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포털을 통과하자 진우는 연습했던 대로 제일 앞으로 나섰다. 곤 클랜에는 따로 추적에 특화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보통은 마나 감지력이 나름 뛰어나고 경험도 많은 최진석이 선두에 서고는 했었다.
그런데 지구에서의 연습 과정에서 진우가 추적자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나섰다. 경험 많은 추적자들에 비해 마수의 흔적을 판별하는 능력은 부족할지 몰라도, 진우로서는 범위가 넓고 예민한 자신의 마나 탐지 능력을 활용해 마수의 위치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상곤은 진우의 요청을 듣고 그를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훈련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야산에 아주 작은 마나 스톤을 몇 군데 숨겨놓고 진우로 하여금 그것을 찾게 했는데, 진우는 놀라운 속도와 정확성으로 그것들을 어렵지 않게 모두 찾아내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본 클랜원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진우가 정찰에서 선두에 서는 것에 만장일치로 찬성했었다.
“전방 1Km 부근에 최하급 마수로 보이는 녀석들이 두 마리 있습니다.”
진우의 말에 김상곤이 뒤로 손짓을 해서 임지근을 불렀다. 그는 곤 클랜의 사수형 중급 헌터였다. 임지근이 활을 꺼내들자 김상곤의 의도를 알아챈 진우도 총을 꺼내 소음기를 달고 탄창을 꼈다. 관통형 마나를 실은 실탄이 담긴 탄창이었다.
일행이 600m 가량 전진했을 때 진우가 주먹을 쥔 오른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손가락 두 개를 펴들고 전방을 가리켰다. 목표와의 거리가 200m 남았다는 뜻이었다. 처음 감지했을 때의 거리가 1Km였는데 벌써 그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것은 마수들도 이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일행이 모두 정지했다. 진우와 임지근은 각각 총과 활을 든 채 목표가 확실히 눈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사과나무 사이로 시커먼 집게를 위로 치켜 세운 동티 두 마리가 나타났다. 임지근이 진우를 향해 왼쪽을 가리킨 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오른쪽 동티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진우도 킬러 제이를 들어 왼쪽을 겨냥했다.
퉁
임지근이 활시위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진우도 왼쪽의 동티를 향해 총을 발사했다.
켁, 켁.
거의 동시에 두 마디의 짧은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동티들이 풀썩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접근.”
김상곤의 짧은 명령과 함께 일행들이 신속하게 쓰러진 동티를 향해 다가갔다. 두 마리의 동티는 모두 집게 중간의 머리 한 가운데를 맞아 숨이 끊어져 있었다. 임지근의 화살은 거의 화살 끝까지 깊숙하게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관통에 회전까지 건 것으로 보였다. 확실히 이름 있는 클랜의 전문 궁수다운 솜씨였다.
“기지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인데도 벌써 마수들이 돌아다니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기지를 노린 침공이라기보다는 거의 대이동에 가까운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부클랜장인 최진석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상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동티를 살피기 위해 굽혔던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일단 오늘 내로 최대한 기지 근처까지 접근한 뒤, 거기서 비트를 파서 몸을 숨기고 쉰다.”
그 말이 떨어지자 진우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임지근은 뒤로 이동하고 일행들이 처음과 같은 포진으로 진우의 뒤에 섰다.
“출발.”
마나 감지의 범위를 최대로 펼친 진우가 소리 없이 앞을 향해 나가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 띄워 놓은 비행 드론도 일행의 모습을 촬영하면서 뒤따르고 있었다.
* * * * *
기지가 5Km 가량 남았을 때 해가 지기 시작했다. 일행은 일단 그곳에서 각자 적당한 거리를 두고 흩어져 땅을 파서 개인용 비트를 만들고 몸을 숨기기로 했다. 여기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벌써 동티 열다섯 마리와 가사리 네 마리를 더 사냥했다.
처음 가사리를 사냥할 때에는 자칫 놈이 발광해서 주변에 소리가 퍼질 것을 두려워 해 최대한 접근한 뒤 임지근과 진우가 동시에 활과 총을 쏘았다. 놈은 총을 맞고 화살을 꽂은 채로도 일행의 앞까지 거칠게 달려들었지만, 결국 신체형 중상급 마나 헌터인 부클랜장 최진석의 주먹을 정통으로 얻어맞고 두개골이 부서지면서 숨을 거두었다.
생각보다 큰 소리가 나는 바람에 일행을 잠깐 긴장시킨 일격이었다.
