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나병수의 집이다.
집사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은 2층 응접실에 계십니다.”
항상 서재에서 그를 만났다. 응접실에서 만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집사가 날 응접실로 안내했다.
나병수가 응접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도.
“오랜만이군. 앉게.”
창백한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상냥하게 느껴졌다.
2층 응접실은 식당으로 쓰는 장소 같았다.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불렀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병수는 집사에게 손짓했다. 집사가 나가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펀딩은 어떻게 되고 있나?”
“그걸 어떻게?”
그의 입에서 펀딩이란 단어가 나올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어떤 의도인지 더 궁금해졌다.
난 간단하게 펀딩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배선아 기자에게 말했던 것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펀딩과 관련한 이야기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뒤에 요리사로 보이는 남자도 있었다.
나병수와 나의 메뉴는 달랐다.
내 앞에는 스테이크가 있었고, 나병수의 앞에는 멀건 죽이 놓였다.
집사는 음식 세팅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나병수가 내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보며 말했다.
“이제 고기 하나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됐군. 자네라도 마음껏 들게.”
그저 저녁 한 끼 먹자고 부른 자리 같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말없이 스테이크를 썰었다.
나병수는 입맛이 없어 보였다. 몇 술 뜨더니 곧 수저를 내려놓았다.
“죽조차도 먹기 힘든 처지가 됐구먼.”
그는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나에게 땅을 빌리려 왔던 때가 생각나는군. 내가 자네에게 짓궂은 장난을 쳤지.”
그때 독소조항을 감수하고 땅을 임대했다.
나병수의 미래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난 자네가 나 같은 종류의 인간일 거라고 생각했네.”
난 포크를 내려놓고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나처럼 돈에 영혼을 뺏긴 남자라고 생각했지.”
그는 힘겹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빛은 날카롭지만 목소리는 차분했다.
“내 착각이었네. 자네를 두 번째로 본 날 알게 됐네. 그날 내게 했던 말 기억나나?”
그에게 나의 꿈을 말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나의 목표에 대해서.
“많은 사람과 함께 꿈을 이루겠다는 말을 듣고 알았네. 자네는 나와는 좀 다른 인간이라는 걸.”
나병수의 전동 휠체어가 기계음을 내며 움직였다. 그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도 자네의 일에 동참할 수 있겠나?”
창백한 얼굴에 박혀 있는 두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펀딩에 참여하겠다는 말은 아닐세.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난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긴장감이 돌았다.
나병수는 상대를 긴장하게 만드는 독특한 능력이 있었다.
“대규모 재배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지 않나? 그 땅을 무상으로 빌려주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다.
독이 든 사과인지 알아야 했다. 그가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고는 하지만 속셈을 알 수 없었다.
나병수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다.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역시 자네는 보통 사람이 아니군. 땅을 거저 빌려주겠다는데 이유부터 묻다니.”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나병수는 기분이 좋은지 껄껄거리며 웃었다.
“자네와 내가 닮은 구석도 있군. 나도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
그가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공짜가 아니라 기회네.”
난 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묘하게도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밝힌다면, 자네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어서라네.”
그의 휠체어가 나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어느새 그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난 평생 돈을 벌기 위해 살았네. 그렇게 번 돈으로 악착같이 땅을 샀지. 남들이 날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었네. 그게 내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으니까.”
마음을 한꺼번에 쏟아 내듯 말했다.
“결국, 남은 건 땅밖에 없네. 죽어서는 가져갈 수 없는 땅이지.”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으로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인생의 끝자락에 느끼는 허무함이다.
“펀딩에 성공한다는 조건을 달고 싶은데, 괜찮겠나?”
“좋습니다. 펀딩에 성공해서 어르신의 땅에 재배 시설을 짓겠습니다.”
“자네는 언제나 성공을 자신하는군.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
“자신에 대한 믿음이죠.”
나병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저녁을 마치고 나가는 길이다.
집사가 조용히 날 불렀다.
그는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꺼냈다.
땅을 무상으로 임대하는 계약서다.
무려 20만 평의 땅이다.
목장을 운영하기 위해 빌렸던 땅보다 더 넓었다.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집사가 말했다.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도 엿볼 수 있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기탁을 불렀다.
그가 편안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늦은 밤에.”
“중요한 소식을 알려 주려고요.”
“그런 중요한 소식이라면 좋은 곳에 가서 들어야지.”
한기탁은 단골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소주에 꼼장어를 시키고 나에게 말했다.
“이제 말해도 돼. 그 중요한 일.”
“땅을 구했어요.”
난 주변을 둘러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기탁도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땅을 구했다고? 무슨 땅?”
“재배 시설을 만들 땅이요.”
“뭐라고? 그게 정말이야?”
한기탁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주인 아주머니는 볼이 빨개진 한기탁을 보고 기분 좋게 말했다.
“계란찜은 서비스~”
“고마워요, 이모.”
한기탁은 주인 아주머니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속삭이는 말투로 물었다.
“우리 시설이 들어갈 땅을 구했다고?”
“네. 땅을 구했어요.”
난 계약서를 꺼냈다. 한기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약서를 쳐다보았다.
