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헌터 학교 대항 무투 대회는 전 세계에 있는 헌터 학교 학생들에게는 일종의 올림픽과 같은 행사였다. 전 세계에 있는 120개의 헌터 학교에서 2년에 한 번씩 각각 8명의 대표 선수들을 출전시켜, 전체 1,0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서로의 기량을 겨루는 대회였다.
세계적으로 국가의 수는 200 개 나라가 넘었지만, 실제로 설립된 헌터 학교의 수는 120개에 불과했다. 중국의 경우 한 나라에만 네 곳의 헌터 학교가 있었고, 미국과 인도 등에는 2개의 헌터 학교가 세워졌다.
반면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나 버진 아일랜드 같은 소국에는 헌터 학교가 한 곳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나라는 인근의 다른 국가의 헌터 학교로 학생들을 보냈다.
종목은 개인전에서 궁술, 근접 전투, 추적술의 세 가지와 학교별 단체 대항전을 합해서 네 가지밖에 되지 않았지만, 우승할 경우 개인과 학교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확실한 기회라는 점에서 전 세계의 헌터 학교 관계자들은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이 높았다. 특히 일반인들에게는 평소 잘 소개되지 않는 헌터들의 일면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사람들 중에는 이 대회를 ‘헌터 올림픽’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아직 정식 헌터가 되지 않은 학생들 간의 일종의 아마추어 대회라는 점을 들어 대개는 그냥 ‘무투 대회’라고 간단히 부르고는 했다.
값비싼 포털 이용료라는 경제적인 장벽 때문에 일반인들이 관람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 방송국에서조차 학생들의 대회인 무투 대회를 중계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의 중계 인원을 보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헌터 학교 연합회 측에서 자체적으로 설치한 수많은 카메라들을 통해 촬영된 영상을 편집해서 방송국에 보내면, 방송국 측에서는 이 영상을 활용해서 녹화방송의 형태로 무투대회를 소개했다.
무투 대회 개회식은 뉴 올림포스 행성의 ‘센트럴 타워’에 있는 ‘크리스털 볼륨’이라는 커다란 연회실에서 개최되었다. 내심 올림픽처럼 선수단 입장과 같은 행사를 예상하고 있던 진우에게는 학교별로 간단한 음료와 간식 거리가 제공된 테이블에 모여 앉아 마치 공연을 구경하듯 진행되는 개회식이 다소 뜻밖이었다.
연회실 중앙 천장에는 마나 크리스털을 모방한 듯한 다양한 색깔의 수정들을 모아 만든 커다란 샹델리에가 높게 매달려 있었다. 곳곳에 화려한 장식과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도 처음 보는 신기한 재질의 천으로 만들어 진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우아하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를 풍기는 연회실은 지구의 어느 고급 호텔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 크기와 고급스러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야, 듣던 것보다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치?”
진우의 옆자리에 앉은 안나예는 연신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며 고개를 가만히 두지 못했다.
“이번 대회는 다른 때와는 달리 각국의 정부 인사와 기업 임원들이 많이 참관 신청을 한 모양이야. 우리나라에서도 산업자원부 장관이 왔고, 오성을 비롯한 여러 대기업에서 한두 명씩 임원을 파견했잖아. 그 사람들만 해도 참가 학생 수보다 훨씬 많다고 하더라.”
창술이 특기인 이병희가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실제로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몰려드는 바람에 선수단과 임원들의 숙소로 예정된 ‘센트럴 타워’ 이외에도, 평소에는 경제적인 여유가 많지 않은 헌터들의 숙소로 쓰이는 다소 허름한 곳까지 방이 모두 동이 났다는 말을 들었다. 뉴 올림포스 행성에는 일 년 내내 여러 가지 목적으로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센트럴 타워를 비롯한 5 개의 숙소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곳들이 모두 만원이 된 것은, 이 행성을 개척하기 시작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대회 참가 학생들의 숙소는 모두 시설이 좋은 센트럴 타워로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나중에야 참관 신청을 한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쩔 수 없이 센트럴 타워 밖에서 묵을 곳을 찾아야 했다.
“이번 대회 우승자에게는 여러 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할 거라는 얘기가 있던데?”
특이하게 경찰들이 쓰는 진압봉인 톤파를 사용하는 민아라가 속삭이듯 얘기를 했다. 그 얘기를 들은 다른 학생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들 알고 있는 눈치였다.
