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두바이 재배 시설이 완성됐다.
준공식에 두바이 왕 이스마일이 직접 참석했다. 왕자인 모하마드가 에스코트했다.
두바이 왕은 약속대로 세계 각국의 외신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기자 중에 한국 신문의 배선아 기자도 참석했다.
재배 시설 앞에 기자들부터 두바이 시민들까지 사람들이 가득했다.
두바이 왕 이스마일은 형식적인 인사를 한 뒤에 나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는 수경 재배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내가 마이크를 잡자 모든 이들이 나에게 주목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대표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먼저 재배 시설 준공을 축하하러 와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재배 시설을 공개하기에 앞서 소개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난 대형 조형물을 가리켰다.
조형물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비 내리는 조형물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카메라 기자들은 바쁘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비의 축복이란 이름의 조형물입니다. 물이 순환하는 수경 재배의 특성을 살려 만들었습니다.”
난 기자들을 이끌고 1층 재배 시설로 들어갔다.
재배 시설 안에서 신선한 샐러드가 자라고 있었다.
기자들은 압도적인 규모의 재배 시설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날, 전 세계에 지리산 농부들이 만든 재배 시설이 보도됐다.
세계 각국의 언론은 두바이 왕보다 김덕명에게 주목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대표 김덕명을 농업의 미래를 앞당길 선구자라고 보도했다.
국제적 명성
두바이 재배 시설에서 본격적으로 샐러드 재배가 시작됐다.
일주일 동안 모든 장치가 순조롭게 돌아가는지 지켜봤다.
중원 건설의 차종문 대표도 내 옆을 지켰다.
일주일 동안 꼼꼼하게 지켜봤지만, 특별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난 중원 건설의 차종문 대표에게 말했다
“차종문 대표님은 이제 한국으로 가셔도 될 거 같네요.”
“김덕명 대표님도 같이 가셔야죠.”
“전 아직 할 일이 좀 남아서요.”
차종문 대표는 한국으로 돌아가며 주요한 기술진을 남겼다.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 * *
호텔 세미나실에 청년 농부들을 불러 모았다.
100명의 청년 농부들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여러분 덕에 무사히 재배 시설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로테이션 방식으로 두바이 재배 시설을 관리할 예정입니다. 이중 절반은 곧 한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그들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한국으로 돌아갈 청년 농부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조만간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모두 책임을 다해 주시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 한입으로 말했다.
청년 농부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세미나실을 울렸다.
공지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갈 때였다.
강수열이 나에게 다가왔다. 옥상 양봉장 작업으로 얼굴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저에게 할 말이 있나요?”
“로테이션을 바꿀 수 있을까 해서요. 원래대로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그럼 두바이에 남겠다는 건가요?”
“네. 아직 양봉장 일도 남았고 해서요.”
난 강수열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곳에 남고 싶은 의지가 느껴졌다.
“로테이션을 바꿀 사람도 정했나요?”
“네, 이미 말해 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미나실 구석에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가 있었다. 강수열이 말하는 이 같았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신 두바이 양봉장을 책임지는 조건입니다.”
강수열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미나실 앞에서 이장우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강수열이 뭐라고 한 거야?”
“로테이션을 바꿔 달라고 했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겠네?”
이장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강수열은 원래 한국으로 돌아가는 조였어.”
“뭐라고? 그럼 두바이에 남겠다는 거야?”
“맞아. 양봉장 일을 지키고 싶나 봐.”
“별난 놈이네. 다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안달인데.”
“그런데, 지금까지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혹시 무슨 일 있어?”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그는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그도 나에게 할 말이 있는 얼굴이다.
이장우는 커피부터 탔다. 평소와 달리 얼굴에 장난기가 없었다.
커피를 건네며 내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로테이션 말이야.”
“너도 로테이션 문제야?”
“나도 두바이에 남아야 하는 거지?”
“맞아, 이장우 팀장님은 두바이 책임자니까.”
이장우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그는 두바이에서 근 일 년이나 있었다. 두바이 재배 시설이 완공될 동안 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극 대원들도 일 년 단위로 근무하잖아. 난 좀 긴 것 같아.”
“네가 좀 이해를 해 줘야 할 거 같아. 이장우만큼 두바이 사정을 잘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건 사실이지.”
“조금만 더 고생해. 조만간 교대할 사람을 구해 줄게.”
“네 말대로 할게.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조건?”
“아버지는 두바이 책임자로 선발하지 말아 줘. 한국에 돌아갔는데 아버지가 없으면 서운할 거 같아.”
이장우는 제법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버지가 그리운 얼굴이다.
“네 말대로 할게.”
그제야 이장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거면 됐어. 두바이는 내가 책임진다!”
이장우는 평소대로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 * *
두바이를 떠나기 전, 할 일이 하나 더 남았다.
두바이 왕자 모하마드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두바이 왕궁에 들어서자 모하마드가 날 반겼다.
그의 콧수염을 보는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왕자님 덕에 일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제 덕이라니요. 모두 김덕명 씨가 한 일이죠.”
그와 함께 응접실로 들어갔다. 식탁에 샐러드가 가득 놓여 있었다.
“두바이 재배 시설에서 나온 샐러드입니다. 보는 것만으로 신선함이 느껴질 정도죠.”
모하마드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샐러드를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나를 보여 주려고 일부러 갖다 놓은 것 같았다.
“김덕명 씨가 만든 재배 시설이 두바이를 변화시킬 겁니다. 수출에만 의존하던 두바이 농업도 달라질 거고요.”
모하마드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는 두바이 왕 이스마일보다 농업을 걱정했다.
모하마드는 재배 시설이 완성될 동안 유통 회사를 만들었다.
두바이 재배 시설에서 생산되는 샐러드를 유통할 회사였다.
국영 회사로 모하마드가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도시 양봉도 잘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시범적으로 한 곳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차츰 범위를 넓혀 갈 예정이고요. 조만간 두바이에 양봉 전문가도 파견하겠습니다.”
“아주 좋습니다. 제가 남극에서 김덕명 씨에게 했던 말 기억하나요?”
모하마드가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먼지로 금을 만드는 남자라고 하셨었죠?”
