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 (198/205)

약속한 시각에 맞춰 롤스로이스가 도착했다.

차종문 대표와 신상원 건축가도 차에 함께 탔다.

왕궁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홍해의 기적 같았다. 도로 위의 차들이 자동으로 길을 터줬다.

공항에서 올 때도 비슷한 광경이 연출됐다.

호기심에 운전대를 잡고 있는 아자르에게 물었다.

“차들이 알아서 비켜 주네요?”

“번호판 때문이죠.”

“번호판이요?”

“왕족의 번호판이니까요.”

그러고 보니 롤스로이스의 번호판 숫자가 남달랐다.

숫자 2가 전부였다.

“한 자리 숫자는 왕족을 의미합니다. 두 자리는 숫자는 귀족을 뜻하고요. 세 자리는 저 같은 평범한 국민에게 주어지죠.”

“그럼 저 같은 외국인에겐 몇 자리 숫자가 주어지나요?”

“다섯 자리 숫자판이 주어집니다.”

아자르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잠시 말하는 사이 우린 두바이 왕궁에 도착했다.

화려하면서도 간결한 건축양식의 왕궁이다.

정문을 지키는 군인들을 뚫고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모하마드가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남극에서 봤을 때와 전혀 다른 분위기다. 아자르처럼 흰색의 발목까지 오는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지만, 왕족의 품위가 느껴졌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난 모하마드와 함께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 주단이 길게 깔려 있었다.

아랍에서 붉은색은 단결과 권위를 의미한다.

왕궁 내부는 금으로 장식해 화려함을 뽐내고 있었다.

“식사하면서 이야기 나누죠.”

모하마드의 말에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두바이 전통 음식으로 준비했습니다.”

테이블 위에 음식이 가득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병아리콩과 치즈 그리고 쿠브즈라고 불리는 아랍 정통 빵 정도였다.

모하마드는 저녁 자리에선 일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두바이에서 최근 화제가 되고 분수 쇼 등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야 수경 재배 시설 이야기가 나왔다.

난 준비한 설계도를 꺼냈다.

모하마드는 흡족한 얼굴로 설계도를 보았다.

“특허와 관련한 내용은 이미 검토했습니다. 설계도를 보니 확실히 이해가 가네요. 이제 재배 시설의 외부 건축물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시설의 외부는 직접 만나 결정하기로 했다.

“외부 시설을 말하기 전에 돈 문제부터 말씀드리는 게 순서겠죠?”

“돈 문제요?”

“수경 재배 시설 비용에 대해서만 말했으니까요. 재배 시설의 외형 건축물에 대해서는 금액을 말씀드리지 않았죠.”

“5,000만 달러는 수경 재배 시설 자체만 말했던 건가요?”

모하마드 살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5,000만 달러는 원화로 600억이다.

그것이 당연히 전체 비용일 것이라 생각했다.

방송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발생했다.

행운의 비

모하마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재배 시설의 외부 건축 비용으로도 5,000만 달러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차종문 대표는 목에 뭐가 걸렸는지 캑캑거렸다.

상상을 뛰어넘는 액수에 놀란 것 같았다.

“액수가 적어서 말씀이 없는 건가요?”

모하마드가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전 지금까지 재배 시설과 건축 비용까지 합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역시 덕명 씨는 솔직하시네요. 항상 그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제가 건축 비용을 따로 생각했다는 건, 그만큼 건축도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하동 재배 시설은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외관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종문 대표와도 그 점에 대해서 의견을 조율했다. 두바이에 지을 재배 시설도 하동과 비슷한 디자인을 생각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모하마드 살라는 외형까지 몹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재배 규모를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나요?”

“하루 생산량이 100톤 정도면 충분할 거 같네요.”

하동에 지을 시설은 하루 샐러드 생산량이 30톤 정도다. 100톤이면 하동의 3배가 조금 넘는 규모다.

100톤이면 두바이 인구의 30%는 매일 신선한 샐러드를 먹을 수 있다.

적은 숫자가 아니다.

“두바이는 농산물의 9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매년 수입하는 규모도 40억 달러에 육박합니다. 1억 달러를 들여서 농산물을 자력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두바이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죠. 두바이 국민도 이번 일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겁니다.”

모하마드가 첨단 농업에 관심을 보인 결정적인 이유 같았다.

두바이 왕이 무역과 관광에 돈을 쏟아부었다면, 왕자는 나라의 농업을 걱정하고 있었다.

“빠른 시간 안에 건축 디자인을 받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모하마드 살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와 식사 전 차종문과 신상원을 소개했다. 그들이 재배 시설의 건축을 담당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신상원이 유명 건축가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 문제는 당장 답변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원래대로라면 한국으로 돌아가서 할 일이다.

모하마드 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좀 급했나 봅니다. 아무래도 그 부분은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서…….”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모하마드도 이 부분에선 말을 흐렸다.

두바이 왕자가 처음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혼자 결정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아버지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요?”

“왕실의 주도하에 짓는 모든 건물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아버지는 건물의 외관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모하마드 살라의 아버지, 이스마일 살라다.

두바이의 왕이자, 대외적으로는 두바이 총리이며 통치자이다.

