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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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의 보상

방청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사회자와 모진수도 놀란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에 모하마드 살라가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모하마드 살라라고 합니다. 남극에서 김덕명 씨와 만났습니다. 그때도 김덕명 씨의 기술을 높게 평가했죠.”

모하마드 살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콧수염이 보기 좋게 움직였다.

“두바이에 수경 재배 시설을 지을 계획입니다. 이번 일은 김덕명 씨와 함께 추진하고 싶습니다. 아직 정확한 금액을 확정하진 않았지만, 약 5,000만 달러 정도의 규모를 예상합니다.”

화상 통화 장면을 편집한 화면이었다.

모하마드는 자신의 영상을 허락하며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두바이 수경 재배 시설을 최대한 빨리 만드는 것이다.

처음엔 고민이 많았다. 한국 시설을 먼저 만들고 두바이 건을 해결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장우가 지하철에 수경 재배 시설을 설치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우린 서울과 부산으로 팀을 나눠서 재배 시설을 설치했다. 그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규모겠지만, 동료들은 자신감을 내비쳤다.

모하마드 살라가 나오는 화면이 끝났음에도 사람들은 아직도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었다.

모두가 꿈이라도 꾸는 얼굴이다.

오늘 토론에서 두바이 왕자가 출연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사회자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두바이에 수경 재배 시설을 짓는다는 게 사실인가요?”

“모하마드 살라의 말대로입니다. 두바이에 수경 재배 시설을 지을 계획입니다.”

“말씀대로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짓기도 전에 돈을 벌겠네요?”

“지리산 농부들은 작물만 재배하는 농업 회사가 아닙니다. 농업 기술을 세계로 수출하는 회사이기도 합니다.”

“5,000만 달러라면 한국 돈으로 얼마인가요?”

“지금 환율로, 대략 600억이 넘겠네요.”

“어마어마한 금액이네요!”

모하마드 살라가 나오고 분위가 완전히 반전됐다.

지금은 토론회장이 아니라 김덕명을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으로 변해 있었다.

모진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사회자도 그를 투명 인간 취급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저건 본질에 벗어난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는 펀딩에 관련한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모진수가 발악하듯 외쳤다.

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지금 펀딩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은 투자형 펀딩입니다. 지리산 농부들이 수익을 내면 펀딩에 투자한 사람에게도 수익을 보장하는 구조죠. 두바이에 재배 시설을 건설하는 지리산 농부들의 사업 내용은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는 내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연실 눈알을 돌리고 있었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제 말은 국내에 재배 시설을 짓는 게 우선이란 뜻입니다. 펀딩으로 모은 돈으로 국내에 재배 시설을 지을 거니까요.”

“그건 모진수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펀딩으로 모은 돈으로 국내에 재배 시설을 지을 겁니다.”

그는 음흉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먹잇감을 잡은 하이에나 같았다.

“그럼 땅 문제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대규모 재배 시설을 짓는 데 땅이 필요하지 않나요? 그 땅이 있기는 한 겁니까?”

난 한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논객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최소한 그때는 상식이 통하는 말을 했다.

지금은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고 있다.

“땅 문제라면 이미 확보해 두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제가 알기로는…….”

화면에 나병수와 계약한 서류가 나왔다. 신상정보를 지웠지만, 땅을 무상으로 임대한다는 말은 뚜렷하게 보였다.

20만 평의 땅이다. 대규모 재배 시설을 짓는데 충분한 땅이다.

모진수는 화면을 보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도 모진수를 주목했다.

그의 입에서 이번엔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한 눈빛이다.

나 역시도 궁금했다.

“물은 어떻게 해결할 겁니까?”

“물이라니요?”

“수경 재배 시설은 물이 많이 들어가니까요. 그 많은 물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는 겁니다!”

미친개의 마지막 발악이다.

“모진수 대표님은 수경 재배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내 물음에 모진수는 눈을 부릅떴다.

“제가 수경 재배가 뭔지도 모르고 이 자리에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하는 말씀을 들으니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김덕명 대표님,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함부로 말한 적 없습니다. 방금 모진수 대표님의 질문은, 수경 재배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하실 수 없는 말입니다.”

난 화면에 수경 재배에 관련한 이미지를 띄웠다.

수경 재배 시설에의 구조가 자세하게 나온 이미지다.