“기억하는군요. 그때는 아련한 느낌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확실한 믿음으로 변했습니다. 이제 김덕명 씨가 우주에서 샐러드를 재배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습니다.”
모하마드는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 * *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정해졌다.
이장우는 떠나기 전날 나와 밤새도록 수다를 떨었다.
잠이 쏟아지는지 이장우의 눈꺼풀이 잠기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서 자.”
“아니야, 아니야. 나 안 졸려.”
이장우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너 계속 자고 있었어.”
“나 안 잤어.”
“그렇게 아쉬운 거야?”
“좀 아쉬운 건 사실이지. 술친구가 떠나니까.”
이장우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금방 쓰러져 잘 것 같았는데, 끝까지 버티고 있었다.
우린 남극 이야기부터 두바이 생활까지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며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아침, 난 한국으로 돌아갈 청년 농부들과 함께 두바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이장우가 공항까지 배웅을 나왔다.
“아버지에게 안부 전해 줘.”
이장우가 손을 흔들며 그리운 얼굴로 말했다.
* * *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었다.
두바이로 떠나던 날보다 많은 수다.
외신에 크게 보도가 된 뒤라 지리산 농부들의 위상은 더 높아져 있었다.
몸은 좀 피곤했지만, 마음은 여유로웠다. 난 취재진의 물음에 하나하나 친절하게 답했다.
한기탁이 미리 준비해 둔 버스를 타고 하동으로 내려갔다.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하동에 도착해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사무실로 향했다.
동료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손뼉을 치며 날 반겼다.
한기탁이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수고했어.”
“그런데, 우리 장우는 안 보이네요?”
이동춘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이장우도 함께 올 거라고 기대한 것 같았다.
“이장우 씨는 두바이에 좀 더 있기로 했습니다.”
“그런가요?”
이동춘은 무척이나 아쉬운 얼굴이다.
“장우가 아버님에게 안부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건강하게 잘 있나요?”
난 이동춘에게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두바이 재배 시설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이동춘이 사진을 보며 말했다.
“얼굴이 많이 탔네요.”
“두바이 햇빛이 워낙 강해서요.”
“그래도 건강해 보여서 좋네요.”
이동춘은 사진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참, 우리 재배 시설에 가 봐야지.”
한기탁이 날 보며 말했다.
“이제 공사가 끝났나요?”
“아직 마무리 공사가 조금 남았어. 조금만 더 하면 끝날 거야.”
난 한기탁과 함께 하동 재배 시설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한기탁이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공사가 끝났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두바이 재배 시설과 거의 동시에 끝날 예정이었으니까.”
나도 그 점이 의문스러웠다. 하동 재배 시설 공사가 끝나있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한기탁은 공사가 늦어진 이유를 말했다.
“실은 이동춘 기술자님의 의견 때문에 늦어졌어.”
“어떤 의견이요?”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만드는 연구 시설을 따로 넣자고 하셔서.”
“그랬군요.”
처음 재배 시설을 만들 때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만들 걸 생각하지 못했다.
암스테르담 박람회 이후에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네가 두바이 간 사이, 독일에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도 다시 보냈고.”
도이치 컴퍼니 대표 하이디 모어는 유럽 규격에 맞춰서 샐러드 재배기를 다시 만들어 주길 요청했다.
두바이로 떠나기 전 한기탁에게 전달한 사항이었다.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는 샐러드 컨테이너와 달리 가전제품에 들어간다.
유럽 시장의 깐깐한 규정을 통과해야만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하동 재배 시설에 도착했다. 한기탁의 말대로 공사가 아직 진행 중이다.
두바이와 달리 재배 시설과 연구동 그리고 사무동이 함께 지어지고 있었다.
난 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네요.”
우리 힘으로 만든 재배 시설이다.
두바이 재배 시설이 부럽지 않았다.
한기탁도 현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 외신 기자들이 왔었어.”
“외신 기자들이 이곳에 왔었다고요?”
“두바이 재배 시설이 완성됐다고 보도가 난 뒤에 외신 기자들이 왔었어. 기자들이 김덕명 대표님만 찾아서 혼났고.”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기자들이 뭐라고 하던가요?”
“지리산 농부들이 국제적으로 성공한 이유를 물었지?”
“선배는 뭐라고 답했어요?”
“뭐라고 하긴, 다 우리 김덕명 대표님 잘난 덕이라고 했지.”
한기탁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의 농담을 들으니 한국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참, 미국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어요?”
두바이에서 한기탁에게 전해리의 일을 전했다. 미국 시장에 진출을 위해 그녀가 필요하다는 말에 한기탁도 동의했다.
“해리 씨가 일을 잘하더라고. 미국 법인을 만드는 일도 생각보다 빨리 진행될 거 같아.”
“미국에도 우리 쪽 사람을 보내야 할 거 같아요.”
“외국으로 사람들 다 보내면 하동은 누가 지키냐고요?”
한기탁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청년 농부들을 더 증원하면 되죠.”
“이러다 하동이 지리산 농부들로 가득 차겠어.”
* * *
그날 저녁 부모님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두바이에서 세계 각지의 음식을 먹었지만, 밥은 역시 어머니가 해주는 집밥이 최고다.
매콤한 오징어볶음에 차돌 된장찌개를 맛있게 먹고 있을 때다.
전화벨이 울렸다.
“덕명아, 전화 왔다.”
어머니가 바닥에 놓인 전화를 보고 말했다.
밥을 먹다 전화기를 들었다.
국제 전화다. 난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대표님, 통화 가능하신가요?”
독일에 파견 간 박태호였다. 목소리의 톤이 높았다. 흥분한 것 같았다.
“네. 가능합니다.”
부모님도 밥을 먹다 말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유럽에서 팔 수 있게 됐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네. 필요한 모든 절차를 마쳤습니다. 이제 물건만 나오면 됩니다.”
“반가운 소식이네요!”
통화를 마쳤을 때, 아버지가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무슨 소식이냐?”
“유럽에서 지리산 농부들이 만든 샐러드 재배기를 팔 수 있게 됐다는 반가운 소식이요.”
비 오는 날 이사하면 부자가 된다
동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유럽에서 판매할 수 있게 됐습니다.”
