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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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한기탁이 물었다.

“혹시, 지하철역도 섭외가 된 거야?”

“아직 섭외는 못 했어요. 이제부터 해야죠.”

“하긴, 그럴 시간도 없었지. 나랑 서울과 부산을 나눠서 섭외하면 되나?”

“그럴 필요 없어요.”

“그게 무슨 뜻이야? 네가 두 군데 다 섭외하겠다는 말은 아니지?”

“제가 두 곳을 다 섭외할 생각인데요?”

“뭐라고? 너무 힘들지 않겠어?”

한기탁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선배는 이거 말고도 할 일이 많잖아요.”

“그렇긴 하지. 누구 때문에 일이 넘쳐 나는 상황이니까.”

“장소 섭외는 벤처 크라우드에게 맡길 생각이에요.”

“벤처 크라우드에게 부탁한다는 바로 이거였구나!”

벤처 크라우드는 펀딩만 하는 업체는 아니었다.

마케팅 일도 겸하고 있었다. 벤처 크라우드는 지하철공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벤처 크라우드와 계약 건도 있고, 조만간 서울에 한 번 다녀오려고요.”

“계약을 미뤄 둔 것도 미리 계획한 거구나.”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지하철공사도 공공의 목적도 있지만, 영리를 위한 곳이기도 했다.

돈을 내면 장소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물론, 원하는 장소에 들어가는 건 다른 문제다.

수경 재배 시설까지 설치하는 일이기도 했다.

까다로운 조건을 들이밀 수 있었다.

완벽한 일 처리를 위해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 * *

벤처 크라우드는 종로 한복판에 있었다.

여러 회사가 모여 있는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공대식 대표와 이미 약속을 한 상태였다.

입구에 공대식 대표와 함께 하동을 찾았던 남자가 있었다.

하동에서는 말 한마디 없었던 남자다.

그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다시 보니 제법 스마트한 이미지다.

사무실 안은 여느 회사처럼 분주했다. 모두 모니터를 보며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

공대식 대표가 두 팔을 들고 반겼다.

“이번엔 김덕명 대표님이 서울까지 오셨네요.”

“덕분에 서울 구경 했습니다.”

“농담도 하시네요.”

공대식 대표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옹골찬 인상에 힘이 넘쳐 보이던 남자다.

오늘 유난히 금빛 안경테가 빛나 보였다.

공대식 대표는 날 안내했던 남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남자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때 부탁드린다던 것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도 대표님의 부탁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공대식 대표가 안경테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안경테를 들어 올리는 건 습관 같았다.

살짝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직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이다.

직원 하나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커피를 내려놓고 나갔다.

“드시면서 말씀하시죠.”

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펀딩을 시작하기 전에 새로운 재배 시설을 만들 계획입니다. 일종의 이벤트라고 볼 수 있죠.”

“이벤트요?”

“펀딩을 흥행시킬 카드죠.”

공대식 대표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어떤 전략인지 궁금한 얼굴이다.

난 그에게 지하철역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만히 내 말을 경청했다.

“재배 시설에서 나온 샐러드를 시민들에게 무료로 나눠 줄 생각입니다.”

난 동료들에게 했던 말을 그에게도 똑같이 했다.

공대식 대표는 여유로운 표정을 되찾았다.

“멋진 아이디어네요! 대표님은 마케팅을 했어도 잘하셨을 거 같네요.”

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지하철역에 공간이 필요합니다. 섭외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런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커버 가능합니다.”

“유동 인구가 많고, 수경 재배 시설을 놓을 만한 자리가 있는 역이면 좋을 거 같습니다.”

난 미리 준비한 서류를 꺼냈다.

그 안에 수경 재배 시설에 들어갈 조건들이 명시돼 있었다.

공대식 대표는 서류를 꼼꼼히 챙겨 보았다.

“이 조건에 맞는 곳으로 섭외해 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저도 지하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하철이요?”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일에 말이죠.”

공대식 대표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지하철역에 수경 재배 시설과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광고가 함께 있는 장면이 그려졌다.

그림이 나쁘지 않았다.

