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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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탁에게 알래스카 건에 대해서 알렸다.

“북극이랑 맞닿은 그 알래스카 말이야?”

“그 알래스카 맞아요.”

“마을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한다고?”

“복지 사업이라고 하네요.”

“샐러드 복지라, 알래스카니까 가능한 일이겠네.”

그의 말대로 알래스카라서 가능할 복지 정책이었다.

알래스카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기본 소득제를 도입한 곳이다.

재산이나 소득, 고용 여부 등과 무관하게 거주자들에게 기본 생활비를 지급한다.

‘알래스카 주의 자원은 주민의 소유’라는 알래스카 헌법에 따른 결정이었다. 석유와 천연자원에서 발생하는 수입 일부를 활용해 알래스카 영구 기금을 마련해 기본 소득을 지급하는 것이다.

“계약 때문에 알래스카에 가야 할 거 같아요.”

“계약은 누구랑 하는 거지?”

“알래스카 주와 직접 계약하는 형태에요.”

“그럼, 알래스카 주지사와 만나겠네?”

* * *

알래스카로 떠나는 날이 정해졌다.

이번 출장은 혼자 떠나게 됐다.

알래스카로 떠나기 전 하동 대학을 찾았다.

태풍으로 피해를 본 농부들이 모여 있었다. 전국에서 모인 농부들이었다.

많은 혜택이 있는 만큼 지원자가 많이 몰렸다. 전부 다 뽑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은 30명 정도였다.

난 농부들 앞에 섰다.

“지리산 농부들의 대표 김덕명입니다. 농사는 하늘의 뜻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농사는 날씨가 중요합니다. 농부는 날씨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올해는 날씨 때문에 힘든 시간이셨으리라 짐작됩니다.”

피해를 본 사실이 떠올랐는지, 농부 중에 눈이 촉촉하게 젖은 이도 있었다.

“이번 교육을 진행하는 이유는 여러분들의 재도약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사용하면 태풍이 와도 영향 없이 작물을 재배할 수 있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가 여러분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길 바랍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난 농부들의 눈빛을 읽었다.

그들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재기에 성공하고, 다시는 쓰러지지 않겠다고.

* * *

캐나다 밴쿠버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알래스카로 가는 직항이 없어, 중간에 갈아타야 했다.

문득 남극으로 갈 때가 떠올랐다. 길고 먼 여정이다.

알래스카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했다.

앵커리지는 알래스카에서 가장 큰 도시다. 항구를 중심으로 발달한 곳이다.

러시아 제국이 통치할 때만 해도 황무지였던 땅이다.

미국이 알래스카를 차지하면서 가장 큰 도시로 부상했다.

전해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알래스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재킷을 입고 있었다. 북쪽의 추운 나라다웠다.

“숙소로 먼저 가실까요?”

그녀는 앵커리지에서 가장 좋은 호텔을 잡았다.

난 정장으로 갈아입고 로비로 나왔다.

“피곤하실 텐데, 오늘은 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그럼 주지사부터 만나러 갈까요?”

“좋습니다.”

앵커리지에 알래스카 주 정부 건물이 있었다.

전해리와 함께 주 정부 건물로 들어갔다.

비서가 우릴 안내했다.

역대 주지사들의 사진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현재 주지사는 공화당의 크리스 쿠스코였다.

크리스 쿠스코는 덩치가 큰 백인 남자였다.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크리스 쿠스코입니다.”

“김덕명입니다.”

“앉으시죠.”

난 소파에 앉아 방안을 둘러봤다. 알래스카의 원주민 사진이 눈에 띄었다.

사진에 관심을 보이자 주지사가 웃으며 말했다.

“저희 증조할아버지 사진입니다.”

난 크리스 쿠스코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전형적인 백인의 얼굴과는 사뭇 달랐다. 푸른 눈의 서양인과 달리 그의 눈동자는 검은색에 가까웠다.

“저에게도 알래스카 원주민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크리스 쿠스코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알래스카 원주민들은 강대국의 놀음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다.

러시아의 통치를 받다 지금은 미국의 통치를 받는 중이다.

“처음엔 지리산 농부들이 아니라, 플랜트 팩토리와 계약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전해리 씨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꿨죠.”

크리스 쿠스코는 전해리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전해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난 크리스 쿠스코에게 물었다.

