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백민석이 날 보고 물었다.
“일은 잘됐어? 뭐라고 해?”
“도이치 컴퍼니와 합작 회사를 만들기로 했어.”
“정말? 그럼 유럽에도 우리 회사가 생기는 건가?”
“맞아. 유럽 시장도 지리산 농부들의 손에 들어올 거야.”
“두바이에 이어 유럽 시장까지, 당장 한국에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백민석은 전화기를 들고 말했다.
박태호도 당장 소식을 전하고 싶은 것 같았다.
“전화보다 직접 만나서 전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다 사람들 놀라면 어쩌려고. 기탁 선배 숨넘어갈지도 몰라.”
백민석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한기탁 선배가 까무러칠 일이다.
유럽에서의 성과를 동료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알리고 싶었다.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할 일이 있었다.
난 리틀 한스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두 팔을 벌려 반겼다.
“박람회를 무사히 끝내고 오셨군요.”
“덕분에 좋은 성과를 거뒀습니다.”
“제 덕이라니요~ 전 그저 구경만 갔을 뿐인데요.”
그는 함께 갔던 사람들의 반응을 이야기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리의 기술력이 좋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유럽에서 기술력이 우수하다는 말을 귀가 빠지게 들었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말이다.
리틀 한스는 이야기 끝에 물었다.
“그런데 제가 주문한 샐러드 컨테이너는 언제 받을 수 있나요?”
그도 박람회에서 10피트 규격의 샐러드 컨테이너를 주문했다.
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주일 뒤에 주문한 샐러드 컨테이너가 집에 도착할 겁니다.”
“그렇게 빨리 받을 수 있나요?”
“박람회 때 전시한 샐러드 컨테이너를 드릴 생각입니다.”
“혹시 공짜로 주는 건 아니겠죠?”
“선물로 드리는 겁니다.”
“선물이라고요?”
그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리틀 한스의 도움으로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도이치 컴퍼니의 루카스 베르너도 그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다.
작은 성의를 보이고 싶었다.
리틀 한스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비싼 물건을 공짜로 받을 순 없죠.”
“친구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선물도 선물 나름이죠. 공과 사는 구분하는 게 제 원칙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완강한 태도에 난 한발 뒤로 물러났다.
“전시 제품이니 저렴하게 드리는 건 어떨까요?”
리틀 한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 정도라면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샐러드 컨테이너가 도착하면 저희 쪽 사람들을 보내겠습니다. 샐러드 재배하는 방법과 관리 요령을 알려 줄 겁니다.”
“덕분에 매일 신선한 샐러드를 먹게 생겼네요.”
리틀 한스와 이야기를 마치고 곧장 호텔로 돌아갔다.
백민석은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떠날 일만 남은 건가?”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바이를 거쳐 암스테르담 박람회까지, 모든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호텔을 나가기 전 박태호에게 말했다.
“조만간 사람을 보낼 생각이에요. 그동안 힘들겠지만, 수고해 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외국 생활이 익숙해졌으니까요.”
박태호가 밝은 얼굴로 말하니 믿음직스러웠다.
그의 비자 문제도 도이치 컴퍼니와 이야기를 마친 상태였다. 도이치 컴퍼니는 우리를 위해 사무 공간도 제공하기로 했다.
“암스테르담에 있던 물건들은 모두 독일로 옮겨 주세요.”
“네, 문제없이 처리해 놓겠습니다.”
그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처음엔 그저 시골 생활이 좋다고 했던 이다.
지금은 첨단 농업으로 유럽을 누비고 있었다. 멋지게 성장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거 같은데. 비행기 시간 늦겠어.”
백민석이 시계를 보며 말했다.
“가 볼까.”
우린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자리에 앉자마자 백민석이 흥분한 듯이 말했다.
“박람회 성과를 들으면 다들 놀라겠지?”
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기탁에겐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를 무사히 끝마쳤다고만 전했다.
그는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에게 한 가지 사실만은 자세하게 말했다.
플랜트 펙토리가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에서 처참하게 무너진 일이었다.
그들이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가 지리산 농부들의 압도적인 기술력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한기탁은 신나게 이야기를 듣다 물었다.
“그럼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 성과가 좋았다는 말이네?”
“아주 좋았어요.”
“뜸 들이지 말고 자세하게 말해 봐.”
“자세한 내용은 하동에 가서 말할게요.”
“나 궁금해서 잠 못 자게 하려는 속셈이야?”
한기탁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크게 물었지만, 성과는 하동에서 들어야 했다.
난 동료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유럽에서의 성과를 말하고 싶었다.
* * *
인천 공항을 거쳐 하동에 도착했다.
처마 밑에 곶감이 매달려 있었다.
하동에서만 볼 수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올해가 지나고 있는 풍광이기도 했다.
사무실보다 집이 먼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당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고생했다.”
어머니가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고개를 돌려 아버지에게 물었다.
“별일 없으셨죠?”
“우리야 뭐, 잘 있었지.”
“올해도 곶감 농사가 풍년인 것 같네요.”
“올해도 곶감이 아주 잘 됐다. 그나저나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 일은 어떻게 됐냐?”
아버지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머니도 궁금한 눈빛이다.
“곶감만큼이나 아주 잘 됐어요.”
“반가운 소식이구나.”
아버지가 활짝 웃으며 답했다.
“역시, 우리 아들이야.”
어머니도 거들었다.
“저 이제 사무실에 좀 가 보려고요. 동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하니까요.”
“그래. 어서 가 봐라.”
난 당장 동료들이 있는 사무실로 달려갔다.
백민석은 이미 사무실에 도착해 있었다.
한기탁을 포함해 지리산 농부들의 주요 멤버들이 사무실을 메우고 있었다.
