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9화 (19/235)

19화

트럭을 향해 하강하던 두 마리 괴조 가운데 하나가 커다란 발로 차체를 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이 타고 있던 트럭은 내려가던 자세 그대로 앞으로 재주를 넘으며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핸들을 꼭 쥔 최현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옆자리를 보았다. 진우가 쳇바퀴 속에서 발이 미끄러진 다람쥐처럼 사방으로 부딪히며 돌고 있었다. 안전벨트 같은 것은 애초에 맬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상황이었다.

“정신 차려.”

최현은 한 손으로는 핸들을 붙잡고 차의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한편, 다른 한 손을 뻗어 좌석을 벗어나 이리저리 부딪히고 있는 진우의 몸을 끌어당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신을 잃은 듯했다. 그는 급히 무중력 장치를 조정하여 앞으로 돌고 있던 트럭을 간신히 세웠다. 트럭이 공중제비를 멈추자 한 손을 뻗어 의식을 잃은 진우를 다시 자리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트럭의 기수를 아래로 숙인 그가 페달을 있는 힘껏 밟아 다시 땅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정면에서 또 다른 괴조가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

“제기랄.”

전면의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면서 운전석 지붕이 괴수의 발톱에 의해 통째로 뜯겨나갔다. 그 충격으로 인해 기수가 위로 덜컥 치켜 오르면서 땅으로 향해야 할 트럭이 거꾸로 하늘을 향해 쑤욱 올라가고 말았다.

“빌어먹을.”

이대로 가다가는 괴조를 피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현은 아예 무중력 장치를 꺼버렸다. 그러자 하늘을 향해 올라가던 트럭이 덜컥 멈추더니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쿵’ 하는 충격이 다시 느껴지면서 떨어지던 트럭이 허공에 멈추었다. 이어서 쇠가 긁히는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차가 아래로 기울며 운전석이 땅을 향한 채로 공중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모양이 되었다.

최현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핸들을 밟고 뚜껑이 날아간 운전석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괴조 한 마리가 짐칸 위에 설치된 화물 지지용 버팀대를 발로 움켜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대도를 빼어들었다. 정신을 잃은 진우의 몸에 채워진 안전벨트를 다시 한 번 확인한 그는 운전석을 넘어 짐칸을 향해 기어나갔다. 어떡하든 저 발을 트럭에서 떼어내어야 했다. 그의 몸 전체로 빠르게 마나가 퍼져나갔다.

트럭을 발톱으로 잡고 있던 괴조는 암컷이었다. 녀석은 갓 태어난 새끼에게 주기 위한 먹이를 찾기 위해 수컷과 함께 호수를 떠났다가 생전 처음 보는 생물이 하늘을 나는 것을 발견하고 접근했다. 모양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꽁무니 쪽으로 접근해서 툭 쳐보았더니 특별한 저항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늘 하던 대로 수컷이 반대 방향에서 날아오면서 머리를 쥐어뜯자 죽어 버렸는지 녀석은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별로 사납지 않은 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냉큼 날아가 떨어지려는 녀석의 몸통을 움켜잡았다. 그대로 호수 안의 섬에 자리 잡은 둥지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때 갑자기 상대를 움켜 쥔 발등 위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최현은 암벽 등반을 하듯 짐칸으로 기어올라 온몸의 마나를 대도에 밀어 넣었다.

“놔라, 이 자식아.”

그는 한 손으로 대로를 틀어잡고 트럭을 잡고 있는 괴조의 발등을 있는 힘을 다해 내려찍었다. 괴조가 트럭을 놓아버리면 땅으로 추락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이대로 끌려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칼이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중급 헌터 중에는 제법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힘으로도 괴조의 발조차 관통을 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아 눈매가 저절로 일그러졌다.

최현이 이를 갈며 다시 한 번 놈의 발을 찌르려고 하는데 갑자기 괴조가 트럭을 잡고 있던 두 발 가운데 하나를 놓아버렸다. 트럭이 기우뚱 하면서 기울어졌다. 최현은 다급히 한 손으로 트럭에 달라붙었다. 그 순간 트럭을 놓은 괴수의 한쪽 발이 신경질적으로 그의 몸을 툭하고 쳤다. 그는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짐칸에서 튕겨져 나와 하늘을 날았다. 그런 최현을 지켜보던 수컷이 순식간에 다가와 부리로 냉큼 그의 왼팔을 물어버렸다. 팔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이 그의 머리를 관통했다.

