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프랑스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진우는 모처럼 마음껏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육체적인 피로야 하루 자고 일어나서 명상을 하고 났더니 금방 풀렸지만 그동안 쌓였던 정신적인 피로가 제법 많이 누적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일주일가량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푹 쉬었더니 심신이 모두 거뜬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따금 남쪽 바닷가에 가서 한 번씩 잠수를 해서 수영을 하는 것도 긴장감을 해소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나저나 얘를 어떻게 가지고 다녀야 하나?”
진우는 양반자세로 앉아 무릎 위에 머플러처럼 늘어져 있는 금색의 마나 크리스털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지금은 일단 유성추 안의 이레지움 케이스 속에 넣어 두었지만, 그건 그냥 보관하는 것뿐이지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지구로 귀환하면 그 문제에 대해 연구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얻은 녀석은 아무래도 마나의 운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본성으로 지닌 듯했다. 품고 있는 마나의 양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나를 갈무리해서 단단히 저장하는 것보다는 주변을 흐르는 마나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간섭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 간섭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지.”
진우는 윌러킹을 사냥하고 나서 금색 마나 크리스털을 팔목에 붙인 채 사투에 가까운 명상을 했었다. 명상을 끝냈을 때 그는 일 년 내내 북쪽 지대를 휩쓸고 다니던 모래폭풍이 씻은 듯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이 금색 마나 크리스털이 그동안 북쪽 지대의 마나 흐름에 끼어들어 엄청난 폭풍을 만드는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의미했다. 놈이 주변의 마나와 교감하고 그것을 조정하는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괴물같은 능력이었다.
금색 마나 크리스털이 죽은 윌러킹의 사체 밑에서 기어 나왔다는 것은 본래는 살아있는 윌러킹의 배 밑바닥에 붙어 있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폭풍이 윌러킹의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던 것이다. 윌러킹이 이동할 때마다 주변의 마나를 끌어들였을 테고, 갈수록 조정하는 마나의 양이 점점 많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반경이 100Km에 이르는 거대한 폭풍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마나가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좋아하는 것도 분명하고.”
놈은 윌러킹이 죽자 거기서 기어나와 진우에게로 달려들었다. 진우의 몸속에 만만치 않은 양의 마나가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진우의 왼팔에 들러붙자마자 바로 탐욕스럽게 진우의 마나를 자기 멋대로 움직이려고 하였다.
그 때문에 진우는 정작 윌러킹과의 싸움을 무사히 끝내고서도 예상치 못하게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아마도 윌러킹은 금색 마나크리스털의 도움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이놈에게 휘둘렸을 가능성이 컸다. 윌러킹이 계속 움직였던 것은 끊임없이 더 많은 마나를 원하는 이 녀석의 뜻을 들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본능적으로 자신이 위험할 수도 있음을 느꼈겠지.”
녀석은 진우에게 둘러붙은 뒤에도 윌러킹에게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려고 시도했다. 진우가 윌러킹의 몸에 손을 가져다 대었을 때 느껴졌던 사나운 마나의 움직임은 아마도 이 녀석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다만 진우는 윌러킹처럼 녀석에게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명상을 통해 고비를 넘겼다.
놈으로 하여금 진우의 몸 속에 있는 기존의 마나 흐름에 참여해 오히려 그것을 도와주게 하는데 성공했다. 그로 인해 금색 마나 크리스털은 진우의 정신과 의지에 어느 정도 순응하게 됐다. 하지만 놈이 앞으로도 순순히 말을 따를지는 확실하지가 않다는 게 문제였다.
“마나의 흐름을 증폭시키는 능력을 잘만 활용하면 앞으로의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거 같은데 말이야.”
그걸 한 번 제대로 수련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수련을 장시간 하기에는 곤란했다. 일단 마나 크리스털을 오래 밖에 내 놓아둘 수가 없었다.
기지 주변에는 위험한 맹수나 마수가 없었지만, 이렇게 강력한 마나 크리스털을 너무 오랫동안 노출시켜 두었다가는 잘못하면 멀리 떨어진 곳에 살던 마수들을 불러들일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명상을 할 때를 포함하더라도 하루에 한 두 시간 이상을 꺼내 놓기에는 걸리는 게 많았다.
“본격적인 교감 수련은 역시 지구에 돌아가서 해야겠지.”