동료들은 모두 기뻐했다. 두바이 재배 시설부터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까지, 그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루지 못할 성과였다.
유럽에서 판매하는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는 도이치 컴퍼니와의 합작 회사를 통해서 생산, 판매할 예정이다.
하동에서는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의 기술을 고도화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이동춘은 기분이 좋은지 입꼬리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오늘 같은 날은 회식하는 게 좋지 않을까? 두바이 재배 시설을 완공한 것도 기념해서.”
그때 한기탁이 나섰다.
“회식은 하동 재배 시설까지 마무리된 후에 하면 어떨까요?”
한기탁의 말에 모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춘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긴, 우리 재배 시설이 완공되고 나서 회식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그럼, 하동 재배 시설이 완공된 뒤에 전 직원 회식을 한번 크게 하겠습니다!”
한기탁이 선포하듯 외쳤다.
동료들에게 공지 사항을 전하고, 한기탁과 인원 증원에 대해서 상의했다.
하동 재배 시설로 입주하기 전 청년 농부들을 증원할 계획이었다.
한기탁은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때 아쉽게 탈락했던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면 어떨까?”
그는 청년 농부들을 선발할 때 떨어진 사람들을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저도 찬성해요.”
두바이에 청년 농부를 50명이나 파견한 상태였다. 유럽에도 10명의 청년 농부를 보냈다.
우리 넉넉하게 80명의 청년 농부를 더 선발하기로 했다.
* * *
그날 오후 오래간만에 목장으로 향했다.
설강인에게 했던 약속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젖소들이 들판에서 여유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설민주가 손을 흔들며 나에게 다가왔다.
“두바이 재배 시설이 완성됐다는 소식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다 민주 씨가 열심히 해준 덕분이죠.”
“제가 뭘 했다고요.”
설민주는 부끄러운 듯이 얼굴을 붉혔다.
“설강인 팀장님은 어디 계시나요?”
“아버지는 저기 계세요.”
그녀는 로봇 착유기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로봇 착유기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난 조용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로봇 착유기 안에서 한 중년 남자가 나왔다.
이동춘이다.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대표님 오셨네요.”
이동춘이 말하는 순간, 주변에 있던 청년 농부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설강인 팀장이 인사를 하며 말했다.
“로봇 착유기를 수리하는 중이었습니다.”
처음 로봇 착유기를 샀을 때는 수리할 때 애를 먹었다.
한국에는 수리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사람을 불러와야 했다.
지금은 이동춘이 그 일을 맡아서 했다. 엔지니어 팀도 그를 거들었다.
난 오늘 목장에서 로봇 착유기를 수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설강인에게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상의할 생각이었다.
난 이동춘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쉬었다가 하시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이것만 끝내고 가겠습니다.”
“그럼, 천천히 하시고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난 설강인과 함께 휴게실로 들어갔다.
설강인은 여유로워 보였다. 나에게 시원한 아이스티를 주며 말했다.
“두바이 재배 시설을 완성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목장에 찾아온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
그와 그간에 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는 목장에서 새로 출시한 요거트와 유제품들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때 이동춘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로봇 착유기 수리가 끝났습니다.”
이동춘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말했다.
설강인은 냉장고에서 아이스티를 꺼냈다.
“이리 와서 시원한 거 한잔 드세요.”
이동춘은 시원하게 아이스티를 마셨다.
난 이동춘에게 물었다.
“그런데 함께 작업하던 청년 농부들은 안 들어오나요?”
“지금 로봇 착유기 연구 중입니다.”
“연구요?”
“젊음이 가진 열정이죠. 우리 기술로 만든 로봇 착유기가 나올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동춘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설강인도 함께 웃었다. 둘 다 기분 좋은 얼굴이다.
난 설강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동춘 기술자님의 말대로 로봇 착유기 연구를 꾸준히 할 생각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저에게는 재배 시설만큼이나 설강인 팀장님과 한 약속도 중요합니다. 목장을 운영하는 많은 농가를 살리는 일이기도 하고요.”
로봇 착유기는 수입에만 의존하는 상황이다.
아직 국내 기술로 만든 로봇 착유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리산 농부들이 로봇 착유기를 만들 수 있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목장을 운영하는 농부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다.
* * *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기탁이 날 불렀다.
“손님들이 와 계셔.”
“손님들이요?”
한 명이 아닌 모양이다. 그의 말대로 손님이 여러 명 있었다.
열 명도 넘어 보였다. 그중 내가 잘 아는 사람도 있었다.
포도밭을 운영하는 임화수 농부였다. 그는 예전에 포도 가격이 내려가 힘들어했다. 난 목장 유제품을 개발하며 그의 포도를 구매해 주었다.
난 임화수에게 물었다.
“오랜만이시네요. 잘 지내셨지요? 갑자기 저를 찾으신 이유라도?”
“김덕명 대표님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김덕명 대표님 덕분에 올해 농사를 안심하고 지을 수 있게 됐습니다.”
임화수가 나에게 종이를 한 장 건네며 말했다.
그가 건넨 종이는 포도와 고구마의 구매자 리스트였다.
농사 계획을 보고, 아직 수확하지 않은 작물을 소비자들이 미리 구매한 것이다.
감사를 전하는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성도윤이 진행하고 있는 농사 펀딩 때문이었다.
임화수를 시작으로 함께 온 농부들이 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걱정 없이 농사를 짓게 됐다며, 정성을 다해 최고로 좋은 농산물을 보내겠노라 입을 모았다. 눈물을 글썽거리는 농부도 있었다.
대부분 소규모로 농사를 짓고 있어 판로 개척이 쉽지 않았던 분들이다.
성도윤이 주목한 농부들이기도 했다.
그들을 돌려보내고, 농사 펀딩 사이트에 접속했다.
두바이 일로 사이트를 볼 시간이 없었다. 그사이 농사 펀딩 사이트가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일 년 농산물을 완판한 농부들이 제법 많았다.
두바이 재배 시설이 완성되는 동안 성도윤도 놀라운 성과를 냈다.
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난 사무실로 성도윤을 불렀다. 잠시 후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난 그의 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리호리했던 몸에도 살이 붙어 있었다.
