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1. (201/205)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박람회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난 샐러드 컨테이너에 심을 모종판을 옮기며 백민석에게 말했다.

“민석아, 샐러드 컨테이너를 애플리케이션에 연동해 줘.”

“오케이, 작업 시작할게.”

“박태호 씨는 나와 함께 모종 작업 같이하고요.”

“알겠습니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박람회 때는 샐러드 컨테이너 안에서 작물이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난 심혈을 기울여 모종 작업을 했다.

모종이 끝난 작물을 고체 배지에 끼웠다.

고체 배지는 암석을 1,600도로 용융한 뒤 솜사탕 제조 방식으로 뽑아낸 물질로, 작물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작업이 끝난 작물을 샐러드 컨테이너로 옮겨 심었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내부 설정도 맞췄다.

[빛 8,500lux, 온도 16도, 상대습도 범위 70%, 이산화탄소의 농도 380ppm]

* * *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지도 열흘이 지났다.

샐러드 컨테이너에서 푸른 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때마침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오늘 컨테이너 도착이요.”

백민석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바이에서 이동춘에게 따로 부탁한, 10피트 규격의 작은 사이즈 샐러드 컨테이너다.

청년 농부들의 실습용으로 사용하던 물건이기도 했다.

두바이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개인적인 용도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산 압둘라 사마를 보며 떠올린 아이디어다.

농부가 아닌 개인도 샐러드 컨테이너에 관해 관심을 보였다.

난 그들을 공략할 목적으로 가장 작은 규격의 샐러드 컨테이너를 골랐다.

작은 규격의 샐러드 컨테이너는 개인 구매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거라고 여겼다.

크기가 작아서 부담스러운 가격도 극복할 수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 들어옵니다!!!”

박태호가 창고 문을 열며 외쳤다.

하동에서 보내온 샐러드 컨테이너가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샐러드 컨테이너는 하동에서 봤던 것과 조금 달랐다.

하동에서 실습용으로 사용하던 것들은 중고 컨테이너를 재활용한 물건이었다.

내 눈앞에 있는 샐러드 컨테이너는 외관이 새것처럼 깨끗했다.

이동춘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는 이번 박람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밤을 새워서 샐러드 컨테이너의 외관을 칠했을 것이다.

우린 저녁도 잊은 채 하동에서 온 샐러드 컨테이너를 점검했다.

하동에서 샐러드 컨테이너가 도착하자,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날 저녁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백민석에게 물었다.

“오늘 맥주 한잔 어때?”

“그 말이 언제 나오나 했네.”

백민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도요.”

박태호도 하얀 치아를 보이며 말했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뒤 작업에만 매달리고 있었다.

휴식이 필요한 순간이다.

우린 바다가 보이는 펍에서 여유롭게 맥주를 마셨다.

“시간 참 빠르네. 벌써 열흘이 지나다니.”

백민석이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었다.

모든 게 완벽해야 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준비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더 있었다.

난 박태호에게 말했다.

“이제 모종 작업도 정리가 됐으니, 태호 씨는 홍보 책자 작업을 해주세요. 특히 개인용 샐러드 컨테이너 부분은 신경을 써 주고요.”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박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박람회 때 쓸 영문 홍보 책자다. 박람회 준비를 하며 홍보 책자를 만들긴 했었다.

하지만 추가돼야 할 부분이 있었다.

개인용 샐러드 컨테이너 부분이다.

그는 이미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난 웃으며 말했다.

“말하지 않아도 잘하고 있었네요.”

“다 대표님을 보고 배운 덕이죠. 대표님은 언제나 준비가 철저하시니까요.”

그의 말에 백민석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우리 대표님만큼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도 없지.”

“프로그램 개발은 잘 되고 있어?”

백민석에게도 프로그램을 요청한 상태였다.

이것도 하동에서는 구상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다.

박람회 때 사람들이 애플리케이션을 깔고 샐러드 컨테이너 관리자 화면을 볼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보통은 샐러드 컨테이너의 주인에게만 관리자 권한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난 박람회를 찾는 모든 이들을 샐러드 컨테이너의 주인으로 만들고 싶었다.

개인 용도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쓸 사람들에게 효과적인 마케팅 수단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태호만큼이나 잘하고 있다고. 프로그램 개발도 거의 끝나가고 있어.”

백민석이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역시 백민석이네!”

“훌륭한 대표 밑에는 탁월한 팀장이 있는 법이니까.”

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런데 암스테르담은 미국하고 분위기가 완전 다른 것 같아. 뭐랄까, 좀 특색이 있는 것 같아. 미국은 크기만 하고 개성이 없어 보였는데.”

“유럽은 개성이 강하지. 미국과 달리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니까.”

“그렇기는 하네. 미국 역사는 고작 200년밖에 안 됐으니까.”