이곳에서는 지구에는 없는 풍부한 마나를 이용해서 더 늘어난 체내 마나량을 안정시키고 몸과 마음을 새롭게 정비하는 정도로 충분했다. 진우는 되도록 복잡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마음껏 여유를 누렸다.
* * * * *
진우가 휴가를 겸한 휴식을 취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기지장이 프랑스 외계 생물 연구소로부터 소식을 가지고 왔다.
“지난번에 지구와 정기적인 물품 교환 때 진우 자네가 가져왔던 윌러킹 기름의 샘플을 함께 보냈네. 그걸 바탕으로 가격을 산정해달라고 했지. 그 샘플을 세 군데에 보냈고, 그 중에 한 곳은 한국의 외문연 연구소네. 세 곳에서 각자 검사한 바에 따르면 기존의 윌러몬 기름에 비해 한 배 반 정도의 유효성분이 농축되어 있다는 결과가 공통적으로 나왔네. 그걸 바탕으로 기름의 양을 다시 측정해 보았는데, 대략 18 명에게 십년 간 꾸준히 복용시킬 수 있는 정도의 양이 담겨 있는 걸로 확인이 되었네. 저쪽의 제안을 말해도 되겠나?”
기지장이 세 곳의 연구소에서 샘플을 검사한 결과를 보낸 기록지를 내보이며 물었다.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에게 십년 간 복용시킬 수 있는 윌러몬의 기름을 얻으려면 자네도 알다시피 중급 헌터 세 명에게 의뢰를 해야 하지. 아만다 부녀의 경우 급한 마음에 한 사람당 오십만 피씨의 의뢰비를 제안했지만, 연구소에서는 일인 당 의뢰비로 삼십에서 사십만 피씨가 적당하다고 보고 있네. 다만 내가 자네의 솜씨가 중급 중에서는 상위에 속한다고 미리 언질을 주었네. 그래서 최종 제안은 1인분에 120만 피씨, 18인분 총액 2160만 피씨로 결정되었네. 거기에 자네가 지구로 이동할 때의 포털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이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지구로 이동할 때의 포털 비용은 본래 기지에서 내기로 했었다. 다만 그럴 경우 그 비용은 다시 세드릭이 갚아야 하는 돈이 된다. 진우는 세드릭에게 굳이 더 이상의 호의를 베풀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저쪽에서 내겠다는 걸 억지로 세드릭에게 떠넘길 이유도 없었다.
짐작에 포털 비용에 관한 조항은 아마 기지장이 세드릭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진우는 그런 사실을 모르는 척 받아들이기로 했다.
행성 간에 포털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지는 거래는 복잡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전초 기지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대개 사나흘이나 일주일에 한 번씩 포털을 통해 정기 물품 이동이 있다.
심한 곳은 한 달에 한 번밖에 물품이 이동하지 않는다. 거래를 위한 의견 조정이 필요할 경우 이 정기 물품 이동 기회를 이용해 양쪽의 의사를 담은 크리스털 메모리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의사 타진을 하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어느 쪽이든 한 번에 자신의 최종 제안을 해야 했다. 간을 본다거나 흥정을 통해 가격을 조정하려는 짓을 하려다가는 거래가 그것으로 끝장나기 마련이었다.
연락을 주고받는 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대금은 어떻게 지불이 됩니까?”
그러자 기지장이 진우에게 몇 장의 서류와 함께 피씨 카드를 한 장 건넸다.
“정확히 2160만 피씨네. 처리를 마친 것이니 자네가 수령하고 그 서류에 사인을 하면 거래가 완료되네.”
생각보다 프랑스에서의 기지장에 대한 신용이 높은 것 같았다. 신속한 거래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한화로 치면 200억이 훨씬 넘는 돈을 선뜻 맡긴 것을 보면 기지장이 본국에서 가지고 있는 신분이 생각보다 대단한 것 같았다.
진우가 서류에 사인을 하고 피씨 카드의 돈을 자신의 헌터 카드로 이체시키자 모든 거래가 완료되었다. 기지장은 서류를 챙기고 일어서면서 진우를 향해 물었다.
“그럼 이만 쉬도록 하게. 지구에는 언제쯤 돌아갈 건가?”