“전해리 씨가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 컨테이너 소개를 아주 잘 했나 봅니다.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나요?”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을 상세하게 설명해 줬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애플리케이션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죠. 플랜트 팩토리의 샐러드 컨테이너는 애플리케이션 기술이 없더군요. 전해리 씨의 설명을 듣고 마음을 바꿔 먹었습니다.”

크리스 쿠스코는 테이블에 지도를 펼쳤다.

알래스카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지도였다.

“지도에 점으로 표시한 지역들이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할 곳들입니다.”

크리스 쿠스코는 지도에 찍힌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선은 50개 마을에 시험적으로 설치할 계획입니다. 반응이 좋으면 더 확대해 나갈 생각입니다.”

“샐러드 컨테이너가 아니라 재배 시설을 설치할 생각은 없으신가요?”

“처음엔 그 부분도 고려해 봤지만, 샐러드 컨테이너가 적당하다고 여겼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죠?”

“알래스카는 인구수에 비해 땅이 넓습니다. 인구밀도도 아주 낮고요. 마을 단위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맞는 말이다. 두바이처럼 도시에 인구가 집중된 곳은 대규모 재배 시설이 들어서기에 적당했지만, 알래스카는 정반대였다.

“알래스카는 지역에 따라 온도 차가 무척 큽니다. 북극과 맞닿은 지역은 최저 기온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기도 합니다. 작물을 재배하기 힘든 환경이죠. 그래서 채소는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입니다. 수입에만 의존하다 보니 가격이 제멋대로고요. 그것이 샐러드 컨테이너를 도입하고 싶은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크리스 쿠스코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알래스카 주지사의 고민이 느껴졌다.

알래스카의 풍부한 자원으로 주민들에게 기본 소득을 주고 있었지만, 물가가 비쌌다.

특히 농산물은 냉동 수입 제품이 대부분이며, 신선한 채소 등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알래스카 주민들에게 샐러드 복지를 제공하는 건 선심을 쓰는 복지 정책이 아니었다.

꼭 필요한 일이었다.

주지사와 이야기를 충분히 나눈 뒤, 샐러드 컨테이너에 관한 계약을 맺었다.

* * *

다음 날, 전해리와 함께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할 마을 중 한 곳을 찾았다.

멀리 만년설이 보이는 어촌 마을이다.

전해리가 만년설을 보며 말했다.

“예전에는 저곳에 금광이 있었다고 해요.”

“금광이요?”

“골드러시가 있을 정도였죠.”

골드러시(gold rush)는 금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현상을 말한다.

알래스카는 석유뿐만 아니라 다른 천연자원도 풍부한 곳이다.

천연자원은 풍부하지만, 작물을 재배하기엔 최악의 환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주지사의 말대로 마을과 마을 사이의 거리가 상당했다.

먼 거리 때문에 특이한 광경이 연출 되기도 했다.

난 하늘을 바라보며 물었다.

“알래스카엔 경비행기가 많네요!”

도로를 달리는 동안 경비행기가 다니는 장면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

“알래스카에선 피자 배달도 경비행기로 해요.”

“피자를 비행기로 배달한다고요?”

“네.”

전해리가 웃으며 말했다.

우린 곧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할 마을에 도착했다.

앵커리지에서 비교적 가까운 마을이라고 했지만, 자동차로 2시간 거리였다.

왕복 4시간이다. 피자 배달도 경비행기를 이용하는 이유였다.

마을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크로루 네스트(Crow nest), 까마귀 둥지다.

전해리는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이 어부예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어촌마을이다.

서른 가구가 조금 넘는 것 같았다.

마을 중앙에 공터가 하나 있었다.

전해리는 그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놓을 예정이에요.”

전해리는 알래스카에서 사전 작업을 하고 있었다.

50개의 마을을 선정한 사람도 전해리였다.

지리산 농부들이 계약을 따낸 건, 우수한 기술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해리가 만든 제안서도 큰 역할을 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다.

작은 매장 하나가 눈에 띄었다.

“저곳은 슈퍼마켓 아닌가요?”

“네. 마을에 하나뿐인 슈퍼마켓이에요.”

“구경 좀 하고 갈까요?”

그녀와 함께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갔다.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가게 안에는 공산품부터 고기와 채소까지 없는 게 없었다.

“가격이 상당히 비싸네요.”

특히 채소 가격이 비쌌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면 마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앵커리지로 돌아와 전해리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알래스카에서 유명한 킹크랩이다.

살이 연하고 맛이 좋았다.