“좋은 아이디어네요. 마케팅에 따른 비용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일은 저희가 맡고 싶습니다. 비용은 펀딩 수수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대표님 생각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이야기를 마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목표 금액 100억의 펀딩 계약서다.

100억을 모으는 기간은 3개월로 정했다.

3개월 안에 목표 금액의 80% 이상을 모아야 했다.

펀딩이 시작되는 시점은 지하철역에 재배 시설 구축한 뒤다.

난 계약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대식 대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무실을 떠나려는 순간, 공대식 대표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번처럼 기대되는 펀딩은 처음입니다.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 *

계약을 마치고 곧장 하동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 미팅을 가졌을 뿐인데 벌써 저녁 시간이다.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었다.

약속 장소는 하동에서 유명한 한정식집이다.

예전에도 한 번 들렀던 곳이다.

난 서둘러 예약한 방으로 들어갔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내가 먼저 도착한 거죠. 덕명 씨가 늦은 게 아니에요.”

전 하동 군수 김창대가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서 있지 말고 앉으세요.”

자리에 앉자 준비한 음식이 나왔다. 금세 푸짐한 한 상이 차려졌다.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마음껏 드세요.”

김창대가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여유가 넘쳤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김창대는 군수 임기를 마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온 상태다.

지금은 자연인 신분이다.

“농부는 희망이다, 방송을 봤어요. 방송을 보다 새삼 느꼈네요. 김덕명 씨 욕심이 끝도 없다는 사실을.”

“제 욕심이 끝이 없다고요?”

“청년들을 농촌에 끌어들일 욕심이요.”

김창대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처음 이곳에서 그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군수와의 면접을 요청해서 간신히 만날 수 있었다.

그 이후 그와 많은 일을 함께했다.

그는 지역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창대는 소멸해 가는 농촌을 걱정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녹차가 나왔다.

“나이를 먹을수록 좋아지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럼 제 마음도 읽으셨겠네요.”

“덕명 씨 얼굴을 보는 순간 느껴지더군요.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게.”

김창대가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하철을 농장으로 만드는 법

“지하철역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계획입니다.”

난 김창대에게 지하철에 재배 시설을 만들 계획을 밝혔다.

“좋은 아이디어네요. 게다가 재배 시설에서 나온 샐러드를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 준다니, 기발하네요. 100억이라는 목표 금액도 어렵지 않게 달성하겠네요.”

“그런데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제야 본심을 꺼내시는군요?”

김창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펀딩과 동시에 청년 농부들의 지원도 받을 생각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저도 기대가 컸습니다.”

“최소 100명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동군에서 하던 청년 농부 지원 사업과는 비교가 안 되는군요.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가 되나요?”

“청년 농부를 교육할 장소가 문제입니다.”

하동에서 청년 농부 지원 사업을 할 때도 열 명이 조금 넘는 인원을 받았다.

그때는 농업 지원 센터를 활용했다. 그때와 지금은 규모가 달랐다.

농업 지원 센터의 시설로는 부족했다.

최소 100명 규모의 인원을 교육할 장소가 필요했다.

난 하동에 있는 공무원 연수 시설에 협조를 요청했다.

공무원들만 시설을 사용할 수 있었다.

내가 김창대를 만난 이유다.

그에게 사정을 말했다.

“그런 고민을 하고 있군요. 뭐라 말을 하기 전에, 덕명 씨에게 궁금한 걸 한가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난 조용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눈빛이다.

“덕명 씨는 얼마나 많은 청년 농부를 육성할 생각인가요?”

“물론 지금은 100명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100명이 1,000명이 되고, 1,000명이 10,000명이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덕명 씨는 하동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나요?”

“5만 명이 조금 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창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2009년 기준으로 하동 인구는 5만 명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이후로 인구수는 점점 급감한다.

회귀 전 기준으로는 4만 언저리 수준이었다.

“일개 군수였던 저는 생각도 못 한 꿈이네요. 역시 젊음이 좋은 건가요?”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라 부럽다는 말입니다. 저도 덕명 씨 나이로 돌아가고 싶네요.”

“군수님도 아직 젊으십니다.”

