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53화 (53/235)

53화

“강진우가 결국 상급 전투 과목을 신청했다고?”

“네. 여기 그에 관한 자료를 정리해 왔습니다.”

허진행은 진우가 상급 전투과목을 신청한 바로 다음날, 비서 송혜미로부터 자세한 자료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자료를 죽 살펴 본 허진행이 혀를 찼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신청한 교관들이 전부 우리가 손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군.”

“그래도 함께 듣는 학생들 중에는 저희 말을 들을 친구들이 몇 명 있습니다.”

“그래. 일단 그 친구들이라도 이용을 해야지. 강진우가 교관과 대련을 하게 되면 그 장면을 촬영해 보라고 해. 몰래 촬영할 수 있는 간단한 도구들을 지원해 줘. 혹시 교관이 대련을 허락하지 않으면, 본인들이라도 직접 시비를 붙이든지 해서 어떡하든 먼저 그 애송이의 실력을 확인하도록 지시하고.”

송혜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허진행에게 물었다.

“조금 심하게 다치게 하는 일이 있어도 상관하지 말라고 할까요?”

“전력을 다해서 시험해 보라고 해. 물에 들어가려면 먼저 물의 깊이를 재 봐야지. 뭔가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있어서 시작한 일이지만, 일단은 나도 그녀석이 과연 내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놈인지 확실히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송혜미가 문을 닫고 협회장실을 나가자, 허진행이 씨익 웃으며 중얼거렸다.

“강진우, 넌 도대체 누구냐. 정체를 밝혀 봐라, 후후.”

*  * * * *

진우의 전임 교관들은 그가 상급 전투 과목을 신청하자마자 곧바로 교관에게 대련을 신청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소개해 준 새로운 교관들에게도 적당히 귀띔을 해 주었다. 어린 녀석이지만 제법 실력이 좋으니, 공연히 방심하지 말라고.

수업을 담당한 교관들도 사실 진우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헌터 학교가 생긴 이래로 첫 학기에 전투 훈련 과목을 중급까지 모두 통과한 학생은 전례가 없었다.

과목을 맡았던 교관들이 워낙 실력이 쟁쟁하고 자존심도 강한 사람들이어서, 설마 실력도 되지 않는 학생을 무리해서 통과시켰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진우가 거둔 성과도 그냥 믿기에는 너무 상식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신임 교관들은 은근히 자신이 직접 진우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수업을 시작한 지 두 주가 다 되어 가는데도 진우는 교관들에게 대련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교관들이 지시한 훈련들을 소화해 내고 있을 뿐이었다.

훈련 과정이 꽤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별 어려움 없이 그것들을 소화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완전히 엉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에 대한 호기심과 의구심이 다 해소되기에는 부족했다. 그렇게 벌어져야 할 일이 생기지 않고 계속 시간이 지나자, 뭔가를 기대하고 잔뜩 부풀어 있던 수업의 긴장감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점점 가라앉고 말았다.

*  * * * *

진우가 두 주째 교관에게 대련 신청을 하지 않고 정해진 훈련 프로그램만 따르고 있자, 허진행 측에서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행동을 시작했다.

격투술 수업을 마치고 교관이 돌아가자, 간단하게 얼굴을 닦고 체육관을 나가려는 진우를 함께 수업을 듣던 3학년 학생 4명이 에워쌌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표정으로 진우가 묻자, 3학년 가운데 한 명이 나섰다.

“우린 네가 실력으로 중급 과목을 통과해서 우리랑 같이 수업을 듣고 있다고 믿기 어렵다. 3학년들 중에는 1학년이랑 수업을 함께 듣고 있는 우리를 조롱하는 녀석들까지 있어. 네가 중간에 불쑥 끼어드는 바람에 이래저래 불편한 게 많다.”

“저 때문에 쓸 데 없는 대우를 받게 되신 것에 대해서는 죄송하지만, 그건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학기를 그냥 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최대한 건방진 태도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렇다고 이유 없이 고개를 숙일 수도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누군가가 나선다면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

허진행은 이미 자신을 탐색하기 위한 촉수를 들이민 게 확실했고,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교관들은 그가 마음대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점을 감안해서 수업 신청을 했었다. 그렇다면 학생들 가운데 허진행의 지시를 따르는 누군가가 먼저 나서리라고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네가 정말 실력이 있다면 우리에게 죄송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이 수업에서 나가주었으면 좋겠다. 실력도 없는 녀석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망신을 당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진우는 나서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는 3학년 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군. 말은 그래도 선배답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의도가 빤히 보이는 소리였다. 진우는 훈련을 마치고 벗어 두었던 격투용 장갑을 다시 집어들었다.