백민석은 입을 굳게 다문 채로 날 바라보았다.
한기탁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김덕명 대표님이 와야 말을 하겠다면서, 입을 다물고 있지 뭐야?”
난 백민석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제 유럽에서의 성과를 발표할까?”
백민석은 말을 참느라 고생했던 것 같았다.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난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의 응원 덕에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는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박람회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도 냈습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 컨테이너가 무려 158개나 팔렸습니다.”
“뭐라고요? 샐러드 컨테이너가 158개나 팔렸다고요?”
이동춘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한기탁은 머릿속으로 액수를 계산하는 얼굴이다.
그가 대뜸 말했다.
“그럼 100억이 넘는 액수네.”
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기탁은 입을 벌리고 바보처럼 웃었다. 잠시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이동춘은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한기탁도 정신을 차리고 내 입을 주목했다.
“유럽에 합작 회사를 만들게 됐어요. 그쪽에서 유통을 맡아 줄 거예요.”
“샐러드 컨테이너의 유통까지 해결됐다고? 어떤 회사야?”
한기탁은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도이치 컴퍼니라는 유통 전문 회사요.”
“도이치 컴퍼니라면 독일에서 가장 큰 유통 회사 아닌가요?”
민요한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도 도이치 컴퍼니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맞아요. 독일에서 가장 큰 유통업체죠. 우리 기술진을 최대한 많이 배치하는 조건으로 합의했고요.”
“샐러드 컨테이너 판매만 한 게 아니라, 독일 최대 규모의 유통 회사와 합작까지 했다고?”
한기탁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동료들을 보고 외쳤다.
“대표님을 위해서 헹가래 어때요?”
한기탁이 말이 떨어지자 동료들이 모두 나에게 달려들었다.
난 그들 손에 잡혀 하늘 높이 날았다.
사막에서 열기구를 탔을 때보다 더 높이 날아오르는 기분이다.
동료들이 헹가래를 쳐 주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그만요. 멀미 나겠어요.”
이동춘이 내 말을 듣고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하늘에 내려와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만족스러운 얼굴이다.
이동춘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들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네, 주문한 양에 맞게 제작해 주시면 됩니다.”
“당장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대표님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청년 농부들의 실력도 부쩍 늘었습니다.”
이동춘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유럽에 있는 사이 모두 열심히 하고 있었다.
“제가 책임지고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들겠습니다.”
이동춘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 전에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대표님!”
“샐러드 재배기를 전보다 더 작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미 10피트 규격의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들었는데요?”
“그것보다 더 작게요.”
난 양손을 벌렸다가 모으며 몸짓으로도 말했다.
“도이치 컴퍼니 대표와 약속한 일입니다.”
그들에게도 도이치 컴퍼니 대표 하이디 모어가 제안한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에 대해서 말했다.
그제야 이동춘도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기탁이 날 바라보며 물었다.
“작은 재배기라면 남극에서도 만들지 않았나?”
“네, 남극에 작은 재배기를 만든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건 콩나물을 재배하는 용도였죠.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는 다시 제작해야 해요.”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들면서 가정용도 연구·개발해 보겠습니다.”
이동춘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역시 베테랑 기술자다웠다. 그는 이장우와 함께 샐러드 컨테이너의 최고 기술자였다.
가정용 재배기를 만드는 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조금 다른 계획이 있었다. 유럽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민했던 일이기도 했다.
“전 이번 프로젝트를 청년 농부들에게 과제로 주고 싶습니다.”
“청년 농부들에게 과제로 준다고요?”
이동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청년 농부들이 팀을 짜서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만들게 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제가 교육을 잘한 건 사실이지만, 개발까지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네요.”
이동춘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이동춘 기술자님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겁니다.”
중요한 역할이라고 하자 이동춘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요?”
“네, 이동춘 님이 기술 자문이자 심사위원을 맡게 될 겁니다.”
“아주 중요한 일이군요. 얼마든지 맡겠습니다.”
이동춘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 대표님의 아이디어가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민요한이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동춘 님의 말대로 기술은 충분히 습득한 상태니까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게 하면 좋은 자극이 될 거 같아요.”
그때 한기탁이 의견을 냈다.
“재배팀과 기술팀이 서로 협력해서 팀을 구성하면 더 좋을 거 같아. 재배팀의 아이디어를 기술팀이 구현하는 방식으로.”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재배팀과 기술팀이 머리를 모으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동료들은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냈다.
프로젝트의 뼈대가 금세 완성됐다.
* * *
청년 농부들을 대강당으로 불렀다.
200명의 청년 농부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 연단에 올랐다.
먼저 유럽에서의 성과를 알렸다. 청년 농부들은 환호했다.
곧장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서 말했다.
“유럽 시장을 공략할 새로운 샐러드 재배기를 만들 생각입니다. 소형화된 가정용 재배기죠. 이번 일을 여러분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말과 동시에 대강당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재배팀과 기술팀이 서로 협력해서 팀을 구성하고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개발하는 과제입니다. 팀원은 최대 5명까지 허용하겠습니다.”
그때 빔 프로젝터가 켜지고 스크린에 영상이 나왔다.
남극에서 만들었던 콩나물 재배기 영상이다.
“남극에서 제가 만든 콩나물 재배기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만들 재배기도 이것처럼 크기가 작아야 합니다. 이건 참고용 영상입니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콩나물 재배기를 만들면 안 됩니다.”
강당에 있던 청년 농부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는 팀은 유럽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질 겁니다.”
청년 농부들의 눈이 별처럼 빛났다.
청년 농부들의 열정
유럽에 보낼 샐러드 컨테이너 작업이 시작됐다.
