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A코스가 모두 끝나자 다시 하얀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공간의 전면에 B코스 시작이라는 글자가 나타나더니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부터 B코스를 시작하겠습니다. B코스는 상황 당 3분씩 모두 4개의 상황이 주어지며, 시작 전에 각 상황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주어집니다.”
B코스는 상황 판단에 따른 대처가 필요한 테스트였다. 진우는 정신을 집중해서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첫 번째 상황의 무대는 기차선로를 조정하는 철도역 통제실입니다. 현재 세 대의 여객 열차와 두 대의 화물 열차가 통제실이 위치한 기차역을 서로 교차해서 지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모종의 문제가 발생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피험자는 통제실장입니다. 상황에 돌입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사정을 파악하여 인명 피해를 막거나 최소한으로 줄여야 합니다. 그럼 10초 뒤에 상황에 돌입합니다.”
정면의 글자가 사라지더니 초시계가 나타났다. 10으로 시작한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시계의 숫자가 0이 되자 진우의 정면에 무려 10여개에 달하는 모니터 스크린이 나타났다. 서로 다른 정보를 보여주고 있는 모니터들을 보는 순간 그는 자신이 철도 통제실 한가운데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중앙에 있는 제일 큰 모니터에는 통제실이 있는 기차역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지도에는 철도역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각각 네 갈래의 철로가 표시되었는데 아래쪽에서 올라와 오른쪽으로 휘면서 기차역을 통과하는 철로들 가운데 가장 바깥쪽에 있는 선에는 X자 표시가 되어 있었다. 통행할 수 없는 철로라는 뜻이었다.
기차역 왼쪽의 네 철로는 왼쪽에서부터 가-1, 가-2, 가-3, 가-4의 번호가, 그리고 오른쪽의 네 철로는 위에서부터 각각 나-1부터 나-4까지의 번호가 붙어 있었다. X 표시가 되어 있는 철로는 가-1이었다.
역 왼쪽 아래로는 푸른색으로 철로 변환기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고, 기차역을 통과해서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는 철로 중간에도 역시 같은 색의 철로 변환기 표시가 있었다. 역에서 출발한 네 갈래의 철로는 철로 변환기를 지나면서 양쪽 모두 각각 두 갈래의 철로로 바뀌었다. 상행선과 하행선의 교차 통과를 위해 역 안에서는 철로가 2배로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역 오른쪽 밑의 화물 계류장에서는 이제 막 가장 밑쪽에 있는 철로를 향해 천천히 진입하고 있는 화물 열차가 붉은 기차 모양의 아이콘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기차역 왼쪽 하단에는 붉은 색의 화물 열차 아이콘 하나가 천천히 역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고, 거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녹색으로 빛나는 여객 열차가 빠른 속도로 화물열차와 같은 철로를 타고 역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역 오른쪽에 있는 두 개의 철로에는 여객 열차를 나타내는 두 개의 녹색 기차 아이콘이 역을 향해 반대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중앙 상단의 모니터는 기차역 내부의 철로를 비추고 있었다. 다른 모니터들은 각각 기차역 주변의 모습들과 철로 변환기 등을 비추는 CCTV 화면을 전송 중이었다. 그밖에 다른 역들과의 직접 연락이나 인터넷 통신과 관련된 모니터들이 자리했다. 통제실 창 너머로 제법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는 것이 보였다. 통제실 뒤편 창 너머로 하얗게 눈으로 덮인 커다란 호수가 시린 풍경을 드러내고 있었다.
“실장님 큰일 났습니다.”
상황이 시작되자마자 옆에 있던 직원 하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진우에게 외쳤다.
“1216호 여객 열차가 브레이크 고장인 것 같습니다. 속도를 줄일 수 없답니다. 그리고 1073호 여객 열차에도 문제가 생긴 듯합니다.”
상황의 시작이군. 진우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쓰며 직원을 향해 물었다.
“어떤 문젭니까?”
“승무원 한 명이 유리창으로 기관실을 보았는데 기관사가 쓰러져 있답니다.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모양입니다.”
열차 기관실에는 보통 두 명의 기관사가 함께 근무했다. 한 명이 쓰러졌다면 다른 한 명이 아직 있을 것이다.
“부 기관사는 없습니까?”
“그게... 식당 칸에서 식사중이랍니다.”
“연락이 안 됩니까?”
