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스노우 바이크를 타고 이틀을 달린 끝에 일행은 드디어 목표로 하는 레드 플라워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화창했던 햇살이 이미 꼬리를 감추어서 그런지 눈앞의 레드플라워는 눈 위에 핀 화려한 붉은 색의 꽃이 아니라 그저 혹이 4개 달린 상처투성이의 커다란 바위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녀석은 주위의 눈과 얼음을 다 파먹고 내려가 표면으로부터 10여 미터 아래에 드러난 암석층 위에 올라서 있었다. 눈과 얼음으로 된 커다란 분지 안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4개의 혹처럼 생긴 것이 놈의 머리라는 건가?”
바이크에서 내린 조승운이 묻자, 진성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오늘 영감님과 사랑스러운 제자께서 직접 상대를 해 주셔야 하는 놈들이지요. 말씀 드렸듯이 놈의 혀를 아주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영감님께서 오래 버텨주셔야 저희가 일을 하기 편하니까요.”
진성환이 진우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두 분이서 레드 플라워의 머리를 잘 상대하고 있으면 그동안 저희들이 괴물의 등 위로 올라가 새끼를 잡을 겁니다.”
“알았네.”
조승운이 검을 빼들고 분지 아래로 내려가 괴물의 정면에 섰다. 진우 역시 활을 들고 내려가 조승운의 조금 뒤에 섰다.
두 사람이 레드 플라워의 정면에 자리를 잡자, 진성환 역시 무중력 벨트를 조정하는 리모콘을 이동수에게 넘겨주고는 분지 아래로 내려갔다. 나태준과 차덕구 역시 각자의 무기를 들고 괴물의 주위를 둘러싸고 섰다. 나머지 헌터들은 분지 바깥에 서서 장박사와 소현을 데리고 이들이 공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우는 화살을 꺼내면서 분지 위를 힐끗 바라보았다. 두 명이 총을 꺼내들고 장박사와 소현의 옆에 서 있었다.
이동수는 그들의 옆에서 양 손에 각각 장도와 리모콘을 쥐고 있었다. 조승운과 진우가 이상한 행동을 하면 바로 리모콘을 누를 기세였다.
다른 헌터들 역시 도끼와 창을 비롯한 각자의 무기를 들고 섰다. 만약의 경우 이들도 분지로 뛰어들어야 했다.
그 경우 총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모두가 자리를 잡자 한인재가 자신의 활에 활을 거는 것이 보였다. 진우는 활에 화살을 걸고 급히 조승운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관님, 잠시만 혼자서 괴물의 공격을 막아주십시오.”
조승운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뭘 할 생각이냐?”
“일단 분지 위의 사람들을 처리해야 할 거 같습니다.”
“할 수 있겠느냐?”
진우가 말없이 조승운의 눈을 바라보았다. 조승운도 그의 눈을 마주보았다.
“네. 나중에 괴로워하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걸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요.”
조승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늙으면서 죄가 점점 많아지는구나.’
그는 속으로 나직이 탄식했다. 그리고는 괴물을 향해 앞으로 뛰어나갔다. 어쨌든 그가 선제 공격을 시작해야 저 놈들이 괴물을 향해 움직일 것이다. 놈들은 자신이 괴물의 혀를 묶어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조승운은 오히려 진우를 위해 저 놈들을 괴물에게 묶어두어야 했다.
* * * * *
조승운이 다가서자 괴물의 등 주위를 따라 혹처럼 돋아 있던 투명한 눈들에 약한 빛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잠잠히 있던 괴물의 머리 네 개가 움직였다. 머리에 달린 입이 벌어지더니 순식간에 4개의 혀가 조승운을 향해 쏘아져 왔다.
말 그대로 순식간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빠른 속도였다. 조승운은 빠르게 움직이면서 검에 마나를 잔뜩 주입시켜 휘둘렀다.
가능한 한 몸을 움직여 피하면서 피할 수 없는 경우에만 검을 사용해서 괴물의 혀를 막아나갔다. 마나를 강하게 실어 혀를 베는데도 갈라진 상처만 날뿐 베어지지는 않았다.
