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60화 (60/235)

60화

문수련은 다음날 오전 궁술 개인전 경기장에서 대기하고 있는 진우에게 어제 자신이 보았던 일을 얘기했다. 진우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헌터 협회장인 허진행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국 헌터 학교의 아스탄 교장하고요?”

“응. 나는 처음에 허진행 혼자 밤에 숲속을 다녀오는 건줄 알았는데, 조금 뒤에 허진행이 나왔던 곳과 비슷한 곳에서 아스탄 교장이 나타나더라고. 아무래도 둘이 늦은 시간에 만났던 것 같았어.”

진우는 고개를 수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스탄 교장은 이번 대회를 주관하는 영국 헌터 학교의 교장이다.

대회의 진행 자체를 총괄하고 있는 책임자이다. 그 얘기는 본인이 원한다면 앞으로 있을 경기에서 몇 가지 수작을 부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사람이 허진행과 만나서 일을 꾸민다면 과연 어떤 일일까?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실은 꾸밀 수 있는 일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딱히 짐작이 가는 것이 없었다.

진우는 가능성을 자신을 해치는 쪽으로 좁혀 보았다. 스카디안에서 벌어졌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조승운, 그리고 장박사 부녀 넷이었다.

그 가운데 장박사 부녀에 대해서는 이미 암살 시도가 있었다. 그렇다면 허진행이 이번에는 자신을 노리고 일을 꾸미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가능성을 자신에게로 좁히자, 아스탄 교장이 적극 협력한다는 가정 아래, 허진행이 시도할 수 있는 일들이 몇 가지 떠올랐다. 개인전 결승에서 아예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목숨을 노리게 만든다? 진우는 머리를 저었다.

그건 허진행과 아스탄 둘이서 공모를 한다고 해서 쉽게 꾸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대 선수를 매수해야 하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과연 진우가 결승에 오를 수 있을지, 또는 그의 상대가 될 선수가 될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 사이에 상대 선수를 살인을 마다 않을 정도로 매수한다는 것은 아무리 교활한 허진행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진우는 계속해서 머리 속으로 몇 가지 가능성들을 검토하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게 가능한 일일지, 혹은 과연 효과가 있을 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  * * * *

궁술 개인전 3,4위 전이 끝난 뒤 바로 치러진 결승전은 그다지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아니었다. 불과 5분 만에 끝난 결승전보다는 차라리 그 전에 펼쳐진 3,4위 결정전이 보는 재미는 훨씬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3,4위 전에 나섰던 두 선수는 제한 시간을 거의 채울 때까지 숨막히는 시소 게임을 벌이다 결국 캐나다 대표가 5:4라는 점수로 막판 역전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하며 3위를 차지했다.

반면에 진우가 나선 결승전은 상대 선수가 계속해서 경기장에 설치된 기둥 뒤로만 옮겨 다니며 방어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바람에 초반 경기가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결국 3초 룰에 따라 기둥이 세 개나 사라지는 수모를 겪은 상대는 진우의 활에서 쏘아지는 연사를 막지 못하고 5:0이라는 일방적인 점수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최초의 1학년 대표가 거둔 최초의 1학년 우승이었다. 관객석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경기를 마친 진우는 이번에는 경기장 안으로 거의 난입하다시피 쳐들어온 연합회 방송팀과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지 못했다. 활을 채 내려놓지도 못한 상태에서 거의 30분 가량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을 해야 했던 그는, 오후의 근접 전투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며 억지로 기자들을 떼 놓은 진승훈 교관 덕분에 간신히 경기장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장비를 정리하자마자 식당에 들러 짧은 시간 동안 점심 식사를 마친 진우는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어제 장박사가 준 책을 펼쳐 보았다. 거기서 필요한 항목을 확인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허진행이 생각할 만한 일이었다. 더구나 대회 주관 학교인 영국 헌터학교의 아스턴 교장이 협조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책에서 고개를 든 진우의 눈에서 무거운 빛이 흘렀다.

‘가능성이기는 하지만, 만약 허진행 당신이 정말로 그렇게 일을 벌인다면, 나도 망설일 이유가 없지.’

그는 자신의 옆에 놓여 있던 검을 세게 움켜잡았다.

