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고 하자 비서 송혜미가 들어와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얇은 서류철을 허진행에게 건넸다. 서류철 위에 [강진우 동향 보고]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허진행이 서류철을 펴고 내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헌터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공부를 꽤 잘했다는 것 이외에는 특별한 사항이 없군. 어머니는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작년 1월에 사고로 죽었다....”
허진행이 자신을 쳐다보자 송혜미가가 얼른 대답했다.
“네. 입학 전까지 그다지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헌터 후보자 테스트에서 오전 측정에서는 1,500m 성적이 좋았다는 것 말고는 별로 뛰어난 점이 없었고, 그런데 오후 측정에서는 월등한 성적으로 1위를 차지했군. 이때 난이도가 최상급이었다고?”
“네. TVR동의 우지연 과장이 직접 그렇게 결정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난이도를 고려한 평가 점수였다고 해도, 2등과는 현격할 정도로 큰 점수차가 있는 1등이었군. 역시 조승운이 관심을 가질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는 건가...”
허진행은 서류를 넘기며 찬찬히 내용을 살폈다.
“입학 전에 케이튼 행성에 가서 두 달 동안 있었다고? 최현 교관과 함께? 이건 뭔가? 입학도 하지 않은 학생이 어떻게 그곳을 갔지?”
“최현 교관과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입학 축하 선물 겸 미리 그곳을 여행삼아 데리고 간 것으로 보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안 되지만 가끔 있는 일이기는 합니다. 조세연 케이튼 기지장과 최현은 헌터 학교 동문으로 꽤 절친한 사이입니다.
묵인하는 걸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나중에 둘 다 그 일로 처벌을 받았습니다.”
“마나량 측정치가 33P라. 아주 높은 수치이기는 하지만 이번 여름의 훈련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비정상적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군. 보통 후보자 테스트에서 오후 측정 성적이 좋은 친구들이 마나 친화도가 좋게 나오곤 하니까 말이야.”
“네. 재능은 분명히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특이 사항이라고까지 하기는 어렵습니다.”
허진행이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특이 사항이 있기는 하군. 입학한 이후가 오히려 문제야. 오전 교과목 통과 시험이야 원래 공부를 잘 했다니까 그렇다 치고, 오후 전투 훈련 과목 통과 승인이 너무 빨라. 조승운과 권일도, 멜리사가 맡은 과목은 그렇다 치고 정찬우 교관이 맡았던 검술 1이나 나르샤가 맡았던 궁술 1도 통과 승인이 너무 일찍 났어. 내가 조승운 영감이나 권일도 헌터를 좀 아는데, 그 사람들이 아무한테나 이런 비리로 의심을 해도 될 만큼의 특혜를 베풀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야. 이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 점은 저희들도 아직 조사 중에 있습니다. 입학 전인 작년까지는 운동에 소질을 보이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입학과 동시에 단기간에 실력이 급성장한 것에 대해, 저희로서도 아직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케이튼에서 잠시 실종된 적이 있었다고 했나?”
“네. 그곳에서 일하는 관리인을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최현과 대수림에 들어갔다가 헤어져 이십일 가까이 혼자 떨어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반인에 불과한 강진우 혼자서 대수림을 통과해 살아 돌아왔다고?”
“말씀드린 관리인에 따르면 케이튼에 도착하자마자 약 이 주 동안 엄청난 양의 훈련을 소화했다고 합니다.”
허진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결국 그곳에서 실력이 갑자기 성장하게 된 어떤 계기를 만났다는 건가? 하지만 케이튼은 지금까지 수많은 헌터 학교 학생들이 훈련을 다녀온 곳이다.
이제까지 누구도 진우처럼 한 학기만에 중급 전투 훈련과목까지 단숨에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 실력이 급성장한 사람은 없었다.
“최현과 박정태라는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갔다가 중급 마나 헌터와 싸웠다는 이건 뭔가?”
“네. 뉴스에도 보도가 됐던 것인데, 당시 최현이 상대를 전투 끝에 격살한 것으로 진술했습니다. 마나 헌터들끼리의 싸움이었고, 정당방위가 인정이 된 사건입니다.”
“알았어. 그만 나가 봐. 케이튼에서의 일에 대해서는 계속 더 조사해 보고.”
“알겠습니다.”