정말 만약을 대비해서 준비한 화면이다. 모진수가 이 정도는 공부하고 나올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미지에서 보시는 것처럼, 수경 재배는 물을 순환시켜 사용하는 구조입니다. 계속해서 물을 주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물을 갈아 주면 됩니다. 수족관의 어항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에어 펌프로 공기를 주입하기 때문에 물 안에 산소도 충분하고요.”

모진수는 내 말에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붕어처럼 눈을 깜빡일 뿐이다.

“수경 재배는 노지 재배보다 물이 적게 들어갑니다. 재배 시설을 짓는데 초기 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요. 저희가 펀딩을 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수경 재배 시설은 크기가 클수록 만들기 어렵다고 하던 데 맞나요?”

사회자가 상냥한 말투로 물었다.

“네, 맞습니다. 규모를 크게 할수록 재배 시설을 만들기가 까다롭습니다. 지금은 저희만의 기술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했습니다.”

“특허를 말씀하시는 거네요?”

“네, 수직 재배 관련한 특허입니다. 재배 시설을 층층이 쌓을 수 있는 시스템이죠. 수직 재배는 작물에 물을 공급하는 방식도 분무 방식입니다. 일반적인 수경 재배 시설보다 물을 더 절약할 수 있습니다.”

사회자는 모진수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진수 대표님, 그동안 팩트 패스트를 통해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에 문제 제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김덕명 대표의 답변을 들으니 어떠신가요? 다른 질문이나 의혹이 있으신가요?”

모진수는 사회자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멍한 눈으로 방청석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빛이 멍한 게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모진수 대표님께서 말씀이 없으신 걸 보니 이 정도면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질문 없으신가요? 마지막 발언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발언권이란 말에도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고개를 처박고 가져온 서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을 보고 있는 건지, 생각이 멈춰 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제 토론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럼 김덕명 대표님에게 마지막 발언 기회 드리겠습니다.”

사회자는 나를 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제가 준비한 게 있습니다. 화면을 함께 보시죠.”

화면에서 청년 농부 모집과 관련한 자세한 일정이 나왔다.

“원래 펀딩을 마치고 청년 농부 모집과 관련한 계획을 알리려고 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최초로 공개하고자 합니다.”

화면 안에 ‘부자 농부의 꿈을 이루세요.’라는 말이 눈에 띄었다.

“저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농부는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겠죠. 하지만 전 농사로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곶감으로 시작해 첨단 농업을 하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믿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많은 청년이 뜻을 함께하길 바랍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방청객과 지금 이 방송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하는 인사였다.

방청석에서 우렁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장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손바닥이 터져라 손뼉을 쳤다.

그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 * *

모진수와의 토론은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에 커다란 도움이 됐다.

인터넷 방송국 토론이었지만, 주류 언론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엄청나게 이슈가 됐다.

그날 당일 모인 펀딩 액수만 10억이 넘었다.

50억에서 주춤하고 있던 액수가 하루 만에 60억을 넘어갔다.

토론을 마치고 하동에 돌아왔을 때, 날 위한 식탁이 준비돼 있었다.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수고한 대표님 저녁밥이지.”

“저녁밥치고는 너무 근사한 데요?”

“전부 우리 대표님이 좋아하는 걸로만 차렸지.”

삼겹살에 잘 익은 목살까지, 식욕을 자극했다.

어머니가 만든 잡채도 있었다. 밭에서 딴 상추까지 한 상 가득하다.

아버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이런 날에 소주가 빠지면 안 되죠. 대표님 한잔 받으세요.”

이동춘이 다가와 술잔을 건넸다.

“고기도 안 먹었는데 술부터 먹어요?”

“진도가 너무 빨랐나요?”

이동춘의 말에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다.

본격적인 삼겹살 파티가 시작됐다.

즐거운 날이다.

그동안 애써준 동료들이 고마웠다.

오늘만큼은 이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

동료들은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오늘 토론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화제의 중심은 나였다.

토론이 아니라 김덕명을 위한 인터뷰였다며 떠들썩했다.

백민석이 한기탁에게 말했다.

“모진수인가 하는 놈 공부도 안 하고 토론에 나온 거 같던데, 좀 모자라는 놈 아닌가요?”

“그러게. 이름하고도 닮았네. 모진수가 아니라 모지리야.”

한기탁의 말에 다들 포복절도했다.

“그 사람, 수경 재배의 ‘수’ 자도 모르는 것 같던데요?”

민요한도 한마디 거들었다.

“수경 재배만 모르는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었어. 억지만 부릴 줄 알았지.”