“전화 연락이 안 됩니다. 객차 내 방송은 승객들이 불안해할까 봐 직접 뛰어가서 연락을 취해야 합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가상현실로 만들어낸 문제 상황이겠지만 고약하게 걸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중앙 모니터에는 열차를 나타내는 아이콘들 옆으로 각 열차의 번호와 속도가 표시되어 있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1216호는 기차역 왼쪽 아래에서 석탄을 실은 3763호 화물열차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여객 열차였다.
화면에 표시된 여객 열차의 속도는 시속 180Km. 반면에 앞서 가고 있는 화물열차의 속도는 시속 80Km에 불과했다. 여객 열차가 브레이크를 잡지 못하거나 앞선 화물열차가 철로 변경을 통해 옆 선로로 이동하지 않는 한 추돌사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기차역 오른쪽에서 서로 다른 선로를 타고 반대 방향에서 역으로 접근 중인 두 열차 때문에 화물차의 선로를 바꾸는 방법이 복잡해졌다.
“저기 가-1번 철로에 X표시가 되어 있는 건 뭡니까?”
“아 그곳은 지반 침하로 선로 일부가 휘었습니다. 일단 휘어진 부분을 제거했지만, 재 가설공사는 내년 봄으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그럼 선로가 아예 없는 겁니까?
“예.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골치 아프다. 그렇다면 아래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열차들은 선로 변환기를 통해 이용할 수 있는 철로가 세 개밖에 없다는 말이었다.
“1073호 열차는 역 오른쪽에서 접근하고 있는 여객 열차지요?”
“네. 그렇습니다.”
“일단 1073호 승무원한테 그냥 객차 내 방송으로 부기관사를 기관실로 속히 오도록 연락하라고 하세요. 자세한 상황은 말하지 말고 급한 일이 있다고만 전하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오른쪽에서 오고 있는 두 여객 열차 가운데 밑의 선로를 타고 접근하고 있는 1073호 열차의 속도는 시속 170Km였다. 부기관사가 언제 도착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속도 조정은 불가능한 상태라고 가정하는 게 좋았다. 그 열차의 경우 선로를 변경하지 않고 기차역을 그냥 통과시키는 게 정답이었다.
화물 계류장에서 진입중인 화물열차는 변환기를 통과하기 전까지는 선로 변경이 불가능하므로 가장 아래 쪽 철로인 나-4선을 타야 했다. 그렇다면 결국 1073호는 밑에서 두 번째 선로인 나-3으로 진입시켰다가 그대로 통과시켜야 했다.
결국 기차역 왼쪽 아래에서 접근하고 있는 3763호 화물열차는 세 번째 선로인 나-2로 빼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오른쪽에서 다른 선로를 타고 접근하고 있는 1131호 여객 열차가 갈 곳이 없었다. 화물열차의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속도를 더 올린다고 해도 1073호가 빠져나가고 나서 그쪽 선로로 옮겨 타기 전에 다른 여객 열차와 충돌할 가능성이 높았다.
진우는 중앙 모니터에 나타난 각 열차의 속도와 열차간 거리 등을 토대로 빠르게 암산을 했다. 화물 계류장에서 나온 열차가 화물 열차가 기차역에 들어오기 전에 통과할 수는 없나? 안 된다. 선로 변경 후 일단 정지 상태였다가 다시 출발하기 때문에 속도가 맞지 않았다.
1073호 건너편의 1131호 여객 열차가 브레이크를 걸어 일단 정지하는 것은? 속도와 거리로 보아 기차역에 들어와서야 멎을 것이다. 그럼 결국 충돌이었다. 1073호 열차가 속도를 250Km까지 올려서 조금 더 빠르게 통과하면? 기차역에서 대기 중이던 화물 열차가 통과하고 간신히 시간이 될지 모르겠지만 부기관사가 언제 기관실에 도착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도박을 걸 수야 있겠지만 결과가 너무 불확실했다.
정 안 되면 왼쪽 아래에서 석탄을 싣고 오고 있는 3763호 화물열차에 뒤에서 오던 1216호 여객 열차를 그냥 추돌시키는 수도 있었다. 화물열차에는 승객이 없으니까 그게 인명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일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잘 될까?