두바이 주요 건물이 범상치 않은 건, 그의 까다로운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두바이를 세계 최고의 관광지로 만들고 싶은 통치자의 열망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호합니다. 단순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저와는 다르죠.”

모하마드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두바이 왕은 그가 유일하게 극복할 수 없는 존재다.

“내일까지 답변을 드리면 어떨까요?”

“좋습니다. 만약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최대한 돕겠습니다.”

난 왕궁을 떠나기 전에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한국에서 가져온 선물입니다.”

모하마드는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 곶감이 있었다.

“이게 뭔가요?”

“곶감이라고 합니다. 감으로 만든 전통 식품이죠.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두바이를 포함해 아랍에는 감나무가 없다.

모하마드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곶감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대추야자와 비슷하네요?”

대추야자는 아랍에서만 나는 독특한 과일이다.

오아시스 옆에 자라는 나무는 모두 대추야자 나무다.

대추야자 나무는 특이하게도 사막에서만 자라는데, 아랍 사람들은 곶감처럼 말려서 먹기도 한다.

모하마드는 곶감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대추야자보다 맛이 더 좋네요!”

그는 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 * *

왕궁에서 나와 호텔로 향했다.

아자르가 돌아가고 일행만 남았다.

난 차종문 대표에게 말했다.

“잠시 회의 좀 해도 될까요?”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같이 호텔로 들어가시죠.”

우리가 묵는 객실은 거실이 딸린 스위트 룸이다. 4명이 회의할 공간도 있었다.

객실 안에 있는 미니바도 제법 훌륭했다.

이장우가 냉장고를 열며 말했다.

“대표님, 미니바 좀 이용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이장우는 미니바에서 캔 맥주를 꺼냈다.

맥주는 외국인 손님을 위한 배려였다.

아랍의 다른 여러 나라들은 율법대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판매조차 금지한 나라가 많다.

두바이는 다른 아랍 나라들과 다르게 술을 판매하는 매장도 있었다.

기업인과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그들만의 전략이다.

이장우가 사람들에게 시원한 캔 맥주를 돌렸다.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하시죠?”

“안 그래도 갈증이 나서 혼났습니다.”

차종문은 반가운 얼굴로 캔 맥주를 쥐었다.

신상원도 캔 맥주를 들고 미소 지었다.

“성공을 기원하며 건배하죠.”

차종문이 캔 맥주를 들고 외쳤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두바이에서 마시는 맥주 맛은 유독 좋았다.

왕궁에서 있었던 일들이 술안주로 나왔다.

차종문의 입에선 칭찬이 마르지 않았다.

“김덕명 씨가 모하마드를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습니다. 제가 괜한 우려를 했던 것 같습니다.”

“대표님이 주신 팁을 유용하게 활용한 것뿐이죠.”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에 들어갔다.

신상원 건축가는 차종문과 다르게 조용히 맥주만을 마시고 있었다.

차종문이 그에게 말했다.

“여기서 건축 디자인해 보면 어떨까?”

“두바이에서 디자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뿔테 안경 속에서는 고민하는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현지에서 디자인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

차종문은 아이 달래듯이 신상원을 설득했다.

신상원은 그의 친구이자 유명 건축가다. 건설사와 건축가는 주종 관계가 아니다. 서로 공생하는 관계다.

차종문 대표가 그를 애타게 설득하는 이유다.

신상원 건축가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했다.

난 맥주 캔을 바닥에 내려놓고 신상원에게 말했다.

“이번 일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요?”

“다른 관점이요?”

신상원이 뿔테 안경테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작품을 만드는 겁니다.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죠.”

“재배 시설이 아니라 작품이라고요?”

작품이란 말에 신상원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두바이는 평범한 건물이 없습니다. 두바이 왕의 야심 때문이죠. 그는 두바이를 세계 최고의 관광 도시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수경 재배 시설도 작품으로 만들어야 할 겁니다. 만약 평범한 디자인이라면 어쩌면 이번 프로젝트가 허무하게 끝날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말에 차종문은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도 동의한다는 뜻이다.

모하마드는 지리산 농부들에게 재배 시설을 맡겼다. 수직 재배 기술은 우리만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외관이다.

까다로운 두바이 왕을 만족시켜야 한다.

두바이 왕은, 왕자인 모하마드도 쉽게 넘을 수 없는 산이다.

“그럼 한번 해 보죠.”

신상원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결심이 선 얼굴이다.

차종문은 신상원을 끌어안고 싱글벙글 웃었다.

* * *

다음날, 모하마드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모하마드는 목소리가 밝았다. 그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뭐든 요청하라고 말했다.

지금은 사무 공간만 있으며 충분했다.

“사무 공간이라면 얼마든지 협조하겠습니다. 기간은 얼마를 생각하고 있나요?”

“대략 일주일 정도 예상합니다.”

세부적인 디자인을 하는 일은 아니기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이곳에서 할 일은 건물의 특징과 콘셉트를 구상하는 작업이다.

바다에 세운 7성급 호텔도 왕에게 돛 모양을 디자인을 보여 주고 난 뒤 작업에 들어갔다.

그만큼 아이디어가 중요했다.

신상원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디자인할 시간을 더 짧게 잡았다.

제한 시간이 짧을수록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말했다.

