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동료들에게 하이디 모어의 말을 전했다.
“도이치 컴퍼니에서도 우리가 만든 샐러드 재배기를 좋게 평가했습니다. 기술력이 매우 우수하다는 말은 귀가 따갑게 들었고요.”
“독일 사람들에게 기술력이 좋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더 좋네요!”
이동춘이 어깨를 짝 펴며 말했다.
“평가가 좋을 거라고 예상했어요.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으니까요.”
민요한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요한 씨 말대로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은 세계 최고죠!”
한기탁이 민요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경영지원 팀장님, 배당금 지급 건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주는 배당금이다.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
“이미 다 처리했습니다. 약속한 날짜에 배당금이 지급될 겁니다.”
한기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동춘이 만세를 불렀다.
이동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두가 펀딩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배당금이 보너스가 된 것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한기탁이 말했다.
“하동군에서 연락이 왔어. 집 고치는 일이 거의 끝나가는 것 같아.”
청년 농부들 대부분은 하동 대학에 딸린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대학 기숙사는 어디까지나 임시 주거 시설이었다. 이제 제대로 된 집을 청년 농부들에게 줄 수 있게 됐다.
“하동군에서 한번 방문해 달라고 하더라.”
“방문이요?”
“집 문제도 그렇고, 우리 대표님에게 줄 것도 있다고.”
“저한테 줄 게 있다고요?”
* * *
그날 오후 한기탁과 함께 하동 군청으로 향했다.
난 한기탁에게 물었다.
“뭘 준다는 건지, 따로 말 없었어요?”
“아까부터 계속 묻는 걸 보니 궁금하긴 한가 보네.”
“선배는 알고 있는 거죠?”
“알고 있지. 공무원들이 깜짝 선물을 줄 이유는 없으니까.”
“이제 말해 주세요.”
“궁금해하니까 말하기 싫어지는데?”
한기탁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선물인가 보네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계속 말 안 할 거예요?”
“우리 대표님 놀려 먹는 재미가 쏠쏠하네. 하동군에서 김덕명 대표님에게 공로상을 주겠다고 했어.”
“공로상이요?”
“지역을 위해 큰일을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야. 우리 대표님이 받을 자격은 충분하지.”
한기탁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 * *
하동 군수 이병휘는 우리를 반기며 말했다.
“행사가 준비되는 동안 여기서 잠시 기다리시죠.”
하동 군청 강당에서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메인 행사에 시상식이 포함돼 있다.
“공로상이라니, 과분하네요.”
“과분하다니요. 김덕명 씨는 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고작 공로상밖에 줄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죠.”
이병휘는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정말 아쉽다는 표정이다.
상을 받는 일보다, 집을 고치는 일이 끝났다는 게 더 반가웠다.
하동군과 지리산 농부들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사업이었다.
청년 농부들의 주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일이었다.
지리산 농부들과 하동군이 비용을 반씩 부담했다.
집을 매입하는 일이며 공사를 추진하는 건 하동군이 맡았다.
“집을 수리하는 일도 거의 다 끝났다고 들었습니다.”
“네.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곧 있으면 입주가 가능할 겁니다.”
“반가운 소식이네요.”
“그냥 뒀으면 흉가처럼 남을 집들이었죠. 지리산 농부들 덕분에 버려진 집들이 모두 새집으로 변했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병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이병휘는 책상에 있던 파일을 가지고 왔다. 그는 파일 속에서 사진을 꺼냈다.
“수리한 집을 찍은 사진입니다. 한번 보시죠.”
난 한기탁과 함께 사진을 살폈다. 그의 말대로 깨끗한 새집으로 변해 있었다.
마을 하나가 새롭게 조성된 수준이다.
“제가 사는 집보다 더 좋아 보이네요.”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직접 감독했습니다. 절대 허투루 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이병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때 한기탁이 날 보며 물었다.
“왜 아무 말도 없어?”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이병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마음에 쏙 듭니다.”
“다행이네요.”
이병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보완했으면 하는 점이 있습니다.”
“보완이요?”
이병휘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한기탁도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벽화를 그리면 어떨까요?”
“벽화요?”
청년 농부들의 주거지 앞에 낮은 담벼락이 있었다.
담벼락을 보자, 정가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서관으로 만들 건물에 벽화를 그리겠다는 말이었다.
청년 농부들이 살 집에도 벽화를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참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이병휘는 군수실이 울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기탁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물었다.
“벽화를 그릴 사람이 있나?”
“제가 잘 아는 화가가 있어요. 그 사람에게 맡겨 보려고요.”
화가라는 말에 그가 미소를 지었다.
그도 남아영을 떠올린 것 같았다.
그때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군수님, 행사 준비 끝났습니다.”
우린 하동 군청 강당으로 향했다.
강당 안에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백민석, 이동춘, 민요한까지 지리산 농부들의 동료들도 자리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와 계셨다.
모두 한기탁이 꾸민 일 같았다.
난 부모님 옆자리에 앉았다. 어머니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이병휘는 연단에서 공로상 수상자를 호명했다.
“공로상 수상자는 김덕명 씨입니다.”
난 연단으로 나가 상을 받았다.
“수상 소감 말씀하시죠.”
이병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저 열심히 일한 것밖에 없는데 상까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백 하나 하겠습니다. 처음엔 지역을 살리겠다는 마음보다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곶감 농사를 지으며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새로운 가족도 생겼습니다. 그들과 함께 꿈을 이뤄 나갈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수와 갈채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 * *
서울에서 남아영과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녀에게는 부탁할 일이 있다고만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얼굴을 보고 말하겠다고 전했다.
커피숍에 그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멜빵 바지에 베레모를 쓰고 있는 모습이 예술가처럼 보였다.
“무슨 부탁이신데요?”
남아영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부탁할 일이 있다는 게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정가희 선생님에게 벽화를 그려 주겠다고 했지?”
“네. 도서관이 만들어지면 벽화를 그려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정가희 선생님이 엄청나게 자랑했거든, 아영이가 벽화를 그려 주기로 했다고.”
“혹시 아저씨도 벽화가 필요한 거예요?”
“맞아. 지리산 농부들이 살 집에 벽화를 그리면 좋을 거 같아서.”
난 그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말했다.
남아영은 설명을 다 듣고 말했다.
“청년 농부들이 들어갈 집에 벽화를 그려 달라는 말이네요. 한두 집도 아니고요. 저 혼자는 할 수 없는 일 같아요.”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아영이 친구들을 총동원하면 가능할 거 같아서.”
“친구를 데려가는 건 어렵지 않아요. 마침 방학이기도 하고. 그런데…….”
그녀가 잠시 말을 주저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정가희 선생님에게는 제가 선물로 벽화를 그려 준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일은 쉽지 않을 거 같아요.”
“난 선물로 벽화를 받을 생각 없었는데. 필요한 재료며 벽화를 그리는 비용까지 넉넉하게 챙겨 줄 생각이야.”