술 생각도 사라진 것 같았다.
“정말 땅을 구했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는 손가락으로 계약서에 나온 이름을 가리켰다.
검지가 나병수의 이름을 누르고 있었다.
길게 이야기할 장소가 아니다.
난 최대한 간략하게 사연을 전했다.
한기탁은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 영감,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야?”
한기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펀딩에 성공하는 조건이 깔려 있어요.”
한기탁은 그제야 소주잔을 들었다.
“우선 한잔해.”
오늘은 나도 술 생각이 났다.
시원하게 한잔 털어 넣었다.
시원한 소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데, 남극에서 먹던 빙하 소주 맛이 났다.
한기탁이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
“사람이 변할 수도 있는 건가?”
“변할 수도 있죠.”
“아무튼 좋은 일이다. 솔직히 땅도 걱정이었거든.”
“선배도 신경 쓰고 있었네요.”
“당연하지. 경영지원팀장이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쓰냐?”
그가 소주잔을 훔치며 말했다.
“이제 펀딩에만 집중해 주세요. 땅은 걱정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대표님.”
* * *
펀딩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초반 흥행과 달리 조금 힘이 빠진 상태다.
일주일 만에 10억을 모았지만, 한 달이 된 지금은 20억 정도가 모였다.
정체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처음엔 주변의 지인들과 지리산 농부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 뒤로는 소소하게 반응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기탁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액수가 도통 오르지 않네.”
“돌파할 방법이 있어요. 2차 이벤트 들어가야죠~!”
“방법이 있다고?”
난 그에게 방금 받은 따끈한 서류를 내밀었다.
한기탁은 서류를 보며 외쳤다.
“드디어 특허가 나왔네!”
앵커의 옆자리
펀딩이 정체된 시점에 장마가 시작됐다.
특허가 나왔다고 해서 문제가 당장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특허를 이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난 한기탁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공대식 대표가 우릴 맞았다. 그의 얼굴에서 초조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도 펀딩이 정체된 걸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펀딩 같았으면 벌써 성공했다고 말했을 겁니다. 무려 20억이나 모았으니까요.”
“우린 목표 금액까지 아직 갈 길이 멀죠.”
“아무래도 100억 원은 적은 돈이 아니니까요.”
“지금처럼 모금액이 모인다면 목표 금액까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공대식 대표는 안경테를 들어 올렸다. 긴장한 얼굴이다.
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체된 상황을 시원하게 뚫을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인가요?”
그때 한기탁이 그에게 특허증을 내밀었다.
공대식 대표는 안경까지 벗고 특허증을 자세히 보았다.
“특허를 벌써 받으셨군요!”
“유능한 변리사를 고용했으니까요.”
일부러 유능한이란 단어를 꺼냈다.
벤처 크라우드도 유능하게 일해 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공대식 대표도 그 말을 이해한 것 같았다.
“저도 실력 발휘 좀 해야겠네요.”
안경 속의 두 눈이 빛났다.
특허증을 받는 순간부터 벤처 크라우드에 일을 맡길 생각이었다.
벤처 크라우드는 마케팅 일도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 보도 자료를 배포할 생각이었다.
“곧 보도 자료를 배포하겠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보도 자료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국내 기자들에게만 배포하기 아깝네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외신 기자들에게도 보도 자료를 만들어서 배포하면 어떨까요?”
난 한기탁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도 고민하는 듯 보였다.
아직 국제 특허를 받기 전이기 때문이다.
공대식 대표도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김 대표님 말씀대로 유능한 변리사라면 국제 특허를 받는 것도 시간문제겠죠?”
그 말에 한기탁이 나를 보며 끄덕였다.
나도 그 정도는 문제 될 게 없다고 판단했다.
“공 대표님 말씀처럼 외신에도 보도 자료를 배포하죠.”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 *
공대식 대표는 일을 빠르게 처리했다.
미팅 다음 날 보도 자료가 나갔다. 국내 언론사뿐만 아니라 외신까지도 지리산 농부들의 특허에 대해서 다뤘다.
보도와 동시에 펀딩도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일주일 만에 10억 모았던 것과 같은 흐름이다.
모금액만 증가한 것은 아니었다.
공중파 뉴스에서 섭외까지 들어왔다.
한기탁이 지리산 농부들 앞으로 온 메일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대표님 뉴스에 출연하게 생겼네!”
그 말에 백민석이 메일 내용을 훑어보았다.
“이거 단신 보도가 아니잖아. 앵커 옆자리에 앉아서 인터뷰하는 거야.”
백민석이 놀란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그때 공대식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대표님, 혹시 메일 받으셨나요?”
“네. 인터뷰 요청 메일을 받았습니다.”
“정말 잘 됐습니다.”
“혹시, 이 일도 공 대표님 작품인가요?”
“보도국까지 움직일 힘은 없습니다. 다만, 아는 분을 통해 의견을 드렸을 뿐이죠.”
“보도 자료만 배포하신 게 아니었군요.”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하면 펀딩에도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전화를 끊자, 한기탁이 나에게 다가왔다.
“공 대표?”
“네.”
