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훈련 첫날 새로운 단계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이던 나르샤는, 하지만 이십일이 지나도록 발현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본인도 답답해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특히 멜리사의 경우는 조승운이나 권일도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애가 닳아 했다. 스승으로서 제자 앞에서는 천천히 하라고 태연히 격려하고는 했지만, 나머지 세 남자는 그녀가 제자를 격려하고 돌아설 때마다 안타까움에 입술을 깨물곤 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진우가 유도 화살의 시연에 성공하는 모습은 또 다시 나르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조승운이나 권일도 같은 신체형 마나 헌터들이야 ‘저 놈은 역시 괴물이야’라는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것에 그치고 말았지만, 같은 궁수로서 나르샤는 그것이 얼마나 경이적인 일인지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훈련을 한지 채 한 달이 안 돼서 멜리사가 가진 모든 기술을 익히는 것도 모자라, 진우는 듣도 보도 못한 유도 화살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도 마나를 발현시키지도 못하고 있었다. 첫날 느꼈던 발전의 가능성으로 인해 가졌던 기대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는데, 진우의 유도 화살을 보는 순간 그런 기대와 희망이 모래성이 무너지듯이 스러져버렸다. 마음속에 있던 의지와 미련 같은 것들이 마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연기처럼 다 흩어져 버렸다.
한 시간이 넘게 아무 말도 않은 채 그린 듯이 앉아 호수만을 쳐다보고 있는 나르샤를 보고 조승운이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려 했다. 그런 조승운을 멜리사가 손을 들어 막았다.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 오랜 기간 나르샤를 가르쳤던 멜리사로서는 지금 나르샤의 속마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듯이 환하게 알 수 있었다.
진우가 유도 화살에 성공하는 것을 본 이후로 계속 저러고 있었다. 마음이 아플 것이다. 진우와 함께 훈련을 시키면 뭔가 발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실패했다. 멜리사는 나르샤의 실망과 좌절이 느껴지는 듯해서 가슴이 아팠다. 멜리사는 조승운을 끌고 버너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차를 끓였다.
“많이 상심한 것 같아요. 지금은 그냥 내버려두시고 차나 한잔 드세요.”
* * * * *
특별히 무얼 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속에서 들끓고 있는 이 반갑지 않은 감정들을 모두 쏟아내 버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모든 소망과, 모든 절망과, 부질없었던 모든 노력과, 그 노력에 덕지덕지 붙어 있던 미련들까지. 그런 감정들을 한꺼번에 화살에 담아 쏘아버리고 싶었다. 그러면 속이 시원해 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최소한 미련이라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르샤는 활을 집어 들었다. 늘 목표를 향해 활을 쏘아 왔지만, 이제는 겨눌 곳이 없어진 텅 빈 시야에 우연히 권일도가 세워 두었던 방패가 보였다. 진우가 유도 화살을 쏘아 맞혔던 바로 그 방패였다. 나르샤는 아무 생각없이 활을 당겼다.
슬슬 짐을 챙기고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활을 접고 있던 진우의 손이 뚝 멈췄다. 느닷없이 굳어버린 진우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낀 멜리사가 진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진우의 시선을 따라 가다 그 시선의 끝에서 활을 들고 서 있는 나르샤를 발견했다. ‘흡’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멜리사의 숨소리가 멈췄다. 나르샤의 몸에서 안개처럼 흘러나와 활끝으로 모이고 있는 마나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진우의 눈에는 복숭아만한 마나를 활 끝에 실은 채 호숫가 한쪽의 나무에 기대놓은 방패를 향해 화살을 쏘는 나르샤가 보였다. 그녀가 쏜 화살이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않고 소리 없이 날아가 쇠로 만든 방패에 부딪혔다.
쾅
차를 홀짝이고 있던 조승운이 놀라서 찻물을 엎을 정도로 큰 소리가 호수 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나갔다. 방패가 산산조각 나서 흩어지고, 방패를 기대 놓았던 나무가 허리를 부러뜨리며 쓰러졌다. 진우와 멜리사가 허겁지겁 나르샤에게 달려갔다. 자리에 주저앉은 그녀를 일으켰다. 나르샤는 멍한 표정으로 스승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맑은 눈이었다. 그 눈에서 샘물이 솟아나듯 눈물이 스며나와 두 볼 위로 흐르기 시작했다.
“스승니임, 으아아앙~~~”
멜리사가 대성통곡을 하듯이 울어대는 나르샤를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그래, 잘했다. 잘했어. 장하다”
모두의 얼굴에 흐뭇함과 후련함이 섞인 웃음이 어렸다. 특히 진우는 내색은 안했지만 줄곧 나르샤와 멜리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 나르샤가 결국 마나를 발현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마음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려움은 있어도 노력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답을 주는 곳. 진우는 왠지 행성 케이튼이 그런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 *
진우가 유도 화살을 구현하는데 성공하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르샤가 마나를 발현시킨 것은 케이튼에서 여름 훈련을 시작한 지 25일 째 되는 날이었다. 오일만 더 지나면 이제 케이튼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지구로 귀환할 시간이 되었다.