‘마나를 두른 칼에도 한 번에 잘리지가 않는 군. 자칫하면 검이 혀에 말려 들어가겠어.’
혀의 움직임은 놀라웠다. 자유자재로 신축하는 그것은 눈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4개의 채찍 같았다. 검에 최대한 마나를 응집시켜 베어낸다면 하나 정도는 어쩌면 잘라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다가는 나머지 3개 혀의 공격에 속절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혼자서는 버티는 게 최선이군.’
진우를 흘깃 보았다. 그가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있었다.
* * * * *
진성환을 비롯한 세 사람은 조승운이 괴물의 정면을 향해 달려가자 괴물의 머리들이 일제히 입을 열어 혀를 쏘아내는 것을 보았다. 전달된 영상에서 본 것에 의하면 저 혀는 괴물의 등 한 복판까지 이를 정도로 길고 빠르다.
조승운이 괴물의 혀를 잡아두는 동안 자신들은 최대한 빨리 괴물의 새끼를 등에서 떼어내야 한다.
“공격”
진성환이 괴물을 향해 달려갔다. 그가 공격하는 모습을 본 나태준과 차덕구도 각각 두 자루의 도끼와 검을 들고 괴물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괴물의 등판에서 대롱에 매달린 껍질들이 일어났다.
오래된 쇠에 칠해진 페인트가 갈라져 떨어지듯이 괴물의 등껍질이 벗겨져 나왔다. 등판 위의 투명한 눈들이 일제히 빛을 발했다. 그러자 껍질 조각을 달고 있는 대롱들이 움직여 세 사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 * * *
한인재는 네 사람의 공격이 시작되자 활에다 화살을 먹이고 마나를 실었다. 활 자체에 마나를 실어 사거리와 파괴력을 증가시키고 화살의 끝에는 관통형 마나를 응집시켰다.
화살대에는 회전까지 먹였다. 한 방에 부숴야 한다. 최대한 빨리 눈을 부숴 괴물의 감각을 무력화시킬수록 진성환을 비롯한 자신의 일행들이 일을 하기가 쉬워질 것이다.
적당히 해도 되는 상대라면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자신을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지금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는 최대한 마나를 동원해 화살촉에 부여한 마나를 응집시켰다.
얼핏 괴물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헌터 학교의 애송이가 눈에 보였다. 방향이 잘못되었다. 저대로 쏘면 괴물의 등 위로 날아가고 만다. 나름 활에 자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더니 아직 멀었다.
‘겁에 질렸나 보군. 애송이는 애송이인가...’
* * * * *
가장 중요한 것은 장박사 부녀를 구하는 것이다. 일단 그들을 구해야 조승원이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우는 우선 순위를 장박사 부녀를 구하는 데에 두었다.
조승운이 괴물을 향해 공격해 들어가자 진우는 화살을 당겼다. 활대에 실린 마나를 길게 늘여 등 뒤로 보냈다.
허공을 뻗어가던 마나의 실이 장박사에게 총을 겨눈 녀석의 심장 부근에 가서 붙었다. 마나 헌터라면 조금 민감하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상대는 그냥 전문 헌터였다.
옷 위에 살짝 붙어 있는 마나를 감지하지 못했다한인재가 괴물을 향해 화살을 쏘는 순간, 진우 역시 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괴물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한인재의 입가에 비웃음이 묻어나왔다.
‘역시’
그 순간 진우가 뒤로 돌아섰다. 어느 새 그의 활에 새로운 화살이 걸려 있었다. 진우는 빠르게 마나를 실어 화살과 공기와의 마찰을 없앴다. 장박사 부녀에게 총을 겨누고 있던 헌터들이 미처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진우의 활에서 화살이 떠났다.
컥
컥
두 개의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괴물의 머리 위로 날아가던 화살이 갑자기 원을 그리며 돌아서더니 순식간에 총을 들고 있던 한 명의 심장 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을 녀석은 뒤로 돌아서는 진우에게 집중하느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놓쳤다. 총을 든 다른 한 명의 이마에는 공간을 순간적으로 이동하듯이 날아간 화살 하나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무슨?”