호텔로 들어가는 길에 그녀가 물었다.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시나요?”

“네, 계약까지 마쳤으니 바로 일을 시작해야죠. 샐러드 컨테이너가 준비되는 대로 알래스카로 보내겠습니다. 전문가들도 함께요.”

“그동안 준비 잘해 놓고 있겠습니다.”

다음 날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 * *

그 시각, 하동 지리산 농부들의 재배 시설.

배선아 기자가 재배 시설 안으로 들어갔다.

한기탁이 그녀를 반겼다.

“취재하러 오신다고 대표님에게 전달받았습니다.”

“김덕명 대표님은 안 계시나 봐요?”

“갑자기 출장이 잡혀서요. 혹시, 대표님 인터뷰도 필요한가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오늘은 청년 농부들을 만나고 싶어서 온 거니까요.”

“그러시군요.”

한기탁은 그녀에게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하동 재배 시설에서 샐러드는 얼마나 생산하나요?”

“하루에 30톤을 생산합니다.”

“엄청난 양이네요?”

“주문을 거절할 정도로 문의가 많이 들어오기도 했었죠.”

“어마어마하군요!”

배선아 기자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청년 농부 인터뷰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한기탁 팀장님이 인터뷰할 분을 추천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배선아 기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한기탁은 한 남자와 함께 등장했다.

긴 눈매가 인상적인 남자다.

“성도윤이라고 합니다.”

“배선아 기자입니다.”

성도윤이 자리에 앉자, 한기탁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도윤 씨는 무슨 일을 하고 있나요?”

“재배 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럼 샐러드용 채소를 재배하는 농부시네요?”

배선아 기자는 농부라는 단어에 힘을 줘서 말했다.

“네, 샐러드용 채소를 재배하는 농부죠. 농사 펀딩 일도 함께 진행하고 있습니다.”

“농사 펀딩은 뭔가요?”

성도윤은 그녀에게 농사 펀딩에 대해서 말했다.

배선아 기자는 메모를 하며 말했다.

“농부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는 일이군요. 대단하시네요!”

“모두 김덕명 대표님을 보고 배운 겁니다.”

“대표님을 보고 배웠다고요?”

“혼자만 잘되는 건 소용없다고 하셨으니까요.”

인터뷰의 마지막에 배선아 기자가 물었다.

“혹시, 청년 농부들의 연봉을 여쭤봐도 될까요? 부담되시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성도윤이 눈을 지그시 뜨며 말했다.

배선아 기자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연봉이 어느 정도 되나요?”

부자 농부들

성도윤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1억 원 정도 됩니다.”

“네에~? 1억 원이요? 엄청나네요!”

배선아 기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김덕명 대표님이 약속했던 일입니다. 하동 재배 시설과 두바이 재배 시설을 완성하면 모두 부자 농부가 될 거라고 말씀하셨죠.”

“두바이에서도 청년 농부들이 일하고 있죠?”

“네. 현재 50명의 재배 전문가들이 파견 나가 있습니다. 유럽에도 청년 농부들이 나가 있고요.”

“그렇군요. 지리산 농부들이 한국에서만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돈을 벌고 있다는 게 실감 나는군요. 청년 농부들의 연봉이 1억 원 정도라는 것도 굉장히 인상적이네요. 오늘 인터뷰 감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한마디 하시는 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연봉은 상징적인 숫자라고 생각합니다. 전 지리산 농부들의 구성원으로 일하는 게 행복합니다. 농사 펀딩을 진행하며 보람도 느끼고 있고요.”

* * *

밴쿠버 공항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눈을 감자 남극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남극에서의 작은 성공이 두바이와 암스테르담 그리고 알래스카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기반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재배 시설까지 완성했다.

남극에서 찾은 수직 재배 비법으로 대규모 재배 시설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앞만 보고 달린 지난날들이다. 후회는 없었다.

눈을 뜨자 인천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공항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신문에 성도윤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나와 있었다.

‘하동의 부자 농부’라는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난 그 자리에서 기사를 읽었다. 예상대로 배선아 기자가 쓴 기사였다.

첨단 농업으로 성공한 지리산 농부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야기의 중심은 지리산 농부들에서 일하는 ‘청년 농부들’이다.

성도윤의 농사 펀딩이 성공한 이야기부터, 청년 농부들이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개발한 이야기까지, 하동에서의 농부들 생활이 제법 상세히 기사화됐다.