“대표님도 건강해 보이세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농사 펀딩이 제법 잘 되고 있나 봐요?”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도 농사 펀딩 사이트를 봤어요. 반응이 아주 좋더라고요. 마케팅을 어떻게 한 건가요?”
“지리산 농부들의 배당금 때문에 마케팅을 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배당금이라고 하면, 펀딩 배당금을 말하는 건가요?”
“네.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 배당금을 마케팅에 활용했습니다. 배당금이 지급된 후로 지리산 농부들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부분을 최대한 살려서 농사 펀딩을 홍보했습니다.”
“영리하네요. 그런 것도 이용할 줄 알고?”
“실은, 대표님의 유명세도 한몫했습니다.”
“제 유명세요?”
“네, 김덕명 대표님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농부니까요. 그 부분도 마케팅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성도윤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한 단계 성장한 게 느껴졌다.
* * *
재배 시설이 완성되기 전에 청년 농부를 증원할 계획이었다.
이전에 지원하고 아쉽게 떨어졌던 이들에게 다시 기회를 준다는 공고를 냈다.
두바이 재배시 설까지 성공적으로 끝낸 상태라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곧장 면접이 진행됐고, 청년 농부들을 증원할 수 있었다.
새로 뽑힌 청년 농부들과 오리엔테이션을 마쳤을 때다.
남아영에게 전화가 왔다.
“하동 재배 시설은 완성됐나요?”
“마무리까지 아직 며칠 남았어.”
“설마 계약을 잊은 건 아니시죠?”
담벼락 벽화 작업을 끝냈을 때, 그녀와 새로운 계약을 했다. 하동 재배 시설에도 벽화를 그리겠다는 약속이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그럼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하나요?”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 계획은 입주까지 끝난 뒤에 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생각이 달라졌다. 산뜻한 새집으로 이사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지금 하고 싶은데 가능할까?”
“그 말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남아영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뭘 그릴지는 생각한 거야?”
“네. 이미 구상한 아이디어가 있어요.”
“먼저 살짝 말해 줄 수 있어?”
“아니요. 비밀이에요.”
그녀는 담벼락 벽화에 지리산 농부들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그렸다. 곶감 농사부터 남극 기지에 만든 샐러드 컨테이너까지. 지리산 농부들의 역사가 담긴 벽화였다.
독특한 건 모든 벽화에 꿀벌을 그려 넣었다는 점이다.
하동 재배 시설을 바라보고 날갯짓하는 꿀벌의 그림이었다.
“내가 맞춰 봐도 될까?”
“네. 한번 맞춰 보세요.”
“재배 시설에 꽃을 그릴 거지?”
“상상은 자유죠?”
“꽃이 아니란 뜻인가?”
* * *
다음 날 바로 남아영과 그녀의 친구들이 하동으로 내려왔다.
두 번째라서 그런지 얼굴들이 낯설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하동 재배 시설로 향했다.
남아영은 재배 시설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보다 엄청나게 크네요?”
“국내에서는 가장 큰 재배 시설이니까.”
난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높이가 엄청 높아요!”
남아영의 친구 중 한 명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하동 재배 시설은 단층이지만 높이가 30m에 달한다.
난 남아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화로도 말했지만 무리하게 벽화를 그리는 건 바라지 않아. 사람의 키가 닿을 수 있는 곳까지만 그리면 좋을 거 같아.”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부터 벽화작업이 시작됐다.
재배 시설에 벽화를 그리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재배 시설의 마무리 작업과 거의 동시에 끝났다.
남아영은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나에게 물었다.
“그림 보셨어요?”
“아니, 아직 안 봤어.”
“왜 안 보셨어요?”
“이사하는 날 보고 싶어서.”
“기대하셔도 좋아요!”
남아영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 * *
드디어 지리산 농부들의 재배 시설이 완성됐다.
임시로 사용하던 건물을 떠나는 날이기도 했다.
한기탁이 하동 대학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도 정이 많이 들었는데.”
“선배는 여기에 계속 있고 싶은 거예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한기탁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모두 짐을 챙겨 지리산 농부들의 새로운 보금자리로 떠났다.
가는 도중에 한기탁이 물었다.
“덕명이 넌 재배 시설에 그려진 벽화 봤어?”
“아니요. 아직 안 봤어요.”
“난 봤는데, 말해 줄까?”
한기탁이 그 말을 하는 순간, 하늘에서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맑은 하늘에서 내리는 부슬비였다. 빛과 만나 무지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비 오는 날 이사하면 부자 된다던데~”
한기탁이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 순간 눈앞에 지리산 농부들의 재배 시설이 등장했다.
벽에 그려진 벽화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푸른 잎이 돋아난 샐러드용 채소 그림이 재배 시설을 울타리처럼 두르고 있었다.
버터헤드, 카이피라, 크리스탈벨, 그린글레이스, 스킬톤, 로메인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꽃이 아니라 재배 시설에 어울리는 샐러드용 채소였다.
한기탁이 재배 시설에 그려진 벽화를 보며 말했다.
“비가 내려서 그런가? 꼭 살아 있는 채소 같네!”
그의 말대로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두바이에 만든 조형물보다 더 아름다웠다.
지리산 농부들의 보금자리
하동 재배 시설로 이사를 마쳤다.
사무동과 연구동 그리고 재배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춰진 시설이다.
동료들은 만족해했다. 시설 이전으로 가장 좋아한 사람은 서우영 박사와 이영호 연구원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묵묵하게 수경 재배에 필요한 영양액을 연구·개발하고 있었다.
서우영 박사가 따로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종자 연구소까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 재배 시설을 만들 때부터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영양액 연구와 더불어 토종 종자 연구에도 힘써 주십시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라니요. 서우영 박사님과 했던 약속을 지켰을 뿐입니다. 묵묵히 애써 주셔서 지리산 농부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곧이어 지리산 농부들의 팀장들이 모두 내 사무실에 모였다.
한기탁이 사무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 대표님 사무실이 너무 소박한 거 아니야?”
“그러게요. 좀 더 크고 화려했으면 좋았을 텐데.”
이동춘이 한마디 거들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내 사무실을 포함해 팀별로도 일할 공간이 생겼다.
한기탁의 경영 지원 팀부터 쇼핑몰 운영과 유통 팀은 사무동에 입주했다.