미국은 역사가 짧은 나라임에도 압도적으로 성장했다. 신대륙을 찾아 나섰던 탐험가들은 척박한 환경에 새로운 세상을 건설했다.

지리산 농부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난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조만간 독일에 좀 다녀올 생각이야.”

“농업 박람회가 코앞인데, 독일에 간다고?”

백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박태호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박람회를 위해 만나 볼 사람이 있어.”

“독일에 누가 있는데?”

“리틀 한스.”

백민석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리틀 한스를 만나 봤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리틀 한스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네. 독일 농부들도 많이 알 거고.”

리틀 한스는 독일에서 양봉 교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생업으로 양봉을 배우는 한국과 달리 취미로 배우는 이들도 많았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다. 유럽에서 취미 농사가 발달한 곳이기도 했다.

그를 통해 농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을 모으고 싶었다.

분명 개인 용도의 샐러드 컨테이너에 관심을 보일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비행기 표 예매는 제가 하겠습니다.”

박태호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기차 타고 가도 되지 않나? 유럽은 하나로 연결돼 있으니까.”

그의 말대로 기차로 갈 수도 있었다. 유럽에서 일하기 편한 점이기도 했다.

* * *

다음 날 리틀 한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부를 전하고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유쾌한 목소리로 답했다.

“언제나 환영입니다. 우린 오랜 친구니까요.”

“감사합니다, 조만간 뵙겠습니다.”

그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마력을 가진 인물이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독일에서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독일에서 만난 사람들

네덜란드와 독일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독일 도르트문트에 도착했다.

도르트문트역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작은 키에 유머 감각이 좋은 리틀 한스다.

독일 양봉 협회 회장이자, 나와 오랜 인연을 가진 인물이다.

“독일에서 다시 만나니 반갑네요.”

“마중까지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하죠. 우린 오랜 친구니까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에 참여한다고요?”

“네, 암스테르담 박람회에서 저희가 개발한 수경 재배 시설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수경 재배라면 첨단 농업이네요? 역시 젊은 사람이라 다르군요.”

“리틀 한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하하하, 덕명 씨는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나는 양봉을 하는 사람인데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그것참 다행이군요. 그런데, 박람회 준비도 바쁠 텐데 독일까지 무슨 일로?”

“독일 농부들을 만나고 싶어서 왔습니다.”

“독일 농부들이요?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가서 하면 어떨까요?”

리틀 한스가 자동차 문을 열며 말했다.

* * *

한적한 전원 풍경이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었다.

집에 도착하자 후덕한 인상의 여자가 반겼다.

리틀 한스의 부인 레베카 여사이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오랜만에 요리 솜씨를 발휘할 테니까요.”

그녀가 주방에서 요리하는 사이, 나와 리틀 한스는 서재로 들어갔다.

리틀 한스는 웃으며 물었다.

“오랜만에 독일에 오셨는데, 음료수 한잔해야겠죠?”

“좋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는 독일 사람들은 맥주를 음료수처럼 마신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아마 지금도 맥주를 가지러 나갔을 것이다.

그를 기다리며 서재를 둘러봤다.

서재엔 양봉과 관련한 책들이 즐비했다. 한쪽엔 사람들과 찍은 사진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중 한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벌통을 배경으로 수십 명의 사람이 미소를 짓고 있는데, 사진 속에 친숙한 얼굴이 보였다.

토종벌 협회의 초대 회장인 양대호다.

리틀 한스가 양대호와 어깨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도 있었다.

“지금도 한국 토종벌 협회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답니다.”

등 뒤에서 리틀 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대로 그는 맥주가 든 유리잔을 들고 있었다.

“덕명 씨가 소개해 준 사람들은 모두 좋은 분들이더군요.”

리틀 한스가 나에게 맥주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는 예전부터 한국 토종벌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난 그에게 토종벌 협회의 양대호 회장을 소개해주었다.

사진 속에 양대호 회장과 토종벌 협회 간부들의 모습도 보이는 걸 보니, 그 뒤로도 꾸준히 교류가 이어지고 있던 모양이다.

리틀 한스는 맥주를 한잔 마시며 물었다.

“이제 덕명 씨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독일 농부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정확하게는 취미로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양봉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라면 아주 많습니다.”

난 생업이 아닌 취미로 농업을 하는 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두바이 귀족 압둘라 사마도 취미로 샐러드를 재배하고 있었다.

두바이에서는 귀족들이나 하는 취미겠지만, 독일에서는 귀족이 아니라도 취미로 농사를 짓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도 샐러드 컨테이너에 호감을 보일 거로 생각했다.

“그분들에게 샐러드 컨테이너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요?”

리틀 한스는 샐러드 컨테이너란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제가 만든 재배 시설을 보여 드려도 될까요?”

그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북을 펼쳐 샐러드 컨테이너와 관련한 이미지를 클릭했다.

리틀 한스는 눈을 크게 뜨고 샐러드 컨테이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샐러드를 재배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도 있습니다.”