너클을 낀 최진석의 주먹을 맞고 죽기는 했지만, 가사리 역시 하급 마수임에도 맷집이 정말 좋은 놈이었다. 그 뒤로는 가사리가 돌진을 시작하기 전에 진우가 미리 총을 두세 방 더 쏘아서 녀석들의 접근을 아예 막아버렸다.
한 마리를 잡는데 너무 큰 소란이 나면 주변의 마수들을 불러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긴장을 풀기 어려운 사냥과 전진이 계속되었다.
일행이 마지막으로 가사리를 쓰러뜨렸을 때 검을 쓰는 중급 헌터인 원혜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마수들의 밀집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요. 확실히 이들을 끌어들이는 요인이 부근에 있는 게 틀림없어요.”
그녀는 박화정을 제외하면 곤 클랜의 유일한 여자 대원이었다. 김상곤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과 40Km를 전진하는 동안 최하급 마수 16마리와 하급 마수 5마리를 만났다. 거의 2Km마다 한 마리씩 마수를 만난 셈이었다.
이건 자연적인 마수들의 분포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맹수도 아닌 마수들이 이렇게 조밀하게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부근에는 이들의 먹이가 될 수 있는 특별한 짐승들이 없었다.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분포였다.
“이놈들의 분포로 보아 우리는 지금 마수들의 서식지 한 가운데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다. 최대한 기척을 숨기면서 천천히 이동한다.”
김상곤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때부터 일행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때문에 기지를 불과 5Km 남겨 두고 비트를 파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머리 위에 띄워 놓은 드론의 비행 높이도 최대한으로 상승시켰다. 너무 낮게 날다 마수들의 눈에 띄면 녀석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비트를 파고 이레지움으로 만든 그물로 입구를 막았다. 몸 안에 있는 마나의 기운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마수들이 대원들의 기운을 느끼는 것을 상당히 방해할 수 있었다.
연습 기간 동안 곤 클랜원들로부터 배운 방법이었다. 비트를 잇는 연결선을 흔들어 땅속에 누운 채로 번갈아 불침번을 섰다.
몸 하나 딱 누일 정도의 비트 안에서 자다 깨다 하면서 밤을 새운 일행은 다음날 아침 해가 비추자마자 바로 비트에서 나왔다. 건조시킨 비상식량과 물 만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운 이들은 다시 기지를 향해 더욱 조심스러운 자세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 * * * *
“두억시니입니다. 세 마리나 보이는데요.”
기지가 어느 정도 육안으로도 식별되는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망원경으로 기지 부근을 살펴 본 최진석이 가라앉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일행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나씩 유인해서 해치울까요?”
중급 창술사인 손주원의 질문에 김상곤이 고개를 흔들었다.
“우리의 임무는 마수의 제거가 아니라 상황파악이다. 필요하면 싸워야 하겠지만 일단은 정확한 상황파악이 먼저다. 섣불리 놈들을 자극하지 마라.”
그때 최진석이 김상곤에게 들고 있던 망원경을 건넸다.
“대장님, 이거 좀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망원경을 눈에 댄 김상곤은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저건...?”
다른 대원들도 서둘러 각자의 망원경을 꺼내 기지를 관찰했다.
“헉... 저건?”
원혜수가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망원경 너머에 두억시니가 같은 마수인 가시리를 잡아먹고 있는 광경이 보인 것이다.
“마수들은 서로 싸우기는 해도 웬만해서는 다른 마수를 잡아먹지는 않는데, 확실히 주변에 이들의 먹이가 될 만한 것들이 없는가 보네요.”
진우의 말에 부클랜장인 최진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결국 먹이사슬에 따른 이동이 아니라는 말이지. 그리고 같은 마수를 잡아먹으면서까지 저 자리를 지키고 있도록 만드는 강력한 유인 요인이 기지나 그 근처에 있다는 얘기고.”
“결국 원인을 확실히 파악하려면 기지로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진우의 말에 일행의 얼굴이 모두 무거워졌다. 정찰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가 갑작스러운 마수 침공의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다.
상황에 따른다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간단히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클랜원들 모두 그 점을 밝혀내지 못하면 설사 이들을 토벌한다고 하더라도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는 위험이 여전히 남아있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당분간 기지 주변의 반경 10Km 인근을 돌면서 마수들의 분포를 조금 더 확실히 파악한다. 일단은 기지 주변의 상황파악이 첫 번째 임무니까. 기지 진입 여부는 그 뒤에 결정한다.”
