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안나예는 안타깝게도 궁술 개인전 본선에 진출하지 못했다. 나름 나쁘지 않은 경기를 펼쳤는데도 결국 32위 안에 드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45위를 기록했으니, 조금만 더 운이 좋았다면 본선 진출을 기대할 수도 있었던 성적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그 점에 대해 크게 아쉬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깝기는 하지만 할 수 없지. 하지만 단체전에서는 더 잘 할게. 진우 넌 꼭 우승해라. 파이팅!”
그녀는 나름 쿨하게 자신의 아쉬움을 떨쳐버리고 대신 진우를 응원해 주었다. 헌터들은 대개 팀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단체전 우승자 명단에 오르는 것만 해도 졸업 후의 진로에 상당히 도움이 되기는 했다.
특히 팀에서 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궁수의 존재라는 것은 실제 헌팅에서 대단히 중요했기 때문에 단체전에서의 역할에 집중하겠다는 그녀의 생각은 은 옳은 것이었다.
1학년 학생이 학교 대표로 처음 출전한 것도 모자라, 첫날 궁술 개인전 예선에서 1위를 차지해 버리자 진우에 대한 관심도가 급상승했다. 전체 대회에 대한 촬영과 기록을 맡은 연합회 방송 팀에서 인터뷰를 하자는 요청이 들어왔지만 진우는 일단 사양했다. 방송 팀에는 대회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다고 변명을 했다.
물론 대회 우승까지 차지한다면 인터뷰를 끝까지 거절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무투 대회에 몰린 일반의 관심이 예전과는 달리 높았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거둔 사람들은 어느 정도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진우로서는 인터뷰를 할 때 하더라도 이왕이면 근접 전투 시합을 끝낸 뒤에 하고 싶었다. 멜리사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번 시합에서 그는 궁술보다는 검술로 자신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 * * * *
김상곤을 비롯한 ‘곤’ 클랜원 6명은 장수덕 박사와 그의 딸을 2교대로 24시간 경호했다. 클랜 대표인 김상곤과 부대표 최진덕이 교대로 장수덕 박사를 맡고, 여성인 박화정과 원혜수가 그의 딸 장소현을 맡아 역시 교대로 밀착 경호했다.
궁수인 임지근과 창술사인 손주원은 언제든지 출동 가능한 상태로 밴 안에서 번갈아 가며 상황 통제를 맡았다.
김상곤의 지시로 밴은 늘 장박사의 집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주차시켜 놓고 대기 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항상 두 명의 클랜원 만이 장박사 부녀를 밀착 경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밀착 경호를 끝내고 나서도 클랜원들은 모두 한 달째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밴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그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 경호를 마치고 이동할 때에도 꽤나 복잡한 경로를 거쳐 밴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밴의 위치도 수시로 바꾸었다.
하필 경호를 시작한 때가 연말 연시라서 클랜원들은 모처럼 지구에서 이십일 가까이 지내면서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자신들이 지구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집에 들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기가 난처했기 때문이었다.
말은 안 하지만 경호에 사용하는 통신기 외에는 전화기도 사용하지 않는 그들을 본 장박사와 소현도 대충 사정을 짐작하고 되도록 쓸 데 없는 외출을 삼갔다. 방학이 되면서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학교에 나갈 이유는 없었기 때문에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집에서만 웅크리고 있는 기간이 한 달쯤 되어갈 때, 장박사가 어쩔 수 없이 외출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내일 오후에 대전에 있는 카이스트에서 외계 생물학 심포지움이 있습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이번에 발표될 논문에 대한 논평자로 선정되어 있어 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경호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장수덕 박사가 알게 모르게 신경 쓴 것을 클랜원들도 모르지 않았다. 김상곤은 별 말 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저 알았다고만 대답했다.
대전에는 장소현도 동행하기로 했다. 그녀의 전공도 아버지와 같은 외계 생물학이어서 심포지움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집을 떠나 찬바람을 쐬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곤’ 클랜의 입장에서도 경호 대상이 둘로 분산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점도 있었다.
