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65화 (65/235)

65화

서러운 정태의 봄은 의외의 인물이 등장하는 바람에 변화의 계기를 맞았다.

“진우 오빠!”

소현과 정태와 함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반갑게 진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밥을 먹던 진우가 고개를 들고 보니 눈앞에 웬 소녀 하나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 희정이구나?”

격투기 도장 남상호 관장의 딸 남희정이었다.

“와, 오빠 되게 반갑다. 헌터 학교 들어와서 한 달이 넘도록 오빠가 보이지 않아서 은근히 찾아다녔는데, 여기서 만나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격투기 도장은 헌터 후보자 테스트에 합격하고 나서 잠깐 다닌 뒤로는 거의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입학 후 정태네 집에 들렀다가 딱 한 번 인사하러 찾아갔던 것 외에는 서로 소식을 주고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헌터 후보자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과 대련을 하자고 졸랐던 당돌한 소녀를 그때로부터 1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서 헌터 학교 식당에서 마주친 것이다.

“너 합격했구나? 와아, 축하한다. 여기서 만나니까 되게 반갑네.”

진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반갑게 인사를 하자 옆에 있던 소현과 정태가 궁금한 눈빛으로 진우를 쳐다보았다. 정태 녀석이 진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물었다.

“누군데?”

희정이는 발랄한 기운이 풍기는 깜찍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운동으로 단련된 몸매도 그럴 듯했다. 정태 녀석의 눈치를 보니 ‘저 예쁜 아가씨한테 날 소개시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테다’ 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진우가 세 사람을 돌아보며 서로를 소개시켰다.

“인사해라. 내가 전에 살던 동네에서 격투기 도장을 하시는 남상호 관장님이라고 계셔, 여기는 그 분 딸 남희정이야. 이쪽은 내 친구인 장소현하고 박정태. 정태는 지금 2학년이고, 소현이는 희정이 너처럼 신입생이다.”

남희정이 ‘헤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당돌하기는 해도 관장님이 잘 가르치셨는지 예의는 바른 아이였다.

“그런데 저기 소현이라는 분은 신입생인데 오빠 친구에요?”

그러자 진우가 웃으며 설명을 해 주었다. 소현이 사실은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헌터 학교에 다시 입학했다고 하자 남희정은 깜짝 놀랐다.

“우와, 그럼 언니네요? 안녕하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소현이 쿡 하고 웃으며 희정에게 자리를 권하자 그녀는 마침 비어있던 정태 옆자리에 앉았다. 정태 녀석 얼굴이 헤벌쭉해졌다.

“근데, 오빠. 오빠 그동안 되게 유명해졌더라? 헌터 학교 대항 무투 대회에서 개인전하고 단체전을 휩쓸었다며? 나 다니던 학교에서 오빠 인기 짱이에요.”

추적술은 다른 학교에서 우승했으니 휩쓴 것은 아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어째 예전부터 말을 높이는 것도 아니고 낮추는 것도 아니고 마구 섞어서 말한다.

“야, 존대를 하려면 확실히 하고, 아니면 편하게 하겠다고 양해를 구하던가. 왜 말이 왔다 갔다 하냐?”

“넵. 알겠습니다.”

머리에 경례를 척 하고 올려붙이더니 금세 혀를 쏙 내밀고는 헤헤 거린다. 악의가 없으니 참 뭐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서울에 계신 남상호 관장님 안부를 묻고, 못 보던 사이에 헌터 학교에서 겪었던 일들을 얘기하던 도중에 갑자기 희정이 진지한 표정을 하고 진우에게 물었다.

“근데 진우 오빠.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 부탁 하기가 좀 그렇기는 한데, 나 격투기 연습하는데 대련 상대 좀 해 주면 안돼요?”

진우의 표정에 잠시 멈칫하는 기운이 떠올랐다.

“격투기?”

“네. 오빤 무투 대회 개인전 우승도 했으니까 예전과는 달리 실력이 이제 아주 좋을 거 아니에요. 격투기 수업 시간에 다른 아이들하고 대련 연습을 하기는 하는데, 걔들이 너무 실력이 없어서 훈련이 안 돼요. 교관님은 너무 세고. 오빠가 제 대련 상대 좀 가끔 해 주면 안 돼요?”

사실은 웬만한 교관보다 진우가 더 세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진우는 이번 학기에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바빴다. 틈틈이 시간을 내어서 소현의 대련 상대를 해 주고는 있지만, 그것만 해도 여유가 많지 않았다. 난처했다.