무투 대회 대표로 선발된 학생들은 방학이 시작되고 나서도 남들처럼 귀가 휴가를 즐기지 못하고, 대회가 시작되는 1월 16일 직전까지 학교에서 훈련을 했다. 개인 연습을 비롯한 단체 훈련을 하느라 집에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이 거꾸로 대전으로 내려와 간단히 외출 겸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때 학생들에게 뉴스에는 나오지 않는 이런 저런 바깥 동향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가능성 있는 졸업생들의 몸값이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무투대회에 대한 가족들의 관심이 급상승 했고, 학생들도 은연중에 그런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
“너한테 거는 기대가 크다. 잘 부탁한다.”
맨손 격투술이 뛰어난 주장 나상진이 진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다른 3학년들도 모두 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함께 훈련을 하면서 이들은 모두 진우가 최소한 마나를 각성한 마나 헌터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의 가공할 만한 힘과 속도를 훈련 중에 여러 차례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진우가 제 실력만 발휘해 준다면 개인전은 몰라도 단체전은 자신들이 우승할 가능성이 크다.
다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진우는 멋쩍은 듯이 아무 말 없이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 훈련을 시작했던 때와는 달리 기대를 잔뜩 실어 자신을 쳐다보는 선배들의 눈이 은근히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1학년인 주제에 상급 전투 훈련 과목까지 통과한 녀석이라 몹시 시건방을 떨지도 모른다는 3학년들의 의심 섞인 우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우에 대한 믿음과 호감으로 급격히 변했다. 겸손하면서도 단호하다. 그리고 실력은 둘째 치고, 위기 상황에서도 놀라울 만큼 침착하다.
그게 진우와 함께 훈련하면서 선배들이 그에 대해 내린 평가였다.
‘이번엔 우리가 우승할 수 있다.’
모두의 가슴이 흥분과 기대로 설레었다.
* * * * *
헌터 학교 연합 회장의 축사로 시작한 개회식은 이번 대회를 주관하는 영국 헌터 학교의 아스탄 교장의 개회 선언으로 절정에 다다랐다. 특별한 기념 행사나 축하 공연은 없었지만 참석한 사람들이 내지르는 요란한 함성 소리가 연회실을 가득 메웠다.
선수단 대표의 선서가 있고, 대회 일정과 진행 방법에 대한 소개가 첨단 영상 장치를 통해 소개되는 등의 순서가 모두 끝나자 공식적인 개회식은 모두 끝났다. 대기하고 있던 센트럴 타워의 직원들이 연회장 안으로 뷔페식의 음식들을 내오면서, 앉은 자리를 떠나 여기저기로 움직이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거나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사람들 속에 종목별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가한 허진행과 조승운 교관이 서로 노려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으로 정부 대표로 참석한 산업부 장관의 얼굴도 함께 있었다.
“진우야, 잠깐 이야기 좀 해야겠다.”
두 사람과 뭔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던 조승운은 허진행과 산업부 장관이 자리를 뜨자, 잠시 후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던 진우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조승운의 얼굴이 다소 어두웠다.
“여기서요?”
“아니, 잠시 복도로 좀 나가자.”
식탁에서 일어나 연회실을 나가는데 저 멀리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허진행이 자신을 보더니,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비릿한 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허진행이 정부와 기업 쪽에 두루 손을 쓴 것 같다.”
진우를 데리고 연회실 복도로 나온 조승운은 주변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부와 기업이라니요?”
조승운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했다.
* * * * *
진우가 상급1 전투 과목들을 통과하고 난 다음에 학기말 교과 시험을 위해 공부하느라 여념이 없는 동안, 조승운은 그 나름대로 허진행의 손발을 자르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가장 핵심적인 공략 대상은 무엇보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올라 있는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을 만날 기회를 얻는 것은 아무리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라고 알려져 있는 그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부 각 부처에 있는 인맥을 동원하여 여기저기 끈을 늘어뜨린 끝에 방학이 막 시작되는 시점에서 드디어 대통령과의 면담 약속이 잡혔다. 무투 대회 개회를 앞두고 청와대로부터 헌터학교 교장인 펄스너와 교관 출신으로 대회 심사위원을 맡은 조승운을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함께 점심이나 들자는 얘기였다.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조승운은 무투 대회에 관한 대통령의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한 끝에 조심스럽게 허진행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일전에 대통령께서 스카디안 행성에 있는 레드 플라워라는 괴물을 한국에 들여오는 것을 허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적이 있으십니까?”
대통령이 잠시 생각을 하는 표정을 짓자 옆에 배석했던 비서가 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잠시 소곤거렸다. 그러자 대통령이 ‘아’하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락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괴물이라니요? 사람에게는 크게 해를 끼치는 동물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외계 생물을 지구에 들이는 것이 엄격히 통제된 사항이기는 하지만 기존에 크롱 같은 동물도 들여와 식용으로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일단 들여와 연구용으로 사용한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저한테 올라온 보고로는 별 문제가 없는 일이라고 들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조승운은 나직이 혀를 찼다. 대통령이 선인일 수도 있고 악인일 수도 있지만, 멍청하거나 순진한 사람이기는 힘들다.
