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각자의 사냥터로 진입하는 학생들의 머리 위에는 사냥터마다 수십 대의 비행 드론이 떠 있었다. 경기 장면을 촬영하는 목적 이외에도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학교 대항 단체전의 최종 종목인 단체 사냥에 나설 정도라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아직 자격만 취득하지 못했을 뿐, 전문 헌터에 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실제로 개인전이나 단체전에서 우승한 학생들은 대개 졸업과 동시에 전문 헌터 자격 심사 시험을 통과했다.
그 중 일부는 체내 마나량이 이미 100P 육박해 머지않아 마나 헌터로서 각성할 것이 확실시 되는 이들도 있었다. 마나량만 채운다고 해서 마나 헌터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빠르면 20대 초반에 각성에 성공하리라는 기대가 가능한 인재들이었다.
사냥터에서 등장하는 사냥감들이 비록 마수가 아닌 맹수였고, 그나마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놈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단체 사냥에 나선 학생들이 시합 도중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이를 대비해 비행 드론들이 수시로 학생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동시에 심사위원들이 직접 사냥터에 진입해서 이들을 뒤따르면서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언제든지 개입할 준비를 갖추고 있기도 했다.
진우 일행은 처음 한 시간 동안 순조롭게 사냥을 하고 있었다. 문수련이 전면에서 주변의 흔적들을 근거로 맹수들을 추적하면, 진우와 나상진이 그 뒤를 바짝 따르면서 문수련을 보호하는 한편, 발견하는 맹수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다.
진우와 나상진이 공격을 시작하면 안나예가 활을 쏘아 맹수의 급소를 노렸고, 이병희는 제일 뒤에 있다가 다른 위험 요소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면 선두의 진우와 나상진에게 합류했다.
맹수들은 한 마리나 두 마리씩 숲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문수련의 추적 솜씨가 나쁘지 않은데다 사냥감이 발견되면 진우가 달려들어 제거하는 속도가 워낙 빨랐기 때문에, 이병희는 사실상 사냥감에다 창을 찌를 기회조차 몇 번 없었다.
그나마 진우가 아직은 마나를 사용하고 있지 않았기에 그에게도 간혹 기회가 돌아갔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냥감은 발견되는 즉시 처리되었을 것이다.
다른 사냥팀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숲속의 사냥감을 정리해 나간 끝에, 시합이 시작된 지 한 시간가량 지났을 때, 진우의 팀은 이미 전체 숲 면적의 삼분의 일 가량에 대한 수색과 사냥을 마치고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려 있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승에 대한 확신이 깃든 만족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아자, 우리가 이길 수 있어. 파이팅.”
앞서 가던 문수련이 짧게 기합을 넣으며 소리치자 나상진을 비롯한 팀원들의 얼굴에 동의한다는 듯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게 일행의 긴장감이 살짝 풀리는 순간, 진우는 문수련의 오른쪽 머리 위에서 그녀를 향해 비스듬히 떨어져 내리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위험해!”
짧게 고함을 지른 진우가 자신의 자리에서 앞으로 뛰어나가며 막 문수련의 머리를 후려치려는 그림자를 향해 검을 길게 휘둘렀다.
캉
비록 마나를 불어넣지는 않았지만 힘을 넣어 휘두른 검이 그림자의 발톱에 부딪혀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불꽃을 튀겼다.
“꺄악.”
예상치 못한 습격에 깜짝 놀란 문수련이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비명을 질렀다. 진우의 검에 막혀 습격에 실패한 그림자가 공중에 뜬 자세 그대로 몸을 뒤집더니 이번에는 진우의 머리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진우는 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녀석의 발톱에 등에 매고 있던 활을 고정시킨 끈이 툭 하고 끊어지면서 그의 활이 땅에 떨어졌다. 땅에 내려선 그림자가 잽싸게 달려들어 그 활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진우의 귀에 어디선가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들렸다.
“벨라몽이잖아?”