지리산 농부들의 구성원으로 일하는 게 행복하다는 성도윤의 마지막 말로 기사가 마무리됐다.

공항 앞에서 한기탁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알래스카에서 돌아온 걸 환영해.”

한기탁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말했다.

“수고스럽게 왜 나왔어요?”

“우리 대표님이 먼 길 다녀왔는데, 이 정도는 서비스해야지.”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라? 손에 든 건?”

“신문이요.”

난 신문을 들어 그에게 보였다. 성도윤의 얼굴이 난 면을 보자 한기탁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보여 주려고 했는데, 먼저 사 버렸네.”

한기탁도 손에 쥔 신문을 들었다. 나와 같은 신문이다.

우린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돌아가는 길에 한기탁이 물었다.

“알래스카는 일은 어땠어?”

“좋은 조건으로 계약했어요.”

“더 바빠지겠네?”

“맞물려 있는 일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을 거 같아요.”

“일도 좋지만 좀 쉬기도 하자. 하동 재배 시설 완공된 후로 언제 쉬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하동 재배 시설을 완전 가동한 후로는 여유가 없던 건 사실이다.

청년 농부들은 그나마 돌아가며 쉴 수 있었지만, 팀장급들은 주말도 없이 일하고 있었다.

“우리도 돌아가면서 휴가를 가면 어떨까요?”

“우리 대표님 입에서 그 말이 나올지 몰랐네?”

한기탁이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겼다. 기분 좋은 얼굴이다.

* * *

하동 사무실에 도착하자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팀장들이 내 사무실로 모여들었다.

난 그들에게 알래스카 계약 건에 대해서 알렸다.

내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한기탁이 입을 열었다.

“올여름에는 휴가를 갈 수 있게 됐습니다.”

“휴가요?”

이동춘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알래스카 일까지 해결하려면 무척 바쁠 텐데, 괜찮을까요?”

이동춘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일도 쉬면서 해야죠.”

“대표님 생각이 그렇다면 전 찬성합니다.”

이동춘이 목청을 높여 말했다.

“아버님은 이번 휴가 때 두바이에 다녀오시면 어때요?”

“두바이요?”

“네. 두바이 구경도 하고 아드님도 만나고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네요.”

이동춘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기탁이 동료들을 보며 외쳤다.

“다들 휴가 계획 잡으세요. 먼저 계획을 잡는 순서대로 휴가를 쓸 수 있게 조정할 테니까요.”

* * *

한기탁의 말대로 일에만 매달려 살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난 생활 방식을 바꿔 보기로 마음먹었다.

주말만은 여유를 가져 보기로 정한 것이다. 막상 주말이 되니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일 생각과 여러 가지 고민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때 전화가 왔다. 최근 하동에 도서관을 만든 정가희였다.

“뭐해? 주말인데?”

“쉬려고.”

“주말에 쉬기도 해?”

“그럼, 나도 사람인데.”

“도서관에 놀러 와.”

“일 시키려는 거지?”

“맞아, 일 좀 시키려고.”

정가희는 주말마다 도서관에 내려왔다.

그녀는 양초 학교 선생 일을 하며 도서관 일도 보고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 가운데 가장 바쁜 사람이었다.

머리도 식힐 겸 도서관으로 가기로 했다.

나가려는 순간 어머니가 물었다.

“주말인데 또 일하러 가는 거야?”

“아니요, 오늘은 쉴 거예요.”

“정말이야? 쉰다고 하면서 사무실 가는 거 아니지?”

어머니는 못 믿겠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정말이에요. 가희 만나러 도서관 가는 거예요.”

“그래? 그럼 잠깐 기다려 봐.”

잠깐 기다려보라고 했지만, 시간이 제법 걸렸다. 난 주방으로 들어가 물었다.

“뭘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먹을 것 좀 챙겨 주려고.”

“괜찮아요.”

어머니는 김밥과 과일을 바구니에 넣었다.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거, 가져가서 먹어.”

“이 많은 걸 누가 다 먹어요?”

“도서관에 간다며? 거기 사람들하고 같이 먹어.”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싼 음식을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 * *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수업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정가희가 칠판에 글을 썼다. 책상에 앉은 사람들이 그녀가 쓴 글을 따라 읽었다.

수강생의 대부분은 할머니들이다.

할머니들에게 한글 교육을 하는 것 같았다.

난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언제 온 거야?”

정가희는 웃으며 물었다.

“금방 왔어.”