“내일 바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충분히 쉬었거든요.”
기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저녁 무렵쯤 세드릭이 진우의 방을 찾아왔다.
“지누. 기지장님에게 포털 비용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 고마워. 나도 이번에 여기 일을 정리하면 그만 지구로 돌아가려고 해. 이런 일을 벌여 놓고도 여기서 계속 근무하기도 여러 사람에게 미안하고, 그만 돌아가서 여자 친구 곁에서 아이를 함께 키우려고.”
전초 기지에서 근무하는 관리인들의 급여는 지구에서 웬만한 직장을 다니는 것보다 훨씬 높았다. 세드릭이 헌터 학교 졸업생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끈질기게 노력했어도 빈자리를 따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자리를 그만두겠다는 것은 단순히 여자 친구와 자식을 보고 싶다는 소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다못해 세드릭이 한두 해만 더 근무해도 제법 돈을 모아 돌아갈 수 있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의 선택이었다. 뭐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세드릭이 두 손으로 진우의 손을 왈칵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돌아갔다.
진우는 세드릭이 떠난 방을 둘러보다가 베란다로 나가 눈앞에 펼쳐진 무니악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진우도 무니악을 떠날 시간이 되었다.
* * * * *
케이튼에서의 겨울 훈련이 끝나고 다시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소현은 케이튼에서 돌아왔을 때 은근히 진우가 지구로 귀환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새로 시작될 때까지 진우는 크리스털 메모리로 소식을 보내왔을 뿐,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을 기다린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절실하게 느낀 시간이었다.
소현은 주말을 맞아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온 장수덕 박사를 만나기 위해 대전 시내로 향하고 있었다.
“보고 싶네. 진우가 이제 올 때도 됐는데.”
진우는 헌터다. 그리고 헌터는 지구에 있는 시간보다 외계 행성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길 때가 많다. 헌터를 사귀려면 기다림에 익숙해져야 한다.
자신도 헌터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봄바람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너무나 쌀쌀한 기운이 아스팔트 위로 긴 먼지 띠를 휘몰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걷고 있자니, 지금 가는 이 길이 아버지가 아니라 진우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못된 딸 다 됐네, 나도.”
나이답지 않게 궁상을 떨고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그때 그렇잖아도 차가운 바람을 거세게 밀어붙이며 소현의 옆에 무중력 자동차 하나가 갑자기 정지했다.
“탈래?”
처음 보는 남자였다.
“누구...?”
제법 훤칠한 키에 얼굴에는 좋은 집에서 좋은 밥 먹고 자란 티가 물씬 나는 사내 하나가 창문을 내리고 한 팔을 척 걸쳐 놓은 채 소현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그냥 지나가다 보니까 추워보여서.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겠지만 태워 줄게.”
하... 보고 싶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고 이건 또 웬.
“됐어요. 괜찮아요.”
소현이 대낮의 불청객을 무시하고 그냥 앞을 보고 걸어가는데 녀석이 차를 슬쩍 앞으로 빼더니 다시 소현의 옆에 세웠다.
“헌터 학교 학생이지? 나 헌터 학교 3학년이야. 넌 몇 학년?”
소현이 자신의 블라우스 윗도리에 달려 있는 학교 뱃지를 힐끗 보았다. 헌터 학교 학생들은 전투 과목 훈련을 할 때에는 반드시 훈련복을 입어야 했지만, 그 외에는 너무 지나치지 않은 범위 내에서는 일상복을 입고 생활해야 했다. 대신 옷 위에 뱃지를 달고 다녀야 했다.
‘뱃지를 빼 놓고 온다는 걸 깜빡 잊었네.’
소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오늘 아침 외출할 때에 뱃지를 빼 놓고 온다고 하다가 그만 깜빡하고 말았다. 그런데 바람에 펄럭인 외투자락 안으로 블라우스에 달린 뱃지가 상대의 눈에 뜨였던 모양이었다.
‘눈 좋네. 헌터 학교 학생이라는 건가.’
소현은 대답을 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냥 가라. 귀찮다. 그런데 녀석이 또 다시 차를 앞으로 빼며 소현을 불렀다.