“진짜요?”
남아영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럼 내 부탁 들어주는 거야?”
“부탁이 아니고 정식 계약이죠.”
“아영이 말이 맞네. 이건 정식 계약이야.”
“제가 사람들을 모아 볼게요. 어떤 벽화를 그릴지 구상도 하면서요.”
“그럼 계약이 성사된 건가?”
남아영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일주일 뒤 남아영은 미대생들과 함께 하동에 내려왔다.
남아영을 포함해 열 명의 화가들이다.
그들이 오기 전에 미리 펜션을 예약해 두었다. 벽화를 그리는 동안 그들이 묵을 장소였다.
펜션에 도착하자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 남아영에게 물었다.
“벽화로 뭘 그릴지 생각은 해 봤어?”
“네! 친구들과 상의해서 결정했어요!”
남아영은 고개를 돌려 친구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아저씨에게 미리 보여 드릴게요.”
그들이 가방에서 꺼낸 건 밑그림이다. 벽화를 그릴 설계도와 같았다.
재미난 사실은 한 장이 아니란 거다. 수십 장이 넘는 그림이 등장했다.
남아영은 그림을 하나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림은 퍼즐처럼 연결돼 있었다.
난 그림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리산 농부들이 했던 모든 일이 그림 속에 다 있네.”
곶감으로 시작해 수경 재배에 이르기까지, 지리산 농부들의 이야기가 담긴 벽화였다.
마음에 들었다.
“집들이 모두 떨어져 있지만, 최대한 연결되는 느낌을 살려 보려고요.”
남아영이 웃으며 말했다.
벽화를 그리기 전에 열심히 기획한 게 느껴졌다.
“오늘은 쉬고 내일부터 작업을 시작하면 좋을 거 같아. 참고로 오늘은 특별히 바비큐 파티를 준비했어. 친구들이랑 저녁 맛있게 먹고.”
돌아가려는 순간, 펜션 앞에 차가 서는 걸 목격했다.
낯익은 얼굴이 차에서 내렸다.
양초 학교 출신의 지리산 농부들이다.
성도윤과 강수열도 있었다.
“대표님도 계셨네요?”
성도윤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곳에서 약속이라도 있는 모양이죠?”
“네. 친구가 왔다고 해서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양초 학교 아이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흐뭇했다.
* * *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벽화 작업이 시작됐다.
난 가끔 남아영을 찾아가 간식을 사 주곤 했다.
남아영과 친구들은 벽화 작업에 아주 열심이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역사가 담긴 벽화가 완성돼 가고 있었다.
곶감 농사부터 지장사에서 양봉을 배우던 일도 벽화 속에 등장했다.
남아영은 기사를 통해 자료를 수집했다고 했다. 자료를 바탕으로 그림을 구상하고 벽화로 만든 것이다.
폐허처럼 변했던 마을이 벽화와 함께 되살아나고 있을 때였다.
두바이에서 연락이 왔다.
중원 건설의 차종문 대표였다.
“김덕명 대표님, 잘 지내셨습니까? 차종문입니다.”
“고생 많으시죠? 일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염려 덕에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지리산 농부들의 손이 필요한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준비하겠습니다.”
마지막 작업은 중원 건설과 지리산 농부들이 함께하기로 했다.
두바이 재배 시설이 완성될 날도 멀지 않았다.
청년 농부 군단
벽화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담벼락을 따라 형형색색의 그림이 이어져 장관이 연출됐다.
감나무 아래서 감을 따는 모습부터 남극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모습까지, 지리산 농부들의 과거와 현재가 담겨 있었다.
하동에 지어질 대규모 재배 시설의 모습도 보였다.
벽화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뭘 그렇게 보세요?”
남아영이 날 바라보며 물었다. 벽화 작업 중이었는지, 코에 페인트가 묻어 있었다.
“코에 페인트 묻었네.”
“아, 정말요?”
수건으로 그녀의 코에 묻은 페인트를 닦아 주며 물었다.
“이제 벽화 작업은 거의 끝나가지?”
“네, 곧 끝날 거예요.”
“고생 많았어. 벽화가 아주 멋져서, 감동하며 보고 있었어.”
그녀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건 뭐야?”
난 벽화에 그려진 꿀벌을 가리키며 물었다.
“꿀벌이요.”
“꿀벌인 건 나도 알아. 좀 이상한 구석이 있어서.”
“뭐가 이상한데요?”
남아영은 눈을 크게 뜨고 벽화에 그려진 꿀벌을 바라보았다. 이상할 게 전혀 없다는 얼굴이다.
“그림마다 꿀벌이 보이는데, 좀 신기하다?”
그녀는 모든 벽화에 작은 꿀벌을 그려 놓았다.
심지어 남극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제작하는 장면에도 꿀벌이 그려져 있었다.
“꿀벌이 날아가는 방향이 포인트에요.”
“날아가는 방향?”
벽화를 다시 한번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모든 꿀벌이 한 방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꿀벌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지리산 농부들의 일터요.”
남아영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정말 그랬다.
꿀벌은 하동에 새로 짓고 있는 대규모 재배 시설로 날갯짓하고 있었다.
그녀는 벽화에 지리산 농부들의 역사만 그려 놓은 게 아니었다.
거기에 재미난 상상력까지 덧붙였다.
“꿀벌의 귀소 본능을 그림으로 표현해 봤어요.”
“그럼, 지리산 농부들의 일터는 꽃밭인 거네?”
“네, 맞아요.”
꿀벌에겐 귀소 본능이라는 독특한 성질이 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자기 집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양초 학교에서 양봉을 배웠던 터라 꿀벌의 습성을 잘 아는 것이다. 귀소 본능을 벽화에 형상화한 게 참신했다.
“마음에 들어!”
“진짜 마음에 드세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내가 원하던 벽화야. 작업이 다 끝나면 맛있는 거 사줄게. 친구들도 함께.”
남아영은 군인처럼 거수경례하며 말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한 노인에 나에게 말을 걸었다.
백발 머리에 하얀 턱수염을 기른 노인이다.
“혹시, 김덕명 씨 되시오?”
“네, 제가 김덕명입니다.”
노인은 내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아이고~ 이렇게 반가울 수가! 정말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당황할 일은 아니었다.
노인을 자세히 바라보니, 목에 커다란 명찰을 걸고 있었다.
‘이길남, 86세, 하동군 산내면 수양리.’
이름과 나이 주소가 적힌 명찰이다.
내가 명찰을 보고 있자, 그가 입을 열었다.
“명찰을 항상 차고 다닌다오, 나이를 먹으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웃는 얼굴로 말하고 있지만 처연함이 느껴졌다.
“내 나이 구십 가까이 되도록 이 마을에서 태어나 여태 여기 살고 있다오. 예전에는 제법 사람이 살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나처럼 곧 죽을 사람들만 몇몇 살고 있답니다. 젊은 사람들이 와서 동네를 이렇게 환하게 바꿔 놓으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소. 참 고맙구려!”