“혹시, 이 인터뷰도 공 대표가 한 일?”
“다리를 놓아 준 것 같아요.”
“좋은 기회야. 우리 이 기회를 꼭 잡자.”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 * *
이틀 뒤, 여의도에 도착했다.
방송국 로비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고애주 작가다.
“덕명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가 올 걸 어떻게 아시고?”
“이 바닥이 워낙 좁아서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근데……. 저를 기다린 이유가 있나요?”
“덕명 씨에게 사소한 팁 하나 전해 드리려고요.”
“팁이요?”
“오늘 스튜디오에서 신남수 앵커랑 인터뷰하시죠?”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도움이 될 거예요. 인터뷰 마지막에 이 말을 꼭 하세요.”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내 귀에 속삭였다.
인터뷰 말미에 발언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하라는 팁이다.
생방송으로 진행하는 뉴스인 만큼 인터뷰 시간도 짧았다.
3분 정도의 인터뷰로 예정되어 있었다.
앵커의 권한으로 줄 수 있는 최대 시간은 1분가량이다.
그녀는 신남수 앵커가 좋아하는 단어를 알려 주었다.
그 단어를 써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중간에 끊지 않을 거라고 했다.
“어때요? 써먹어 볼 만하겠죠?”
“생각도 못 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네요.”
고애주 작가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난 스튜디오에 앉아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보도국의 분위기는 엄숙했다.
내가 진행하던 방송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뉴스라는 특이점도 있지만, 생방송에서 오는 긴장감이 가장 컸다.
신남수 앵커는 능수능란하게 뉴스를 진행했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중 하나다.
하얀 얼굴에 지적인 이미지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보도국 피디가 신호를 보냈다.
“오늘은 스튜디오에 특별한 손님을 초대했습니다. ‘지리산 농부들’이라는 농업 회사의 대표이십니다. 김덕명 씨와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난 신남수 앵커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분이다.
“곶감 농사로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하동은 대봉감으로 유명합니다. 곶감으로 농사를 시작하게 된 배경이죠.”
“곶감 농사 이후 다양한 품목을 상품화해서 판매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수경 재배까지 하시게 되었는데, 어떤 계기로 수경 재배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 건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첨단 농업으로 부자 농부를 육성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렇군요. 이번에 수경 재배 관련해서 특허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특허라고 하던데요?”
“수직 재배에 관련한 특허입니다.”
“그렇군요. 수직 재배라……. 다소 생소한 표현인데, 시청자들께 수직 재배가 뭔지 간단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난 수직 재배에 관련한 내용을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말했다.
신남수 앵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씀을 종합해 보면, 지금 같은 장마철에도 작물을 재배하는 데 문제가 없겠군요. 생산도 안정적으로 가능하겠고요.”
“네, 그렇습니다. 장마와 기후 변화 등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시간 관계상 여기까지 듣도록 하겠습니다.”
신남수 앵커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고애주 작가의 팁을 사용할 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해도 될까요?”
“최대한 짧게 부탁드립니다.”
신남수 앵커를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전 아이들이 농부를 꿈꾸는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신남수 앵커가 좋아하는 단어는 ‘아이들’이다.
그는 내 말을 끊지 않았다.
고애주 작가는 마지막 발언에서 미처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라고 조언했다.
신남수 앵커는 펀딩과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펀딩과 관련한 말을 하고 싶었다.
“첨단 기술을 이용해 농촌의 변화를 이끌고 싶습니다. 많은 청년 농부를 육성하고 낙후된 지역을 발전시킬 것입니다. 이번 펀딩에 성공해서 그 꿈을 반드시 이루고 싶습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신남수 앵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은 최대 1분이다.
그는 나에게 2분이나 시간을 주었다.
* * *
밤늦은 시간에 하동에 도착했다.
한기탁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안 자고 여기서 뭐 해요?
“우리 대표님이 고생하고 있는데 혼자 잘 수가 있나?”
“반응이 좀 있어요?”
“좀이 아니라 많이 있지. 이제 정체 구간이 확실히 뚫린 것 같아.”
특허 이슈와 방송 출연으로 더디게 진행되던 펀딩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오늘은 바로 자. 컴퓨터 들여다보지 말고.”
“선배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컴퓨터를 켜지 않을 수 없었다.
난 잠도 잊은 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기탁의 말대로 반응이 좋았다.
마지막에 했던 멘트가 화제에 올랐다.
펀딩 페이지도 무럭무럭 자라는 콩나물처럼 액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고 졸음이 쏟아졌다.
그때 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메일을 보낸 이를 확인하고 잠이 확 달아났다.
두바이 왕자 모하마드 살라다.
그에게 먼저 연락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난 당장 메일을 열었다.
그도 특허 소식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남극에서 했던 이야기를 자세히 적었다.
두바이에 수경 재배 시설을 건설하는 내용이다.
편지 말미엔 연락을 기다린다고 적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 난 당장 그의 명함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메일을 보내자마자 전화를 받게 될 줄은 몰랐네요.”
모하마드의 목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연락했습니다.”
“기왕 이렇게 연락했으니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할까요?”
모하마드는 화상으로 통화할 것을 권했다.
