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딩을 일주일 남겨두고 엘브이 컴퍼니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가장 원하던 회사였다. 엘브이 컴퍼니는 글로벌 패스트푸드 체인을 가진 다국적 기업이다.
한국에서는 현재 패스트푸드 업계 2위를 달리고 있지만, 세계 시장에서는 최고 강자다.
몇 년 안에 한국에서도 업계 1위로 도약할 회사다.
엘브이 컴퍼니와 계약하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히 규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른 패스트푸드 브랜드에 비해 양심적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식재료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걸로 유명했다.
난 한기탁과 함께 미팅 장소로 향했다.
서초동 사옥으로 가는 길에 한기탁이 말했다.
“네가 제안서를 먼저 보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나에게도 말하지 그랬어?”
“이 일까지 했으면 선배 쓰러졌을 거예요.”
한기탁은 토론회 준비를 끝내고 몸살을 앓았다. 제안서 작업은 나 혼자도 충분했다.
“나 생각해 주는 건 우리 대표님밖에 없네.”
한기탁이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이번엔 나도 좀 알아봤어. 엘브이 컴퍼니는 G푸드랑 많이 다르던데? 특별히 문제를 찾을 수 없었어.”
“저도 조사해 봤는데, 괜찮은 회사 같았어요.”
그와 함께 사옥 안으로 들어갔다.
정장 차림의 여자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김덕명 대표님이시죠?”
“네.”
“송경찬 대표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가 우리를 안내했다. 고양이처럼 얌전한 걸음이다.
그녀를 따라가며 머릿속 생각을 정리했다.
분명 송경찬 대표라고 말했다. 그는 엘브이 컴퍼니의 한국 지사 대표다.
대표가 직접 미팅에 나왔다는 건 좋은 신호다. G푸드에서는 본부장이 나왔다.
여자가 문을 열고 손짓했다.
회의실 안에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하얀 백발에 안경을 낀 남자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송경찬이라고 합니다.”
그와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눴다. 안내했던 여자는 살며시 문을 닫고 나갔다.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응원 덕에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보내 주신 제안서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송경찬 대표는 옆자리에 있던 남자에게 손짓했다. 그는 준비한 서류를 송경찬 대표에게 건넸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하얀 얼굴에 이마가 반듯했다.
남자가 건넨 문서는 내가 보낸 제안서였다.
“매년 같은 가격에 샐러드를 공급하신다는 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매해 가격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비료 가격의 변동이나 물가 상승률에 따라 가격을 정할 테니까요.”
“말씀대로 매해 가격을 정하시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1년 동안 같은 가격을 보장한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저희에게는.”
송경찬 대표는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그는 지리산 농부들의 제안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1년 동안 같은 가격을 보장한다는 점이 우리 샐러드의 최대 강점이었기 때문이다.
“농산물 가격은 변동이 심합니다. 일 년 단위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매달 가격이 변하니까요. 하지만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를 공급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송경찬 대표의 말이 끝나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회의실 구석에 있던 냉장고에서 뭔가를 꺼내 왔다.
“이건 지리산 농부들이 재배한 샐러드입니다.”
테이블 위에 지리산 농부들이 재배한 카이피라가 있었다.
송경찬 대표는 카이피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햄버거나 샌드위치에 반드시 넣어야 하는 채소가 있습니다. 토마토나 양파보다 카이피라 한 장이 더 중요하죠. 가격이 비싸도 반드시 넣어야 하는 재료죠.”
카이피라는 대표적인 서양 상추다. 흔히 양상추라고 부른다.
양상추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그중에 카이피라는 햄버거와 샌드위치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재료다.
그의 말대로 카이피라는 햄버거와 샌드위치의 맛을 좌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카이피라는 샐러드 컨테이너부터 재배하던 작물이기도 하다.
“김덕명 씨의 제안서를 받고 재배하고 계신 샐러드부터 살펴봤습니다. 신선하고 품질도 아주 좋더군요.”
엘브이 컴퍼니는 G푸드와 수준이 달랐다. 그들은 지리산 농부들의 모든 걸 꼼꼼하게 확인한 것 같았다.
“저희는 지리산 농부들과의 계약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지을 확실한 역량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고요. 두바이에 수경 재배 시설을 짓는 일까지 추진하고 계시니까요.”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자부합니다.”
송경찬 대표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남자는 곧장 서류를 꺼냈다.
“저희가 준비한 계약서입니다.”
난 계약서를 꼼꼼히 살폈다. G푸드에서 봤던 계약서처럼 독소조항 따위는 없었다.
한기탁도 계약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다는 신호다.
“처음엔 이렇게 빨리 계약할 계획은 없었습니다. 지리산 농부들은 아직 재배 시설을 짓지 않았으니까요.”
송경찬 대표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약을 서두르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김덕명 씨의 제안서 덕이죠. 저희 쪽에만 제안서를 보낸 게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다른 업체에도 제안서를 보냈습니다.”
“그 덕에 서두르게 됐습니다. 다른 업체가 지리산 농부들과 계약할 수도 있으니까요.”
“엘브이 컴퍼니와 함께 일하길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계획이 들어맞았다. 엘브이 컴퍼니와 일하고 싶다고 해서 이쪽에만 제안서를 보낸 건 아니다. 다른 업체에도 제안서를 보냈다. 그 작전이 적중했다.
한기탁과 함께 서초동 사옥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한기탁은 만세부터 불렀다.