이동춘을 중심으로 엔지니어 팀은 밤낮도 없이 일했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재배 팀도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모두 샐러드 컨테이너 교육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청년 농부들은 유럽으로 보낼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드는 일과 동시에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만드는 과제도 수행하고 있다.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만드는 과제는 업무 시간엔 할 수 없어서, 청년 농부들은 틈나는 대로 재배기를 연구·개발했다.
이젠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공놀이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밥을 먹고 쉬는 시간에도 팀별로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주말에도 시내로 나가는 이들이 없었다. 모든 청년 농부들이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 프로젝트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얼굴에서 투지가 느껴졌다. 자신들이 만든 샐러드 재배기가 뽑히길 바라고 있었다.
청년 농부들에게 과제를 준 가장 이유는 동기 부여였다.
동기 부여를 통해 도전을 해 봄으로써, 창의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원했다.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만드는 과제로 그들을 성장시키고 싶었다.
* * *
도이치 컴퍼니에 보낼 서류가 있어 주말에 사무실을 찾았다.
이동춘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주말인데 쉬지도 못하시고. 괜찮으세요?”
“괜찮다마다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청년 농부 몇 명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 도면과 샐러드 컨테이너를 축소한 모형이 들려 있었다.
이동춘은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주말에도 사무실을 나온 이유였다.
“그럼 수고하세요.”
도이치 컴퍼니에 보낼 서류 작업을 끝내고, 방현식과 김상철을 사무실로 불렀다.
방현식이 먼저 사무실에 도착했다.
“현식이가 먼저 왔네. 이리 와서 앉아 봐.”
그가 내 옆자리에 앉았다.
“교육도 끝나고 요즘은 좀 한가하지?”
“한가하긴요. 요즘 샐러드 컨테이너 만드는 일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방현식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기름 짜는 일까지 하고 있으니 더 바쁘겠구나?”
“그 일은 형 말대로 좀 줄였어요. 어머니랑 둘이서 쉬엄쉬엄하고 있어요.”
그의 목소리가 밝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때마침 김상철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제가 늦었나요?”
“아니에요. 시간 맞춰서 잘 왔어요. 이리 와서 앉아요.”
두 남자는 무슨 일인지 궁금한 표정이다.
“두 사람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유럽에 갈 의사가 있는지 묻고 싶어서예요.”
“유럽이요?”
김상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방현식과 김상철은, 청년 농부들에게 샐러드 컨테이너 교육을 할 정도로 전문가로 성장했다.
마침 청년 농부들에게 하던 재배 교육도 끝난 상태였다.
난 그들이 유럽에서 역량을 발휘하길 바랐다.
김상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선발대로 가는 건가요?”
“네, 두 사람이 선발대로 가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박태호 씨 혼자서 너무 애쓰고 있기도 하고요.”
김상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얼굴만 봐도 알 것 같았다.
그는 선발대가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김상철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요.”
지리산 농부들은 원어민 강사를 초빙해서 영어 교육을 하고 있었다.
김상철이 강좌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는 말을 한기탁을 통해 들었다.
방현식은 대답을 주저하고 있었다.
어머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현식이는 아무래도 어려우려나?”
고민하는 얼굴이다.
방현식이 대답을 못 하고 가만히 있자, 김상철이 입을 열었다.
“현식이랑 잠깐 나갔다 와도 될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김상철이 방현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나이로 보면 김상철이 방현식보다 형이다.
두 사람은 청년 농부 교육을 맡은 뒤부터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김상철이 앞장서서 들어왔다. 나갈 때와 달리 표정이 여유로워 보였다.
방현식이 나에게 말했다.
“저도 유럽에 가고 싶어요.”
결심이 선 얼굴이다.
“어머니랑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어?”
“어머니도 절 응원할 거예요.”
난 방현식이 김상철만큼이나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걸 알고 있었다.
김상철이 어떤 말로 꾀었는지 모르지만, 방현식은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았다.
“알겠어요. 두 사람은 떠날 준비를 해 주세요. 한기탁 팀장님이 자세한 일정을 알려줄 거예요.”
두 남자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들이 박태호와 함께 유럽 시장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생각하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문이 열리고 방현식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이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름 짜는 기계는 청년 농부들의 실습실로 옮길까 하는데 괜찮겠죠?”
“어머니가 기름을 짜지 못하게 하려고?”
내 물음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기계가 있으면 일만 하실 거 같아서요.”
* * *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복도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소리가 나는 장소는 복도 끝 작은 강의실이다.
창문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강의실 안에 5명의 청년 농부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의실 한가운데 샐러드 재배기 모형이 보였다.
과제를 두고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던 모양이다.
양초 학교 출신의 성도윤과 강수열이 눈에 띄었다.
못 본 척하고 가려고 했다.
우연히 성도윤과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가 문을 열고 나왔다.
“대표님, 여기서 뭐 하세요?”
“목소리가 크게 들려서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어요.”
“수열이 목소리가 워낙 커서요.”
성도윤이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강수열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이 전과 달라 보였다.
“수열 씨, 이제 콧수염이 없네요?”
두바이에 간다고 기른 콧수염이었다.
강수열은 부끄러운 듯 손으로 코밑을 가리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도윤을 포함해 강의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깔깔거리며 웃었다.
난 성도윤에게 물었다.
“수열 씨 콧수염은 왜 사라진 거예요?”
“유럽에 가고 싶다고 잘라 버렸어요.”
그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몇 달 전까지 두바이에 갈 생각으로 열심히 기른 콧수염이었다.
지금은 유럽에 갈 생각에 몇 달을 기른 콧수염을 밀어 버렸다.
난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몸 관리도 잘 하면서 해요.”
돌아가려는 순간, 성도윤이 나에게 물었다.
