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매일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꼬박 정찰에 투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입한지 열흘이 지나고서야 두 사람은 비로소 대수림의 중앙지역에 이를 수 있었다. 높은 나무들 위를 날아서 지나느라 때로는 지상 50m 이상을 부유한 채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트럭의 이동 속도는 시속 20Km 아래로 떨어졌다. 점심 식사는 언제나 트럭에 탄 채 간단한 건조식량으로 때웠다. 그래도 해가 없으면 정찰을 중단해야 하는 입장이라 하루 10시간 이상을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되도록 넓은 지역을 살피기 위해 옆으로 크게 지그재그를 그리며 뱀처럼 움직였기 때문에, 대수림을 관통하는 직선 방향으로의 이동 거리는 하루에 20Km를 넘지 못했다. 이동의 대부분이 대수림을 가로지르는 세로 방향보다는 가로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두 사람은 실로 엄청난 면적을 살펴보고 있었다.
진우의 입장에서는 비록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기는 했지만, 대수림에서 서식하는 다양한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최현은 케이튼 행성으로 올 때 그에게 헌터 패드(Hunter Pad)를 하나 주었는데, 거기에는 ‘행성 도감’이라는 유용한 앱이 있었다. 그 앱을 이용해서 새로운 생물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특성이나 서식지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방학을 이용한 헌터 학교의 훈련 프로그램 같은 것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산지식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자주 목숨을 위협받는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최현 때문이었다. 처음 몬티를 상대로 한 실전 훈련이 있은 뒤로, 그는 이삼 일에 한 번씩 최현이 잡아 온 맹수들을 상대해야 했다. 최현은 숙영에 적당한 공터를 발견할 때마다 정찰을 핑계 삼아 늘 인근의 맹수들을 확인했다. 그러다 쓸 만한 놈이 있다 싶으면 진우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사라졌다가 돌아와서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괴상한 생물들을 하나씩 던져 놓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진우는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진우의 두 번째 상대는 ‘예카리나’라는 다소 여성스러운 이름을 가진 여우 크기의 맹수였다. 주둥이가 개미핥기처럼 생긴 예카리나는 주둥이를 대롱처럼 사용해 마비 효과가 있는 독침을 쏘아댔다. 독침을 맞은 상대가 쓰러지면 강력한 소화액을 내뱉어 순식간에 흐물흐물하게 만든 뒤에 입을 대고 빨아먹는 놈이었다.
진우는 최현의 엽기적인 설명을 듣고, 절대로 질 수 없다는 각오로 놈을 상대해야 했다. 그날 진우는 30분 동안 사력을 다해 백여 발이 넘는 독침을 모두 막아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뱉을 독침이 없어진 놈의 주둥이를 잘라버림으로써 간신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어찌나 신경을 곤두세웠던지 두 번째 실전 훈련이 끝나고 나서 그는 무려 한 시간을 땅바닥에 널브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걸 다 막아내다니. 동체 시력이 좋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몸 움직임의 정확성도 상당히 나아졌군.’
그러나 정작 진우 본인은 야구공도 맞추지 못했던 자신이 그 많은 독침을 검으로 막아냈다는 사실이 지니는 의미를 되새길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최현이 그런 진우를 직접 둘러메고 텐트 속으로 옮겨 주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고 만 것이다. 잠 든 진우의 주머니 속에서 마나스톤이 세차게 진동하고 있었다.
세 번째 상대의 이름이 ‘돌쇠’라는 얘기를 듣고 진우는 웃음을 터트릴 뻔 했다. 최현도 따라 웃으며 설명을 해 줬다.
“외계 생물들의 이름은 보통 처음 발견한 헌터가 짓게 되는데, 녀석의 최초 발견자가 한국 사람이었거든. 그놈 주먹이 이름처럼 돌주먹이니까 맞으면 꽤 아플 거다.”
