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3. 행성 케이튼
헌터 양성소에서 측정을 마치고 나면 보통 며칠 뒤에 합격자 본인이 아닌 소속 학교로 통보가 갔다. 이 때에는 후보자 테스트에 응시한 모든 학생들의 측정 기록과 판정 점수 등이 자세하게 적힌 기록지가 함께 보내졌다. 최종 합격자의 경우에는 합격증서가 담임의 손을 거쳐 본인에게 전달되었다.
측정이 끝나고 합격자 통보가 있기까지의 며칠 동안은 어느 학교나 제대로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생들이 기대에 들떠서 수업에 집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도 그 점을 이해하고 며칠 동안 꼭 필요한 진도를 나가는 것 이외에는 학생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풀어두고는 했다.
합격자가 있는 학교보다는 없는 학교가 더 많았고, 한 학교에서 두 명 이상의 합격자가 나오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기 때문에 실제로 학생들의 기대는 과도한 것이었다. 문제는 헌터 양성소의 헌터 후보자 선발 결과가 눈에 보이는 실력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데에 있었다.
학생들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개 오전 측정에서 나타나는 신체 측정 기록이었다. 하지만 신체 측정에서 아무리 뛰어난 기록을 보여주더라도, 그런 학생이 반드시 후보자로 선발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후의 가상현실 측정 결과에 따라 결과가 뒤집어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었고, 드물기는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학생들이 보기에 전혀 엉뚱한 학생이 최종 후보자로 선발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그 때문에 보통 오후 측정이 끝나고 나면 학생들끼리 자신이 한 대답이나 행동을 놓고 서로 토론을 하며 비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오후 측정에서 각자가 어떤 점수를 얻었는지, 그리고 그 점수를 두고 어떤 판정이 내려졌는지에 대해서는 학교로 최종 통보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판정의 정확한 기준은 여전히 공개된 적이 없었다. 이렇게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점 때문에 설사 자신이 생각하기에 측정 기록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조차도 끝까지 합격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일부에서는 이런 점 때문에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한 헌터 후보자 테스트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기도 하였다. 자발적으로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전국의 모든 학생들을 무조건 테스트 대상으로 하는 것은 심각한 사회적 낭비를 초래한다는 주장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헌터 후보자 선발은 외계인들이 처음 지구와 협상을 할 때 제시한 강력한 요구사항이었다. 이제 와서는 어느 나라든 그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그 점을 제외한다면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에게 특별히 요구하는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칫 그 요구를 거절했다가 협상이 깨지기라도 한다면 정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 * * * *
10월말에 있었던 학산고의 헌터 후보자 테스트가 끝난 뒤 며칠 뒤에 그 결과가 학교에 통보되었다. 합격자가 발표된 그날, 학교 전체가 벌컥 뒤집어졌다.
“우와~~ 강진우 이 미친 새끼. 네가 합격이라고? 야, 이게 가능한 얘기냐 정말?”
아침 조회 시간에 담임이 전해 준 합격 증서를 손에 쥔 진우가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정작 옆에 있던 정태가 더 난리를 쳤다.
“야, 이 몸치에 방망이 고자가 정말 합격이야? 으하하하. 헌터 후보자 선발 기준이 실력보다는 잠재력이라더니. 네가 그럼 잠재력이 엄청나다는 뜻이잖아. 우와~ 축하한다, 축하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그를 붙잡고 펄쩍펄쩍 뛰는 정태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진우는 합격자 증서를 슬그머니 말아 쥐고 정태의 머리를 딱 하는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너도 합격이잖아 임마. 나만 합격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나야 이 자식아 당연히 합격이지. 나 같은 인재가 합격 안 하면 누가 하겠냐. 하지만 넌 솔직히 정말 예상이 안 됐잖아. 예상이.”
“네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없었던 거지.”
솔직히 진우 자신도 엄청나게 놀랐다. 그날 헌터 소장까지 와서 추가 테스트를 받으라고 할 때에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오전 측정 결과가 워낙 안 좋았다. 그 점은 합격증서와 함께 전달된 측정 기록지에도 여실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런데 오후 측정 점수가 워낙 좋았다. 그는 그 덕에 자신이 합격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외에도 추가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그 점은 아직 진우가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정태가 커다란 목소리로 교실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로 호들갑을 떨고 있는 동안 같은 반 친구들도 부러움과 질시가 동시에 섞인 눈으로 다가와 하나 둘씩 진우에게 축하를 건넸다. 그들에게 일일이 고맙다고 답하면서도 그는 왠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합격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합격한 것 같다는 느낌을 그들에게서 받았던 것이다.