“컨테이너에서 샐러드를 재배하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사계절 내내 키울 수 있죠.”

“저도 하나 갖고 싶네요.”

리틀 한스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렇다. 이런 반응을 원했다.

“제가 갖고 싶어질 정도면 다른 사람들도 분명 관심을 보일 겁니다.”

그는 샐러드 컨테이너의 이미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이 샐러드 컨테이너에 관심 있어 할 만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을 수 있을까요?”

“그 정도 일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연락을 한번 취해 보겠습니다.”

유쾌한 저녁 자리가 이어졌다.

레베카 여사가 준비한 저녁 식탁 앞에 앉았다.

소시지와 치즈, 빵이 메인 요리다. 으깬 감자와 신선한 샐러드도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맥주도 빠질 수 없었다.

“제가 직접 만든 소시지랍니다.”

레베가 여사가 접시에 담긴 소시지를 보며 말했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는 중에 리틀 한스는 뜬금없이 독일식 유머를 선보였다.

“전화로 세운 건물을 뭐라고 부르는지 압니까?”

그의 말에 레베카 여사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녀에게는 익숙한 유머 같았다.

난 리틀 한스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전화국 아닌가요?”

“아쉽지만 틀렸습니다, 콜로세움입니다.”

정답을 듣자 레베카 여사가 박장대소했다.

역시 독일인다운 썰렁한 유머다.

독일인의 유머 코드는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 부장님 개그랑 비슷한 것 같다.

그 생각을 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조금 뒤, 리틀 한스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주무시죠?”

난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 * *

다음 날, 리틀 한스와 함께 움직였다.

그는 나를 위해 사람들을 모았다.

수십 명의 독일인이 강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우선 여러분들과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반갑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에서 전시할 샐러드 컨테이너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앞자리에 리틀 한스가 앉아 있었다.

든든한 지원이 날 지키고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사용하면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작물을 재배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스크린에 준비한 화면을 띄웠다.

남극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영상이 가장 먼저 나왔다.

방송에도 나왔던 내용이었다.

남극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영상이 나오자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두바이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이미지도 나왔다.

두바이 귀족 압둘라 사마의 집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마지막으로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샐러드 컨테이너의 환경을 제어하는 장면이 보이자, 난 화면을 보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샐러드 컨테이너의 모든 환경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조종할 수 있습니다. 내부에 카메라를 장착해 내부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에 대한 소개를 마치자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단순한 호의가 아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관심을 보였다.

그 뒤 질문이 이어졌다.

첫 번째 질문자는 중년의 여자였다.

“정말 컨테이너를 이용해서 사계절 내내 샐러드를 먹을 수 있는 건가요?”

“관리만 잘한다면 사계절 내내 신선한 샐러드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녀의 뒤에 있던 젊은 청년도 물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코가 인상적인 남자다.

“컨테이너의 크기는 40피트만 있는 건가요?”

“10피트 규격의 소형 컨테이너도 박람회 때 소개할 예정입니다.”

가장 끝에 앉아 있던 백발의 남자도 손을 들었다.

“애플리케이션으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관리하는 모습을 박람회에서 볼 수 있나요?”

“네, 박람회 때는 샐러드 컨테이너의 관리자가 돼서 내부 환경을 조정해 볼 수 있습니다. 암스테르담 박람회에 참석하신다면 이 관리자 기능을 테스트해 보실 수 있습니다. 많이들 참석해 주시길 바랍니다.”

“직접 보고 싶군요!”

“꼭 가 보겠습니다.”

모든 이들이 한목소리로 답했다.

그 뒤로도 많은 질문이 쏟아졌고, 난 사람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했다.

소개가 끝나고 강의실을 나올 때다.

백발의 중년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애플리케이션으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관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질문했던 이다.

“루카스 베르너라고 합니다. 한국의 샐러드 컨테이너 기술력에 감탄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독일 사람들의 기술력도 뛰어나죠.”

“독일 사람들이라고 모든 부분에 기술이 다 좋을 순 없죠. 첨단 농업만큼은 김덕명 씨를 쫓아가기 힘들 겁니다. 이번 암스테르담 박람회에도 참석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박람회에서 꼭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시간이 된다면 제 사무실에 방문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가 명함을 꺼내며 말했다.

‘도이치 컴퍼니, 마케팅 이사 루카스 베르너.’

도이치 컴퍼니는 독일 최대 유통 기업이다.

도이치 컴퍼니의 마케팅 이사가 취미로 양봉을 배우고 있었다.

그가 샐러드 컨테이너에 관심을 보이다니, 재미있는 인연이 생길 것 같았다.

난 그의 명함을 받고 말했다.

“암스테르담 박람회가 끝나고 방문하겠습니다.”

“좋습니다.”

* * *

그 날 저녁, 난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리틀 한스 부부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부부와 함께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스테이크를 잘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여긴 아주 비싼 곳입니다.”