꽤 아픈 정도가 아니었다. 죽는 줄 알았다. 돌쇠를 상대로 할 때 최현은 진우에게 검을 쓰지 않고 격투술로 상대하게 했다. 고릴라처럼 두 발로 서서 주먹을 휘두르는 돌쇠의 손은 체구에 비해 상당히 컸다. 손바닥을 펴면 진우의 얼굴이 완전히 덮일 정도였다. 게다가 주먹을 쥐면 손마디마다 쇠뭉치처럼 단단한 검은 색의 뼈가 도드라져 나왔다. 너클을 낀 상대와 권투를 하는 느낌이었다.
처음 돌쇠의 주먹에 배를 얻어맞고 진우는 그날 저녁에 먹었던 것을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정신없이 토하던 그는 이어진 공격에 얼굴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아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대로 뻗어 있었으면 점프를 해서 덮쳐오는 녀석의 발에 최소한 몸 한 군데는 짓이겨졌을 것이다. 다급히 몸을 옆으로 굴려 피한 뒤 일어나서 힐끗 최현 쪽을 바라보니 그가 흐뭇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뱃속에서부터 열이 확 뻗쳐올랐다.
돌쇠는 높이 도약하거나 고속으로 이동하는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마구잡이로 내려치는 듯한 주먹의 움직임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게다가 한 번 공격을 허용하면 쉬지 않고 연타가 이어졌다. 그걸 막아내는 진우의 팔에 멍이 차곡차곡 쌓였다.
계속 막기만 하다가는 공격 한 번 변변히 못하고 맞아 죽을 것 같았다. 다른 맹수들의 공격을 막아낼 때와는 기분이 달랐다. 송곳니가 비죽 삐어져 나온 녀석의 살짝 비틀어진 입 꼬리가 마치 비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성질 더러운 동네 불량배에게 걸린 꼬맹이가 되어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속에서 천불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날 진우는 처음으로 온몸을 소용돌이처럼 헤집으며 돌아다니는 마나의 분명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트럭에 기대 대도를 쥐고 돌쇠와 진우의 격투를 구경하던 최현의 눈에 갑자기 진우의 전신 근육이 살짝 부풀어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눈에서 보일 듯 말 듯 푸르스름한 광채가 순간적으로 내비쳤다.
‘저건.’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떡 일어섰다. 그 순간 계속 수세로 일관하던 진우의 주먹이 돌쇠의 몸으로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진우의 주먹과 돌쇠의 주먹이 마주 부딪치자 ‘빠직’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손에서 검은 뼛조각이 부서져 내렸다. 녀석의 입에서 처음으로 비명이 터졌다. 그 다음부터는 일방적이었다.
순식간에 공격과 수비의 위치가 바뀌었다. 돌쇠는 마치 권투 선수가 가드를 올리듯 얼굴과 가슴을 팔뚝으로 가리고 어떻게 하든 진우의 주먹을 막아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은 우지직 하며 놈의 팔이 부러지고 말았다. 녀석의 팔이 힘없이 밑으로 내려가자마자 격투는 금방 끝났다. 마지막으로 관자놀이에 적중한 진우의 주먹이 돌쇠의 머리뼈를 부수자 녀석의 몸이 장작 쓰러지듯 넘어지면서 싸움은 끝났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제 자리에 선 채 숨을 헐떡이는 동안 진우의 온몸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마나의 기운이 썰물 빠지듯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쓰러진 돌쇠의 흉측한 모습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최현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감싸 쥐면서 물었다.
“느꼈냐?”
진우가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최현이 허탈하게 웃었다.
“미치겠군. 헌터 학교에 아직 정식으로 입학도 하지 않은 녀석이.”
* * * * *
그날은 맹수를 상대로 한 실전 훈련이 끝난 뒤에도 바로 들어가 자지 않고 최현과 함께 차를 끓여 마셨다. 몸이 피곤하기는 했지만 죽을 것처럼 힘들지는 않은데다 최현이 할 말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내일부터는 정찰하는데 신경을 쓰지 말고 트럭에 앉아 명상에 힘써라.”
“네? 그런 거는 나중에나 신경 쓰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하지만 이제는 신경 써야 한다. 너도 느꼈겠지만 신체가 마나를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었다. 지금부터는 당분간 명상을 통해 신체에 마나를 안착시켜야 해.”