“이제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죠. 그래도 젊다는 말은 듣기 좋습니다그려.”

김창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제가 덕명 씨에게 한 약속을 기억하나요?”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퇴직 후에도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 달라고 말했다.

지역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겠다고 약속했다.

“설마 연수원을 사용하는 비용까지 공짜로 하겠다는 건 아니겠죠?”

“당연히 비용을 낼 생각입니다.”

“덕명 씨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하동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을 범위를 넓히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하동 군수님이셨던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좀 의외네요.”

“자연인 신분이라 이런 말도 편안하게 할 수 있네요.”

그의 말대로 자연인 김창대는 전과 달리 편안해 보였다.

하동 군수 시절의 근엄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참고 말씀드리면 저도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 * *

2주일 사이에 반가운 소식을 두 개나 받았다.

우선 연수원 문제가 해결됐다.

단 공무원 연수와 겹치지 않는 게 조건이었다. 재배 시설을 만들 동안 교육할 장소가 정해졌다.

두 번째 소식은 지하철 공간이 확정된 일이다.

벤처 크라우드의 공대식 대표가 공문을 보내고 지하철공사와의 협의를 마쳤다.

공대식 대표는 일을 잘 처리해 주었다.

우리가 만들 수경 재배 시설이 공공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설득한 것이다.

지하철공사는 공공성이란 말에 귀를 기울였다.

때마침 정부도 녹색 성장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다.

우린 목이 좋은 곳에 재배 시설을 설치할 수 있게 됐다. 난 기쁜 소식을 동료들에게 전했다.

“서울과 부산 시청역에 우리 재배 시설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정말 잘됐네요!”

이동춘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다른 동료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작업 들어가면 되는 건가?”

이장우가 두 팔을 번쩍 들며 말했다.

이미 지하철에 설치할 수경 재배 시설 디자인을 마친 상태다.

서울팀과 부산팀으로 팀원을 나누고 장비 정비까지 끝마쳤다.

그의 말대로 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난 서울 공사를 책임질 이장우에게 말했다.

“내일 팀원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난 부산으로 갈 테니까.”

“참, 예약은 했나?”

이장우가 두 눈을 모으고 물었다.

작업을 하는 동안 지낼 숙소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호텔을 원했다.

난 딴청을 피웠다.

“예약이라니?”

“우리가 묵을 호텔?”

이장우는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건 기탁 선배가 알걸?”

그때 한기탁이 귀신처럼 이장우 옆에 불쑥 나타났다.

이장우는 갑자기 나타난 한기탁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꼭 호텔에서 자야겠어? 그 근방에 모텔도 많은데?”

“남극에서 너무 고생해서 그래요. 잠은 좋은 곳에서 자는 게……. 일도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고……?”

이장우는 애원하듯 말했다.

한기탁이 바로 받아쳤다.

“나도 네 말에 동의하긴 해. 잠은 좋은 곳에서 자야지. 그래도 호텔은 과하잖아?”

“우리도 호텔에서 잠 좀 자면 안 돼요?”

이장우의 목멘 소리가 애처롭게 들렸다.

한기탁은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미 호텔에 예약해 놨어.”

“정말요?”

이장우의 생기 넘기는 목소리로 물었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 같았다.

“감사합니다, 경영지원팀장님.”

이장우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 모습에 민요한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모두가 웃고 있을 때 진지한 표정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동춘이다.

그가 한기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산팀은 숙소가 어떻게 되나요?”

한기탁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했다.

“그게, 저…….”

“우리는 모텔인가요?”

이동춘은 실망스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난 이동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왜요? 아버님, 모텔은 싫으세요?”

“아니요. 싫긴요. 좋습니다. 전 아들놈처럼 잠자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이동춘은 애써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때 한기탁이 목청을 높여 말했다.

“부산팀도 호텔로 숙소를 예약해 놨습니다. 작업 잘하시고 편안하게 주무십시오.”

그 말에 이동춘이 고백하듯 말했다.

“솔직히 제가 신혼여행 때를 빼고 호텔에서 자 본 적이 없습니다. 정말 영광입니다.”