점심시간이 끝난 뒤 교장실에 불려가 교장으로부터 직접 축하의 말을 들었다. 교장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합격자는 내년부터 헌터 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다. 결국 누군가 헌터 후보자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조만간 학교를 떠날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고등학교의 교장들은 자기 학교에서 최대한 많은 합격생이 배출되기를 바랐다.
통상 헌터 후보자 합격생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두 세 학교 가운데 하나 꼴로 배출되었다. 헌터 후보자 합격생이 배출된 학교와 그렇지 못한 학교는 당장 이듬해 신입생 모집에서부터 지원율이 바뀔 정도로 위상이 달라졌다. 그런데 한 학교에서 합격생이 두 명이나 배출되었으니 교장 입장에서는 벌써 내년이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자네들이 어디를 가더라도 한때나마 학산고 출신이었다는 점을 잊지 말게.”
교장의 속보이는 덕담에 고개를 끄덕이고 교장실을 나오고 나서도 그날 하루 종일 정태와 진우는 이곳저곳에 불려 다녀야 했다. 평소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던 선생님들마저 일부러 찾아와서 축하를 해 주는 바람에 결국 앉아 있지 못하고 여기 저기 학교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담임과도 긴 시간 동안 면담을 해야 했다.
“우리 학교는 헌터 후보자 테스트를 가장 늦게 받았기 때문에 다른 학교보다 합격자 통보가 많이 늦은 편이다. 그래서 슬슬 전학 수속도 해야 할 것 같다. 헌터 학교에서 벌써 전학 요청서가 왔다. 집에 가서 부모님에게 합격 소식 말씀 드리고 전학 동의서에 도장 받아 오너라. 진우는 내가 보호자 대리를 할 테니까 네 사인하고 도장 찍으면 되고.”
“네."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을 했다.
“그리고 다음 달에는 학기말 고사가 있다. 전학을 가더라도 1학년 때 성적은 그대로 남으니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시험에 임하도록 해라.”
“네.”
담임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진우와 정태 모두 1학기말 시험은 무슨 정신으로 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대충 넘길 수밖에 없었다. 본인들 스스로도 들뜬 마음이 채 가라앉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나마 마음잡고 공부라도 하고 있으려면 옆에서 친구들이 가만 놔두지를 않았다.
“야, 헌터가 무슨 국영수를 공부하고 그래. 그런 건 공부해서 대학 갈 우리들이 하는 거지.”
알면서도 하는 소리였다. 헌터 학교에서도 졸업하려면 고교 과정을 마쳐야했다. 게다가 헌터 학교 졸업생들도 대부분은 대학을 갔다. 헌터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모두가 전문 헌터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헌터 학교 출신 가운데 전문 헌터가 되는 사람들은 졸업생의 20%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400여명이 입학하지만 정작 전문 헌터가 되는 사람은 80명 남짓이라는 얘기였다. 나머지는 헌터 학교를 졸업하더라도 결국 다른 직업을 찾거나 보조 헌터로 나서야 했다.
헌터 학교를 졸업할 경우 대학들이 여러 가지 특혜를 주기 때문에 대학 입학 자체가 보통 고등학교 졸업생들보다 수월하기는 했다. 그 때문에 졸업생들 가운데 헌터가 될 가능성이 적은 이들은 대학에 진학을 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고, 그러면서도 하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결국 1학기말 시험은 두 사람 모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충 보고 넘길 수밖에 없었다.
* * * * *
학기말 고사가 끝나자마자 날씨는 완연히 겨울로 접어들었다. 과거보다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거리 여기저기에는 그래도 간간이 크리스마스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 뒤로 각 종교들마다 신도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전통 명절 비슷한 개념으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동안 정태가 함께 놀자고 몇 번 전화를 했었다. 사교성이 좋은 정태조차도 헌터 후보자에 합격을 한 뒤로는 전에 같이 놀던 친구들이 여럿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진우의 경우는 거의 외톨이처럼 지냈다. 그 점을 눈치 채고 정태가 같이 놀자고 여러 번 말했지만 진우는 또 진우 나름대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살고 있던 집을 정리하는 것이 큰일이었다. 헌터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면 앞으로 최소한 3년은 집을 비워야 했다. 문제는 헌터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데에 있었다. 진우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집을 팔기로 했다. 아직 그가 성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담임선생님이 적극적으로 나서 일을 도와주신 덕분에 간신히 매매 계약을 마무리할 수가 있었다. 여러 가지로 고마운 분이었다.