남극에서 자주 썼던 방식이다.
그와 화상 통화를 연결했다.
화면에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남자가 등장했다.
모하마드는 황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얼굴을 보니 더 반갑네요.”
“남극에서 만난 뒤로 처음이네요.”
“덕명 씨는 얼굴이 더 좋아 보이네요.”
“보약을 먹은 덕이죠.”
“보약이요?”
“기력을 보충해 주는 약입니다.”
“그걸 먹고 수직 재배도 성공했군요.”
모하마드는 웃으며 말했다.
자연스럽게 일 이야기로 넘어갔다.
“특허 내용을 봤습니다. 대단한 성과더군요. 어떻게 성공한 거죠?”
“칠레 기지에서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든 게 힌트가 됐습니다.”
“역시 먼지로 황금을 만드는 남자가 맞네요.”
“황금이 아니라 푸른 샐러드죠.”
“사막에서는 황금보다 샐러드가 더 귀하죠. 혹시, 제가 남극에서 했던 말 기억하고 있나요?”
모하마드의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남극에서 기회를 줄 수 있다고 했다. 계약과 혼동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말을 바꿔야 할 것 같군요. 계약에 대해서 상의하고 싶습니다.”
두바이에도 수직 재배 시설을 만드는 일이다.
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펀딩과 별개로 엄청난 기회다.
그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은 펀딩을 진행 중입니다.”
“저도 덕명 씨가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펀딩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 줄 수 있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겠다는 말은 아닙니다. 전 인내심이 강한 사람은 아니거든요.”
“펀딩이 끝나는 대로 두바이 건에 대해서 의견을 드리겠습니다.”
“저와 계약하게 되면, 목표하는 펀딩 금액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액수를 보게 될 겁니다.”
* * *
다음날, 조용히 한기탁을 불렀다.
“뭐야? 갑자기 옥상에서 보자고 하고.”
“조용히 할 말이 있어요.”
그에게 두바이 계약 건에 대해서 말했다.
한기탁은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남극에서 사막으로 가는 거네. 조금 있으면 우주로도 가겠다!”
“어쩌면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죠.”
“계약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고?”
“펀딩이 끝나고 답을 주기로 했어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완전 경사 났잖아!!”
“우선 선배만 알고 계세요.”
“알겠어. 입 다물고 있을게.”
한기탁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 * *
지루한 장마도 끝나가고 있었다.
펀딩을 시작한 지 한 달 반이 지났다.
모금액도 50억을 넘어섰다.
남은 펀딩 기한도 충분했다. 한 달 하고도 2주일이나 남았다.
그 시간 동안 50억만 모으면 펀딩은 성공적으로 끝난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 탈 없이 펀딩이 마무리될 거라고 여겼다.
이상한 글들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기 전까지 말이다.
이번 건은 벤처 크라우드로는 해결이 안 될 거 같았다.
내가 직접 나서야 했다.
배후 세력
악성 루머가 떠돌기 시작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과 관련해 부정적인 가짜 뉴스가 어디선가 만들어져 유포되고 있었다.
첨단 기술이란 것도 빛 좋은 개살구라는 둥,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일도 감성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등의 루머 내용을 보고 화가 치밀었다.
미담은 더디게 퍼지지만, 악성 루머는 빠르게 퍼진다.
이런 가짜 뉴스를 읽다 보면 펀딩에 참여한 사람조차 불안해할 것 같았다.
진원지는 ‘팩트 패스트’라는 인터넷 언론사였다.
그곳에서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과 관련한 악성 루머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기자 중에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전(前) 한길 신문의 조용삼 기자이다.
양초 학교 남아영을 비행 청소년으로 둔갑시키고, 지리산 농부들이 악덕 업체라고 기사를 썼던 인물이다.
그 사건 이후 쓰레기 기자로 낙인찍혀 한길 신문에서 퇴출당했다.
지금은 ‘팩트 패스트’의 기자가 돼서 지리산 농부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난 조용삼이란 이름보다 ‘팩트 패스트’라는 이름에 더 몸서리쳤다.
‘팩트 패스트’는 악질 중의 악질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언론사라는 말도 아까운 곳이다.
‘팩트 패스트’의 대표이사 모진수는 돈이 되는 일이면 뭐든 다 했다.
언론사라기보다 흥신소 같은 곳이었다.
모진수는 한때는 논객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제법 유명세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팩트 패스트’라는 인터넷 매체를 만들고 만행을 일삼았다.
‘팩트 패스트’는 명예훼손 범위를 넘지 않는 선에서 타깃을 공격했다.
지리산 농부들을 음해하는 글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 * *
비상 대책 회의가 열렸다.
한기탁을 포함해 이장우, 이동춘, 민요한, 백민석이 사무실로 모였다.
모두 표정이 굳어 있었다.
한기탁이 서류를 돌렸다. 그 안에는 ‘팩트 패스트’에서 유포한 글이 있었다.
다들 한숨을 쉬며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이동춘이 먼저 말을 꺼냈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런 글을 쓰는 건가요?”
평소의 그답지 않게 흥분한 말투다.