나타난 맹수를 본 나상진이 소리쳤다. 아니다. 벨라몽이 아니다. 진우는 자신을 향해 팔을 휘두르는 녀석의 겨드랑이 안쪽에 동전 크기의 하얀 반점이 새겨져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벨라몽은 원숭이처럼 생긴 뉴 올림포스 행성의 맹수였다. 케이튼의 대수림에서 진우가 맞섰던 무꿰이들처럼 대여섯 마리가 함께 다니며 집단 사냥을 하는 녀석들이었다.
한 마리 한 마리의 힘은 전문 헌터들이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 녀석들이었지만 무리로 몰려다니는 습성 때문에 혼자서 사냥하기는 어려웠다. 날카로운 앞발 발톱과 구부러진 삽처럼 함께 붙어 있는 뒷발 발톱을 이용하여 사냥감을 해치우고는 깔끔하게 뒤처리를 하는 습성이 있는 놈들이었다.
‘저놈들은 벨라키에르야. 벨라몽이 아니야.’
벨라키에르는 벨라몽과 흡사하게 생겼지만 양쪽 겨드랑이와 발목 뒤에 동전 크기의 하얀 반점 모양으로 털이 나 있었다. 이놈들은 최하급이기는 하지만 맹수가 아니라 마수였다.
힘과 빠르기, 잔인함과 교활함에 있어 벨라몽은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무서운 녀석들이었다. 최소한 발현이 가능한 중급 마나 헌터가 아니라면 이들 무리를 혼자서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녀석들이었다. 하물며 아직 전문 헌터도 아닌 학생들이 이들을 상대하다가는 몰살을 면치 못할 게 뻔했다.
“어? 저 녀석이 진우의 활을 가지고 도망치고 있어.”
안나예가 나무들 사이를 뛰어 넘으며 진우의 활을 쥔 채 빠르게 멀어지고 있는 벨라키에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진우가 놈을 따라 막 쫓아가려고 하는데 주장 나상진이 진우의 팔을 잡았다.
“안 돼. 유인하는 거야. 저녀석들은 사냥감이 많을 경우에는 일부를 떼어 저희 무리가 있는 곳으로 유인하는 습성이 있어. 아쉽겠지만 활은 잊어버려. 네 실력은 알지만 너무 위험하다.”
나상진의 판단은 역시 주장다웠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녀석이 활을 집어드는 순간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울렸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놈은 벨라몽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무슨 소리 못 들었죠? 피리소리 같은 거 말이에요.”
진우의 질문에 일행이 모두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서로를 돌아보며 아무도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한 나상진이 진우에게 되물었다.
“피리 소리? 아무도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지는 않은데?”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체 재구성을 거친 뒤의 진우는 보통 인간들의 가청력 범위를 뛰어넘는 청각을 가지고 있었다. 방금 전의 소리는 역시 동물들이나 들을 수 있는 높은 주파수를 내는 피리였음에 틀림없었다.
“저 활은 소중한 사람에게서 선물 받은 귀한 거라서 잃어버리면 안 되거든요. 죄송하지만 얼른 쫓아가서 찾아올 게요.”
나상진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진우는 나무 위로 뛰어오르더니, 벨라키에르가 나뭇가지를 헤치며 멀리서 도망치는 모습을 확인하고 곧 뒤쫓기 시작했다.
“야, 진우야. 어, 어...”
나상진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지만 진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벨라키에르를 뒤쫓아 사라지고 말았다.
“어떻게 하지? 여기서 진우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이병희의 물음에 나상진은 고개를 흔들더니 할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은 우리가 월등하게 앞서 나가고 있을 거야. 일단 잠시만 쉬면서 진우가 오기를 기다리도록 하자. 너무 오랫동안 소식이 없으면 경기를 포기하더라도 심사위원들에게 연락을 해야 해. 아마 본부에서도 지금 장면을 모두 보고 있을 테니 설마 위험에 처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겠지.”
진우의 단독 행동은 팀원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행동이었지만, 지금까지 진우가 보여줬던 활약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일행은 일단 진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방금 전의 자신감이 무색하게, 초조한 긴장감이 팀원들을 감쌌다.