리틀 한스가 웃으며 말했다.

“제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우린 음식을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소개한 일이 화제에 올랐다.

리틀 한스가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모두들 암스테르담 박람회에 참석할 기세였죠.”

레베카 여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저도 암스테르담 박람회에 갈 생각이에요.”

“당신 혼자?”

리틀 한스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당연히 남편하고 같이 가야죠.”

그녀의 말에 리틀 한스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리틀 한스 내외뿐만 아니라 박람회 참석을 약속한 사람들이 많았다.

사전에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싶었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좋았다.

역시 유럽에서도 통할 물건이었다.

도이치 컴퍼니의 마케팅 이사도 샐러드 컨테이너에 관심을 보였다.

난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리틀 한스에게 물었다.

“루카스 베르너씨는 어떤 분인가요?”

“성실한 사람이고, 대단한 사업가죠.”

리틀 한스는 주저 없이 답했다.

평소와 달리 그의 눈빛이 진지했다.

더 물을 필요가 없었다.

후식을 먹으면서 부부에게 말했다.

“오늘은 호텔에서 머물 예정입니다. 오늘도 신세를 질 순 없으니까요.”

“호텔이 불편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리틀 한스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 *

리틀 한스의 도움으로 다른 몇몇 지역에서도 샐러드 컨테이너를 소개할 수 있었다. 반응이 아주 좋았다.

독일에서의 마지막 날 백민석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박람회에 참여하는 업체들이 속속 모습을 보인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마지막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플랜트 팩토리 사람들도 왔어. 그런데 전해리 씨는 보이지 않았고.”

전해리는 플랜트 팩토리의 수석 연구원이자 나에게 민요한을 소개한 사람이다.

플랜트 팩토리의 대표 마크 레스터가 총애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가 이번 박람회에 오지 않았다는 게 흥미로웠다.

난 당장 전화기를 들었다.

“오랜만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반가워요, 덕명 씨.”

전해리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또, 샌프란시스코에 오셨나요?”

“유감스럽게도 샌프란시스코는 아닙니다.”

“그럼 한국?”

“아니요, 지금은 독일에 있습니다. 내일이면 암스테르담으로 떠납니다.”

암스테르담이란 말에 전해리의 숨소리가 커졌다.

“혹시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 일인가요?”

“네, 이번엔 방문자가 아니라 참여 업체로 나가게 됐습니다.”

“축하드려요.”

“플랜트 팩토리도 참여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겠죠? 놀라셨겠지만, 전 이제 플랜트 팩토리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가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전해리는 플랜트 팩토리를 퇴사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플랜트 팩토리도 우리와 같은 콘셉트의 샐러드 컨테이너로 박람회에 참가하기 때문이다.

“플랜트 팩토리의 샐러드 컨테이너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요?”

샐러드 컨테이너 vs 샐러드 컨테이너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 전시장에서 어차피 볼 물건이지만, 사전에 궁금한 게 있었다.

전해리는 플랜트 팩토리가 선보일 샐러드 컨테이너에 대해서 간단히 말해 주었다.

플랜트 팩토리의 샐러드 컨테이너는, 짐작했던 것처럼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 컨테이너와 거의 흡사했다.

심지어 재배하는 작물까지도 같았다. 그들이 만든 샐러드 컨테이너도 버터헤드와 카이피라를 재배한다.

그럴 만도 했다. 플랜트 팩토리의 샐러드 컨테이너를 디자인한 사람이 민요한이기 때문이다.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 컨테이너도 민요한이 디자인했으니, 두 회사의 샐러드 컨테이너를 탄생시킨 사람이 동일 인물인 거다.

플랜트 팩토리가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선보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샐러드 컨테이너 제어 방식이 가장 궁금했다.

“플랜트 팩토리의 샐러드 컨테이너는 어떻게 작동시키나요?”

“작동은 내부에 있는 계기판을 통해서 해요.”

“계기판 말고 다른 방식은 사용하지 않나요?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는 방식이라든가?”

“내부 계기판 말고 다른 방식은 없는 거로 알고 있어요.”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두 회사의 샐러드 컨테이너는 내부 시설도 유사하고 재배하는 작물까지 같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쌍둥이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 컨테이너는 플랜트 팩토리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술적 우위에 있었다.

애플리케이션으로 샐러드 컨테이너의 내부를 조종한다는 점이다.

난 스마트폰이 등장하자마자 백민석에게 애플리케이션 개발을 맡겼다. 앞으로 모든 기계가 스마트폰과 하나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암스테르담 박람회에서 플랜트 팩토리를 가볍게 따돌릴 비장의 무기였다.

“덕명 씨가 만든 샐러드 컨테이너는 애플리케이션으로도 제어를 할 수 있나요?”

“네. 애플리케이션으로 제어할 수 있습니다.”