“대표님, 잠시만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성도윤은 팀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 손에 노트북을 쥐고 있었다.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이동춘은 집에 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여전히 청년 농부들에게 조언하고 있었다.
난 성도윤과 함께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가져온 노트북을 펼치며 말했다.
“농사 펀딩을 제 나름대로 발전시켜 봤습니다.”
성도윤이 면접 때 나에게 말했던 아이디어다. 크라우드 펀딩을 농사에 접목하는 발상이다.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 전 그에게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대표님 말씀대로 하동을 중심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봤습니다.”
홈페이지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하동 농부를 위한 농사 펀딩’, 도윤 씨가 붙인 이름인가요?”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홈페이지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화면 안에 농부들의 이미지가 있었다.
농부들의 이미지 중에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포도 농장을 운영하던 임화수 농부다.
그가 포도 가격 하락으로 힘들어할 때 도움을 준 일이 있었다.
임화수 농부를 클릭했다. 인물을 클릭하자 농사 계획서가 나왔다.
2월에는 대파, 6월에는 감자, 7월에는 포도를 생산할 계획이 담긴 농사 계획서가 나왔다.
농사 계획서를 보고 있을 때, 성도윤이 말했다.
“농사 계획서를 보고 소비자가 원하는 농작물을 미리 구매하는 구조입니다.”
“사진 속의 농부들은 어떻게 알게 됐나요?”
“직접 찾아가서 의견을 묻고 농사 계획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소규모로 농사를 짓는 분들이네요?”
“크게 농사를 짓는 분들은 이미 판로가 확보된 분들이 많아서요.”
“도윤 씨는 소규모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주목했군요?”
“네, 어려운 농부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요.”
“훌륭하네요!”
성도윤의 말대로 농사를 작게 하는 사람들은 판로 확보가 어려웠다.
농사 펀딩이 활성화된다면 소규모로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난 홈페이지 화면을 보며 물었다.
“홈페이지 제작은 누가 했나요?”
“제가 직접 했습니다.”
“도윤 씨 코딩도 할 줄 아나요?”
“아니요, 그 정도 전문가는 아닙니다. 코딩이 아니라 홈페이지 만드는 도구를 사용했습니다. 외국 사이트 중에 홈페이지를 무료로 만들 수 있게 탬플릿을 제공하는 사이트가 있어서요.”
“농사 펀딩, 도윤 씨에게 맡겨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꼭 하고 싶습니다.”
* * *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난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할 무렵 전화벨이 울렸다.
양초 학교를 책임지고 있는 정가희다.
“무슨 일이야, 이 늦은 시간에?”
“집에 온 김에 대표님 얼굴이나 보려고.”
“집에 왔다고?”
“아버지 생신이셔, 연말이기도 하고. 겸사겸사 왔지.”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는데 얼굴이나 볼까?”
운전대를 돌려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정가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잘 지냈어?”
“나야 항상 잘 지내지.”
그녀가 차에 타며 말했다.
“저녁 먹으러 갈까?”
“그 전에 가고 싶은 곳이 있어.”
“그게 어딘데?”
“내가 찍는 주소로 가 주시면 됩니다.”
정가희는 손을 가리고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다.
“대체 어딜 가려고 하는 거야?”
“가 보면 알아.”
‘정가희는 참 여전하다’는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났다.
그녀가 찍은 장소로 향하던 중, 갑자기 그녀가 물었다.
“성도윤하고 강수열은 잘 지내고 있나?”
“그 친구들, 지리산 농부들의 희망이 될 아이들이야.”
“그렇게 잘하고 있어?”
정가희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왜 놀래? 혹시 두 사람 양초 학교에서 사고라도 쳤었나?”
“사고 친 적 없어. 좋아서 그런 거야. 잘하고 있다니까.”
정가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미소에서 안도감과 약간의 슬픔이 느껴졌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성도윤과 강수열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었기에,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그런 마음인 것 같다.
잘하고 있다는 말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것이다.
“나 책 나왔어.”
정가희가 대뜸 말했다.
“책이라면 그때 선물로 줬잖아?”
“또 나왔지.”
그녀가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난 힐끔 그녀가 든 책을 바라보았다.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기계’네.”
“맞아. ‘기계’야.”
전에 쓴 소설의 제목은 ‘꿀과 벌’이었다.
벌에 쏘여 특별한 능력을 얻은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었다.
이번에 ‘기계’다. 제목부터 범상치 않았다.
“제목이 왜 ‘기계’야?”
“영혼을 바꾸는 기계에 관한 소설이거든.”
“영혼을 바꾸는 기계?”
정가희의 기괴한 상상력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왜 웃는 거지?”
“그냥 재미있어서.”
“소설을 읽지도 않고 재미있다고?”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상상력이 기발하다는 뜻이야, 오해하지 말고.”
날 바라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벌써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야.”
그녀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골의 한적한 초등학교 건물이다.
“여긴 왜 온 거야?”
“가 보면 알아.”
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빨리 들어가자.”
그녀가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며 말했다.
우린 비를 맞으며 뛰었다.
잠깐 사이였지만, 비에 옷이 젖었다.
그녀도 물에 빠진 고양이 같았다.
난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말 좀 해 봐. 여긴 대체 어디야?”
“도서관으로 만들 곳이야.”
꿈의 도서관
정가희가 도서관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곳은 폐교가 된 학교 건물이다.
난 학교 건물을 둘러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곳에 도서관을 만들겠다고?”
그녀가 강한 긍정을 표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건물을 산 거야?”
“아직은 계획 중이야. 우선은 찜만 해 놓은 상태고. 곧 살 수 있을 거야.”
정가희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돈이 많이 들 텐데?”