모하마드는 다운타운에 우리가 쓸 사무 공간을 제공했다.

신상원은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나와 이장우에게 말했다.

“이번 일은 덕명 씨와 장우 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단순히 아름다운 디자인을 뽑아내는 작업이 아니다.

공학적인 측면을 고려해야만 했다.

그날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했다.

신상원에게 수경 재배 시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난 수경 재배의 전반적인 부분을 그에게 전했고, 이장우는 공학적인 부분을 맡았다.

차종문은 디자인을 도울 시간이 없었다. 그는 우리가 두바이에 지을 시설에 집중할 동안, 하동에 지을 재배 시설을 살펴야 했다.

화상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진행 상황을 주고받았다.

하동에 짓는 재배 시설은 한기탁의 책임하에 진행되고 있었다.

두바이에 온 지도 벌써 사흘이 지났다. 우린 사무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일에 매달렸다.

신상원이 일하는 스타일은 독특했다.

그의 책상은 항상 어질러져 있었다. 디자인한 종이와 메모지 그리고 연필 등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내가 정리를 한 번 하려 했을 때 그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그게 정리가 된 상태니까요.”

“정리된 건지 몰랐습니다.”

“혼란스러워 보일지는 모르지만, 일정한 패턴이 있습니다. 전 그 패턴을 보며 일하는 걸 즐기죠.”

카오스 속에 규칙이 있다.

화가 중에서도 불규칙한 패턴 속에서 자신만의 상징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다.

그도 그런 부류인 듯했다.

신상원은 매일 그림을 그렸다. 처음엔 추상화처럼 불규칙한 선으로 이뤄진 그림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의 말대로 특정한 패턴을 보이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을 이틀 남기고 신상원의 스케치가 나왔다.

“대략 윤곽이 잡혔습니다.”

그는 디자인한 그림을 공개했다.

한눈에 봐도 그럴싸한 디자인이다.

어찌 보면 창고형 매장과 흡사한 구조다.

2층 구조로 천정이 높은 게 특징이다.

가장 독특한 점은 외벽이 투명한 유리라는 것이다.

바깥에서 수경 재배 시설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대단하네요. 수경 재배 시설이 아니라 예술 작품 같아요.”

이장우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차종문은 팔짱을 끼고 말을 아꼈다.

신상원은 차종문에게 물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좀 평이해 보이는 것 같아서.”

이장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종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차종문은 건설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보는 눈만큼은 건축가 못지않았다.

“수경 재배 시설의 특징이 잘 살아났으면 좋겠는데…….”

차종문의 말에 신상원은 턱을 만졌다. 그가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 같은 행동이다.

“며칠 동안 잠도 못잖으니까 오늘은 좀 쉬어.”

차종문이 신상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신상원은 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종문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행운의 비네요.”

“행운의 비요?”

“두바이에서는 비 오는 날이 드물죠.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은 행운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차종문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보니 가슴까지 뻥 뚫리는 기분이다.

비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이미지가 있었다.

재배 시설의 외관을 멋지게 장식할 아이디어다.

두바이 왕뿐만 아니라 현지인까지 찬사를 보낼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빛과 그림자

두바이에는 비가 오는 날은 극히 드물다.

차종문 대표가 비는 모습을 보며 행운의 날이라고 말할 법하다.

실제로 두바이에서 비가 오는 날은 일 년에 5번도 채 안 된다. 행운의 날이라고 불릴만하다.

내리는 비를 보자 재배 시설 외관을 장식할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건물 외관에 비가 내리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다.

비 내리는 벽이다.

수경 재배 시설에서 물이 순환하는 것처럼, 외벽을 타고 내린 물도 순환하는 구조로 만들면 될 것 같았다.

수경 재배 시설의 특징을 보여 주면서 동시에, 비가 내리는 이미지까지 보여 줄 수 있었다.

두바이 사람들에게 ‘비’는 행운의 상징이다.

건물의 외관을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심지어 두바이의 더위까지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난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저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어떤 아이디어죠?”

“비 내리는 벽을 만들면 어떨까요?”

“벽에서 비가 내린다고요?”

신상원 건축가가 놀란 듯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투명한 건물 외벽에서 비처럼 물이 떨어지는 겁니다!”

칠판에 상상한 이미지를 그리며 말했다.

“멋진 아이디어야! 두바이 왕도 반할 거 같아!!”

이장우가 환한 얼굴로 말했다.

신상원 건축가는 내가 그린 이미지를 보며 말했다.

“김덕명 씨는 좋은 눈을 가졌네요.”

“좋은 눈이요?”

“예술은 손이 아니라 눈으로 하는 것이란 말이 있죠.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고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린 건, 그만큼 보는 눈이 있다는 뜻이죠.”

신상원은 차종문에게 고개를 돌렸다.

차종문만이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신상원 건축가의 말에 동의합니다. 김덕명 씨의 발상은 참신하고 훌륭합니다. 김덕명 씨의 생각대로 건물 외벽에 비가 오는 장면을 연출한다면, 건물이 아니라 거대한 작품처럼 보일 겁니다. 그런데 걱정되는 게 있습니다.”

차종문 대표의 얼굴이 경직돼 있었다. 심각한 문제라도 발견한 표정이다.