그는 벽화가 그려진 담벼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다 이사 나가고 빈 마을마냥 흉했는데, 김덕명 씨 덕에 이렇게 예쁜 마을이 됐네요. 젊은 총각이 대견스럽기도 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전 그저 청년 농부들에게 집을 구해 주려고 한 것뿐입니다.”
“대통령도 못 한 일을 김덕명 씨가 했습니다. 죽기 전에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노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가 이곳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벽화가 그려진 마을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말대로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 * *
사무실로 돌아와 한기탁을 불렀다.
“벽화 그리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
한기탁은 커피를 건네며 물었다.
“네, 아주 잘 진행되고 있어요. 마을이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 정도야? 나도 가 봐야겠네.”
그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집을 배정하는 일은 선배가 맡아 줬으면 좋겠어요.”
“안 그래도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지.”
“생각한 방법이 있어요?”
“추첨할 생각이야.”
“추첨이요?”
시골집은 방이 많았다. 도시처럼 일인 가구가 들어갈 집은 없었다.
한기탁은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한집에 사는 아이디어를 냈다.
한 집에 들어갈 팀을 구성하고 제비뽑기를 하는 것이다.
제비뽑기 아이디어는 청년 농부들이 제안했다고 말했다.
역시 한기탁다웠다. 복지와 관련한 일은 항상 의견부터 수렴한 뒤에 일을 처리했다.
청년 농부들에게 집을 배정하는 일은 무리 없이 처리될 것 같았다.
“참, 샐러드 컨테이너는 독일로 보냈죠?”
“어제 출발했어.”
한기탁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암스테르담 박람회에서 주문받은 샐러드 컨테이너들이다.
모두 힘을 합쳐 작업한 덕에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는 유럽 판매를 위한 절차를 밟고 있었다.
“전 조만간 두바이로 떠나야 할 거 같아요.”
“중원 건설에서 연락이 온 거야?”
“네, 작업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된 거 같아요. 이제 내부 재배 시설을 만드는 일만 남았어요. 지리산 농부들도 움직일 때가 된 거죠.”
“청년 농부는 몇 명이나 데려갈 생각이야?”
“전에 말한 대로 100명 정도 데려갈 생각이에요.”
“다 데려가면 난 어떻게 하라고?”
한기탁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두바이 재배 시설은 세계 최대 규모다.
최소 100명은 있어야 한다.
재배 팀과 엔지니어 팀 그리고 영양액을 만들 인원까지 따로 구성할 계획이었다.
“그래도 100명이나 남아 있잖아요.”
“하긴, 100명 가도 100명이나 남아 있네.”
“재배 시설이 완공되면 그중 절반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거예요.”
“남은 사람들은 현지에서 재배와 관리를 맡는 거지?”
“네, 1년 단위로 사람들을 교체할까 생각 중이에요.”
“남극 대원들이 1년 단위로 근무하는 것과 비슷하네.”
“제가 두바이에 있을 동안 선배는 하동을 책임져 주세요.”
“이곳은 걱정하지 마. 내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그나저나 두바이에 갈 사람들은 어떻게 뽑을 생각이야?”
“우선 자원자를 받을 생각이에요.”
“그럼 공지는 내가 띄울게.”
“부탁드려요.”
* * *
며칠 뒤 벽화가 완성됐다.
벽화가 아니라 멋진 예술 작품 같았다.
남아영과 친구들은 자신이 작업한 벽화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난 그들을 지리산 농부들의 매장으로 불렀다.
“여기 버블티 정말 맛있어!”
남아영이 친구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노해미와 김꽃님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난 남아영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남아영은 봉투에 든 돈을 확인하곤 말했다.
“이미 작업료 받았잖아요?”
“그건 특별히 주는 보너스야.”
보너스란 말에 남아영의 친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남아영만이 즐거워하지 않았다.
“아영이는 얼굴이 왜 그래? 보너스가 싫은 거야?”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계약하고 달라서요.”
그녀의 친구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새로운 계약이라면 이 돈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아요. 계약금으로요.”
“새로운 계약?”
“새로 짓고 있는 재배 시설에 벽화를 그리는 일이요.”
그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우리가 만들 재배 시설에 꽃들이 만발할 게 상상됐기 때문이다. 담벼락에 그려진 꿀벌이 찾을 꽃이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남아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서.”
“아직 구상도 안 했다고요!”
남아영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계약 받아들일게. 그런데 친구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저희도 좋습니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답했다.
남아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새로운 계약도 성사된 거네요?”
유쾌한 시간을 보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아영과 친구들이 서울로 떠나야 할 시간이다.
그때 노해미가 여러 개의 종이봉투를 들고 왔다.
“이거 가면서 먹어요.”
노해미와 김꽃님 할머니가 준비한 간식이다.
약과와 곶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매번 받기만 해서…….”
남아영이 노해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전에 매장을 방문했을 때도 음식을 받았다.
“부담 갖지 말아요, 이건 고마움의 표시니까. 우리 하동에 벽화를 멋지게 그려 줬잖아요.”
노해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 * *
남아영 일행을 터미널에 내려다 주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한기탁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영이는 잘 갔어?”
“네, 새로운 계약도 잘 하고 보냈어요.”
“새로운 계약?”
새로 짓는 재배 시설에도 벽화를 그리기로 했다는 말을 전했다.
한기탁은 웃으며 말했다.
“아영이가 무슨 그림을 그릴지 상상이 안 가네. 무슨 그림을 그린다고 말은 안 했어?”
“아직은 구상 중인 것 같아요.”
“우리 재배 시설도 예술 작품이 되겠어.”
“아마 두바이보다 더 멋진 작품이 나올 거예요.”
두바이란 말이 나오자, 한기탁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서류를 건넸다.
“이건 두바이에 갈 지원자들 명단이야.”
난 지원자들 명단을 살폈다.
“100명이 넘네요?”
“생각보다 많아서 나도 놀랐어.”
“인원을 정하는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한기탁을 보내고 명단을 꼼꼼하게 다시 살폈다.
명단에 흥미로운 이름이 있었다.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로 대상을 받은 강수열이다.
대상을 받은 팀원들은 유럽으로 갈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유럽에 가고 싶어서 콧수염까지 잘랐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유럽으로 갈 기회를 걷어찼다.
그가 두바이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 * *
점심시간, 난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고등어구이와 김치찜을 식판에 올리고 자리를 찾았다.
강수열을 찾아 그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어색한 인사를 하고는 밥만 먹었다.
빨리 밥을 먹고 자리를 뜨려는 것 같았다.
밥을 먹던 중 넌지시 그에게 물었다.
“수열 씨, 유럽에 가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강수열은 목이 메는지 말을 하지 못했다.
그에게 물잔을 건넸다.
그는 한입에 물을 다 마셨다.
그제야 좀 진정이 된 얼굴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유럽에 간다는 말을 듣고 혹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두바이가 저에게는 더 맞을 거 같습니다.”
