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차를 몰고 기지로 돌아가면서 진우는 이번 일에 대해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조승운은 늘 진우에게 헌터는 대가를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는 얘기를 강조했다.
허진행의 일에 대해서도 헌터는 먼저 이빨을 드러낸 짐승을 가만두지 않는다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었다. 이번 일은 자신이 받은 첫 의뢰였다.
자신은 과연 헌터답게 일을 처리했던 것일까?
아만다 부녀나 세드릭의 사정을 들어준 것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외면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거니와 자신으로서는 크게 위험하거나 어려웠던 일도 아니었다. 대가도 받았다.
하지만 세드릭의 경우에는 부탁을 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아무리 헌터가 대가를 받고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해도 헌터 역시 사람이었다.
자식을 위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고 진정을 담아 호소했다면 어렵지만 들어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고, 윌러몬 한 마리쯤 윌러킹을 상대하기 전에 연습 삼아 사냥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세드릭은 끝내 자신에게 솔직하게 부탁하지 않았다.
진우의 진짜 실력을 몰라서 그랬다고는 하더라도 정말 간절한 일이라면 처음부터 속마음을 털어 놓았어야 했다. 공연히 사정을 숨기는 바람에 하마터면 쓸 데 없는 피가 흐를 뻔하지 않았던가.
‘그 녀석이나 나나 헌터는 대가를 받고 움직인다는 생각에 너무 얽매인 것은 아닐까?’
맥커힐과 월터의 경우는 더욱 문제였다. 그들이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진우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래서 폴라투샹을 상대할 때에는 일부러 자신이 가진 힘을 슬쩍 드러내기도 했다.
그게 더 편하게 사냥을 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로 하여금 함부로 딴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자신을 힘으로 제압해서 협박을 할 생각도 했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그들의 계획에 분노하기보다는 그 어리석음에 실소를 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윌러몬 사냥 도중 몸을 빼버리기라도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생각까지 했단 말인가? 협박을 받은 헌터가, 그것도 중급 헌터가 끝까지 적극적으로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무모한 생각이었다. 헌터 카드는 나중에라도 찾을 가능성이 있지만, 목숨은 한 번 잃으면 끝이다.
설사 진우가 힘이 약해 협박에 잠시 굴복했다고 하더라도 사냥이 끝난 다음에 도대체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끝까지 그들에게 협조하고 있을 것인가?
심성이 악한 사람보다는 때로는 어리석은 사람이 남에게 더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다. 세드릭과 두 헌터는 아주 선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악인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이번 일에 관해서 그들은 어리석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진우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진심을 믿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남의 판단까지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
허진행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며 남의 목숨까지 아랑곳하지 않은 놈들은 진우도 동정 없이 처단할 수 있었다. 허진행은 어리석다기보다는 나쁜 놈이었다.
반면에 세드릭이나 두 헌터는 결과적으로 나쁜 짓을 한 꼴이 되었지만 그 발단은 어리석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발생했던 일들은 진우가 조금만 더 명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태도를 분명히 했다면 미리 예방할 수도 있었다. 그러지 못하는 바람에 자신은 물론 그들도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할 뻔 했다.
“헌터가 자신의 안전에 관한 일조차 확실하게 챙기지 못했다는 건 확실히 문제가 있군.”
자신은 최상급 헌터다. 무력으로는 웬만한 헌터들이 당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샌가 그 사실을 너무 믿고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조승운 스승이라면 아마 진우가 세드릭이나 두 헌터를 도와준 일을 가지고 나무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일을 처리한 방법에 대해 알게 된다면 분명 걱정과 꾸중을 함께 할 것 같았다.
진우는 자신이 제대로 된 헌터가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
진우가 기지로 돌아왔을 때에 아만다 부부와 두 명의 중급 헌터는 이미 지구로 귀환한 뒤였다. 데스크를 지키고 있던 세드릭이 거의 버선발로 뛰어나오다시피 진우를 맞이했다.
그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진우의 장비가 실린 가방을 대신 들어 기지 안까지 날라다 주었다. 진우는 그의 지나친 저자세에 대해 일단은 아무 말 없이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늘 하던 대로 빨래 거리를 내 놓고 샤워를 한 뒤 쉬고 있는데 도어벨 소리가 울렸다.
“누구세요?”
진우가 가운을 동여매며 문을 향해 묻자 기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세. 라네스 기지장이네.”