*  * * * *

기본적으로 이번 무투 대회에서 자신의 실력을 어느 정도 드러냄으로써 허진행을 자극한다는 진우의 계획은 본래 허진행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도록 유도하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만약 허진행이 직접 흉계를 꾸며 실행한다면, 그 기회를 역으로 이용해 허진행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는 증거를 잡겠다는 생각이었다.

스카디안에서의 일은 상황이 정확하게 어떤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다소 급하게 일이 진행되었던 터라 그 일이 허진행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밝혀낼 결정적인 증거를 잡지 못했다. 허진행이 따로 증거를 남기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사실상 함께 있던 헌터들을 살해한 것은 결국 진우 자신과 조승운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밝히기 어려운 점도 있었다.

결국 장박사와 소현, 그리고 조승운의 증언만으로 허진행을 끌어내리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허진행은 아직 진우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위해를 가하려는 행동을 하더라도, 진우로서는 충분히 주의를 하기만 한다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는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것은 진우의 생각일 뿐, 조승운은 그런 진우의 행동을 적극 말렸었다. 자신이 알아서 허진행의 발톱을 뽑아버릴 테니 진우는 행여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막은 것이다.

물론 진우가 아무리 허진행을 자극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정말로 어떤 행동을 취하리라는 보장도 정확히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던 것이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조승운은 정말 모든 인맥과 자금을 동원하여 허진행을 압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역시 허진행은 교활했다. 기업가들을 충동질하여 자신의 위기를 타개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역으로 헌터들을 동원해서 지구에 있던 장박사와 장소현을 암살하려는 시도를 했다.

김상곤과 그 클랜원들의 활약으로 다행히 화를 면한 장박사 부녀가 뉴올림포스로 피신하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허진행이 결국 그들을 노렸다는 사실은 진우에게 무거운 의미로 다가왔다. 그리고 문수련의 목격담이 사실이라면, 또, 진우의 짐작이 맞다면, 허진행은 이곳에서도 자신을 해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음이 분명했다. 진우는 여기에서 악연의 고리를 끊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허진행이 어디까지 자신을 몰아 붙이느냐에 달린 일이었다. 진우는 그의 계획에 맞추어 거기에 맞게 대응하기로 했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이미 준비한 기술도 있었다. 만약 허진행이 자신의 짐작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칼날을 들이민다면, 자신도 그에 맞는 칼날을 휘두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  * * * *

오후에 벌어진 근접 전투 결승전의 상대는 일본 헌터 학교 대표로 나온 나가요시 쯔루였다. 그는 일본 전통 사무라이들처럼 허리 양쪽에 커다란 일본도와 작은 소도를 찬 상태로 경기장에 들어섰다.

“조심해라 애송이, 너도 잘못하면 어제의 그 바보 녀석보다 더 크게 다칠 수도 있어.”

녀석이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로 진우를 향해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진우는 그 말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녀석은 오늘 진우가 세운 계획의 희생양일 뿐이었다.

진우는 이 시합을 통해 상대가 아니라 허진행에게 뭔가를 보여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상대가 어제 나상진에게 한 짓으로 보아 크게 미안해 할 이유도 없었다.

진우는 상대의 말을 무시하고 검을 들어 중단에 세웠다. 그리고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상대를 향해 까닥였다. 들어오라는 표시였다. 나가요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건방진 자식. 기고만장했구나.”

나가요시가 일본도를 뽑아 오른쪽 상단으로 비스듬히 치켜들더니 빠른 속도로 달려들었다. 거리를 잡은 그의 칼이 진우를 향해 시린 빛을 뿌리며 사납게 베어 들어왔다. 성격은 좋지 못한 것 같았지만 솜씨는 나무랄 데 없었다. 그가 내려치는 칼을 향해 진우의 검이 빛살처럼 마주쳐 갔다.

서걱

칼날이 부딪힐 때 터지는 불꽃도, 요란한 충돌음도 들리지 않았다. 진우가 휘두른 검에 나가요시의 일본도가 허리부터 뎅겅 베어지는 소리에 이어 잠시 후 잘려진 그의 칼끝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캉’하고 경기장을 울렸다.

주위가 정적에 빠졌다. 마치 누군가가 갑자기 구경하던 사람들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은 것처럼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도 못한 채 입만 벌리고 멍한 눈으로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진우의 검날이 나가요시의 목 옆에 바짝 붙은 채로 어깨 위에 올려졌다. 그때까지도 그는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못하고 그저 초점이 풀린 눈으로 자신의 잘려진 일본도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겨, 경기 종료. 한국 대표 강진우 승”

지켜보던 심사위원이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진우의 승리를 선언하자, 관객석에서 폭발하듯 함성이 터져나왔다.