이장우는 유쾌한 말투로 말했다.

“저는 대표님이 그놈 매부리코를 납작하게 하는 모습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동춘이 날 보며 말했다. 이미 술에 취한 얼굴이다.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대표님이 마지막 말을 하는 데 감동한 나머지 그만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이동춘은 지금도 눈가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아버지, 약주가 과하신 거 같아요.”

이장우가 이동춘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놈아, 이런 날에는 좀 마셔도 되는 거야.”

“알겠어요. 아버지.”

이장우는 아버지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지리산 농부들의 일원이라는 게 정말 자랑스러웠습니다.”

이동춘의 동료들을 보며 말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우리 아버지, 오늘 좀 취하셨습니다. 다들 이해 좀 해 주세요.”

난 이동춘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도 아버님같이 훌륭한 동료가 있어서 정말 든든합니다.”

그때 이동춘의 눈물샘이 폭발하고 말았다.

이동춘은 나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우리 아버지 너무 취하셨네. 내가 모시고 가야겠다.”

이장우가 이동춘을 업었다.

“조금만 기다려. 아버지 모셔다드리고 금방 다시 올 테니까.”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다들 기분 좋게 취한 상태였다.

한기탁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모진수랑 토론 한 거, 정말 잘한 거 같아.”

“토론하지 말라고 말렸던 것 기억 안 나요?”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한기탁은 능청스럽게 딴청을 피웠다.

“아무튼, 오늘은 기분이 참 좋네!”

“저도 좋네요.”

“역시, 우리 대표님은 백마 탄 초인이었어.”

* * *

토론이 끝나고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모진수와의 토론은 지리산 농부들의 입에만 오르내리는 화젯거리가 아니었다.

언론에서는 김덕명과 모진수의 토론을 크게 다뤘다.

가장 큰 이슈는 지리산 농부들이 두바이에 수경 재배 시설을 건설한다는 이야기였다.

나와 모하마드의 사진이 신문 1면에 실릴 정도다.

펀딩과 관련한 악성 루머도 종식됐다. 동시에 ‘팩트 패스트’의 배너 광고도 사라졌다.

가장 기분이 좋았던 건, 청년들의 반응이었다.

청년들이 지리산 농부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웹페이지가 마비될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토론의 긍정적인 영향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일하던 한기탁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펀딩 모금 액수가 80억을 넘었어!”

“뭐라고요? 정말요?”

백민석도 자리에서 일어나 화면을 확인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나에게 달려왔다.

“덕명아, 80억이 넘었어!”

기쁨에 넘쳐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다.

유쾌한 후원자

펀딩이 끝나기까지 2주일이 남았다.

모금액은 90억이 넘었다.

목표액의 80%를 가뿐히 넘은 상황이다.

남은 기간에 모금액의 100%를 모으는 일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목표액을 초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모진수와의 토론회 이후엔 어떤 악재도 등장하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일상이다.

동료들도 여유를 되찾았다.

난 사무실에서 이후 일정을 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일하던 중 누군가 등을 두드렸다.

백민석이다.

“바빠? 잠깐 이야기 좀 할까?”

처음엔 커피 한잔하자는 뜻으로 여겼다.

난 그를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사이, 그의 입에서 낯익은 이름 나왔다.

“정가희도 펀딩에 참여했어.”

정가희는 지리산 농부들의 초창기 멤버다. 지금은 양초 학교를 책임지고 있다.

“가희도 우리와 한마음이니까.”

난 당연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동료들도 펀딩에 참여했다. 동료들에게 무리해서 큰 액수를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정가희가 펀딩에 참여한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펀딩 페이지가 열리자마자 100만 원을 내고 펀딩에 참여했다.

백민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혹시 가희가 얼마를 투자했는지 알아?”

“100만 원 내고 참여한 걸로 알고 있어.”

“그건 초반이고. 최근에 참여한 액수 말이야.”

“최근에도 또 돈을 냈다고?”

“아직 모르고 있었구나?”

“얼마나 냈는데?”

“그게……. 액수가 좀 돼.”

백민석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봐. 가희가 또 얼마를 더 낸 거야?”

“5천만 원이나 투자했어.”

“5천만 원?”

하마터면 입안에 있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동료 중에서 최고 액수다.

백민석이 주변을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다.

“덕명아 있잖아……. 아무래도 내 생각엔 가희가 로또에 당첨된 거 같아.”

“로또?”

“그게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액수야.”