정치판의 권력 다툼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조승운의 기준으로 볼 때 대통령은 특별히 부패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멍청하지도 않다.
그런 대통령이 레드 플라워의 반입을 허락했다고 하기에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밑에서부터 올라온 보고 자체가 왜곡된 것 같았다. 아니면 레드 플라워의 경제적 가치가 크다는 얘기에 대통령이 다른 위험성에 대해 모른 척 눈을 감았을 수도 있었다.
“레드 플라워는 상당히 강력한 포식자입니다. 최상급 헌터인 저조차도 혼자서는 상대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살펴보셨던 보고에 조금 누락된 사항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옆에 있던 비서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안절부절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 작자도 스카디안 행성 건과 무관하지가 않군.’
허진행이 손을 쓴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스카디안 행성을 탐사하고 돌아온 헌터들의 보고에 의하면 레드 플라워가 사람을 공격한 적이 없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 보고에 따라 탐사대를 보냈는데, 탐사 도중 갑자기 그 놈이 괴물로 변해 대원들을 습격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도 그 사실을 장수덕 박사가 돌아온 뒤에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미개척 지역을 탐사하다 보면 그렇게 예상치 못했던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레드 플라워에 대해서는 반입 허가를 취소하고, 책임자들은 이미 관계 장관들이 인사 조치 등을 통해서 문책을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비서가 서둘러 대통령에게 해명을 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러 빼먹은 내용들이 있었다.
장수덕 박사는 귀환 이후에, 허진행이 스카디안으로 보낸 헌터들이 자신을 위협하고 대원들을 강제해서 무리한 탐사를 진행시키는 바람에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허진행에 대해서는 검찰에 고발하기까지 했다.
조승운도 그 고발장에 목격자로 진술 내용을 싣고 서명을 했다. 다만 진우에게는 일부러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진우가 미성년자이기도 했지만, 조승운으로서는 이번 일에 진우가 직접 개입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검찰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장수덕 박사 일행을 빼고는 모두 실종 처리되었고, 본인의 증언 이외에는 특별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장수덕 박사의 허진행에 대한 고발을 ‘증거 불충분’이나 ‘혐의 없음’으로 처리해 버렸다. 오히려 조승운과 강진우, 그리고 장박사 부녀가 유일한 생존자라는 점을 들어 다른 헌터들을 살해한 혐의를 물을 수 있다면서 위협을 했다.
결국 사건은 유야무야되고, 사람이 10명이 넘게 죽은 일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게 된 것이다. 보나마나 허진행이 검찰에 손을 썼음이 틀림없었다.
비서는 그런 내용을 모두 감추고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스카디안에 갔던 탐사대가 귀환 예정일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는 바람에 제가 구조대의 일원으로 그곳을 갔습니다. 거기서 허진행 헌터 협회장이 함께 보낸 헌터들이 장수덕 박사 부녀를 인질로 잡고 저에게도 레드 플라워를 상대하도록 협박했습니다.
다행히 장수덕 박사 가족은 무사히 구출해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머지 대원들이 모두 레드 플라워에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서는 조금 더 조사를 명령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
조승운을 쳐다 보는 비서의 눈에 살기에 가까운 매서움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이미 검찰에서 조사를 다 끝내고 ‘증거 불충분’이나 ‘혐의 없음’ 처리를 한 사건입니다. 조승운 교관도 지금 말한 것과 같은 진술을 이미 검찰에서 했지만, 사실로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끝난 사건을 다시 조사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검찰에서도 불쾌하게 생각할 겁니다.”
비서가 다시 대통령을 설득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펄스너 교장이 나섰다.
“지구인이 아닌 저로서는 이런 문제에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그간의 정황으로 봐서 허진행 협회장에 대해서는 저희 쪽에서도 다소 의구심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저희로서는 앞으로 포털 관리 권한을 한국 정부 쪽에 이양하는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 되도록이면 헌터들을 잘 보호하고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나 단체가 협상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찻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대통령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서렸다. 대충 이 이야기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아들은 눈치였다. 그가 찻잔을 내려 놓으며 입을 열었다.
“무투 대회 얘기나 하면서 간단하게 식사나 함께 하려던 자리에서 예상치 못하게 다소 무거운 얘기를 듣게 되어 다소 당황스럽기는 합니다만, 말씀하시려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대충 알아 들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식사 후에 다른 약속이 잡혀 있어 그 문제로 오래 얘기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하군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것으로 그날의 만남은 끝났다.