이동춘도 이장우처럼 생기 넘기는 얼굴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얼굴이 붕어빵처럼 닮았다.

돈이 많아서 펑펑 쓰는 건 아니다.

작업이 고단한 만큼 잠자리라도 편안하길 바랐다.

* * *

서울과 부산 두 곳에서 동시에 수경 재배 시설을 설치했다.

서울은 이장우의 지휘 아래 재배 시설을 만들었다.

부산은 내가 맡았다.

지하철공사도 우리에게 우호적이다.

차단막을 치는 일을 돕기도 했다.

난 재배 시설을 완성하기 전까지 외부에 노출할 마음은 없었다.

펀딩과 동시에 하는 깜작 이벤트를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동춘은 작업하는 동안은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일하는 순간만큼은 일급 기술자의 품위를 지켰다.

일이 끝나고 저녁을 먹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유쾌한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숙소가 정말 깨끗하고 좋네요. 여기에서 살고 싶은 정도예요.”

부산에서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서울팀도 이상 없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한 달도 지나기도 전에 재배 시설이 모습을 갖춰 가고 있었다.

“이제 며칠만 더 작업하면 시설이 거의 완성될 거 같네요.”

이동춘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 한기탁에서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에요?”

“잠깐 시간 좀 낼 수 있어?”

평소의 그답지 않게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게 말이지, 현식이가 병원에 입원했어.”

“현식이가 입원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방현식은 나에게 곶감 교육을 받았던 청년 농부다.

곶감 농사가 망해 참기름으로 새로운 길을 찾았다.

지금은 형 동생으로 의좋게 지내는 사이기도 했다.

난 전화를 끊고 곧장 하동으로 향했다.

자세한 내용은 병원에 도착한 뒤에 듣기로 했다.

목적지는 하동의 대학 병원이다.

지리산 농부들이 최초로 샐러드를 납품했던 곳이다.

한기탁이 병원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왔네.”

“뭐 때문에 입원한 거예요?”

“눈에 이상이 생겼대.”

“눈이요?”

방현식은 한쪽 눈을 실명한 상태다. 눈에 이상이 생겼다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의사가 망막혈관폐쇄증이라고 하더라고.”

눈병에도 응급질환이 있다. 대표적인 게 망막혈관폐쇄증이다.

혈관 내 찌꺼기인 혈전이 망막 혈관을 막는 병이다.

“과로가 원인이었던 것 같아. 어머니 말로는 요즘 잠도 안 자고 일했다고…….”

난 당장 병실로 달려갔다. 몸이 망가질 정도 일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방현식의 옆에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자 조용히 자리를 비켜 줬다.

방현식은 한쪽을 가리고 있었다.

멀쩡한 오른쪽 눈이다.

의사가 응급조치한 상태다.

처음에 혼을 내줄 생각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그런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덕명 형!”

방현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누워 있어.”

난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잡았다.

“형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니, 어쩌다 이런 거야?”

“뭘요?”

“왜 몸까지 상해 가면서 일을 하고 그러냐고?”

“돈 벌려고요.”

그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돈도 좋지만, 건강도 챙겨야지.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죄송해요. 저도 잘 아는데 이번엔 그게 잘 안 됐어요.”

“돈이 필요했니? 그럼 형에게 말하지 그랬어?”

“형에게 말할 수는 없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돈은 형이 필요하니까요.”

방현식은 그 말을 하고 입을 닫았다.

“너, 혹시 펀딩 이야기하는 거야?”

그의 입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온 신경을 소리에 집중했다.

귀를 기울이자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무리한 거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만 성인이지 아직 순수한 아이 같다.

“마음은 고맙게 받을게. 다시 이런 일 벌어지면 혼날 줄 알아.”

방현식이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대를 하고 있었지만 날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저 곶감 농사 망하고 진짜 힘들었어요. 그때 형이 아니었으면 다시 일어날 수 없었을 거예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눈물이 쏟아져요.”

안대가 젖어 들고 있었다.

“형 덕에 차도 사고, 부자 농부가 됐잖아요. 그래서 펀딩에도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그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졌다.