최근에는 새롭게 시작한 격투기 훈련 때문에 매일 녹초가 되고는 했다. 비록 가상현실 장치를 이용한 오후 측정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 합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운동신경이 바닥인 진우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헌터 학교의 훈련 과정 속에는 강도 높은 신체 훈련 과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현재 상태로 그 과목들을 무사히 이수해 낼 자신이 없었다. 이제까지 좋지 않던 신체 조건이 몇 달 운동한다고 해서 금방 나아질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이대로 손 놓고 있기에는 불안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 둔 12월 22일 저녁에도 진우는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고 집 근처의 격투기 도장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호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진동을 시작했다.
“여보세요?”
“강진우 학생이죠? 저 기억하세요? 헌터 양성소의 우지연 과장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진우학생하고 긴히 상의할 일이 있는데 혹시 내일 오전에 시간 되세요?”
이미 이틀 전에 방학을 한 터라 오전에는 운동을 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네. 시간은 되는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진우 학생 이번 방학 때 스케줄 때문에 저희가 좀 의논했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요. 시간이 괜찮으시면 내일 오전에 저희 쪽에서 차를 보내려고 하는데 혹시 이곳까지 오실 수 있겠어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헌터 양성소까지? 무슨 일이지?
“네. 상관은 없는데 무슨 의논을 하시려는 건가요?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할게요. 그럼 내일 오전 10시까지 진우 학생 집 부근에 있는 큰 햄버거 체인 있죠? 그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저희 쪽에서 차를 보낼게요. 그럼 내일 뵙도록 해요.”
진우가 무슨 일인지 재차 물어보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자기 할 말만 하고는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뭐지 이거?
* * * * *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십 여분을 걸어 격투기 도장에 도착했다. 도장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참 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관원들로 도장 내부가 후끈했다.
“진우 학생 왔어?”
중년의 관장님이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진우를 맞아 주었다. 헌터학교 졸업생이었다는 남상호 관장은 결국 졸업할 때까지 전문 헌터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헌터 보조원으로 2년을 전문헌터들을 따라 행성 탐사에 나서기도 했지만, 결국 마나 각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 생활을 그만두었다.
다른 졸업생들은 전문 헌터가 되지 못하더라도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관장은 보조원 생활을 그만 두자 격투기 선수로 나섰다. 자신이 잘 하는 것은 몸 쓰는 일인데 이제 와서 다시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기는 싫다는 것이었다.
10년 동안 격투기 선수로 생활하면서 한국 챔피언까지 올랐지만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결혼과 함께 선수 생활을 접었다. 그 뒤로는 조그만 도장을 열어 사람들을 가르치며 생활을 하고 있었다. 헌터 학교 졸업생에 한국 챔피언까지 지냈다는 이력 때문인지 다행히 관원들은 적지 않았다.
“오늘은 어때, 스파링 한 번 하지 않을래?”
“스파링이요?”
진우는 그 동안 기본적인 기술을 익히기 위한 훈련을 했을 뿐 한 번도 다른 사람과 직접 스파링을 한 적이 없었다. 그의 훈련 성과를 지켜보던 관장도 ‘지구력 갑, 순발력 제로’라는 판단에 따라 그동안 한 번도 진우에게 스파링을 권한 적이 없었다.
“갑자기 스파링이라니요?”
그러자 관장이 난처한 얼굴로 자신의 뒤쪽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거기에는 벌써 양손에 격투기용 글러브를 끼고 매서운 눈초리로 두 손을 팡팡 부딪치고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남 관장의 딸 남희정이었다. 올해 중3인 희정은 내년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반드시 헌터 후보자 시험에 합격하겠다고 몇 년 전부터 치열하게 훈련을 하고 있었다.
“진우 오빠. 오늘은 나하고 스파링 한 번 해요.”
“야, 너. 참 나. 내가 무슨 스파링을 해.”