* * * * *
그 시각, 학교별 사냥터를 감시하는 드론의 조종을 총괄하고 있던 무투 대회 통제 본부에서는 당혹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어, 어. 저거 화면이 왜 저래? 동쪽 숲 사냥터를 감시하던 드론들 영상이 왜 다 꺼진 거야? 빨리 확인해 봐.”
벨라몽 한 마리가 동쪽 숲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던 한국 헌터 학교 학생들을 습격하고, 진우의 활을 훔쳐 달아나는 장면을 모니터링하고 있던 참이었다.
“숲에 벨라몽도 풀어놨네? 저거 조금 위험하잖아? 원래 계획되어 있던 거야?”
통제실장이 옆이 직원에게 물었다.
“네, 그렇기는 한데, 조금 이상하네요. 지금 있는 곳에서 한참 더 가야 나오는 놈인데, 저 녀석이 왜 벌써 저곳에 나타났죠?”
질문을 받은 직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하는 순간, 동쪽 숲을 비추고 있던 드론들의 영상이 일제히 꺼져버린 것이다. 통제실에 난리가 나고, 장치를 점검하느라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지금 숲 속에 들어가 있는 심사위원이 누구지? 선수들 보호하기 위해 한 사람 따라 붙게 되어 있잖아?”
통제실장이 고함을 치자 방금 그의 질문에 대답했던 직원이 말을 받았다.
“한국 헌터 협회장 허진행 위원입니다. 같은 나라 학생들을 보호하겠다고 자원했거든요.”
“그 양반한테 빨리 연락해 봐. 지금 모니터가 나가서 학생들 상황이 확인 안 된다고 말하고, 학생들한테 가서 일단 움직이지 말고 대기하라고 전해달라고 부탁해.”
통신기와 헌터 패드를 양 손에 들고 조작하던 직원이 초조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됩니다. 연락이 안 돼요. 통신기하고 헌터 패드 모두 응답이 없습니다.”
통제실장이 자기 앞에 있던 데스크를 쾅 하고 주먹으로 내리쳤다.
“아니, 벌써 며칠 째 점검을 한 건데 왜 하필 마지막에 말썽인데? 미치겠네, 정말.”
그들이 허둥대는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영국 헌터 학교 교장인 아스탄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헌터 패드 화면 구석에는 조금 전 허진행으로부터 수신된 짤막한 메시지가 깜빡이고 있었다.
“O.K."
특별한 내용이 없는 간단한 메시지였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받자마자 아스탄은 미리 설치해 두었던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동쪽 숲을 감시하던 드론들의 영상과 소리를 차단시켰다.
‘30분이요, 허회장. 그 안에 모든 걸 끝내야 할 거요.’
엷은 미소를 띤 그의 눈 위로 차가운 빛이 반짝이다 사라졌다.
* * * * *
일행들과의 거리가 조금 멀어지자, 진우는 마나를 몸에 돌려 벨라키에르를 쫓던 속도를 높였다. 놈과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지기 시작했다.
5분 정도 도망가는 놈을 뒤쫓아 거의 거리를 좁혔다고 생각한 순간, 나무 위로 이동하던 벨라키에르가 땅 위로 펄쩍 뛰어내렸다. 숲 속에 있는 조그만 공터로 내려선 놈은 도착한 곳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중년의 인간이 검을 뽑아들고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당황하는 눈치였다.
“깩, 깩”
놈이 상대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을 하고 있는 사이, 뒤쫓던 진우 역시 공터로 뛰어 내렸다. 진우가 뛰어내리는 모습을 본 중년의 인물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서와라, 강진우. 기다리고 있었다.”
중년인이 살기어린 미소를 띠며 진우를 향해 말했다.
“허진행.”
진우 역시 얼굴을 굳히고 살기를 드러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허진행이 들고 있던 검을 손바닥에 탁탁 내리치며 입을 열었다.
“골치 아픈 놈 때문에 머리를 좀 많이 썼어. 내가 원래 머리 써서 일을 처리하는 걸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좀 피곤했지. 인사를 나누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까 빨리 끝내자. 나도 급하거든.”
