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진우의 마나가 쥐고 있는 검신으로 부드럽게 밀려들어갔다가 다시 검 끝에서부터 가느다란 실처럼 풀려나와 조금씩 피잘리의 몸속을 향해 뻗어가기 시작했다. 진우는 정신을 집중해서 그 마나를 통해 놈의 몸속에 퍼져있는 색다른 마나와 교감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피잘리의 마나를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손을 직접 상대의 몸에 대고 하는 것과는 달리 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른 생물의 마나를 느끼는 것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몇 배나 숙련된 마나 운용능력과 강한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10여분을 그렇게 시도했을까. 진우의 감각에 조금은 말랑말랑 하면서도 억세게 질긴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마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놈의 마나가 진우가 흘려보낸 실 같은 마나를 따라 오더니 몸에 박힌 검신을 살살 건드리기 시작했다.
‘이게 피잘리의 마나인가?’
마나는 어디서나 동일한 것 같지만, 일단 그것이 생물의 몸에 안착하거나, 광물의 형태로 굳어지면 제각기 다른 고유한 특성을 띠게 된다. 대기 중에 퍼져 있는 마나의 성격조차 전체적인 느낌으로 보면 행성마다 조금씩 달랐다.
진우는 지금 검신을 건드리고 있는 피잘리의 이질적인 마나를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진우는 피잘리의 몸속 마나와 교감을 시도해 놈의 뱃속에서 축구공만한 크기로 동그랗게 뭉쳐지도록 조정했다. 동조로 나가기 위한 발판이 될 수도 있는 새로운 시도였다.
마음속에서 모든 잡념을 지우고 오로지 검을 통해 느껴지는 놈의 마나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조금이라도 교감이 흐트러지게 되면 피잘리의 마나를 뜻대로 제어하는 일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진우는 입술을 깨물고 정신을 최대한 가다듬어 피잘리의 마나가 자신의 인도를 따라 뭉쳐지도록 유도했다.
‘됐다.’
놈의 몸 한가운데에서 약간 벗어난 지점에 마나들이 동그란 형태로 자리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진우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마나들이 완전히 형체를 갖추기를 기다렸다.
‘이런.’
하지만 피잘리 역시 상급 마수답게 외부의 타의적인 마나 조종 시도에 대해 나름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지, 마나는 뭉쳐지자마자 불과 몇 초를 견디지 못하고 손쉽게 풀어져서 도로 몸 전체로 스르르 퍼져나갔다. 실망감과 초조함에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했지만 진우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될 때까지 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내가 죽는다.’
진우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강점은 위기에 몰릴수록 더욱 더 침착하고 끈질겨 진다는 데에 있었다. 평소에는 성격도 특별히 모나지 않아 보였고, 외모도 조금 잘 생기기는 해도 대체로 까다롭지 않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스스로 이겨내지 않으면 자신을 버텨 줄 사람이 없다는 경험에서 오는 절박하면서도 강인한 정신력이 내재되어 있었다.
거듭되는 시도와, 연속되는 실패가 반복되었다. 물속에 끌려 내려온 지 벌써 삼십분이 지나고 있었다.
아직은 견딜 만했지만 숨이 조금씩 가빠오기 시작했다. 검을 움켜 쥔 손에서 차츰 힘이 빠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검 끝에 신경을 집중시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몸을 옥죄는 피잘리의 촉수를 견디기 위해 마나로 신체를 강화시키고 있자니, 점점 한계에 다다르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다시 5분 정도가 지났을 때, 드디어 피잘리의 몸속에 생성시킨 축구공 크기의 마나 폭탄이 놈의 저항력을 견디기 시작했다. 목표했던 1분에 이르기 전에 그냥 흩어지는 바람에 폭발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진우는 드디어 작은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다.
‘차라리 정지 시간을 줄일까...’
진우가 마나 폭탄의 유지 시간을 굳이 1분으로 한 것은 이 기술을 쓴 뒤에 폭발 대상으로부터 몸을 피할 시간을 벌 필요가 있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좀 더 기술에 익숙해지면 원하는 대로 시간을 조정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일정한 시간을 유지시키는 감각에 익숙해지도록 연습하는 게 우선이었다.
‘한 번 더.’