다음날, 카이스트에서 일정을 마치고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일행이 오후 8시쯤 서울을 향해 출발할 때까지도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행을 태운 무중력 자가용이 대전을 출발한지 10분 쯤 지났을 때, 차량은 세종시를 지나 오른쪽으로 야트막한 구릉을 끼고 서울을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김상곤이 운전대를 잡고 그 옆에 박화정이 앉아 있었다. 장박사와 소현은 둘 다 뒷자석에 타고 있었다. 차가 구릉을 크게 돌아 서울로 방향을 잡고 나아가려고 할 때 갑자기 경고음이 울리면서 왼쪽 뒤에서 미니 버스처럼 생긴 무중력 차가 일행이 탄 자가용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접근해 왔다.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세요.”
이상을 느낀 김상곤이 급히 핸들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틀며 뒷자석에 대고 소리쳤다. 장수덕 박사와 장소현이 좌석 밑으로 바짝 몸을 붙이는 순간 ‘쿵’하며 자동차 뒤에 뭔가가 무겁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무중력 자가용이 거칠게 흔들리자 장소현이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빌어먹을. 다행이 조용하다 싶었더니, 노리고 있었구나.’
무중력 자동차들은 워낙 빠른 속도로 지면 가까이에 떠서 움직이기 때문에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자동 거리 유지 장치가 의무적으로 부착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자동차들 사이의 거리가 일정 간격 이상으로 가까워지면 경고를 울리면서 저절로 속도를 줄이게 되어 있었다.
지금처럼 뒤에서 오는 자동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추돌을 하는 경우는 하나밖에 없었다. 작정하고 자동 거리 유지 장치를 꺼버리고 덤벼드는 것이다.
김상곤은 상대 차량에 계속 신경을 쓰면서 통신기의 스위치를 켜고 손주원을 불렀다.
“지금 어디 있나?”
“현재 속도로 대략 5분 거리에서 뒤쫓아 가고 있습니다.”
김상곤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깃든 것을 느낀 손주원이 급하게 대답했다.
“미니 버스 한 대로부터 뒤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 일단 지상에 착륙할 테니 주변을 살피면서 최대한 빨리 합류하도록 해라.”
“네.”
상대가 무식하게 자동차를 밀고 들어오는 상태에서 계속 부유 운행을 하는 것은 위험했다. 자칫 공중에 뜬 상태로 차가 뒤집어져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무중력 자동차는 뒤집힐 경우 통제가 불가능했다. 김상곤은 뒤에서 오는 차를 예의 주시하며 일행이 탄 차의 방향을 구릉 쪽으로 틀었다.
장박사 일행을 태운 차가 지상에 내려 앉을 듯한 움직임을 보이자, 뒤따라오던 미니 버스도 더 이상 추돌을 시도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왔다.
어둠 속에서 오른쪽으로 울창한 숲의 윤곽이 어슴푸레 보이는 언덕 위에 차를 완전히 착륙시킨 김상곤은 좌석 사이에 끼워 두었던 자신의 대검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박화정도 왼 손에 작은 손 방패를 낀 채 오른손에 손잡이까지 70cm 정도 되는 길이의 중검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치료사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마나를 발현할 수 있는 마나 헌터였다. 치료사로 각성하기 전까지 즐겨 사용하던 무기가 바로 검과 방패였다.
장박사 일행이 탄 차를 뒤이어 상대편의 미니 버스도 땅 위에 내려섰다. 곧바로 버스의 문이 열리더니 스무 명 가까운 사람들이 우루루 차에서 내려섰다. 모두 손에 칼과 창, 도끼 등의 무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총도 몇 자루 보였다. 그 중 제일 선두에 선 인물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윤치수. 너희 아이들이 허진행의 엉덩이를 닦아주기로 한 건가?”
그러자 선두에 있던 사내, 윤치수가 싱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안녕하시오, 선배. 선배가 여기 있는 걸 보니 조승운 영감이 꽤 신경을 썼나 보네?”
“내가 여기 있는 걸 알면서도 나선 걸 보니 준비를 많이 했나 보구나?”