한인재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같은 외침을 내뱉는 순간 진우의 손에서 멜리사가 감탄했던 연사가 시작되었다.
오십 발이 들어있던 활통의 화살이 서너 발만을 남기고 순식간에 비워졌다. 놀라서 급히 장박사를 향해 뛰어 들던 헌터들이 무기를 들어 화살을 막으려고 했지만, 잠깐 동안 쏘아진 화살의 수가 너무 많았다.
이동수가 급히 리모콘을 눌렀다. 하지만 이미 그의 몸에도 서너 발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다른 헌터들도 저마다 몇 발씩의 화살을 몸에 꽂은 채 하나둘 씩 쓰러졌다.
이동수의 손에서 리모콘이 굴러 떨어졌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무게를 버티지 못해 쓰러져 있던 장소현이 리모콘을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간발의 차이로 이동수가 리모콘을 누르는 것을 막지 못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몸이 무거워졌다. 진우는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한 발을 간신히 세워 활을 들었다. 25Kg이었던 활의 무게가 엄청나게 늘어나 팔을 짓눌렀다.
등 뒤에서는 힘겹게 레드 플라워의 혀를 막아내던 조승운의 손발이 어지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늘어난 무게에 짓눌린 장박사와 그의 딸이 눈위에 쓰러져 버둥거리는 것도 보였다.
한인재가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그의 화살이 진우가 들고 있는 활 옆을 스쳐 지나 심장을 깊숙하게 노리고 있었다. 진우도 그를 향해 활을 겨눴다. 한인재의 입술이 이지러지는 것이 보였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활을 들고 있는 동안은 반중력 장치의 영향을 받아 모든 무게가 지구 위에서와 동일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일단 활을 떠난 화살은 스키디안 행성의 중력이 주는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비록 하루뿐이지만 스카디안 행성에 오기 전에 진우는 중력 체험실에서 스카디안의 중력에 적응하는 연습을 했다.
그 연습에서 진우가 가장 주력해서 익히려고 노력한 것은 중력에 따라 달라지는 화살의 궤적에 대한 감각이었다. 스카디안의 중력은 지구보다 세다.
지구나 케이튼에서처럼 화살을 쏘면 예상보다 훨씬 아래에 화살이 떨어진다.
비록 하루 동안이었지만 그걸 조정해서 쏘는 감각을 익히려고 애를 썼다.
물론 한인재도 그런 연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곳에 오기 전에 하루의 여유밖에 없었다. 누가 더 심혈을 기울여서 시간을 투자했는지. 혹은 누구의 감각이 더 정확한지. 그것을 겨룰 시간이었다.
두 사람의 화살이 거의 동시에 활을 떠났다. 자신의 마나를 쥐어짜낸 관통력이 두 사람의 화살 끝에 맺혀 있었다. 두 개의 화살이 무섭게 회전하며 상대를 향해 날아갔다. 피할 수 없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을 느꼈다.
진우는 한인재의 화살이 회전하며 자신의 가슴 속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마나를 최대한 끌어 모아 가슴 앞에 쳐 놓은 마나막이 힘없이 부서졌다.
가슴살이 종이장처럼 찢어지며 화살이 몸속으로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신체 재구성으로 인해 더욱 질기게 변한 근육이 파고드는 화살을 기어코 막아섰다. 마나를 잔뜩 먹은 근육이었다.
“컥”
입에서 울컥 핏물이 터져 나왔다. 화살은 심장 바로 밑의 갈비뼈를 부수며 멈췄다.
털썩
한인재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넘어진 그의 등 뒤로 가슴을 관통한 화살이 튀어 나온 것이 보였다. 스카디안의 차가운 눈 위로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흐르다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빨리.”
장소현이 기어코 리모콘을 쥐는 것을 본 진우가 억눌린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그녀가 리모콘의 단추를 누르자 온몸을 내리 누르던 무게감이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일단 자리를 피하자.”
어느새 다가온 조승운이 진우의 어깨를 팔에 끼고 강제로 일으켰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자 가슴 속에 박힌 화살이 흔들리면서 짜릿한 고통이 머리를 헤집었다.