몇 번의 시도가 더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피잘리의 몸속에 있는 마나 폭탄이 놈의 저항력을 완벽히 버티기 시작했다. 마나 폭탄이 놈의 몸과 동화되려는 움직임을 저지시키기 위해 폭탄의 경계에 사력을 다해 의념을 불어 넣었더니, 다른 곳보다는 조금 단단한 껍질 같은 것이 폭탄 주위에 한 겹 씌워지는 느낌이 전해졌다.
‘1분.’
그동안 익숙해진 감각에 의지해서 1분을 헤아렸을 때, 피잘리의 몸속에 있는 마나 폭탄이 드디어 폭발했다. 꽁무니로 물을 내뿜으며 물속을 헤치고 나가던 놈의 몸이 움찔하더니 멈춰 섰다. 피잘리의 꽁무니에서 더 이상 물이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진우는 계속해서 방금 전의 느낌을 살려 다시 마나 폭탄을 생성시켰다. 1분이 지나고 나자 다시 한 번 피잘리의 가죽을 통해 몸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한 진동이 칼끝을 통해 전해졌다. 피잘리의 꽁무니에서 물 대신 녹색의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진우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것을 참으며 다시 한 번 필사적으로 마나 폭탄을 생성시켰다. 이제까지 시도했던 것 중에서 가장 크기가 큰 것이었다.
퉁
폭탄이 터지는 세기가 훨씬 커졌던지 이번에는 놈의 몸체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물에 진동이 전해질 정도로 큰 흔들림이 생겼다. 진우의 몸을 조이고 있던 촉수들이 힘을 잃고 스르르 풀려나갔다. 이제는 피잘리의 입에서도 피가 꾸역꾸역 밀려나와 주변의 바닷물을 탁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진우는 놈의 가죽 위에 박아 놓았던 칼을 뽑아내어 검집에 집어넣고, 다급하게 팔 다리를 놀려 물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지가 한참 전이었다.
“푸우~~”
공기가 이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 하마터면 최상급 마나헌터가 물에 빠져 죽는 꼴을 당할 뻔 했다. 마수와의 싸움에서 상대를 직접 때려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로 모든 승부가 결판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경험이었다.
한참 숨을 고르면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벌써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곳까지 멀어진 고무보트를 향해 헤엄을 쳐 가는데 뒤에서 무언가 불쑥 하며 솟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헤엄을 치면서 뒤를 돌아보니 죽은 피잘리의 사체가 약간은 쭈글쭈글해진 모양으로 물 위로 떠오른 것이 보였다.
고무보트에 올라타 노를 저어 피잘리의 사체가 있는 곳까지 되돌아온 진우는 칼에 마나를 불어넣어 놈의 몸을 가르기 시작했다. 마나 스톤을 찾기 위해서였다.
워낙 몸이 크고 가죽이 질긴 놈이라서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서야 간신히 어른 주먹 크기의 말랑말랑한 젤리같은 모양의 마나 스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약간 투명한 살색의 마나 스톤에서는 손에 전해지는 느낌과는 달리 질기고 억센 성격의 마나가 느껴졌다.
“헌터는 목숨을 담보로 보물을 찾는 사람이라더니, 딱 그 꼴이네.”
벌써 몇 번씩 겪은 일이었지만 이번에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다.
힘이 빠진 몸으로 억지로 고무보트를 저어 간신히 텐트가 있는 섬까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수평선 위로 무니악의 밤하늘을 비추는 별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고 있을 때였다. 진우는 피잘리의 마나스톤을 차연희가 선물했던 마나스톤 보관 주머니에 넣어 두고는 간단한 즉석요리를 데워 배를 채웠다.
식사 후에 커피를 한 잔 끓여 먹으며 마나스톤 주머니를 손에 들고 살짝 흔들자 안에 들어 있는 마나스톤들이 잘그락 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탐사에서는 본의 아니게 돈만 잔뜩 벌고 가는 게 될지도 모르겠군.”
텐트 문을 열어둔 채로 침낭 위에 누워서 낯선 행성의 낯선 별들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지구에 두고 온 사람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 날치고는 평안한 밤이었다.