그러자 윤치수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지구에서의 싸움에서 준비랄 게 뭐 있겠소? 아이들 좀 늘리고 총을 준비했지.”
김상곤의 눈이 꿈틀거렸다. 외계 행성에서 포식자를 사냥할 때에는 총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일정 수준 이상의 헌터들로 구성된 헌팅 클랜에서는 사냥에 나설 때에도 총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총기를 가지고 다니는 경우에도, 사냥을 마치고 귀환한 헌터들은 개인 소장이 가능한 다른 무기들과는 달리 총기만은 귀환 즉시 헌터 협회에 예치하도록 규정이 정해져 있었다.
한국에서는 아직 공기총이 아닌 전투 살상용 총기를 일반인이 개인적으로 소장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헌터 협회 자체는 비록 민간단체였지만, 정부로부터 권한과 책임을 위임받아 헌터들의 총기를 관리했다.
헌터라는 직업의 특성을 고려한 정책이었다.
“허진행이 총을 내 준 모양이군.”
“협회장 얘기는 왜 자꾸 꺼내시오? 무슨 개인적인 불만이라도 있소?”
김상곤은 픽하고 웃고 말았다. 차에서 내리면서 전면과 후변에 장착된 블랙박스를 동시에 작동시켜 두었었다. 녹음 기능까지 있는 장치였다. 나중을 대비해서 증거를 남기려고 했는데, 역시 영악한 녀석이라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한테는 총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여기는 지구 아니오? 당분간은 버틸지 모르겠지만, 뭐 마나를 회복할 수 없으니 언젠가는 통하지 않겠소? 어디 한 번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견뎌 보시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 서 있던 녀석 가운데 몇 명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전부 소음장치가 달린 총이었다.
박화정과 김상곤은 이미 상대의 총을 보고 몸에 마나를 발현시켜 둔 상태였기 때문에 각각 방패와 대검으로 최대한 총알을 막으면서 상대를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총을 든 녀석들을 먼저 제거할 생각이었지만 윤치수를 비롯한 녀석의 일행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오랜만에 만났으면 몸이나 같이 풀어봐야지. 뭐가 그리 급하시오?”
김상곤을 가로막은 윤치수가 득의만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녀석도 이미 몸에 마나를 발현시키고 있었다.
김상곤은 상급 마나 헌터였다. 반면에 윤치수는 중상급이라고 할 수는 있을 정도로 실력이 좋았지만 여전히 중급 헌터에 머물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일대일 대결에서 김상곤을 이긴다는 것은 아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단지 방어에만 치중하며 버티는 것이라면, 김상곤도 그를 단시간 내에 쓰러뜨리기는 어려웠다.
문제는 시간이 윤치수의 편에 있다는 점이었다.
장박사와 소현이 탄 차량은 방탄이었기 때문에 총알에 의해 쉽게 뚫릴 걱정은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직접 마나를 이용해 차량 문짝이나 창문을 부수어 버린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숫자가 훨씬 많았다.
신속하게 총기를 든 녀석들을 제거하려고 했던 박화정과 김상곤은 최초의 공격이 막히자 차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일단 수비에 중점을 두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을 조롱하듯 윤치수 일행은 중급 헌터들이 교대로 공격을 감행하며 두 사람의 마나를 소진시키는 작전을 펼쳤다.
놈들의 총이 차량에 사격을 가하는 사이사이, 틈만 나면 김상곤과 박화정을 향해 총알을 날리는 것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윤치수까지 중급 헌터만 여섯 명이다. 역시 허진행이군. 준비를 철저히 했어.’
윤치수 일행에 속한 중급 헌터들도 마나를 회복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상대는 교대로 공격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상곤과 박화정의 마나 소모 속도가 훨씬 빨랐다. 하급 헌터들로 구성된 나머지 일행은 처음부터 직접 덤벼들지 않고 주위를 빙 둘러싼 채 혹시 모를 탈출 시도를 저지하고 있었다.
그 중 절반 정도는 계속 탄창을 갈아 끼며 사격을 하고 있었다.