“펀딩이 끝나기 전에 계약까지 하다니, 정말 좋은데!”
“이제 마지막으로 불을 지필 차례에요.”
“마지막으로 불을 지핀다고?”
“선배 먼저 하동에 내려가세요. 전 잠시 일 좀 보고 내려갈게요.”
* * *
난 한국 신문이 있는 중구로 향했다.
배선아 기자에게도 전화해 둔 상태다.
그녀에겐 카페보다 신문사 회의실이 좋겠다고 말했다.
회의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순간이다.
벽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혼자 미소를 지었다.
포스터 안에 정가희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의 사진과 함께 공모전 대상을 받은 ‘꿀과 벌’이 소개된 포스터다.
회의실에 도착해서도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뭐 좋은 일 있으세요?”
배선아 기자가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네, 아주 좋은 일이 생겼죠.”
“그게 뭔데요?”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기사가 될 만한 내용인지 궁금한 눈빛이다.
난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지리산 농부들이 엘브이 컴퍼니와 채소 공급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벌써 계약을 했다고요? 아직 펀딩도 끝나지 않았잖아요?”
“미리 계약한 거죠.”
“놀랍네요. 혹시 이 사실을 기사로 내보내도 되나요?”
“이 기사는 배선아 기자님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물론 계약과 관련한 세부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는 조건이다.
난 그녀에게 기사에 공개할 수 있는 내용을 말했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문제없어요.”
그녀는 당장이라도 기사를 쓰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럼 배 기자님만 믿겠습니다.”
* * *
다음날 지리산 농부들과 엘브이 컴퍼니가 계약을 맺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사무실이 기사로 떠들썩했다.
“기사가 이렇게 빨리 나올 줄 몰랐네.”
한기탁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기사가 나가고 난 뒤에 펀딩 금액이 더 올라가고 있어.”
백민석이 펀딩 페이지를 보며 말했다.
“이대로 가다간 오늘 안에 100억이 넘겠어요.”
경영지원팀의 박태호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그의 예언은 사실이 됐다.
퇴근 시간이 되기도 전에 펀딩 금액이 100억을 돌파했다.
“100억이 넘었어.”
한기탁은 억 소리를 하다 턱이 빠질 지경이다. 동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펀딩 제한 시간이 이틀이나 남았어요.”
난 동료들을 향해 외쳤다. 그 말에 다들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펀딩 액수를 더 높여 보자!!!”
한기탁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흥분했던 동료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남은 시간 동안 모든 역량을 동원할 때다.
지리산 농부들은 모든 역량을 동원해 펀딩에 집중했다.
벤처 크라우드의 공대식 대표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공대식 대표는 전화를 받자마자 속사포처럼 말했다.
“100억 펀딩에 성공했습니다.”
“벤처 크라우드가 애써 준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김 대표님이 수고 많으셨죠.”
“아직 펀딩 기간이 남았습니다. 남은 기간에도 최선을 다해 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긴장을 늦추지 않겠습니다.”
지리산 농부들은 이틀 동안 야근했다. 모두 잠도 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벤처 크라우드도 남은 기간 혼신의 힘을 다했다.
* * *
펀딩 마지막 날이다. 제한 시간이 모두 종료됐다.
난 동료들과 함께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 페이지를 바라보았다.
백민석이 화면을 보고 말했다.
“120억이야……. 120억……!”
그는 기운이 없는지 큰 소리로 말하지도 못했다.
다른 동료들도 모두 화면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이동춘만은 예외였다.
“120억이다!”
그는 사무실이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대표님, 지리산 농부들이 120억이나 모았습니다!”
이동춘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동료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동료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동춘이 눈물을 전염시킨 모양이다.
눈물의 의미는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진심을 사람들이 알아줬기 때문이다.
우리의 꿈과 목표를 많은 사람이 알아줬다는 게 감격스러웠다.
동료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오늘은 당연히 회식이겠죠?”
이동춘이 젖은 눈으로 물었다.
“당연하죠. 뭐든 말씀만 하세요.”
“오늘은 소고기가 먹고 싶네요. 꽃등심으로.”
난 고개를 돌려 한기탁의 얼굴을 살폈다.
안방마님의 반응이 궁금했다.
“왜 내 눈치를 보고 그래? 오늘 같은 날은 꽃등심 정도는 먹어 줘야지.”
“아버님, 꽃등심 문제없대요~!”
“꽃등심에다 키조개 관자도 먹고 싶네요.”
이동춘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 사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한기탁의 말에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다들 기운을 되찾은 것 같았다.
* * *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펀딩을 진행하며 벌어졌던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슬기롭게 대처했다. 꿈만 꾸던 일이 이제 현실이 돼 가고 있었다.
늦은 귀가에도 부모님이 날 마중 나와 있었다.
“안 주무시고 나와 계세요?”
“우리 아들 잘했다고 말해 주고 싶어서.”
어머니가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고생했다. 앞으로 더 잘 될 거야.”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가 가슴을 때렸다.
“이제 들어가서 주무세요.”
방안에 꿀물이 있었다.
꿀물을 마시니 몸이 나른했다.
누우면 바로 잘 것 같았다.
이틀 동안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자리에 누우려는 순간에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을 확인하는 순간 잠이 확 깼다.
모하마드 살라의 전화다.
반가운 손님과 선물
모하마드 살라에게는 펀딩이 끝나는 대로 연락하겠다고 전했다.