“제 실력을 확인하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어느 분이 나서시겠습니까?”

진우가 쳐다보았던 녀석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상대하마. 맞으면 조금 아플 거다. 봐 줄 생각은 없으니 최선을 다 해라.”

순간 진우의 귀에 미약하게 ‘지잉~’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움직이지 않고 눈만 살짝 돌려 소리가 들린 곳들을 살펴보니 자세히 보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무선 카메라들이 숨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확실하군.’

그냥 순수하게 짜증나는 후배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나선 것이라면 굳이 이 장면을 촬영할 이유가 없었다. 자칫하면 학생 간의 과도한 사적인 결투로 간주되어 처벌이 내려질 수도 있는데, 굳이 증거를 남기려고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놈이 허진행의 주구다.

진우는 장갑을 끼고 두 주먹을 올렸다.

“저한테 맞아도 많이 아프실 겁니다. 선배.”

녀석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다른 3학년들이 뒤로 물러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건방진. 내가 오늘...”

기다려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상대가 자세를 취하자마자 앞으로 크게 한 발을 내밀며 내지른 진우의 주먹이 그대로 녀석의 가드를 뚫고 인중에 틀어박혔다. 딱 한 방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녀석은 섰던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입술 위로 피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당분간 밥 먹기 힘들 거다.’

진우는 멍하니 서 있는 나머지 3학년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다.

‘허진행. 이제 판단에 좀 도움이 되었나?’

진우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체육관을 떠났다.

*  * * * *

수업을 신청한 지 세 주째로 접어든 어느 날, 멜리사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헌터 학교 대항 무투 대회의 자세한 일정과 대회 진행 방법, 그리고 참여할 각국 심사위원들의 명단과 약력이 적힌 메일이었다. 헌터 패드로 메일을 열어 본 진우는 내용을 죽 살펴보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아직도 결정되지 않은 항목이 이렇게 많지? 무투대회 최종일은 대회 진행 프로그램조차 확정이 된 게 하나도 없네. 더 기다리고 있는 건가?’

멜리사는 영국에서 파견하는 궁술 개인 부문 심사위원으로 확정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조승운 교관과 허진행 헌터 협회장이 심사위원으로 위촉이 되었지만, 아직 잠정적인 결정사항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어떤 종목의 심사위원을 맡을 지가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이틀 뒤 펄스너 교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진우는 교장실로 그를 찾아갔다. 그곳에서도 멜리사가 메일로 보낸 것과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조승운 교관님하고 허진행 회장이 심사를 맡을 종목은 왜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겁니까? 보통은 심사위원으로 위촉이 될 때 종목까지 함께 정해서 통보가 오지 않나요?”

펄스너 교장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하면서 말을 했다.

“그건 무엇보다 대회 주관을 맡은 영국 헌터 학교에서 아직 대회 프로그램의 세부 사항을 명확히 확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네. 보통 이맘때면 그런 게 다 정해져서 슬슬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가야 하는데, 무엇 때문인지 학교 측에서 자꾸 결정을 늦추고 있네. 그러다 보니까 심사위원들이 맡을 종목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경우가 꽤 있어. 멜리사 여사의 경우 본인이 처음부터 궁술 개인 종목을 지정했기 때문에 무리 없이 결정이 났지만, 허진행 회장은 심사위원 위촉을 받아들이면서도 종목 결정을 아직 공란으로 비워두고 있네. 그 이야기를 조승운 교관에게 했더니, 그 역시 자기가 맡을 종목의 결정을 미루고 있지.”

진우는 펄스너 교장에게 감사를 표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 생각을 했다. 현재 가장 모호한 부분은 허진행 회장과 영국 헌터 학교의 아스탄 교장 사이에 정말로 모종의 긴밀한 끈이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게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아서 조승운 교관도 대비를 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결정을 하는 걸 도와줘야 겠군. 아울러 결과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두 사람 사이의 관계도 조금 더 명확히 알 수 있을 것 같고.’

다음날 수업 시간에 진우는 격투기 교관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  * * * *

상급 격투술1 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진승훈은 마나 헌터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급도 아닌 상급 격투술 과목을 몇 년째 가르치고 있었다. 그만큼 격투술이 뛰어났다. 발현 가능한 상급 마나 헌터들조차 마나를 사용하지 않은 격투에서는 그를 쉽게 쓰러뜨리지 못했다.