“어떤 문제인가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수 있습니다.”

“비용 말씀인가요?”

“네, 현실적인 한계랄까요.”

“모하마드가 말한 건축비로도 부족할 것 같으신가요?”

“신상원 건축가가 디자인하는 자체만으로도 비용이 빠듯합니다.”

우린 처음부터 외관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재배 시설을 만드는 데는 외관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바이에서 상황이 변했다. 모하마드의 아버지이자 두바이 왕인 이스마일 살라를 만족시켜야 했다.

비 내리는 외벽을 빼고도 건축비가 상당했다.

“제 아이디어를 실제로 구현한다면 비용이 얼마나 더 들까요?”

“당장 계산기를 두드려서 가격을 말할 순 없지만, 아무리 못해도 2,000만 달러는 들 것 같네요.”

5,000만 달러를 들여 만드는 건물에 2,000만 달러를 더 들여야 한다!

건설사 대표의 고민을 느낄 수 있었다.

“음……. 차 대표님이 저에게 했던 말 기억하시나요?”

“제가 무슨 말을 했죠?”

“두바이 왕족에게 돈은 모래와 같다고.”

차종문 대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두바이 왕을 만나 설득해 보겠습니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겠습니다. 빼지도 더하지도 않고요. 대신 디자인만큼은 최고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제야 차종문 대표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김덕명 씨는 좋은 눈만 가진 게 아니라, 좋은 입까지 가졌네요.”

차종문 대표의 말에 모두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 * *

다음날 신상원은 디자인 작업을 마쳤다.

그는 완성한 디자인을 사람들에게 공개했다.

“김덕명 씨의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디자인입니다.”

신상원 건축가는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그는 내가 생각한 이미지를 건축 디자인으로 완벽하게 구현했다.

그는 건물 정면에 비가 내리는 구조물을 배치했다. 60미터 가까이 되는 초대형 구조물이다. 나머지 면에 구조물을 설치하지 않는 건 건물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모든 면을 유리로 만든 처음의 디자인과 모습이 사뭇 달랐다.

비가 내리는 구조물을 제외하고 다른 면은 태양열 집열판이 부착된 디자인이었다.

“태양열 집열판은 이장우 씨가 낸 아이디어입니다. 두바이의 강렬한 태양을 이용해 에너지를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죠.”

신상원 건축가의 말에 이장우가 미소를 지었다.

“김덕명 씨와 이장우 씨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던 디자인입니다.”

그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차종문 대표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때 이장우가 날 보며 말했다.

“아직 하루가 남았네?”

“그게 무슨 소리야?”

“디자인 작업 끝나고도 여유 시간이 하루가 남았다고~”

그가 어떤 의미로 말을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린 일주일 내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바람이나 쐬러 나갈까?”

“그 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지.”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어?”

“많지. 아주 많다고!”

이장우가 웃으며 답했다.

기분전환이 필요한 순간이다.

차종문 대표와 신상원 건축가도 외출 준비를 했다.

“정말 저희랑 같이 안 가시겠어요?”

“쉴 때라도 편하게 쉬어야죠. 덕명 씨와 장우 씨도 편하게 쉬세요.”

그들은 금빛 백사장에 에메랄드빛의 바다를 자랑하는 해변을 향했다.

우리가 선택한 장소는 두바이 아쿠아리움이다.

이장우가 아쿠아리움이 보고 싶어 했다. 나 역시 아랍 최대 규모의 수족관이 궁금했다.

두바이 아쿠아리움은 쇼핑몰 안에 있었다.

이곳은 한 해 1억 명의 방문자를 자랑하는 대규모 쇼핑몰이다.

쇼핑몰 안에 들어서자 엄청난 규모에 놀랐다.

“쇼핑몰 안에 택시가 있네!”

이장우는 놀란 눈으로 택시를 바라보았다. 골프장에서 사용하는 전기 카트가 택시로 사용되고 있었다.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랍의 부호들 같았다.

전신 베일을 뒤집어쓴 여자와 아이들이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저기 아쿠아리움이다!!”

이장우가 손을 들어 아쿠아리움을 가리켰다.

눈앞에 내부가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수족관이 등장했다.

두바이 아쿠아리움은 세계에서 매우 큰 수족관 중 하나다. 1,000만 리터의 물속에서 3만 3,000여 종의 어류를 볼 수 있다.

“어마어마하네!!!”

이장우는 투명한 수족관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아랍 최고의 수족관답게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했다.

난 수족관을 보며 재배에 쓸 물을 떠올리고 있었다.

수족관을 채우고 있는 건, 페르시아만에서 퍼온 바닷물이다.

두바이 사람들이 먹는 물이기도 했다. 바닷물을, 담수화 작업을 거쳐 식수로 사용하는 것이다.

남극에서 식수를 얻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곳에서 작물을 재배할 때도 담수화한 물을 이용해야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장우가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 시설 생각하고 있었지.”

“일 생각은 잠시 접어 둬. 하루라도 쉬어야지.”

“머릿속에 일 생각이 끊이질 않네.”

“그럴 땐 좋은 방법이 있지.”

“좋은 방법?”

“따라와 봐.”

이장우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쇼핑몰을 나와 택시를 잡았다.

“어딜 가려는 거야?”