아직 내가 연락을 하기도 전이다. 이렇게 빨리 전화를 한 걸 보면 그도 이날을 손꼽아 기다린 것 같았다.
난 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곧 연락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너무 급했나요?”
밝은 목소리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펀딩은 목표액을 초과했더군요.”
“도움을 주신 덕분입니다.”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죠. 펀딩이 잘 된 건,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 때문이고요. 이제 펀딩도 끝났으니 두바이에 오시는 건가요?”
“그때 말씀드린 대로 최대한 빨리 두바이로 갈 생각입니다.”
“그럼 내일 오시는 건가요?”
모하마드 살라가 농담처럼 물었다.
“내일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주일 안에 두바이로 가겠습니다.”
“일주일이 길겠군요.”
모하마드 살라와는 구두로 계약을 한 상태다.
두바이 왕자의 말은 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만나서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 일이 남았다.
세부적인 내용은 두바이에서 매듭을 지어야 했다.
무려 5,000만 달러 공사다. 원화로 환산하면 600억이 넘었다.
하동에 지으려는 수경 재배 시설과는 규모가 달랐다.
* * *
우린 재배 시설에 관련한 작업에 들어갔다.
회의실에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 수경 재배에 참여했던 주요 인력들이다.
“서울과 부산에 수경 재배 시설을 설치했던 것 기억하시죠? 이번에도 그때처럼 두 팀으로 나눠서 일이 진행될 겁니다. 물론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동료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냥 나오는 자신감이 아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부터 수직 재배 시설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쌓인 경험이 풍부했다.
“요한 씨, 재배 시설 설계는 어느 정도 진행됐나요?”
“이미 완성했습니다.”
민요한이 경쾌한 말투로 답했다. 그는 지하철 수경 재배 시설을 설치할 때는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난 그에게 검증을 위해 만든 수직 재배 시설을 관리하는 일과 새롭게 만들 시설을 설계하는 일을 맡겼다.
몇 달 동안 그는 대규모 수직 재배 시설을 설계했다. 이제 결과물을 확인할 때다.
빔프로젝터에 불이 들어왔다.
화면에 민요한이 설계한 재배 시설이 나타났다.
민요한은 화면을 보며 동료들에게 설명했다.
“보시는 대로 대규모 수직 재배 시설입니다. 기술적인 부분은 엔지니어에게 검증받았습니다.
민요한의 말에 이동춘과 이장우가 미소를 지었다.
높이가 30미터가 넘는 대규모 수직 재배 시설이다.
“재배 시설이 완성되면 하루에 6만 5,000팩의 샐러드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무게로 따지면 대략 30톤 가까이 되죠.”
엘브이 컴퍼니에 샐러드를 대고도 남았다. 재배 시설이 완공되면 다른 판매처도 뚫을 수 있었다.
민요한의 설명이 끝나고 한기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펀딩을 진행하는 중에 몇몇 건설사와 접촉했습니다. 현재 중원건설을 1순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직 재배 등의 내부 시설은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진이 담당할 것이다. 하지만 재배 시설의 골격을 만드는 일은 건설사에 맡겨야 했다.
중원건설은 중견 건설사다. 그들은 다양한 경험이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든 건 아랍에 호텔을 세운 이력이었다.
실제로 대형 건설사들도 지리산 농부들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두바이 프로젝트를 발표하고 난 뒤였다.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 때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대형 건설사들이 관심을 보였다.
두바이 프로젝트의 규모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한기탁과 상의해 중견 기업인 중원건설을 선택했다. 그곳은 미래에 건실한 건설사로 승승장구할 곳이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곳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중원건설의 일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한국의 건설사 중엔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지어 본 건설사가 없었다.
처음으로 하는 일인 만큼 지식도 부족했다.
여러 건설사가 우리에게 제안서를 보냈지만, 대부분 함량 미달이었다.
수경 재배 시설에 대해, 기본적인 공부조차 하지 않고 제안서를 보낸 것이다.
중원건설은 달랐다. 고민하고 연구한 흔적이 보였다. 그들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번 주 안에 두바이에 갈 생각입니다. 경영지원팀장님, 티켓 부탁드립니다.”
한기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우와 함께 두바이로 출장을 다녀올 예정이다.
더 많은 인원이 함께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초기 단계에서는 소수의 전문가가 낫다고 판단했다.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올 때다.
난 민요한과 이동춘을 따로 불렀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동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재배 시설이 완성되기 전에 청년 농부들을 모집할 계획입니다.”
“그 일이라면 잘 알고 있습니다.”
“토론회에서도 발표했던 내용이죠. 청년 농부라고 하지만 그중 절반은 엔지니어가 될 겁니다.”
엔지니어라는 말에 이동춘의 눈에 반가움이 가득 돌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것 같았다.
“제가 할 일이 있는 거군요?”
“공대를 나왔다고 해서 당장 일을 시킬 순 없습니다.”
“아무래도 교육이 필요하겠죠.”
“네, 맞습니다. 엔지니어 교육을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그 일이라면 저에게 맡겨 주십니다. 제가 아는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쓸 만한 인재를 만들겠습니다.”
그는 당장이라도 교육에 들어갈 사람 같았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요, 아버님. 미리미리 준비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지금부터 착실하게 준비하겠습니다.”
난 민요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요한 씨도 교육을 준비해 주세요. 작물 재배 교육을 맡아 주셔야 합니다.”