두 사람이 장박사 부녀가 있는 분지 위로 막 올라서자 진성환을 비롯한 세명의 마나 헌터들도 괴물의 등 위에서 내려와 분지 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진우는 일단 가슴에 박힌 화살을 부러뜨린 후 치료 마나를 일으켜 흐르는 피만 급한 대로 지혈시켰다.
조승운의 왼쪽 종아리가 둥그렇게 돌아가며 파인 것이 보였다. 레드 플라워의 혀에 감겼던 모양이었다.
“별 거 아니다. 갑자기 몸이 무거워지는 바람에 살짝 긁혔다.”
핏물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살짝 긁힌 상처는 아니었다. 진우는 치료 마나를 일으켜 조승운의 상처도 일단 지혈만 시켜 놓았다. 아직 위험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조승운을 놓친 레드 플라워는 자신의 등에서 뛰어내린 진성환 일행을 공격하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회전하는 속도는 빠르다고 하더니 어느새 괴물의 머리가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있었다. 세 명이 모두 제각기 다른 방향을 향해 분지 위로 뛰었지만, 쌍검을 쓰는 차덕구가 기어코 괴물의 혀에 몸이 감기고 말았다.
“으악”
순식간에 그의 몸이 괴물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 반으로 잘리는 것이 보였다. 그 처참한 모습에 장소현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차덕구의 희생을 댓가로 분지 위로 올라온 진성환과 나태준이 이를 갈며 진우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조승운의 다리에도 치료 마나를 일으켜 일단 피만 멈추게 하고는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영감님, 정말 대단한 꼬맹이를 데리고 오신 거였군요. 상상도 못했습니다. 으드득.”
진성환이 이를 갈며 씹어뱉듯이 말을 뱉었다. 그의 손에 쥔 창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승운은 진성환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장박사를 향해 말했다.
“스노우 바이크에 소현이랑 함께 타고 조금 멀리 떨어져 있거라.”
“네.”
장박사가 장소현과 함께 바이크에 올라탄 것을 확인하자 조승운이 진성환을 보고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리 사이에 그간 말이 너무 많았어. 뭐 더 할 말이라도 있나?”
진성환이 희게 웃으며 창을 고쳐 잡았다. 나태준 역시 양 손에 든 도끼를 치켜 들었다. 진우가 활을 던지고 허리에서 검을 뽑아들자, 조승운도 역시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궁수가 활을 버리고 검을 든다라. 영감님에게 검도 잘 배웠나 보군. 설마 더블 헌터이기라도 한 건가?”
진성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진우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트리플이라더군.”
말이 끝나자마자 진우는 쏜살같이 진성환을 향해 짓쳐 들었다. 선수를 놓친 조승운이 할 수 없이 나태준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눈밭 위에서 네 사람이 사방에 자욱한 눈가루를 날리며 치열한 싸움을 시작했다.
진성환은 싸울수록 기가 막혔다. 자신의 창은 강력한 힘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정확하고 빨랐다.
괜히 상급 창술사가 아니다. 하지만 진우의 입장에서는 진성환의 창에 실린 힘은 권일도의 일격 일격에 담긴 힘을 능가하지 못했다. 권일도의 주먹과 발을 비롯한 온몸에서 터져 나오는 힘을 맨몸으로 받아내며 싸우던 진우였다.
진성환의 창에 실린 힘이 비록 한 곳에 집중되는 것이었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권일도 역시 무식하게 짓누르는 권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진성환의 창은 진우를 압박하지 못하고 계속 비껴나거나 옆으로 흘렀다.
공격의 정확성과 신속함은 아무래도 조승운 쪽이 한 수 위였다. 그의 공격을 모두 눈으로 잡아내며 마주 겨루던 진우였다. 수십 개의 창이 동시에 찔러오는 것처럼 짓쳐 들어오는 진성환의 창날이 하나하나 진우의 검에 의해 튕겨 나갔다. 진성환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목숨을 걸고 겨루는 실전 전투의 경험은 당연히 진성환 쪽이 많았다. 만약 진우가 진성환과 같은 상급 마나 헌터였다면 싸움은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기량의 차이가 컸다.