“이유가 궁금하네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경험하고 싶어서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두바이의 척박한 환경입니다.”
“두바이의 척박한 환경이요?”
“두바이는 수경 재배가 아니면 작물을 재배하기 힘든 곳이니까요. 물도 담수화한 바닷물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런 환경에서 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강수열 씨는 대상을 받았으니 원하는 곳으로 갈 자격이 있습니다.”
“그럼 저도 두바이에 갈 수 있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자리에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 * *
두바이로 떠나기 전 하동 재배 시설을 점검했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두바이 시설과 동시에 하동 재배 시설도 완성된다.
하동 재배 시설은 두바이처럼 재배 시설만 있는 게 아니다.
재배 시설뿐만 아니라 연구동과 사무동도 함께 짓고 있었다.
작물 재배는 물론 수경 재배 기술을 고도화하는 일까지 이뤄질 시설이다.
지리산 농부들은 이곳을 기반으로 세계로 뻗어갈 것이다.
두바이 재배 시설을 완성하는 일이 그 시작이다.
난 두바이로 갈 100명의 청년 농부를 선발했다.
떠나기 전날 한기탁이 말했다.
“이번 출장은 느낌이 다르네.”
“뭐가 다른데요?”
“청년 농부 군단의 대이동이잖아.”
“듣기 좋네요, 청년 농부 군단의 대이동.”
“이번엔 정말 엄청난 일을 하는 기분이야. 어쩌면 역사책에 나올 사건이지 않을까?”
그의 말대로 우린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었다.
두바이에서 우리를 증명하는 일만이 남았다.
압도적인 조형물
청년 농부 군단을 이끌고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인원이 많아 두 대의 비행기로 나눠서 타야 했다.
한기탁이 비행기 표 때문에 애를 먹었을 지경이다.
인천 공항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수경 재배 시설을 짓는 일에 대중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한국 신문의 배선아 기자와 사전 협의를 마친 상태였다.
기자들의 질문을 정리해서 인터뷰하기로 했다.
난 약속한 인터뷰 장소에 섰다.
방송국부터 시작해 메이저 언론사들이 총출동했다.
한국 신문의 배선아 기자가 대표로 질문하기로 했다.
배선아 기자가 나에게 물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수경 재배 시설이라고 들었습니다. 총 공사 비용이 얼마인가요?”
“1억 3천만 달러입니다.”
액수를 말하자 기자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화로 대략 1천 5백억 원이다.
단일 수경 재배 시설로는 세계 최고 액수다.
“두바이로 떠나는 지리산 농부들은 모두 몇 명인가요?”
“저를 포함해 100명입니다.”
“인원이 그렇게 많은 이유가 뭔가요?”
“두바이 재배 시설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합니다. 인원도 그에 걸맞게 구성했습니다. 재배와 엔지니어 그리고 영양액 팀까지, 수경 재배에 필요한 전문가 그룹입니다.”
“두바이 재배 시설을 관리하는 일도 지리산 농부들이 한다던데, 사실인가요?”
“네, 재배와 시설 관리 또한 지리산 농부들이 맡아서 할 예정입니다.”
“지리산 농부들은 유럽 시장에도 진출한다고 알려졌는데,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난 암스테르담 박람회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판매했던 일을 간략하게 말했다.
유럽 시장에서의 유통은 도이치 컴퍼니와 합작한 회사를 통해서 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배선아 기자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유럽에서도 지리산 농부들의 인기가 대단하네요.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 주시죠.”
“저에게는 두바이 재배 시설만큼이나 하동에 짓고 있는 재배 시설도 중요합니다. 전 국민이 참여한 펀딩을 통해서 만드는 재배 시설이기에 더 애정이 가기도 합니다. 펀딩에 참여해 준 많은 분을 위해서라도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난 사람들이 하동에 짓고 있는 재배 시설에도 관심을 두길 바랐다.
인터뷰를 마치고 두바이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 * *
두바이 국제공항에도 기자들이 나와 있었다.
두바이 현지 언론사뿐 아니라, 국제적인 유명 언론사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들도 두바이에 짓고 있는 수경 재배 시설에 관심을 보였다.
기자들과 간단하게 인터뷰를 나눴다.
인터뷰를 끝내자 반가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바이에서 기술 자문 역할을 하고 있는 이장우다.
그의 얼굴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우리 대표님 얼굴을 보니까 이제야 좀 살겠네.”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이다.
박태호까지 떠나고 혼자서 외로웠던 모양이다.
“얼굴이 많이 탔네?”
“그렇게 많이 탔어? 매일 선크림을 발라도 소용이 없더라고.”
이장우는 검게 탄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그런데, 이게 다 우리 식구들이야?”
이장우는 내 뒤에 있는 수많은 청년 농부를 보며 물었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놀란 얼굴로 청년 농부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두바이 파견 때문에 청년 농부들을 직접 만나 볼 기회는 없었다.
“그만 좀 봐. 얼굴 닳겠다.”
이장우는 새로운 사람들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버스 세 대에 나눠 타고 두바이 중심가로 이동했다.
숙소는 두바이 중심가에 있는 호텔이다. 지리산 농부들이 호텔 하나를 전세 내다시피 했다.
모하마드의 배려로 좋은 호텔을 구할 수 있었다.
이장우가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말했다.
“참고로 우리 대표님은 스위트룸으로 잡았어.”
“난 스위트룸까지 필요 없는데.”
“필요 없다니? 대표님 방에 회의실 정도는 있어야지!”
이장우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장거리 이동으로 모두가 피곤한 상황이다. 호텔에서 저녁 식사를 한 뒤 충분히 쉬라고 전달한 뒤, 내일 아침 세미나실에 모이라고 전달했다.
“오늘 저녁은 잘 쉬고, 내일 오전 10시에 세미나실에서 만납시다.”
공지를 끝내자 이장우가 물었다.
“청년 군단은 오늘 저녁 쉬라고 해 놓고, 설마 대표님은 도착하자마자 일할 생각은 아니지?”
“당연하지. 무리하지 않을게. 내일 오전에 다 모여서 일정을 전달하고 현지 상황을 공유할 계획이야. 너도 한마디 해 줘야 하고.”
“내가? 무슨 말?”
“두바이 생활에 대해서.”
“그거라면 내가 전문이지.”
다음 날 아침, 청년 농부들이 모두 호텔 세미나실로 모였다.
그들에게 두바이에서의 일정을 알렸다.
중원 건설의 차종문 대표도 세미나실에 방문해 현장 상황을 공유해 주었다.
“두바이에서의 작업 기간은 총 2개월입니다. 재배 팀과 영양액 팀을 제가 직접 관리·감독할 겁니다. 엔지니어 팀은 이장우 팀장님과 함께 움직이면 됩니다.”
내가 손짓하자 이장우가 앞으로 나왔다.
“엔지니어 팀을 맡을 이장우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러분들과는 초면이네요.”
그때 청년 농부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말했다.