“전 이미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민요한이 웃으며 말했다. 민요한은 방현식과 김상철을 수경 재배 전문가로 키우고 있었다.
“방현식과 김상철은 잘하고 있나요?”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검증 작업을 했던 수직 재배 시설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고요.”
민요한의 말이 끝나자 이동춘이 입을 열었다.
“요한 씨에게는 보조가 있나 보네요? 그럼 저는……?”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방현식과 김상철은 샐러드 컨테이너 때부터 수경 재배를 배운 사람들이니까요. 그때 요한 씨가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고요. 아직 엔지니어 교육은 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아주 중요한 일이죠.”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요?”
“지리산 농부들의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아버님.”
“지리산 농부들의 미래가요?”
이동춘의 표정이 달라졌다. 방금까지 서운한 내색을 비췄다면, 지금은 화산처럼 불타오르고 있다.
“그럼 제 손에 지리산 농부들의 미래가 달린 거군요!”
“정확하게 이해하셨습니다.”
“비록 보조는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동춘은 너털웃음을 호탕하게 터뜨렸다
회의실을 나왔을 때다.
한기탁이 조용히 날 불렀다.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손님 왔어.”
“손님이요?”
“특별한 손님이야.”
“누군데 이렇게 뜸을 들여요?”
“남아영이 우리 사무실에 왔어.”
남아영이 하동까지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난 걸음을 재촉했다.
정말 남아영이 이곳에 왔다.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가 커졌다.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축하해 주러 왔죠.”
남아영이 방긋 웃었다.
“모처럼 왔는데 좋은 데 가서 이야기할까?”
“어디요?”
“화개 장터.”
난 남아영과 함께 화개 장터 매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커다란 종이봉투를 품에 안고 있었다.
“품에 안고 있는 건 뭐야?”
“아저씨 줄 선물이요.”
선물이란 말에 정가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나를 위해 뭔가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미대에 들어갔다는 말 들었어. 미리 말하지 그랬어? 선물 줬을 텐데.”
“그때 아저씨는 남극에 있었어요.”
“남극에 있을 때였구나. 그래도 선물은 사 왔지.”
난 그녀에게 상자를 건넸다. 사무실에서 가져온 물건이다.
“이게 뭐예요?”
남아영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작은 펭귄 인형이 있었다.
“남극에서 산 거야, 아영이 주려고.”
“귀엽다!”
남아영은 펭귄 인형을 들고 활짝 웃었다.
웃는 얼굴을 보니 예전 모습이 떠올랐다.
씩씩하고 당찼던 남아영의 얼굴이다.
그녀와 함께 지리산 농부들의 매장으로 들어갔다.
노해미가 반갑게 우릴 맞았다.
“오늘은 손님과 함께 오셨네요?”
“네, 귀한 손님이세요.”
“그럼 저희 매장에서 가장 맛있는 걸 준비해야겠네요.”
“부탁할게요.”
남아영은 매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도 지리산 농부들이 운영하는 곳인가 봐요?”
“화개 장터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지.”
내 말에 남아영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지금 보니 옷차림이 독특했다. 바지와 티셔츠 모두 초록색이다.
노란색 허리띠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미대생만의 센스 같았다.
“난 아영이가 농부가 될 줄 알았어.”
농부라는 말에 그녀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왜 내가 잘못 짚었나?”
“아니요. 실은 저도 농부가 되고 싶었어요. 아저씨처럼 채소도 키우고 꿀벌도 키우는 농부요.”
“그런데 왜 미술을 선택한 거야?”
그때 노해미가 쟁반을 들고 왔다.
“주문하신 녹차 아이스크림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건 꿀로 만든 약과고요.”
노해미가 녹차 아이스크림과 약과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아이스크림 양이 평소보다 많았다. 거의 곱빼기다. 일부러 많이 준 모양이다.
“우와, 맛있겠다!”
“하동 녹차로 만든 아이스크림이에요.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남아영은 노해미에게 꾸벅 인사했다. 노해미도 미소로 답했다.
“먼저 먹어.”
“아저씨도 같이 먹어요.”
우린 전투적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한 마디 대화도 없었다. 그저 아이스크림을 먹는 데 집중했다.
노해미와 김꽃님 할머니가 우리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정신없이 아이스크림을 먹다, 자연스럽게 물었다.
“나 아직 대답을 못 들었는데. 아영이가 미술을 선택한 이유?”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편안해 져요.”
남아영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말했다.
난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당차고 밝던 아이였다.
너무 당차서 탈이었다. 어쩌면 슬픔을 감추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남아영이 아이스크림을 먹다 빙긋 웃었다. 웃을 때마다 내가 아는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아저씨 줄 선물이요.”
드디어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생각보다 큰 물건이다.
각이 진 모양이 안에 액자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뜯어 봐도 돼?”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되는 순간이다.
난 종이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카운터에 있던 노해미와 김꽃님 할머니도 이쪽에 시선이 고정돼 있었다.
종이봉투 안에 그림이 있었다.
“아영이가 그린 거야?”
“네, 제가 그렸어요.”
“이 사람들 전부 농부들 아니야?”
“맞아요. 전부 농부들이에요.”
일하는 농부들로 가득한 그림이다. 한 가지 일만 하는 게 아니다.
채소를 키우는 농부부터 꿀벌을 키우는 이까지. 그림 속에 사람들의 수를 셀 수도 없었다.
작은 캔버스 안에 농부만 수십 명이다.