한기탁도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조용삼, 이놈 그때 우리를 공격했던 놈이잖아. 이놈이 벌이는 짓인가?”
“혼자 일을 꾸민 게 아닌 거 같아요.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난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그럼 우리에게 돈이라도 받아 낼 심보인가?”
이장우가 고함을 지르듯 말했다. 짜증이 난 얼굴이다.
“처음에 나도 그 점을 의심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우리가 사람들을 속이려고 펀딩을 하는 게 아니잖아?”
처음부터 사기를 칠 생각으로 펀딩을 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사기꾼이 아니다.
정당한 목적으로 펀딩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노리는 데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뒤에 배후 세력이 있는 것 같아요.”
민요한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배후 세력이라고요?”
이동춘이 놀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나 역시 민요한이 어떤 생각으로 배후 세력이라는 말을 꺼냈는지 궁금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플랜트 팩토리의 마크 레스터가 꾸민 짓 같아요.”
“마크 레스터가?”
백민석과 이장우가 동시에 말했다.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 농업 박람회에서 마크 레스터를 본 일이 있었다.
“근거가 있나요?”
난 민요한을 보고 물었다.
민요한은 노트북을 펼치고 ‘팩트 패스트’의 웹페이지를 열었다.
기사와 광고로 도배된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민요한은 손가락으로 배너 광고를 가리켰다.
천연 비타민을 홍보하는 화면이다.
“이 광고가 결정적인 근거 같습니다.”
“저 광고가 플랜트 팩토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 건가요?”
백민석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얼마 전에 플랜트 팩토리가 인수한 건강 식품 회사예요. 최근 한국에 지사를 냈고요.”
민요한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확신에 가득한 눈빛이다.
“마크 레스터는 이런 일을 벌이고도 남을 인물이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감춰진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아무래도 외신에 보도 자료를 배포한 것이 문제를 야기한 것 같았다.
모하마드 살라도 외신 보도를 통해 우리가 수직 재배에 성공한 것을 알았다.
마크 레스터도 보도 자료를 봤을 것이다.
두 사람은 반대로 움직였다.
한 사람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려 하고, 다른 이는 우리의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
“마크 레스터가 우리를 망쳐서 얻는 게 뭐죠?”
백민석이 민요한에게 물었다.
“마크가 예전에도 비슷한 방법을 썼어요. 기술을 가진 기업이 성장하려는 순간 제동을 건 일이 있어요. 그리고 기술 제휴를 하자며 손을 내밀었죠. 아마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민요한은 플랜트 팩토리의 핵심 멤버였다.
마크 레스터의 비인간적인 면이 싫어서 회사를 나온 인물이다.
그의 말대로 이번 일의 배후 세력은 플랜트 팩토리 같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양아치네!”
이장우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난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진정하세요.”
“난 아직도 몸이 부들부들 떨려.”
한기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당황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우선 어수선한 분위기부터 바로 잡고 싶었다.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에요. 좋은 소식도 있어요.”
“좋은 소식이요?”
이동춘은 좋은 소식이란 말에 눈을 반짝였다.
“두바이에서 연락이 왔어요.”
“두바이라면, 모하마드에게 연락이 왔다는 거야?”
이장우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는 내가 남극에서 모하마드를 만난 일을 알고 있었다.
“맞아. 두바이 왕자 모하마드 살라에게 연락이 왔어.”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침을 꿀꺽 삼키며 내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두바이에 수경 재배 시설을 지을 기회가 생겼어요.”
“정말?”
이장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이동춘과 백민석은 서로 부둥켜안으며 기쁨을 표현했다.
한기탁과 민요한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방금까지 분노를 감추지 못하던 사람들이 맞나 싶었다.
“펀딩이 끝난 뒤에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어요. 지금 우리에겐 펀딩이 가장 중요한 문제니까요.”
다시 펀딩 이야기를 꺼내자, 다들 긴장한 듯 표정이 굳었다.
“우선 악성 루머부터 도려내야겠어요.”
“어떻게?”
한기탁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다른 동료들도 궁금한 눈빛이다.
“모하마드가 반전 카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 * *
회의가 끝나고 전화가 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이 떠올랐다.
마크 레스터 전화다.
“미스터 김, 오래간만이네요.”
“무슨 일인가요?”
난 건조한 말투로 물었다.
“수직 재배에 성공한 걸 축하드리기 위해서 전화했습니다.”
그는 과장된 말투로 말했다. 세일즈맨이 물건을 팔 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전 미스터 김이 수직 재배에 성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죠.”
“감사합니다. 지금은 처리할 일이 많아서 나중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시간이 괜찮으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전화를 끊으려 하자,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한국에 대규모 시설을 만들 예정입니다. 펀딩도 진행 중이고요. 그 일이 끝나야 시간이 날 것 같네요.”
“행운을 빌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그날 새벽, 플랜트 팩토리에서 이메일이 한 통 왔다.
수직 재배 기술을 제휴하고 싶다는 내용이다.
말이 기술 제휴지 나중에 플랜트 팩토리에 흡수될 것을 요구할 게 뻔하다.
민요한의 예상과 일치했다.