“대단하네요! 암스테르담 박람회에서 마크가 진땀을 흘리겠어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해리 씨는 왜 플랜트 팩토리를 그만뒀나요?”

“플랜트 팩토리와 맞지 않다는 걸 알게 됐어요. 대표도 마음에 안 들었고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나도 마크 레스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리산 농부들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참고할게요.”

* * *

다음 날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백민석과 박태호가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백민석이 나에게 물었다.

“독일에서는 어땠어? 리틀 한스는 잘 만났고?”

“리틀 한스 덕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많은 사람에게 소개할 수 있었어. 박람회에 오겠다는 사람들도 많았고.”

“좋은 소식이네.”

백민석이 웃으며 말했다.

난 박태호에게 홍보 책자의 내용을 변경했는지 물었다.

그는 책상에 놓인 홍보 책자를 나에게 건넸다.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난 수정·보완한 홍보 책자를 확인했다. 개인용 샐러드 컨테이너 부분이 추가돼 있었다.

레이아웃과 디자인도 마음에 들었다.

“애플리케이션 작업도 끝났어.”

백민석이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독일에 있는 동안, 그들도 남은 작업을 모두 끝냈다.

마지막으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점검했다.

샐러드 컨테이너 안에서 샐러드가 잘 자라고 있었다.

암스테르담에 일찍 와서 작업한 보람이 있었다.

“이제 내일모레면 박람회가 열리네. 기대된다!”

백민석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대표님, 이 작물은 뭔가요? 버터헤드와 카이피라는 아닌 것 같은데……?”

박태호가 푸른 잎이 돋아난 작물을 보며 물었다.

“그건 박람회 때 쓸 비장의 무기에요.”

“비장의 무기요?”

새싹 인삼이다. 농부들을 돕는 방송을 할 때 샐러드 컨테이너에서 처음 시도했던 작물이기도 했다.

암스테르담 박람회를 준비하며 작물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버터헤드와 카이피라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새싹 인삼을 추가했다.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 사람들도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인삼은 재배 기간이 길지만, 새싹 인삼은 짧은 시간에도 재배할 수 있었다.

또, 인삼은 유럽 사람들에게 아시아의 명약으로 알려져 있었다.

플랜트 팩토리와의 차별점이 하나 더 늘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 * *

드디어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가 열리는 날이다.

난 배정 받은 부스에서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스터 김, 여기서 또 만나게 됐네요.”

마크 레스터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인사했다.

하얀 와이셔츠를 입어서 그런지 얼굴이 유독 하얗게 보였다.

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곳에서 보니 더 반갑네요.”

진심으로 반가웠다. 놈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 절호의 찬스였다.

“부스가 맞은편이라서 놀랐습니다. 게다가 박람회에서 선보일 물건도 비슷한 것 같더군요?”

마크 레스터는 우리 샐러드 컨테이너를 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플랜트 팩토리와 지리산 농부들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장소 배치까지 환상적이다.

플랜트 팩토리가 무너지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난 부스로 돌아가며 마크 레스터에게 말했다.

“행운을 빕니다.”

마크 레스터는 가볍게 손을 들었다.

거만한 태도다. 과연 이 박람회가 끝날 즈음에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이제 곧 고개도 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 부스로 돌아왔을 때 백민석이 물었다.

“저 남자, 플랜트 팩토리 대표 맞지?”

백민석도 마크 레스터를 본 적이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백민석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더러운 놈,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미네.”

그는 플랜트 팩토리가 야비한 방식으로 우리 기술을 빼내려고 한 일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놈하고 무슨 이야기 한 거야?”

“오늘이 플랜트 팩토리의 제삿날이 될 거라고.”

조용히 웃으며 말했더니, 백민석은 큰 웃음을 터트렸다.

박람회에 참여한 모든 업체가 준비를 끝냈다.

유럽의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박람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시작부터 반응이 좋았다.

지리산 농부들의 홍보 전략 덕분이다.

우리는 부스 앞에 커다란 화면을 설치했다.

화면에서 영상들이 나오고 있었다.

남극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했던 영상 편집본이다.

홍보 영상이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고 있었다.

펭귄이 나오는 장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아이도 있었다.

난 푸른 눈의 꼬마에게 사탕을 하나 건넸다.

사탕을 받는 아이가 백발의 남자에게 달려갔다.

그 남자는 내가 독일에서 만났던 남자였다.

도이치 컴퍼니의 마케팅 이사 루카스 베르너다.

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가족들과 함께 왔습니다.”

“약속대로 오셨군요.”

“독일인들은 약속을 칼 같이 지키죠.”

루카스 베르너가 온 뒤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 부스를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내가 샐러드 컨테이너를 소개한 독일인들이다.

리틀 한스 부부의 모습도 보였다.

우리 쪽 부스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와 애플리케이션을 연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루카스 베르너가 나에게 물었다.