*  * * * *

수컷은 괴상하게 생긴 놈의 몸통을 암컷이 잡자 이제 그만 둥지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먹이를 잡고 있던 암컷이 갑자기 작은 비명소리와 함께 발 한쪽을 들어 신경질적으로 뭔가를 뿌리쳤다. 먹이에게 벌레가 붙어있던 모양이었다. 조그맣고 괴상하게 생긴 놈 하나가 암컷의 발짓에 밀려 공중으로 툭 하고 날아올랐다.

‘요놈 봐라?’

재빨리 다가가 냉큼 물어버렸다. 간식거리였다. 출출한 김에 삼키려고 하는데 암컷이 ‘카악~’하며 날카롭게 경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새끼에게 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수컷은 입맛을 다시며 녀석을 물고 둥지로 돌아가기로 했다.

*  * * * *

괴조의 부리에 물린 최현은 왼팔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괴조가 방향을 호수쪽으로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칫 팔이 끊어지는 것은 둘째 치고 녀석들의 먹이가 될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오른손에 들린 대도를 치켜들었다. 눈앞에 핸드볼 공 크기만 한 괴조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보였다.

‘젠장.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는 이를 질끈 물고 마나를 최대한 끌어 모아 대도에 불어넣었다. 어차피 기회는 한 번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팔을 힘껏 휘둘러 마나가 실린 대도를 괴조의 눈을 향해 던졌다. 워낙 가까운 거리에서 날아간 대도가 미처 눈을 감지 못한 놈의 눈동자에 ‘푹’하고 박히는 것이 보였다.

*  * * * *

갑자기 눈동자에서 끔찍한 고통이 전해졌다. 수컷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본능적으로 맹렬하게 날갯짓을 했다. 녀석의 몸이 빠르게 트럭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방향이 호수가 아닌 초원 쪽이었다. 뒤에서 암컷이 ‘카악~’하며 경고의 소리를 냈지만 수컷은 그 소리에 신경을 쓸 정신이 없었다.

최현은 대도를 괴조의 눈동자에 꽂아 넣는데 성공했지만, 녀석이 자신을 문 채 오히려 트럭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보고 순간적으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괴조의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무거운 트럭을 다리에 움켜 쥔 암컷은 미처 수컷을 따라오지 못하고 소리만 질러댔다. 최현에게는 고통과 초조로 뒤엉킨 5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수컷은 초원을 향해 수십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비행했다.

카아아악~~

수컷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신과 계속 멀어지자 당황한 암컷이 찢어지는 듯한 높은 소리로 계속 울어댔다. 그제야 수컷이 속도를 줄였다. 몸을 멈춘 녀석은 암컷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카악~’하고 소리를 냈다. 덕분에 부리에 팔이 물려 매달려 있던 최현의 몸이 수컷에게서 떨어져 나와 숲 속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대수림의 거대한 나무가 커다랗게 확대되며 그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콰지직

최현은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도 사력을 다해 품에 들어오는 나뭇가지를 끌어안으려고 애를 썼다. 추락하던 그의 몸이 제법 굵은 가지 하나에 매달리며 간신히 멈췄다. 왼팔은 물론이고 온몸이 죽을 것처럼 아팠다. 잠시 후 끝내 의식을 잃은 그의 몸이 힘없이 늘어지더니 쿵 하고 땅 위로 떨어졌다. 쓰러진 그의 몸 위로 꺾인 나뭇가지와 함께 나뭇잎들이 비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최현을 물고 가던 수컷 괴조 역시 눈동자의 고통을 이기고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멀리서 암컷이 여전히 먹이를 움켜쥐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수컷은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쉽게 먹이를 하나 잡았다고 좋아했는데 괘씸한 벌레 한 마리 때문에 한쪽 눈이 보이지를 않게 되었다. 일진이 사나운 날이었다. 괴조 두 마리는 그만 둥지로 돌아가기로 했다.

*  * * * *

트럭 안에서 정신을 잃고 있던 진우는 간신히 눈을 떴다. 갑자기 차가 공중에서 뒤집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 같았는데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옆을 보니 최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 차가 지금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거지? 주변을 살펴보려는데 위쪽의 느낌이 휑했다.

고개를 들자 운전석 지붕이 날아가고 없는 것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뭔가 자세도 이상했다. 눈앞에 대수림의 나무들이 정면으로 보였다. 차가 땅을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때 위에서 새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안전벨트를 조심스럽게 풀고 일어나 운전석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맙소사.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발에 트럭을 매달고 날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괴조의 다리 사이로 호수가 보였다. 정신을 잃기 전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녀석이 트럭을 붙잡은 채 호수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호수 근처에 괴조의 둥지가 있는 가 보구나.’