게다가 헌터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진우같은 예외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어렸을 때부터 몇 가지 무술 정도는 수련을 하고 입학했다. 그런 아이들이 대련 상대로 시원찮다고 하는 걸 보니 희정이 솜씨가 역시 예사롭지는 않은 듯했다.

자신이 대련 상대를 해 줄 수 없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미루기도 곤란했다. 진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득 정태를 보았다.

아, 이거 괜찮겠는데?

“정말 미안한데, 오빠가 이번 학기에 졸업을 생각하고 있어서 여유가 좀 없어. 그래서 말인데, 여기 정태라고 내 친구라면 네 대련 상대로 좋을 것 같은데 어떠냐? 정태도 어렸을 때부터 격투기 훈련을 받은 데다, 지난 두 학기에서 격투기 과목을 학기말도 되기 전에 통과 승인을 받았거든. 어때?

정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우를 바라보았다. 짜식, 놀라기는. 희정이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정태를 쳐다보았다. 정태 녀석이 갑자기 으흠 하며 점잔을 뺐다.

“저기, 그럼 초면에 실례지만 선배님께 부탁을 좀 드려도 될까요? 저도 이번 학기에 격투술을 좀 일찍 통과하고 싶어서요. 도와주시면 제가 식사 대접이라도 할 게요.”

희정이가 어울리지 않게 정중하게 부탁하자, 정태 녀석 얼굴이 약간 불그스름해 지더니, 기침을 몇 번 했다.

“어, 흠흠. 그러지 뭐. 그래, 그렇게 하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 게요.”

남희정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정태에게 허리를 구십도 각도로 숙여 크게 인사를 했다. 슬쩍 쳐다보았더니 정태 녀석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다.

“그럼, 괜찮으시면 지금 한 번 좀 대련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입학하고 나서 대련다운 대련을 거의 못해봐서요. 지금 비어있는 도장을 제가 몇 군데 알거든요.”

남희정다운 소리였다. 성격이 저러니 헌터 후보자 테스트에 합격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진우에게도 냉큼 대련을 요청했던 거였다.

“어? 그래. 그러자, 그럼.”

“우와, 감사합니다.”

남희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벌써 식당 문쪽으로 쪼로록 달려나갔다. 함께 따라나가던 정태 녀석이 갑자기 몸을 돌려 진우에게 오더니 두 손으로 진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다, 친구야.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옆에 있던 소현이 쿡 하고 웃었지만 녀석은 상관도 하지 않고 휑하니 몸을 돌려 남희정을 따라 나갔다.

“정태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저 희정이라는 아이 말이야.”

소현이 웃으며 말을 했다. 진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야. 둘 다 성격이 나쁜 사람들이 아니니까 잘 지내면 좋지 뭐.”

정태에게는 잔인했던 3월이 지나고 희망이 샘솟는 4월이 성큼 다가왔다.

*  * * * *

김도훈이 진우에게 돌아오는 주말에 함께 영화도 보고 식사도 같이 하자는 제안을 해 온 것은 날씨가 완연히 풀린 4월말 경이었다. 진우가 신입생인 소현과 자주 붙어 다니는 것을 본 그가 정태에게 슬쩍 뭔가를 물어보더니 이른바 더블 데이트를 제안한 것이다.

“너하고 연희, 나, 소현이 이렇게 넷이서 말이야?”

진우가 묻자 도훈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진우는 저 어색한 커플들과 주말을 함께 한다는 생각에 조금 찜찜해 했지만 의외로 옆에 있던 소현이 금방 찬성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러자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넷이서 함께 한 시간은 생각보다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영화도 제법 재미가 있었고, 도훈이 고른 식당도 깔끔하면서도 입맛이 도는 음식을 냈다.

차연희는 여전히 예의 그 알 듯 말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지만, 소현이 평소와는 달리 발랄한 모습으로 수다에 가까울 정도로 말을 많이 한 덕분에 분위기가 크게 처지지 않을 수 있었다.

문제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였다. 여전히 애매한 분위기를 풍기며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던 소현이 문득 돌발 질문을 던졌다.

“근데, 두 사람 사귀는 것 맞지?”

“물론.”

“아니.”

동시에 터져 나온 정반대의 대답에 진우는 그만 머리를 감싸 쥐고 말았다. 에효, 저 황당한 녀석들. 하지만 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서 단정을 내렸다.

“맞구나, 둘이 사귀는 거.”

“당연하지.”

“아니라니까.”