난 사람들에게 샐러드 컨테이너와 애플리케이션을 연동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아직 2009년 말이다.

스마트폰이 사람들의 일상으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점이기도 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있었다.

백민석과 박태호가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할 수 있게 도왔다.

“다들 설치가 끝났나요?”

“네, 끝났습니다.”

“이제 관리자 버튼을 눌러 보세요.”

나도 애플리케이션의 관리자 버튼을 눌렀다.

샐러드 컨테이너의 관리자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빛 8,500lux]

[온도 16도]

[상대습도 범위 70%]

[이산화탄소 농도 380ppm]

[물의 흐름 정상]

[영양액 정상]

사람들은 놀랍고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전화기로 샐러드 컨테이너의 내부 환경을 전부 제어할 수 있네요? 게다가 내부의 모습도 볼 수 있고요!”

루카스 베르너는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실제로 보니까 정말 탐나게 생긴 물건이네요. 특히 작은 컨테이너가 좋아 보입니다. 정원에 놓고 쓰기 좋은 크기예요.”

리틀 한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부인 레베카도 고개를 끄덕였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애플리케이션으로 제어하는 기능만큼이나 반응이 좋았던 것은 작은 크기의 샐러드 컨테이너였다.

10피트 규격의 컨테이너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정원에 놓고 사용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많이 몰린 곳은 호기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 부스는 사람들이 줄지 않았다.

나와 동료들은 쉴 틈이 없었다.

유럽 사람들은 새싹 인삼에도 관심을 보였다.

새싹 인삼을 보고는 매직 샐러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설명과 동시에 계약도 이뤄지고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의 구매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첫날부터 폭발적인 반응이다.

반면 플랜트 팩토리의 부스는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방문자보다 직원들이 더 많아 보였다.

난 사람들에게 샐러드 컨테이너를 소개하며 마크 레스터의 얼굴을 살폈다.

하얀 와이셔츠 때문인지 마크 레스터의 얼굴이 더 창백해 보였다.

그는 플랜트 팩토리 직원에게 괜한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그때였다.

반가운 손님이 눈앞에 등장했다.

두바이 왕자 모하마드 살라다. 오늘은 두바이에서 입던 전통 의상이 아니라, 멋진 수트를 차려입고 나타났다.

그가 활짝 웃으며 사람들을 소개했다.

“제가 손님들을 좀 모시고 왔습니다.”

리틀 한스처럼 그도 여러 사람과 함께 방문했다.

두바이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대부분 서양 사람들이었다.

차림새만 봐도 일반인과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모두 높은 신분의 사람들 같았다.

모하마드는 함께 온 이들에게 홍보 영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덕명 씨와는 남극에서 만났죠. 이제 덕명 씨가 만든 샐러드 컨테이너를 구경해 볼까요?”

모하마드는 나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의 응원에 힘이 솟았다.

난 신나게 샐러드 컨테이너를 소개했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샐러드 컨테이너와 연동하는 일까지 마쳤을 때다.

금발 머리의 여자가 손을 들었다.

“궁금한 점이 있나요?”

“맞은편 부스에서도 샐러드 컨테이너를 소개하는 거 같던데, 맞나요?”

“네, 플랜트 팩토리라는 회사입니다. 그곳에서도 우리처럼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들었습니다.”

“지리산 농부의 샐러드 컨테이너와 차이점이 뭔가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전 플랜트 팩토리의 직원이 아니라서 자세히 설명해 드릴 수가 없네요.”

“그럼 직접 가서 알아봐도 될까요?”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정말 플랜트 팩토리가 있는 부스로 향했다.

모하마드는 난감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공주님이라서 그래요. 덕명 씨가 이해해 주세요.”

모하마드처럼 왕족 출신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분은 어느 나라 분이신가요?”

“스웨덴 왕가의 공주님이죠.”

모하마드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가 손으로 플랜트 팩토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있는 샐러드 컨테이너는 못 쓰겠던데요?”

“못 쓰겠다고요?”

난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애플리케이션 연동도 안 되고, 사이즈도 하나뿐이었어요. 좀 구식 같더라고요.”

그녀는 플랜트 팩토리 사람들도 들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말했다.

스웨덴 공주님은 남의 기분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난 마크 레스터의 얼굴부터 살폈다.

땀이 났는지 하얀 와이셔츠가 후줄근하게 변해 있었다.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곧 쓰러질 사람 같았다.

스웨덴 공주님이 나에게 말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 컨테이너가 마음에 들어요. 10개 주문할게요!”

유럽에서의 성과

스웨덴 공주 로타 융베리는 샐러드 컨테이너를 10개나 주문했다.

그녀가 샐러드 컨테이너를 구매한 목적이 독특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노숙자들을 위해서 쓰겠다고 말했다.

처음엔 귀를 의심했다.