“그럴 수도 있겠네?”

가만히 생각하니 그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가희는 돈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월급의 대부분을 양초 학교 아이들을 위해서 쓰고 있었다.

거액이 생긴 방법은 복권밖에 없었다.

“덕명이 네가 한번 만나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로또에 당첨되면 불행해진다는 말이 있으니까.”

“불행해진다고?”

“통계가 그렇단 소리야.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으로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많다잖아.”

백민석은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 * *

그날 저녁 정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지내?”

“김덕명이 무슨 일로 나에게 전화를 한 거지?”

정가희 까칠한 말투가 귀를 간지럽혔다.

“뭐 또 부탁할 일이 있는 건가?”

“부탁이라니?”

양초 학교 아이들과 황규대 농부를 도운 일이 있었다.

난 그가 이동 양봉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왔다.

그때 그녀가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 장터까지 왔었다.

“그냥 안부를 묻고 싶었을 뿐이야.”

“아주 잘 지내고 있어.”

“내일 양초 학교에 갈까 해.”

“무슨 이유로 오는 건대? 혹시 나 때문에 오는 건가?”

“정가희를 보고 싶은 것도 이유 중 하나야.”

“다른 이유도 있다는 거네?”

“양초 학교 아이들도 보고 싶고.”

난 일부러 펀딩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 말을 피하는 것 같았다.

느낌이 오묘했다.

그 뒤로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다.

전화를 끊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실은 나도 너에게 할 말이 있긴 해.”

“무슨 말인데?”

“뭐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겠지만, 좋은 일이야.”

“좋은 일?”

“아무튼, 내일 만나면 이야기해 줄게.”

그녀의 목소리가 무척 밝았다.

좋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어쩌면 백민석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 * *

다음날, 아침 난 양초 학교로 향했다.

어제 퇴근할 때 한기탁에게 양초 학교에 다녀오겠다고 말해 두었다.

그는 가는 김에 바람이나 쐬고 오라는 말까지 했다.

요즘 지리산 농부들은 분위기는 최고로 좋았다.

동료들의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난 기분 좋게 서울로 향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순간 정가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얀 피부에 고양이처럼 얌전해 보이는 여자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인상이 그렇다는 것이다.

가까이서 보면 비로소 본모습을 알게 된다. 그녀는 성에 안 차거나 마음에 안 들면 불평불만을 마구 늘어놓았다.

하얀 눈이 내리던 겨울, 그녀와 함께 지장사에 간 일이 있었다.

양봉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정가희가 산길을 오르는 내내 투정을 부렸다. 그녀를 간신히 달랬던 기억이 났다.

그때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돌이켜 보니 지금은 재미있는 추억이 됐다.

그때 라디오에서 진행자가 하는 말이 들렸다. 평소라면 흘려보냈을 이야기다.

“로또에 당첨되면 정말 불행해질까요?”

“대부분 불행해진다고 하네요.”

백민석이 어제 했던 말이 라디오에서도 나왔다.

나도 그 말이 걸려서 로또와 관련한 내용을 검색했다.

심지어 로또에 당첨한 사람들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를 보기도 했다.

백민석의 말은 사실이었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불행해졌다.

커다란 행운과 동시에 불행이 덮친 것이다.

정가희, 그녀가 걱정되는 대목이기도 했다.

* * *

정가희의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사무실에도 없었다.

“정가희 선생님 어디 계시니?”

난 복도를 지나던 한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꿀벌 이미지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고 있던 귀여운 소녀다.

“지금 수업 중이세요.”

난 복도를 따라 걸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양초 학교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후원할 목적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단순한 후원만 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학업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정가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교실에서 나왔다.

정가희도 수업을 마치고 나왔다.

“안에서 기다리지?”

“수업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녀가 날 보며 웃었다. 하얀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바로 또 수업 있는 건 아니지?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야.”

“그거 잘됐네. 우리, 나가서 이야기할까?”

“나가자고?”

“좀 걷고 싶어서.”

양초 학교에서 조금만 걸으며 인사동이다. 그 전엔 용건을 마치고 바로 하동으로 내려가기 바빴다.

오늘은 시간 여유가 있었다.

“데이트 신청인가?”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받아 주지.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그녀가 가방을 챙겨서 나왔다.

한여름이었지만 시원한 바람에 기분이 산뜻했다.

인사동 거리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그녀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어디 가려고?”

“이 안에 좋은 곳이 있어.”

