94화
행성 이니스프리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구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곳은 거대한 호수 안에 위치하고 있는 여의도 다섯 배 정도 크기의 섬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도 숲과 시냇물, 그리고 야트막한 산이 있었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가든 사람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야생의 자연이 때로는 혹독하게, 때로는 거칠고 메마르게,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너무나도 막막한 울창함으로 행성의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런 이니스프리의 가혹함마저도 사랑했다. 지구에서는 문명을 박탈당하는 상실감을 이겨내야만 겨우 발견할 수 있는 자연의 위대함이, 이니스프리에서는 호수 바깥으로 조금만 나가도 늘 숨 쉬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 곳을 지구인들의 잃어버린 꿈이라고 불렀다.
이니스프리 호수는 갇힌 물이 아니었다. 세 곳의 강으로부터 물이 흘러들어와 호수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두 곳의 물줄기로 갈라져 흘러나갔다.
아침마다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섬 안에 자리잡은 인공의 결과들을 부드럽게 휘감으면, 잠시나마 사방의 모든 것들이 날 선 모서리를 잃어버리고 꿈결 같은 아련함 속으로 젖어들었다. 짧은 환상이 끝나고 이니스프리의 태양이 맑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한 호수 위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면, 호수가 아니라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듯한 인간들의 유일한 안식처도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 밤새 잠들어 있던 번잡한 욕망들도 눈을 비비고 일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최현은 아침 식사를 권하기 위해 진우가 새벽마다 수련을 하는 거실 발코니로 향했다가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그를 차마 깨우지 못하고 30분가량을 서성였다.
‘최상급을 넘어섰군.’
최현 자신은 석 달 전에 간신히 상급의 경지에 도달했다. 진우에게서 수승화강의 수련법을 전해 듣고 마나의 운용법을 처음부터 다시 뜯어 고치는 모험을 시도했었다.
조승운과 진우라는 명확한 결과물이 있는 검증된 방법이었지만, 중급 이상의 경지를 지닌 마나 헌터가 자신의 수련법을 바꾼다는 것은 사실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년 가까이 밤낮으로 두려움과 싸움을 하며 결국 단계 상승이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중급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발전을 거듭하다, 상급의 경지를 목전에 두고 무려 7년 가까이 정체를 경험한 끝에 얻은 기쁨이었다.
그런 그의 눈으로 볼 때에도 진우는 자신이 다음 단계로 기약하고 있는 최상급 이상이었다. 명상할 때마다 몸 주위를 감싸고 도는 마나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늘 느끼는 것이었지만 정말 엄청난 발전 속도였다.
‘그런데도 저 녀석은 그 사이 더 앞으로 나간 것 같아. 본인은 싫어하지만 괴물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녀석이지.’
타르코스 소장이 발견해서 자신의 힘으로 기초를 닦아 준 아이였다. 결혼도 하지 않은 그에게는 사랑하던 여인의 뱃속에서 잃어버린, 얼굴도 모르는 자식같은 느낌을 주던 녀석이었다.
너무나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고 있지만 보면 볼수록 질투보다는 대견함이 느껴졌다. 지금도 명상에 든 모습을 보니 차마 그를 깨우기가 어려워서 차려 놓은 밥상이 다 식도록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10분 정도가 더 지나 진우의 몸 주위를 희미하게 일렁이던 기운들이 몸속으로 수습되자, 비로소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 계속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명상에서 깨어난 진우가 최현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최현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아침 먹자. 배고프겠다.”
식탁 위에는 관리 로봇들이 아니라 최현 자신이 직접 준비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눈치를 보니 진우를 기다리느라 두어 번 새로 데운 것 같았다.
“그래서 헌터 대전 참가는 포기하기로 한 거냐?”
아침을 먹으면서 최현이 진우의 의사를 다시 물었다.
“애초에 꼭 참가하려는 생각도 없었던 거니까 포기는 아니고요. 그냥 수련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면 직접 마수들을 상대로 연습하는 길에 말씀하셨던 와카반이나 보러 갈까 해요.”
“그래. 사실 우승 상금이 오백만 피씨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결국 기업들 호주머니만 채워주는 거지. 헌터들 입장에서는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일 거다.”
진우도 최현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따져 볼 때도 같은 결론이 나왔던 것이다.
호수 인근만을 따지면 이니스프리 행성은 굉장히 안전한 곳이었다.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섬에는 일 년 내내 이곳을 방문하는 헌터들로 인해 언제나 삼사백 명 이상의 자격 있는 헌터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이 전문 헌터 이상이었고, 마나 헌터들의 수만 해도 최소 백 명이 넘었다.