기술 제휴의 대가는 돈이다. 펀딩 모금액보다 큰 액수다.
배후 세력이 플랜트 팩토리라는 게 확실해지는 순간이다.
그들은 ‘팩트 패스트’라는 한국의 인터넷 언론사를 섭외해 우리를 공격했다.
펀딩을 무산시키고,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계획인 모양이다.
마크 레스터는 비열한 인간이다.
그들에게 당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난 펀딩을 성공시키고, 계획대로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것이다.
* * *
플랜트 팩토리의 제안을 받고 일주일이 지났다.
남은 펀딩 기간도 한 달이 조금 넘게 남은 상황이다.
펀딩 금액은 50억에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난 동료들과 함께 전략을 짰다.
악성 루머를 극복하고 펀딩에 성공할 방법이다.
두바이 건도 카드 중 하나였다.
동료들과도 일주일 내내 그 일에 대해서 상의했다.
행동에 나서려는 순간, 의외의 인물에게 연락이 왔다.
‘팩트 패스트’의 조용삼에게 문자가 온 것이다.
중요한 일이니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전했다.
난 그를 보러 서울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거절의 문자를 보내자, 하동으로 오겠다는 문자가 왔다.
어디든 내가 원하는 곳으로 오겠다며 거듭 문자를 보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무조건 날 만나야 하는 상황 같았다.
갑자기 오래전 그와의 일이 떠올랐다.
그가 벌을 무서워하며 자리를 떴던 장면이다.
그를 양봉장으로 불렀다.
“왜 거기 서 계세요?”
조용삼은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꿀벌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가까이 오세요.”
그는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왔다. 난 웃음 참으며 그에게 말했다.
“꿀벌은 이유 없이 침을 쏘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그의 하얀 얼굴에 안경이 보이질 않았다.
“원래 안경을 쓰지 않았나요?”
“별걸 다 기억하시네요? 라식 수술을 받고 안경을 벗었습니다.”
그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때보다 얼굴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더 음흉해진 얼굴이다.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김덕명 씨에게 대표님의 제안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팩트 패스트’ 모진수 대표의 제안을 전하기 위해 날 찾았다고 했다.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보도를 통해 보셨겠죠? 저희가 이번 펀딩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생각이 있다는 말에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들은 그저 플랜트 팩토리의 하수인일 뿐이다.
“모진수 대표님이 이번 펀딩과 관련해서 토론을 제안하셨습니다.”
“토론이요?”
“네, 진실을 밝히는 토론이죠.”
진실이란 단어를 꺼내는 순간 꿀벌 한 마리에 그에게 다가왔다.
조용삼은 두려운 눈빛으로 꿀벌을 쳐다보았다.
예전에 그를 만났을 때는 꿀벌이 무서워 이야기 중간에 도망갔었다.
지금은 도망갈 처지가 아니다.
내 대답을 들어야 자리를 뜰 수 있었다.
그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김 대표님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저한테 뭐가 좋다는 말씀일까요?”
조용삼은 얼굴 주변을 맴도는 꿀벌 때문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모진수는 토론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논객 활동을 하며 많은 사람과 토론을 벌였다.
그는 자신과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을 깔아뭉개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세간에 떠도는 말에 답할 기회죠.”
조용삼은 식은땀을 흘려가며 말했다.
“루머는 모두 그쪽에서 지어낸 거 아닌가요?”
“저희는 시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 움직일 뿐입니다. 함부로 말을 지어내지 않습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말이다.
“다시 한번 묻죠. 토론을 하려는 진짜 이유가 뭔가요?”
“말씀드렸듯이 시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그는 손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꿀벌을 쫓으려는 처절한 손짓이다.
그가 요란스럽게 흔드는 팔을 한 손으로 잡았다.
조용삼은 손을 제압당한 상태에서 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꿀벌이 잠시 그의 팔에 앉았다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의 팔을 놓아 주며 말했다.
“꿀벌은 냄새에 민감하죠. 향수 냄새 때문에 다가온 겁니다.”
“아, 네. 그럼 토론은?”
그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모진수 대표의 제안에 응하겠습니다.”
난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백마 탄 초인
한기탁에게 조용삼과 나눈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거절해.”
“왜요?”
“그게 할 소리야? 모진수 그놈, 상종을 못 할 인간이라고. 너 그 인간 별명이 뭔지 알아?”
“아니요.”
“미친개야.”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나 아주 심각해. 모진수 그 인간, 한 번 물면 놓지 않는다고.”
“아무리 미친개라고 해도 문제없어요.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으니까요.”
“물론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지. 그런데 미친개와는 마주치지 않는 게 상책이야.”
“나도 알아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
“그런데 왜 하겠다는 거야? 그냥 그때처럼 보도 자료를 발표하는 선에서 매듭지을 수도 있잖아?”
동료들과 회의를 통해 낸 아이디어였다.
벤처 크라우드에 보도 자료를 요청하는 것이다.
특허 때는 효과를 봤다. 하지만 비슷한 방식이라 마음에 차지 않았다.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고 있을 때, 조용삼이 찾아왔다.