김상곤의 명령이 떨어졌다. 진우가 다시 일행의 앞으로 나섰다. 지루하고 위험한 정찰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틀간 피말리는 정찰이 계속되었다. 당당하게 텐트를 치고 잘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밤마다 땅속에 비트를 파고 들어가 쪽잠을 자야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불을 피워 음식을 익혀먹지도 못했다. 물도 아껴 먹어야 했다.
다들 중급 헌터 이상이었기 때문에 육체적인 피로는 감당할 수 있다고는 하더라도, 정신적인 피로가 장난이 아니었다.
“마수들의 빈자리를 다른 마수들이 채우고 들어오는 것 같아요. 활발하지는 않더라도 외곽의 마수들이 약간씩이나마 끊임없이 중심부를 향해서 이동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틀 동안 기지 부근을 완전히 한 바퀴 돌며 정찰을 했다. 그런데 이틀 전 동티 세 마리를 처치한 장소 부근에 새로운 동티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놈의 발자국은 기지를 중심으로 더 먼 외곽으로부터 안쪽을 향해 나 있었다.
그것을 본 원혜수가 낮은 목소리로 김상곤에게 그렇게 말을 했다. 김상곤의 이마에 깊은 고랑이 패였다.
“기지에 아직 운행이 가능한 무중력 자동차가 남아 있을까요?”
그때 느닷없이 진우가 일행들에게 질문을 했다. 클랜원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중력 자동차를 이용하자는 말이냐?”
손주원이 그렇게 묻자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수들은 먹이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갖지는 않잖아요. 처음에 기지를 침공했을 때에는 흉성이 발동해서 닥치는 대로 주변을 파괴했을지는 모르지만, 가만히 서 있는 무중력 자동차를 모두 파괴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걸 얻을 수만 있다면 확인하고 싶은 곳이 있어요.”
“어딜?”
임지근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진우는 품속에서 장수덕 박사가 주었던 지도를 꺼냈다.
“전에 말씀드렸을 거예요. 기지 북서쪽으로 250Km 정도 가면 호수가 하나 있어요. 처음 마수들이 대거 이동해 온 지역과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호수예요. 예전에 이곳을 탐사했던 장수덕 박사님 말에 따르면 이곳 호수물의 마나 함유량이 비정상적으로 높다고 하더라고요. 지진으로 인해 지층의 일부에 틈이 생기면서 이곳으로 유입되던 지하수의 일부가 기지쪽을 향한 게 아닌가 싶어서요. 여기서 호수까지는 너무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지하수맥이 기지와 호수의 중간 쯤에 있다가 이번 지진으로 틀어졌을 수도 있거든요. 만약 그렇다면 지하수 유입량이 줄었을 테니까 호수물이 분명 줄어들어 있을 거예요.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요.”
진우의 말을 들은 일행이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평소라면 별 일이 아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큰 모험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지근아.”
김상곤이 임지근을 불렀다.
“비행 드론을 조종해서 자동차들이 있었던 주차장 부근을 확인해 봐라. 일단 그곳 상태를 좀 보자.”
임지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헌터 패드를 조작해서 비행드론을 움직였다. 화면에 조금 무너진 자국은 있어도 여전히 제대로 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주차장의 모습이 나타났다.
“주차장 상태로 봐서는 몇 대는 쓸 만한 게 남아 있을 수도 있겠는데요?”
원혜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가 앞장을 서라. 이곳에서부터 주차장 쪽으로 비스듬히 돌아 들어가며 접근한다. 진우는 두억시니나 천구가 눈에 띄지 않는지 특히 주의하며 전방을 살펴라. 뒤에 오는 지근이도 수시로 망원경을 통해 확인하고.”
진우를 비롯한 클랜원들이 이번에는 확실하게 기지쪽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일행은 주변에 마수가 감지되더라도 사냥을 하지 않고 정지한 상태로 놈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혹시나 두억시니나 천구가 기척을 느끼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전진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 작품 후기 ============================
국립국어원에서 새로운 표준어를 추가했네요. 모두 13개의 낱말이 새로이 표준어로 인정받았습니다. 그중에 '꼬시다'와 '개기다'도 있군요. 진우는 그동안 소현이를 꼬신 적은 있지만 누구한테 개기지는 않았는데요.... 흠.. 좀 개겨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