민요한을 중심으로 하는 샐러드 재배 팀은 재배동에 자리 잡았다.
이동춘 기술자가 이끄는 기술 개발 팀과 서우영 박사가 이끄는 영양액 팀은 연구동을 나눠 썼다.
이동춘은 지금까지 참았던 말을 꺼냈다.
“이제 이사까지 했으니, 이제 회식을 하는 건가요?”
이동춘은 한기탁의 표정을 살폈다. 내가 두바이에서 돌아왔을 때 한기탁의 말에 가로막혀 회식을 못 했다.
한기탁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많이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기왕 기다리시는 거, 일주일만 더 참아 주시면 안 될까요?”
“일주일이나요?”
이동춘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사만 왔다고 끝이 아니니까요. 재배 시설이 정상 작동하는지도 지켜봐야 하고요. 게다가 우린 계약까지 한 상태라서.”
지리산 농부들은 재배 시설이 완성되기 전에 엘브이 컴퍼니와 계약을 맺었다.
엘브이 컴퍼니는 전국적인 체인망을 둔 패스트푸드업체다. 샐러드 가격 문제로 몸살을 앓았던 적이 있기에 우리와 계약을 미리 맺었다.
시장 가격과 상관없이 샐러드 가격을 유지하는 조건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샐러드를 재배해야 할 때다.
동료들도 한기탁의 말에 수긍했다.
전체 회식보다 샐러드 재배가 먼저라는 눈치다.
내가 나서서 한마디 거들었다.
“전체 회식은 날을 잡아서 해야 할 일이겠지만, 저희 팀장단은 따로 식사 한번 하시죠?”
이동춘은 동료들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아이고~ 굳이 안 그래도 됩니다. 회식 타령을 한 게 부끄럽네요. 우리 청년 농부들이 고생이 많으니, 회식을 핑계로 편안한 식사 자리가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 뒤가 좋을 거 같습니다. 최소 한 달은 지켜봐야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괜찮으시겠어요? 한 달씩이나?”
한기탁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당연하죠.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재배 시설이 최우선이죠. 한 달 동안 이상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겠습니다. 회식은 그 후에 하면 더 좋겠습니다.”
난 이동춘에게 눈빛으로 인사하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경영 지원 팀장님의 말대로 지리산 농부들은 엘브이 컴퍼니와 계약이 돼 있습니다. 곧장 샐러드 재배를 해야 하는 상황이죠. 힘들겠지만 다들 최선을 다해 주세요.”
“말씀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동춘이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회의를 마치고 엘브이 컴퍼니의 송경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송경찬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하동 재배 시설 공사가 끝났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난 바로 본론을 꺼냈다.
“2주일 후부터 엘브이 컴퍼니에 샐러드를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샐러드 가격이 심상치 않은 상황이기도 하고요.”
가뭄에 장마까지 겹쳐서 농산물 가격이 요동치는 상황이었다.
“엘브이 컴퍼니는 시장 가격과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샐러드를 공급받게 될 겁니다.”
그날 저녁, 이동춘을 동네 포장마차에서 뵙자고 했다.
청년 농부들을 가르치느라 밤낮으로 애쓰고 있으니, 그들의 노력과 열정을 토닥이고 싶었으리라. 더군다나 아들이 오랫동안 해외에 나가 있어 적적한 마음도 있겠거니 싶었다.
“아버님, 고생이 많으시죠? 적적하실 텐데 자주 못 모셔서 죄송합니다.”
“아이고, 대표님 바쁜 거 세상이 다 아는데 별말씀을……. 지리산 농부들이 이렇게 큰일을 하는데, 제가 도움이 된다면 더 열심히 해야지요. 제가 책임감 하나는 끝내줍니다, 허허!”
“장우 걱정도 많으시죠? 제가 아버님과 장우 덕에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습니다. 장우니까 믿고 두바이 상황 전체를 맡길 수 있는 겁니다. 또 아버님이니까 청년 농부들 기술 교육을 맡길 수 있는 거고요. 그 덕분에 제가 여러 가지 일을 진행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항상 감사드립니다.”
시원한 소주라도 한 잔 따라 드리며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소주를 털어 넣는 이동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들이 멀리 가 있으니, 보고 싶긴 합니다. 하지만 잘 지내는 것 같으니 걱정 안 하렵니다. 우리 같은 기술자가 대우받으며 맘껏 일하는 이런 곳이 세상에 어디 그리 많겠습니까? 다 대표님 덕이지요.”
내 마음도 촉촉해지는 이동춘과의 포장마차 시간이었다.
* * *
약속한 2주가 지났다.
하동 재배 시설에서는 안정적으로 샐러드가 재배되고 있었다.
엘브이 컴퍼니에 문제없이 샐러드를 공급했다.
재배 시설에서는 문제가 되는 요인이 발견되지 않았다.
사무실 이전 이후 모처럼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때였다.
양초 학교 정가희에게 전화가 왔다.
“하동 재배 시설로 이사했다며?”
“이사만 한 게 아니라 샐러드도 재배하고 있지.”
“새집으로 이사한 거 축하해. 실은 나도 축하받을 일이 있어.”
“설마, 도서관?”
“맞아. 이번 주말에 도서관을 개관할 거야. 지금은 하동에 내려와 있어. 도서관 책이 들어오는 날이라 내가 직접 왔어.”
“그럼 지금 도서관에 있는 거야?”
“아니. 지리산 농부들의 새집 앞이야.”
“사무실 앞이라고?”
난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갔다.
정가희가 재배 시설에 그려진 벽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벽화 아영이가 그린 거지?”
“맞아. 아영이가 재배 시설을 샐러드로 도배를 해 놨어.”
“이곳과 잘 어울려.”
정가희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오래간만에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그런데 도서관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이 책이 들어오는 날이라며?”
“여기부터 보고 싶었지~”
“영광이네.”
“시간 되면 나랑 같이 도서관에 갈래?”
난 스마트폰을 꺼내 일정을 확인했다. 급한 일은 없었다.
“바쁘면 안 가도 돼.”
“아니야, 시간 괜찮아. 가자!”
* * *
도서관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사이 또 아영이가 작업을 한 모양이다.