“그림 속에 아저씨도 있어요.”
“여기에 내가 있다고?”
“찾아보세요.”
난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림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밀짚모자를 쓰거나 보호망으로 얼굴을 가린 농부들이다.
크기도 작아서 얼굴을 구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최고 레벨의 숨은그림찾기 수준이다.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남아영을 바라볼 때다.
노해미와 김꽃님 할머니가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도 같이 찾아봐도 될까요?”
노해미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네, 같이 찾아봐 주세요.”
노해미와 김꽃님 할머니도 그림 속에서 나를 찾았다.
“아, 찾았다!”
노해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어디에 있어요?”
“이 사람이요.”
노해미가 손가락으로 그림의 한 부분을 집었다.
남아영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해미와 김꽃님 할머니는 그림을 보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남아영이 그린 내 모습은 독특하다 못해 기이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정도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게 나라고?”
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동시에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두바이로 가다
“아저씨는 농부 중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에요.”
남아영이 그림을 보며 말했다. 그림 속에는 수많은 농부가 등장한다.
농부 중 유독 튀는 인물이 있었다.
감나무 아래 밀짚모자를 쓴 농부다. 혼자만 얼굴이 초록색이다.
난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힘도 세고, 피부색도 초록색인 거 보니 헐크네?”
“아니요.”
남아영이 고개를 저었다.
노해미와 김꽃님 할머니도 궁금한 눈빛으로 남아영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럼 뭐야?”
“슈렉이요.”
남아영의 말에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래도 마음에 들어. 선물 잘 간직할게.”
“정말 마음에 드세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난 그림을 다시 한번 찬찬히 바라보며 말했다.
“들판에서 수많은 농부가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그리고 감나무 아래 있는 내 모습도. 비록 얼굴은 초록색이지만.”
“제가 초록색을 가장 좋아해요. 좋아하는 색으로 아저씨 얼굴을 그려 봤어요. 슈렉은 농담이고요.”
남아영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우린 웃고 떠들며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아쉽네.”
남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노해미가 다가왔다.
“이거 가지고 가세요.”
“이게 뭐예요?”
“빵하고 이것저것 좀 챙겼어요.”
“괜찮은데…….”
“제가 사는 거예요.”
노해미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로고가 그려진 종이봉투 안에는 모카빵, 약과, 요거트까지 있었다.
난 남아영과 함께 터미널에 도착했다.
“아저씨, 아까 매장에서 말하지 못한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뭔데?”
“그림을 그리고 싶은 다른 이유도 있어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기 넘치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동으로 미소가 지어진다.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예술을 하고 싶어요. 아저씨가 농촌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저도 농촌을 멋지게 바꾸는 데 도움이 되고 싶어요.”
실제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예술가가 있다.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스탠드로 쓸 수 있는 태양열 목걸이를 만든 영국의 화가가 대표적이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예술가가 되겠다는 남아영의 말을 들으니, 고맙고 기특했다.
그녀가 손을 흔들며 버스에 올랐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기탁이 물었다.
“아영이가 어른이 다 됐어. 똘망똘망한 꼬맹이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참 빠르죠.”
“하긴, 김덕명도 이제 삼십 대니까.”
“그러네요.”
“그건 그렇고, 내일 중원건설하고 미팅 잡혔어.”
그에게 두바이로 떠나기 전에 건설사와 미팅을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 * *
다음날 한기탁과 함께 중원건설 본사가 있는 한남동으로 향했다.
단정한 차림새의 남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가시죠.”
다부진 체격의 그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우리를 건물의 꼭대기 층으로 안내했다.
그 층은 일반 사무실로 쓰는 공간이 아닌듯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은 넓은 회의실이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죠. 차는 뭐로 준비해 드릴까요?”
“물이면 됩니다.”
“저는 커피요.”
한기탁이 커피를 말하자,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중견 기업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제법 크네?”
“왜, 부러워요?”
“부럽긴. 난 이젠 이런 건물에서는 답답해서 일 못 해.”
그때 문이 열리고 세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한 명은 우리를 안내했던 남자다.
그는 물과 커피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반갑습니다. 중원건설의 차종문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덕명입니다.”
“앉으시죠.”
차종문은 중원건설의 대표다.
대표가 직접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공사는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바이 건의 액수도 컸지만, 지리산 농부들의 재배 시설을 짓는 일도 제법 큰 공사였다.
차종문은 짧은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중년의 나이에도 머리숱이 많았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저희에게 일을 맡겨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차종문은 깍듯하게 감사를 표했다.
“재배 시설은 저희 지리산 농부들에서 직접 제작할 겁니다. 중원건설은 재배 시설 외형을 담당해 주시면 됩니다.”
“재배 시설이 어떤 정도인지 볼 수 있을까요?”
한기탁은 서류를 꺼냈다.
보안 사항은 삭제한 공개용 설계도다.
건설사도 재배 시설의 정보를 알아야 설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차종문은 재배 시설을 꼼꼼하게 살폈다.
“대단하네요. 이런 재배 시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두바이에도 같은 시설이 들어가나요?”
“네, 현재로선 같은 시설이 들어가는 걸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다만 건축물은 현지에서 협의해야 할 부분이고요.”
“아랍 사람들은 까다롭기로 유명하죠. 특히 왕족들은 상대하기 어렵죠.”
차종문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두바이엔 언제 가시나요?”