“진우 오빠는 운동 신경이 느려서 매일 운동을 해도 발전이 없잖아요. 격투기는 직접 스파링을 해야 감각이 는다고요. 오늘은 이 도장의 수석 관원인 제가 몸소 진우 오빠의 스파링 상대가 되어 드릴게요. 영광으로 아세요.”
“영광은 무슨. 그리고 네가 무슨 수석 관원이냐. 그냥 관장님 딸이잖아.”
“내가 이 도장 첫 번째 관원인 거 몰라요? 그러니까 당연히 수석 관원이죠. 잔소리 말고 빨리 글러브 끼고 링 위로 올라와요.”
“야.. 그게 무슨...”
진우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관장을 쳐다보자 관장이 난처한 얼굴로 눈을 찡긋거렸다.
“저 녀석이 내년에 헌터 후보자 테스트 보잖아. 네가 헌터 후보자 테스트에 합격했다는 소리를 듣더니 저 난리다. 내 딸이지만 격투기 솜씨도 나무랄 데 없는 편이니까 네가 그냥 한 번 적당히 상대해라. 하도 졸라대서 내가 아주 숨이 막혀 죽겠다.”
“아니. 하지만 저 운동 못하는 거 보셔서 잘 알잖아요. 제가 무슨 스파링을 해요?”
그러자 관장이 애절한 표정으로 진우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야. 내 얼굴 봐서라도 한 번만 부탁하자. 다치면 내가 치료비 줄 게.”
“치료비가 문제가 아니라...”
관장은 성격도 좋고 남자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른이 넘어 결혼해서 얻은 딸에게만은 팔불출이었다. 무리한 요구를 해도 잘 거절하지 못했다. 문제는 그로 인한 피해가 가끔은 이번처럼 엉뚱한 사람에게 온다는 점이었다. 진우는 관장의 얼굴을 한참 쳐다보다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요. 하지만 희정이에게 살살하라고 말씀하셔야 해요?”
“그럼, 그럼. 내가 벌써 그렇게 얘기 해 놨다. 걱정 말고 얼른 준비해서 링에 올라가라.”
진우는 반쯤 떠밀려서 옷을 갈아입고 장비를 챙긴 다음에 링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첫 스파링 상대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여학생이라는 게 다소 찝찝하기는 했지만, 희정이의 실력은 여학생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웬만한 남자 관원들도 그녀와 스파링을 하면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아버지의 핏줄을 이어받았는지 어려서부터 격투기에 소질을 보인 그녀를 헌터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남 관장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철저하게 그녀를 훈련시켰다.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만은 귀여운 딸이라고 적당히 하는 법이 없었다. 작년부터는 대당 1억이라는 가상현실 훈련 장치까지 자비로 구입해서 인식능력과 판단 능력을 기르고 있었다. 머리도 좋았다. 어떤 면에서는 정태보다도 더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게 그녀였다.
꿀꺽.
글러브와 헤드기어를 쓰고 희정이와 마주해서 가드를 올린 진우는 긴장감으로 몸이 굳었다. 기세라고 할까, 평소에는 까불까불한 여학생 티를 풀풀 내던 어린 녀석에게서 뭔가 날카로운 기운이 뻗어 나오는 것 같았다.
쉭~
왼손으로 가볍게 잽을 날리더니 오른 손으로 훅을 날리려는 자세를 취하는 게 보였다. 저건 페인트다. 아니나 다를까. 휘어져 들어올 것 같던 오른 손 훅이 중간에 멈추더니 곧바로 왼손 스트레이트가 날아왔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진우는 간신히 가드를 올려 그것을 막아냈다. 희정이의 눈에 ‘제법인데’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저거 은근히 자존심 상하는 눈빛이네.
진우는 그동안 도장을 다니면서 기본적인 체력과 기술 훈련에만 전념했지만 간간이 이루어지는 관원들 간의 스파링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자신이 그들의 동작을 따라할 수는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원리는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진우의 어설픈 동작을 보면서 운동 신경이 바닥인 놈이라고 비웃었지만, 사실 기술 그 자체에 대한 이해도는 진우를 따라갈 사람이 흔치 않았다.