진우는 자신에게 전투술을 가르쳐 준 교관들에게 이미 최상급에 맞먹는 솜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았다. 게다가 진우의 인식능력과 신체 재구성 이후의 몸에 대한 조정 능력은 아무리 뛰어난 헌터라고 하더라도 훈련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우월함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가슴에 박혀 있는 화살촉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진우를 계속 괴롭혔다. 싸움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진우는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진성환의 창을 검으로 비껴 흘린 후 직선으로 그의 심장을 노리고 검을 찔러 갔다. 진성환이 다급하게 뻗었던 창을 휘돌리며 창봉으로 진우의 검면을 후려쳤다.
진우는 검면을 그대로 창봉에 밀려주면서 몸을 회전시켜 왼쪽 팔을 뻗었다. 그러자 손목의 토시에서 유성추가 풀려나오면서 그대로 진성환의 가슴을 꿰뚫었다.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찔러 들어온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컥”
진성환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그가 손에 쥔 창을 놓치면서 눈 위에 털썩 두 무릎을 꿇었다.
“크크크큭”
진성환의 입에서 가래 끓는 듯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멍청하군. 나를 죽이면 쿨럭, 팔찌가 터져서 크리스털 cpu가 사라지는 걸 모르나? 어린놈이 무서울 정도의 실력을 지녔지만, 쿨럭, 결국 같이 죽게 생겼군.”
그러자 진우가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필요 없어.”
그의 검이 진성환의 목을 파고 들었다가 빠져 나왔다. 진성환의 몸이 고목처럼 눈 위로 털썩 쓰러졌다. 그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져 갔다. 조승운 쪽을 보니 그의 싸움도 막 끝나 조승운의 검이 나태준의 목을 자르고 있었다.
“팔목의 폭약이 곧 터질 겁니다.”
진우가 고함을 치자 조승운이 펄쩍 뛰며 멀리 물러났다.
“야, 이놈아 그런 거는 진작 말해야지.”
진우가 뒤로 물러서자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진성환의 몸이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졌다.
* * * * *
“어차피 그 놈은 딱 봐도 독한 놈이라서 설득이 안 됐을 거다. 살려둬 봤자 두고두고 뒤통수가 따가웠을 놈이기도 하고. 차라리 그냥 목숨을 끊은 것이 잘 한 거야.”
진우가 진성환을 그냥 죽여버린 것을 조승운은 그렇게 정리했다.
“그래서 기분은 어떠냐?”
진우는 아무 말 없이 씁쓸하게 웃었다. 살아가면서 해결되는 일보다는 정리해야 되는 일만 자꾸 늘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
자신들이 타고 왔던 스노우 바이크에 몸을 실은 두 사람은 얼마 안 있어 장박사와 장소현이 탄 스노우 바이크와 만날 수 있었다. 장박사는 진성환이 팔찌와 함께 터져버렸다는 얘기를 듣고는 경악했다.
“네? 아니 그럼 저희는 어떻게 돌아갑니까?”
조승운이 한심하다는 듯이 장박사를 쳐다 보았다.
“내가 헌터 밥 먹은 게 몇 년인데 아무런 대책도 없이 여기를 들어왔겠냐?”
“대책이 있으세요?”
“이 행성이 무슨 비밀 행성도 아니고, 우리가 여기 들어온 걸 타르코스 소장하고 펄스너 교장이 다 알고 있잖아. 우리가 들어간 뒤로 소식이 없으면 지구에서 가만 있겠냐? 헌터 양성소의 타르코스 소장하고 이미 얘기 다 해 놓고 들어왔다.”
진우가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이번 구조대는 최대 15일을 활동 기한으로 보고하고 들어왔습니다. 20일이 지나도록 저희가 귀환하지 않으면 소장님이 직접 구조대를 만들어서 저희가 처음 도착했던 좌표로 포털 이동을 해 오실 겁니다. 그때 간이 포털 장치도 가지고 오실 거예요. 그걸 통해 귀환하면 될 겁니다.”
조승운이 입을 빼고 투덜거렸다.
“원, 염병을 할 놈들. 난 실종됐다던 너희들이 버젓이 베이스캠프까지 차리고 있을 지는 짐작도 못했다.