“가 보면 알아.”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중식당이다.

“한국식이니까 입에 맞을 거야.”

“한국식이라고?”

정말 사람들이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한국식 중식당이다.

“맛있는 거 먹으면 일 생각도 잠시 놓을 수 있을 거야.”

이장우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사무실에서 작업을 할 땐, 거의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웠다.

가끔 정체불명의 음식을 먹을 때도 있었다.

두바이에서 한국식 중식당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여긴 어떻게 안 거야?”

“검색 좀 했지.”

그때 붉은 유니폼을 입은 여자 종업원이 나타났다.

한국 사람이 아니다. 국적은 알 수 없지만 동남아 사람인 것 같았다.

“주문하시겠어요?”

그녀가 친절한 얼굴로 물었다. 놀라운 건 그녀의 한국어 실력이다.

한국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이장우가 나에게 물었다.

“짜장, 짬뽕?”

“난 짬뽕.”

“우리 대표님은 두바이에서도 짬뽕을 먹는구나.”

“넌 짜장면 먹을 거지?”

“당연히 짜장이지!”

이장우는 메뉴판을 덮고 종업원에게 말했다.

“짜장면, 짬뽕, 그리고 깐풍기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는 돌아서는 종업원을 다시 불렀다.

“저기요!”

“더 주문하시겠습니까?”

“혹시, 군만두 서비스로 주나요?”

“저희는 주문한 것만 드립니다만……?”

“그럼 군만두도 추가로 주문할게요.”

그 장면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어?”

“두바이에서 서비스로 군만두 달라고 하는 게 웃겨서.”

“난 좀 서운하네. 원래 군만두는 서비스로 먹어야 더 맛있는데.”

곧이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짜장면과 짬뽕이 제법 그럴싸했다. 한국에서 먹던 것과 거의 흡사했다.

이장우가 짜장면을 폭풍 흡입했다.

“천천히 먹어. 그러다 체하겠다.”

“이 맛이 그리웠어.”

그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깐풍기에 군만두까지 배부르게 밥을 먹었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포만감이다.

이장우의 말처럼 일 생각도 잠시 사라졌다.

후식으로 민트차가 나왔다.

“이제야 살 것 같네. 어때, 먹을 땐 일 생각도 안 났지?”

“네 말이 맞았어.”

“거봐. 내 말이 맞지.”

난 민트차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두바이는 한국만큼이나 공사를 많이 하는 것 같아.”

이장우가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방에서 공사가 진행 중이다. 공사 천국이라고 말해도 될 수준이다. 두바이는 도시를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었다.

두바이 왕족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는 일이다.

난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주목했다.

현지인은 거의 없었다. 전부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인도를 포함해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등의 동남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두바이는 현지인보다 외국 노동자가 많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다.

그들의 노동력으로 두바이가 빛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는 두바이의 그림자다.

한국 사람들도 저들처럼 중동에서 일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지리산 농부들은 두바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난 이 척박한 땅에 푸른 싹이 피어나게 할 것이다.

* * *

모하마드와 약속한 날 아침이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속대로 작업을 마쳤습니다.”

“어떤 디자인이 나왔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그때처럼 아자르가 호텔로 갈 겁니다.”

롤스로이스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

아자르가 웃으며 우리를 반겼다.

왕궁으로 가는 길에 홍해의 기적을 다시 목격했다.

경찰도 우리를 피해 갈 정도다.

왕족의 번호판 때문이다.

첫 번째는 그저 신기하다고 여겼지만, 두 번째로 이런 일을 겪으니 왕족이 가진 막강한 힘이 피부로 느껴졌다.

모하마드는 처음과 달리 사냥복 차림으로 우릴 반겼다.

그는 오늘따라 마음이 급한 것 같았다.

작업한 결과물부터 물었다.

“비 내리는 벽이라니. 상상력이 놀랍네요!”

그는 디자인을 보고 몹시 만족스러워했다.

“이제 아버지만 남았네요.”

모하마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밖으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아자르도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어딜 가나요?”

“사냥터로 이동할 겁니다.”

“사냥터요?”

“아버지와 약속한 장소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아버지와 그곳에서 이야기하나요?”

모하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이 아니라는 게 의문스러웠다.

“실은 제가 일부러 선택한 방법입니다.”

“일부러 선택했다고요?”

“아버지는 매사냥을 가장 좋아하시죠.”

그가 궁리 끝에 세운 전략 같았다.

난 모하마드와 함께 자동차에 올랐다.

그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나머지 일행들도 우리를 뒤쫓았다.

사륜구동 자동차가 사막을 질주했다.

모래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 게 놀이동산의 기구를 탄 느낌이다.

우린 사막 깊은 곳으로 이동했다.

멀리 하늘을 나는 매가 보였다.

날개를 펼치고 비행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화려한 장식의 천막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린 경계를 서고 있는 군인을 뚫고 사냥터 안으로 들어갔다.

난 모하마드와 함께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두바이 왕 이스마일 살라가 있었다.

매사냥

두바이 왕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았다.

이스마일 살라는 덩치가 큰 남자다. 중간 키의 날씬한 체형인 모하마드와는 대조적이다.

