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3화 (3/235)

3화

유난히 날씨가 화창한 가을날이었다. 8시 반이 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집합을 완료한 학생들을 태운 헌터양성소 소속의 무중력 버스는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학생들을 양성소 건물 앞의 운동장에 내려놓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속속 도착해 운동장은 1000여명의 학생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진우네 학교를 포함해서 모두 4개 정도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모아온 듯했다. 그 많은 학생들이 모였는데도 워낙 운동장이 넓어서 그런지 별로 사람이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운동장이 네 군데나 더 있대. 역시 헌터 양성소야. 여기서 테스트를 받을 수 있다니 우린 운이 좋은 거야.”

정태는 들떠서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이 녀석 어제 잠을 제대로 자기나 했을까. 하긴 대한민국처럼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이만큼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 해도 대단하긴 했다.

“오전에는 근력, 지구력, 순발력 등을 측정하기 위한 체력 검정이 있습니다. 체력 검정이 끝난 뒤에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반부터 가상현실장치를 이용해 인식능력, 판단능력, 반응속도 등을 측정할 겁니다. 스무 명씩 열 개 조로 나누어 측정을 하니 조별로 교관들의 지시를 잘 따라주십시오. 물론 여러분의 학교 성적도 평가에 일부 반영된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모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헌터 양성소의 부소장이라고 밝힌 중년의 아저씨가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테스트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나자 학생들은 각 조별로 인솔 교관을 따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 *

진우가 속한 조는 100m 달리기부터 시작했다. 그는 테스트 통과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정작 자신의 순서가 되자 나름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기록은 13초 4. 평범한 학생 수준에서 본다면 제법 빠른 편이기는 했지만 헌터를 꿈꾸기에는 많이 모자랐다. 반면에 그와 같은 조에 속했던 정태는 12초 1을 기록해서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측정을 마치고 진우의 옆에 앉아 쉬던 정태가 갑자기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야, 저기 봐라 저기.

“뭔데.”

“옆 조에서 방금 들어온 녀석 말야.”

100m 달리기 측정은 출발 신호가 따로 없었다. 자기 차례가 된 학생이 출발점에서 신분 확인을 한 다음 뛰기 시작하면 자동으로 시간이 측정되기 시작해서 결승점에 도착하면 결승선 한 쪽에 있는 커다란 전광판에 기록이 나타났다. 그 전광판에 11초 0이 찍혀 있었다.

“뭐야? 육상 선수인 거야?”

“으아, 괴물이네. 어떻게 나보다 1초 이상 빠른 놈이 있을 수가 있지?”

그때 자기 조 쉬는 자리로 가던 그 학생이 정태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씩하고 웃었다. 얼핏 봐도 190 정도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몸의 비례도 좋았다. 건장하다기보다는 잔 근육이 오밀조밀하게 박힌 잘 빠진 체형이었다.

“저 자식 지금 쪼개는 거 맞지? 재수 없게 생긴 자식이...”

“흠... 저만 하면 잘 생긴 것 같은데...”

“그래 뭐... 그래도 비실비실해 보이잖아.”

“탄탄한 몸으로 보이는데...”

“뛰는 폼이 이상했어.”

“너 쟤 뛰는 거 보지도 못했잖아.”

진우의 눈앞으로 정태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야 강진우. 너 도대체 누구 편이야?”

“응? 나야 물론 네 편이지. 질투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버린 친구의 잘못된 시선을 바로잡아 주는 정말 좋은 친구.”

“어휴. 됐다 됐어. 암튼 저 자식 뭔가 재수 없어.”

정태의 입장에서는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한 셈이었다. 그 마음이 이해될 듯해서 진우는 그저 픽하고 웃고 말았다.

정태의 ‘재수 없는 놈’이 속한 조는 진우네 조와 오전 내내 같이 측정을 받았다. 덕분에 정태의 기분은 계속해서 ‘대체로 흐림, 가끔 비’였다. 이어진 제자리높이뛰기와 멀리 뛰기, 윗몸 일으키기 등에서 그는 계속해서 간발의 차이로 ‘재수 없는 놈’에게 밀렸다. 측정 종목마다 전광판이 있어 측정을 끝낸 학생들의 기록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정태 녀석은 자신의 기록보다 ‘재수 없는 놈’의 기록을 더 챙겨 보았고, 그때마다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반전의 계기는 근력 측정의 첫 번째 순서인 악력 측정이었다. 진우네 조 옆에서 측정을 마친 ‘재수 없는 놈’은 62.4Kg을 기록했다. 정태의 차례가 되었을 때 녀석은 비장한 표정을 하고 측정기를 쥐었다. 올림픽이라도 출전한 선수 같았다.

“으쌰쌰쌰쌰샤~~~~아흐~~”

해괴한 기합을 지르면서 얼굴이 시뻘겋게 된 녀석은 척 봐도 죽을힘을 다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몸까지 바들바들 떠는 정태를 보면서 진우는 자기 차례가 되면 설사 기록이 저조하더라도 절대 무리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용을 쓰는 정태의 표정이 마치 변비 걸린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측정을 마친 정태의 기록이 전광판에 나타났다. 65.5Kg.