“이번 주 토요일에 두바이로 떠납니다.”
“저희 쪽 사람도 함께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난 잠시 고민했다. 우선 모하마드와 만나 의견을 조율할 생각이었다.
차종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직접 갈 생각입니다.”
“대표님이 직접 가신다고요?”
“젊은 시절 아랍에서 모래 밥을 먹어 본 경험이 있습니다. 제 경험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돈이며 공사의 규모는 입 밖을 꺼내지 않았다.
겸손한 말투로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난 고개를 돌려 한기탁과 눈을 마주쳤다. 그도 긍정적인 눈빛이다.
“대표님이 직접 가신다면 저도 좋습니다.”
한기탁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국내 수경 재배 시설 계약서다.
차종문 옆에 있던 남자가 계약서를 살폈다. 남자가 꼼꼼하게 계약서를 살피는 사이, 차종문이 스스럼없이 말을 꺼냈다.
“건설업은 예전과 달리 사양 산업입니다. 반면 첨단 농업은 전도유망한 신사업입니다. 앞으로 세계 시장을 주도할 거로 예상합니다. 지리산 농부들은 그 중심에 있겠죠.”
입에 발린 말이지만 기분 좋게 들렸다.
계약서를 살피던 남자가 차종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건설과의 계약을 마치고 하동으로 내려갔다.
* * *
“우리 김 대표님은 두바이에 갈 일만 남았네요.”
한기탁이 기분 좋게 말했다.
“두바이 일 때문에 한국까지 신경 쓰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한국 일은 나에게 맡겨.”
한국과 두바이 동시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어야 했다.
내가 두 곳을 오가며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기탁이 있어 든든했다.
“가는 길에 하동군청 좀 들러요.”
“혹시 박동규 주무관에게 연락이 왔어?”
“나오는 길에 보니까 문자가 왔더라고요.”
“그럼 우리가 제안한 일이 통과된 건가?”
“네, 통과됐어요.”
박동규 주무관은 지리산 농부들의 축제를 도왔던 인물이다.
난 하동군청에 제안서를 보냈다.
시골에 있는 빈집을 리모델링하는 일이다.
청년 농부들을 모집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청년 농부들을 한두 명 모집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청년들이 하동에 모이게 되면, 그들이 살 집이 필요했다. 하동엔 빈집이 많았다.
난 빈집을 리모델링해서 청년 농부들의 주거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지리산 농부들과 하동군이 함께 비용을 분담해 집을 고치는 것을 제안했다.
하동군도 반색하고 나섰다. 지역의 빈집은 군에서도 골칫덩이였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에 한기탁과 함께 하동군청으로 들어갔다.
박동규 주무관은 나를 보자 인사부터 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죠.”
그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박동규 주무관은 준비한 서류를 꺼내며 말했다.
“이 서류에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
난 한기탁과 함께 서류를 살폈다.
내가 작성한 제안서에 몇 가지 추가 사항이 들어가 있었다.
빈집을 수리하는 일과 더불어 주변 시설도 정비하겠다는 내용이다.
문서만 봐도 하동군에서도 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서류에 사인하기 전에 박동규 주무관에게 물었다.
“그럼 언제부터 집을 고치는 일에 들어가나요?”
“생각보다 빠르게 일정이 잡힐 겁니다. 이번 일은 새로 부임한 군수님도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까요.”
만약 전 하동 군수 김창대가 있었다면 바로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을 것이다.
사인을 하려는 순간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동규 주무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군수님이 여긴 어떻게?”
박동규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김덕명 씨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새로운 하동 군수 김병휘다. 나도 말로만 들은 인물이다.
그가 나에게 다가왔다.
“하동 군수 김병휘입니다.”
“김덕명입니다.”
“반갑습니다.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김창대를 떠올리자 새로운 하동 군수가 나타났다.
난 속으로 웃음이 났다.
한기탁과 함께 군수실로 들어갔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군수 자리에 앉은 사람은 달라졌지만.
새로운 군수를 보좌하는 사람도 처음 보는 남자였다.
마른 체구에 말수가 적어 보이는 남자다.
그에 반해 새로운 군수 김병휘는 체격이 상당했다.
얼굴도 둥글둥글한 게 바다표범을 연상케 하는 외모다.
그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김덕명 씨를 뵙고 싶었습니다.”
“저도 군수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그가 보기 좋게 미소 지었다.
“펀딩도 성공했으니 조만간 하동에 청년 농부들이 넘치겠네요. 모두 김덕명 씨 덕분입니다.”
“별말씀을요. 전 그저 제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김덕명 씨의 제안서를 보고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예산만 있으면 집을 새로 짓고 싶었습니다.”
내 마음도 그와 같았다.
여유자금만 충분하다면 새로 집을 짓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하동의 재배 시설과 두바이 건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차선책으로 택한 게 빈집을 수리하는 것이었다.
빈집을 찾고 수리하는 일은 하동군의 도움이 필수였다.
김병휘 군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번 일은 저도 발 벗고 나설 계획입니다.”
“군수님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신다니 안심이 되네요.”
“하동이 청년으로 넘치는 일인데 뭐든 다 해야죠.”
“그럼 저희는 군수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김병휘 군수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벌써 가시려고요?”
“저희가 곧 두바이로 출장을 갑니다, 출발 전에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요.”
“저녁이라고 함께하려고 했는데 아쉽네요.”
“아쉽지만 다음에 하시죠.”