실명한 왼쪽 눈이 투명하게 빛났다.

마치 내 마음을 엿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내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고마워. 그런데 몸을 해치면서 버는 돈은 사양하고 싶어.”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런데 형 울어요?”

“아니.”

“그런데 목소리가 왜 잠겼어요?”

“목에 뭐가 좀 걸려서 그래.”

“그럼 물 드세요.”

난 그의 옆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일부러 재미있는 이야기를 골랐다.

이장우가 펭귄에게 똥을 맞은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중에 또 올게. 치료 잘 받고 있어.”

“네, 조심히 가세요.”

난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담당 의사를 찾았다.

“부기를 가라앉히는 주사를 놨습니다. 조만간 막힌 정맥도 뚫릴 겁니다. 심각한 건 아니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곧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

그날 이후 매일 저녁 병원에 들러 봤다.

방현식과 수다도 떨고 즐겁게 지냈다.

시간은 아주 잘 갔다.

공사도 끝나갈 무렵, 방현식은 안대를 풀었다.

그가 날 보며 말했다.

“형, 얼굴이 더 잘생겨진 것 같아요.”

그의 눈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정말 다행이다.

방현식이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공사가 끝났으면 곧 펀딩에 들어가겠네요?”

“그래, 넌 응원만 해 줘. 무리하지 말고.”

그의 말대로 곧 펀딩이 시작된다.

기대감으로 가슴이 떨렸다.

두 마리 토끼

부산에 수경 재배 시설을 완성했다.

시설의 외부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민요한이 버터헤드, 카이피라 모종을 갖고 시설을 찾았다. 그는 완성한 재배 시설을 보며 감탄한 듯 말했다.

“이걸 보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네요.”

“아마 지하철역에 작은 식물원이 생겼다고 하지 않을까요?”

이동춘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버님 말씀대로 지하에 식물원이 생겼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아요.”

민요한이 유쾌한 얼굴로 답했다.

“대표님, 모종 작업은 끝났어요. 이제 바로 서울로 넘어가나요?”

“서울도 준비가 다 됐으니 모종 작업만 하면 끝나겠네요.”

민요한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이동춘을 조용히 불렀다.

“아버님, 이제부터 이곳은 아버님이 책임져 주셔야 해요. 전 이제 펀딩 작업으로 바빠질 테니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곳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동춘은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기 전까지 절대 시설을 외부로 노출해서는 안 되는 거, 잘 알고 계시죠?”

“잘 알고 있습니다. 펀딩이 시작되고 난 뒤에 시설을 개방한다는 사실을.”

그의 얼굴만 봐도 믿음직스러웠다.

난 민요한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이장우의 서울 팀도 완벽하게 작업을 마친 상태다.

“장우야, 점검은 끝난 거지?”

“벌써 끝났지. 모종을 옮겨 심기만 하면 될 거야.”

버터헤드, 카이피라 모종을 옮겨 심었다.

이제 작물이 건강하게 자라기만 기다리면 된다.

하동으로 내려오기 전에 벤처 크라우드의 사무실에 잠시 들렀다.

공대식 대표와 최종으로 점검할 일이 있었다.

오늘따라 금색 안경테가 유난히 반짝거렸다.

“재배 시설이 완성됐습니다.”

난 지하철 재배 시설을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공대식 대표는 안경까지 벗고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지하 식물원이네요.”

이동춘과 같은 반응이다. 수경 재배를 모르는 이도 비슷한 반응을 보일 거 같았다.

“샐러드를 나눠 줄 수 있는 시점 맞춰 펀딩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펀딩을 시작한다는 말에 공대식 대표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저희 쪽에서도 그동안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웹페이지를 열었다. 펀딩을 위한 웹페이지가 나왔다.

세련된 디자인에 강조해야 할 단어들이 잘 들어가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을 보여 주는 내용에는 남극 자료도 들어가 있었다.

투자형 펀딩으로 수익을 보장한다는 문구도 눈에 들어왔다.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페이지도 따로 제작했습니다.”

그가 보여준 웹페이지엔 단순히 부자 농부의 꿈을 이루라는 말만 있지 않았다.