마나량이 33P다. 어린 나이치고는 비록 턱걸이이기는 하지만 전문 헌터라고 할 수 있는 정도로 높은 수치다. 하지만 그 정도 실력으로 중급 2 전투 과목들을 통과할 수 있을까? 설사 정말 실력이 좋아서 조승운이나 권일도, 나르샤가 인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스카디안에서의 상황에서 조승운에게 힘이 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조승운이 그곳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래도 이 녀석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대학교수인 장수덕과 천재라고는 하나 아직 16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녀인 장소현이 마나 헌터들이 관계된 전투에서 힘이 되었다고 보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됐다.
생각을 하던 허진행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송혜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송비서. 진우 학생 기록을 보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묻는 건데. 이 친구가 혹시 조기 졸업할 생각이 있다고 하던가?”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 학기에도 일반 교과 통과 시험을 여러 개 준비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생각이 있는 거구만.”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알겠어. 그럼 아까 말한 케이튼 건은 계속 좀 알아보고.”
전화를 끊고 나자 허진행은 강진우에 대해 조금 더 확실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혹시라도 위험한 놈이라면 싹부터 자르는 것이 좋았다.
“이해가 되는 면과 이해가 전혀 안 되는 면이 너무 함께 얽혀 있어. 경험으로 볼 때 이런 놈은 위험한데 말이야, 일단 정말 실력이 좋은지 확인을 해야 되겠군.”
* * * * *
학기가 시작되고 두 주 정도 지났을 때 장소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주말에 장수덕 박사와 대전에 내려갈 일이 있는데 시간 되면 같이 점심이나 먹자는 얘기였다.
특별한 일이 없던 터라 그러자고 하고 전화를 끊고 나니 귀환한 뒤 가져 온 금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장박사와 조승운만 서로 통화했지, 자신이 장박사나 소현이를 다시 만난 적이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문득 그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카디안에서의 상황이 마무리되고 나서 장소현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가볍지 않은 후유증을 앓았다. 보통 어려운 일을 겪으면 사람이 성장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장소현이 겪은 일은 그저 그런 어려움이 아니었다.
이미 진우와 조승운이 스카디안에 오기 전에도 함께 있던 사람들이 레드 플라워에게 잡아 먹히는 일을 당했다.
게다가 진우가 오고 난 뒤, 레드 플라워의 새끼를 빼앗으려는 과정에서 사람이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걸 눈앞에서 목격했다.
마지막 싸움에서는 장박사와 소현이를 바이크에 타고 멀리 가 있으라고 했지만, 그 전에 진우가 날린 화살에 사람들이 맞고 쓰러지는 것을 이미 생생히 목격했다. 차덕구가 레드 플라워의 입에 끌려 들어가 반 토막이 나는 끔찍한 광경도 보았다.
일을 겪을 때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라 잘 느끼지 못했지만, 상황이 모두 마무리되고 나자 소현이는 밤마다 악몽을 꿨다.
진우는 자신도 겪었던 적이 있는 일이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현이의 경우는 자신이 누굴 죽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끔찍한 일을 너무 많이 겪었다.
정서가 불안하고 충격에 시달린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었다. 걱정이 됐다. 그래서 계속 옆을 지켜줬다.
아버지인 장박사도 소현이를 돌보려고 애썼지만 사실은 그 역시도 자신을 주체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른이라 그래도 어느 정도 견디는 것 같았으나 경험이 많은 조승운이 표나지 않게 다독거려 준 덕을 보았다.
스카디안에서 소현이는 진우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지했다. 어쨌든 그 덕에 자신과 아버지가 목숨을 구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곁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를 무서워했다.
한재인과 서로 활을 겨누고 쏘던 때에 그의 얼굴에 서렸던 단호한 살의를 보았던 것이다. 무서워하면서도 의지하고, 의지하면서도 무서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나아지기는 했지만 구조대를 만나 지구로 귀환할 때까지도 그런 혼란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현이가 먼저 전화를 걸어, 비록 아버지와 함께이기는 했지만 먼저 만나자고 한 것이다. 그게 왠지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그간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먼저 자신을 만나자고 전화를 한 것을 보면 그게 성과가 있었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이 되는 한편 기대가 되기도 했다.
* * * * *
“우리 딸이 아무래도 대전에 내려올 일이 자주 있을 것 같은데, 여기 내려오면 자네가 가끔 밥이라도 사 줄 수 있겠나?”
“네?”
“대전에 내 여동생이 시집을 와서 사는데, 그 딸내미가 올해 중학교 2학년이야. 여동생이 아이 진학 문제에 관심이 워낙 많아서 소현이에게 주말마다 내려와서 과외를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지 뭔가.”