김병휘 군수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군수실을 나와 다시 박동규 주무관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서류에 사인을 하고 군청을 나왔다.
“오늘은 하루가 아주 기네.”
한기탁이 하늘을 보며 말했다.
노을이 하늘이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소주 한잔할까?”
그가 웃으며 물었다.
“좋죠.”
“군수의 말은 거절하면서 내 말은 잘도 받네.”
“선배의 말을 어떻게 거절해요?”
“그건 그렇지, 내 말은 절대 거절할 수 없지.”
* * *
두바이로 떠나는 날 아침이다.
어머니가 아침부터 부산스럽다.
한두 번 가는 출장도 아닌데 이것저것 챙겨 주시느라고 바쁘시다.
“금방 돌아오는데요.”
“음식이 입에 안 맞을까 봐 그렇지.”
그때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우리 아들은 춥고 더운 곳만 골라 다니네.”
그 말에 어머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난 이장우와 함께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그도 아버지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냉탕에 있다가 다시 온탕에 들어가는 기분이야. 남극 출장 이후에 두바이라니.”
“두바이에 가면 남극에서 봤던 녀석들이 반겨 줄 거야.”
“남극에 봤던 녀석들? 혹시 펭귄?”
“맞아, 두바이에도 펭귄이 살아.”
“나 놀리려고 하는 말이지?”
“진짜야.”
“거짓말.”
“진짜라니까.”
이장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남극에서 펭귄에서 당한 일이 떠오른 모양이다.
“아랍에 펭귄이 있다니 믿어지질 않네.”
“정말이야.”
“펭귄은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가 몸서리치며 말했다.
목적지인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차종문은 우리보다 먼저 두바이로 떠났다.
비행기 좌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난 이장우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9시간 30분 후면 두바이에 도착한다.
왕좌의 힘
아랍에미리트는 7개의 자치 왕국의 연방이다.
두바이(Dubai)는 아랍에미리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국가다.
200년 전에는 유목민이 살던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그때만 해도 진주를 채취하거나 어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1969년 유전이 발견되면서 두바이는 화려하게 변신했다. 석유를 기반으로 한 풍부한 자금력으로 첨단 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능가하는 변화였다. 기발한 상상력과 놀라운 추진력이 결합한 도시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대규모 항구가 만들어졌다.
두바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유 무역 지대를 만들고, 관광업을 발달시켰다.
단시간 내에 첨단 도시로 변신할 수 있던 이유는 두바이의 독특한 정치 구조 때문이다.
두바이를 포함한 아랍에미리트의 7개의 연방은 왕의 통치를 기반으로 한다.
대통령도 연방에 속한 왕족들이 뽑는다. 왕족이 돌아가며 대통령과 총리를 역임하는 구조다.
봉건 군주가 통치하고 있지만 국민들은 큰 불만이 없다. 무상 교육에 무상 의료가 기본이고, 국영 기업에 취업하는 것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세금도 내지 않는다.
복지 국가를 자처하는 북유럽과도 비교가 안 될 수준이다.
자국민의 복지를 기반으로 왕족들은 도시를 원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
두바이는 무역과 관광업에 집중했다. 아랍 최고의 무역 거점 도시를 만든 것이다.
석유가 고갈된 후에도 왕국이 먹고 살 방법이었다. 무역을 통해 글로벌 기업을 유치하고, 관광 산업을 통해 전 세계 부호들에게 휴양지로 주목받을 계획이었다.
그 결과 도시에 163층의 초고층 빌딩을 세우고, 바다 위에 7성급 호텔을 세웠다.
* * *
두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우린 공항에서 검사받지 않았다.
모하마드가 미리 손을 써 두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공항을 빠져 나서려는 순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도착했나요?”
“배려 덕분에 공항도 편하게 통과했습니다.”
“다행이네요. 공항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모하마드는 그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전화를 끊자 이장우가 나에게 물었다.
“모하마드 전화?”
“맞아, 안내할 사람을 보냈다고.”
공항 앞에는 슈퍼카들이 즐비했다. 마치 슈퍼카 전시장 같았다.
이장우가 한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롤스로이스 한정판 모델이 있네~!”
난 모하마드가 알려 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 젊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앞에 계시네요. 금방 가겠습니다.”
남자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롤스로이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장우가 유심히 보던 자동차다.
롤스로이스에서 남자가 내렸다. 그는 발목까지 오는 긴 옷에 머리에는 하얀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아자르라고 합니다.”
“김덕명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선 호텔로 가시죠.”
이장우는 아이처럼 들뜬 얼굴로 차에 탔다.
두바이는 계획도시답게 도로가 잘 정비돼 있었다.
해안을 따라 넓은 백사장이 보였다. 아랍에서 만나는 에메랄드빛 해변이다.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대부분 외국인이다.
해안 끝에 돛 모양의 건물이 보였다.
두바이의 상징과도 같은 호텔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돛 모양에서 착안한 디자인이 돋보였다.
실제로 바다 위에 호텔을 지었다. 돌로 인공 섬을 만들고 그 위에 호텔을 세웠다.
태풍이 와도 견딜 수 있게 건물 바닥에 수천 개의 철심을 박았다.
우리가 묵을 호텔은 실내 스키장이 보이는 곳이다.
“짐을 풀고 잠시 쉬시죠. 저녁에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아자르는 우릴 호텔에 내려주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이장우는 호텔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에 스키장이 있네!”