농업이 미래 산업이 될 거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마케터 출신답게 꼼꼼한 준비다.

“아주 좋네요.”

공대식 대표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한기탁과 함께 ‘원스톱 특허’에서 보내온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한 달 안에 특허가 나온다는 내용이다.

한기탁이 서류를 보고 물었다.

“특허까지 받고 펀딩을 진행하면 안 될까?”

“펀딩 중간에 발표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중간에 발표한다고?”

“선배 말대로 특허까지 받고 펀딩을 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에요. 그런데 특허도 마케팅 전략으로 이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계획하는 펀딩은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니까요.”

“중간에 깜짝 이벤트 같은 거네?”

“맞아요. 지하철에 설치한 재배 시설이 제1 이벤트라면 특허는 제2 이벤트인 거죠.”

“이벤트를 순차적으로 한다?”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은 이미 방송을 통해 소개됐어요. 초반에 우리를 어필할 수 있는 카드는 아주 많아요.”

“나도 동감이야. 네 말대로 순차적인 이벤트가 좋을 거 같아.”

그때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백민석이 동료들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왔다.

경영지원팀의 박태호는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백민석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팀원들이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서.”

백민석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나오는 얼굴이다.

“아이디어?”

아이디어란 말에 호기심이 들었다. 한기탁과 내가 펀딩과 관련한 일을 진행하며 사무실 직원들의 일은 두 배가 된 상황이다.

난 나머지 동료들에겐 펀딩과 관련한 일은 신경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과부하가 걸릴 수도 있었다.

“이것 좀 한번 봐 주시겠어요?”

박태호가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았다.

“이건 포장지네요.”

“네. 샐러드를 담을 포장지를 디자인해 봤어요.”

난 포장지를 들고 자세히 보았다. 투명한 비닐 포장지에 지리산 농부들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밀짚모자를 쓴 농부의 얼굴이다.

그 밑에 펀딩에 관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100억 펀딩의 주인공이 되세요.’

펀딩에 대한 내용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부자 농부의 꿈을 이루세요.’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포장지에 간결한 문장으로 펀딩과 청년 농부를 모집한다는 내용이 쓴 것이다.

백민석이 웃으며 말했다.

“희석이가 아이디어를 내고 태호가 디자인했어. 지하철에서 무료로 나눠 주는 샐러드 포장지에 광고하는 아이디어야.”

“포장지에 우리 광고를 한다고? 아이디어 좋은데?”

한기탁도 디자인한 포장지를 보며 말했다.

특허와 펀딩을 신경 쓰느라고 포장지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저도 마음에 드네요. 시안을 고를 것도 없겠네요. 이 아이디어는 바로 채택하겠습니다. 선배도 동의하시죠?”

한기탁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적인 반응에 박태호와 천희석의 표정이 밝아졌다.

백민석이 두 사람의 등을 두드리면 밖으로 내보냈다.

그들이 나가자 백민석이 조용히 말했다.

“태호랑 희석이가 주말 시간을 쪼개서 한 일이야.”

“주말에?”

“자기들도 작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고.”

백민석이 속삭이듯 말했다.

“기특한 놈들.”

한기탁이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번 일에 도움이 되고 싶다며 밤잠을 줄여 가며 일했던 남자다.

방현식, 그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 * *

오래간만에 방현식의 집을 찾았다.

그는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 집에서 안정을 취했다.

집에 도착하자 익숙한 기계가 소리가 들렸다.

기름 짜는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다.

그는 내가 옆에 서 있는 것도 모르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어깨를 잡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이 여긴 무슨 일이세요? 바쁠 텐데?”

“너 감시하러 왔지.”

방현식이 기계를 잠시 멈추고 말했다.

“이제 절대 무리하지 않아요.”

“아닌 것 같은데? 지금도 일하고 있잖아?”

“아니에요. 형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어요.”

“기름은 한정 판매만 하는 거 맞지?”

“네. 형 말대로 수량을 정해 놓고 일해요.”

병원에서 그와 기름 판매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난 그에게 수량을 한정해서 판매할 것을 추천했다.