허진행이 씨익 웃으며 품 속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 불었다. 그의 뒤편으로 다섯 마리의 벨라키에르가 나뭇가지를 헤치며 나무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허진행이 들고 있던 피리를 진우에게 보여주며 씩 웃었다.
“벨라키에르의 우두머리가 자신의 무리를 부를 때 내는 소리를 흉내내서 만든 피리지. 이걸 불면 일부러 숲 여기저기에 흩어 놓았던 녀석들을 한 곳에 모을 수 있거든.”
진우가 픽하고 웃었다.
“그래 봤자 최하급 마수다. 그놈들 몇 마리로 나를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허진행이 마주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하, 그래, 처음에는 이놈들만으로 너를 유인해서 해치우려고 했던 게 사실이야. 너를 유인하려고 네 활과 장비 몇 개에 벨라키에르 수컷을 유인하는 암컷의 암내를 살짝 발라 두었거든. 그게 인간에게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 거라서 말이야. 네 녀석이 근처를 지나가면 너를 공격해서 암내가 발린 물건을 빼앗게 하려고 미리 손을 써 두었지. 수컷들은 그 냄새에 환장을 하거든. 근데 네 놈이 근접 전투 결승전에서 마나를 발현하는 것을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어. 이놈들은 오늘 청소부로 쓰기로 했다.”
“청소부?”
“이런, 이런. 공부를 제대로 안 했군. 벨라몽도 그렇지만 벨라키에르들은 기본적으로 습격자야. 이놈들은 다른 사냥감들의 경계심을 없애기 위해서 일단 사냥한 사냥감을 먹어치우고는 그 흔적을 아주 깨끗이 없애는 습성이 있지. 네 놈의 몸을 먹이로 주면 이놈들이 알아서 먹고 나서는 흔적을 없애 줄 거야. 아주 깨끗하게 말이야. 하하하하.”
허진행은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혼자서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러더니 금세 웃음을 멈추고는 진우를 향해 살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네 놈이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더 기다리다가는 내가 꿈자리가 사나울 거 같아서 말이야. 이놈들로는 결과가 확실치 않을 것 같아 오늘 네 놈의 목숨은 내가 직접 거두기로 했다. 뒤처리는 이놈들이 알아서 깨끗하게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자 진우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부를 안 하기는? 나도 물어보자. 그놈들이 왜 너를 공격하지 않고 눈치만 보고 있는지는 혹시 아나?”
“말했잖아. 이놈들은 습격자라니까? 자신들보다 월등히 강한 상대에게는 공격을 하지 않지. 중급 마나 헌터라면 모를까, 나같은 상급 헌터에게는 감히 덤벼들...”
말을 하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허진행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서야 벨라키에르들이 진우를 향해 공격하지 않고 두 사람을 둘러싼 채 눈치만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허진행이 흠칫 하더니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이놈들이 너한테 달려들지 않는 거지? 진우 네 녀석이 설마?”
진우가 검을 바로 세우며 씩 웃었다.
“조승운 교관님하고 멜리사 교관님 말로는 최상급이라고 하던데?”
“거짓말!”
허진행이 비명처럼 고함을 지르는 순간 진우는 이미 빠르게 그를 향해 공격해 들어가고 있었다. 자신의 목을 향해 떨어지는 진우의 검을 다급하게 막아낸 허진행은 일단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하지만 진우는 그에게 틈을 주지 않고 재차 달려들었다.
치열한 공방전이 한 동안 오고갔다. 그러나 승부는 일찍 났다. 허진행은 죽을 힘을 다해 진우의 검을 막아내려고 했지만 결국 진우의 힘과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검을 놓치고 말았다.
비록 상급 헌터였지만, 헌터 협회장을 맡은 뒤 오랫동안 헌팅에 나서지 않은 그로서는 한창 물이 올라가는 진우의 솜씨를 당할 수가 없었다. 검을 잃은 그의 목을 진우의 왼손이 거칠게 움켜잡았다.
허진행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변했다. 그는 억눌린 목으로 간신히 소리를 내어 물었다.
“나를 죽일 건가?”
진우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였다.