골목길 끝에 마당이 딸린 작은 카페가 나왔다.

사과나무라는 이름답게 마당 한가운데 아담한 사과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다.

“내가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카페야.”

“미로 같은 골목에 이런 곳도 있었네.”

“오늘은 내가 살게. 좋은 일도 생겼으니까.”

그녀가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좋은 일이 생겼다는 말에 확신이 들었다.

로또에 당첨된 게 분명했다.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펀딩 관련한 이야기는 일부러 꺼내지 않았다.

“아영이, 대학에 합격했어.”

그녀가 불쑥 남아영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빵 가게 도둑으로 몰렸던 남아영이다.

그 아이가 벌써 대학에 들어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벌써 대학생이라고? 세상에! 나한테는 연락도 없었는데.”

“키다리 아저씨에겐 나중에 알리겠다고 했어.”

“내가 키다리 아저씨?”

“그럼 김덕명 말고 키다리 아저씨가 또 있나?”

정가희는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그런데 왜 나중에 알리겠다고 한 거야?”

“키다리 아저씨에게 주고 싶은 게 있대. 그게 아직 완성이 안 됐나 봐.”

“그게 뭔데?”

“그건 아영이만 아는 비밀이지.”

“아영이는 전공으로 뭘 선택했어?”

“미대에 들어갔어.”

“미대라면, 화가를 목표로?”

“아영이 원래 손재주가 많았어. 밀랍 양초도 잘 만들었던 거 기억하지?”

정가희의 말대로 손재주가 좋은 아이였다.

남아영이 만들었던 밀랍 생일 양초가 떠올랐다.

녹차 밭에서 열린 결혼식에서 그녀가 만든 양초를 썼다.

남아영이 나에게 주겠다는 선물이 궁금했다.

“다 정가희 덕이지.”

“내가 뭐 한 일이 있다고?”

“지금까지 양초 학교 아이들을 잘 보살펴 줬잖아.”

“나보다 키다리 아저씨를 더 좋아하던데?”

우린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커피가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옛날이야기를 나눴다.

황유신 선생님에게 곶감을 배웠던 일이며 지장사에서 생활했던 이야기가 끝날 줄 몰랐다.

간만에 유쾌한 시간이다.

우리는 최근 모진수와의 토론일이며 지리산 농부들 펀딩과 관련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녀가 갑자기 훅 들어오기 전까지는.

“나 좋은 일 생겼어.”

정가희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처음엔 로또라고 생각했다.

지금 다시 보니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장하다 못해 엄숙한 기운마저 느껴졌기 때문이다.

“혹시, 결혼하니?”

순간적으로 떠오른 단어였다.

“뭐라고?”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아니야?”

“결혼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럼 로또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펀딩에 큰 금액을 투자했잖아? 로또에 당첨된 거 아니었어?”

“나 지금까지 로또 한 번도 사 본 적 없거든?”

“로또도 아니라고? 그럼 대체 뭐야? 좋은 일이라는 게?”

정가희는 혼자서 킥킥대며 웃었다.

“왜 웃어?”

“너 당황하는 모습이 웃겨서.”

“그만 놀리고 진실을 말해 줘.”

그녀가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가방이 좀 크다고 느꼈다.

가방에서 나온 것은 한 권의 책이다.

“책이네?”

“이 책, 김덕명에게 주는 선물이야.”

그녀가 나에게 책을 건넸다.

받자마자 제목부터 봤다.

“책 제목이 유치하네, 꿀과 벌이라니. 합치면 꿀벌이잖아.”

제목이 유치하다는 말에 그녀의 얼굴이 변했다.

당장이라고 날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다.

가만히 보니 저자가 정가희다.

그때 그녀가 발표하듯 말했다.

“나 소설가로 데뷔했어.”

한국 신문에서 주최하는 장편 소설 공모전이다.

‘꿀과 벌’이 대상을 받았다.

대상 상금이 정확히 5천만 원이다.

난 그제야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다.

정가희는 로또에 당첨된 게 아니었다.

그녀가 어릴 때부터 희망하던 소설가가 된 것이다.

“이 소설 무슨 내용이야?”

“법의학자 이야기야.”

“법의학자?”

“벌에 쏘여서 초능력을 갖게 된 법의학자 이야기.”

“그래서 제목도 꿀과 벌이구나.”

난 소설의 첫 장을 펼쳤다.

주인공 이름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인공 이름이 나랑 똑같네?”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아주 좋아.”