“손에 든 건 뭐야?”

“같이 먹을 점심.”

정가희는 바구니를 들여다보고 물었다.

“이거, 어머님이 싸 주신 거지?”

“어떻게 알았어?”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지.”

“귀신이네.”

“다 같이 먹어도 될까?”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관 휴게실에 할머니들과 함께 김밥과 과일을 먹었다.

전부 아는 할머니들이었다.

하동 대학 때부터 지리산 농부들의 식단을 책임져 주고 있는 분들이다.

“오늘은 대표님에게 점심을 얻어먹네요~”

할머니 중 한 명이 웃으며 말했다.

김밥을 먹으며 할머니에게 물었다.

“수업은 들을 만 하세요?”

“요즘은 글을 배우는 낙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좋으신가 봐요?”

“아주 좋아요, 우리 가희 선생님이 얼마나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는지~”

옆에 듣고 있던 할머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을 먹고 정가희와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

벽화가 그려진 곳을 지나며 그녀에게 물었다.

“할머니들은 집에 안 가시네?”

“수업 끝나면 책도 보시고, 쓰기 연습도 하셔.”

“열정이 대단하다.”

“나도 놀랐어.”

“정가희 다음 목표가 한글 교실이었네.”

“한글 교실은 도서관을 만들 때부터 생각했던 일이야. 다음 목표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

“아직 안 정했다니 궁금하네, 난 오늘 새로운 목표를 하나 정했는데.”

“목표?”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독서 모임을 만들어 볼 생각이야.”

“독서 모임?”

* * *

지리산 농부들의 독서 모임을 결성했다.

시작은 한기탁을 포함한 팀장급으로 정했다.

한기탁이 책을 들고 물었다.

“휴가를 주는 대신 주말에 쉬지도 못하게 하는 거야?”

“책 좀 같이 읽자는 거죠.”

“청년 농부들도 같이하는 건 어때?”

“성도윤에게 슬쩍 물어는 봤어요.”

“뭐라고 해?”

“자기네들끼리 하겠다고 하네요.”

“하긴, 우리랑 같이 있으면 부담스럽겠지.”

그 후로 난 주말마다 도서관을 찾았다.

독서 모임은 일주일에 한 권씩 책을 보고, 각자의 감상과 의견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민요한이다. 그는 첨단 농업과 관련한 책을 잘도 찾아냈다.

출간된 책이 아니라 논문을 준비하기도 했다.

드론을 농업에 이용하는 내용의 논문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백민석은 프로그램과 관련한 책을 추천했다가 욕을 먹기도 했다.

이동춘은 생각과 달리 기술과 관련 책을 추천하지 않았다. 그가 추천한 책은 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수필이었다.

한기탁은 요리와 관련한 책을 추천했다. 그가 요리에 관심이 있는지 독서 모임을 통해 알게 됐다.

성도윤과 청년 농부들도 도서관에서 독서 모임을 했다.

그룹을 지어 모임을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도서관에서 종종 마주칠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우린 서로의 책을 들어 보이곤 했다.

정가희는 우리를 위해 간식을 준비했다.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그렇게 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기탁은 오늘따라 독서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모임이 끝날 때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다음 주는 한 주 쉬는 게 어때?”

“왜요?”

“휴가를 가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으니까.”

한기탁은 이동춘과 백민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동춘이 웃으며 말했다.

“다음 주에 두바이로 떠납니다. 오래간만에 아들 얼굴을 보게 생겼네요.”

“나도 서울에 좀 다녀오려고.”

백민석도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휴가를 기대하는 얼굴이다.

* * *

독서 모임이 없는 날이었지만, 도서관을 찾았다.

주말이면 도서관에 가는 버릇이 생겨 버린 것 같았다.

마침 정가희가 수업을 끝내고 나왔다.

“오늘은 모임 없다고 하지 않았어?”

“맞아, 오늘은 쉬는 날이야.”

“그럼 놀러 온 거네?”

“습관이 됐나 봐.”

“마침 잘 됐다. 오늘 특별한 행사가 있는데.”

“행사?”

난 그녀와 함께 도서관 강당으로 향했다.

그곳에 수업받던 할머니들이 모여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할머니들이 웃으며 반겼다.

“오늘 뭔가 하나 보다?”

“할머니들이 직접 쓴 시를 발표하는 날이야.”

“시?”

난 그녀와 함께 자리를 잡았다.