친구라고는 해도 남의 일이라 그동안은 그냥 보고만 있었는데, 소현이까지 나서서 대답의 불협화음이라는 게 뭔지를 일깨우자,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저녁의 식사를 끝내고 소현과 연희를 여학생 기숙사까지 바래다 준 진우는 돌아가려는 도훈을 끌고 학교 한 구석에 있는 조그만 호수로 데리고 갔다. 도훈을 벤치에 앉힌 진우는 그동안 참았던 질문을 했다.

“야, 솔직히 이건 내가 함부로 물을 일은 아닌 거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도대체 너희 둘은 정체가 뭐냐? 옆에서 보는 사람 복장 터지겠다.”

“왜, 왜 그래? 우리가 뭐 어때서?”

진우가 느닷없이 따지듯이 묻자 당황한 빛의 도훈이 말을 얼버무리며 모르는 척 했다. 아, 이 옆집 엄마 아들같은 녀석이 갑자기 멍청한 척 하기는. 진우는 도훈을 매섭게 바라보다 이왕 말을 꺼낸 거, 끝까지 물어보기로 했다.

“야, 솔직히 말해서 너희 둘의 이상한 짓거리는 학교에서도 소문이 파다하잖아. 너 지금 몰라서 물어? 사귀면 사귀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벌써 일 년이 넘도록 맨 날 붙어 다니면서 하나는 사귄다고 그러고, 다른 하나는 또 아니라고 그러고. 보는 사람 헷갈리게 만들려고 둘이서 일부러 장난치는 거 아니면 도대체 왜들 그러는 건데? 넌 정말 차연희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지내는 게 괜찮다는 거냐? 보는 사람이 다 답답해서 속이 터지겠는데.”

따지고 보면 진우가 굳이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동안은 그도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나름 커플 대 커플로 데이트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면서까지 계속 그러는 모습을 보자, 진우도 오늘 만큼은 은근히 열이 받았다.

진우가 평소와는 달리 마구 다그치자, 도훈은 왠지 풀이 확 죽었다. 뭔가 처량한 눈빛으로 한참을 말도 않고 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연희네 집이 우리 아버지 때문에 망했어. 나 어릴 때부터 집안끼리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연희네 아버지가 하던 회사를 그냥 한 방에 집어 삼키더라고. 그 충격으로 연희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까지 하셨었어. 연희 엄마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수습하지 않았으면, 아마 지금쯤 연희네는 길바닥에 나 앉았을 거야. 특허며 핵심 기술자를 아빠가 거의 다 뺏어 버렸거든.”

아, 이게 갑자기 또 웬 막장 드라마냐. 그러니까 친구의 배신, 집안의 원수라는 거냐? 그런데 그럼 둘은 도대체 왜 붙어 다니는 건데? 진우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도훈이 픽 웃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도 예쁘지만 어릴 때 연희는 정말 귀여웠어. 지금까지 살면서 연희보다 더 예쁜 아이는 본적이 없어. 중학교 때까지는 집안끼리 자주 만나기도 했고, 정말 친하게 지냈지. 나중에 크면 연희에게 장가들겠다고 생각한 게 아마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부터였을 거야.”

이어진 도훈의 말에 의하면 그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도훈의 아버지인 김정호가 연희 아버지에게 합병을 제안했던 모양이다. 꽤 후한 조건을 제시하고 끈질기게 제안을 했지만, 연희 아버지는 끝내 그것을 거부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룹 후계자 자리를 놓고 장남인 오성 자동차 사장 김정현과 경쟁을 벌이고 있던 김정호로서는 연희 아버지의 회사가 지닌 특허와 기술력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대규모 하청과 대금 지급 미루기, 주가 조작, 핵심 기술자 빼내기 등의 수법을 총 동원한 끝에 연희 아버지의 회사를 강제 인수하는데 성공했다. 오랜 인연과 친분을 외면한 냉혹한 처사였다.

“그때 원래 학교 선생님을 하던 연희 어머니가 나서서 회사를 수습하는 한편 각종 소송을 통해 어느 정도의 이익을 확보하지 않았으면, 연희네는 아마 살던 집조차 빼앗겼을 거야. 아버지도 막판에는 그 정도는 그냥 양보를 하더라고. 지금도 잊히지가 않아. 연희 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찾아와 아무리 사업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아버지를 막 몰아붙이는데, 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묵묵히 그 욕을 다 듣고 있더라.”