“팀장님 얼굴이 낯설지 않습니다!”
양초 학교 출신의 강수열이 말했다.
“이동춘 기술자님과 너무 닮았어요~”
다른 사람들도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내가 나설 차례였다.
“이동춘 기술자님은 이장우 씨의 아버지입니다.”
그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이장우도 함께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됐다.
난 그들에게 대규모 재배 시설을 작업할 때의 유의 사항이며 현지 일정에 관해 전달했다.
오리엔테이션의 끝은 이장우가 맡았다.
“두바이 생활과 관련한 중요한 팁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건 인터넷에도 없는 고오급 정보입니다.”
이장우는 두바이 맛집 지도를 들고나왔다.
그는 한식부터 중식까지 세계 각국의 음식을 소개했다.
청년 농부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수첩을 꺼내 열심히 적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 * *
기분 좋게 오리엔테이션을 끝내고 두바이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처럼 아자르가 담당했다.
롤스로이스를 타고 왕궁에 도착했다.
모하마드가 두 팔을 벌려 날 반겼다.
그는 하얀색 아랍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잘 다듬은 콧수염이 보기 좋았다.
그가 날 보며 말했다.
“다시 만나 반갑네요. 아버님도 덕명 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두바이 왕 이스마일도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난 모하마드와 함께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두바이 왕 이스마일 살라도 모하마드처럼 하얀색 아랍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같은 옷을 입은 두 부자를 보니 이동춘과 이장우가 생각났다.
모하마드 부자도 닮은 구석이 많았다.
이스마일이 턱수염을 휘날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오래간만이군요.”
난 두바이 왕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이건 제가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입니다.”
선물이란 말에 두바이 왕이 관심을 보였다.
고급스러운 포장지 안에 곶감과 벌꿀이 담겨 있었다.
“올해 만든 곶감입니다.”
“이미 곶감 맛을 보았습니다. 두바이에서 나는 대추야자 열매보다 맛이 더 좋더군요.”
이스마일은 잘 익은 곶감을 한입에 넣었다.
미간을 모으며 얼굴을 흔드는 모양새가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그러곤 밝은 얼굴로 물었다.
“공사는 언제쯤 끝나나요?”
“2개월 후면 본격적으로 샐러드를 재배할 수 있습니다.”
“시설이 완공되면 전 세계 기자들을 모두 부를 예정입니다.”
두바이 왕 이스마일은 재배 시설을 두바이의 상징물로 만들 욕심이 있었다.
그가 전 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재배 시설을 자랑할수록 지리산 농부들의 위상은 더 높아질 것이다.
“외신들도 놀랄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기대가 아주 큽니다.”
두바이 왕 이스마일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 * *
다음 날 난 청년 농부들과 함께 재배 시설 건설 현장을 찾았다.
모든 청년 농부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축구장 3개를 합쳐 놓은 크기의 대규모 재배 시설에 압도당한 것이다.
2층으로 된 건물이지만 높이가 60m에 달했다.
아파트로 치면 20층 높이다.
청년 농부들을 현장에 투입하기 전에 중원 건설의 차종문 대표와 다시 만났다.
중원 건설의 인력도 함께 작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김 대표님을 현장에서 보니 힘이 납니다.”
“지금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힘을 합쳐 마무리 작업을 할 일만 남았습니다.”
난 건물 외벽에 장치한 거대한 조형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경 재배의 상징성을 보여 주는 조형물이다. 조형물의 크기는 재배 시설의 높이와 같았다. 높이만 무려 60m에 달하는 거대한 조형물이다.
비가 내리지 않는 두바이에서 일 년 내내 비 내리는 장면을 연출하는 멋진 작품이기도 했다.
“비 내리는 장면을 볼 수 있을까요?”
“작동까지 하려면 보름 정도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조형물이 작동되면 장관이겠군요?”
“전 세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물건이 될 겁니다.”
차종문 대표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난 그와 작업에 필요한 사항을 조율했다.
그도 우리 작업자들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했다.
차종문 대표와 이야기를 끝내고 청년 농부들을 현장에 투입했다.
재배 시설엔 샐러드를 재배하는 공간과 모종을 하는 공간도 따로 있었다.
이장우가 엔지니어팀과 수경 재배 시설을 마무리할 동안 난 재배 팀과 영양액 팀을 데리고 모종 작업을 시작했다.
첫날 작업부터 순조롭게 진행됐다.
* * *
그날 저녁 이장우가 내 숙소를 찾았다.
양손에 물건들로 가득했다.
“뭘 그렇게 사 온 거야?”
“축하 파티해야지.”
“그건 일주일 후에 하기로 했잖아.”
“이건 친구를 위한 개인적인 파티야.”
이장우가 맥주캔을 꺼내며 말했다.
그가 가져온 맥주캔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맥주를 어디서 사 왔길래 이렇게 차가워?”
“숙소에 보관해 놓고 있었지. 맥주캔에 젖은 티슈를 붙이고 냉장고에 보관하면 이렇게 시원해져.”
“별걸 다 아네.”
시원한 맥주를 한잔 마셨다.
가슴까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장우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나 오늘 좀 감동했어.”
“감동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엔지니어 팀이 일을 너무 잘해서. 가르칠 필요가 없더라고.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위대한 이동춘 기술자님 덕분이지.”
“우리 아버지가 마법이라도 부린 거야?”
이장우는 웃으며 물었다.
“맞아. 마법을 부렸어. 모두 최고의 기술자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암스테르담에서의 성과를 듣던 이장우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플랜트 팩토리가 박람회에서 파리만 날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또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장우는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침대에 뻗어 잠이 들었다.
그의 잠자리를 정리해 주고 거실로 갈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플랜트 팩토리를 퇴사한 전해리였다.
그녀가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두바이에 계시죠?”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기사를 보다 김덕명 씨 사진이 나와서요.”
두바이 공항에서 외신기자들과 인터뷰했던 일이 생각났다.
“기사를 보다 연락 드렸어요.”
“안 그래도 해리 씨에게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두바이 재배 시설을 완성하면 그녀에게 연락할 계획이었다.
그녀가 먼저 연락을 한 게 반가웠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전해리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두바이 재배 시설이 완성되면 해리 씨를 보러 미국으로 갈 계획이었습니다.”
“저를 보러 미국까지 올 생각이었다고요?”
그녀는 놀란 말투로 물었다.
유럽 다음은 미국 시장이다.
전해리는 플랜트 팩토리에서 쌓은 다양한 경험이 있다.
그녀와 함께 미국 시장 진출을 놓고 상의하고 싶었다.
그때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혹시, 제가 두바이로 가도 될까요?”
“해리 씨가 두바이로 오겠다고요?”
아이스 민트 티 파는 소년
“두바이에서 직접 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뭔가요?”
“세계 최대 규모의 재배 시설이요.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플랜트 팩토리도 성공하지 못한 수직 재배 시설이니까요.”