할머니 중 한 명이 연단에 섰다.

그녀는 준비한 종이를 펴고 말했다.

“한글도 모르던 사람이 시를 쓴다는 게 이상하네요. 부끄럽지만 제가 쓴 시를 발표하겠습니다.”

할머니가 직접 쓴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제목 도서관 가는 길, 도서관에서 한글을 공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처음으로 글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어릴 때는 가난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고, 어른이 돼서는 젖먹이 키우며 살림하느라 공부를 못했습니다. 칠십이 넘어, 이제라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가슴이 뛰었습니다. 지금도 가슴이 떨립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할머니의 솔직한 글이 마음을 울렸다.

* * *

행사가 끝나고 정가희가 물었다.

“오늘은 밖에 나가서 밥 먹을까?”

그녀와 함께 도서관 옆 계곡으로 향했다.

한낮에는 아직 더위가 느껴졌다.

계곡에 들어서자 에어컨보다 시원한 기운에 탄성이 절로 났다.

“저기에 앉자.”

계곡의 절경을 볼 수 있는 곳에 평상이 놓여 있었다.

그녀와 함께 평상에 앉아 시원하게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이거 먹어.”

정가희는 도시락을 꺼냈다.

“꼬마 김밥이네.”

“내가 직접 만든 거야.”

“어디 한 번 맛 좀 볼까?”

당근과 단무지만 넣은 꼬마 김밥이다.

생각보다 맛이 좋아서 놀랐다.

“시 낭송, 정말 감동적이었어.”

난 김밥을 먹으며 말했다.

“솔직한 글이라서 더 그랬을 거야.”

“맞아, 솔직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어.”

우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황유신 선생님에게 곶감을 배우던 순간부터 지장사에서 지냈던 이야기까지 나왔다.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다, 정가희가 조용히 계곡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새로운 목표가 생겼어.”

새로운 목표 –완결-

정가희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나, 행복한 가정을 갖고 싶어.”

“행복한 가정? 결혼하고 싶다는 거지? 근데 상대는 있는 거야?”

“음…… 상대에게 물어보진 않았지만, 지금 물어보려고. 김덕명 씨, 나랑 결혼해 줄래?”

그녀는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 * *

그날 이후 고민에 빠졌다.

회귀한 후로는 오로지 꿈을 위해 달렸다.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퇴근 무렵 한기탁이 나에게 말했다.

“오늘 포장마차에서 한잔하자.”

대답이 없자 그가 내 등을 떠밀었다.

한기탁은 주문을 마치고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즘 우리 대표님이 뭔가 이상해졌어.”

“이상해 보여요? 뭐가 다른데요?”

“고민이 너무 많은 얼굴이야.”

그때 주문한 안주와 술이 나왔다. 그와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다.

한잔 마시고 그에게 물었다.

“선배는 실패할까 봐 걱정해 본 적 있어요?”

“나야 항상 실패를 걱정하면서 살았지. 지리산 농부들의 일원이 되기 전까지는.”

“지금은 걱정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전혀 걱정하지 않아.”

“왜요?”

“김덕명 때문에.”

한기탁은 날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성도윤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 기억나? 지리산 농부들의 구성원으로 일하는 게 행복하다고 했어.”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친구와 마음이 같아. 지리산 농부들의 구성원으로 일하는 게 행복해.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 매일 새로운 꿈을 꾸는 기분이야. 그 중심에 지리산 농부들의 대장인 김덕명이 있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들어 버리는 남자지.”

“너무 띄워 주는 거 아니에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야. 동료들 모두가 널 믿고 따르고 있으니까.”

난 소주잔을 털어 넣었다.

“네가 어떤 고민이 있는지 모르지만, 나도 돕고 싶어. 우리 대표님이 흔들리지 않게.”

한기탁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럼, 이야기 듣고 웃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세요.”

“약속할게. 이제 털어놓아 봐.”

난 그에게 정가희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처음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정가희가 김덕명에게 프러포즈했다고?”

“웃지 않기로 약속한 거 잊었어요?”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그는 물을 벌꺽벌꺽 마셨다.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 같았다.

“넌 뭐라고 했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어요.”

“설마, 그 일로 어색해진 건 아니지?”

“그렇진 않아요, 선배도 가희 성격 알잖아요.”

“정가희는 절대로 기죽을 여자가 아니지.”

“네 생각은 어때? 아니, 네 마음. 정가희가 여자로 보이긴 해?”