헌터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바람에 호수 인근의 마수들은 씨가 말랐다고 할 정도로 깨끗이 청소가 된 지가 이미 오래였다. 그러나 호수에서 무중력 자동차를 타고 반나절만 나가면 아직도 사냥감이 널려 있었다. 이니스프리가 헌터들의 행성, 또는 용병들의 행성이라고까지 불리는 이유는 그렇게 마수들이 흔하고, 그 종류 또한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헌터 대전이라는 명목으로 평소보다 배나 많은 헌터들이 몰려들었다. 만약 그들이 닥치는 대로 사냥을 하게 되면 단기간에 마수들의 숫자가 크게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다른 곳보다 번식력이 좋은 마수들이라고 해도 다시 예전의 서식 밀도를 회복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헌터 대전이 끝나고 나면 상당한 기간 동안 헌터들은 줄어든 인근의 마수들로 만족하지 못하고 멀리까지 사냥을 나가야 할 것이다. 사냥 기간이 늘어나고, 좀 더 위험한 마수들과 마주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헌터들의 수입 감소로 이어질 게 틀림없었다.
반면에 기업들의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상금을 주더라도, 계약에 의해 단기간에 굉장히 많은 마나 스톤을 챙길 수 있었다. 마나 스톤 하나를 구입하는데 드는 비용이야 늘겠지만, 그 마나스톤을 활용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늘어나므로 전체적인 수입은 오히려 증가할 것이다.
헌터들이 기업의 의뢰를 받아 마수를 사냥하는 분위기를 형성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투자를 늘려 이익을 증대시킨다.
기업 경영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 *
진우가 주로 명상을 통해 수련을 하는 이유는 외부 마나를 조정하는 것에 대해 확실한 감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천구를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지로 놈의 마나를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비록 고도로 정신이 집중된 상태에서 거의 무아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그는 그것이 외부 마나를 동조시키는 단계를 향해 구체적인 걸음을 내디딘 사건임을 알고 있었다. 만약 마수를 상대할 때 그런 능력을 마음먹은 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마수 사냥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동조 단계에 대한 좀 더 명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지금 진우가 수련하고 있는 것은 외부의 마나를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와라.’
진우는 무아지경에 살짝 발을 걸친 상태에서도 의식의 끈을 놓치 않고 주변의 마나에게 명령을 내렸다. 호수 위의 마나가 진우의 부름에 응답하여 그를 향해 슬그머니 모여들었다. 대기 중의 마나가 움직임에 따라 호수 위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돌아.’
약한 회오리가 일면서 호수 물이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눌러.’
진우 앞에 있던 호수가 움푹 파이며 주변의 물들이 사방으로 밀려갔다. 발코니 아래에 있는 물이 기슭에 부딪혀 이른 아침의 차가운 물방울들을 튕겨 올렸다. 그의 얼굴에 만족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젠 마수들을 직접 상대하면서 연습을 해야겠다. 공기 중의 엷은 마나들은 말을 잘 듣네.”
수련을 마친 진우는 옷을 벗고 속옷만 걸친 채로 발코니에서 바로 호수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니스프리 호수에 사는 물고기들을 잡아 점심거리를 마련할 속셈이었다.
섬에 처음 기지가 건설될 때만 해도 호수에는 적지 않은 수의 수중 마수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지가 완성 된 뒤로 꽤 시간이 흐르면서 몰려 든 헌터들에 의해 놈들은 거의 멸종되고 말았다. 마수들이 사라지자 천적의 위협에서 벗어난 물고기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그 물고기로 만든 요리가 이니스프리의 별미 가운데 하나였다.
물속으로 잠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진우는 팔뚝만한 이니스프리 잉어 한 마리가 몇 미터 앞을 유유히 헤엄치는 것을 발견했다. 이름만 잉어지 겉모양은 오히려 작은 상어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그는 오른 손을 앞으로 뻗어 물고기를 향해 손바닥을 펼치고 마음속으로 마나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먼저 놈의 몸속에 있는 마나를 고정시키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켰다.
진우의 의념을 받은 잉어 몸속의 마나가 조금씩 혼란을 일으키다가 차츰 자연스러운 흐름을 잃어버리고 몸속에서 돌멩이처럼 굳기 시작했다. 여유만만하게 헤엄을 치던 녀석이 깜짝 놀란 듯 버둥거렸지만 제자리에서 부르르 떨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허둥대는 것이 보였다.
