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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헌터-22화 (22/235)

22화

처음은 그저 몇 가닥의 가느다란 실이 호주머니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약간 투명한 은백색의 실들은 잠시 동안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는 듯하더니 이내 진우의 허리를 타고 올라가 피가 덩어리져 엉겨 있는 배 위를 향해 나아갔다. 그의 배에는 케로스의 발톱에 의해 세 갈래로 깊게 갈라진 상처가 있었다. 실들은 상처 위를 탐색하듯 톡톡 건드리며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을 한 듯 그 가운데 두세 가닥이 상처를 뚫고 배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주머니에서 더 많은 실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쏟아져 나온 실들은 금세 배 위의 상처를 하얗게 덮었다. 상처를 헤집고 진우의 뱃속으로 파고드는 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많아졌다. 배 위의 상처가 실에 의해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일부가 케로스의 뿔에 찔렸던 가슴의 상처 쪽으로 움직였다. 녀석들은 또 다시 그의 가슴 주위를 탐색하듯 잠시 배회하더니 깊게 패인 상처 속으로 쑥 들어갔다.

주머니에서 나오는 실의 양이 더욱 많아졌다. 녀석들은 진우의 몸 여기저기를 탐색하듯 옮겨 다니면서 상처가 있는 곳마다 파고들었다. 어느새 그의 몸은 수천, 수만 개의 가느다란 실들로 이루어진 솜뭉치처럼 변해버렸다. 그러고도 주머니에서 나오는 실의 양은 계속 늘어나 결국에는 진우의 몸 전체가 은백색의 실들로 하얗게 둘러싸여 버렸다. 그 모습은 마치 누에가 실을 뽑아 만든 고치처럼 보였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은백색의 실로 만들어진 고치는 사흘 동안 진우의 몸을 온통 둘러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변하는 게 없어 보였지만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고치의 내벽에서 계속 실들이 풀려나와 진우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몸 안에 스며드는 실의 양이 증가하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고치의 두께가 하루하루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흘째 되던 날 아침, 진우를 뒤덮었던 실들이 모두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고치가 사라지자 드러난 진우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렸는지 반질반질한 민머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심지어 눈썹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찢어진 방호복 사이로 보이던 상처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흉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끙.”

아침 해가 정오의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 무렵, 진우는 무거운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깨어난 그가 처음 느낀 것은 타는 듯한 갈증과 엄청난 허기였다. 입고 있던 방호복이 헐렁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이 야위어 있었다. 케로스의 공격을 받고 쓰러질 때만 하더라도 진우는 제법 단단하고 건장한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흘 만에 깨어난 그의 몸은 뼈마디 위에 그냥 가죽을 입혀 놓은 것처럼 앙상하게 변했다.

머리가 깨지는 듯 아프고 정신이 몽롱했다. 뭔가를 먹고 마시고 싶다는 다급한 욕망 이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눈에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개울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트럭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아직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 비척거리며 개울을 향해 다가갔다. 목이 너무 말랐다. 진우는 개울물에 고개를 처박고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목울대가 끝도 없이 움직이며 엄청난 양의 물이 뱃속으로 넘어갔다.

“푸하~.”

배가 볼록해질 정도로 물을 마신 그는 그대로 개울가에 쓰러졌다. 여전히 정신이 몽롱하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고개가 저절로 옆으로 넘어갔다. 트럭이 보였다. 진우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세우고 일어나 어기적대며 트럭으로 다가갔다. 케로스와의 마지막 전투 때 받은 충격 때문인지 짐칸에 있던 밀폐형 적재함이 열려 있었다. 적재함 밖으로 크롱의 다리 한 짝이 반쯤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꽁꽁 얼어있던 녀석은 사흘 동안 완전히 녹아 있었다.