“저도 가희를 좋아해요.”

“그럼 걱정할 거 하나도 없네. 정가희의 프러포즈를 받아.”

“결혼이 그렇게 간단한가요?”

“일은 가볍게 처리하는 사람이, 결혼은 고민이 많네?”

“전혀 다른 문제니까요.”

한기탁은 눈웃음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내 생각엔 다르지 않아.”

“그게 무슨 뜻이에요?”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결혼이란 좋아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는 거니까. 그리고 이건 내 느낌인데, 정가희만큼 너와 어울리는 사람도 없는 거 같아.”

한기탁과 헤어지고 집으로 향했다. 택시가 마을 입구에서 멈췄다.

난 일부러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렸다. 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어느새 감나무밭이 가까워졌을 때다.

감나무를 보자 처음 곶감을 배웠을 때가 떠올랐다.

정가희와 함께 황유신 선생님의 집을 찾아갔었다.

그녀에게도 곶감을 함께 배울 것을 권했다.

그녀가 서울로 가지 않기를 바랐다. 정가희의 불행한 인생이 시작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녀는 서울로 가지 않았다. 나와 함께 곶감 기술을 배웠고, 지리산 농부들의 일원이 됐다.

어쩌면 그때부터 날 기다리고 있던 건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린다.’

한기탁이 내게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 * *

독서 모임은 변함없이 주말마다 진행되고 있었다.

한기탁은 나와 정가희의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정가희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색한 내 마음과 달리, 나를 예전처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독서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정가희가 나에게 물었다.

“집에 안 가?”

“오늘은 너한테 할 말이 있어.”

그녀는 긴장한 눈빛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무슨 말인데?”

“나가서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받았던 계곡으로 향했다.

우린 계곡 옆에 놓인 평상에 앉았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난 흐르는 물을 보며 말했다.

“네가 도서관을 만든다고 했을 때, 내가 했던 말 기억나?”

“무슨 말?”

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기억나.”

“너를 매일 보고 싶은데, 괜찮을까?”

“지금 나에게 프러포즈하는 거야?”

“프러포즈를 누가 먼저 했더라?”

그때 그녀가 다가와 입을 맞췄다.

* * *

그해 가을,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임시백 선생님의 녹차 밭이 결혼식 장소다.

햇살이 가득하고,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푸른 찻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날이었다.

녹차 밭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지리산 농부들의 모든 식구가 녹차 밭에 모였다.

하동 재배시설의 청년 농부부터, 목장을 지키는 사람들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반가운 손님이 있었다. 두바이에 있던 이장우도 결혼식에 참석했다.

얼굴이 완전히 검게 탄 모습이 두바이 사람처럼 보였다.

난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두바이 재배 시설은 어쩌고 온 거야?”

“재배 시설이 문젠가? 우리 대표님 결혼식이 먼저지.”

독일에서 날아온 방현식도 반가웠다.

“결혼 축하해, 형.”

“독일에서 너만 온 거야?”

“네, 제가 대표로 왔어요.”

지리산 농부들에게 땅을 빌려줬던 나병수와 하동 대학을 내어 준 최금자 사장도 자리를 빛냈다.

하동 군수와 마을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하객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주례사가 시작됐다. 주례는 곶감 장인 황유신 선생님이다.

황유신 선생님이 나와 정가희를 보며 말했다.

“신랑 김덕명과 신부 정가희는 저와 각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두 사람 다 저에게 곶감 기술을 배웠죠. 그때 김덕명이 저에게 부자 농부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농촌에 희망이 있다고 협박하듯 말했죠. 그때는 젊은 친구가 입담깨나 좋구먼, 하고 생각했었더랬죠.”

황유신의 말에 하객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억대 연봉의 청년 농부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는 그저 젊은이의 패기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 됐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청년을 제자로 둬서 자랑스럽습니다. 두 사람이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 걸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하객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주례가 끝나고, 남아영을 중심으로 한 양초 학교 아이들의 특별한 무대가 꾸며졌다.

가을 녹차 밭에 아름다운 노래가 울려 퍼졌다.

* * *

그로부터, 1년 후.

1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하동 재배 시설의 한 해 매출만도 1,000억이 넘었다.