아무리 폐교라고 하지만 학교 건물을 사고 도서관으로 만들려면 최소 몇억은 필요했다.
“소설을 팔아서 사려고.”
“소설이 그렇게 잘 팔려?”
“지금 서점에서 베스트 1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고.”
정가희는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에 5,000만 원이나 투자했었다.
한국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장편 소설 공모전에 당선됐기에 가능했다.
그 후에도 ‘기계’라는 소설을 또 출간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일 수 있었다.
“왜, 안 믿겨?”
그녀가 내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그냥 신기해서.”
“뭐가 그렇게 신기해?”
“정가희의 놀라운 추진력이.”
정가희는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잠깐 들어가 볼까?”
“좋아.”
폐교된 학교지만 건물 내부는 비교적 깨끗했다.
그녀는 텅 빈 교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에 책과 사람들이 넘치게 될 거야.”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가희의 거창한 계획도 들었으니까, 이제 저녁이나 먹을까?”
난 그녀를 한기탁의 단골 포장마차로 안내했다.
정가희는 포장마차 앞에 서서 물었다.
“포장마차네?”
“비도 오는데 막걸리나 한잔하자.”
“차는 어떻게 하고?”
“택시 부르면 돼.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 여기 서비스가 좋아.”
후덕한 인상의 여사장님이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비 다 맞았네. 이걸로 좀 닦아.”
여사장님이 나에게 수건을 주며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사람이랑 왔네?”
그녀가 정가희를 보며 물었다.
“매일 똑같은 사람하고 오면 재미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혹시, 기탁 선배가 안 와서 서운하신 거예요?”
“서운하긴, 하나도 안 서운해. 기탁이는 매일 서비스 타령만 하니까.”
그녀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뭐 줄까?”
“해물파전에 막걸리 주세요.”
“조금만 기다려, 금방 해 줄게.”
여사장님이 돌아가자, 정가희가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일은 안 하고 여기서 매일 술만 마셨구나?”
“정가희 잔소리는 여전하네.”
“뭐, 잔소리?”
그때 여사장님이 막걸리와 안주를 놓으며 말했다.
“이건 아가씨를 위한 특별 서비스.”
먹음직스러운 두부와 볶음 김치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해물파전도 곧 부쳐 줄게.”
우윳빛 막걸리를 잔에 따르는 순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가 많이 오네.”
정가희는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막걸리 마시기 딱 좋은 날씨야.”
난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녀와 한두 잔을 기울이는 사이에 해물파전까지 나왔다.
빗소리 때문인지 술맛이 좋았다.
잔을 비우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도서관을 만들고 싶은 진짜 이유가 뭐야?”
“하동은 문화생활을 즐길 공간이 부족하니까. 청년 농부들에게도 좋은 시설이 될 거야.”
“그 이유 말고 다른 이유는 없는 거야?”
전에도 그녀는 청년 농부들이 문화생활을 즐길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지만, 문득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가희는 술잔을 비우고 말했다.
“굳이 묻는다면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해.”
“그게 뭔데?”
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도 너처럼 꿈을 향해 도전해 보고 싶어서.”
“도전?”
“넌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잖아. 곶감으로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달리고 있으니까. 나도 너처럼 도전해 보고 싶어.”
정가희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서 소설도 쓰고 도서관도 지으려는 거야?”
“맞아, 하나씩 목표를 세우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 보려고.”
“멋진데?”
내 말에 그녀가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자신의 꿈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정가희의 꿈을 위해 건배 한번 할까?”
우린 기분 좋게 술잔을 부딪쳤다.
그녀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을 때다.
“아영이도 날 도와주기로 했어.”
“남아영이가 도와주기로 했다고?”
“아영이가 도서관에 벽화를 그려 주기로 했어.”
“벽화?”
남아영 이야기를 하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정가희는 날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왜 웃어?”
“아영이가 준 선물이 생각나서.”
“선물?”
난 그녀에게 남아영이 준 그림에 대해서 말했다.
내 얼굴을 초록색으로 그렸다고 하자, 그녀도 깔깔거리며 웃었다.
“도서관 벽화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된다.”
* * *
다음 날 정가희는 양초 학교로 돌아갔다.
난 도이치 컴퍼니와 합작회사를 만드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한기탁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점심도 먹었는데, 커피 한잔 어때?”
농업 지원 센터를 사무실로 쓸 때는 주로 옥상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동 대학을 쓰는 지금은 커피를 마실 장소가 널려 있었다.
난 운동장이 내려다보이는 스탠드에 앉았다.
한기탁이 나에게 커피잔을 건네며 물었다.
“어제 가희랑 포장마차 갔었다며?”
“그걸 선배가 어떻게 알았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
그가 나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그것도 비 오는 날 포장마차에서.”
“정가희의 꿈을 들었어요.”
“꿈?”
“가희가 하동에 도서관을 지을 계획이래요.”
“도서관?”
난 그에게 폐교에 갔던 일을 들려주었다.
남아영이 벽화를 그려 주기로 했다는 말을 듣자 그가 말했다.
“양초 학교 선생이 된 뒤로 많이 달라진 것 같네. 잘나가는 소설가라니! 또 이제 곧 도서관장 정가희네~”
한기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상철 씨랑 현식이, 독일에 갈 준비는 잘 되고 있나요?”
“잘 진행되고 있어. 도이치 컴퍼니도 쪽도 협조적으로 나와서 문제가 될 만한 건 없었고. 독일에 갈 비행기 표까지 끊어 놨지.”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고마워요, 형.”
“수고는 무슨~ 저기 보이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한기탁이 손가락으로 벤치에 앉아 있는 청년 농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들은 점심시간을 이용해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청년 농부들에게 과제를 준 건 좋은 아이디어였어.”