모진수와의 토론은 한기탁의 말대로 쉬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려운 만큼 효과도 클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한기탁은 초조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토론 장소도 문제잖아. 공중파나 케이블도 아니고 인터넷 방송국이라며? 우리에게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어.”
게임 중계 전문 인터넷 방송국에서 하는 토론이다.
그가 섭외할 수 있는 곳은 인터넷 방송국뿐이었다.
난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인터넷 방송국에서 토론하면 좋은 점도 있어요.”
“좋은 점이 있다고? 그게 뭔데?”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거예요.”
“너, 혹시 청년 농부 모집하는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맞아요. 우리와 함께 일할 청년 농부들이요.”
“네가 무슨 생각인 줄은 알겠는데, 그래도 위험 부담이 너무 큰 거 아니야?”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좋은 점도 있으니까요.”
“좋은 점이 또 있다고?”
“선배, 그때 제가 말했던 이벤트 전략 기억해요?”
“이벤트 전략?”
“이벤트를 순차적으로 터트리는 전략이요.”
“기억하지. 그래서 특허도 남겨 뒀던 거고.”
“이번 일도 이벤트 전략의 하나라고 생각하자고요. 지금은 악성 루머 때문에 펀딩도 주춤한 상태잖아요.”
“그래서 이번엔 두바이 계획을 발표하자고 한 거잖아. 미친개랑 토론하는 게 아니고.”
“두바이 계획을 발표하는 건 확실히 좋은 전략이에요. 하지만 모진수라는 악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이번 토론을 통해서 모든 악재를 다 제거하고 싶어요.”
한기탁은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김덕명 고집 정말 못 말리겠네. 내가 졌다, 내가 졌어. 대신 준비는 철저하게 하고 나가자.”
“물론이죠. 지금까지도 준비하고 있었잖아요.”
“준비하긴 했지. 그건 모진수랑 토론하는 걸 준비한 건 아니었잖아. 처음부터 다시 짜야지.”
“좋아요. 처음부터 다시 짜요.”
모진수와의 토론까지 이틀을 남겨둔 상황이다.
난 동료들에게 계획을 공유했다.
민요한, 이장우, 이동춘, 백민석도 모진수와 토론을 한다는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동료들은 한기탁처럼 모두 날 말렸다.
신기하게도 이동춘만은 예외였다.
“토론에 나가서 그놈 코를 납작하게 해 주십시오.”
이동춘은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날부터 지리산 농부들은 작업에 들어갔다.
이미 준비했던 자료도 수정 보완해야 했다.
청년 농부 모집안도 새로 정리했다. 원래대로라면 펀딩 후에 할 일이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모진수가 어떤 말로 공격하든 대응할 수 있어야 했다.
이번 토론을 통해 사람들의 머릿속에 지리산 농부들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모두 밤을 새우며 자료를 준비했다.
새벽까지 작업이 이어졌다.
한기탁은 나에게 말했다.
“대표님은 들어가서 쉬어요. 이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준비를 완벽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어디 갔나요?”
“그 사람이 바로 여기 있지. 그래도 넌 좀 쉬어야 해.”
“토론은 제가 할 거니까, 저도 같이해야죠.”
그때 민요한이 불쑥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컨디션 관리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다른 동료들도 모두 일어나 민요한과 같은 말을 했다.
“제발 들어가서 잠이나 좀 자.”
내가 고집을 부리자 이장우가 등을 떠밀었다.
이틀 동안 우린 토론에 나갈 준비를 마쳤다.
덕분에 지리산 농부들이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됐다.
머릿속에만 있던 마케팅 계획을 문서로 정리했다.
* * *
난 이장우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이장우가 운전대를 잡았다.
원래는 한기탁과 함께 가기로 했으나, 한기탁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가장 멀쩡한 사람이 이장우였다.
그가 운전 중에 입을 열었다.
“많이 긴장되지?”
“아니, 전혀.”
“거짓말.”
이장우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짜 긴장이 안 돼.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
“기탁 선배 말이 맞긴 한 것 같네.”
“한기탁 선배가 뭐라고 했어?”
이장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우리 대표님은 백마 탄 초인이라고 했어.”
우리 동시에 웃음 터트렸다.
“내가 백마 탄 초인이라니?”
“처음엔 나도 웃어넘겼는데, 곱씹을수록 맞는 말 같아. 남극 일도 그렇고.”
그는 블리자드로 대원들이 위험에 처한 일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아무튼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해.”
“무슨 싸움터에 나가는 사람 같네?”
“싸움보다 더 한 일이지.”
이장우는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양재동에 있는 인터넷 방송국 사옥에 도착했다.
정문에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배선아 기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배 기자님이 여긴 어떻게……?”
“오늘 토론 때문에 난리가 났어요.”
모진수는 지리산 농부들의 실체를 밝히겠다고 연일 떠들어 대고 있었다.
기자들은 모진수에 대한 관심보다 지리산 농부들과 김덕명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것 같았다.
“모진수 악질이에요. 조심하세요. 저도 방청석에 앉아서 응원할게요.”
난 취재진을 뚫고 사옥 안으로 들어갔다.
취재진의 질문에는 토론이 끝난 후에 답변하겠다고 말했다.