진우는 부들거리는 팔로 낑낑대며 그것을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미친놈처럼 허겁지겁 크롱의 다리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날 것인 크롱의 고기를 뜯어먹는 그의 모습은 완전한 야생 그대로였다. 하지만 본인은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늑대소년처럼 크롱 다리를 먹어치우던 진우는 배가 어느 정도 차자 다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그의 몸에서 누런 진물과 함께 끔찍한 악취가 풍기는 액체들이 땀이 배어나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웠던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진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호수 위를 비추던 햇빛이 희미해질 때 즈음, 그는 다시 깨어났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옷에 배인 냄새가 코를 찔러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는 별 생각 없이 옷을 몽땅 벗어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격렬한 뇨의와 함께 배가 찌르듯이 아파왔다. 방향을 정해 놓은 자동인형처럼 호수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 진우는 선 채로 소변과 대변을 보았다. 엄청난 양이 나왔다.

배설을 마치고 나자 또 다시 끔찍한 갈증과 허기가 덮쳐왔다. 호수에서 나와 개울로 달려가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고 나서는 잠시 쓰러졌다 다시 적재함에서 고기를 꺼내 먹었다. 적재함에는 예전에 최현이 잡아 두었던 크롱 두 마리가 토막이 난 채로 들어 있었다. 진우는 고기에 붙어 있던 뼈까지 오도독 대며 씹어 먹었다. 깨어난 뒤 허약해진 상태에서 그렇지 않아도 부실하던 이빨이 몽땅 빠지고 말았다.

배가 차자 또 의식을 잃었다. 반나절이 지나도록 정신을 잃고 있던 그는 깨어나자마자 다시 배설을 위해 호수로 달려갔다. 어느새 이가 빠진 자리에서 새롭게 돋아나는 이빨이 머리를 내미는 게 느껴졌다. 잇몸 전체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이빨이 채 자라지 않아 고기를 물어뜯기 어렵게 되자 나중에는 손으로 그냥 뜯어서 삼켰다. 온몸이 고기에서 흘러나온 핏물로 범벅이 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또 의식을 잃었다.

진우의 식탐은 대단했다. 적재함에 실렸던 고기를 뼈째 씹어 먹었을 뿐 아니라 눈에 띄는 것은 가리지 않고 다 입으로 가져갔다. 호숫가의 나무 위에 매달린 과일 중에서 손이 닿는 곳에 있는 것은 죄다 그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풀도 뜯어 먹고 향기를 자랑하던 꽃들도 삼켰다. 심지어 나무껍질도 벗겨 먹었다. 버섯이나 잡초를 가리지 않고 입에 넣었다가 몇 번씩 몸에 독이 올라 시퍼렇게 변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 쓰러졌다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정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도 대여섯 번씩 마시고 먹고 싸고 정신을 잃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한 번씩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마다 진우의 신체는 계속해서 변화를 거듭했다. 처음 고치가 사라지고 깨어났을 때에는 몸에 한 가닥도 남아 있지 않던 털들이 어느새 다시 자랐다. 하루 만에 대머리에서 밤송이로 변했던 머리카락들은 닷새가 지나자 귀를 덮을 정도로 자랐다. 눈의 각막이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하루 내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고생하기도 했다.

여전히 정신이 맑지 않았지만 그 와중에도 본능에 이끌리듯 물과 고기를 찾아 마시고 먹었다. 소리와 냄새만으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불과 하루 만에 각막이 새로 나고 시력이 회복되었다. 새로운 각막으로 본 세상은 모든 것이 투명할 정도로 선명했다. 고막이 떨어져 나갔다가 새로 나고, 손톱 발톱 역시 모두 빠졌다가 다시 자랐다.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온 몸의 피부가 뱀이 허물을 벗듯 벗겨졌다. 전에도 그다지 나쁜 피부는 아니었지만 허물이 벗겨진 뒤로는 탄력과 윤기가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진우의 겉이 아니라 몸속에서 이루어졌다. 근육이 다시 붙고 내장 기관이 새로운 세포들로 대체되었다. 골수가 바뀌고 뼈들이 모두 새롭게 만들어졌다. 한 번 죽으면 잘 재생이 안 된다는 뇌세포마저 활기를 되찾거나 다시 복원되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신경 계통이 완벽하게 재구성되었다는 점이었다.