커다란 덩치에 긴 수염이 인상적이다. 과거 아랍의 전사를 연상케 하는 외모다.

천막 안에는 그를 지키는 남자들이 있었다. 왕을 지키는 호위무사 같았다. 그들은 매서운 눈으로 나와 함께 온 일행을 쳐다보았다.

난 예의를 갖춰 두바이 왕 이스마일 살라에게 인사했다.

“모하마드가 말한 사람이군요.”

이스마일 살라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했다. 그도 모하마드처럼 외국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모하마드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수경 재배 전문가라고요.”

그때 모하마드가 끼어들었다.

“아버지, 재배 시설의 디자인이 완성됐어요. 보시면 만족하실 거예요.”

“일 이야기는 매사냥이 끝나고 하자.”

모하마드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두바이 왕자는 왕 앞에서는 아이에 불과하다.

이스마일은 두꺼운 가죽 장갑을 끼고, 매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두 마리의 매가 있었다. 갈색 날개에 군데군데 하얀 깃털이 있는 모습이 제법 늠름해 보였다.

두 마리 모두 눈가리개를 하고 있었다.

이스마일이 나에게 손짓했다.

“덕명 씨는 매에 대해서 잘 아나요?”

“간단한 상식 정도입니다.”

“혹시, 매의 눈을 가린 이유를 아나요?”

“매를 안정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매는 시각적으로 매우 예민한 동물입니다. 사람들이 많으면 불안해할 수도 있죠. 이렇게 눈을 가려 놓으면 얌전해진답니다.”

이스마일이 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매는, 가늘고 째지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두바이는 오래전부터 매사냥이 발달했습니다. 칼과 창이 없던 시절에 사냥하던 방식이죠. 새끼 때부터 훈련한 매를 이용했습니다. 이놈들도 오랜 시간 훈련받았답니다.”

이스마일은 장갑을 낀 손목 위에 매를 올려놓았다.

매가 푸덕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귀여운 생김새와 달리 날카로운 발톱이 눈에 띄었다.

내가 발톱을 유심히 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매의 발은 악력이 무척 강합니다. 먹이가 발에 닿는 순간 발톱이 피부를 파고들죠. 엄청난 속도로 사냥하는 덕에 사냥감은 반응조차 할 새도 없습니다.”

매는 독수리와 함께 새의 왕 중 하나다.

맹금류 중에서 가장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

먹이를 잡기 위해 급강하할 때는 390km에 육박하는 속력을 낸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속도와 강한 발톱은 매의 치명적인 무기다.

“저와 함께 매사냥을 하시죠.”

그가 나에게 가죽 장갑을 건네며 말했다.

나와 함께 온 일행들이 긴장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다.

난 두바이 왕이 건넨 가죽 장갑을 받았다.

두 마리 매 중 한 마리가 내 손목 위로 올라왔다.

이스마일은 나에게 가슴에 하얀 깃털이 난 매를 주었다.

“매사냥이라고는 하지만 일종의 스포츠 경기라고 보면 됩니다. 진짜 사냥은 아니니,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냥이 아니란 말에 긴장이 좀 풀렸다.

모하마드가 경기의 규칙에 대해서 알려 주었다.

“4백 미터 밖에서 사람이 깃발을 흔들고 있을 겁니다. 가장 짧은 시간에 결승선을 통과한 매가 우승을 차지하는 방식이죠. 기록은 레이더 장치를 통해 바로 확인됩니다. 매가 돌아오면 경기가 끝납니다.”

모하마드의 설명이 끝나자 이스마일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 밖으로 나가죠.”

두바이 왕은 수경 재배 시설보다 매사냥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난 손목을 들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사막 한가운데 깃발을 든 남자가 보였다.

이스마일이 신호를 보내자 남자가 깃발을 흔들었다.

“시계가 0을 가리키면 눈가리개를 벗기는 겁니다.”

이스마일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전광판에서 숫자가 나타났다.

5, 4, 3, 2, 1, 0.

난 매의 눈을 가리고 있던 가리개를 벗겼다.

손목을 움직이자 매가 하늘 높이 비상했다.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나는 모습이 장관이다.

두 마리 매가 목표 지점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깃발을 흔드는 사람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화면을 통해 매가 목표 지점을 통과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가슴에 하얀 털이 수북한 녀석이 먼저 목표 지점을 통과했다.

이스마일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하다.

공교롭게도 내가 두바이 왕을 이겼다. 이겼다고 기분 좋아할 상황이 아니다.

나와 함께 온 일행들도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임무를 완수한 매가 다시 날아왔다.

다시 돌아오는 건, 이스마일의 매가 더 빨랐다.

하늘을 부유하던 녀석이 빠른 속도로 이스마일의 손목에 내려앉았다.

우승자는 여유로운 날갯짓을 하며 사뿐히 내려왔다. 상으로 먹이를 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놈은 눈을 깜빡이며 먹이를 받아먹었다.

이스마일이 나를 보고 물었다.

“두바이 왕을 이긴 기분이 어떻습니까?”

난 매를 원래의 자리에 놓고 장갑을 벗었다.

모두 긴장한 얼굴로 내 입만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경기에 이긴 적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분명 덕명 씨의 매가 결승점에 먼저 도착했는데요. 혹시, 내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말인가요?”