허진행이 그 놈이 너희들을 어디다 숨겨두고 그걸 이용해서 내 목숨을 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만 했었지. 그 놈이 헌터 학교 학생일 때부터 지금까지 나하고는 악연이 아주 많았거든. 놈들이 너희들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던 장면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다 떨린다. 에효. 아무튼 최대한 너희들 행방을 찾다가 상황이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진우 이 녀석하고 둘이서 도망이라도 치려고 생각했어. 이놈이 이래 뵈도 인류 역사상 최초의 트리플 헌터거든. 정 안 되면 도망을 갔다가 기간에 맞추어 처음 도착했던 장소에 가서 구조대를 기다릴 생각이었지. 일단은 너희들 생사하고 행방만 확인되면 나중에라도 다시 시도를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그놈들이 준 거 말고 우리가 가져온 배낭에는 텐트하고 식량만 있어.”
진우가 조승운의 말에 입맛을 다셨다.
“저기, 교관님. 제가 트리플 헌터라는 거는 얘기 하지 말라고 하시고는...”
“아, 그렇지. 괜찮아. 장박사하고 소현이는 내 가족이나 다름없어. 너희들 꼭 비밀을 지켜야 한다? 나중에야 어차피 알려지겠지만 당분간은 비밀이야.”
“네.”
장소현이 귀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진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장박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박사님. 협회장하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저 레드 플라워를 지구로 가져가려고 한 이유가 도대체 뭐죠?”
“그건 자네가 이미 말했잖은가. 광석을 캐기 위해서지. 쇠나 구리 같은 일반 금속이야 굳이 레드 플라워가 필요하지 않겠지만, 희귀 금속들은 엄청난 양의 원석을 채굴해야지만 아주 작은 양의 순수한 금속을 얻을 수 있지.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제련 비용이라든가 그로 인해서 야기되는 환경 문제들이 수도 없어. 레드 플라워는 그런 과정을 순식간에 줄여줄 수가 있지. 특히 함유량이 너무 작아서 경제성이 없는 매장 광물까지 레드 플라워 한 마리만 있으면 모두 채굴 가능한 광산으로 변할 수가 있으니까, 아마 욕심이 났겠지.”
“근데 왜 이렇게 급히 서두른 거에요? 새끼 한 마리 잡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조금 더 천천히 시간을 들여 준비할 수도 있지 않았나요?”
장박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새끼의 성장 속도 때문이야. 비록 사람 두 명을 잡아 먹었다고는 하지만 그 전에는 불과 50cm가 조금 넘던 놈이 갑자기 1m 가까운 크기로 자라 버렸거든. 생물 통과 허가에 설사 다소 문제가 생기더라도 레드 플라워는 피부가 암석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마 생물 검사를 피하고 여기서 가져가는 특이한 바위 정도로 속이는 것도 가능했을 거야. 그런데 성장 속도가 빠르니까 자칫 잘못하다가는 포털 통과 규격을 넘어버리게 생긴 거지. 레드 플라워를 크롱처럼 토막내서 통과시킬 수도 없으니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거야.”
“그런데 저런 생물이라면 정말 지구로 가져갔을 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요?”
그 말을 들은 장박사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과학을 모르고 경제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이지. 레드 플라워가 지구라는 색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게 되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네. 장점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거지. 레드 플라워는 햇빛이 나는 날이면 봤던 것처럼 꽃을 피우듯이 피부를 들어올려 변형시키지. 그때는 레드 플라워들이 아무 것도 안 해. 오로지 햇빛만 받으려고 하지. 저놈들이 만약 지구처럼 햇빛이 많은 곳에 가면 매일 꽃만 피우고 있을 거네. 그거야 빛이 없는 갱도 같은 곳에 집어 넣으면 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생물의 환경에 대한 적응력을 가볍게 보면 안 돼. 복덩어리가 될 수도 있지만 재앙이 될 가능성도 있다는 걸 생각해야지. 이번에는 정부에서 잘 못 생각한 거야. 어리석은 결정을 한 셈이지.”
이야기를 듣던 조승운이 두 팔을 홰홰 내 저으며 골치 아픈 얘기는 그만 하라고 성화를 부렸다.