난 도서관 담장에 그려진 벽화를 보며 물었다.
“이 그림, 혹시 나야?”
“김덕명, 너 맞아.”
정가희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내가 타고 있는 게 꿀벌 맞지?”
꿀벌이란 단어가 나오자 그녀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꿀벌을 타고 하늘 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그림이다.
남아영의 상상력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도서관에 그려진 벽화는 지리산 농부들의 얼굴로 빼곡했다.
정가희를 포함해 한기탁, 백민석, 이동춘, 이장우, 민요한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양초 학교 출신의 성도윤과 강수열의 얼굴도 보였다. 남아영의 얼굴도 있었다.
남아영은 도서관에 지리산 농부들과 양초 학교 아이들의 얼굴을 그렸다.
지리산 농부들이 사무실 이전과 여러 일로 바쁜 동안, 양초 학교 사람들이 이곳 도서관을 정리하고 꾸미는 데 많이 도와줬다고 한다.
다들 한마음으로 서로를 돕고, 그들 자신을 벽화에 남기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때마침 책을 실은 차들이 도착해 있었다.
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책을 나르는 일을 도왔다.
“책, 생각보다 무거워.”
그녀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끄떡없어.”
오늘은 그녀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도서관은 지리산 농부들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책이 많았다. 기증받은 책도 있었고, 정가희가 직접 산 책도 있었다.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날 무렵이다.
책을 나르던 사람들이 도서관을 떠났다.
서재에 책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제법 그럴듯하다!”
그녀와 함께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폐교건물이었다. 지금은 근사한 도서관으로 변신해 있다.
정가희는 내게 시원한 주스를 건네며 말했다.
“도와줘서 고마워.”
“고맙긴. 지리산 농부들도 쓸 공간인데.”
“참고로 말하면 지리산 농부들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함께 이용할 공간이야. 그리고 아이들도.”
“아이들?”
시골 마을엔 이젠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청년 농부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잖아. 머지않은 미래에 아이들도 생길 거고.”
“하긴, 그렇겠네!”
양초 학교를 책임지고 있는 선생님다웠다.
“강수열에게 들었어. 정가희 선생님이 양초 학교 출신이란 사실을 숨기라고 했다고.”
“수열이가 그런 말을 했어?”
정가희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표정을 보니까 사실인가 보네.”
“양초 학교 출신인 거 밝히면 평가가 공정하지 않을까 봐 그랬지.”
“양초 학교 출신이라고 특혜를 줄 마음은 없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잖아.”
정가희는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어, 이제 얼굴 좀 풀어.”
“내가 너무 심각했나?”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도서관을 만들었으니, 이제 다른 목표도 세우겠네?”
그녀는 소설가가 된 후에 도서관을 세우는 목표를 세웠다. 다음 목표가 궁금했다.
“아직은 미정이야.”
“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
“그래. 천천히 생각해 볼게.”
“조만간 동료들과 한번 뭉칠 생각인데, 도서관 개관과 맞춰서 하면 어떨까?”
“여기서 지리산 농부들의 회식을 하겠다고?”
“도서관 개관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고.”
“혹시, 예전처럼 운동장에서 파티를 여는 건가?”
정가희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처음 곶감 농사를 했을 때도 학교 운동장에서 다 같이 밥을 먹었다.
그때가 생각난 얼굴이다.
“맞아, 예전에 곶감 농사 마치고 파티를 했던 것처럼.”
“좋아. 도서관 개관에 맞춰서 지리산 농부들을 초대할게.”
* * *
동료들에게 도서관에서 회식할 것을 전했다.
이동춘이 가장 기뻐했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네요. 운동장에 모여 고기도 구워 먹고 게임도 하면서요.”
“나도 좋을 거 같아. 청년 농부들에게 도서관을 알리는 계기도 될 거 같고.”
한기탁이 오래간만에 이동춘의 말에 맞장구쳤다.
이동춘은 기분이 좋은지 한기탁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그때 백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나저나 정가희 대단하네. 도서관까지 만들고. 정말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한 건가?”
“내가 좀 알아봤는데, 정가희 작가가 쓴 ‘기계’라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건 사실이야.”
한기탁이 백민석의 물음에 답했다.
“소설 제목이 뭐라고요?”
“기계야.”
“제목 참 이상하네요?”
“소설 속에 영혼을 바꾸는 기계가 등장해.”
“정가희다운 발상이네요.”
백민석의 말에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 * *
예정대로 도서관에서 축하 파티가 열렸다.
청년 농부들은 책을 가져와 기증을 했다.
마을 사람부터 지리산 농부들의 모든 인원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한기탁이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이거 완전 잔칫집 분위기네!”
“그러게요. 우리 식구들이 정말 많아졌어요.”
“두 사람 거기서 뭐 해요? 이리 와요.”
정가희가 큰 소리로 외쳤고, 백민석과 이동춘도 손짓했다.
난 자리에 앉아 동료들과 함께 어울렸다.
이동춘은 고기 전문이라며 삼겹살을 구웠다.
아버지는 아껴둔 매실주를 사람들에게 따라 주고 있었다.
해가 떨어질 무렵이다.
운동장에 설치된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연구소의 이영호가 준비한 스크린이다.
예전에 그를 위해 스크린을 준비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그가 우리를 위해 스크린과 영화를 준비했다.
그는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코미디 영화를 틀었다.
지리산 농부들과 마을 사람들은 깔깔거리며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까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이다.
한기탁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비가 오려나 보네. 빨리 정리해야겠다.”
* * *
다음 날에도 비가 이어졌다.
“하늘이 심상치 않아.”
그의 말대로 범상치 않은 하늘이다.
비가 그칠 줄 몰랐다.
뉴스에서는 태풍이 한반도를 관통할 거라는 예보가 나오고 있었다.
난 이동춘에게도 특별히 부탁했다.
“전기 시설에 특별히 신경 써 주세요.”
누전 등 혹시나 모를 사고에 대비해야 했다.
“만약 전기가 끊겨도 내부 발전기가 돌아갑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동춘은 안심시키듯이 말했다.
태풍은 일주일 내내 비를 뿌리고 물러갔다.