“야, 너 2학년이지? 뱃지 색깔 보니까 그런 거 같은데? 선배가 후배한테 호의를 보이는데 너무 버릇없이 그러는 거 아냐? 사람이 호의를 베푸는데 그렇게 무시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하아...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헌터 학교 3학년이면 이제 겨우 18세가 되었다는 뜻이다.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면허를 따고 차를 샀다는 얘기다. 차는 꽤 비싼 티가 나 보였다.
부모가 사 줬을 거다. 그래봤자 전부터 무면허 운전을 일삼던 놈이 아니라면 기껏해야 초보 딱지를 뗄까 말까 했을 시점이다.
그런 주제에 벌써부터 차를 몰고 나와 처음 보는 여자한테 ‘탈래?’를 외치고 다니는 녀석이라면 뻔한 놈이다. 게다가 말도 섞기 싫어 그냥 가는데도 자꾸 따라오면서 말을 건다.
“그 차 탈 거 아니니까 그냥 가세요.”
차갑게 대꾸하고 휭하니 지나치려는데 녀석이 아예 차에서 내리더니 쪼르륵 뛰어와서 앞을 가로막았다. 얼굴이 조금 붉어진 모양새가 자기 딴에는 화가 난 모양이다.
“야, 선배가 추워 보이는 학교 후배 태워주겠다는 건데 왜 그렇게 딱딱하게 그래? 멀리 가는 것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타.”
보아하니 건달이나 양아치는 아니다. 그렇다고 싸가지가 제대로 박힌 놈도 아닌 게 분명했다. 여자가 대꾸를 안 하면 싫다는 뜻이다.
말도 섞기 싫으니 그냥 가라는 뜻이다. 그걸 자기 기분 나쁘다고 쫓아오면 뭘 어쩌겠다는 건가? 멱살이라도 잡을래? 모르는 여자한테 수작을 걸 뻔뻔함은 있어도, 그런 주제에 거절당하는 걸 참을 만큼 뱃속이 넓지도 않다.
이런 자식은 진짜 골치 아프다.
“저 아세요?”
소현이 눈을 똑바로 뜨고 묻자 녀석이 얼굴이 잠시 멍청해졌다. 표정만큼 멍청한 놈이다.
“제가 후배인 거는 맞는데 나이는 같을 거예요. 반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 남자 친구 만나러 가는 거예요. 괜한 오해 사기 싫으니 그냥 가세요. 아무한테나 반말하는 것도 실례고, 아무 한테나 호의 베푸는 것도 예의가 아니에요. 그리고 명색이 헌터 학교 학생이 이만한 날씨에 추위를 탈 리가 없잖아요. 저 바쁘니까 더 이상 시간 뺏지 말고 그냥 가세요.”
소현은 평소에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에 이렇게 길게 대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없었다. 소현도 안다. 그런데 오늘은 은근히 짜증이 많이 난 상태였다.
하필 그런 때에 이상한 녀석이 이상한 수작을 부리니 신경질이 왈칵 치밀었다. 꾹꾹 참으면서 나름 좋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이런 놈 때문에 길거리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소현이 입을 꼭 다물고 앞을 막아선 녀석을 돌아서 지나치려는데 가슴 앞에 팔 하나가 떡 하고 가로막았다. 하마터면 가슴이 팔에 닿을 뻔 했다.
순간적으로 살의가 확 치밀었다.
“그래서 뭐? 네 나이가 많다는 거냐? 네가 아줌마라도 된다는 거야? 남자 친구 만나러 간다고? 내가 너하고 지금 사귀자는 거냐? 나 참, 오랜만에 차 끌고 나와서 후배 하나 태워주려다가 별 봉변을 다 당하네? 얼굴 좀 예쁘게 생겼다고 아무나 막 오냐오냐 해 줬나보지? 나이 같으면 선배가 동기 되냐? 이게 어디서 선배한테 그냥 확.”
상대가 자신을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드는 것을 보는 순간 소현의 머리 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개싸가지 자식이 정말. 소현이 뺨이라도 때릴 생각으로 상대를 노려보는데, 누군가가 소현의 어깨 뒤에서부터 손을 내밀어 남자의 팔을 꽉 잡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니 거기에 강진우가 서 있었다. 소현은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반가움과 서러움에 자기도 모르게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진우야...”
“너 이름이 뭐냐?”
소현이 진우의 이름을 부르는데 정작 진우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상대의 손목을 쥔 채 녀석의 얼굴을 노려보며 이름을 물었다.