“아자~~~”

금메달 딴 선수처럼 두 팔을 번쩍 치켜들던 녀석이 갑자기 울상을 했다.

“왜 그래?”

“아 젠장. 이빨에 금간 것 같다.”

“......”

*  * * * *

악력을 포함한 근력 측정 다섯 종목 중에서 정태는 무려 네 종목이나 ‘재수 없는 놈’을 이겼다. 상당히 미세한 차이의 승리이기는 했지만 덕분에 정태의 기분이 ‘대체로 맑음’으로 바뀌었다. 진우는 정태보다는 상대에게 더 감탄했다.

‘근육질 체형도 아닌데 의외로 힘이 좋네.’

하긴 정태도 겉으로 보이는 것에 비해서는 생각 밖으로 민첩한 편이었다. 애써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런 두 사람이 진우는 모두 부러웠다.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기록을 내고 있었지만 곧 자신의 취약점이 드러날 테스트가 다가오고 있었다.

1,500m에서는 뜻밖에도 진우가 가장 좋은 기록을 보였다. 4분 12초. 보통 올림픽 경기 같은 곳에서 금메달을 따는 기록이 3분 20초대니까 전문적인 육상 선수가 아닌 고등학생으로서는 아주 좋은 기록이었다. 정태가 간신히 5분대를 넘기지 않고 헉헉 대며 들어온 뒤 한참 전에 들어와 쉬고 있던 진우를 쳐다보며 “이 자식도 괴물이었잖아”라고 소리쳤을 정도였다.

진우는 어렸을 때부터 기본적인 폐활량이나 체력이 좋았다. 그것도 아주 좋았다. 앞서 측정을 마치고 들어와 옆 조에서 쉬고 있던 예의 그 ‘재수 없는 놈’조차 진우의 기록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을 정도였으니까. 1,500m는 오전 측정에서 진우가 유일하게 남들의 관심을 받은 종목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어진 순발력 테스트와 정확성 시험에서 진우는 처참할 정도의 결과를 얻었다. 순발력 시험은 양쪽 끝에 빨간 신호등이 서 있는 50m 트랙에서 치러졌다. 트랙을 전력으로 질주하다가 맞은 편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방향을 바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을 5회 반복하는 방식이었다.

진우는 처음 세 번을 방향을 바꾸다 미끄러졌고, 그 다음의 두 번은 아예 포기하고 천천히 뛰었다. 꼴찌에 가까운 기록이었다. 정태가 자신을 향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쳐주었지만, 빈말로도 괜찮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고 말았다.

정확도 시험은 X자 모양으로 다섯 개의 원이 그려져 있는 표적에 교관의 지시대로 10개의 공을 던져 맞추는 것이었다. 진우는 단 1개의 공을 맞추는 데 그쳤다. 그 한 번도 운이 좋아 맞춘 것에 불과했다. 그 밖에 순발력을 측정하는 시험이 셋, 정확도를 측정하는 시험이 둘 더 있었지만 역시 최악의 성적을 받았다. 혹시나 했던 기대가 역시나로 바뀌었다. 마지막 측정을 마친 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 * * *

오전의 체력 검정이 끝난 뒤에 간단한 뷔페식으로 되어 있는 구내식당에서 진우는 정태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정태의 식판 위로 음식들이 산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너, 그거 설마 다 먹을 거냐?”

“당연하지. 오전에 힘을 뺐더니 위장이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먹어야 오후에 또 힘을 쓰지 음핫핫하..”

“오후에는 가상현실 장치를 이용한 측정인데, 힘을 어디다 쓰려고?”

“난 머리도 밥심으로 쓰거든.”

“넌 뇌가 무슨 근육으로 되어 있냐?”

“맞아. 바로 그거야. 생각하는 근육. 음핫하하하.”

진우가 할 말을 잃고 숟가락을 드는데 누군가 옆 자리에 식판을 내려놓고 앉았다.

“안녕. 여기 자리 빈 거 같은데 같이 먹어도 되지?”

이미 볼이 불룩할 정도로 밥을 우겨넣고 있던 정태가 고개를 들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우도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고 놀랐다. 그 ‘재수 없는 놈’이 옆자리에서 씩 웃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나 김도훈이다. 대천고 1학년이야.”

“어어.. 너능 그 재수어은...”

정태 녀석이 상대가 알아들으면 곤란한 이야기를 뱉고 있었다. 다행히 밥을 잔뜩 넣고 있어 발음이 새는 바람에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기 어려울 것 같았다. 진우는 정태의 입을 얼른 막았다.

“밥알 튄다. 삼키고 말해라.”

다행히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챈 정태는 입을 다물고 밥을 꿀꺽 삼켰다.

“학산고 1학년 박정태다.”

김도훈의 고개가 진우에게로 향했다. 쩝. 내 이름은 알아서 뭐 하게.

