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페노닉스 행성의 무인 전초 기지에 있는 포털 장치들이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포털을 생성시키기 시작했다. 매일 기지를 청소하고 관리하느라 움직이는 로봇들을 제외하고는 적막에 잠겨있던 전초 기지가 일순간에 잠에서 깨어나듯 활기를 되찾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니코레임 행성 지구 평의회 의원들이 하나 둘 포털을 통과해 나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반갑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포털을 통과하자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평의회 의원들이 이야기를 나누며 속속 회의장으로 모여들었다. 제일 먼저 포털을 통과해 미리 기다리고 있는 콴톤 의장이 회의장을 메운 의원들을 둘러보더니 손바닥으로 의장석을 탁탁 쳤다.
“지금부터 니코레임 지구 평의회 제 120회차 정기 회의를 개최합니다. 저를 포함한 총 인원 101명 중에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한 9명을 제외한 92명이 오늘의 참석 인원입니다.
각자 자기 앞에 놓인 패드를 통해 회의 안건과 내용을 확인해 주십시오. 30분 뒤에 토의를 시작할 테니 그 전에 모두들 내용을 숙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의장의 개회 선언에 따라 참석한 의원들이 각자의 패드에서 미리 전송된 회의 안건들을 불러내 검토하기 시작했다. 조용한 가운데 패드를 조작하는 손가락만 바삐 움직이는 가운데 30분은 금방 지나갔다.
콴톤 의장이 다시 책상을 쳐서 의원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몇 가지 간단한 사안들에 대해 토의를 진행시키고, 거수를 통해 통과를 시키거나 결의 내용을 확정지었다.
그런 순서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의원 하나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했다. 의장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그가 앉은 자리에서 말을 했다.
“뉴델리 헌터 양성소장으로 있는 알함미르 의원입니다. 이번에 뉴 올림포스 행성에서 열렸던 무투 대회에서 마지막 날 사고가 생겼다고 하던데, 대회를 주관했던 영국 헌터학교의 교장인 아스탄 의원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합니다.”
의장이 그에게로 눈길을 돌리자, 아스탄이 입을 열었다.
“자세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은 사건 자체가 미궁에 빠진 측면이 있어서 저도 상세한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이미 배부해 드린 자료에 나온 것처럼, 마지막 날 단체 사냥 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던 한국 헌터협회장 허진행이 벨라키에르로 추정되는 마수들의 공격을 받고 사냥터 내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 밖의 자세한 정황에 대해서는 이미 자료에서 밝힌 것 이외에는 저도 따로 말씀드릴 것이 별로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
아스탄은 별 다른 설명 없이 그렇게 간단히 말을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 질문을 했던 알함미르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손을 들고 말했다.
“그럼 상급 헌터인 허진행이 왜 최하급 마수에 불과한 벨라키에르에게 살해를 당했는지 그 원인을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아스탄이 다시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교장으로 있는 영국 헌터 학교가 대회를 주관하기는 했지만, 실제 대회의 진행은 주로 지구인들이 맡아서 준비했습니다. 염치 없는 말이지만, 저도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또, 아시다시피 저희 니코레임인들에게는 지구인들을 강제로 억류해서 조사하거나 할 권한이 없습니다.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국 헌터 양성소의 타르코스 소장이 손을 들었다. 의장이 그의 발언을 허락하자 타르코스가 입을 열었다.
“한국 헌터 양성소장을 맡고 있는 타르코스 의원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조금 아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의원들의 시선이 모두 타르코스에게로 향했다. 타르코스가 말을 이었다.
“이번 무투 대회 마지막 날 경기에서 방금 언급된 허진행이라는 인물이 일전에 말씀드렸던 한국 헌터 학교의 강진우 학생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듯합니다. 그가 원래 사냥터에 배치되기로 했던 벨라몽을 벨라키에르로 바꿔치기 해서 강진우를 유인, 살해하려다가 오히려 강진우 군에게 역습을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
타르코스는 지구로 귀환한 진우와 조승운으로부터 나중에 일의 전말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과정에서 진우는 자신이 상대방의 마나를 고정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타르코스는 평의회에서 그 사실까지는 밝히지 않았다.
진우에 관한 모든 일을 회의장에서 다 밝히기에는 곤란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만 이미 최상급 헌터의 경지에 오른 진우와의 싸움에서 패한 허진행이 결국은 벨라키에르에 의해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하는 참변을 겪었다는 정도로만 말을 했다.
다른 의원들이 타르코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아스탄도 속으로 뉴 올림피아 행성에서의 일을 정리하고 있었다.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군. 처음부터 가능성이 높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허진행이 너무 욕심을 부렸어. 지구인들은 아무리 머리를 잘 써도 역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실패하는 일이 너무 많아. 그나저나 6개월 전에 중급 헌터였던 친구가 벌써 최상급이라니. 역시 마나를 보는 자라서 그런가?’