나르샤가 마나를 발현시키자 한동안 한가한 모습을 보이던 멜리사가 바빠졌다. 전문 헌터가 마나를 각성해서 마나 헌터가 된 직후에는 몸 안의 마나를 빨리 안정시키지 않으면, 축적되었던 마나가 빠져나가 도로 평범한 전문 헌터가 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예전에 진우가 마나를 각성하자 최현은 그에게 명상에 힘쓰라고 얘기했었다.
마나 헌터가 발현에 성공한 직후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그보다 더 주의가 필요했다. 진우의 경우는 다소 평범하지 않은 과정을 거쳐 마나 발현이 가능하게 됐고, 그와 함께 신체 재구성까지 경험하면서 비교적 순탄하게 발현 직후의 불안정함을 극복했었다. 하지만 신체 재구성을 경험한 지구인 자체가 오직 진우 한 사람뿐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경우 그런 행운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나르샤가 마나를 발현시키면서 멜리사는 한동안 그녀를 유리 그릇을 들고 있는 어린 아이를 다루듯이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명상에 들게 하고, 마나를 발현시켜 안정되게 화살에 싣는 연습을 끊임없이 시켰다.
그게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야 비로소 진우에게 가르쳤던 여러 가지 마나 발현의 기술을 나르샤에게도 훈련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나 헌터로 각성한 경우, 안정화에 실패해서 보통의 전문 헌터로 돌아가더라도 약간의 어려움만 극복하면 다시 마나 헌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발현의 경우에는 일종의 깨달음을 동반한 것이기 때문에 마나의 안정화에 실패하면 또 다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한 다시 마나를 발현시키기가 무척 어려웠다.
한 번 깨달음을 얻는 것도 쉽지 않은데, 다시 그와 같은 깨달음을 그것도 종류가 다른 것으로 얻는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멜리사가 아기 돌보듯이 나르샤를 끼고 도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 * * * *
멜리사와 나르샤가 마나 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진우는 거의 손을 놓고 있던 유성추 훈련을 시작했다. 조승운과 권일도와 계속해서 대련을 하고는 있었지만 점점 큰 도움이 되지 않고 있었다.
두 교관들마저 아무래도 대련 자체를 많이 심드렁해 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멜리사마저 나르샤에 들러붙어 말을 붙이기도 힘들어지다 보니 마땅히 할 일이 없어졌다.
원래는 마나 크리스털을 보관할 겸 겸사겸사 마련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왕 가지고 다니기로 했으면 어느 정도는 무기로서 활용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성추는 장점만큼이나 단점이 많은 무기였다. 추의 무게가 너무 가벼우면 무기로써 활용하기에 좋지 않았고, 너무 무거워도 또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최현은 유성추를 제작할 때, 마나 크리스털 용기를 포함하여 추 전체의 무게를 5Kg에 맞추었다.
또한 유성추를 사용할 때에도 그것을 무기로써 제대로 활용하려면 양손을 포함한 온몸을 사용해야 했다. 검술을 익힌 진우가 검을 버리고 대신 유성추를 사용하는 것은 도토리 한 알을 얻기 위해 밤나무를 베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그래서 진우는 유성추의 사용법을 온전히 익히기보다는 보조적인 용도로만 쓰기로 했다.
어차피 제대로 다루려면 따로 가르쳐 주는 교관이 필요했지만, 케이튼에 온 교관 중에는 유성추가 전문인 사람이 없기도 했다. 어차피 지구로 귀환할 시간도 점점 다가오고 있어서 연습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처음 진우는 토시에 감겨 있는 유성추를 일시에 풀어내었다가 그것을 다시 한 동작으로 되감는 연습에 집중했다. 일단은 풀고 거두는 일이 자유자재로 되어야 검술에 대한 보조로 활용하기가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설프나마 숙달이 된 이후에는 주로 직선으로 던져서 표적을 적중시키는 간단한 동작만을 훈련했다. 접혀 있던 활을 꺼내 상대를 쏘기에는 시간이 다급할 때에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상대를 적중시키는 용도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습을 시작한 지 고작 이틀 만에 진우는 유성추 훈련을 그만 두어야 했다.
* * * * *
유성추 연습이 이틀 째로 접어들던 날, 조승운과 권일도는 둘이서 무언가를 속닥거리더니 슬그머니 트럭을 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세 시간 가량 소식도 없던 그들은 크롱 한 마리를 잡아 돌아왔다. 그들이 열어서 보여준 트럭의 냉동 적재함에는 깨끗하게 도살되어 토막까지 쳐진 크롱 한 마리가 있었다.