스웨덴은 북유럽의 유명한 복지국가이기 때문이다. 노숙자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암스테르담 박람회장에서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웨덴에 일정한 주거지가 없는 사람이 대략 34,000명 정도 있어요. 샐러드 컨테이너가 그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인구 천만의 스웨덴에서 노숙자가 34,000명이면 제법 많은 숫자다.

스웨덴 노숙자의 대부분은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집시들이었다.

난 스웨덴 공주님이 노숙자들의 삶에 관심이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사회 공헌 사업이 제 일이에요. 전 그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죠.”

그녀는 스웨덴 공주이자, 융베리 재단이라는 비영리 법인을 운영하고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 중 하나는 제가 직접 사용해 볼 생각에요. 새싹 인삼은 꼭 재배해 보고 싶어요.”

로타 융베리 공주가 기대에 찬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치고는 소탈해 보이는 사람이다.

* * *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는 3일에 걸쳐 진행됐다.

지리산 농부들의 부스는 매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유럽의 많은 나라 사람들이 지리산 농부들이 만든 재배 시설에 관심을 보였다.

숙소로 돌아오면 그대로 뻗어서 잠이 들 정도였다. 동료들은 힘들다는 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불굴의 투지로 버티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박람회를 찾은 사람들이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과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냈다.

칭찬을 들을 때마다 힘이 솟았다.

샐러드 컨테이너의 계약 건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마지막 날까지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플랜트 팩토리는 우리와 정반대 모습이다. 박람회 마지막 날은 그나마 찾던 방문객도 보이지 않았다.

플랜트 팩토리의 직원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마크 레스터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그는 초상집에 온 사람 같았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검은색 옷까지 입으니 저승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백민석이 플랜트 팩토리 부스를 보며 말했다.

“플랜트 팩토리 부스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고개를 돌려 플랜트 팩토리 부스 쪽을 보았더니, 마크 레스터가 누군가와 말다툼을 벌이는 듯했다.

암스테르담 박람회 운영팀의 데이비 클라센이 마크 레스터에게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우리 부스까지 그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박람회 마지막 날 부스를 바꿔 달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마크 레스터는 반쯤 미쳐 있었다. 말도 안 되는 괴변으로 자리를 바꿀 것을 요구했다.

결국, 암스테르담 박람회 운영팀의 데이비 클라센은 경비를 불렀다.

나와 동료들은 마크 레스터가 박람회장에서 쫓겨나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것참 고소하다.”

백민석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남 일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일이나 하자. 아직 박람회 안 끝났어.”

“알겠습니다, 김덕명 대표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지리산 농부들은 암스테르담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암스테르담 박람회에서 판 샐러드 컨테이너만 150개가 넘었다.

한국 돈으로 100억이 넘는 액수였다.

* * *

박람회 정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 같이 맥주잔을 들고 축배를 들었다.

“모두 고생했어.”

“고생이라니, 내 생에 최고의 순간이었어. 특히 플랜트 팩토리의 대표가 쫓겨날 때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고.”

백민석이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저도 백 팀장님의 말씀에 동의해요. 정말 즐거웠어요. 일하는 보람이 느껴졌어요.”

박태호도 거들었다.

“너도 그렇지?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백민석이 박태호와 맥주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한참을 웃고 떠들던 중 백민석이 나에게 물었다.

“그럼 이제 하동으로 돌아가는 건가?”

“독일에 잠시 들러야 할 거 같아.”

“리틀 한스에게 볼 일이 남았나?”

백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팔았으니 유럽에도 사무실이 있어야지.”

“하긴, 그렇네. 두바이처럼 유럽에도 사무실이 있어야지.”

도이치 컴퍼니의 마케팅 이사 루카스 베르너를 만날 생각이었다.

도이치 컴퍼니는 독일 최대 유통망을 가진 기업이다.

지리산 농부들과 도이치 컴퍼니가 손을 잡으면 유럽에서 안정적으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공급할 수 있었다.

“태호 씨는 유럽에 남아야 할 것 같아요.”

“이장우 팀장님이 서운해하겠어요. 두바이에서 절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박태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 *

다음 날 동료들과 함께 독일로 떠났다.

가벼운 마음에 기차를 타고 독일로 향했다.

백민석은 기차를 탄다는 말에 만세를 외쳤다.

그는 유럽에서 기차를 타 보는 게 꿈이었다.

기차를 타니 여행을 떠나는 느낌이 들었다.

네덜란드 국경을 지날 때, 박태호는 가방에서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꺼냈다.

“박태호, 알고 보니 옛날 사람이었네!”

백민석이 삶은 달걀을 받으며 말했다.

“저희 어머니가 기차에서는 이걸 먹어야 한다고 하셔서.”

박태호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말씀이 맞아. 기차에서는 간식 먹는 재미가 쏠쏠하지.”

박람회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난 뒤라 그런지 여유가 느껴졌다.

베를린 역까지 편안하게 도착했다.