왼손 스트레이트가 막히자 희정이가 바짝 다가오면서 오른손 훅을 날렸다. 간신히 그걸 막아내면서도 진우는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이미 희정이의 다리 근육이 긴장하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훅이 막힘과 동시에 자신을 툭 밀친 희정이가 빠른 속도로 로우킥을 날렸다. 알아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반응속도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퍼억
고통과 함께 왼쪽 다리가 뻐근했다. 다리를 절룩이며 물러나는데 다시 왼손 스트레이트가 날아왔다. 고개만 살짝 움직여 간신히 피했지만 희정의 왼발 하이킥이 다시 머리를 겨냥하고 쭉 뻗어왔다. 진우는 급히 몸을 최대한 기울였지만 결국 관자놀이에 정타를 허용하고 말았다.
쿠다당
머리가 띵 하는 순간 그만 링 위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는 다운을 당하자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며 손에 끼고 있던 글러브를 벗어버렸다. 마우스피스를 뱉은 진우가 볼 멘 소리를 터트렸다.
“야, 너 살살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왜 이렇게 세게 하는 건데?”
“에이 그 정도면 살살 한 거예요, 오빠. 마지막에 힘도 좀 뺐잖아요. 근데 오빠 정말 걱정이다. 내년부터 헌터 학교에서 생활해야 하는데 거긴 진짜 훈련 빡세다면서요. 운동 진짜 열심히 해야 할 텐데.”
희정이 정말 걱정된다는 듯이 혀를 찼다. 아, 저게 정말. 야. 사내자식들도 너처럼 격투 잘하는 애들이 흔할 거 같으냐. 속으로만 투덜거리면서 진우는 링을 내려왔다.
“관장님. 스파링 그만 하고 저는 그냥 운동만 좀 더 하다 갈게요.”
“그래, 그래. 수고했다. 희정이 저 녀석이 헌터 후보자 합격생하고 꼭 한 번 대련해 보고 싶다고 하도 보채서 말이야. 내가 아직 안 된다고 했는데도 말을 안 들어.”
어이구, 이 딸 바보 아저씨가 행여나 극구 말리셨겠네.
“오빠. 이거.”
헤드기어를 벗고 땀을 닦는데 희정이가 캔 음료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성격은 좋은 녀석이었다. 본래 무례한 편도 아닌데 내년이면 자신도 후보자 테스트를 받아야 하니까 합격생이라는 그에게 호기심이 생긴 듯했다.
“헌터 시험에 합격하려면 운동신경이 좋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이상하네. 오빠 하는 거 보면 꼭 안 그래도 합격할 수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도대체 뭐가 관건이지?”
이 자식이 은근히 사람의 자존심을 후비네.
“전에도 말했지만 난 오후 측정 결과가 좋아서 합격한 거라니까. 나 원래 운동 못해.”
“하지만 오후 측정에서도 결국은 운동 신경이 좋아야 점수를 잘 얻는다며?”
“그게 현실에서의 운동 신경과 가상훈련 장치에서의 운동 신경이 다른 사람이 있는 가 봐. 가상훈련 장치에서는 나도 제법 잘 움직였거든.”
“그게 가능해? 현실이나 가상이나 결국은 자기 몸 가지고 하는 건데.”
그 점에 대해서는 진우도 아직 정확하게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인식 능력과 운동 능력이 자신처럼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굳이 남에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 헌터 후보자도 얼굴 보고 뽑는 건 아닐까? 오빠 잘 생겼잖아.”
“에라, 이 자식아. 칭찬은 고마운데 그럼 헌터 후보자는 죄다 연예인이겠다.”
그날 저녁 시간 동안 평소에 하던 대로 운동을 마친 진우는 집으로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는 간단히 샤워를 한 다음 침대에 누웠다.
‘무슨 일로 헌터 양성소까지 오라는 거지? 내 방학 스케줄에 관련된 일이라는 건 또 뭐지?’
이리저리 생각을 해 봤지만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가는 것이 없었다. 한참 고민을 하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나중에 작품 설정에도 밝히겠지만 이 시대의 학교 교육과정은 5-3-4-4 입니다. 초등학교 5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4년, 대학교 4년입니다. 학생들의 성장과 발육이 빨라짐에 따라 현재보다 1년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초등학교 교육과정은 5년에 끝납니다. 헌터학교의 학년제는 한국의 교육과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서 학생들이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헌터학교로 전학가는 형식으로 되었습니다. 혹시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