그의 마음속에 어두운 구름 한 조각이 배회했다.
‘하지만 강진우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지구인이다. 근본적으로 허진행과 별로 다를 게 없어. 우리가 그에게 너무 많은 희망을 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아스탄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미국 뉴욕 헌터학교장인 온툴 의원이 발언권을 얻어 질문했다.
“강진우 군이 동조의 단계로 넘어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까? 조금 성급한 질문인 것 같기는 하지만 다른 분들도 제 마음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타르코스는 양손에 깍지를 껴서 턱밑에 대고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대답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동조의 실마리를 조금 잡은 것 같다고 합니다.”
회의장에 ‘오오~’하는 감탄사가 작게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본인 역시 단지 실마리를 잡았을 뿐, 그것을 풀어나갈 방도를 알지 못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아직 최상급 헌터의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게 분명하고, 아무래도 당분간 정체기가 이어지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의원들이 안타까움에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일부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콴톤 의장이 소란을 진정시키고 나서 말을 했다.
“우리는 지구에 백 년을 기약하고 왔습니다. 이제 아직 50년도 채 지나지 않았고, 진우 군의 나이도 고작 스무 살을 넘지 못했습니다.
진우 군이나 저희나 아직 조급해 할 때가 아닙니다. 발현 단계에서 동조 단계로 넘어가는 데에 아무리 빨라도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는 일 아닙니까. 너무 과한 기대를 걸어 서로 힘을 빼지 맙시다.
”
관톤 의장은 상황을 정리한 다음 의원들을 바라보며 당부의 말을 했다.
“그것보다 이제 돌아가시면 각 의원들마다 지구인들과 포털 관리 권한 양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셔야 할 겁니다. 누가 권한을 양도받을지에 대해서는 나라마다 지구인들이 각자 알아서 할 일이지만, 향후 10년 간은 저희가 계속 포털을 관리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 주십시오. 다들 잘 알고 계신 일이겠지만, 다시 한 번 부탁을 드립니다.
수고들 해 주십시오.”
포털 관리 권한 이양에 관해 몇 가지 일에 대한 토의가 이어졌지만, 그 뒤로 30분 가량 회의가 더 진행되고서는 폐회가 선언되었다. 의원들이 다시금 포털을 통해 지구로 귀환하는 것을 보고 있던 타르코스는 아스탄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 콴톤 의장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한국의 허진행 협회장 살해 사건에 관한 일 말씀입니다.”
타르코스가 말을 멈추자, 콴톤 의장이 그를 바라보며 말을 계속하라는 눈짓을 주었다.
“사체에 남은 흔적으로 보아서는 벨라키에르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 분명해 보이기는 한데, 정작 그 뒤에 진행된 수색에서는 벨라키에르가 한 마리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경기가 끝난 뒤 수색이 시작되기 전에 누군가가 미리 다 정리를 한 듯 합니다.”
콴톤 의장이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누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도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받지 않고 벨라키에르를 숲에 풀어 놓을 수 있는 사람, 한 밤중에 몰래 숲에 들어가 최하급 마수이기는 하나 여섯 마리를 상처 없이 해치울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놈들의 사체를 숲에서 끌어내어 흔적 없이 처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능력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
콴톤 의장이 타르코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서로의 머릿속에 맴도는 이름이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이름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런 상태로 꽤 시간이 지난 뒤 콴톤 의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니코레임인들은 지구인들과는 달리 집단의 이름으로 개인의 판단과 자유를 함부로 억압하지 않습니다. 그건 역사적 경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랜 진화의 결과라고 할 만큼 우리의 본성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지요. 지금은 우리가 매우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으니 그런 본성에 반하는 일도 때로는 가능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일이 조금 더 확실해 질 때까지는 일단 더 기다려 봅시다.
”
타르코스는 콴톤 의장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정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대일의 대결을 시도해서 상대방에게 징벌을 내리거나 아예 제거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러나 그 일을 집단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은 니코레임 인들에게는 본능적인 터부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타르코스는 가슴 속 한 구석을 맴도는 불안의 그림자를 씻어버릴 수가 없었다. 지구로 온 뒤로 자신을 포함하여 니코레임 인들에게서 간혹 예상치 못한 변화의 기미가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어떤 형태로 모습을 드러낼지는 알 수가 없었다. 타르코스는 다만 그게 너무 치명적인 것만 아니기를 바랐다.
* * * * *
6월에 접어들면서 날씨가 조금씩 무더워질 때쯤 해서 궁술 교관인 나르샤가 진우를 찾아왔다.