* * * * *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텐트를 걷어 짐을 꾸리고는 무중력 자동차를 몰고 ‘사블레메흐’로 돌아왔다. 기지 앞에 자동차를 세운 뒤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세드릭 녀석이 마치 집을 나갔다가 몇 년 만에 돌아온 낭군을 맞이하는 아낙네처럼 호들갑을 떨며 진우에게로 뛰어왔다.
“지누~! 도대체 왜 통신기를 꺼 놓은 거야. 내가 지누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역시 이 녀석은 나를 기다리는 새색시가 아니로군. 네가 왜 나를 기다렸느냐는 듯이 진우가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자, 세드릭이 다짜고짜 그의 손을 붙잡고는 계단으로 이끌었다.
“야, 세드릭.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도대체 왜 그래?”
그러자 세드릭이 너무한다는 표정으로 진우를 보았다.
“나만 지누를 기다린 게 아냐. 그 동안 여기서 지누가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린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알아?”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누가? 여기 내가 아는 사람은 너하고 기지장 밖에 없는데?”
진우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세드릭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쳤다.
“답답하네. 그새 잊은 거야? 내가 통신으로 말했잖아. 지누한테 의뢰를 하려는 손님이 지구에서 여기까지 직접 찾아왔다고. 함께 의뢰를 받은 중급 헌터들도 두 명이나 지누를 기다리고 있어. 사람이 도대체 그렇게 남의 속을 태우면 어떡해?”
“아, 그거? 그 의뢰라면 안 한다고 이미 얘기했잖아. 나 지금 피곤하니까 올라가서 짐 정리하고 샤워해야 해. 할 말 있으면 나중에 하라고.”
진우는 세드릭이 잡은 팔을 툭 팽개치고 냉정하게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세드릭이 뒤에서 방방 뛰는 소리가 들렸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피곤했다.
메이드 로봇을 불러 빨래 거리를 맡기고 샤워를 한 다음 잠시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데, 문에서 방문을 알리는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샤워를 마친 뒤 대충 걸치고 있던 가운의 허리띠를 매고 문에 달린 렌즈를 통해 밖을 보니 세드릭이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문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저 자식이 진짜.
“이봐, 세드릭. 의뢰는 안 받는다고 했잖아. 나 지금 피곤해서 쉬어야 한다니까.”
살짝 문을 열고 세드릭에게 인상을 쓰면서 퉁명한 소리를 내뱉는데, 녀석의 뒤에 서 있던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미국에서 온 아만다 프레이저라고 합니다. 쉬시는데 죄송하지만 제발 제 말을 한 번만 들어주세요. 부탁입니다.”
그러자 여자 옆에 서 있던 초로의 신사 하나가 덩달아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아만다의 애비되는 사람입니다. 제발 저희 얘기를 들어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합니다.”
분명 미국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악수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진우가 한국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동양식 예의를 차리려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뒤에 뻣뻣하게 서 있는 남자들은 아마도 이번 의뢰를 맡기로 한 중급 헌터들인 것 같았다. 입맛이 썼지만 여기까지 찾아와 허리를 숙이는 사람들을 매몰차게 내몰기도 조금 애매했다.
“우리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번 의뢰는 웬만하면 함께 해 주었으면 하네. 중급 헌터 셋이라면 윌러몬 사냥이 특별히 위험한 일도 아니지 않은가?”
뒤에 서 있던 중급 헌터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두 부녀의 말을 거들었다. 키가 크고 근육이 제법 잘 발달한 게 전형적인 신체형 마나 헌터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진우의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헌터들은 보통 다른 헌터들의 결정에 참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왜 자청해서 나서는 거지?
“알겠습니다. 얘기만이라면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식당에서 이야기를 들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지금 배가 고파서 마침 점심을 먹으러 내려가려던 참인데, 혹시 식전이면 거기서 식사나 하면서 얘기를 들었으면 좋겠군요.”
그러자 아만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아직 점심 전입니다. 제가 식사를 대접할 테니 함께 드시지요.”
그러자 또 세드릭이 나섰다.
“그럼 내가 얼른 내려가서 특별 코스 요리를 준비하라고 할게. 나 먼저 간다.”
세드릭은 진우가 또 뭐라고 할까 무섭다는 듯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겠다며 후다닥 사라졌다. 야, 무슨 특별 코스 요리는, 저 자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