한기탁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눈빛이 달라졌어. 너도 느껴지지?”
“네, 다들 의욕이 넘치는 것 같아요.”
“처음엔 좀 걱정하기도 했거든?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드는 일에, 과제까지 수행해야 하니까.”
유럽에 보낼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드는 일 말고도 일이 많았다.
지리산 농부들은 하동 대학 병원을 포함해 5개의 대형 매장에 샐러드를 납품하고 있었다.
지금은 샐러드 컨테이너를 이용해 샐러드를 재배하는 상황이다.
대규모 재배 시설이 완공되면 더 바빠질 것이다.
이미 전국적 체인망을 가진 엘브이 컴퍼니에 샐러드를 납품하기로 계약한 상태였다.
“과제 마감이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면 끝나요.”
“어떤 물건이 나올지 기대되는데?”
* * *
일주일 후 과제가 마감됐다.
총 40개의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가 완성됐다.
각양각색의 재배기가 눈앞에 모습을 보였다.
모든 재배기엔 샐러드가 자라고 있었다.
기계만 만드는 게 끝이 아니었다.
과제엔 작물을 재배하는 일까지 포함돼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팀장들이 모여 청년 농부들이 만든 재배기를 평가했다.
작물이 자라고 있다고 해서 모든 재배기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광량이 부족하거나, 온도와 습도를 제어하지 못하는 재배기도 있었다.
1차 평가는 이동춘과 민요한이 맡아서 했다.
그들은 5개의 샐러드 재배기를 골랐다.
5개의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는 온도, 습도, 광량,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완벽하게 제어했다.
이동춘이 5개의 재배기를 놓고 말했다.
“1차 평가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건 5개의 재배기였습니다.”
2차 평가의 기준은 실용성과 내구성 그리고 디자인이다.
온도, 습도, 광량,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완벽하게 제어한다고 해도 실용성이 떨어지는 재배기가 있었다.
가정에서 일반인들이 샐러드를 길러 먹을 소형 장치였다.
누구나 쉽게 쓸 수 있어야 했다.
영양액과 물을 주는 구조가 단순하고 재배기 관리가 쉬워야 했다.
민요한이 평가를 마치고 말했다.
“최종으로 두 개의 재배기가 남았습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한기탁이 최종으로 오른 재배기를 보며 물었다.
“하나는 ‘샐러드 천국’이고, 다른 하나는 ‘하루 샐러드’예요.”
민요한은 재배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샐러드 천국은 공교롭게도 내가 남극에서 만들었던 콩나물 재배기와 흡사한 물건이다.
나처럼 재활용 냉장고를 이용해서 재배기를 만들었다.
작물 재배의 모든 요건을 충족했으며 관리 또한 쉬웠다.
샐러드 천국을 만든 이는 성도윤과 강수열이 속해 있는 팀이었다.
“하루 샐러드는 디자인이 아주 산뜻하네.”
백민석이 하얀 외관을 자랑하는 재배기를 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디자인이 산뜻했다.
디자인이 산뜻한 이유는 단지 하얀 외관 때문은 아니었다.
하루 샐러드는 내부를 볼 수 있게 유리문이 장착돼 있었다.
샐러드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성도윤 팀이 만든 재배기는 밀폐형이라서 내부를 볼 수 없었다.
하루 샐러드를 만든 이들은 조미희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팀이다.
조미희는 기계 공학을 전공한 여자였다.
첨단 기계로 한국 농업의 생태계를 바꾸는 것이 그녀의 꿈이자 목표였다.
이동춘은 두 재배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능 면에서는 샐러드 천국이 매우 우수합니다. 하루 샐러드는 디자인과 실용성 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요.”
모두 두 대의 재배기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누구에게 대상을 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한기탁이 턱을 만지며 말했다.
“저는 그래도 하루 샐러드에 한 표를 주고 싶어요.”
민요한이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하루 샐러드를 선택한 이유가 뭐죠?”
“가정용 재배기에 가장 충실한 것 같아서요. 디자인도 좋고요.”
민요한의 말에 다들 수긍하는 눈빛이다.
그때 이동춘이 입을 열었다.
“저는 샐러드 천국에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이유도 말씀해 주세요."
난 이동춘에게도 이유를 물었다.
“샐러드 천국이 하루 샐러드보다 기술적으로 더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내부에 설치된 에어 펌프와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제어하는 장치가 꼼꼼하게 정리돼 있습니다. 전 디자인보다 성능이 우수한 샐러드 천국을 선택하겠습니다.”
이동춘의 말에 팀원들의 고민이 더 깊어졌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때 한기탁이 입을 열었다.
해답이라도 찾은 듯한 얼굴이다.
“대상을 결정하는 건 지리산 농부들의 대표님에게 맡기면 어떨까요?”
한기탁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저는 찬성합니다.”
백민석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저도 그 의견에 찬성해요.”
민요한도 거들었다.
거기에 이동춘까지 합세했다.
“대표님의 결정이라면 뭐든 받아들이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러분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최종 우승자를 발표하겠습니다.”
* * *
다음 날 대강당에 청년 농부들이 모였다.
모두 기대에 찬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은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 대상자를 발표하는 날입니다. 대상자를 발표하기에 앞서 먼저 여러분들의 노력과 열정에 찬사를 보내고 싶네요. 모두 수고 많았습니다.”
말이 끝나자 우렁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럼 대상을 발표하겠습니다.”
모두에게 좋은 결과
청년 농부들은 내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준비한 쪽지를 펼쳤다.
“이번 과제의 대상은…….”