“나를 베거나 가격하면 흔적이 남을 텐데? 아무리 벨라키에르가 청소를 잘 한다고 해도 결국 사람들은 내 시체의 일부라도 찾아낼 거야. 몸에 남은 상처를 조사하면 내가 맹수가 아닌 사람에게 살해당했다는 걸 눈치 챌 거다.”
그러자 진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내가 죽이지 않아.”
진우가 말을 마치는 순간 그의 왼손이 잡고 있던 허진행의 목으로부터 체내의 마나가 얼어붙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허진행의 몸 속 마나가 굳어버렸다. 겉으로는 아무런 표시가 나지 않았지만, 허진행은 몸 전체에서 얼음이 얼어붙는 ‘쩡’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진우가 그의 목에서 손을 떼자 허진행은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만 털썩하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요즘 내가 동조의 실마리를 잡아 배운 기술인데 말이야, 상대의 마나를 일정한 시간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얼리는 기술이야. 뭐 굳게 한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당분간 힘은 쓸 수 있어도 마나를 움직이지는 못할 거야. 이걸 당하면 밖에서 볼 때는 마나가 느껴지지 않지. 아마 마나 측정기를 들이대어도 체내 마나량이 거의 제로에 가깝게 나올 거야.”
허진행이 허탈한 표정으로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동조라고? 크크크큭. 마나를 발현시키는 것도 모자라 동조라고? 너 진짜 괴물이구나.”
많은 사람들이 진우에게 내렸던 평가가 다시 허진행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말을 하던 허진행은 문득 주변의 분위기가 변한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동안 관망한 하고 있던 벨라키에르들이 이빨을 드러내고 조금씩 자신의 주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진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허진행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벨라키에르는 마나의 기운을 느끼고 자신보다 세 보이는 상대에겐 공격을 하지 않지. 하지만 그게 느껴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스카디안 행성에서 조승운 교관님이 레드 플라워에게 상처를 입는 것을 본 순간 내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지. 이 일을 꾸민 놈을 잡을 수만 있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를 하고 싶다고 말이야. 사람을 마수의 아가리에 던져 넣는 놈이, 저도 같은 꼴을 당하면 기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어.”
진우는 허진행이 놓쳤던 칼을 집어들었다.
“너는 몰랐겠지만 네가 아스탄 교장과 숲속에서 만난 날, 그 장면을 우리 학교의 학생 하나가 우연히 보았다. 그 사람에게 너와 아스탄 교장이 숲속에서 만난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 네가 과연 무슨 일을 꾸미려고 하는 걸까 고민을 했지. 숙소에 돌아와서 이 행성의 생물들에 관한 책을 들고, 대회 안내 책자를 확인했더니 대충 그림이 그려지더군. 사실 네 놈이 무슨 짓을 꾸미던 다치지 않을 자신은 있었어. 그런데 달리 생각을 해 보니까 네 계획을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진우가 허진행에게서 조금씩 떨어지며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마나를 발현할 수 있는 중급 헌터라는 것을 네가 알게 되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고 다음을 노릴까, 아니면 이 기회에 확실하게 매듭을 짓겠다고 직접 손을 쓰려고 할까? 가능성은 반반이었지. 하지만 장박사 일행의 암살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게 된 너라면 나라도 확실하게 처리하겠다고 하지는 않을까? 그래서 일단 근접 결투 결승전에서 상대의 검을 베어버림으로써 내가 마나 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어. 그 다음은 네가 결정할 일이었다. 그런데 진짜로 직접 나섰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진우가 허진행의 칼을 그의 발끝에 툭 던져 주며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자업자득이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발악을 해 봐라.”
진우는 물러나던 도중 자신의 활을 들고 서 있던 벨라키에르에게 검을 휘둘러 그의 팔을 베었다. 놈의 팔이 땅 위로 툭 하고 떨어지자 재빨리 자신의 활을 집어든 그는 훌쩍 뛰어 허진행이 있는 공터 반대편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공터에 벨라키에르의 잘린 팔에서 쏟아지는 피냄새가 퍼지면서 허진행을 둘러싸고 있던 놈들의 눈가에 붉은 빛이 맴돌았다. 진우가 공터를 떠나자 이를 드러내며 살기를 내뿜던 녀석들이 동시에 허진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아악.”