“영광인 줄 알아.”

그녀는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소설가 된 거 진심으로 축하해. 그런데 상금을 전부 우리 펀딩에 넣은 거야?”

“세금 떼고 5천이 좀 안 됐는데, 내 돈으로 5천을 채웠지.”

“너를 위한 것도 남겨 두지 그랬어?”

“나를 위해서 펀딩에 돈을 넣은 건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난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

“난 지리산 농부들에 투자한 거야. 네가 방송에 나와서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거든. 수익을 내면 투자한 만큼 돈을 준다고 했던 말.”

“당연히 기억하지. 수익을 내면 투자했던 사람들에게 이익을 나눌 거야.”

“그러면 됐어.”

“너는 돈에 큰 관심 없었잖아?”

“지금은 관심이 생겼어. 하고 싶은 일이 생겼으니까.”

“하고 싶은 일? 그게 뭔데?”

그녀가 손짓했다.

귀를 빌려 달라는 신호다.

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말이야…….”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정가희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 투자에 성공해서 도서관 지을 거야.”

난 귀를 떼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가희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도서관을 지을 장소도 생각해 놨어.”

“어디다 지을 생각인데?”

“하동이야.”

“하동?”

그녀가 건넨 책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소설가의 꿈을 이루고 도서관을 짓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유가 궁금했다.

“갑자기 도서관은 왜 짓고 싶은 거야?”

“나도 지리산 농부들이니까.”

“그거 무슨 말이야?”

지리산 농부들이기 때문에 도서관을 짓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물음에 그녀는 눈을 흘겼다.

“김덕명이 방송에 나와서 했던 말 때문이야.”

“내가 방송 한두 번 한 것도 아니고……. 아무튼, 어떤 거 말하는 거지?”

“하동에 청년 농부들이 넘치게 할 거라고 했잖아.”

“그게 도서관을 짓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넌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정가희가 새침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너도 잘 알잖아? 하동에는 젊은 사람들이 문화생활을 즐길만한 곳이 별로 없어.”

아하! 싶었다. 그녀의 말대로 하동에는 문화 시설이 거의 없다.

정가희가 만들려는 도서관은 단순히 책만 있는 공간이 아니다. 복합 문화 시설을 만들고 싶었던 거다.

전시와 다양한 문화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그런 시설.

“미안, 네가 그런 생각까지 하는 줄 몰랐어.”

이제야 정가희의 표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녀도 지리산 농부들의 일원이었다.

그녀만의 방식으로 지리산 농부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정가희의 속 깊은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소설가가 되더니 사람이 달라졌네?”

“달라지지 않았어.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내가 지리산 농부들이라는 사실은.”

난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녀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풀꽃이란 시야. 널 보고 있으니까 그 시가 생각나네.”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정가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놀리는 거 아니야. 고마워서 그래. 그리고 도서관은 꼭 지어 줘.”

“꼭 지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반드시 성공해.”

우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벌써 저녁 시간이다.

그녀와 함께 카페에서 간단하게 저녁까지 먹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그녀가 물었다.

“아영이 잠깐 보고 갈래?”

“아영이?”

“이 시간에는 양초 학교에 있을 거야.”

아영이가 지금은 미대생이 됐다니, 세월이 참 빠르다. 잠시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정가희와 함께 양초 학교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몇몇 교실에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정가희가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여기야. 아영이가 수업하는 교실.”

교실 안에서는 아이들이 석고상을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선생이 한 아이의 그림을 봐주는 중이다.

난 목소리를 낮춰 정가희에게 물었다.

“저 선생님이……. 남아영 아니야?”

“맞아. 지금은 양초 학교 미술 선생님이야.”

언제나 아이일 거라고만 여겼다. 지금은 어엿한 어른이 돼 있었다.

“난 이제 갈게.”

“왜? 아영이 안 보고 가게?”

“아영이가 나에게 줄 게 있다며. 그게 완성되기 전까지 기다려야지.”

정가희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왔었다는 말은 하지 말고.”

“정말 키다리 아저씨 같네.”

그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작별 인사를 하려는 순간, 그녀가 나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아이들이 만든 거야. 가져가.”

상자를 열어 보았다.

밀랍으로 만든 비누가 들어 있었다.

모양이 독특했다.

“비누 모양이 꼭 컨테이너 같네.”