다행히 하동 재배 시설은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샐러드를 정상적으로 재배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태풍은 지리산 농부들에게 본의 아니게 호재로 작용했다.
태풍의 영향으로 샐러드 등의 잎채소 수확량이 급격하게 줄었기 때문이다.
지리산 농부들에 샐러드 구매를 문의하는 전화가 폭주하고 있었다.
희망을 주는 사람
샐러드 등의 잎채소는 수확 주기가 짧다. 그만큼 날씨에 따라 가격 변동도 심한 작물이다.
태풍의 영향으로, 밭에서 키우던 샐러드용 채소는 수확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재배하던 샐러드용 채소도 영향을 받았다. 비닐하우스까지 날려 버릴 정도로 바람이 강하게 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방현식의 곶감 비닐하우스가 큰비에 무너져 절망했던 때가 생각났다.
지리산 농부들의 하동 재배 시설은 태풍에도 끄떡없었다.
단단한 외벽이 태풍도 막아 낸 것이다.
태풍과 무관하게 재배 시설에서는 샐러드를 재배할 수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하동 수경 재배 시설은 국내 최대 규모이다.
샐러드용 채소를 하루 최대 30톤을 생산할 수 있다.
처음 가동을 시작할 땐 하루에 20톤을 생산했다.
그 20톤의 샐러드용 카이피라는 엘브이 컴퍼니와 계약한 물량이었다.
태풍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샐러드용 채소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만이 안정된 가격으로 샐러드용 채소를 공급했다.
주문이 폭주할 수밖에 없었다. 밀려드는 주문 전화로 사무실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엘브이 컴퍼니에 납품하는 20톤 말고도, 10톤의 샐러드용 채소를 더 재배해야 했다.
하동 재배 시설은 완전 가동에 들어갔다. 하루에 30톤의 샐러드용 채소를 생산하고 있다.
* * *
재배 시설 완전 가동에, 주문과 납품 등 지리산 농부들은 정신이 없었다. 한 달 내내 야근할 지경이다.
한기탁이 결재할 서류를 들고 내 사무실로 들었다.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표정이 밝았다.
“청년 농부를 증원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어. 안 그랬으면 하루에 30톤은 생각도 못 했을 거야.”
재배 시설을 완전 가동한 이후로는 더는 주문을 받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재배 인력을 증원하지 않았다면 생산에 차질이 생겼을 것이다.
“이번 달 매출이 100억을 넘어설 거 같아. 샐러드용 채소 시장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질 거예요.”
“샐러드 시장이 더 커진다고?”
한기탁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물었다.
한국의 샐러드 시장은 앞으로 점점 더 성장한다. 회귀했던 2021년 기준으로 샐러드 시장 규모는 이미 1조 원이 훌쩍 넘었다.
다른 농산물과 달리 지속해서 성장하는 작물이었다.
식생활의 변화가 가장 큰 이유였다. 웰빙에 다이어트 열풍까지 불어, 샐러드를 밥 대용으로 먹는 이들까지 생길 정도다.
“한국 시장만큼이나 다른 나라도 샐러드 판매가 더 늘어날 거예요. 재배 시설의 수요도 늘겠죠.”
“그럼 우린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거네. 샐러드용 채소와 재배 시설까지 전부 팔 수 있으니까.”
“지리산 농부들은 샐러드 시장의 최강자가 될 거예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아~! 그런데 한편으로 좀 미안해지기도 하네.”
“미안하다니요?”
“이번 태풍으로 피해를 본 농부들도 많으니까. 우리만 잘 되는 것 같아서.”
여유가 있어 보험이라도 든 농부들은 피해가 덜했다.
문제는 보험조차 들 수 없는 농부들이다.
“저도 그 부분은 고민하고 있었어요.”
“성금이라도 낼 생각이야?”
“성금이 아니라 같이 살 방법을 찾아보려고요.”
“같이 살 방법?”
* * *
난 ‘하동 제일 한정식’ 집을 찾았다.
최금자 사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도움으로 하동 대학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일부러 손님이 없는 시간을 택했다.
“사무실을 이전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많이 바쁘실 텐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하셨을까요?”
최금자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난 준비한 서류를 꺼냈다.
“이게 뭔가요?”
“하동 대학을 다시 살릴 계획서입니다.”
최금자는 서류를 꼼꼼하게 살폈다.
서류엔 하동 대학을 농업 전문 대학으로 만들 계획이 담겨 있었다.
난 그녀에게 하동 대학 건물을 빌리며 대학을 다시 살리겠다고 약속했다.
“김덕명 씨는 약속을 지킬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장님의 배려 덕에 지리산 농부들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이제 하동 대학도 다시 살리고, 지역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하동 군수 이병휘이다.
“행사가 있어서 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동 대학에 관한 일은 최금자 혼자 결정할 수 없었다.
하동군의 동의도 필요한 일이다.
난 이병휘에게도 하동 대학을 살릴 계획서를 건넸다.
이병휘는 서류를 보며 말했다.
“하동 대학을 농업 전문 대학으로 새롭게 부활시키는 아이디어군요.”
“군수님의 의견은 어떠신가요?”
“저는 무조건 찬성입니다. 김덕명 대표님이 나서 주신다니 고마울 따름이죠.”
대학을 살리기 위해 지리산 농부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물론 하동 군청도 일정 부분 지원해야만 했다.
“특히 취업이 보장되는 부분이 아주 마음에 드네요. 많은 학생이 관심을 가질 내용 같습니다.”
이병휘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농업 대학을 졸업했다고, 모두가 농사를 지을 순 없었다.
농사는 땅과 자본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 부분을 해결할 좋은 방법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이들에게 취업을 보장하는 일이다.
난 그들에게 지리산 농부들의 일원이 될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지리산 농부들은 하동 재배 시설뿐만 아니라 두바이와 유럽에서도 일손이 필요했다.
대학을 살리고 지리산 농부들도 인력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운 환경의 농부들을 위해서도 대학을 사용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난 그들에게 한 장의 서류를 더 건넸다.
최금자와 이병휘는 서류를 살폈다.
학생이 아닌 농부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주는 내용이다.
우선은 태풍으로 피해를 본 농부들로 대상을 정했다.