진우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상황이 조립되었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숱한 가능성을 놓고 고속으로 계산을 하는 동안 벌써 1분이 지났다. 문득 진우의 눈에 통제실 뒤편 창 너머로 얼어붙은 호수가 보였다. 며칠 동안 계속 눈이 내렸는지 철로를 조금 벗어난 지역부터는 온통 눈이 덮여 있었다. 진우는 다급히 옆에 있던 직원을 붙잡고 물었다.
“지금 바깥 기온이 얼마입니까?
“네, 네?”
난데없는 그의 질문에 통제실 직원이 깜짝 놀라 말을 더듬었다.
“바깥 기온이 지금 얼마냐고요?”
“아... 네, 네. 영하 17도입니다.”
“굉장히 춥네요?”
“그.. 그렇죠.”
“인터넷으로 최근 열흘 동안의 날씨를 확인해 주세요. 최고 기온과 최저 기온, 평균 기온을 모두 뽑으세요.”
“네? 아니 그걸 왜?”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확인부터 해 주세요.”
직원이 인터넷으로 기상청에 접속하더니 금방 결과를 확인했다.
“찾았습니다.”
“최근 최고 기온이 가장 높았을 때가 몇 도입니까?”
“영하 3도였습니다. 최근 강추위가 계속 됐거든요.”
“평균기온은요?”
“매일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영하 12도 안팎이었습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직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진우를 쳐다보았다.
“최근 눈이 많이 내렸습니까?”
“네. 이 지역은 눈이 많은 곳이라 지난 한 달 동안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계속 눈이 내렸습니다.”
“저기 기차역에서 호수 쪽으로 설치되어 있는 건 그냥 철조망인거죠?”
“네. 호수하고 기차역 사이에는 다른 도로나 민가가 없기 때문에 따로 벽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기차역에서 철조망을 지나 호수까지는 대략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네? 아, 그건 저 50미터 정도 될 텐데요. 그런데 실장님 그건 왜 자꾸... 서, 설마?”
“역 왼쪽 아래에서 접근하고 있는 3763호 화물 열차에 연락하세요. 지금 당장.”
직원이 서둘러 통신을 연결하더니 화물 열차 기관사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마도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듯했다. 그의 설명이 대충 끝나자마자 곧바로 진우가 통신기를 넘겨받았다. 그는 통신기를 들고 고함치듯 소리쳤다.
“여기 통제실장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워서 이대로 진입하면 추돌이나 충돌사고가 예상됩니다.”
상대 쪽에서 긴장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충 전해 들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차 최고 속도가 얼마까지 나옵니까?”
“현재 석탄을 적재하고 있어서 아무리 올려도 120Km 이상은 힘듭니다.”
“당장 최고 속도로 올리세요.”
“네? 그래도 뒤에서 오는 열차와의 추돌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잘 들으세요. 그 열차는 기차역으로 진입하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변환기를 조작해서 가-1 선로로 유도할 겁니다.”
“네, 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거긴 노선이 끊겨 있지 않습니까?”
“3763호 열차는 탈선을 해야 합니다.”
진우가 딱딱한 목소리로 자르듯이 얘기했다. 그러자 통신기 너머로 황당함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우리더러 죽으라는 말입니까?”
진우는 크게 호흡을 하고 배에 힘을 꽉 주었다.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그 기차가 탈선하면 호수 방향으로 진행할 겁니다. 그동안 계속 강추위였어요. 호수 얼음의 두께가 제법 될 겁니다. 제 지시대로만 하면 기차가 호수에 빠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누군가 다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열차가 기차역으로 들어오면 추돌이든 충돌이든 대형 사고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여객 열차가 포함된 사고입니다. 많은 인명 피해가 나올 거라고요. 죄송하지만 그 열차가 노선에서 사라져야 사고를 피할 수 있습니다.”
통신기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진짜 같지만 지금 상황은 가상현실이었다. 상대의 침묵은 단순한 망설임이 아니었다. 컴퓨터에서는 내 지시가 주어진 규칙 내에서 수긍 가능한 지를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침묵이 이어진다는 건 내 지시가 주어진 프로그램 속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건가? 이제 와서 거절당하면 다시 생각할 시간이 없는데....“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A코스에서는 아마 나쁘지 않은 성적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제안이 거절당하면 B코스는 처음부터 점수를 말아먹을 가능성이 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계획대로 진행되어야 했다. 진우는 속을 졸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닌 뒤 드디어 통신기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휴~. 진우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고를 완전히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부탁드릴게요.”