허진행은 사력을 다해 진우가 던져두고 간 칼을 집어 들어 휘둘렀다. 그러나 마나가 전혀 실리지 않은 그의 칼질은 벨라키에르의 손톱에 힘없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허진행은 마나를 사용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상급 헌터답게 마수의 공격을 한동안 어렵사리 막아내는 듯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벨라키에르의 공격은 점점 거세졌고, 반대로 허진행은 힘이 빠져갔다.
5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허진행이 다급하게 주위를 향해 도리깨질을 하듯 칼을 휘두르는 순간 뒤에 있던 놈 하나가 그의 뒷목으로 발톱을 깊게 찔러넣었다.
“컥.”
허진행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치켜드는데, 앞에 있던 다른 놈 하나가 발톱을 구부려 그의 심장 근처를 움켜쥐듯 뜯어 내었다. 허진행의 가슴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며 그의 몸이 힘없이 땅 위로 쓰러졌다. 그 위로 둘러싸고 있던 벨라키에르들이 한꺼번에 덮쳐들었다.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서 그 모습을 보던 진우는 근처의 나뭇잎에 칼에 묻었던 피를 닦고는 돌아섰다. 허진행의 몸이 벨라키에르들에 의해 삽시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여러조각으로 갈가리 찢겨지는 게 보였다. 시간을 보니 일행을 떠난 뒤로 15분가량이 흐른 듯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하지만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네, 정말.”
눈을 질끈 감은 그는 나뭇가지를 밟으며 동료들이 있던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로부터 15분이 지나자, 본부 통제실의 모니터들이 일제히 다시 기능을 회복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이미 진우는 동료들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 작품 후기 ============================
허진행의 운명은 어차피 여기까지였습니다. 제 구상 속에서 허진행은 사실 그렇게 대단한 인물도 아니었고, 게임으로 치면 중간보스나 될까 말까한 캐릭터였지요. 진우의 성장을 위한 계기를 제공하는 정도의 역할이었는데, 뜻밖에도 이놈 때문에 저도 무진 욕을 먹은 느낌입니다.
가볍게 생각하고 등장시킨 인물 때문에 무겁게 욕을 먹고 나니까 타자를 치는 제 손끝에도 살기가... 흠흠.
사실은 진우가 스카디안 행성에 진입하고 있던 때에 허진행은 이미 제 파일 속에서 죽어 있었습니다. 그 뒤에 글을 하나씩 올리면서 독자들의 반응을 보니 살려두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최근에는 연말이라 저도 글을 아예 못 쓰고 지나가는 날도 있어, 비축분이 많이 줄었습니다. 당분간 휴재 없이 연재하는 것만으로도 그다지 여유가 없을 듯합니다. 혹여 12시가 되도록 제 글이 올라오지 않는 날이 있으면 그 날은 송년회가 늦게까지 달리는 날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늦게라도 돌아와서 올리거나, 그냥 골아 떨어지는 날이면 아침에라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글을 쓰고 또 연재했는데, 한 편 두 편 지나면서 제 미숙한 점이 많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바쁜 일들이 조금 지나가면 전체적으로 앞에 썼던 글들을 약간 손을 볼까 생각중입니다.
가령 포털 이용료 같은 것은 제가 계산을 분명하게 하지 않아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스카디안 행성 파트도 개인적으로 깔끔하게 고쳐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물론 캐릭터가 바뀐다거나 스토리 자체가 흐름이 달라지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그냥 보기 흉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망치로 때리고 대패로 손을 보는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것들은 손을 좀 보아야 할 듯 싶습니다. 그래도 이미 앞글을 보았던 분들이 다시 돌아가서 보아야 이어지는 내용을 알 수 있는 그런 경우는 없을 겁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이미 댓글이 적지 않게 달려서 내용에 손을 보게 되면 그 댓글들이 공중에 뜨게 된다는 거죠. 그것 때문에 사실 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결정이 되어서 수정 작업에 들어가게 되면 후기를 통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연말 연시에 가슴만이라도 따뜻한 만남이 있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