마케팅 전략이기도 했다. 매일 정해진 수량의 기름만을 생산하는 전략이다.

물건을 찾는 이가 많아도 정해진 수량만 생산하는 것이다.

고급제품의 이미지를 줄 수 있었다.

방현식이 무리해서 일하는 걸 방지하는 동시에 명품 이미지까지 챙기는 방안이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이세요? 곧 펀딩 시작하지 않나요?”

“맞아. 곧 시작해.”

그의 말대로 이틀 후가 펀딩이 시작되는 날이다.

“형, 이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잖아요?”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현식이랑 여유 좀 부리면 안 되나?”

“그래도 되긴 하죠.”

그가 빙그레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때 방현식의 어머니가 등장했다.

내가 온 걸 알고 음료를 준비해 오셨다.

“이게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쟁반 위에 커피가 보였다.

커피 믹스에 얼음을 동동 띄워져 있다.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에요.”

우린 평상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시원한 바람에 기분이 산뜻했다.

방현식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은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

방현식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형이 저에게 부탁이요?”

“왜? 부탁 좀 하면 안 돼?”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내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곧 뭔가를 결심한 듯 표정이 변했다.

방현식은 목청을 높여 말했다.

“말씀만 하세요.”

“현식이가 교육을 맡아 줬으면 좋겠어.”

“교육이요?”

“새롭게 모집하는 청년 농부들에게 교육할 사람이 필요해.”

“제가 그런 걸 어떻게……?”

방현식은 놀란 토끼처럼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는 자질이 충분했다.

곶감을 만드는 기술부터 기름을 짜는 기술까지 갖고 있다. 게다가 수경 재배에 대한 지식도 상당했다.

샐러드 컨테이너 수업 때는 우수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큰 부담을 줄 생각은 아니었다.

“민요한 씨가 메인이고 현식이 네가 보조를 맡는 일이야. 보조 교사도 한 명 더 있고.”

“저 말고 다른 사람도 있어요?”

“김상철 씨도 보조 교사가 될 거야.”

“상철이 형이 한다면 저도 해야죠.”

방현식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김상철이란 이름을 듣자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았다.

이번 프로젝트는 동시에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했다.

단지 펀딩만 성공시키는 일이 아니다. 청년 농부들을 모집하는 일도 중요했다.

김창대에게 부탁해 교육 장소는 섭외가 끝났다.

장소가 됐다고 끝이 아니었다. 교육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교육을 민요한 혼자 소화할 수 없었다. 내가 교육까지 관여할 상황도 아니다.

난 방현식과 김상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을 전문가로 키우고 싶었다.

“교육 시작하면 일도 조금씩 줄이도록 해.”

“혹시, 제 건강 때문인가요?”

“그것도 포함돼 있지.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어.”

“어떤 사실인데요?”

“현식이처럼 열정적인 사람이 필요해. 이번 프로젝트는 나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거든.”

순간 방현식의 표정이 달라졌다.

결의에 찬 얼굴이다.

“형 말대로 일은 차츰 줄여 갈게요. 교육을 위한 준비도 열심히 하고요.”

“내 마음 알아 줘서 고마워.”

“그런데 월급은 주시는 거죠?”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건 너 일하는 거 봐서.”

방현식은 웃음을 터트렸다.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사람처럼 생긴 뭉게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방현식의 웃는 모습과 닮아 보였다.

* * *

기다리던 펀딩이 시작됐다.

100억의 목표 금액이 밝혀지고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농업 회사로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액수다.

펀딩이 시작되고 관심을 끈 건, 지하철에 설치한 수경 재배 시설이다.

매일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지경이다.

관심을 끈 이유는 무료로 나눠 주는 샐러드 때문이다.

‘지하철 무료 샐러드’가 검색어 1위였다.

그 뒤에도 ‘샐러드 지하철역’,‘샐러드 종류’, ‘샐러드 주는 시간’,‘무료 샐러드 수량’ 등 모두 지하철에서 벌이는 이벤트에 관한 것이다.

연관 검색어에 ‘지리산 농부들’과 ‘100억 펀딩’이 함께 잡혔다.