통신기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더니 결국 대답이 나왔다.
“알겠습니다. 통제실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진우는 다시 통신기를 꽉 움켜잡았다. 지금부터는 시간이 생명이었다.
“탈선 전부터 집중적으로 통제실에서 지시가 내려갈 겁니다. 지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따라주세요.”
“그럴 정신만 있다면 그렇게 하지요.”
“일단 지금부터 최대 속도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 속도를 올리세요.”
“알았습니다.”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탈선 지시를 따르겠다는 기관사의 대답을 얻자 진우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계류장에서 나온 화물열차는 나-4 선로에 정차한 상태로 대기하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진우의 지시에 따라 통제실 직원들이 통신기를 쥐고 바쁘게 지시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기관사가 쓰러졌다는 1073호 열차에서는 부기관사 복귀했다는 연락 아직 없지요?”
“네. 아직 없습니다.”
그렇다면 1073호 여객 열차는 현재 상태로 그냥 통과시켜야 했다.
“1073호는 나-3 선로를 통과합니다. 1131호 열차는 나-1 선로로 진입시키세요. 기관사에게 지금부터 속도를 줄여서 일단 나-1 선로로 진입하면 정차한 뒤 대기하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통신기가 부산해졌다.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말했듯이 3763호 화물열차는 가-1선로로 유도합니다. 3763호가 통과하자마자 신속하게 변환기를 작동시켜 1216호 열차를 가-2로 유도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나-2로 빼세요.”
“넵.”
중앙 모니터에 표시된 3763호 화물열차의 아이콘이 점차 속도를 높이는 것이 보였다. 80Km였던 열차의 속도가 계속 증가하더니 121Km에 도달했다. 진우가 직원에게서 통신기를 넘겨받아 직접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3763호, 들립니까?”
“네. 빌어먹을 정도로 잘 들립니다.”
대답하는 기관사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미안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선두의 기관차가 선로를 벗어나도 브레이크를 작동시키면 안 됩니다.”
“그럼 계속 밀고 가라는 얘깁니까?”
“연결된 화물 적재 차량들이 모두 선로를 벗어나기 전에 브레이크를 잡으면 차량 중의 일부가 전복될 수 있습니다. 나중은 몰라도 너무 일찍 전복되면 안 됩니다.”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았소.”
대답하는 목소리가 몹시 거칠었다. 상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좀 더 확실히 지시에 따라주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가상현실을 조종하는 인공지능의 성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제실에서는 지금 당신들을 살리려고 하려는 겁니다. 죽이려는 게 아닙니다.”
“후~. 알겠습니다.”
진우는 통신기를 다시 직원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지시가 이어졌다.
“3763호 뒤에서 오고 있는 1216호에 연락해서 현재 상황과 계획을 간단히 설명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그대로 진행하라고 전해 주세요. 그리고 구급대에 연락해서 이곳으로 출동하라고 하세요.”
직원이 1216호와 구급대에 바쁘게 연락하는 동안 진우는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타이밍 싸움이었다. 침착해야 한다. 가상현실로 보면 인명이 걸린 문제였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측정 점수가 이 한 번의 대처로 인해 천당과 지옥을 오갈 정도로 달라질 수 있는 일이었다. 모니터 속에서 3763호 화물열차가 변환기에 가깝게 다가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진우는 다시 통신기를 건네받으면서 통제실에 지시를 내렸다.
“변환기 작동해서 3763호를 가-1 노선으로 이동시키세요.”
“작동시켰습니다.”
“3763호 들으세요. 이제 가-1 노선으로 진입할 겁니다. 최고 속도 그대로 유지하세요.”
“알았습니다.”
화물 계류장에서 나온 빈 화물 열차가 나-4 노선 위에 정차중인 모습이 중앙 모니터에 표시됐다. 3763호 화물열차 역시 가-1 노선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남은 노선의 길이는 고작 2Km였다. 순식간에 가-1 노선을 통과하고 있는 열차의 모습이 통제실의 창문으로 보였다. 진우는 창문에 달라붙었다.
3763호 화물열차의 기관차가 철로를 벗어났다. 기관차가 철로 주변에 가득 쌓여 있는 눈밭 위로 치고 들어가자 눈가루들이 폭탄이 터지듯이 튀어 올라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완전 영화의 한 장면이군.’