“아, 네.”
“자랑은 아니네만 우리 소현이가 공부를 잘 해. 이 나이에 벌써 대학 졸업반이니까 말이야. 무중력 버스로 서울에서 대전까지 40분이면 오니까, 큰 무리도 아니거든. 그래서 내가 허락을 했네. 이왕 오는 김에 자네랑은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하는 말이네.”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뭐. 소현이같이 예쁜 여학생하고 같이 다니면 저야 좋지요. 올 때마다 맛있는 걸로 사 주겠습니다.”
장박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소현이는 엷게 웃었다. 장박사는 소현이가 정신적인 충격을 극복하는데 진우가 도움을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스카디안에 있을 때부터 소현이는 비록 진우를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기도 했다. 사실 장박사의 말을 들은 정신과 의사가 권한 일이기도 했다.
두려움과 편안함이라는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진우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면 그게 심리적인 안정으로 가는 신호가 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과외 문제도 여동생이 아니라 장박사가 먼저 제안했었다. 소현이도 웃으며 별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대학생과 고등학생이라는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둘다 같은 나이였고, 분야는 달라도 남들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공통점이 있으면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친해지가 쉽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어려울 때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 가족 다음으로는 친구였다.
진우는 첫 살인 후 조승운과 권일도에게 정신적으로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최현과 정태가 곁에 있어 준 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자신이 소현이의 옆에 있어주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소현이는 키가 크고 늘씬한데가 얼굴까지 예뻤다. 16살 진우가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 * * * *
허진행이 최명도 교감에게 한 번 보자고 연락을 해 온 것은 2학기가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두 사람은 일식집에 방 하나를 예약해 만났다. 식사와 술자리를 겸한 자리였다. 둘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끝에 허진행이 문득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헌터 학교에서는 요즘 상급 전투 훈련 과목은 학기 중에 수강 신청을 받지 않는다면서요?”
“아, 네.”
“예전에는 안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규정이 바뀐 겁니까?”
“네. 상급은 아무래도 과정이 어려우니까, 학기 중간에 수업이 시작되면 학기 안에 끝내기가 어렵다는 얘기가 나와서요.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상급 과목은 학기 중 수강신청을 받지 않기로 하고 있습니다.”
“흠... 그것 참. 그 규정이 어떻게 융통성을 발휘하거나 변경하기가 어려운 겁니까?”
“아니,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명문화된 규정이 아니라 교장 재량 사항이니까요. 왜 그러십니까? 무슨 곤란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허진행이 여전히 곤란하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제가 아는 사람 아들이 지금 헌터 학교 2학년에 다니는데, 이 친구가 전투 훈련 과목에서 조금 성취가 빠릅니다. 지난 학기 중간쯤에 욕심을 내서 중급 2를 신청했는데, 생각보다 통과가 조금 늦어져서, 하필이면 그게 이번 학기 들어와서 며칠 전에야 통과 승인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아직 학기 초인데 정작 상급 과목을 신청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는 군요. 기껏 욕심을 내서 노력을 했는데, 한 학기를 그냥 날려 버리게 되어서 말이죠.”
최명도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그런 문제라면 제가 좀 힘을 쓸 수 있을 겁니다. 그렇잖아도 이번 학기 시작되기 전에 교관들 몇 명에 관련된 징계 문제 때문에 제가 교장 선생님에게 양보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 훈련에 좀 더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라면 제가 부탁할 경우 교장 선생님도 거절하기 어려울 겁니다.
학생 이름을 말씀해 주시면 그 학생의 경우 제가 재량으로 신청이 가능하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자 허진행이 겸연쩍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그 친구만 특혜를 주는 게 되어버리니 그건 안 되지요. 괜히 이상한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냥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학기 중간에 상급반을 신청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하겠습니까. 걱정 말고 기다리시면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하하.”
“아이고. 이거 저 때문에 교감 선생님께 또 폐를 끼치는 군요. 감사합니다. 하하. 뭐 언제든지 저한테 필요한 게 있으시면 연락을 주십시오. 제가 꼭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술자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최명도는 허진행으로부터 제법 두툼한 봉투를 받았다. 그리고 며칠 뒤 헌터 학교에는 새로운 공고가 붙었다. 이번 학기에는 학기 도중 상급 전투 훈련 과목을 신청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