내가 원하던 흐름이다.

지하철 이벤트가 제대로 통했다.

무료로 샐러드를 줄 수 있는 인원이 한정돼 있지만,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 것이다.

벤처 크라우드의 공대식 대표는 약속을 지켰다.

지하철 광고판에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광고를 붙였다.

작물을 재배하는 평범한 농부가 된다는 개념이 아니다.

첨단 산업을 이끌 인재를 구하는 광고다.

내 마음이 움직일 정도로 매력적이다.

100억 목표의 펀딩과 지하철 재배 시설 이벤트 거기에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삼박자가 들어맞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다.

한기탁이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덕명아, 지금 모금 액수가 얼마인 줄 알아?”

그는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얼마에요?”

“벌써 10억이 넘었어.”

“제법 모았네요.”

“제법이라니, 어마어마하지.”

일주일 만에 10억을 모았다.

펀딩이 종료되는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3개월 뒤다.

어쩌면 제한 시간 전에 목표 금액을 달성할 수도 있었다.

부자의 본심

난 지리산 농부들의 매장으로 향했다.

배선아 기자와 약속이 있었다.

매장 안에 들어서자 그녀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늘따라 화사한 차림이다.

“올라가서 이야기할까요?”

그녀를 2층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펀딩 목표액이 100억이나 되더라고요!”

“왜요? 액수가 너무 적나요?”

“덕명 씨는 농담도 잘하시네요. 솔직히 액수가 그렇게 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때 노해미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배선아 기자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잠시 멈췄다.

“이거 드시면서 말씀 나누세요.”

노해미가 버블티와 약과를 놓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노해미가 미소를 보이며 밖으로 나갔다.

“드시면서 천천히 말씀하시죠.”

배선아 기자는 버블티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줄을 한 시간이나 서서 겨우 받았어요.”

그녀가 비닐 포장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지하철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샐러드 포장지다.

“지하철역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고 무료 샐러드까지 나눠 주다니,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였어요.”

“샐러드 맛도 보셨나요?”

“제가 입맛이 좀 까다로운 편인데 기대 이상이었어요. 수경 재배로 이렇게 신선한 샐러드를 재배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도 했고요.”

“다행이네요. 배선아 기자님의 입맛까지 훔쳤다니.”

난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료 샐러드가 검색어를 다 잡아먹은 거 아시죠?”

“네, 저도 봤습니다.”

“이벤트가 제대로 먹힌 거 같아요.”

배선아 기자는 자신이 펀딩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흥분한 모습이다.

난 시원한 버블티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도 버블티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민감한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뭐든 말씀하세요.”

“목표 금액을 모으지 못하면 펀딩이 물거품이 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목표 금액의 최소 80% 이상을 모아야 성공하는 구조입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어쩌실 생각인가요?”

배선아 기자는 내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든 100% 성공이 보장되는 일은 없겠죠. 하지만 이번 일은 무조건 성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이유가……. 있으시겠죠?”

“세계 시장에서도 통할 기술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 펀딩은 농촌의 미래가 달린 일이기도 하고요.”

“농촌의 미래요?”

“농촌이 점점 고령화되고 있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젊은 사람들의 유입도 없는 상태고요. 이 상태로 가다간 농촌은 소멸해 가겠죠.”

배선아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번 펀딩을 성공시켜 농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까지 하고 계실 줄은 몰랐네요.”

“농부가 된 이후에 줄곧 하던 생각입니다.”

“그 내용 기사에 써도 되는 거죠?”

“물론입니다.”

그녀는 청년 농부를 모집할 계획에 대해서도 물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저도 무조건 성공할 거라고 믿어요.”

배 기자가 돌아가고 매장에 사무실에 서류를 검토할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낯선 번호다.

“여보세요?”

“나병수 어른을 모시고 있습니다.”

나병수는 지리산 목장의 땅 주인이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나병수의 집사다.

“주인어른께서 덕명 씨를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에게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나병수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병수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 뵙는 걸로 알겠습니다.”

난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와의 땅 문제는 매듭을 지었다. 다른 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집으로 초대한 이유를 딱히 짐작할 수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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