진우 자신은 물론이고 그를 진찰했던 의사들도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본래 그의 신경은 감각 계통과 운동계통의 구성이 이질적이었다. 정확히는 운동계통만 일반인들과 같았고, 나머지는 모두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뉴런의 구성 자체가 달라 보통 사람들에 비해 정보 전달 속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 때문에 진우는 늘 인식하고 생각하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몸 때문에 고생을 했다. 양쪽 신경 계통의 차이로 인해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둔한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신경 계통의 부조화가 일으킨 폐단이었다.

그런 신경 계통이 감각 계통을 표준으로 해서 완전히 새롭게 구성되었다. 기존의 운동신경 체계가 해체되고 완전히 새로운 체계로 재편되었다. 아직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금이라면 그동안 진우를 고생시켰던 맹수들을 훨씬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신경계통이 변화하는 동안 진우는 엄청난 고통과 혼란으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의식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 것은 물론 몸 구석구석이 번갈아 말을 듣지 않았다. 팔 다리가 교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얼굴 근육이 마비되어 한동안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는 것이 불가능한 때도 있었다. 하루 종일 미칠 듯한 가려움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치가 사라진 지 엿새째 되던 날 아침, 전날 초저녁부터 한 번도 깨어나지 않고 쓰러져 있던 그가 비로소 깨어났다. 모처럼 머릿속이 거울처럼 맑았다. 주변의 초목이 황폐화되고, 두 마리나 되던 크롱 고기가 뼈까지 모두 그의 뱃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어? 이게 뭐지?”

눈꺼풀 위를 자극하는 햇살에 눈을 뜬 진우는 자신이 홀딱 벗고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민망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마지막 힘을 다해 케로스의 입에 총을 넣고 방아쇠를 당기고 쓰러졌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느꼈던 엄청난 갈증과 허기. 그 뒤로 떠오르는 며칠 동안의 기억은 온통 마시고 먹고 싸는 것 밖에 없었다.

“완전히 미친놈이었군.”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괴상한 행동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그 동안 누구에게 들키거나, 주변에 해를 끼친 기억은 없었다.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잠시 머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렇더라도 자신이 왜 그토록 탐욕스럽게 갈증과 허기를 채우는 데에만 집착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몸을 추스르는 것이 먼저였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진우는 자신의 몸에 있던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는 또다시 깜짝 놀랐다.

“분명 가슴하고 배에 제법 심각한 상처를 입었었는데...”

상처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뿐 아니라 피부와 몸도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상처가 났던 곳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았지만 아무런 통증이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입고 있던 옷은 다 벗어던진 건가?”

사람이 없는 곳이니 누가 볼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벌거벗고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한쪽에 자신이 벗어던진 옷가지가 구겨진 채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우,. 이게 무슨 냄새냐.”

옷을 입으려고 집어 드는데 떨어져 있던 옷가지에서 이루 형용하기 어려운 악취가 풍겨 나왔다.

“주머니에 있던 것만 꺼내고 이건 버려야겠네. 도저히 입을 수가 없잖아.”

진우는 바지 호주머니에서 마나 스톤을 찾기 위해 조심스럽게 뒤적였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마나 스톤이 보이지 않았다.

“큰일 났다. 선생님이 몹시 소중하게 여기던 거라고 했는데.”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다시 한 번 냄새를 무릅쓰고 샅샅이 뒤졌지만 마나스톤은 나오지 않았다.

“호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가지고 있었어. 케로스하고 싸우던 도중에 흘렸나?”

냄새나는 옷은 나중에 태워 버리기로 하고 알몸으로 주변을 몇 번이나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마나스톤은 발견되지 않았다. 진우는 낙담을 하고 땅 위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미친... 환장하겠네, 정말.”