하지만 진우와 진승훈과의 격투술 대련은 불과 1분여 만에 끝이 났다. 대련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을 때, 진승훈 교관이 진우에게 접근하면서 팔꿈치로 그의 턱을 후려쳤다.

깔끔하고 정확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교관의 공격을 피해, 진승훈의 몸을 그대로 감으면서 등 뒤로 돌아간 진우가, 그의 뒷무릎을 발로 차 꺾으면서 그대로 엎어치기를 시도한 것이다. 등뒤부터 땅에 떨어진 그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을 때에는 이미 코앞에 진우의 주먹이 멈춰 서 있었다.

“끄응, 이렇게 손쉽게 당할 줄은 몰랐군. 그 무뚝뚝한 권일도 교관이 하도 칭찬을 하길래 어느 정도인가 했더니, 과연 대단하군. 진우 군은 오늘부로 상급 격투술1 과목 통과네. 그동안 수고했네.”

그 뒤의 이틀 동안 진우는 상급 궁술1과 상급 검술1을 통과했다. 과목의 성격상 직접 서로에게 활을 겨누기는 어려운 궁술의 경우, 무중력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점수가 매겨진 표적에 사격을 해서 총점을 겨루는 방식으로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테스트가 끝난 뒤 궁술 교관은 자신의 완벽한 패를 선언했다. 모든 과목을 통과하자 학교 전체에 진우에 대한 소문이 들끓었다.

*  * * * *

허진행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진우가 결투를 벌이는 영상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심어 놓았던 학생에게 순식간에 일격을 먹이는 모습은 물론, 교관들과 대련을 하는 모습까지 빠짐없이 촬영되어 허진행의 손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새끼 고양이 정도일 줄 알았는데, 거의 다 자란 호랑이였군. 그럼 사냥 종목을 바꿔야지. 호랑이 사냥으로 말이야.”

허진행은 전화기를 들었다. 신호음이 가더니 저쪽에서 아스탄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진행이 인사도 생략한 채 간단하게 용건을 말했다.

“최종일 프로그램은 D 플랜으로 가는 걸로 합시다.”

아스탄이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지구인들의 생각에 많이 익숙해졌다고 여겼었는데, 아직 그렇지 못한 것 같군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약속한 것은 잊지 마십시오.”

“물론입니다.”

일주일 뒤 헌터 학교 대항 무투 대회 프로그램이 최종확정 되었음이 전 세계 헌터 학교로 통보되었다. 10월 말이 지나면서 거리에 낙엽이 많이 떨어지고 있던 때였다.

*  * * * *

“너 원래 실력을 좀 숨기려고 한 게 아니었어?”

“아직 숨기고 있잖아요. 다 드러낸 것도 아닌데요 뭐.”

“그래도 난 네가 대련에서 조금 더 시간을 끌 줄 알았는데. 너무 빨리 끝낸 것 아냐? 지금 학교에 괴물 신입생이 등장했다고 온통 난리야. 이렇게 소문나면 곤란한 거 아니었어?”

오랜만에 나르샤, 권일도, 조승운 세 명의 교관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나르샤로부터 또 괴물 소리를 들었다. 말하는 사람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말을 하니, 이제는 뭐라고 투덜대기도 어려워졌다. 듣고 있던 조승운이 나르샤의 말을 받았다.

“진우 이 녀석이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는구나. 대충 생각을 듣기는 했는데, 나로서는 찬성을 하기도 반대를 하기도 좀 애매해서 일단 녀석의 생각을 따르기로 했다. 착하고 기특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생각하는 게 점점 귀여운 맛이 없어지는 것 같아, 에잉.”

조승운과는 미리 얘기가 된 게 있는 듯해서 권일도와 나르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식사를 하면서 조승운으로부터 대충 계획을 전해들은 권일도와 나르샤도 조승운과 똑같은 심정이었다.

찬성을 하기도 반대를 하기도 둘 다 애매했다. 진우가 조금 성장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그간 험한 일을 계속 겪어서 그런지 진우의 생각이 좀 더 여유가 있으면서도 단단해진 것처럼 보였다. 헌터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들이 보기에 진우는 아직 미성년자였다.

걱정할 만큼 약한 녀석은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네 계획이 불필요한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조교관님이 그걸 위해서 애를 쓰고 계시니까 설마 하는 심정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네.”

진우가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웃음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맑아 보여 세 사람의 마음이 더욱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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