최현은 한 차례 혀를 차더니 들고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너 같은 괴물이 있다는 얘기는 농담으로라도 들어 본 적이 없다. 빨라도 이렇게 빠를 줄이야, 쩝.”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가 진지한 얼굴로 진우를 쳐다보았다.
“훈련을 통해 일정량 이상의 마나를 몸에 쌓으면 대개는 전문 헌터가 될 수 있다. 헌터 자격증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지. 하지만 체내의 마나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을 느끼기 전에는 마나를 각성할 수 없다. 네 놈은 15살에 그걸 느꼈으니 각성의 초입에 들어선 셈이다. 헌터 학교 졸업생도 아니고 고작 입학생이 마나 각성이라니. 남들이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 웃을 일이다. 네 둔한 운동신경을 고쳐 볼까 하고 시킨 실전 훈련인데, 허, 이렇게까지 될 줄이야.”
말을 하던 그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진우를 돌아보았다. 진우는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대견함과 칭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현은 내친 김에 미리 헌터의 등급에 대해 설명을 해두기로 했다.
“단순히 체내에 마나를 쌓아서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근력이나 민첩성을 약간 증가시키는 정도라면 아직 전문 헌터에 지나지 않는다. 마나를 각성했다고는 할 수 없지. 그런 이들에게도 헌터 자격증을 주긴 한다만, 사실상 마나를 각성해야지 진정한 헌터라고 할 수 있는 거다. 그래야지 비로소 마수를 사냥할 수 있거든.”
진우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사실 워낙 헌터의 길을 포기한 지가 오래되다 보니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있었다. 최현의 설명이 이어졌다.
“마나를 각성한 헌터의 단계는 네 단계로 나뉜다. 뭐 아직까지는 현실적으로 두 단계밖에 존재하지 않지만 일단 이론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첫 번째 단계는 운용이다. 몸속의 마나를 느끼고 그것을 의지대로 움직여 필요할 때 신체를 강화시키거나 몸을 민첩하게 만들 수 있는 단계지. 이 단계에서는 동체시력이나 청각 등이 월등히 좋아지고 골격이 단단해진다. 신체의 방어력이 향상될 뿐 아니라 상처를 입었을 때의 재생력 또한 크게 증가하지.”
마나를 각성한 헌터들이 내는 물리적인 힘은 겉으로 보이는 체격이나 근육의 양과는 큰 관계가 없었다. 그보다는 마나량과 운용 능력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물속에 오래 잠수할 수 있는 폐활량도 커졌다. 신체의 움직임 자체가 산소나 영양소에 의존하는 것에서 벗어나 마나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었다. 흔히 하급 헌터로 분류되는 이 단계의 헌터들은 아직 특기에 따른 구분이 없었다. 모두가 다 신체형 마나헌터라고 할 수 있었다.
최현은 모닥불 위에 걸어 놓았던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두 번째 단계는 기지장인 조박사나 내가 도달한 발현 단계다. 보통 중급 헌터라고 하지만 상급이나 최상급 헌터도 결국은 모두 발현 단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경지나 완성도에 따라 구분하는 것뿐이니까. 발현이 가능하게 되면 체내의 마나를 외부의 도구나 다른 사람의 신체에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지. 이때부터는 헌터에 따라 특성이 갈리게 된다. 이 단계에 도달하려면 당연히 몸속에 있는 마나의 절대량 자체가 운용 단계보다 훨씬 많아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마나를 다루는 능력이 비교할 수없이 정교하고 신속해져야 한다는 점이다. 너도 헌터 후보자 테스트 때 체내 마나량을 측정했었지?”
“네.”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체내 마나량을 재는 단위를 혹시 아냐.”
“P를 쓴다고 들었어요.”