“아무튼 여기 들어온 지 아직 며칠 밖에 안 되었으니, 일단은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서 푹 쉬자. 상처도 치료하고 말이야. 쉬다가 시간 맞춰서 처음 도착한 곳에 가서 기다리면 될 거다.”
그러자 진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교관님. 어차피 시간에 좀 여유가 생겨서 말인데요.”
“뭐?”
“여가 오다가 제가 좀 이상한 걸 봤거든요. 그래서 시간이 난 김에 거길 좀 들렀다가 가면 안 될까요?”
“너 상처는 어떡하고?”
“가다가 중간에 텐트치고 치료하면 됩니다. 제가 트리플이잖아요. 마나도 많고요. 하루 자면서 치료하면 움직이는데 지장은 없을 거에요. 걸어가는 것도 아닌데요 뭐.”
조승운이 장박사와 장소현을 쳐다보았다. 장박사는 빨리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장소현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 * * * *
레드 플라워들이 크게 원을 둘러싸며 있는 곳의 중심에서 진우는 지름 3cm 정도의 동전처럼 생긴 마나 크리스털을 발견했다. 마나를 풀어 탐색을 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뱃속에 넣어 두었던 붉은 색의 마나 크리스털이 진동을 시작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진동이 심해지는 방향으로 탐색을 한 끝에 새로운 마나 크리스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음 밑으로 무려 20m를 파고 들어가느라 꽤 고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수확을 거두어 모두 크게 기뻐했다.
스카디안 행성에 도착한 지 21일 째 되던 날, 약속보다 하루 늦게 포털을 통해 이동한 구조대는 조승운으로부터 늦었다고 된통 야단을 맞기는 했지만, 모두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는 다들 기뻐했다. 특히 진우를 끌어 안고 눈물을 흘릴 듯이 기뻐하던 타르코스 소장 때문에 진우는 몹시 무안할 정도였다.
헌터 학교의 여름 방학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아침에 일어나서 밤새 달린 댓글을 보니 실망하신 분들이 너무 많은 것 같더군요. 처음 글을 연재할 때 예상치도 않았던 지나친 격려와 칭찬을 받으면서 살짝 겁이 났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초보작가의 미숙함이 덕지덕지 묻어났나 봅니다.
남들이 제가 쓴 글을 보아주는 게 기뻐서 글을 시작했는데,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제 글이 싫어서 떠나시는 분들에게는 실망을 드려 죄송하다는 말이라도 드려야 할 거 같아서 후기를 씁니다.
처음 이 파트를 쓸 때에는 사실 크게 복잡하게 만들거나 꼬았다고 생각을 안했습니다. 말미에 나름 어떻게 풀어낼지를 생각하고 쓴 거고 그다지 상황을 어렵게 전개시키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멜리사 교관과 관련해서 등장한 영국 헌터 학교의 교장인 아스탄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짝 복선을 미리 깔아두기도 했었구요. 댓글을 보니 그게 저 혼자만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파트는 제가 두고 두고 읽으면서 교훈으로 삼아야 할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도 글 쓰는 게 좋고 되도록이면 연재는 계속 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아라에 글 올리는 게 저 혼자 즐거우라고 하는 일은 아니니까 고민을 좀 해 봐야 될 거 같습니다.
어쨌든 이번 파트의 상황은 해결해야 할 거 같아서 원래 2회 분량으로 써 두었던 글을 약간 축약시켜서 1회분으로 올립니다. 분량을 늘인다는 지적이 있었거든요. 그런 생각은 정말 한 적이 없는데, 보시는 분들은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결제일이 오늘 하루이신 분들을 위해 원하신다면 파트 마지막은 볼 수 있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부랴부랴 올립니다.
개인적으로는 독이 되었든 약이 되었든 지적해 주신 분들의 의견이 많은 참고가 됐습니다. 이미 써 둔 글을 포함해서 앞으로 이곳에 글을 쓸 때 어떤 점을 고려해야 할 지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어떤 일이 있어도 애초의 플롯을 바꾸지는 않겠지만 그걸 어떻게 전달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이번에 배운 것이 많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 대해서는 정말 너무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