“지리산 농부들이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들 때부터 아이들이 만들었어. 우리 키다리 아저씨 잘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난 컨테이너 모양의 비누를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잘 쓸게.”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기탁에게 연락이 왔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상의할 게 있어. 단골 포장마차에서 보자.”

한기탁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손을 들었다.

“이미 여기 소주 한 병이요.”

그의 표정이 밝았다.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양초 학교는 별일 없고?”

“네, 모두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정가희, 정말 로또 당첨된 거야?”

한기탁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때 사장님이 소주를 내려놓았다.

그녀도 속삭이는 말투로 물었다.

“누가 로또에 당첨됐어?”

“아니에요. 농담한 거예요.”

한기탁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포장마차 사장님은 그의 얼굴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조금만 기다려. 계란찜 서비스로 줄 테니까.”

“역시, 우리 이모님 최고.”

사장님이 사라지자 한기탁이 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로또에 당첨된 거야?”

그의 진지한 표정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는 거야? 난 심각한데.”

“백민석의 예언은 빗나갔어요.”

“뭐야? 아니었어?”

그의 잔뜩 긴장했던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럼 그 돈은 어디서 난 거야?”

난 가방에서 책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 책은 뭐야?”

“한번 확인해 보세요.”

“꿀과 벌? 제목이 유치한데?”

“똑같이 그렇게 말했다가 가희에게 면박당했어요.”

“뭐야? 그럼 이거 정가희가 쓴 책이야?”

한기탁은 그제야 책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정가희가 쓴 소설책이네! 상금이 무려 5천만 원?”

“가희가 상금을 몽땅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에 넣었어요.”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가희가 소설가가 되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아무튼 축하주 한잔해야겠다!”

한기탁은 잔에 술을 따랐다.

“설마 이 일 때문에 보자고 한 거예요?”

“상의할 일은 따로 있어.”

한기탁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벤처 크라우드에서 메일이 왔어.”

한기탁의 눈이 반짝였다.

“펀딩과 관련한 내용인가요?”

“펀딩과는……. 상관없는 건데~”

“무슨 내용인데요?”

“샐러드 계약 건이야.”

“샐러드 계약이요?”

한기탁은 벤처 크라우드로부터 받은 내용을 전달했다.

우리가 재배할 샐러드를 받고 싶다는 내용이다.

샐러드를 공급할 곳은 패스트푸드 업체 G푸드다.

G푸드는 전국에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벤처 크라우드가 마케팅하는 업체이기도 했다.

벤처 크라우드를 통해 우리에게 의사를 물은 것이다.

“전국에 있는 매장에 우리 샐러드를 넣고 싶다고 하네?”

“전국이요? 우리에겐 그 정도 샐러드가 없잖아요.”

“나도 당연히 알고 있지. 새로 짓는 재배 시설을 말하는 거야.”

“그럼 미리 계약하는 뜻인가요?”

“맞아. 재배 시설을 짓기도 전에 계약이 들어온 거야.”

그때 사장님의 계란찜이 등장했다.

한기탁은 계란찜을 먹고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펀딩 모금액은 80%를 넘은 상태야. 목표액 100억 중에 90억을 넘겼어. 이미 펀딩에 성공한 거지. 우린 계획대로 대규모 재배 시설을 짓게 될 거야. 계약이 성사되면 시설을 짓자마자 바로 샐러드를 납품할 수 있어. 대규모 재배 시설에 걸맞게 전국 단위로 샐러드를 납품하게 될 거고.”

난 그의 말을 들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기쁘지 않아?”

“좋긴 해요.”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닌데?”

한기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좋은 기회가 분명했다. 하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에게 샐러드를 요청한 업체가 문제다.

패스트푸드 업체 G푸드는 건강하지 못한 업체이기 때문이다.

난 G푸드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었다. 회귀하기 전 일들이다.

햄버거에서 벌레가 나오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한기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팅을 잡을까 하는데, 괜찮겠어?”

벤처 크라우드의 성의를 봐서라도 미팅엔 무조건 참석해야 했다.

* * *

며칠 후, 한기탁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한기탁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서울로 떠나기 전 그에게 보여 준 문서 때문이다.

“난 G푸드가 이런 회사인 줄은 몰랐어. 그때 네가 왜 표정이 안 좋았는지 알 거 같아.”

“저도 이번에 자료 찾아보면서 확실히 알았어요.”

오늘 미팅은 정중한 거절이 목적이다.

한기탁을 설득하기 위해 G푸드와 관련한 자료를 검색했다.