진우가 문을 열자 라네스 기지장과 함께 세드릭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주전자와 커피를 내리는 기구가 들려 있었다.
“많이 피곤한가? 괜찮으면 커피나 한 잔 같이 하자고 들렀네. 이번에 지구에 다녀오는 길에 좋은 원두를 가져 왔거든.”
“그럴 거면 저를 부르시지 그러셨어요. 커피 내리는 기구까지 직접 들고 오려면 번거로우셨을 텐데.”
진우의 말에 기지장이 약간은 씁쓸한 기운이 담긴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폭풍지대로 떠난 뒤 세드릭에게 일이 어떻게 되어갈지 대충 들었네. 맥커힐과 월터도 돌아와서 솔직히 털어 놓더군. 내가 지금 자네에게 오라 가라 할 입장이 못 되는 것 같네. 자네도 기분이 유쾌하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왔네.”
세드릭의 얼굴을 보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진우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기지장은 점잖고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벌인 일은 아니지만 기지를 맡고 있는 장으로서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출발 전에 세드릭이 방을 큰 것으로 바꿔 준 덕에 객실의 거실에는 제법 넓은 다탁과 소파가 놓여 있었다. 세드릭은 그 다탁 위에 기구를 내려놓고는 미리 갈아 놓은 원두를 넣고 주전자의 물을 붓기 시작했다. 커피 추출기 아래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세드릭 이 녀석이 무릎이 닳도록 따로 사과해야겠지만, 일단 기지장으로서 자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겠네. 몰랐다고는 하지만, 이 자리가 그저 몰랐다는 말 한 마디로 모든 걸 없던 일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지.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자네가 의뢰를 수행했던 기간 동안의 숙식비와 장비 일체에 대한 임대료를 받지 않는 걸로 하겠네. 그리고 앞으로 머무는 동안의 숙식비와 지구로 돌아갈 때의 포털 사용료도 대신 부담하도록 하겠네.”
“그건 기지장님에게 너무 큰 손해가 아닙니까?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시면서요.”
진우는 기지장의 말에 약간 놀랐다. 그러자 기지장이 손을 저으며 진우의 말을 막았다.
“내 손해는 아닐세.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앞으로 세드릭이 그 비용을 메워야 할 걸세. 이 녀석도 반성하는 뜻에서 그렇게 하기로 했네. 녀석으로서는 적지 않은 기간 동안 그 돈을 메우기 위해 고생을 좀 해야 할 걸세.
진우가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세드릭이 더욱 고개를 숙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 할 말이 없어. 지누가 욕을 하면 욕을 먹고, 때리면 맞을 게.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용서해 달라고 말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정말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진우는 잠시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어휴, 이 한심한 녀석. 그리고 한심한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이 녀석 성격을 잘 알면서도 마지막 출발 전에 말을 머뭇거리는 걸 보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그때 확실히 물어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진우가 말없이 고개만 쳐들고 있자 라네스 기지장이 다시 카드 한 장과 크리스털 메모리 하나를 내밀었다.
“맥커힐과 월터가 놓고 간 걸세. 지구로 귀환하기 위한 포털비를 제외하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나머지 금액을 모두 피씨 카드에 담아놓고 갔네. 대충 40만 피씨 정도 된다고 하더군. 자네에게 의뢰비용을 너무 적게 지불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네.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언제든지 부르기만 하면 달려와서 돕겠다는 말도 남겼네.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도 몹시 미안해하고 있는 것 같더군. 자네가 돌아오면 얼굴이라도 보고 직접 용서를 빌고 싶어 했지만 윌러몬의 기름주머니를 빨리 처리해야 해서 일단 먼저 지구로 귀환했네. 그 점에 대해서는 자네가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네만. 이체가 자유로운 피씨카드이니 자네가 헌터 카드에 연결해서 이체요구만 하면 바로 넘어갈 걸세.”
진우는 다탁 위에 놓인 피씨 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요구했던 의뢰 비용은 이미 받았다. 그런데 그들은 가지고 있는 돈을 털어 추가 비용을 지불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그들은 진우가 단순한 중급 헌터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헌터들은 지구에서는 일반 시민들 속에 섞여 사는 다소 부유한 프리랜서라고 할 수 있지만, 일단 사냥터라는 필드에 나오게 되면 힘에 의해 정의가 정해지는 야생의 세계 속에 몸을 담을 수밖에 없다.