“난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교관을 그만 둘 거야.”
나르샤의 갑작스런 선언에 진우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생각을 달리 해 보니 그녀에게는 지금 교관을 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헌팅을 하면서 수련을 더 하시게요?”
“응. 몸속의 마나도 완전히 안정이 되었으니, 직접 사냥을 하면서 실력을 늘리는데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 최소한 상급 헌터까지는 도달해야 스승님 체면도 살릴 수 있을 것 같고.”
“특별히 생각하고 계신 행성이 있으세요?”
진우의 물음에 나르샤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영국으로 가서 멜리사 스승님과 의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 스승님은 여러 행성에서 헌팅을 한 경험이 있으시니까 적당한 곳을 고르는데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야.”
나르샤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진우에게 거꾸로 질문을 했다.
“그건 그렇고 진우 너도 졸업을 하면 헌팅을 다닐 거라던데, 혹시 생각해 둔 행성이 있니?”
진우는 몇몇 행성을 마음 속에 두기는 했지만 그 역시 아직 이거다 하는 곳을 확실히 정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지난 겨울에 무투 대회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최현 교관님이 떠나시면서 그러더라고요. 한 일 년 정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나중에 이니스프리 행성에서 한 동안 지내실 예정이시래요. 저도 당분간은 다른 곳을 좀 다니다가 시간이 나면 그곳에 들러 보려고요.”
“이니스프리? 용병들의 행성 말이야?”
“네. 거기가 경치도 좋고 일거리도 많다면서 시간 나면 한 번 같이 사냥을 하자고 하셨거든요.”
최현은 헌터 학교에서 1년 간의 봉사 활동 기간이 끝나자 다시 헌터로 돌아가 외계 행성으로 떠났다. 떠나기 전에 만난 자리에서 그는 진우에게 헌터라면 반드시 가 보아야 할 곳 가운데 하나로 이니스프리를 꼽았다.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인 윌리엄 예이츠가 읊었던 시 ‘이니스프리의 호도(湖島)’는 아일랜드 슬라이고 지방에 있는 작은 호수 속의 섬을 소재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행성 이니스프리에는 그와는 달리 엄청난 크기의 호수와 그 안에 있는 여의도보다 큰 섬으로 헌터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호수 주변에 각종 맹수와 마수들이 많이 서식하는 것은 물론, 더 멀리 나가면 여러 가지 유용한 희귀 광물을 구할 수 있는 곳들이 드물지 않아서, 지구에서 헌터들에게 보내는 여러 가지 의뢰가 넘쳐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예 오랫동안 그곳에서 머물면서 여러 가지 의뢰만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용병들도 적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섬 안에는 그들을 위한 여러 가지 숙박 시설을 비롯한 위락 시설들이 들어서게 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행성 자체를 이니스프리가 아닌 ‘용병들의 행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진우의 얘기를 들은 나르샤는 ‘흠’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우를 보고 말했다.
“그럼 나도 스승님하고 의논해서 나중에 시간이 나면 그곳에 한 번 들러봐야겠다. 아무튼 진우 너하고도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한 번 같이 사냥을 해 봤으면 좋겠어. 다른 데를 가더라도 되도록 행선지를 남겨줄래? 여기 교장선생님이나 아니면 헌터양성소의 타르코스 소장에게 말을 해 두면 내가 나중에 알 수 있을 거야.”
“네. 그렇게 할게요. 교관님도 좋은 성과가 있으셨으면 좋겠어요.”
나르샤는 예쁘게 웃더니 진우에게 손을 흔들고는 자리를 떴다.
그러고 보니, 권일도 역시 이번 학기를 끝으로 교관을 그만 두고 다시 헌팅을 나설까 생각 중이라는 얘기를 했었다. 그간 진우가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이제 과거의 트라우마를 떨쳐 버릴 때가 된 것 같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진우로서는 내심 그가 소현이나 희정이를 가르쳐 주었으면 했지만, 그 말을 들은 권일도는 손사래를 치면서 자신은 여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영 자신이 없다면서 웃었다.
자신을 가르쳤던 사람들이 하나 둘 학교를 떠나는 것을 보면서 진우는 스스로도 슬슬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피부로 다가왔다. 아직 추적술도 통과해야 했고, 14과목이나 되는 필기시험 준비로 바쁘기는 했지만, 그것도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모두 결과가 나올 것이다.
‘생각하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곳에 참 오랫동안 머문 것 같은 느낌이네.’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햇살이 교정을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의 가슴에는 벌써 가을이 내려앉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헌터 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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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에 실수로 66화 것을 올려 버렸네요. 65화를 수정해서 다시 올렸습니다. 아고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