커다란 기차바퀴가 거의 잠길 정도로 두껍게 쌓여 있던 눈들이 열차가 치고 지나가면서 사방으로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브레이크 잡지 말고 속도 계속 유지하세요.”
“네~에에에에에.”
창문으로 보기에는 열차가 눈밭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열차 내에서는 엄청난 진동이 느껴질 것이다. 대답하는 기관사의 목소리가 덜덜 떨려나왔다. 진우가 마른 침을 삼키면서 화물열차가 철로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고 있는 동안 드디어 마지막 화물 차량이 선로를 이탈해 선두 차량들이 파놓은 눈 고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지금. 브레이크 잡으세요.”
철로를 벗어난 탓으로 쇠와 쇠가 마찰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브레이크가 걸리면서 기관차가 직진하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비스듬하게 꺾이는 모습이 보였다.
‘됐다.’
진우가 통신기를 들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브레이크 풀었다가 다시 조이세요. 반복합니다. 브레이크를 계속 풀었다가 잡는 걸 반복하세요.”
직진하던 열차가 조금씩 방향을 틀면서 전체 차량이 활처럼 둥글게 휘어나가기 시작했다. 기관차 앞머리가 눈밭을 벗어나 비스듬히 고개를 튼 상태로 호수위로 들어섰다.
“브레이크 잡아요. 열차가 쓰러질 때까지 계속해서 꽉 잡아요.”
화물열차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방향이 조금씩 틀어지더니 전체 화물차량들이 완전히 호수에 들어설 때쯤 해서는 열차 차량들이 모두 옆으로 길게 늘어서서 호수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결국 마찰을 이기지 못한 차량들이 기관차부터 시작해서 옆으로 들리더니 쿵하고 넘어졌다. 그 상태로 10여 미터를 호수 중심 쪽으로 더 미끄러져 들어가던 화물열차가 결국 완전히 정지했다.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던 호수 위로 화물차에서 쏟아져 나온 석탄 가루들이 화선지 위의 먹물처럼 까맣게 퍼져 나갔다.
“3763호. 3763호. 괜찮아요?”
“실장님 1131호와 1073호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진우가 다급하게 3763호를 호출하고 있는데 통제실 직원이 오른쪽에서 두 개의 여객 열차가 접근하고 있음을 알렸다.
“변환기 작동해서 1131호는 나-1 노선으로 유도해서 정차시키세요. 1073호는 나-3으로 진입시켜 가-3을 통과한 다음 빠져나가는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1216호 여객 열차는 가-2로 유도해서 나-2를 거쳐 1131호가 진행해 오던 철로로 빠져나가게 하세요.”
“넵.”
잠시 후 두 개의 여객 열차들이 서로 엇갈리며 역을 통과했다. 노선이 비자 나-1에 정차해 있던 여객 1131호도 다시 움직여 노선을 바꾼 다음 왼쪽 아래로 빠져나갔다. 진우는 긴장이 풀리면서 의자에 쓰러지듯 걸터 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복잡하게 꼬여 있던 노선 작업을 화물열차 하나를 의도적으로 탈선시킴으로써 깔끔하게 정리한 것이다.
문제는 탈선된 3763호였다. 여기서 사람이 죽으면 무조건 감점이 틀림없었다.
“3763호. 3763호. 대답하세요.”
“치직.. 치직. 아, 3763호입니다.”
대답이 들리자 통제실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직원들끼리 서로 껴안고 난리였다.
“크게 다친 사람 없습니까? 다들 괜찮아요?”
“아.. 부기관사가 팔을 좀 삔 것 같아요. 저도 머리를 부딪쳤는데 피가 날 정도는 아닙니다.”
“후~ 다행입니다. 하지만 일단 얼음이 깨질 수 있으니까 신속히 방한 장비 걸치고 기관차에서 빠져 나오세요. 문은 열립니까?”
“잠시 만요. 아, 네 열립니다. 곧 나가겠습니다.”
옆으로 누워 있는 기관차의 문이 열리더니 사람 하나가 낑낑거리며 문 위로 기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때마침 호숫가의 눈밭을 헤치며 들것을 든 구급대 요원들이 호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진우가 안도의 한숨을 길게 토하는 순간 모든 풍경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는 어느 새 하얀 공간으로 되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