“같은 학교 1학년 강진우야.”

“너 1500m 달리기 정말 잘 하더라.”

“그래. 1500m만.”

별 걸 다 기억하는 놈이군.

“정태라고 했지? 너도 잘 하던데? 깜짝 놀랐다.”

정태 녀석의 입 꼬리가 비틀렸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께서는 못하는 종목이 없던데?”

“난 어렸을 때부터 계속 특훈을 받았거든. 코치들 말로는 나보다 잘 하는 학생이 없을 거라고 해서 자신 있었는데, 니들 보니까 코치들이 너무 쉽게 생각한 거 같아.”

“어느 학원 다녔는데?”

“아.. 학원은 안 다녔고 그냥 집에서 훈련했어. 코치들이 집으로 왔거든.”

진우와 정태의 눈이 둥그레졌다. 뭐야 이 녀석.

“너 집이 부자인가 보다? 개인 코치를 두었다고?”

“아니.. 뭐 집 근처에 학원이 없어서 왔다 갔다 하기가 불편했었어. 그래서 어머니가 코치들을 그냥 집으로 오라고 하신 거야.”

그게 그 얘기지 이 자식아. 진우는 문득 이 자식이 재수 없는 놈이라는 정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여유 있는 부잣집 도련님 얼굴을 하고 있던 김도훈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한쪽을 향해 맹렬히 손을 휘저었다.

“연희야! 여기, 여기.”

김도훈의 갑작스러운 호들갑에 진우와 정태의 목이 녀석이 보고 있는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김도훈이 소리치며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곳에 다소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는 여학생 하나가 식판을 들고 서 있었다.

“예, 예쁘다. 윽.”

거의 반사적으로 헛소리를 내뱉는 정태의 옆구리를 진우가 재빨리 팔꿈치로 가격했다. 하지만 정태가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할 만 했다. 김도훈이 부른 여학생은 진우가 보기에도 꽤 예뻤다. 170cm 정도의 키에 늘씬하게 잘 빠진 체형이었다. 말랐다기보다는 건강하게 탄력이 있어 보이는 몸의 굴곡 또한 예술이었다. 게다가 젖살이 붙은 것도 아닌데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여학생 특유의 청순함과 귀여움이 어우러진 얼굴은 독특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만 김도훈을 바라보고 있는 여학생의 표정이 너무 무덤덤했다.

표정으로 봐서는 김도훈의 아는 척이 꼭 반가운 것 같지는 않았는데도 여학생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식판이 거의 비워져 있었다. 그녀는 김도훈의 곁에 오더니 진우와 정태를 힐끗 쳐다보고는 억양의 고저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누구? 도훈이 친구니?”

“아니 다른 학교에서 온 애들인데 여기서 오늘 처음 만났어. 오전 측정을 함께 받았는데 실력들이 대단하더라고. 어떤 애들인지 알고 싶어서 얘기하던 중이야.”

“도훈이 네가 대단하다고 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가 보네?”

그녀는 적당히 김도훈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어투에서 느껴지는 느낌에는 별로 공감하는 기색이 없었다. 김도훈이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진우와 정태에게 그녀를 소개했다.

“인사해라. 차연희야. 부산 정신 여고 1학년.”

김도훈이 차연희를 대신해서 그녀를 소개하자 진우와 정태는 엉겁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안녕. 나 학산고 1학년 박정태야.”

“난 같은 학교 강진우. 근데 두 사람은 친구인가 보네?”

“우리 아버지하고 연희 아버지하고 잘 아시거든. 어릴 때부터 자주 봐서 친한 사이야.”

차연희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김도훈이 했다. 눈치를 봐서는 차연희는 별로 대답할 생각도 없었던 것 같았다. 김도훈이 애써 웃으며 차연희에게 자리를 권했다.

“밥 먹으러 온 거면 같이 먹자”

“아냐. 난 다 먹었어. 막 나가려던 참이야.”

“그래? 오전 측정은 잘 했니?”

“나쁘진 않았어.”

“너라면 당연히 잘 했겠지. 오후에도 잘 해서 같이 헌터 학교로 전학 오자.”

“그래. 나 이만 갈게.”

차연희는 그 말을 끝으로 맞은편에 앉은 진우와 정태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그대로 자리를 떴다.

“여자 친구니?”

차연희가 조금은 쌀쌀맞은 태도로 사라지자 정태가 김도훈에게 물었다.

“응.”

“둘이 사귀는 사이야?”

“결혼할 사이야.”

진우와 정태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 자식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인데 벌써 결혼까지 약속했다고?”

“좋은 여자 있으면 얼른 정하는 거지. 일단 나는 그렇게 결심했어. 나중에 연희하고 결혼하기로.”

그러니까 아직은 혼자 생각이라는 거군. 어쩐지 차연희의 반응이 그다지 살가운 사이로 보이지 않았었다. 당당하고 침착한 녀석으로 보였는데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뭔가 침착함을 잃어버리고 묘하게 억지로 당당한 척 하려 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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