두바이 재배 시설에는 해마다 청년 농부들을 파견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알래스카 샐러드 컨테이너 사업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지금은 뉴욕에 대규모 재배 시설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동 대학은 첨단 농업 전문 대학으로 변신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를 교수진으로 유치했고, 다양한 장학 혜택으로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아울러 지리산 농부들의 전문 기술진도 강의를 하거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곳에서 이동춘을 중심으로 로봇 착유기를 만드는 일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성도윤의 농사 펀딩도 전국으로 범위를 확대했다.

나와 정가희는 하동에 신혼집을 차렸다.

정가희는 양초 학교 일을 다른 선생님에게 넘겨 주고 하동으로 내려왔다. 지금은 소설을 쓰며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궁합이 잘 맞았다. 가끔 티격태격할 때도 있었지만,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하동에서의 바쁜 일상은 여전했다.

지금은 다른 지역에도 재배 시설을 지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때 한기탁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덕명아, 농촌진흥청에서 손님 왔어.”

농촌진흥청의 남기남 과장이다. 오늘 그와 약속이 잡혀 있었다.

남기남 과장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남극 프로젝트 때 알게 된 인물이었다.

“하동 말고 다른 지역에도 재배 시설을 짓는다고 말씀 들었습니다.”

“네, 계획 중에 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이제 첨단 농업으로는 대한민국 최고가 됐네요.”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그런데, 상의하고 싶다고 하신 일이 뭔가요?”

“다름이 아니라, 남극에 짓는 두 번째 기지 문제로 찾아왔습니다.”

“남극에 두 번째 기지를 짓는군요?”

“네, 이번에 두 번째 기지를 짓기로 했습니다. 김덕명 씨도 잘 아시다시피, 기존 기지는 연구하기에 적합한 위치에 있지 않아서요.”

대한 남극 기지는 킹 조지 섬에 있다.

남극 내륙이 아닌 외곽에 있는 섬이다.

그의 말대로 남극 대륙을 연구하기에는 위치가 좋지 않았다.

“남극 내륙에 연구 기지를 하나 더 만들 계획입니다.”

“그럼 기지 안에 재배 시설을 놓을 생각인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때처럼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할 계획이신지?”

“샐러드 컨테이너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재배 시설을 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어요?”

“실내에서 작물을 키울 수 있는 시설이면 좋겠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는 기지 외부에 있다.

한국에서 만든 시설을 배로 실어 보낸 것이다.

이미 기지를 다 만든 상태라 실내에 재배 시설을 만들 공간이 없었다.

“두 번째 기지는, 시작부터 재배 시설까지 함께 만들 계획이군요?”

“네, 맞습니다. 그 부분을 상의하러 찾아왔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문제없습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재배 기술도 이전보다 더 진보했으니까요.”

* * *

집으로 돌아와 가희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저녁 밥상에 과일이 가득했다. 딸기와 체리 그리고 망고까지 올라와 있었다.

“오늘은 과일 파티네?”

“과일이 너무 먹고 싶었어.”

난 웃으며 망고를 하나 먹었다. 단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오늘은 무슨 일 있었어?”

그녀가 망고를 먹으며 물었다.

“나, 조만간 남극에 다시 갈 수도 있을 거 같아.”

남극이란 말이 나오자, 그녀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

“남극 위험하잖아. 눈 폭풍에 사고도 당할 수 있고.”

정가희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안전 수칙만 잘 지키면 문제없어.”

“그래도 위험해.”

그녀는 밥을 먹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내가 남극에 안 갔으면 좋겠어?”

“위험한 곳에 안 갔으면 좋겠어, 우리 아기를 위해서라도.”

“아기?”

“오늘 병원에 다녀왔어. 3개월 째래.”

“정말이야?”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녀를 안고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도 부모가 되는 거네?”

“그러니까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마.”

“알겠어. 위험한 곳은 가지 않을게.”

“고마워.”

아내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회귀한 뒤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곶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곶감 농사부터 시작해, 양봉을 하고, 목장을 키우고, 차를 배우기도 하며 지리산 농부들을 가꾸어 왔다.

그 지리산 농부들이 남극에서부터 두바이, 알래스카까지 누비며 세계의 첨단 농업을 선도하는 최고의 농업 회사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러 지역에서 젊은 부자 농부들을 키워 내고 있다.

새로운 목표가 생기는 순간이다.

이제, 내 아이가 자랄 행복한 가정, 행복한 세상을 가꾸어야 할 차례다.

개인의 힘으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지역은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다.

난 더 풍요로운 농촌을 만들 것이다.

태어날 아이도 행복한 세상을 만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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