이대로 있다가는 영락없이 새 먹이가 될 판이었다. 그는 간신히 구겨진 몸을 펴고 자세를 잡았다. 어디를 어떻게 부딪쳤는지 몸 구석구석에서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에도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대로 잡혀갈 순 없었다.

지상과의 거리가 다소 멀었지만 잘 하면 나무 위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크롱이 두 마리나 실려 있는 무거운 트럭을 매달고 가는 것이 힘에 부쳤는지 괴조의 고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진우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트럭이 유난히 키가 큰 나무 위를 지나는 순간 휑하니 비어있는 전면을 향해 과감하게 몸을 날렸다. 떨어지는 순간 무기를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제기랄.

눈앞에 주변의 나무들보다 최소한 한 길은 넘게 솟아있는 나무의 가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진우는 나뭇잎 사이로 언뜻 보이는 팔뚝 굵기의 나뭇가지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우지직

그의 몸이 통째로 얹힌 나뭇가지는 진우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길게 찢어지며 꺾여나갔다. 하지만 덕분에 그는 그 다음 나뭇가지에 팔을 걸 수 있었다.

“우욱.”

나뭇가지에 짓눌린 통증으로 인해 배부터 가슴까지 토할 것 같은 고통이 엄습했다. 진우는 간신히 몸이 멎자 아픔을 참으며 나무줄기 쪽으로 기어가듯 움직였다. 안전하게 몸을 세울 수 있는 곳까지 이동하자 굵은 나뭇가지를 딛고 일어선 그는 먼저 괴조가 매달고 가던 트럭을 찾았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어느새 호수 가까이 다가선 괴조와 트럭의 모습이 보였다.

*  * * * *

괴조들이 매달고 가던 트럭은 결국 둥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암컷이 움켜쥐고 있던 짐칸의 버팀대가 트럭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동을 하는 동안 에도 심상찮은 조짐을 보이던 버팀대는 괴조가 둥지가 있는 호숫가 근처에 거의 다다른 순간 결국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키 큰 나무 위에서 보고 있던 진우의 눈에 트럭이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호수 근처의 숲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저거,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겠네.”

트럭의 불쌍한 운명을 목격한 진우의 마음도 안타까웠지만 진짜로 짜증이 난 것은 어미 괴조였다. 새끼의 먹이가 될까 해서 나름 고생하면서 잡았던 먹이가 발톱 사이로 앙상한 쇠붙이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리자 녀석은 신경질적으로 울음을 내뱉고는 호수 안에 있는 섬으로 내려앉았다. 그 뒤를 따라 애꾸가 된 수컷이 땅으로 내려갔다. 그곳에 녀석들의 둥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진우는 물론 괴조들도 알지 못했지만 공중에서 떨어지던 트럭의 운명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운이 좋았다. 고도가 많이 낮아진 덕도 있었지만 떨어지던 도중 울창한 수림을 이루고 있던 나무들이 쿠션의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트럭은 나무들을 헤치면서 떨어져 내리다가 짐칸부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부딪혔다.

바퀴가 없이 허공을 떠서 운행하는 무중력 자동차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밑바닥에 충격을 견딜 수 있는 고성능의 전자 완충 장치를 장착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중력 자동차의 엔진이나 마나 연료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독립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다. 만약 뒤집혀서 떨어졌으면 트럭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박살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짐칸 바닥의 밀폐형 적재함에 실린 두 마리의 크롱 고기가 떨어지는 동안 트럭의 밑바닥이 아래를 향하도록 중심을 돌려놓았다.

호수 인근의 지형은 바닥이 물기를 잔뜩 먹은 축축한 흙으로 덮인 채 호수 쪽을 향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트럭은 나무를 헤치며 땅에 떨어진 후 몇 차례 쿵쿵 거리며 튀어 가더니 경사를 따라 호수를 향해 죽 미끄러져 내려갔다. 중간 중간 몇 번씩 나무에 부딪히며 방향을 바꾸던 트럭은 결국 호수까지 이르러 운전석 앞머리를 물에 처박은 상태로 정지했다. 표면 가까이를 배회하며 햇살을 즐기던 물고기들이 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 *

최현이 정신을 차린 것은 이미 사방이 어두워진 뒤였다. 그는 깨어나자마자 자신이 처한 상황을 깨닫고는 다시 기절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진우가 트럭에 실린 채로 괴조들에게 잡혀갔다.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나게 큰 놈들이었다. 그대로 잡혀갔다면 진우는 십중팔구 괴조들의 먹이가 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는 심장이 옥죄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난 이후로 계속해서 기겁할 정도로 경이적인 성취를 보여주었던 녀석이었다. 진우는 겉으로 보기에는 특별히 강인한 인상이 아니었지만, 보기와는 달리 자신이 시키는 모든 훈련을 군소리 없이 따라주었다. 기지에서의 훈련 첫날부터 무리한 구보를 강요해도 지쳐 쓰러질 때까지 힘들다는 소리 없이 따라오던 녀석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첫 학생이었다.