“그래. ‘포털(Portal)’의 약자야. 한 번 포털을 여는데 필요한 마나량이 100P다. 우주 어느 곳을 가는 경우든 필요한 양이 동일하기 때문에 그걸 단위로 쓰게 되었다고 하더라. 게다가 보통 마나 헌터가 되기 위한 벽을 넘는데 필요한 체내 마나량 또한 대개 그 정도이기도 하지. 대부분의 전문 헌터들은 체내 마나량이 50~90P이고, 그 이하라면 헌터 보조원밖에는 못한다.”
최현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마나를 각성한 헌터가 운용 단계에서 발현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체내 마나량은 헌터의 특성과 마나 조작 능력에 따라 차이가 크다. 가령 조박사같은 치료형 헌터들은 마나량이 200P만 넘어도 발현 단계에 드는 경우가 많아. 대신 가장 섬세한 마나 운용 능력이 필요하지. 운용 능력이 떨어지는 나 같은 경우는 지금보다 마나량이 두 배로 는다고 해도 아마 절대 치료형 헌터는 되지 못할 거다.”
그 말을 하고서 최현은 멋쩍은 듯 씩 웃었다.
“화살과 같은 원거리 투척 장비에 마나를 실어 쏠 수 있는 ‘사수’ 계열은 300P 대로 접어들어야 발현 단계에 이를 수 있다. 비록 총알처럼 작고 속도가 빠른 물체에는 연사가 아닌 단발에만 마나 부여가 가능하고, 그나마 부여할 수 있는 마나의 양도 적어서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지. 하지만 탐사대에 사수형 헌터가 있으면 헌팅에 사용할 수 있는 작전의 폭이 크게 넓어져서 좋아. 다만 화살뿐만 아니라 활자체에도 마나를 실을 정도가 되지 않으면 총에 비해 사거리에 제한을 받는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
“명중률은요? 총보다 명중률이 좋나요?”
진우의 질문에 최현은 ‘흠~’하고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사수형 헌터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엄청난 시력이야. 하긴 애초에 시력이 좋지 않으면 활이나 총을 드는 것 자체가 무리지. 게다가 능숙한 사수는 주변의 대기 흐름까지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지각 능력이 뛰어나다고도 하더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발현의 다음 단계인 동조에 가장 가까운 이들이 바로 사수형 헌터라고도 말하지. 분명한 것은 총을 사용하는 전문 헌터들보다는 명중률이 좋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마나를 각성했다고 말하기 좀 부끄럽지 않겠냐?”
최현은 그 말을 하고 잠시 껄껄거리며 웃더니 문득 생각이 난 듯 다시 말을 꺼냈다.
“과거에는 마나 헌터 중에 몸속의 마나를 직접 상대에게 쏘아 보내는 쪽으로 특화를 시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일종의 마나탄이라고 할까? 무슨 이야기책에 나오는 파이어 볼이니 아이스 스피어 같은 것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그런 마나탄들도 나름 제법 파괴력이 있었다는군. 하지만 사정거리가 너무 짧고, 연사가 어려운데다가 마나 소모량에 비해서는 위력이 워낙 크게 떨어져서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그 길을 시도하던 이들도 나중에는 죄다 평범한 사수형 헌터로 돌아섰다고 하더라.”
최현은 이어서 신체형 마나 헌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 같은 신체형 마나 헌터는 자신의 몸이나 들고 있는 도구에 마나를 주입시켜 강화시키는 쪽으로 특화된 이들이다. 세밀하게는 방어형과 공격형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신체와 도구 모두에 마나를 주입시킬 수 있다는 점은 같아. 발현 단계의 마나헌터가 신체에 마나를 주입한다는 것은 운용단계에서의 활용과는 의미나 효과가 질적으로 다르다. 말 그대로 신체강화라고 할 수 있지. 방어형은 마수들의 발톱도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피부나 근육을 강화시킬 수 있고, 나 같은 공격형은 제대로 맞기만 한다면 한 칼에 하급 마수를 벨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이름값을 할 수 있다. 다만 신체형 마나 헌터들은 대체로 마나에 대한 운용 능력이 다른 계열보다는 떨어지기 때문에 체내 마나량이 400P 정도는 되어야 발현 단계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게 통설이다.”