스튜디오 안에는 토론을 위한 테이블과 의자가 준비돼 있었다.
방송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스튜디오다.
스튜디오 상단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제목부터 자극적이다. 인터넷 방송국은 흥행만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피디 명찰을 단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준비하신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난 가방에서 USB를 꺼냈다. 동료들과 함께 준비한 내용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USB를 건네고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실 안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모진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진수라고 합니다.”
“김덕명입니다.”
체격이 작고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남자다.
“김덕명 씨는 생각보다 체격이 좋으시네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최고 학벌을 자랑하는 엘리트 출신이다.
한때는 논객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악명이 높진 않았다.
피디가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곧 방송 시작합니다. 두 분 준비해 주세요.”
우린 스튜디오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모진수와 내가 마주 보고 앉았고, 가운데 사회자가 있었다.
사회자가 나에게 말했다.
“사회를 맡은 권순재라고 합니다.”
권순재. 전직 아나운서로 지금은 인터넷 방송국에서 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사회자만큼은 중립적인 인물을 섭외했다.
피디의 사인이 떨어지고 토론이 시작됐다.
카메라가 사회자를 잡았다.
“오늘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에 관련해 토론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토론자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카메라가 나와 모진수를 잡았다.
“지리산 농부들의 김덕명 대표님 나오셨습니다.”
“팩트 패스트의 모진수 대표님이 나오셨습니다.”
나는 카메라를 보고 가볍게 인사했다.
“이렇게 두 분을 모시게 된 건 요즘 화제인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 때문입니다. 모진수 대표님이 펀딩에 의문을 제기하셨죠?”
사회자가 모진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진수의 눈빛이 달라졌다. 대기실에 봤던 눈빛이 아니었다.
뱀처럼 음흉한 눈빛이다. 얼굴도 표독스럽게 변했다.
“무슨 문제인가요?”
“펀딩으로 돈만 받아 챙길 우려가 있습니다.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이죠.”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농촌에 대규모 재배 시설을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 데다, 제품을 생산한다고 해도 판로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펀딩 자체가 이해가 안 간다는 뜻입니다.”
모진수는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나왔다.
모진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떠들어 댔다.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에 문제가 있다는 내용을 쉬지도 않고 쏟아 냈다.
모두 거짓말이다.
플랜트 팩토리가 얼마를 약속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사주대로 일을 잘하고 있었다.
“모진수 대표님의 발언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이제 김덕명 대표님에게 발언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고 카메라가 나를 잡았다.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준비한 화면을 볼 수 있을까요?”
피디의 사인이 떨어지자 정면에 있는 화면이 켜졌다.
사회자가 화면에 뜬 그래프를 보며 물었다.
“무슨 그래프인가요?”
“일 년 동안 샐러드 가격의 변화를 보여 주는 그래프입니다.”
“샐러드 가격 변화가 아주 심하네요?”
“모두 날씨의 영향 때문이죠. 가뭄이나 태풍 등으로 샐러드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한 것 알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농산물은 날씨의 영향을 받으니까요.”
“기후 온난화로 날씨를 예측하기가 더 힘들어졌습니다. 농산물 가격도, 변화하는 기후만큼이나 예측하기 힘들고요. 수입 농산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김덕명 씨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래프를 보여 주시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사회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제가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지으려는 이유기 때문입니다. 수경 재배로 작물을 재배하면 날씨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킬 수 있죠.”
화면에 샐러드 컨테이너가 나왔다.
“제가 처음 수경 재배를 시작한 시설입니다. 초기엔 컨테이너를 이용했습니다.”
다음 화면에서 수직 재배 시설이 나왔다.
“특허를 출원한 수직 재배 시설입니다. 이 기술을 이용해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계획입니다.”
모진수도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전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어서 샐러드를 재배할 생각입니다. 가격도 안정화할 계획입니다.”
“가격을 안정화한다는 게 무슨 말씀인가요?”
“같은 가격으로 시장에 공급하겠다는 뜻입니다.”
“해마다 가격을 유지하는 건가요?”
“해마다 같은 가격을 유지하는 건 현실적으로 힘듭니다. 해마다 비료값과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니까요.”
“아, 그럼 매해 가격을 정해 같은 가격으로 샐러드를 팔겠다는 말씀이군요? 최소한 그 해의 가격은 보장이 되겠네요?”
“이런 그래프를 보지 않아도 되겠죠.”
“아주 좋은 계획이네요. 농산물 가격을 안정시킬 수도 있고요.”
사회자는 화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모진수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저런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죠.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다른 곳에 있다니요?”
사회자가 모진수를 보고 물었다.
“수익을 낼 구체적인 방안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저 좋은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뿐입니다.”
모진수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거 보세요. 제 말에 대답을 못 하잖아요.”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짓기 전에 돈을 벌 생각입니다. 어쩌면 펀딩 목표 금액보다 큰돈이 될 수 있습니다.”
“대체 뭐로 수익을 낸다는 말입니까?”
모진수는 목소리가 스튜디오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난 조용히 다음 화면을 열었다.
그의 입을 막아 버릴 내용이 준비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