강한 헌터와 척을 지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특히 상대가 진우같은 더블일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경험이 많은 헌터들이라면 당연히 그 점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 크리스털 메모리는 뭔가요?”
진우가 손으로 다탁 위에 있는 물건을 가리켜 묻자 세드릭이 대답했다.
“아만다 부녀가 지누에게 미처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가게 되었다고 거기에다 영상 기록을 남겼어. 둘 다 기름주머니를 안고는 눈물을 펑펑 쏟더라고.”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리스털 메모리를 챙겼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헌터패드로 천천히 재생시켜 보기로 했다.
커피가 다 내려지자 세드릭이 커피를 잔에 담아 진우와 기지장 앞에 한 잔씩 놓았다. 진우가 세드릭을 쳐다보자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는 커피는 됐어. 이거 맛있는 거야. 식기 전에 어서 마셔.”
아이고, 저 소심한 녀석. 진우는 속으로 혀를 차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말 그대로 좋은 커피였다. 혀 전체를 가득히 맴도는 진한 커피향에 약간 시큼한 맛이 깃들어 있어 입안을 개운하게 해 주었다.
“자네가 몰고 온 무한궤도 차량을 차고에 넣다 보니까 적재함에 기름주머니가 실려 있더군. 자네 혹시 윌러킹을 사냥한 건가? 기름 주머니 크기로 볼 때 일반 윌러몬은 아닌 것 같아서 말일세.”
어차피 기름주머니를 가지고 올 때부터 자신이 윌러킹을 잡았다는 것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그냥 두고 왔다면 모를까, 그렇게 엄청난 크기의 기름주머니를 가지고 왔으면서 다른 설명을 할 수는 없었다.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지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걸 어떻게 처분할 건가? 생각해 둔 곳이 없다면 내가 저 기름주머니를 구입할 곳을 주선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적당한 판매처가 있겠습니까?”
라네스 기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 이 녀석 때문에 지난번에 지구에 갔을 때 프랑스 외문연 산하에 있는 외계 생물 연구소의 지인들을 만나보고 왔네. 혹시나 여분의 윌러몬 기름이 있을까 해서 들렀지만 거기도 남은 게 없다고 하더군. 오히려 내가 무니악 전초 기지의 기지장이라는 걸 알고는 구할 수 있으면 반드시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네. 돈은 적절하게 지불하겠다고 했네.”
가격만 적당하다면 팔아 버리는 게 진우로서도 이득이었다. 어차피 저 엄청난 기름덩어리를 들고 포털을 타려면 그것만 해도 적지 않은 비용이 깨질 게 틀림없었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크리스털 메모리를 통해서 연락을 주고받으면 아마 일주일 정도 걸릴 걸세. 혹시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가격이 있나?”
생각해 둔 건 없었다. 의뢰 자체도 이번에 처음 받은 것이었다.
“글쎄요. 윌러몬 한 마리를 잡는데 필요한 의뢰비용에다 기름의 양을 감안해서 적당히 값을 쳐 주시면 파는 걸로 하겠습니다. 저도 시세를 전혀 몰라서요.”
“윌러몬의 기름은 시세라고 할 게 없네. 워낙 거래가 거의 되지 않는 물품이니까. 하지만 지구에서도 저걸 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비용이 필요한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아마 그쪽도 대충 그에 준해서 가격을 정하지 않을까 싶네. 내가 알아서 가격을 조율해 보고 자네에게 알려주겠네. 그럼 그동안은 특별히 할 일이라도 생각해 둔 게 있나?”
“아뇨. 일단은 좀 쉬려고요. 사냥에서 금방 돌아와서 아직은 특별히 생각해 둔 일이 없어요.”
진우가 그렇게 얘기를 하자 기지장은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긴 윌러킹까지 사냥했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이래저래 힘들었겠군. 우리는 이만 갈 테니 푹 쉬게. 말했듯이 여기 있는 동안은 숙식을 포함해 모든 편의를 무료로 제공할 테니 어디 휴양지라도 왔다고 생각하고 편히 즐기게.”
기지장이 인사를 마치자 세드릭은 서둘러 커피 잔과 기구를 챙겨 일어나서는 다시 한 번 진우를 향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아만다 부녀가 하는 걸 보더니 딴에는 그게 정중한 예의라고 생각하고 흉내를 내는 것 같았다.
진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고 그들을 배웅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피로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진우는 다른 일보다 일단은 오늘만큼은 죽은 듯이 잠만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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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많이 찹니다. 모두 감기 조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