“선생님은 지금 체내 마나량이 얼마나 되시는데요?”
진우의 질문에 최현이 갑자기 큰 소리로 웃었다.
“야 이놈아. 헌터들의 체내 마나량은 가장 큰 비밀 가운데 하나다. 함부로 그런 걸 묻는 건 심각한 실례야. 여자들 신체 사이즈를 물어보는 거 하고 비슷한 일이란 말이야. 뭐 헌터 학교에 들어가면 다 배우는 거지만 아직 입학도 안 했으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그래도 이왕 물었으니 대답은 해 주마. 나는 지금 600P가 조금 넘는다.”
“우와. 그럼 굉장히 높은 거 아니에요?”
그러자 최현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아마 신체형 중급 헌터들 가운데에는 못해도 중상위권 이상은 될 거다. 다들 쉬쉬하면서 밝히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마나 헌터의 체내 마나량이 대략 900P가 조금 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
어느새 마시던 차가 다 떨어졌다. 최현은 빈 컵에 물을 부어 한 번 헹구더니 그냥 텐트 안으로 툭 던져 넣었다.
“발현 단계 다음은 이야기로만 전해진다. 실제 그 단계에 이른 마나 헌터들이 아직 없기 때문이지. 발현 다음은 동조라고 하는데, 체내에 있는 마나가 아니라 몸 밖의 마나를 직접 동조시켜 조작할 수 있는 단계라고 하더라. 허공에 마나를 실체화시켜 움직이거나 대규모의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군. 가장 무서운 것은 타인의 체내에 있는 마나를 동조시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거나 뇌를 곤죽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다.”
진우는 최현의 설명을 듣다 입을 딱 하고 벌렸다. 그의 표정을 본 최현이 피식하고 웃었다.
“아직까지는 모두 외계인들이 설명해 준 내용일 뿐이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무서운 능력이 아닐 수 없지. 대규모 살상이 본격적으로 가능해지는 단계라고도 하더라. 동조단계는 1000P만 넘으면 가능하다는 말도 있고, 1500P는 넘어야 도달할 수 있다는 사람도 있어. 심지어 2000P 이상이 필요 마나량이라는 소리도 있다. 뭐 현재로서는 지구상에 1000P조차 넘은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알 수 없는 얘기지.”
말을 하던 최현이 표정을 살짝 굳히더니 진우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 단계는 지배다. 이 단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아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 외계인들도 언급을 회피하니까. 다만 그들에게 전해지는 전설같은 이야기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지. ‘마나를 보는 자, 마나를 지배하리라’라고 하더군.”
진우를 보는 최현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헌터 양성소 소장님이 너를 내게 부탁하면서 하신 말씀이 있다. 진우 네가 마나를 볼 줄 안다고 하더라. 그 말이 맞는다면 너에게 거는 소장님의 기대는 분명 네가 짐작하는 그 이상일 거다. 뭐 지금까지 한 걸로만 보아도 너는 틀림없이 괴물이 맞아. 그리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지배의 단계에 도달하는 최초의 인간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네가 너무 조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만하지 말고 서두르지 마라. 서두른다고 목표에 일찍 도착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 알겠니?”
진우는 최현의 갑작스러운 말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배의 단계에 도달할지도 모른다고? 마나를 보는 게 특별한 능력일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것일 줄은 몰랐다.
그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이 신체적으로 남들에게 크게 모자라다는 생각을 숱하게 했었다. 그 반대로는 한 번도 꿈도 꿔 본 적이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그는 치가 떨릴 정도로 운동의 둔재였었다. 그게 하루아침에 거꾸로 뒤집히자 기쁘기보다는 헷갈렸다. 최현이 복잡해진 진우의 표정을 보더니 그의 손에서 빈 컵을 뺏으며 머리를 툭 쳤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다.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에 있는 너 자신이 누구냐는 거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당장 내일 할 일이나 생각해라.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만하고 얼른 들어가 자거라.”
진우가 행성 케이튼에 도착한 지 딱 한 달이 되던 날 밤에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