최현의 얼굴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까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조박사가 무려 십억이나 하는 물건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사연이 담긴 물건이라는 점이 더 컸다. 값으로 따질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 걸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한참 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할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현이 살아 있으면 나중에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죄하더라도 우선은 기지로 돌아가는 것이 먼저였다.

“냄새 때문에 일단 좀 씻어야겠다.”

운전석 옆에 있는 콘솔 박스에서 칫솔과 비누를 찾아 개울물을 이용하여 몸을 씻고 양치질을 했다. 몸에 배인 악취가 어찌나 지독하던지 아무리 비누로 씻어도 냄새가 쉬 가시지를 않았다. 진우는 몇 번씩이나 몸 구석구석을 빡빡 문질러 씻었다. 씻고 나니 배낭이 사라지는 바람에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생각이 났다. 할 수 없이 짐칸 옆에 묶어 두었던 화물 덮개용 천을 찢어 아랫도리만 대충 둘러 묶었다.

“밀림의 왕자 나셨네. 무슨 타잔이냐?”

그러고 보니 몸의 근육은 조금 줄어들었지만 전보다 더 탄력이 생긴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오히려 짧아졌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키도 좀 자란 것 같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최현이 주었던 헌터 패드를 꺼내 날짜를 확인해 보았다.

“5일 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어? 이삼일이 아니었다고? 그러고 보니 왜 배가 고프지 않은 거지?”

알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중에 하나씩 기억을 다시 더듬고 따져봐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케로스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았고, 그토록 원하던 트럭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비록 검이 부러져 버렸지만 총은 망가진 데가 없어 보였다. 총알도 아직 한 탄창이나 남아 있었다. 이제 빨리 점검을 하고 기지로 돌아갈 준비를 할 차례였다.

진우는 트럭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만약 트럭이 움직여 준다면 의외로 빨리 기지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나이가 어려 면허는 없지만 그동안 최현을 따라다니면서 무중력 자동차를 다루는 법은 대충 배워 두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누가 무면허 운전이라고 따질 사람도 없었다.

몇 번 스위치를 돌렸지만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계기판에 불은 들어왔지만 정작 시동이 걸리지 않으니 온 몸에 맥이 탁 풀렸다.

“제발, 그냥 마나가 떨어진 것이라고 말해 줘라.”

진우는 운전석 뒤의 보관함을 열어 최현이 넣어두었던 마나스톤을 꺼냈다. 그것을 전에 보았던 대로 핸들 옆에 있는 투입구를 열고 집어넣었다. 잠시 후 계기판에 표시된 마나 잔량이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르렁거리던 트럭이 자세를 잡고 살짝 떠올랐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후, 다행이다.”

서서히 차오르던 마나 게이지의 양이 최대로 올라갔다.

“오케이. 준비 완료.”

태양이 수풀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곧 날이 저물 것이다. 지금 출발하기에는 시간이 애매했다. 진우는 일단 트럭을 몰아 호숫가의 수풀 속으로 옮겼다. 내친 김에 케로스의 시체를 갈라 마나스톤을 추출하기로 했다. 자신의 손으로 쓰러뜨린 최초의 마수였으니 그 안의 마나스톤을 그냥 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케로스의 가죽은 매우 단단하면서도 질겼다. 반 동강 난 검 역시 날이 상해서 그런지 힘을 잔뜩 주고 톱질을 하듯 써는 데도 가죽이 쉽게 잘리지 않았다. 케이튼 행성에 온 뒤로 훈련을 통해 근육이 제법 단단해 졌다고 생각했는데 쓰러져 있는 동안 도로 약해진 것 같았다.

“이놈이 죽어서도 속을 썩이네.”

마나를 움직여 오른손으로 보냈다. 가볍게 마음을 움직인 것만으로도 막대한 양의 마나가 순식간에 오른손에 스며들었다. 힘이 전보다 훨씬 더 증가하는 것이 느껴졌다.