전해리는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이유라면 말릴 이유가 없겠네요. 비행기 표와 숙박은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아니요, 신세를 질 수는 없죠.”
아직은 일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기 전이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그럼 편하실 대로 하시죠.”
“조만간 도착 예정 날짜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전해리가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그녀와의 만남이 기대됐다.
* * *
두바이에 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난 재배 팀과 영양액 팀을 이끌고 모종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이장우는 엔지니어 팀과 함께 재배 시설을 층층이 올리고 있었다.
재배 시설 내부엔 아직 에어컨이 없었다. 우리는 더위와 싸우며 작업을 해야 했다.
두바이의 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탈진을 방지하기 위해 일하는 중간중간에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이장우와 함께 나무 그늘 밑에서 쉴 때였다.
큰 눈의 아랍 소년이 내게 다가왔다.
“아이스 민트 티 한 잔 드릴까요?”
소년은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허름한 옷차림과 달리 영어 발음이 명확했다.
“아이스 민트 티, 한 잔에 얼마니?”
“5디르함이요.”
5디르함이면 한국 돈으로 1,500원 정도 된다.
“그럼, 아이스 민트 티 두 잔 줄래?”
“네.”
소년은 싱글벙글 웃으며 어딘가로 달려갔다. 민트 티를 만드는 곳은 따로 있는 것 같았다.
이장우는 달려가는 소년을 보며 말했다.
“저 아이 처음에 구걸하는 소년인 줄 알았어. 그런데 진짜 민트 티를 팔고 있더라고.”
두바이에서는 구걸이 불법이었다. 성별과 나이와 상관없이 구걸하는 자는 처벌을 받았다.
“너도 민트 티 먹어 본 거야?”
“먹어 봤지, 두바이에서 민트 티는 기본이니까. 맛이 제법 좋더라고.”
이장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년이 나타났다.
소년은 투명한 컵에 담긴 민트 티를 건넸다.
“여기 아이스 민트 티 두 잔이요.”
손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아이스 민트 티다. 민트 특유의 상쾌한 향이 코끝에 스쳤다.
이장우는 민트 티를 받자마자 벌컥벌컥 들이켰다.
난 소년에게 돈을 주며 물었다.
“민트 티에 들어가는 민트는 어디서 난 거니?”
“민트는 엄마가 키운 거예요. 집에 엄청 많아요.”
민트는 번식력과 생존력도 잡초만큼이나 강한 식물이다.
다른 식물에 비해 어렵지 않게 재배할 수 있었다.
“민트 티에 들어 있는 꿀도 엄마가 직접 딴 거예요.”
소년은 자랑하듯 말했다.
민트 티를 한 모금 마셨다. 난 꿀과 설탕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진짜 꿀을 넣었구나?”
지갑을 열어 소년에게 돈을 더 줬다.
소년은 허리를 굽혀 연거푸 인사했다.
이장우는 나에게 물었다.
“꿀 때문에 돈을 더 준 거야?”
단지 꿀 때문이 아니었다. 소년의 딱한 사정이 눈에 그려졌기 때문이다.
소년은 엄마와 함께 장사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민트를 재배하고 꿀까지 채취하고 있었다.
엄마는 아들에게 이런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랍에서는 여자의 활동이 제한됐다. 차도르로 얼굴을 가리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도 어려운 것이다.
어린 아들이 손님을 상대해야 했다.
* * *
재배 시설의 조형물이 완성될 무렵이다.
전해리가 두바이에 도착했다.
난 공항으로 그녀를 마중 나갔다.
전해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제가 마중을 나갔는데, 두바이에서는 덕명 씨가 마중을 나왔네요.”
그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말투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플랜트 팩토리를 그만둔 후에 여유를 찾은 것 같았다.
난 차 문을 열며 말했다.
“재배 시설로 곧장 모셔도 될까요? 마침 조형물이 완성되는 날이기도 하고요.”
“조형물이요?”
“두바이의 상징물이 될 조형물이죠.”
“몹시 궁금한데요?”
전해리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말했다.
차를 타고 가는 중에 그녀가 말했다.
“두바이는 참 덥군요. 상상한 것보다!”
“조형물을 보면 더위도 날아갈 겁니다.”
전해리와 함께 재배 시설에 도착했다.
그녀는 거대한 조형물을 올려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뭔가요?”
“우리 수경 재배 시설을 상징하는 조형물입니다.”
때마침 차종문 대표가 나에게 다가왔다.
“시간 맞춰서 오셨군요. 이제 막 테스트하려고 했습니다.”
재배 시설에서 일하던 모든 이들이 밖으로 나왔다.
조형물이 작동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전해리가 나에게 물었다.
“조형물의 높이가 얼마나 되나요?”
“60m입니다.”
“어떻게 작동하는 건가요?”
그녀가 질문을 던지는 순간 거대 조형물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높이 60m에 달하는 조형물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떨어지자 뒤로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투명한 케이스 때문에 진짜 물이 떨어진 줄 알았던 거다.
전해리는 압도적인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수직으로 낙하하는 물방울이 아름답게 보였다.
마침내 비가 내리는 조형물이 완성됐다.
전해리는 조형물을 보며 말했다.
“정말 비가 내리는 모습 같네요!”
“어때요? 더위가 좀 날아갔나요?”
“네. 아주 시원하네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 등 뒤에서 이장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어. 그런데 옆에 있는 분은 해리 씨?”
이장우도 남극에서 돌아오는 길에 전해리를 만난 적이 있다.
전해리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두바이에서 또 뵙네요. 반갑습니다!”
“그러게요. 여기서 다시 뵈니 더 반갑네요.”
재배 시설 안내는 이장우가 맡았다.
그는 전해리에게 재배 시설을 설명해 주었다.
전해리는 이장우의 설명을 듣다 물었다.
“이렇게 층층이 재배 시설을 쌓을 수 있는 게 분무 시스템 덕분이군요?”
“네, 우리 재배 시설은 작물의 뿌리에 물과 영양액을 분무하죠. 그래서 재배 시설을 층층이 쌓는다고 해도 물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겁니다.”
“대단하네요! 플랜트 팩토리의 기술진도 해내지 못한 일을 지리산 농부들이 해냈군요!”
이장우는 그녀의 칭찬에 미소를 보였다.
“장우 씨가 분무 시스템을 개발한 건가요?”
“아니요, 분무 시스템을 개발한 사람은 김덕명 대표님입니다.”
전해리는 놀란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 * *
그날 저녁 셋이서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두바이 맛집의 달인 이장우가 우릴 식당으로 안내했다.
레스토랑 안에서 이장우가 말했다.
“이 집은 프랑스 요리가 일품이죠.”
메뉴를 주문하는 것도 이장우가 맡았다.
전해리는 나온 음식을 보고 기겁했다.
“이게 뭔가요?”
“에스카르고입니다. 달팽이 요리죠.”
이장우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나도 처음 먹어 보는 요리였다. 버터로 볶아 낸 달팽이에 파슬리가 올려져 있었다.