대강당 안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공동 대상입니다. 성도윤 팀의 샐러드 천국과 조미희 팀의 하루 샐러드, 두 팀이 공동 대상으로 선정됐습니다. 팀의 대표들은 연단으로 나오세요.”
성도윤과 조미희가 연단으로 나왔다.
성도윤이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가늘고 긴 눈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대상으로 선정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함께 한 팀원들과 이 영광을 나누고 싶습니다.”
조미희에게 마이크가 돌아갔다.
그녀는 아담한 체구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이 된 후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네요. 저도 함께 작업한 팀원들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청년 농부들에게도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멋진 도전이었습니다.”
조미희는 마지막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밤잠을 줄여 가며 팀원들과 함께 연구·개발에 매달리던 순간이 떠오른 모양이다.
난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조미희 씨가 제가 할 말을 대신해 줬네요.”
대강당에 모인 청년 농부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긴장이 사라졌는지 여유로운 표정이다.
“저도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분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일과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대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단체 회식을 준비했습니다.”
단체 회식이란 말에 대강당에 모인 환호성을 질렀다.
처음 구내식당에서 환영 파티를 하고는 그 뒤론 너무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이다.
식구가 많다 보니 회식 한번 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기탁은 이번 프로젝트가 끝나면 회식할 것을 제안했다.
오랜만의 회식이다.
* * *
대강당에서 발표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지리산 농부들의 팀장들도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사무실 안에는 대상을 받은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가 두 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동춘이 재배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동 대상이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제 선택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동춘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때 민요한이 나섰다.
“그런데 둘 다 공동 대상이면, 어떤 재배기를 독일로 보내실 건가요?”
도이치 컴퍼니 대표 하이디 모어에게, 최대한 빨리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만들어 보내겠다고 약속했었다.
난 두 대의 재배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두 재배기는 독일로 보내지 않을 생각입니다.”
동료들이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한기탁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둘 다 보내지 않는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두 팀을 공동 대상으로 선정한 이유는 각각의 장점을 살려 새로운 재배기를 만들고 싶어서이니까요.”
“두 재배기의 장점을 하나로 합친다고요?”
민요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샐러드 천국의 기술적 완성도와 하루 샐러드의 디자인과 실용을 합치는 거죠.”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네요!”
이동춘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다른 이들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난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청년 농부들이 고생했으니 이제는 여러분들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두 재배기의 장점을 분석하고 새로 디자인하는 일은 민요한 씨가 맡아주세요.”
“네. 제가 책임지고 하겠습니다.”
민요한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애플리케이션과 연동하는 일은 민석이가 맡아 주고.”
“오케이. 그건 내가 전문이지.”
마지막으로 이동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동춘 기술자님은 재배기의 기술적 완성도를 더 높여 주세요. 샐러드 천국의 기술력보다 더 월등하게요.”
“당연하죠. 샐러드 천국이 아니라 샐러드 파라다이스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난 한기탁에게 고개를 돌렸다.
“회식할 장소는 구했나요?”
“하동에서 가장 큰 뷔페를 섭외해 놨지.”
“목장 식구들에게도 전달했죠?”
“당연하지.”
한기탁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 * *
그날 오후, 도이치 컴퍼니 대표 하이디 모어에게 연락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화상 통화였다.
백발의 백인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합작 회사 관련해서는 서류 작업을 끝냈습니다.”
“지리산 농부들이 준 서류는 모두 전달받았습니다. 남은 작업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꼈지만, 그녀는 일 처리가 빠르고 깔끔했다.
내가 서류를 보낼 때마다 빠르게 처리했다.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언제쯤 볼 수 있나요?”
“한 달 안에 볼 수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빠르네요.”
“저희도 도이치 컴퍼니만큼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녀가 가지런한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어떤 물건이 나올지 기대되네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을 총동원할 테니까요.”
* * *
하동 제일 뷔페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모두 지리산 농부들의 식구들이다.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는 회식이자 송년회이기도 했다.
청년 농부들은 음식을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사무실에서 볼 때와 느낌이 달랐다. 이십 대의 풋풋함이 느껴졌다.
청년 농부 중에 유일하게 정장을 입고 온 이가 있었다.
양초 학교 출신의 강수열이다. 그는 두바이에 갈 걸 대비해 콧수염을 길렀던 인물이었다.
감색 슈트에 갈색 로퍼가 제법 잘 어울렸다.
난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회식 자리에 정장을 입고 왔네요?”
내 물음에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마에서 땀이 나고 있었다.
“혹시, 유럽에 갈 걸 대비해서 정장을 입은 건가요?”
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볼수록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턱시도와 나비넥타이가 더 잘 어울리겠는데요.”
“유럽에서는 그렇게 입어야 하나요?”
그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농담이에요, 격식을 차려야 할 때만 정장을 입으면 돼요.”
“아, 네…….”
강수열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화장실이 급하다며 자리를 피했다.
그때 성도윤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강수열과 달리 편안한 차림이다.
그의 부처를 닮은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
“실은 대표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부탁이요?”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되는 얼굴이다.
“편하게 말하세요.”
“대상을 받은 사람에겐 유럽으로 갈 기회를 주신다고 하셨죠?”
“네. 도윤 씨도 유럽에 가겠죠?”
“유럽에 가지 않아도 되나요?”
난 잠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았다.
“유럽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라도 있나요?”
“유럽에 가게 되면 농사 펀딩을 진행할 수 없을 테니까요.”
하동 농부를 위한 농사 펀딩이다.
농부가 올린 농사 계획서를 보고 소비자가 원하는 농작물을 미리 구매하는 펀딩 시스템이다.
그는 소규모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주목했다.
강수열과 달리 그는 목표가 분명했다. 그의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
“도윤 씨가 원한다면 유럽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이요?”