대치 상태와 비슷한 공방이 3분가량 지속되었다. 잠시 교대하여 뒤로 물러서 있던 윤치수의 입꼬리에 득의양양한 웃음이 떠올랐다.
‘얼마 남지 않았다. 잘 하면 오늘 상급 헌터가 총에 맞아 죽는 꼴을 볼 수도 있겠군.’
윤치수가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는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향해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온 몸에 마나를 끌어올리며 뒤돌아서는 순간 관자놀이에 총알이 ‘퍽’하고 부딪치는 게 느껴졌다.
마나를 이용해 방어했지만 순간적으로 고개가 움찔하며 흔들렸다.
“누구냐? 누가 이쪽으로 총을 쏜 거야?”
다짜고짜 고함을 지르던 그의 눈에 소리를 죽이며 땅 위에 내려서고 있는 밴 한 대가 보였다. 밴의 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세 사람이 자신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차가 완전히 착륙하자 밴의 문과 운전석이 동시에 열리면서 운전자까지 포함해서 총기를 손에 든 네 명이 내렸다. 윤치수 일행 가운데 총을 들고 있던 녀석들이 재빨리 그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동시에 밴에서 내린 네 명도 총을 쏘기 시작했다.
픽, 픽, 픽.
소음기가 장착된 총에서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가 조그만 공터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싸움은 곧 일방적인 결과로 끝이 났다. 밴에서 내린 네 사람은 모두 멀쩡한 반면에, 윤치수 일행은 중급 헌터 여섯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나 둘 피를 흘리며 땅에 쓰러지고 말았다.
장 내에는 삽시간에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들이 흘리는 피 냄새가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윤치수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김상곤에게 물었다.
“일행이 모두 근처에 있었군. 습격을 확신하고 있었나?”
김상곤이 피식 웃더니 대답을 했다.
“경호하는 입장에서 습격에 대한 확신 같은 게 필요한가? 무조건 최악을 가정하는 거지. 덕분에 지난 한 달 간 침대 위에서 자본 적이 없다. 다 네놈들 덕분이지.”
“총을 어떻게 구했지?”
“잊고 있었나 보군. 헌터 학교에도 총은 많아. 펄스너 교장이 손을 써 줬지. 아무래도 허진행이 신사는 아니니까 말야. 혹시 몰라서 우리도 좀 준비를 했어.”
윤치수는 허탈하게 웃었다. 처음 허진행이 여러 가지 당근을 제시하면서 장박사 부녀에 대한 암살을 제안했을 때, 한편으로는 혹하면서도 김상곤이 그들을 경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소 망설였었다.
지구에서의 싸움이 외계 행성과는 다른 조건이라고 해도, 김상곤은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였다. 거기에 허진행이 자신의 클랜원 말고도 두 명의 중급 헌터와 총기 지원을 약속했다.
김상곤의 클랜이 6명의 중급 이상의 헌터로만 구성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인원은 그 세 배가 넘었다. 게다가 지구에서의 싸움에 총기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제안을 수락하고 나서 한 달 가까이 감시와 관찰을 통해 실제로 장박사 부녀를 밀착 경호하는 인원은 늘 두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다른 일행들이 가까운 곳에서 대기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10분만 시간이 주어져도 의뢰를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다.
의뢰를 시작한 후, 윤치수는 섣불리 덤벼들지 않고 기회가 오르기만을 끈질기게 기다렸다.
벼르고 벼르던 기회가 마침내 찾아왔다. 관찰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갈 때, 드디어 장박사 부녀가 서울을 떠나 대전으로 향했다.
수하들을 모두 불러 모은 윤치수는 대전을 떠나 움직이는 장박사 일행이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날 때를 노려 급습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예상대로 일이 풀려갔다. 그런데 뒤따라 온 김상곤의 일행이 예상치 못하게 총을 들고 나오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하급 마나헌터들은 총알을 막아내지 못하고 순식간에 전멸했다.
윤치수는 자신의 대도를 치켜들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육대 육이니 해볼 만은 하겠군. 총으로 그냥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게 되었소.”
김상곤이 마주 웃으며 검을 세웠다.