“거부감 느낄 필요 없어요. 골뱅이를 먹는다고 생각하세요.”
골뱅이란 말에 전해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전해리는 음식을 먹다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재배 시설은 정말 대단했어요.”
우린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하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후식으로 푸딩이 나올 때 아껴 둔 말을 꺼냈다.
“지리산 농부들은 조만간 미국 시장도 진출할 계획입니다.”
미국 시장이란 말에 전해리가 눈을 반짝였다.
“미국에도 대규모 재배 시설을 만들 생각인가요?”
“우선은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로 시장을 개척해 볼 생각입니다.”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요?”
난 핸드폰 영상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하동에서 개발한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 관련 영상이었다.
그녀는 화면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대규모 재배 시설만 만드는 게 아니었네요? 가정용 수경 재배 시설이라니 놀라워요!”
“미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 현지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물론 수경 재배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겠죠.”
“혹시 저를 두고 하는 말인가요?”
전해리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 해리 씨와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좋아요. 저도 지리산 농부들과 함께 일하고 싶어요.”
전해리는 망설임이 없이 말했다.
그녀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했던 것 같았다.
“해리 씨와 함께 일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그건 제가 해야 할 말 같은데요!”
* * *
전해리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한 달이 지났다.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 지리산 농부들의 법인을 세우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제 미국에도 지리산 농부들의 법인이 생긴다.
두바이 재배 시설은 막바지 작업에 들어갔다.
모종이 끝난 샐러드를 재배 시설로 옮기는 일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난 가끔 아랍 소년이 파는 민트 티를 마셨다.
민트 티를 마실 때마다 소년에 관해서 물었다.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소년의 이름은 바바 아스카르였다.
한국 나이로 열두 살밖에 안 된 소년이다.
바바는 두바이 시민이 아니었다. 예멘에서 넘어온 난민이었다.
바바의 아버지는 내전 중에 사망했다.
두바이 시민은 귀족이 아니라도 무료로 나눠 주는 집과 교육 등의 넉넉한 복지를 누릴 수 있었지만, 난민들은 어떤 복지도 누릴 수 없었다.
엄마와 아들이 힘들게 민트 티를 파는 이유였다.
재배 시설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자, 바바의 민트 티도 잘 팔리지 않았다.
재배 시설 안에 편의 시설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냉방 시설이 갖춰진 곳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는 걸 선호했다.
난 바바의 민트 티를 한 잔이라도 팔아 주고 싶었다.
바바를 찾던 중 재미난 광경을 목격했다.
엔지니어 팀의 강수열이 바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강수열이 바바에게 물건을 건네 주었다. 소년이 들 수 없는 큰 물건이다.
바바는 민트 티를 배달하는 카트에 상자를 실었다.
호기심에 물으려고 했지만, 휴식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 * *
그날 저녁, 강수열의 방을 찾았다. 그가 바바에게 어떤 물건을 줬는지 알고 싶었다.
난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수열 씨, 안에 있어요?”
“아, 네. 누구세요?”
강수열이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방안에서 뭔가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
“대표님이 여긴 무슨 일로?”
그는 당황한 눈빛으로 물었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해도 될까요?”
“방 안이 좀 지저분해서요.”
그의 안절부절못하는 태도에 호기심이 생겼다.
“지저분해도 괜찮아요. 우선 안으로 들어가죠.”
강수열은 난감한 얼굴로 방을 공개했다.
그의 말대로 방이 난장판이었다.
태양열 집열판이며 공구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작업만 끝나면 다 치우려고 했습니다.”
강수열은 변명하듯 말했다.
그가 뭘 만들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하동에서 내가 만들었던 물건과 흡사했다.
“벌통을 만들고 있었나요?”
하동 양봉장에서 쓰는 첨단 양봉 장치와 모양이 거의 똑같았다.
강수열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네. 벌통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걸 왜 만들고 있었어요?”
“친구에게 선물로 주려고요.”
“친구요?”
그가 바바에게 상자를 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가 만들고 있는 벌통과 크기가 비슷했다.
“혹시, 바바 말인가요?”
“대표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난 우연히 장면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강수열은 고백하듯 답했다.
“이제 민트 티도 잘 안 팔려서요. 꿀이라도 넉넉하게 팔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강수열은 양초 학교 출신이다. 바바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바바를 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던 것 같다.
“바바를 돕고 싶은 건가요?”
“네.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그럼 바바에게 일을 주면 어떨까요?”
난 그가 만들고 있던 벌통을 바라보며 물었다.
“바바에게 일을 준다고요?”
강수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바바만 돕는 게 아니었다.
잘하면 지리산 농부들에게도 도움이 될 일이다.
도시 양봉의 조건
바바의 일은 두바이 왕자인 모하마드와 함께 풀어야 할 숙제였다.
난 곧장 모하마드에게 연락했다.
그는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재배 시설 작업도 끝나 가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네. 마무리 작업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곧 있으면 샐러드를 재배할 수 있습니다.”
“하루빨리 보고 싶네요.”
통화의 마지막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상의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상의요? 재배 시설과 관련한 일인가요?”
“재배 시설과는 관련 없는 일이지만 중요한 일입니다.”
“궁금하군요? 만날 장소는 제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 * *
모하마드와 만난 곳은 두바이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다.
두바이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유명한 곳이다.
122층에 있는 레스토랑이 모하마드와 만나기로 한 장소였다.
난 두바이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모하마드는 슈트 차림으로 등장했다. 그는 아랍 전통 의상보다 정장이 더 잘 어울렸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모하마드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민트 티를 주문했다.
“김덕명 씨가 따로 만나자고 하니 몹시 궁금했습니다. 중요한 일이라는 게 뭘까요?”
그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두바이의 가난을 없애는 일입니다.”
“가난이요? 두바이 사람들은 모두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모하마드는 여유로운 얼굴로 답했다.
“두바이에서 알게 된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바바라는 이름의 소년이죠.”
난 모하마드에게 바바 아스카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아이가 예멘 난민이란 말을 하자 모하마드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두바이 국민은 다양한 복지 혜택을 받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말씀처럼 모두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죠. 하지만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도 많아 보입니다.”
“저도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꽤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두바이의 고민거리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좋은 일거리를 주면 어떨까요?”
“일거리요?”
“도시 양봉입니다.”
난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 공원들이 잘 조성돼 있었다.
공원마다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모두 두바이 왕족 소유의 공원이다.
“공원에서 꿀벌을 키우겠다는 말씀인가요?”
그의 표정만 봐도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공원에 양봉 시설을 놓는 걸 못마땅해하는 얼굴이다.
“양봉 시설은 건물 옥상으로 올리면 어떨까요? 도시 미관을 생각해서요.”
“아…… 건물 옥상에 양봉 시설이요?”