이스마일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모하마드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사실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사실이라고요?”

“매사냥에 이겼다고 하지만 제가 훈련한 매가 아닙니다. 전 그저 눈가리개를 벗겼을 뿐입니다. 승부에서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스마일은 내 말을 듣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모하마드도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이장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덕명 씨의 말대로 많은 훈련이 필요한 일이죠. 실은 덕명 씨가 날려 보낸 놈은 내가 직접 훈련한 매였습니다.”

이스마일이 휘파람을 불자 하얀 깃털을 가진 녀석이 그의 손목 위로 날아왔다.

모하마드는 일부러 이곳으로 날 불렀다고 했지만, 두바이 왕의 생각은 따로 있던 것 같았다.

“매사냥도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를 해 볼까요?”

* * *

수경 재배와 관련한 이야기는 왕궁에서 진행됐다.

이스마일은 비 내리는 벽을 보고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두바이 또 하나의 명물이 탄생하겠군요. 태양열 집열판을 붙이는 아이디어도 무척 마음에 듭니다.”

왕의 말에 모하마드는 싱글벙글 웃었다. 모든 게 잘 해결됐다는 표정이다.

나에게는 한 가지 숙제가 남아 있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요?”

이스마일은 문제라는 말에 눈을 치켜떴다.

모하마드도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말씀드리기 난감합니다만, 비용이 문제입니다. 처음에 예상했던 것과 달리 추가 비용이 들게 생겼습니다.”

“대략 얼마나 더 추가되나요?”

난 그에게 비용과 관련해 변경된 내용을 자세하게 말했다.

최초 5천만 달러로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다.

비 내리는 벽과 태양열 집열판까지 모두 추가 비용이 드는 일이다.

제작비용과 관련해서는 왕을 만나기 전, 차종문 대표와 이야기를 끝냈다.

“그럼 모두 합쳐서 1억 3천만 달러군요.”

이스마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두바이에 풍부한 자원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나에게 묘한 질문을 했다.

“태양과 모래 그리고 석유입니다.”

“잘 알고 있군요. 두바이엔 태양, 모래, 석유가 풍부합니다. 그중 가장 쓸 만한 건 석유죠. 하지만 그것도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낼 겁니다. 전 석유가 고갈되기 전에 두바이를 세계 최고의 도시로 만들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관광과 무역에 집중적으로 투자했죠. 결과적으로 두바이는 관광과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스마일은 모하마드와 눈을 마주쳤다.

“아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농산물의 해외 의존도가 너무 높습니다. 무려 90%가 넘는 수치죠. 수경 재배가 그걸 해결할 아주 훌륭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덕명 씨는 돈은 걱정하지 말고 디자인대로 시설을 만들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매사냥을 한 번 더 하고 싶습니다. 그전에 덕명 씨에게도 훈련할 매를 드리겠습니다.”

이스마일이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처음으로 보인 미소다.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계약과 관련한 일은 모하마드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그는 모하마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때만큼은 인자한 아버지처럼 보였다.

모하마드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난 모하마드와 함께 왕궁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동료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가는 길에 모하마드가 말했다.

“덕명 씨가 아버지를 상대하는 걸 보고 좀 놀랐습니다.”

“제가 실수라도 했나요?”

“실수라니요? 실수는 제가 했죠. 제가 덕명 씨를 함정에 빠뜨린 꼴이 됐으니까요. 아버지가 덕명 씨와 매사냥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왕궁 응접실에 도착하자 일행들이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민트 차를 마시며 애타게 날 기다리고 있었다.

눈빛만으로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를 대신해 모하마드가 답했다.

“추가로 소요되는 비용까지 모두 합쳐서 계약이 체결될 겁니다.”

모하마드의 말에 차종문 대표는 신상원 건축가를 끌어안았다.

이장우는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우리 대표님 수고 많았어요.”

* * *

저녁이 다 돼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사인한 계약서가 가방 안에 있었다.

처음에 5천만 달러를 예상했던 계약이다. 지금은 1억 3천만 달러의 계약서로 변했다.

처음 곶감 농사를 지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이런 순간이 찾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오늘은 축하 파티를 해야죠.”

차종문 대표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오늘 같은 날은 무조건 축하 파티를 해야죠.”

이장우가 그의 말을 받았다.

신상원 건축가도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날이니까 룸서비스도 시켜야겠지?”

이장우가 나를 보고 물었다.

그때 차종문 대표가 끼어들었다.

“오늘은 중원건설이 사겠습니다.”

“아닙니다, 지리산 농부들이 사겠습니다.”

“부탁입니다. 제가 사게 해 주십시오. 덕명 씨에게 고백할 것도 있으니까요.”

“고백이요?”

고백이란 말이 목에 걸렸다.

그는 나중에 말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룸서비스 음식이 객실 안으로 들어왔다.

두바이가 자랑하는 양고기구이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맥주 한잔에 피로가 풀렸다.

모두 만족스러운 얼굴로 오늘은 자축했다.

차종문 대표는 오늘따라 술을 빨리 마셨다. 그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차 대표님, 술이 과하신 거 아닌가요?”

“아이고, 이 정도는 끄떡없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고백하고 싶으신 건 뭔가요?”