헌터 협회에 있는 노명철의 얘기에 의하면 그 뒤로 허진행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바쁘게 여기저기 연락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고 했다. 조승운은 조승운대로 아는 헌터들을 총 동원해서 허진행에 대한 좋지 못한 입소문을 은근히 퍼뜨리려고 애를 썼다.
정부 부처의 주요 인사들과 국회의원들을 만나 허진행에 대한 주의와 당부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조승운이 놓친 것이 있었다. 기업들의 동향에 대해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다.
외계인들과의 협상 주체는 아무래도 각국 정부와 정치인들이었다. 기업은 그 문제에 대해 직접 개입할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달리 보면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따라 가장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초기에 조승운에게 다소 유리하게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던 상황은 기업들의 로비가 시작되면서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다. 허진행이 기업들을 만나 마나스톤을 비롯한 외계 행성에서 획득하는 자원의 배분을 미끼로 해서 그들을 설득한 것이다.
* * * * *
“새해 들어 일주일 쯤 지났을 때, 청와대 비서실장이 밖에서 한 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었다. 포털 관리 권한을 이양받는 문제에 대해 대통령께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으니, 더 이상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 흔드는 일은 그만 두어 달라고 자제를 부탁하더구나. 내 명성과 그간의 업적을 거론하면서, 대통령께서 긍정적으로 내 주장을 검토하고 있으니 결정이 날 때까지 당분간 조용히 있어달라고 말이다.
”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나요?”
조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성 그룹 회장을 비롯한 재계 인사들이 정계 인물들을 만나 로비를 많이 한 모양이다. 대신 허진행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약속을 받아낸 거겠지. 관례처럼 된 일이기는 하다만, 다음 총선이나 대선을 위한 정치자금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말에 대통령도 많이 흔들린 것 같다.
조금 전에 산업 자원부 장관과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래도 포털 관리 권한은 민간으로 이양하기로 어느 정도 청와대의 뜻이 정해진 듯하다.”
“민간이라면...?”
“헌터 협회로 넘기겠다는 소리겠지. 그렇게 되면 허진행과 기업들은 이익을 많이 보겠지만, 아마도 헌터들의 지위는 지금보다 떨어질 거다. 겉으로는 헌터들이 기업을 상대로 직접 마나스톤을 판매하게 되면 값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하겠지. 하지만 일단 헌터 협회로 포털 관리 권한이 넘어가면 포털 사용 기회를 통제함으로써 헌터들에게 싼 값으로 마나 스톤을 기업에게 넘기도록 강제할 거다.
이미 저희들끼리 그렇게 얘기가 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반대로 기업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연료로 정제한 마나스톤이나, 마나스톤으로 생산한 전기료를 올릴 거다.
대체가 불가능한 자원을 독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두려울 것이 없겠지. 물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이익의 일부는 당연히 허진행에게로 넘어갈 것이고.”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정부도 체면이 있으니 지나치지 않은 범위에서 조정이 되도록 가격 인상을 통제하기는 하겠지만, 연료와 전기의 가격이 10%만 오르더라도 그것이 경제에 미치는 타격은 엄청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말인데, 너 자신은 있느냐?”
조승운의 물음에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획은 이미 세웠고, 그대로 진행도 시키고는 있지만, 어쨌든 최종 결정은 제가 아니라 허진행이 하는 것이니까요. 하는 데까지 해 보는 수밖에 없지요 뭐.”
조승운이 탄식을 터트렸다.
“그래. 모든 일이 계획대로만 되면 세상에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냐. 나는 도대체 외계인들이 왜 포털 관리 권한을 지구인들에게 이양하기로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요구가 강력해도 그렇지, 어차피 그들이 아니면 고장이 나도 수리도 못하는 장치 아니냐.”
진우는 어쩌면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이해하기 더 힘들어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말을 뱉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허진행을 처리하기 위한 일은 전체적으로 조승운이 진행을 시켜왔다. 그건 아직 미성년자인 진우의 입장에서나, 조승운이 가진 헌터로서의 위치로 생각해 볼 때 당연한 것이기는 했다.
진우가 세운 계획은 그저 그런 모든 일들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를 대비한 최후의 깜짝 카드 같은 것이었지만, 사실은 굳이 계획했던 일이 발생하지 않는 편이 진우로서도 좋았다. 그러나 이제는 허진행이 자신의 계획에 걸려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모든 일은 욕심으로 시작해서 욕심으로 끝날지도 모르겠구나.’
갑자기 외계인들로부터 지구인들이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과학 기술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진우는 기분이 울적해졌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날씨가 무척 쌀쌀하더군요. 평소처럼 두껍지 않은 옷을 입고 나갔다가 거리를 종종거리며 뛰어다녔습니다. 올해가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날씨와는 달리 따뜻한 연말을 맞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