자신과는 불과 열세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처음 본 순간 얼굴도 보지 못하고 잃어버렸던 자식 생각이 났었다. 아무 상관도 없고 나이도 맞지 않은 녀석에게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헌터들이 흔히 말하는 ‘마나의 인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시내지 않고 정을 주었다. 성과도 좋았다.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의 어린 나이에, 그것도 몸에 마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후로 한 달 만에 마나를 각성해 주었다. 그랬던 녀석이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끄으으으.”

악물린 잇새 사이로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나왔다. 너덜너덜해진 왼 팔의 통증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진한 아픔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자신의 책임이었다. 나름 조심을 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잠시의 방심으로 어린 녀석을 치명적인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다. 자책감이 최현의 마음을 온통 헤집었다. 그는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새벽 미명에 어둠이 가실 때까지 넋을 잃고 움직이지 못했다.

*  * * * *

날이 완전히 밝자 최현은 어느 정도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자책감은 여전했지만 아직 진우의 죽음이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일단은 살아있다는 전제 하에 구출 계획을 세워야 했다. 어린 나이에 마나를 각성한 녀석이었다. 그렇게 뛰어난 녀석을 하늘이 그냥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최현은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괴조가 날아온 것으로 짐작되는 호수 방향을 향해 샅샅이 뒤져가며 탐색에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 보아도 팔 한 쪽을 거의 쓰지 못하는 자신의 힘만으로 진우를 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괴조에 물려 날아오는 바람에 거리도 너무 멀어졌다. 이대로는 오히려 괴조를 만나기도 전에 자신이 숲속의 마수들에게 당할 가능성이 컸다. 죽을 때 죽더라도 최소한 진우의 생사만큼은 확인하고 죽어야 했다.

최현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태양의 위치로 대충 방향을 잡고 기지가 있는 북쪽 방향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허리에 장착된 통신기가 아직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다. 비록 유효 거리가 100Km에 불과하지만 신호가 닿는 데까지만 이동하면 기지에 연락해 구조대를 파견하도록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  * * * *

트럭의 추락을 확인한 진우는 아픈 몸을 달래며 간신히 나무를 타고 내려왔다. 땅에 내려선 그는 먼저 몸을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지만 다행히 뼈가 부서진 곳은 없는 듯했다.

“휴우~.”

살았다. 일단은 그게 중요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마나스톤도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허리춤에 달려 있던 통신기는 트럭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도중에 떨어져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품속에 넣어두었던 헌터 패드는 나무에 매달릴 때 나뭇가지와 부딪혀 박살이 나 있었다. 최현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사라진 셈이었다.

무기를 챙기지 못했다는 점이 제일 난감했다. 먹을 것도 전혀 없었다. 그동안 최현을 따라다니며 대수림에서 먹을 수 있는 과일이나 버섯 등에 대해 몇 가지 주워들은 건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빈 몸으로 야생에서 생존하는 법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마음 한 구석으로 싸늘한 기운이 파고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세상에 혼자 버려졌다는 느낌에 한동안 괴로워했었는데, 이번에는 그게 느낌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죽기 싫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현으로부터 마나를 각성했다는 인정을 받고 가슴 뿌듯한 기쁨을 느낀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아직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최현의 말에 의하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았다. 마나까지 각성했는데 여기서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진우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살기 위해서는 무기와 통신 장치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트럭이 호수 근처의 숲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트럭은 추락의 충격으로 부서졌을 확률이 높았지만 운이 좋다면 그곳에서 무기와 통신기를 찾을 가능성이 있었다. 트럭이 추락한 장소가 꽤 멀어 보이기는 했지만, 지평선을 넘을 정도가 아니었으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일 것이다.

진우는 일단 호수 쪽으로 이동하며 트럭을 찾기로 했다. 그가 최현 반만큼이라도 대수림과 그곳에 사는 마수들의 흉악함에 대한 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진우와 최현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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