미래에 발생할 문제도 문제지만 지금도 문제가 많은 회사였다.

점주들에게 갑질을 하고 유통 기한이 지난 식재료를 사용한 일도 있었다.

한기탁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러 정보를 확인한 이상, 그도 G푸드와의 계약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G푸드가 점주들에게 벌인 일을 보며 혀를 차기도 했다.

“거절할 건데 만나야 할 이유가 있나?”

“그냥 거절하는 것과 만나서 거절하는 건 차이가 커요.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할 생각이에요.”

“벤처 크라우드도 중간에 끼어 있으니 그게 좋겠지?”

벌써 강남 한복판이다. 우린 꽉 막힌 도로를 지나 G푸드 사옥 안으로 들어갔다.

“본부장 문재혁이라고 합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문재혁은 식품과 관련한 모든 일을 총괄한다.

검은 얼굴에 피부 상태가 좋지 않았다. 피로가 누적된 얼굴이다.

그는 최근에 불거진 수입산 농산물 사건을 먼저 꺼냈다.

“최근, 수입산 농산물로 엄청 애를 먹었습니다. 앞날을 걱정하던 차에 지리산 농부들을 알게 됐죠. 샐러드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하신다고 했는데, 사실인가요?”

“네. 방송에서 말한 대로 샐러드 가격을 일정하게 유지할 계획입니다. 수경 재배 시설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까요.”

“정말 대단하시군요. 펀딩도 성공적으로 진행 중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문재혁 옆에 있던 검은 정장의 남자가 서류를 꺼냈다.

“이게 저희가 준비한 계약서입니다. 아직 시설을 짓지 않았지만,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거죠.”

미래를 보고 투자한다는 말이 걸렸다.

그들의 장래는 그리 밝지 않았다.

난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폈다.

독소조항이 눈에 띄었다. 재배 시설 문제로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시엔 모든 책임이 우리에게 지우는 내용이다.

한기탁도 그 부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이 자리에서 따질 문제는 아니었다.

G푸드를 만난 목적은 정중한 거절에 있었다.

계약서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문재혁이 입을 열었다.

“책임 이행에 관련한 부분은 다른 업체도 동일한 조건을 적용합니다.”

“계약 조건을 바꿀 순 없다는 뜻인가요?”

“회사에서 정한 조건이라 바꾸긴 힘듭니다. 혹시 문제라도……?”

문제라면 수도 없이 댈 수 있는 계약서다.

그의 생각은 우리와 다른 듯했다. 많이 배려했다는 얼굴이다.

“우선 제안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계약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저희의 제안을 거절하시는 건가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아직 재배 시설을 만들기도 전이기 때문이죠.”

“그럼 재배 시설이 다 만들어지면 그때 계약을 고려하시겠다는 건가요?”

“그것도 당장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검토를 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문재혁 본부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상황에 따라 책임 소재에 관련한 조항을 변경할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이 바뀌는 순간이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G푸드는 현재 국내 패스트푸드 1위 업체다.

이런 곳에서 우리와 계약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업계 1위가 이 정도 반응이라면 내가 원하는 업체도 분명 손을 내밀 것 같았다.

“지금은 재배 시설을 만드는 게 우선입니다. 계약과 관련한 내용은 그 후에 상의하면 어떨까요?”

문재혁은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미팅을 마치고 사옥을 나왔을 때다.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인기가 이렇게 높을 줄 몰랐네. 업계 1위가 계약 조항까지 바꿔 주겠다고 하고.”

“그만큼 우리 기술을 인정해 주는 거겠죠.”

“그럼 이제 계약은 물 건너간 건가?”

“아니요. 아직 기회가 있어요.”

“무슨 기회가 있다고?”

그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운은 모험하는 사람을 따라온다

G푸드와 미팅을 한 뒤,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역으로 제안서를 보낸 것이다. 난 함께 일하고 싶은 업체들에 제안서를 보냈다.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 계약과 관련한 제안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펀딩이 끝나고 해야 할 일이었다.

G푸드의 제안을 받고 생각을 바꿨다. 업계 1위가 움직일 정도면 다른 업체들도 충분히 관심을 보일 거라고 여겼다. 게다가 아직 펀딩 기간도 열흘이나 남은 상황이다.

현재까지 모금액은 95억이다. 지금 상태라면 100억은 충분히 가능했다.

난 목표를 새롭게 설정했다. 펀딩 목표 금액을 초과 달성하고 싶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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