“그 총알 막느나 마나를 좀 썼더니 피곤하다. 빨리 끝내자.”
윤치수와 김상곤이 동시에 상대를 향해 칼을 휘둘며 격돌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각자의 상대를 향해 몸을 부딪혀 갔다. 어두운 산등성이에서 때 아니게 쇠와 쇠가 부딪히면서 튀어나오는 불꽃과 함께 요란한 충돌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 *
“지금 우리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일행 모두를 태운 커다란 밴 안에서 장박사가 김상곤에게 물었다. 차의 방향이 다시 대전쪽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치수 일행을 정리하고, 구덩이를 파 시체를 모두 묻은 뒤, 그들이 타고 온 미니 버스를 적당한 곳에 버려 두느라 제법 시간이 지나 벌써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장박사와 소현을 태웠던 자동차가 비록 방탄이라고는 하나 여기저기 총알 자국이 가득한 터라 그대로 끌고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클랜원들이 타고 왔던 밴에도 상대가 쏜 총 때문에 여기저기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김상곤은 대전 근처의 한적한 도로까지 두 차를 끌고 간 뒤, 전화를 걸어 누군가를 불렀다. 박화정이 부상을 당한 클랜원들을 치료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동안 래커차 두 대와 커다란 밴 하나가 도착하더니 일행이 탔던 차에다 커다란 덮개를 씌우고는 끌고 가버렸다.
그들이 남기고 간 밴에 김상곤을 비롯한 클랜원과 장박사 부녀가 모두 올라타자, 김사곤은 차의 방향을 대전 쪽으로 돌렸다.
“헌터 양성소로 갑니다.”
“네? 서울로 가는 게 아닙니까?”
“일단, 그곳에서 펄스너 교장을 만나 빌렸던 총기를 반납해야 합니다. 공식적인 반출이 아니었기 때문에 되도록 빨리 총기를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포털을 타고 뉴 올림포스 행성으로 갈 겁니다.”
“거기는 무투대회가 열리고 있는 곳이 아닌가요?”
“네. 어차피 이번 일로 저희들 모두 마나 소모가 상당했습니다. 허진행이 무언가를 더 준비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지금 상태로는 최적의 경호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허진행이 지구에 없는 동안 무슨 일이 발생하면 일단 그곳으로 모시라는 스승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저희도 마나를 회복해야 하니 겸사겸사 그곳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뉴 올림포스 행성은 여러 나라에서 중요 인사들이 많이 와 있었기 때문에 경호가 상당히 강화된 상태였다. 허진행 역시 다른 수하들 없이 대회 심사위원 자격으로 혼자 가 있는 터라 직접 손을 쓰지 않는 한 이들에게 위협을 가할 다른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조승운은 그런 점을 고려하여 만약 자신이 지구를 떠난 뒤에 어떤 위험이 닥치면, 일단 뉴 올림포스 행성으로 장박사 부녀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저, 비용이...”
“스승님께서 이미 포털 이용에 필요한 마나스톤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체류 비용도 준비가 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승운은 뉴 올림포스 행성으로 떠나기 전에 타르코스 소장에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마나스톤과 소정의 돈을 맡기고, 그 사실을 미리 김상곤에게 일러주고 갔다. 헌터 양성소에 있는 포털을 이용하려면 어차피 타르코스 소장의 도움을 받는 것이 편했기 때문에 그렇게 일을 처리한 것이다.
장박사는 조승운의 배려에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보답하기도 어려운 은혜를 계속 입은 셈이었다. 하지만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옆에 앉아 있는 딸 소현이를 보니 차마 사양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잠긴 장박사의 옆 얼굴을 힐끗 바라본 김상곤은 내심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 이유가 어찌 보면 스승인 조승운에게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스승의 말년이 이상한 놈 하나 때문에 참으로 고단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 타르코스 소장과 펄스너 교장에게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포털 이동을 위한 준비를 부탁했다.
어두운 지형 너머로 대전 시내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항상 후기를 쓰기 전에는 할 말이 무척 많을 것 같은데, 막상 글을 올리고 나면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네요. 그저 더 잘 써야 하겠다는 생각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