‘밀어’
진우는 잉어의 마나를 고정시킨 상태를 유지하면서 인근의 물속에 녹아있는 마나를 움직였다. 마나의 움직임에 따라 잉어 주변의 물들이 자연스럽게 물살을 일으키면서 잉어를 진우 쪽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잉어는 물살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몸만 부르르 떨 뿐 무기력하게 진우의 앞까지 밀려오고 말았다. 깜빡이지도 못하는 잉어의 동그란 눈이 놀란 표정을 지은 것처럼 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우는 마나에 대한 통제를 끊으면서 순간적으로 손을 뻗쳐 놈의 몸뚱이를 움켜쥐었다. 외부에서 간섭하던 힘이 사라지자 잉어는 얼른 진우로부터 도망치려고 꼬리를 사납게 푸득거렸지만 최상급 헌터의 손아귀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푸하.”
진우는 잉어를 두 손으로 쥔 채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온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발코니를 넘어 거실로 들어오던 그에게 낯선 인물이 눈에 띄었다.
“누구...,,,세요?”
그가 묻자 중년의 남자 옆에서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서 있던 최현이 진우에게 목욕 타월을 던지면서 간단하게 소개했다.
“험프리 호텔의 상무로 있는 도널드 만하임 씨다. 너한테 볼 일이 있다면서 찾아오셨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진우는 손에 들었던 물고기를 개수대에 그냥 던져 놓고 수건으로 몸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도널드 만하임이라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잉어가 개수대에서 요란하게 몸을 비틀며 펄떡거렸다.
“제가 지금 꼴이 이래서 손님 대접하기가 조금 그런데, 무슨 일 때문이신지 먼저 간단하게 용건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러자 만하임 상무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미리 연락도 드리지 않고 이렇게 불쑥 찾아온 제가 잘못이지요. 이번 헌터 대전 일 때문에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헌터 대전이 이제 사흘 앞으로 다가와서요. 그 전에 말씀을 드렸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실례를 하게 됐습니다.”
눈치를 보니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짧게 얘기하실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 상태로도 들을 수 있겠는데, 긴 얘기라면 먼저 샤워를 할 때까지 조금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방금 호수에서 수영을 하다 왔거든요.”
만하임 상무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기다릴 테니 천천히 일을 보고 나오시지요.”
다소 예의가 아닌 것 같기는 했지만 예고도 없이 찾아온 손님이었다. 최현의 얼굴을 보니 상관없다는 듯이 손을 젓는 것이 보였다. 반갑기만 한 손님은 아닌 것 같았다.
진우가 샤워를 하고 나서 간단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거실로 나오자 만하임 상무는 그 때까지 최현이 내 놓은 찻잔을 앞에 둔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빌라가 아주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군요. 이곳에서도 이만한 빌라는 얻기 힘들었을 텐데 용케 구하셨군요.”
만하임 상무의 말에 최현이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운이 좋았지요. 마침 임대하고 있던 분이 지구로 급히 귀환한다고 해서 제가 계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대로 주변 경치가 나쁘지 않습니다.”
별 내용 없는 인사가 오고가고 있는 동안 진우가 만하임 상무의 앞에 놓인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아까 말씀하신 부탁이라는 게 어떤 건가요?”
그러자 만하임 상무가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저희 험프리 그룹이 이곳 이니스프리 행성에 자리를 잡은 지도 벌써 이십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상급 마수였던 와카반을 물리친 이후로 이곳을 찾는 헌터들이 급격히 늘어날 때에 저희로서는 대대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험프리 호텔이 그때 지어진 것이지요. 저희로서는 이니스프리 행성의 발전에 저희 그룹이 기여한 공로가......”
“저기 그러니까 저에게 부탁하실 말씀이 뭔가요?”
점잖은 어투이기는 했지만, 그 내용이 자화자찬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진우가 중간에 말을 끊고 다시 묻자 만하임 상무는 또 다시 헛기침을 했다. 스스로도 조금 무안했던 모양이었다.
“이번 헌터 대전에 아직 참가신청을 하지 않으셨더군요. 혹시 잊으신 게 아니라면 그 이유를 들을 겸, 다시 한 번 참가를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진우가 대답을 못하고 최현을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게 뭔가요?’ 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최현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반가운 손님이 아닌 것 같다는 짐작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크리스마스가 코앞이네요. 모두들 산타가 찾아오는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