“진우 네 훈련도 어느 정도 끝난 것 같고, 나르샤도 마나를 발현시키는 데 성공했지 않냐. 이곳에 온 목적이 거의 다 달성됐으니, 돌아가기 전에 축하 파티라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한 마리 잡아왔다. 오늘은 저녁에는 모처럼 먹고 마시고 쉬기로 하자.”
조승운의 말에 모두가 찬성했다. 사실 그동안 나르샤의 눈치도 있고 해서 모두들 너무 오랫동안 훈련 이외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메마른 생활을 해온 감이 없지 않았다.
기지로 돌아가는 트럭 위에서 진우는 통신기를 이용해 기지로 연락해서 남경호 주방장을 찾았다. 남경호 주방장이 통신기에 나타나자, 진우는 그에게 크롱을 한 마리 잡아 갈 테니 오늘은 특별히 맛있는 술과 함께 좋은 요리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학생이 술을 찾는 소리에 깜짝 놀랐던 주방장은 사정 얘기를 듣고 껄껄 웃으며 걱정하지 말고 기대하라는 대답을 보내주었다.
하지만 일행이 기지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제일 먼저 반긴 사람은 주방장 남경호가 아니었다. 진우는 물론이고 교관들의 입장에서도 결코 반갑다고 할 수 없는 최명도 교감이 앞머리가 시원하게 벗겨진 중년의 남자와 함께 기지 입구에 나와 일행들을 맞았다.
일행이 트럭에서 내리자 중년의 남자가 조승운 교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허진행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요. 오랜만입니다. 잘 지냈습니까?”
인사를 받는 조승운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나이가 일흔인 그는 평소에 웬만한 헌터들에게는 그냥 하대를 했다. 그런데 중년의 남자에게는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 진우가 의아해 하며 권일도를 바라보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진우의 귀에 말을 했다.
“헌터 협회 회장이다.”
말하는 권일도의 목소리도 어딘가 좀 냉랭했다. 중년 남자와 시큰둥하게 인사를 주고 받는 조승운의 얼굴에도 그다지 반갑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는 표정이 노골적으로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그걸 보지 못했는지 허진행 협회장이라는 사람의 목소리는 밝고 우렁차기만 했다.
“저야 뭐 늘 바빠서 정신없이 지냅니다. 요즘 학생들 가르치시는 일을 다시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학생들이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이 다 기쁘고 감사합니다.”
뭔가 뻔한 인사치레인 것 같은 말을 하던 협회장이 갑자기 목소리를 줄이며 조승운의 어깨 위로 얼굴을 가까이 하더니 속삭이듯 얘기를 했다.
“훈련하고 오시느라 피곤하신 줄은 아는데,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좀 내 주시지요.”
조승운이 대답을 않고 얼굴만 찡그리고 있자, 그가 다시 소리를 죽여 말했다.
“중요한 일입니다. 잠시만 자리를 함께 해 주십시오.”
조승운이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같이 있던 교감이 얼른 그에게 다가가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협회장의 얼굴이 이번에는 멜리사에게로 향했다.
“멜리사 여사님이시군요. 한국 헌터 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허진행이라고 합니다. 명성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멜리사 킴벨입니다.”
멜리사가 얼떨결에 대답을 했다. 그러자 허진행은 멜리사에게 조금 다가가 역시 마찬가지로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여사님도 저에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긴히 부탁드릴 말이 있습니다.”
지위가 지위라서 그런지 영어가 제법 능통했다. 멜리사가 교감과 함께 멀어져가는 조승운을 잠시 바라보더니 협회장에게 물었다.
“조승운 교관하고 제가 함께 들어야 하는 얘기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멜리사가 권일도와 나르샤, 진우를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이 사람들도 함께 들어도 되는 이야기인가요?”
그러자 협회장의 얼굴에 곤란하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건, 좀...”
“같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는 피곤하니 이만 가서 쉬고 싶네요.”
그러자 협회장은 끙 하는 신음 소리를 내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웃음을 띠었다.
“정 그러시다면 함께 가시죠. 다만 이야기를 듣고 나시면 당분간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멜리사가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하지만 얘기를 좀 빨리 끝내주셨으면 좋겠네요. 저희가 지금 훈련을 마치고 막 돌아오는 길이라 다들 피곤하기도 하고 배도 고프거든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허진행이 인간성이 철철 넘쳐나는 듯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우는 왠지 그 미소가 조금 불안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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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의 두 번째 외계 행성 탐험이 시작됩니다. 이 부분으로 빨리 넘어가고 싶어서 3연참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