도훈의 기억에 의하면 그날 김정호도 밤늦게 서재에 앉아 혼자서 술을 엄청 먹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일어나 출근을 했다. 하필이면 연희네 집안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도훈도 아버지가 퍽 원망스러웠지만, 그날 아침에 보았던 김정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는 아무 얘기도 할 수 없었단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겨울에 부산까지 연희네 집을 찾아갔어. 몇 번이나 통화를 시도한 끝에 간신히 연희를 패스트 푸드점에서 만날 수 있었지. 그날 내가 만나서 한 첫마디가 뭔지 아니?”

도훈이 픽 웃더니 말을 이었다.

“나랑 결혼해 달라고 했지. 연희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않고 일어나서 가더라. 연희가 가기 전에 딱 한 마디를 했어. 자긴 헌터 학교에 들어갈 거라고.”

도훈이 진우를 바라보더니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헌터가 되겠다는 생각에 여기 들어온 너희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난 딱히 그런 생각은 없었어.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집안에 전문 헌터가 하나 있는 게 좋다면서 나를 교육시켰지만, 나는 사실 정말로 꼭 헌터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거든. 그런데 연희가 헌터가 되겠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를 들어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중학교 졸업식을 마치자마자 정말 죽어라고 노력을 했지.”

말을 하는 녀석의 눈에 눈물이 언뜻 비쳤다. 한숨을 내쉰 진우가 도훈에게 물었다.

“너희 집에서도 네가 연희랑 결혼하고 싶어할 정도로 좋아한다는 걸 아니?”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를 만나고 돌아온 날 아버지에게 말했지. 커서 연희랑 결혼하겠다고. 아버지가 들으시더니 그냥 픽 웃으시더라고.”

“그럼 반대를 하는 건 아니시네?”

도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날 저녁에 연희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어. 앞으로 연희 만날 생각 하지 말라고. 우리 집안사람들하고는 얼굴도 보기 싫으니까 다시는 연락도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

참 나이도 어린 것들이 복잡하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우 첫사랑이니 뭐니 하면서 연애질이나 알콩달콩 하면서 지내기에도 빠른 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벌써 무슨 결혼이니 집안의 알력이니 하는 게 진우에게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하염없이 호수만 바라보고 있는 도훈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진우가 툭하고 말을 뱉었다.

“그래서, 어쨌든 지금은 헌터가 되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거냐?”

도훈이 고개를 들었다.

“돼야지.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까. 들어와서 해보니까 제법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아. 수업도 재미있고. 그리고 둘이 같이 헌터가 되면 어쨌든 연희하고 계속 함께 있을 명분도 생길 것 같고 말이야.”

진우가 그의 어깨를 툭 건들였다.

“그럼 헌터답게 해 봐. 찌질하게 굴지 말고.”

도훈이 무슨 말이냐는 듯이 진우를 쳐다보았다.

“헌터는 자유롭다, 몰라? 그럼 자기 삶은 자기가 결정해야지. 니네 둘 다 마찬가지야.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집안이니 뭐니 따지지 말고. 나쁜 짓 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도훈이 진우를 보며 픽 웃었다. 진우도 따라 웃었다. 진우는 손을 내밀어 도훈의 손을 잡고는 힘을 주어 그를 일으켰다.

“들어가자. 네놈 때문에 오늘 시간 많이 뺏겼다. 나 공부할 거 많아.”

도훈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가 갑자기 진우를 왈칵 껴안았다. 아, 남자 자식이 남사스럽게.

“고맙다. 그동안 매일 웃고 다니면서도 사실 가슴이 답답했었는데, 네 덕분에 조금 풀린 것 같다.”

서로 맺혔던 이야기를 터트리고 소리내서 웃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결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도 두 사람 모두 꽉 막혔던 것이 조금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은 그것만이라도 좋았다. 아직은 젊고, 시간은 또 많이 남았으니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어두운 호수 위에 작은 파문을 남기고 사라졌다. 큰 바다에는 큰 물결이 일고, 작은 호수에는 또 그에 맞는 작은 파문이 남는다. 진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호수를 떠나 큰 바다로 나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과연 저 작은 파문마저도 넘어설 준비는 잘 하고 있는 것일까?

============================ 작품 후기 ============================

어제 댓글에 남희정과 김도훈, 차연희는 어떻게 된 거냐는 글이 올라온 걸 보고 가슴이 섬뜩했습니다. 이 양반들이 이제 신기가 들렸나 하는 생각이...

말씀드렸다시피 이 파트는 정리를 하고 넘어가는 파트입니다. 그렇다고 온갖 인연을 끝장을 내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간 진우에게 집중하느라고 미처 다루지 못한 이야기들을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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