이병휘가 서류를 보고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농부들에게 무상으로 임대하는 건가요?”
“교육과 동시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무상으로 임대할 계획입니다.”
“김덕명 대표님의 계획은 훌륭합니다만, 재정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대학이 정상적으로 운영되면 하동 군청도 일정 부분 예산을 투입해야 했다.
하동 군수 이병휘는 예산을 걱정하는 얼굴이다.
“농부에게 샐러드 컨테이너를 임대하는 일은 모두 지리산 농부들이 맡을 예정입니다.”
“지리산 농부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요?”
“그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난 가볍게 말을 꺼냈다. 지리산 농부들의 자금 상황은 예전과 달랐다.
그 정도 돈은 가볍게 쓸 수 있었다. 그렇다고 선심 쓰듯 공짜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나눠 주는 건 아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한 농부들에게 샐러드 컨테이너를 교육하고 임대하는 일이다.
수익을 내기 전까지 무상으로 임대할 계획이었다.
“이렇게까지 농부들을 살리려는 이유가 뭔가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최금자 사장이 입을 열었다.
“저 혼자 농사를 짓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농사는 다른 산업과 다르게 한 사람만 잘 돼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다 같이 잘되지 않으면 기반이 흔들립니다. 모든 농부를 다 살릴 수는 없겠지만 희망을 주고 싶습니다.”
“희망이요?”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희망마저 사라져 버린다면 농업의 미래도 없으니까요.”
“김덕명 씨는 따뜻한 사람이네요.”
최금자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학을 다시 문을 열려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전에 농부들 교육을 먼저 하고 싶습니다.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 적극 찬성입니다. 김덕명 대표님의 말씀처럼 농부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은 가능하니까요.”
하동 군수 이병휘는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저도 찬성입니다. 그리고 작게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최금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단지 희망만 주고 싶은 건 아니었다. 농부들에게 첨단 농업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 * *
난 팀장들에게 하동 대학과 관련한 일을 전했다.
“하동 대학이 지리산 농부들의 요람이 되겠네요.”
이동춘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신세를 갚을 차례네. 그동안 하동 대학을 사무실과 연구실로 잘 썼으니까.”
한기탁이 말했다.
“하동 대학에서 농부들도 교육할 생각이에요.”
“농부?”
난 동료들에게 태풍으로 피해 본 농부들에게 샐러드 컨테이너 교육을 하겠다고 말했다. 교육과 동시에 샐러드 컨테이너의 임대도 이뤄진다고 덧붙였다.
한기탁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모두 같이 살 좋은 방법이네.”
“그러게요. 우리만 너무 잘 되는 것 같아서 미안했는데.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이동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른 동료들도 모두 찬성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들이 기꺼이 동의해 줘서 고마웠다.
“농부들 교육은 청년 농부들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청년 농부보다 제가 더 낫지 않을까요?”
이동춘이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동춘 기술자님이 당연히 더 낫죠. 하지만 지금은 교육보다 우리 일도 중요한 때라서요. 청년 농부 중에서 실력이 좋은 사람들을 선발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대표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지금은 재배 시설을 완전 가동하는 중이니까요. 여기 있는 인원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큰일이죠.”
민요한이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한 씨도 교육을 맡을 청년 농부들을 선발해 주세요.”
“네. 벌써 생각해 둔 사람이 있습니다.”
청년 농부 중에서는 두바이 재배 시설까지 경험한 이들이 있었다.
그만큼 실력이 좋은 이들이 많았다.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은 파트장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하동 대학의 빚도 갚고, 농부들도 살리는 일이네. 역시 우리 대표님이야.”
한기탁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 * *
하동 대학에 농부를 모집하는 일은 빠르게 처리됐다.
일정을 잡고 광고만 하면 되는 수준이었다.
하동 대학에는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든 시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홍보 작업에 들어갔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동시에 활용했다.
농부 중에서는 아직도 온라인 매체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배선아 기자가 있는 한국 신문에 광고를 요청했다.
광고를 요청한 날 배선아 기자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신문사에 광고를 내셨더라고요?”
“배 기자님 덕을 본 게 생각나서요.”
“오히려 반대죠. 제가 김덕명 대표님 덕을 더 많이 봤으니까요.”
“그런가요?”
“그런데 농부들에게 샐러드 컨테이너를 무상으로 임대한다는 게 사실인가요?”
“태풍으로 피해를 본 농부들에게 한정해서죠. 나중에 수익을 내면 갚는 구조이고요.”
“이건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이 아니네요?”
“돈보다는…… 미래를 위한 일이죠.”
“멋지네요.”
그녀는 전화를 끊기 전에 취재 요청을 했다.
지리산 농부들과 관련한 특집 기사다.
난 흔쾌히 허락했다.
“이번 취재의 핵심은 청년 농부들이 될 거 같아요.”
“어떤 기사가 나올지 기대되네요.”
* * *
오늘은 야근이 예정돼 있었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도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지리산 농부들과 한 식구가 된 전해리의 전화였다.
그녀는 지리산 농부들의 미국 법인을 만들고 현지에서 활동 중이었다.
난 수저를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통화 가능한가요?”
“네, 말씀하세요.”
“좋은 소식이 있어요.”
“좋은 소식이요?”
“미국에서도 지리산 농부들이 활약할 것 같아요.”
“그럼, 샌프란시스코에 우리 재배 시설이 만들어지는 건가요?”
“샌프란시스코는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 요청이 왔어요.”
“어느 지역인가요?”
“알래스카에요.”
알래스카의 복지사업
전해리는 알래스카에서 수경 재배 시설을 요청한 사실을 전했다.
알래스카는 1867년에 미국이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매입한 땅이다. 알래스카를 매입할 때 지급한 돈은 720만 달러였다.
그때만 해도 알래스카를 쓸모없는 땅이라고 여겼다. 1960년에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유전이 발견되면서, 알래스카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했다.
“알래스카 주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사업이에요. 일종의 복지 사업이죠.”
“복지사업이요?”
“네. 마을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둬서 무료로 샐러드용 채소를 먹을 수 있게 하는 사업이에요.”
“흥미로운 발상이네요.”
“그 사업을 지리산 농부들이 맡게 됐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