성도윤은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세요.”
“농사 펀딩을 성공시킨다는 조건입니다.”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 * *
해가 바뀌어, 2010년이 됐다.
하이디 모어에게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보내기로 약속한 날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청년 농부들은 유럽에 보낼 샐러드 컨테이너를 제작하며 재배에도 힘쓰고 있었다.
이동춘이 사무실에 들어오며 말했다.
“이제 대표님이 봐 주셔야 할 차례입니다.”
“샐러드 재배기가 완성됐나요?”
“네. 샐러드를 재배하는 일까지 전부 마쳤습니다.”
일주일 전에 재배기의 디자인과 성능을 확인했다.
민요한은 작물 재배까지 마친 후에 최종 검사를 요청하겠다고 말했다.
연구실에 새로 만든 샐러드 재배기가 있었다.
소형 냉장고만한 크기로 가정에서 샐러드 재배기로 쓰기에 적합했다. 하얀색 외관에 투명한 유리문이 달린 게 특징이다.
재배기 안에서 버터헤드와 카이피라가 자라고 있었다.
청년 농부들이 만들었던 샐러드 재배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역시, 최고 전문가들의 손이 닿은 물건이다.
민요한이 새로운 재배기를 보며 말했다.
“일주일 동안 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만큼이나 작물이 잘 자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난 재배기에 달린 문을 열고 샐러드를 확인했다.
샐러드의 신선한 기운이 느껴졌다.
“대표님 말대로 청년 농부들이 만든 재배기의 장점만을 모았습니다.”
이동춘의 밝은 얼굴로 말했다.
“혹시, 샐러드 재배기의 이름도 정했나요?”
난 이동춘과 민요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동춘이 말하려는 순간 민요한이 그의 입을 막았다.
“이름은 조미희 팀이 냈던 ‘하루 샐러드’가 좋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데 다른 이름도 있었나 봐요?”
난 이동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제야 이동춘이 입을 열었다.
“제가 낸 아이디어가 있긴 합니다.”
“궁금하네요. 어떤 이름인지?”
민요한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동춘이 낸 아이디어가 부끄러운 것 같았다.
“제가 지은 이름은 ‘당신을 위한 샐러드’입니다.”
“당신을 위한 샐러드.”
예상과 달리 그가 지은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이름 괜찮네요.”
“대표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실은 민요한 씨가 촌스럽다고 하도 뭐라고 해서 제가 좀 힘들었습니다.”
이동춘이 민요한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대표님은 그 이름이 마음에 드세요?”
민요한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네. 전 마음에 들어요. ‘Salad for you’라고, 영어로 표현하기에도 괜찮은 것 같구요.”
결국, 이름은 투표로 정하기로 했다.
투표 전 한기탁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간단하게 거수로 할 생각도 있었지만, 비밀 투표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거수로 하면 이동춘에게 손을 들어 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투표가 끝나고 한기탁이 결과를 발표했다.
“당신을 위한 샐러드가 과반이 넘었네요.”
모두 이동춘을 바라보며 손뼉을 쳤다.
민요한이 이동춘에게 말했다.
“저도 깨끗하게 인정하겠습니다.”
“이름보다 성능이죠. 요한 씨가 없었다면 우수한 재배기를 만들지 못했을 거예요.”
이동춘은 민요한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새로운 재배기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름까지 정해졌다.
이제 재배기를 독일로 보내는 일만 남았다.
난 한기탁에게 말했다.
“경영지원 팀장님, 우리 재배기를 최대한 빨리 독일로 보내 주세요.”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 *
새로 만든 샐러드 재배기는 독일로 떠났다.
샐러드 재배기만 독일로 가는 게 아니었다.
선발대인 방현식과 김상철도 독일로 떠나야 했다.
그들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떠나는 날, 두 사람을 불렀다.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네. 잘 다녀오겠습니다.”
“공항에 박태호 씨가 나와 있을 거예요.”
“이미 연락했습니다.”
김상철이 웃으며 말했다. 김상철과 박태호는 같은 해 지리산 농부가 된 이들이다.
독일에서도 예전처럼 잘 협력하길 바랐다.
난 방현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께 자주 연락드리고.”
“어머니에게 화상 통화 하는 방법을 알려 드렸어요.”
방현식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날 두 사람은 독일로 떠났다.
* * *
두 사람이 독일로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도이치 컴퍼니에 보낸 샐러드 재배기도 무사히 도착했다.
하이디 모어가 새로 만든 샐러드 재배기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했다.
퇴근을 앞둔 시간, 도이치 컴퍼니의 대표 하이디 모어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리산 농부들이 만든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는 잘 받았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샐러드 컨테이너보다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유럽 시장을 휩쓸 물건이 나온 것 같습니다.”
벽화 마을
도이치 컴퍼니의 대표 하이디 모어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지리산 농부들이 제작한 샐러드 재배기가 유럽 시장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물건이라고 확신했다.
가정용 샐러드 재배기를 유럽에 판매하는 일은 합작 회사를 통해서 진행하기로 했다.
합작 회사의 모든 서류 작업이 끝난 상태였다.
통화를 끝내기 전 그녀에게 말했다.
“조만간 샐러드 컨테이너도 독일로 보내겠습니다.”
암스테르담 박람회 때 유럽 각국에서 주문한 샐러드 컨테이너였다.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진도 함께 오는 건가요?”
“네. 샐러드 컨테이너와 함께 전문가들도 함께 보낼 생각입니다.”
후발대는 청년 농부들이다. 재배와 기술 전문가들로 이뤄진 팀이다.
대상을 받은 두 팀의 모든 인원이 포함된다. 농사 펀딩을 맡은 성도윤은 제외하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