모하마드는 그제야 표정이 밝아졌다. 양봉 시설을 건물 옥상에 설치하면 도시 미관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게다가 물과 전기를 쓰는 일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공원에 있는 꽃과 나무는 꿀벌에게 밀원이 돼 줄 겁니다. 도시 양봉은 생활이 힘든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겁니다.”
“흥미로운 아이디어군요.”
모하마드는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수염을 쓰다듬는 모습이 두바이 왕 이스마일과 닮아 보였다.
“좋은 아이디어긴 한데, 양봉 시설을 만드는 게 고민이군요. 양봉 전문가도 문제고요.”
“그 문제라면 지리산 농부들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한번 맡겨 주시겠습니까?”
난 준비한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에 지리산 농부들이 만든 첨단 양봉 기기들이 있었다.
“두바이를 수경 재배뿐만 아니라 도시 양봉의 메카로도 만들 수 있습니다.”
“김덕명 씨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능이 있으시네요.”
모하마드는 첨단 양봉 기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 * *
도시 양봉은 두바이 왕 이스마일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됐다.
도시 양봉은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바이 왕자인 모하마드의 결정만으로도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선 민트 티를 팔고 있는 바바 아스카르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두바이 왕족이 소유한 빌딩 옥상에 양봉장을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시범적으로 만드는 양봉장은 지리산 농부들이 맡아서 진행하기로 했다.
난 그 일을 강수열에게 맡겼다.
“수열 씨가 양봉장을 만드는 일을 도와주세요. 물론 바바를 돕는 일은 주말을 이용해야 할 겁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두바이 재배 시설을 완성하는 일이니까요.”
“대표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수열 씨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강수열은 내 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바바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가 뭔가요?”
강수열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머뭇거렸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그때 강수열은 결심한 듯 말했다.
“실은 전 양초 학교 장학생입니다.”
강수열이 처음으로 양초 학교 출신인 걸 밝혔다.
“지리산 농부들이 운영하는 양초 학교 말하는 거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저도 바바처럼 엄마와 단둘이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때 양초 학교 장학금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바바를 돕고 싶었던 거군요.”
“제가 양초 학교에서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강수열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지리산 농부들에 지원할 때는 양초 학교 출신인 걸 숨겼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다른 지원자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정가희 선생님도 그게 좋을 거라고 말씀하셨고요.”
“정가희 선생님이 그런 말도 했나요?”
“네. 정정당당하게 지리산 농부들이 되라고 말씀하셨어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양초 학교 아이들이 출신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은 건 모두 정가희의 말 때문이었다.
* * *
두바이에 온 지도 두 달이 다 돼가고 있었다.
재배 시설 공사도 거의 끝나갔다.
차종문 대표가 재배 시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마무리까지 일주일 남았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은 김덕명 대표님이 하셨죠. 전 그저 김 대표님의 요구대로 건물을 지었을 뿐입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새삼 중원 건설의 차종문 대표와 함께 일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일주일 후면 두바이 재배 시설이 완성된다.
두바이에 온 이후로 가장 여유로운 주말이다. 오늘은 꼼짝도 하지 않고 호텔에서 쉬려고 마음을 먹었다.
이장우가 단잠을 깨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어나, 오늘 같은 날은 좀 놀아야지.”
“난 좀 쉬고 싶은데~”
“젊었을 때 하루라도 더 놀아야지.”
이장우가 날 침대 밖으로 끄집어냈다. 평화로운 휴일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순간이다.
우린 두바이 시내로 나왔다.
이장우는 식당으로 향했다.
“밥 먹자. 메뉴는 내가 정할게.”
“그건 두바이 전문가님이 알아서 하세요.”
난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장우는 샌드위치 가게로 향했다.
그는 일할 때를 제외하곤 샌드위치를 즐겨 먹지 않았다. 의외의 선택이다.
매장에서 먹지도 않고 포장 주문을 했다.
그는 두 손으로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샌드위치를 샀다.
나까지 포장한 샌드위치 봉투를 들어야 했다.
“샌드위치를 대체 몇 개를 산 거야?”
“32개 주문했어.”
“설마 이걸 다 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푸드 파이터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다 먹어.”
“이제 고백해. 어딜 가려고 하는지.”
“요 앞 건물이야.”
이장우가 가리킨 건물은 양봉장을 만들고 있는 곳이다. 그도 바바의 양봉장에 관해서 알고 있었다.
“양봉장으로 가는 거야?”
이장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샌드위치를 들고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처음 이곳에 강수열을 데리고 올 때는 텅 빈 곳이었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옥상 텃밭에 꽃들이 만발했다. 벌통도 깔끔하게 정리가 돼 있었다.
“점심 배달 왔습니다.”
이장우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강수열을 포함해 청년 농부들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재배 팀과 엔지니어 팀이 함께 있었다.
이장우가 샌드위치를 꺼내며 말했다.
“한 사람 앞에 한 개씩입니다.”
샌드위치를 보자 바바도 달려왔다.
“전 두 개 가져가도 돼요? 엄마 것까지요?”
“그래. 바바는 샌드위치 두 개.”
이장우가 바바에게 샌드위치 두 개를 주었다.
바바는 차도르를 쓴 여인에게 달려갔다.
난 샌드위치를 먹으며 이장우에게 물었다.
“설마 네가 청년 농부들을 동원한 거야?”
이 일은 강수열과 이장우에게만 알렸다.
이장우에겐 재배 시설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말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재배 시설을 완공하고 난 뒤에 여유롭게 작업하길 바랐다.
청년 농부들이 주말도 없이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장우는 당황한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난 절대 시킨 적 없어. 자발적으로 나온 거야.”
“정말이야?”
난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이장우를 바라보았다.
이장우는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때 강수열이 등장했다.
“이장우 팀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일은 제가 실수로 알리게 됐습니다.”
“그럼 수열 씨가 사람들에게 부탁한 건가요?”
“부탁을 하진 않았는데, 모두 자발적으로 나서 줬습니다.”
강수열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그들의 눈빛을 살폈다. 강수열의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팀을 나눠서 돌아가면서 일을 돕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을 정해 놓고 일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나도 실력 발휘 좀 해야겠네요!”
난 두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저희끼리 해도 충분합니다. 대표님까지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수열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 이장우가 내 팔목을 잡았다.
“나도 저 친구 말에 동의해. 우리 대표님은 나서지 않는 편이 좋을 거 같아.”
“너도 일하게 될까 봐 말리는 건 아니지?”
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장우는 내 눈빛을 피하며 말했다.
“꼭 그런 거만은 아니야.”
“아까 네가 날 깨우며 했던 말 기억나?”
“내가 뭐라고 했는데?”
“젊었을 때 하루라도 더 일해야 한다고.”
“누가 그런 말을 해? 그게 아니라, 젊었을 때 하루라도 더 놀아야 한다고 말했지!”
이장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박했다.
그 말에 샌드위치를 먹던 사람들이 박장대소했다.
그렇게 그날 우린 온종일 양봉장에서 일했다.
문득 양봉을 시작했을 때가 생각났다.
힘들었을 때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