“저거 봤어 지금? 저거 분명 마나를 발현시켜 상대의 칼을 베어버린 것 같은데?”

“학생들 경기에서 마나를 발현시켜? 마나를 각성한 것도 아니고 발현이라고?”

믿기지 않은 광경을 접하고 한동안 침묵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열어 자신들이 방금 보았던 장면이 사실인지를 서로 확인하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1학년 대표가 경기를 우승했다는 것과는 전해주는 의미 자체가 달랐다.

놀라움은 일반 관객이 아니라 헌터 학교 관계자들에게 더 컸다. 그들 역시 방금 목격한 사실을 스스로에게 이해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소란이 가라앉지 않자 대회 진행 측에서 몇 번이나 정숙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장내가 아직 진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우는 검을 거두고 관객과 심사위원들에게 인사를 한 뒤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진승훈 교관과 나상진을 비롯한 동료들도 입을 쩍 벌린 채 자신들 곁을 지나가는 진우를 붙잡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나가요시 쯔루는 여전히 경기장에 선 채 움직일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깜짝쇼를 끝으로 근접 전투 종목의 최종 우승자가 결정되었다. 1학년 학생으로서 마나를 발현시킨 강진우의 승리였다.

*  * * * *

허진행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면서도 방금 눈앞에서 펼쳐진 일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강진우가 마나를 발현시킬 수 있는 헌터였다.

최소한 중급 헌터라는 얘기였다. 그의 머리가 한동안 방금 목격한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것이었다. 저 녀석이 바로 진짜 변수였다. 스카디안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저 녀석이 조승운의 숨겨둔 칼의 역할을 했을 게 틀림없었다.

세상이 이제 고작 헌터 학교 1학년에 불과한 어린 녀석이 벌써 마나를 발현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을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자신이 보냈던 헌터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마도 저 녀석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불의의 일격을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조승운 영감이 왜 굳이 저 어린 녀석을 데리고 위험할 수도 있는 스카디안으로 갔는지가 비로소 명백해졌다.

“허회장, 어디를 가시오? 지금 저 학생이 마나 헌터라는 게 사실입니까?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뒤에서 도인호 장관이 당황해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허진행은 서둘러 관객석을 떠났다. 일단은 상황을 다시 정리해야 했다.

강진우가 마나 발현이 가능한 중급 헌터라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그동안 계획했던 일이 아주 우습게 되었다. 조승운의 계획을 멋지게 부수었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전체적인 흐름은 이미 자신에게로 가져왔는데도, 세부적인 일들이 마무리가 잘 되지 않고 자꾸 걸리적거리고 있었다.

‘녀석이 중급 헌터라면 애초의 계획대로 실행이 된다고 해도 놈을 제거하기는 어려워. 장박사 부녀의 일은 지구로 돌아간 뒤에 시간을 두고 해결해도 된다. 조승운이라고 해서 그들을 천 년 만 년 보호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강진우 그 녀석은 그냥 두어서는 안 돼. 지금도 저렇게 대단한 녀석이 내년에는 어디까지 성장할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조승운만 해도 막바지에 몰리면 직접 칼을 들고 자신을 찾아올 수도 있었다. 나이도 있고 이제까지 살아온 방식이 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적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만약의 경우를 가정해서 지금도 늘 대비를 하고 있었다. 헌터들은 결국 최후에는 힘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지구에서라면 아무리 최상급 헌터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저 어린 녀석이 더 성장해서 조승운과 비슷한 실력을 가지게 된다면? 조승운처럼 노회한 늙은이가 아니라 자신의 힘에 취하기 쉬운 젊은 놈이 꼭지가 돌아 버린다면?

지금쯤 녀석도 자신이 장박사 일행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강진우가 소현과 가깝게 지내는 것 같다는 보고도 받은 적이 있었다. 아직은 자신의 힘으로 녀석을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녀석이 지금처럼 빠른 속도로 성장해서 조만간에 자신을 능가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면?

허진행은 갑자기 몸이 으스스 떨리는 한기를 느꼈다. 충분하게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게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허진행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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