호텔을 잡고 루카스 베르너에게 연락했다.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가 끝난 후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독일 사람만큼이나 약속을 잘 지키시는군요. 안 그래도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카스 베르너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난 전화를 끊고 백민석에게 말했다.

“오늘 도이치 컴퍼니 사람을 만나기로 했어.”

“그럼 우리도 같이 가야 하나?”

“태호 씨만 데려가려고. 민석이 넌 쉬고 있어.”

“대표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백민석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태호 씨는 정장으로 갈아입으세요.”

박람회 때는 캐주얼한 차림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이치 컴퍼니와의 미팅은 격식을 갖춰야 했다.

독일은 독일만의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나와 박태호가 준비를 끝내자 백민석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농부가 아니라 성공한 비즈니스맨 같네!”

약속 장소는 베를린 시내에 있는 도이치 컴퍼니 사옥이다.

도이치 컴퍼니 직원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 안에는 루카스 베르너 말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루카스 베르너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중년 여자다.

얼굴이 낯이 익었다. 코에 난 점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를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 때 우리 부스에 왔었다.

샐러드 컨테이너와 애플리케이션이 연동되는 과정을 자세하게 물었던 게 떠올랐다.

루카스 베르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박람회 성공을 축하드립니다.”

“덕분에 잘 마쳤습니다.”

코에 점이 난 여자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이디 모어라고 합니다. 도이치 컴퍼니의 대표 이사입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박태호까지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도이치 컴퍼니의 대표였다. 예상을 뒤집는 반전이다.

우린 곧장 일 이야기로 들어갔다.

“박람회 때 샐러드 컨테이너를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도이치 컴퍼니는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 컨테이너는 유럽 시장에서 통할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평가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곧 유럽 시장에 진출할 계획입니다.”

“유럽 시장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미국 회사들도 어려워하는 점이죠.”

루카스 베르너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유럽에 법인을 세우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관세며 통관절차가 까다로웠다.

관세조차 받지 않는 두바이와는 정반대이다. 유럽 시장을 공략하겠다고 말했을 때, 박태호를 두바이로 보낸 이유기도 했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유럽에 법인을 세울 마음은 없었다.

“도이치 컴퍼니는 독일 최대의 유통망을 가졌습니다.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많은 나라에도 현지 법인을 가지고 있죠. 지리산 농부들이 도이치 컴퍼니와 손잡는다면, 손쉽게 유럽 시장을 공략할 수 있을 겁니다.”

루카스 베르너가 본심을 드러냈다.

박람회 기간에도 몇몇 회사들의 구애가 있었다. 개중엔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 기업도 포함돼 있었다.

다만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 컨테이너를 독점하려고만 했다.

그저 물건만 대 주길 바란 것이다. 합작 회사를 만들고 우리 기술진을 유럽으로 들이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도이치 컴퍼니에서도 확인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우선 제안에 감사드립니다. 도이치 컴퍼니와 손잡고 일할 수 있다면 무한한 영광일 겁니다.”

도이치 컴퍼니의 대표 하이디 모어는 흡족한 듯 미소를 보였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요?”

하이디 모어 대표가 물었다. 루카스 베르너는 내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샐러드 컨테이너는 첨단 기술이 들어간 재배 시설입니다. 재배부터 기계 관리까지 전문가들이 필요합니다.”

“도이치 컴퍼니와 함께 합작 회사를 만들자는 말씀이군요?”

하이디 모어는 머리가 빨리 돌아갔다.

재배와 기술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말만 듣고 핵심을 파악했다.

“네, 말씀처럼 지리산 농부들과 도이치 컴퍼니가 합작 회사를 만들기를 바랍니다. 전문가들은 모두 한국에서 데려올 생각입니다.”

합작 회사를 만들더라도 인력들은 현지 노동자를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비자 문제며 모든 걸 외국인에게 의존하는 상황이 싫은 것이다.

“좋습니다. 김덕명 대표님의 말씀대로 하죠. 도이치 컴퍼니는 한국에서 온 전문가들이 편안하게 작업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겠습니다.”

하이디 모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서 당황할 정도다.

“대신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하이디 모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녀의 옆자리에 있던 루카스 베르너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얼굴이다.

“말씀하시죠.”

“샐러드 재배기를 하나 더 만들어 주십시오.”

“어떤 재배기를 말씀하는 건가요?”

“더 작은 재배기입니다.”

“얼마나 작은 재배기를 말씀하시는 거죠?”

“냉장고 크기면 좋을 거 같습니다.”

“집 안에 들어가는 크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가정에서도 누구나 샐러드를 재배할 수 있는 재배기죠. 물론 애플리케이션으로 관리하는 기능도 넣어서요.”

그녀는 샐러드 컨테이너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작은 크기의 재배기라면 남극에서도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

도이치 컴퍼니와 좋은 파트너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좋습니다. 가정에서도 샐러드를 재배할 수 있는 재배기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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