“넌 또 뭐야? 니가 얘 남자 친구냐?”
손목을 죄는 힘에 팔이 부러지는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녀석이 자기 딴에는 기가 죽지 않겠다는 듯 소리를 쳤다. 진우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남자 친구 맞아. 내 여자 친구한테 길거리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는 넌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표정은 웃고 있는데 눈빛에서 쏘아져 나오는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녀석이 움찔하는 게 소현의 눈에도 보였다.
“이, 이석진이다. 그러는 넌 누구냐?”
녀석은 자기도 모르게 이름을 얘기하고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아무리 손목을 잡힌 팔이 아프다고는 하지만, 상대가 묻는다고 곧이곧대로 이름을 얘기하고 나니 왠지 자신이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석진? 나 강진우다. 헌터 학교 졸업생이자 여기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 남자 친구지. 본인이 싫다고 하는데 자꾸 이렇게 들러붙는 건 예의가 아니지. 볼일 끝났으면 빨리 가라.”
그 말을 하고 진우가 이석진의 손목을 밀치며 놓아주었다. 말투는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쏘아보는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다. 이석진은 순간적으로 여기서 더 시비를 붙었다가는 꼴이 더 좋지 않게 될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강진우? 무투 대회 우승자 강진우?”
녀석의 경악한 듯한 얼굴을 쳐다보며 진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석진의 눈에 시선을 똑바로 고정시킨 채였다.
이석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얼굴이 낯이 익다. 헌터 학교 학생이라면, 그것도 지금 3학년이라면, 강진우라는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제작년 겨울에 헌터 학교 대항 무투 대회에 나가서 개인전을 두 종목이나 우승한 녀석이었다. 이석진은 나중에 방송을 통해 방영된 화면을 보고 강진우가 자신과 같은 1학년이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녀석이 일본 대표의 칼을 자신의 검으로 베어버리는 순간, 해설자는 그게 바로 강진우가 마나를 발현할 수 있는 단계에 올라섰다는 뜻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쳤다. 자신과는, 아니 다른 모든 1학년과 견주어도 도저히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녀석이었다.
여기서 물러나야 한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더 버티면 아마도 더욱 심하게 자존심이 상할 일을 당할 것 같았다. 예쁘장한 후배 여학생 하나 어떻게 해 볼까 하다가 잘못하면 벼락을 맞을 수도 있었다.
이석진은 입술을 깨물더니 휙 돌아서서 자신의 차로 향했다. 잠시 후 녀석의 무중력 자동차가 공중에 떠서 방향을 돌리더니 사라졌다.
‘이석진?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도훈이한테 들었었나?’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이름이었다.
‘나중에 도훈이 만나면 한 번 물어봐야겠군.’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석진을 쫒아버린 진우는 소현을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물을 글썽이던 소현이가 어느새 눈물을 닦았는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진우야.”
소현이 달려와 품에 안겼다. 진우는 가볍게 그녀를 껴안았다. 그것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게 그동안의 피로가 다 풀리는 것 같았다. 남자의 고향은 여자라더니,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소현이를 품에 안자 정말로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제 왔니? 왔으면 먼저 연락을 좀 하지.”
반가움과 투정이 섞인 말이었다. 진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소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 전에 왔어. 오자마자 총기를 헌터 협회에 예치하고 이것저것 서류 정리하느라고 지금에서야 학교 앞으로 오던 길이야. 그렇잖아도 너 만나러 차 타고 가다가 중간에 네가 지나가는 거 보고 내려서 막 쫓아 온 거야.”
소현의 눈이 반달처럼 곱게 휘어졌다. 방금 전의 녀석 때문에 꼭지까지 치솟았던 화가 어느새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다. 진우의 얼굴을 보니 그저 마냥 좋기만 했다.
“나 지금 아빠 만나러 가던 길이었는데 같이 가자. 아빠도 너 온 걸 알면 굉장히 기뻐하실 거야.”
소현이 진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을 텐데 당장은 참는 눈치였다.
소현의 그런 점 때문에 진우는 그녀를 만나는 게 좋으면서도 편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손이 이끄는 대로 소현을 따라갔다.
진우가 자신의 옆에 서자 소현이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아무래도 차를 한 대 사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