모두의 시선이 차종문에게 집중됐다.

“솔직히 전 덕명 씨가 계약을 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계약을 망쳤다고요?”

“매사냥에서 덕명 씨가 이겼을 때 왕에게 했던 말 기억하시죠?”

“네, 경기에 이긴 적이 없다고 했죠.”

“그때 느낌이 싸했죠. 왕에게 사탕발림하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다른 이들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덕명 씨는 아부하는 말을 했던 게 아니었죠. 제가 생각이 짧았던 겁니다. 덕명 씨 기지에 감탄했습니다.”

차종문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솔직히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신상원 건축가가 뿔테 안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실은 나도 조마조마했어.”

이장도 웃으며 말했다.

“일이 잘된 건, 모두의 응원 덕입니다. 다 같이 건배할까요?”

“좋습니다.”

그렇게 두바이의 마지막 밤이 지나고 있었다.

* * *

다음날 우린 두바이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계약이 끝나면 곧장 한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장우가 비행기에 타며 말했다.

“이곳에서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일 년은 된 것 같네.”

“다음에 올 때는 각오해야 할 거야.”

한국으로 떠나는 비행기가 하늘 높이 날았다.

빅이슈

공항은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장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공항에 연예인이라도 오는 건가?”

“우리를 취재하러 온 사람들일 거야.”

“우리를?”

기자 중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한국 신문의 배선아 기자다.

두바이에서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1억 3천만 달러의 계약에 반응을 보일 거라고 여겼다.

방송사를 포함해 수많은 언론이 총출동했다. 기자 회견장을 방불케 했다.

“두바이 계약 액수가 1억 3천만 달러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기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같은 질문을 해 댔다.

난 기자들을 한곳으로 불러 모았다. 함께 온 일행들도 내 옆에 섰다.

“두바이 수경 재배 시설의 계약 금액은 1억 3천만 달러가 맞습니다.”

“처음엔 5천만 달러가 아니었나요? 금액이 두 배가 오른 이유가 뭔가요?”

“두바이 왕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두바이 왕의 요구요?”

“재배 시설이 아니라 우리에게 작품을 요구했습니다. 다행히 대한민국 최고의 건축가가 저와 함께 있어서 문제를 쉽게 해결했습니다.”

난 마이크를 신상원 건축가에게 넘겼다.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대체 어떤 건축물인가요?”

“김덕명 대표님 말씀대로 단순한 재배 시설이 아닙니다. 두바이 사람들에게 행운의 상징이 될 겁니다.”

“행운의 상징이요?”

“건물 외벽에서 비가 내리게 할 겁니다.”

“비가 내린다고요?”

기자들은 모두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신상원 건축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방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두바이 왕에게 보였던 디자인 도안이다.

기자들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놀랍네요. 일반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발상은 신상원 건축가님이 현지에서 직접 하신 건가요?”

신상원 건축가가 입을 열었다.

“아이디어는 김덕명 대표님이 주셨습니다.”

기자들의 이목이 나에게 집중됐다.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살짝 드린 건 사실입니다만, 디자인은 신상원 건축가님이 하셨죠.”

기자들의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공사 일정이며 두바이에서 있었던 일까지.

난 인터뷰가 끝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말했다.

“두바이뿐만 아니라 하동에도 재배 시설을 짓는 중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청년 농부들도 모집할 계획입니다.”

지금까지 방송과 여러 매체를 통해 청년 농부를 모집한다는 말은 꾸준히 해 왔다.

두바이 계약으로 관심이 더 커질 것이다.

내가 기자들을 부른 이유기도 했다.

“청년 모집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배선아 기자가 날 보며 물었다.

“자세한 내용은, 구체적인 자료와 함께 배포해 드리겠습니다.”

“인원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청년 농부를 몇 명 정도 모집하실 생각인가요?”

“200명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명이란 말에 기자들의 질문이 다시 폭주했다.

난 말을 아꼈다.

그들이 지리산 농부들을 대신해 광고해 줄 것을 기대했다.

* * *

공항을 나와 중원건설 사무실이 있는 한남동으로 이동했다.

차종문 대표는 사무실에 도착하자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사람들의 관심이 이렇게 뜨거운 줄은 몰랐습니다. 다시 젊어진 기분마저 드네요.”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머리카락이 짧아서 그런지 정말 젊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두바이 재배 시설은 누가 감독하나요?”

“두바이는 제가 직접 진두지휘할 생각입니다.”

차종문 대표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물론 신상원 건축가도 두바이에 함께 갈 거고요.”

그는 신상원 건축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신상원 건축가는 미소로 화답했다.

“두바이 건 때문에 하동 재배 시설에 신경을 덜 쓰시는 거 아니겠죠?”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동 재배 시설도 문제가 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현지에서 보셨겠지만, 두바이에서도 하동 일을 신경 쓰고 있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종문 대표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에서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하동에 내려가기 전에 다짐이라도 받아 두고 싶었다. 모두 두바이 건에 주목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동에 짓는 시설과 비교가 안 되게 액수가 컸다.

대중의 관심이 쏠린 부분은 마케팅으로 활용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자회견도 그 일환이었다.

나에겐 두바이 건만큼이나 하동에 짓는 재배 시설이 중요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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