2005년에 아랍 최초로 개장한 실내 스키장이다.
“짐 풀고 한번 가 볼까?”
이장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 짐을 푸는 동안 난 중원건설의 차종문 대표에게 연락했다.
“두바이에 잘 도착했습니다.”
“안 그래도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있습니다. 다운타운에서 뵐까요?”
“제가 잘 아는 카페가 있습니다. 거기서 보시죠.”
차종문과 약속을 잡고 이장우와 함께 실내 스키장으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실내 스키장이다. 내부가 궁금했다.
축구장 3개를 합친 면적이라고 들었다.
스키장 앞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는 스키를 타고 오후에는 선탠을.’
포스터 문구처럼, 두바이에서는 스키와 해수욕을 동시에 즐길 수 있었다.
두바이가 아랍 최고의 관광지임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안이 정말 춥네.”
이장우가 정신이 확 드는 얼굴로 말했다.
6,000톤의 인공눈이 실내 스키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스키장 내부는 영하 4도를 유지한다.
섭씨 38도인 바깥과 대조적이다.
“시간 관계상 스키는 탈 수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김 대표님.”
“스키는 못 타도 꼭 봐야 할 게 있어.”
“그게 뭔데?”
“이쪽으로 와 봐.”
난 스키장 구석으로 그를 안내했다.
이장우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어, 정말 펭귄이 있네!”
남극에 있던 황제펭귄이 눈앞에 있었다. 두바이에 오기 전에 확인한 사실이다.
직접 눈으로 보니 신기했다.
사람들이 펭귄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었다.
“너도 사진 찍어 줄까?”
“고맙지만 사양할게. 펭귄과는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
그는 정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 * *
두바이 다운타운으로 걸었다. 63빌딩보다 높은 건물들이 즐비했다.
빌딩 숲 사이에 전통 양식이 돋보이는 건물이 있었다. 차종문과 약속한 장소다.
건물 내부도 아랍 전통 양식을 잘 살렸다. 양탄자와 독특한 디자인의 의자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차종문 대표가 손을 들었다.
그의 옆에 한 남자가 있었다.
중원건설에 봤던 남자가 아니었다.
차종문과 연배가 비슷해 보였다.
짧은 머리의 차종문과 달리, 볼륨감 있는 머리 스타일이 꼭 예술가 같아 보였다.
두꺼운 뿔테 안경이 각진 얼굴과 잘 어울렸다.
남자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상원이라고 합니다.”
“김덕명입니다.”
“신상원 씨는 중원건설과 함께 일하는 건축가입니다. 제 오랜 친구기도 하죠.”
신상원이란 이름을 알고 있었다. 건축의 노벨상이라고 부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유명 건축가다.
차종문이 이번 프로젝트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장우까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랍 전통 의상을 입은 남자가 잔을 들고 왔다.
차종문이 나에게 말했다.
“아랍 전통 방식의 커피입니다.”
뜨거운 모래로 내린 커피다. 500년 전 유목민들이 사막에서 커피를 마시던 방식 그대로다.
진한 커피 향이 정신을 맑게 했다.
가벼운 화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대표님은 머리를 짧게 하는 이유가 있나요?”
“짧은 머리가 어색한가요?”
“아니요, 잘 어울립니다.”
“젊은 시절 이곳 아랍에서 모래 밥을 먹을 때부터 머리를 짧게 잘랐습니다.”
“특별한 어떤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랍의 뜨거운 햇빛과 모래 때문이죠.”
아랍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다. 뜨거운 태양과 사막의 모래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차종문은 스카프 대신 머리를 짧게 하는 것을 선택했다.
“오늘 저녁에 모하마드와 만난다고 하셨죠?”
“네, 저녁에 왕궁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짧은 경험이지만 몇 가지 팁을 드려도 될까요?”
내가 반색하자 차종문 대표도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두바이는 왕정 국가입니다. 왕이 통치하는 곳이죠. 군주들은 절대 권력을 누리고 있지만, 자국민들을 위해서도 헌신합니다. 외국인들이 이곳에서 사업을 할 때도 자국민의 명의를 빌리게 해서 경제생활을 돕죠.”
나도 그 정도 상식을 알고 있었다. 국왕이 직접 국민들의 불편 사항을 직접 해결한 일도 있었다.
“문제는 왕족들과 직접 일을 할 때 발생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성실한 임금이긴 하지만 까다로운 타입이란 뜻이죠. 두바이에 지은 건축물들은 평범한 것들이 없습니다. 모두 왕족의 결정에 따라 지은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계 최고를 갈망하죠. 그것이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죠.”
차종문 대표의 말대로 두바이엔 평범한 건축물이 없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호텔부터 세계 최고의 높이를 자랑하는 빌딩까지 모두 비범한 것들이다.
“왕족들을 상대할 때도 평범하게 다가가서는 안 됩니다.”
차종문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이장우와 신상원도 귀를 쫑긋 세웠다.
“어떤 상황이든 사탕발림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상황이 나빠도 말인가요?”
“네, 좋든 나쁘든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합니다. 나쁜 상황도 좋게 포장하는 건 믿음을 떨어뜨리는 행동이니까요.”
“감언이설은 통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네요.”
“맞습니다, 오로지 믿음이 중요하죠. 돈 이야기를 할 때도 상대를 배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에게 돈이란 사막의 모래 같은 것이니까요. 가격이 얼마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신뢰입니다.”
차종문 대표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조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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