“험한 싸움을 겪어서 그런가? 전보다 마나가 더 많아진 거 같아.”

케로스의 가죽이 조금씩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잘리는 속도가 더뎠다.

“이 놈은 먹은 게 죄다 가죽으로 갔나? 엄청 질기네.”

짜증이 났다. 이러다가는 가죽만 자르다가 해가 질 것 같았다. 칼이 조금 더 날카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오른팔의 마나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쑥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반 토막 난 검 위로 시퍼런 마나가 솟구쳐 올랐다.

“헉.”

진우는 깜짝 놀라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검을 둘러싸고 있던 마나가 씻은 듯 사라졌다. 마나가 사라진 검은 그저 평범한 칼에 지나지 않았다.

“뭐야 이건.”

분명 마나의 발현 현상이었다.

“어떻게?”

진우는 신체에 마나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케이튼에 도착했다. 열심히 훈련을 한 덕분인지, 아니면 자신의 체질이 특이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도착한 지 한 달이 조금 넘어서 마나를 각성했다. 한 달 만에 체내의 마나 축적량이 대략 100P를 넘겼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것만 해도 남들이 들으면 거짓말이라고 할 만큼 경이적인 성장 속도였다.

그런데 몸 안에 마나를 축적하는 속도는 보통 체내 마나 축적량이 많을수록 느려졌다. 정확한 비례 관계는 아니므로 사람들마다 상당히 큰 폭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특별한 계가나 각성을 거치지 않는 한 갈수록 마나축적 속도가 빨라지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진우는 마나를 각성한 뒤로 아직 20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최현의 말에 의하면 발현 단계에 이르기 위한 체내 마나 축적량은 필요 수치가 가장 적은 치료 계열 마나 헌터만 하더라도 최소한 200P 정도는 넘어야 했다. 하지만 신체형이나 사수형 헌터들처럼 외부의 도구에 마나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300P 이상의 마나를 축적해야 했다. 마나가 생물체에 깃드는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마나를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진우가 벌써 200P 이상의 마나를 몸에 쌓는다거나, 심지어 마나를 신체도 아닌 도구에 발현시킨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마나가 검에 발현되었어.”

단순한 느낌만이라면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순간적으로 착각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우는 마나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최현이나 조박사가 마나를 발현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고, 심지어는 마수들의 몸에서 배어나오는 마나를 관찰한 것만 해도 자신이 직접 상대한 케로스를 비롯하여 여러 차례였다. 착각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고민하지 말고 해 보자. 해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 번 천천히 오른손으로 마나를 이동시켰다. 마나가 오른쪽 어깨부터 손끝까지 가득 차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까지는 지난 십여 일 동안 맹수들과 싸우면서 이미 익숙해진 마나를 이용한 신체 강화였다. 마나를 각성한 헌터라면 누구나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과는 달리 그것이 검을 통해 발현되지는 않았다.

‘아까는 어떻게 해서 마나가 발현되었던 거지?’

케로스의 가죽을 자르면서 했던 일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칼이 조금 더 날카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진우는 일단 자기 팔을 대상으로 의지를 더했다.

‘단단하게, 그리고 더 세게’

몸 안의 마나가 자신의 요구에 부드럽게 웃으며 응답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오른쪽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시퍼런 마나에 감싸이는 것이 보였다. 팔이 단단해 지고 힘이 샘솟는 듯한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분명한 발현 현상이다.’

신체에 대한 발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단순한 강화가 아니라 발현이었다. 더 이상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진우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마나에 의지를 더했다.

‘검을 단단하게, 더 날카롭게’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손을 감쌌던 마나가 검을 향해 물이 밀려 나가듯 확산되었다. 시퍼런 마나가 검을 물들이는 것이 보였다. 마나가 덧씌워진 검 건체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진짜였어.’

긴장을 풀고 마나를 거두겠다는 생각을 하자 팔과 검을 뒤덮었던 마나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진우는 기절하듯 땅에 퍼질러 앉았다.

“도대체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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