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을 마치고 곧장 지리산 농부들의 매장으로 향했다.
오늘은 중요한 내용을 결정하는 날이다.
지리산 농부들의 매장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노해미가 날 보며 손을 흔들었다.
“2층 가시는 거죠? 녹차 한 잔 드릴까요?”
“좋죠.”
북적이는 매장과 달리 사무실이 있는 2층은 고요했다.
사무실 안에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기탁이 버블티 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방송은 잘 끝났어?”
“네, 잘 끝났어요.”
책상 위에 서류 뭉치가 한 다발이다. 내가 오기 전까지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모양이다.
노크 소리와 함께 노해미가 들어왔다.
“녹차 드시고 하세요.”
노해미에게 눈인사를 전했다.
노해미가 나가자 한기탁이 입을 열었다.
“투자형 펀딩을 하려면 우선 중개 업체부터 선정해야 해.”
한기탁은 펀딩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사전 조사를 하고 있었다.
크라우드 펀딩은 크게 보상형과 투자형으로 나뉜다.
보상형은 수익을 기대하지 않는 펀딩이다. 자금 부족으로 아이디어 실현이 어려운 업체를 후원하는 방식이다.
반면 투자형은 중개 회사를 통해 업체에 투자하고 배당금을 받는 구조다.
우린 투자형 크라우드 펀딩으로 결정했다.
투자형은 보상형에 비해 규모를 크게 할 수 있었다.
단순히 후원하는 보상형과 달리 배당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개 업체들은 알아봤어요?”
“전부 알아봤어. 두 군데로 추려 놨고.”
“업체 이름이 뭔가요?”
“신화 펀딩하고 벤처 크라우드야.”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선택한 업체들은 모두 유망한 크라우드 펀딩 업체였다.
“너도 알아봤을 거 같은데, 맞지?”
한기탁이 웃으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 나 역시 사전 조사를 했다.
이미 어떤 업체가 우수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두 업체는 미래에 대형 중개 업체로 성장한다.
둘 다 강점이 있었다.
신화 펀딩은 현재 규모가 가장 큰 크라우드 펀딩 중개 업체다.
벤처 크라우드는 신화 펀딩보다 규모가 작지만 벤처 기업에 강했다.
지리산 농부들은 샐러드 컨테이너 사업 이후 벤처 기업으로 성장 중이다.
이제는 단순히 농산물을 생산, 판매하는 농업 회사를 넘어, 창조적 아이디어와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도전적인 사업을 운영하는 농업 벤처 기업이 되었다.
“선배라면 어디를 고를 거 같아요?”
“규모로 보면 신화 펀딩이 낫긴 한데, 우리와는 벤처 크라우드가 맞을 거 같아.”
내 생각도 같았다.
벤처 크라우드는 벤처 기업에 강할 뿐 아니라 마케팅에도 강점이 있었다.
대표가 마케터 출신이기도 했다.
“저도 선배 생각이랑 같아요. 벤처 크라우드를 중개 업체로 선정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오케이, 그럼 중개 업체는 해결됐고. 목표 금액은 얼마를 정할까?”
방송에서도 목표 금액을 말하지 않았다.
신중하게 결정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한기탁과는 종종 목표 금액에 대해서 상의하곤 했다.
그는 50억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금액을 결정해야 했다.
“100억으로 하면 어떨까요?”
“100억이나?”
한기탁이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생각하던 액수의 더블이다.
“그렇게 많이?”
“솔직히 그 금액도 적다고 생각해요.”
“그게 적다고?”
“수경 재배 시설을 고도화하면 할수록 돈이 더 많이 들어요.”
“내 생각대로 100억을 목표로 하면 무슨 수를 쓰든 80억은 모아야 해.”
“알고 있어요.”
크라우드 펀딩은 기업이 목표로 한 금액의 80% 미만이면 펀딩이 무효가 된다.
“결정권은 대표님에게 있지.”
한기탁은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의 두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럼, 100억으로 목표 금액을 정할게요.”
“좋아. 그럼 바로 일을 진행할게.”
“어쩌면 100억보다 돈이 더 모일 수도 있어요.”
“네 말대로 목표 금액을 초과하면 좋겠다. 물론 우리에게 행운이 따라 줘야겠지만.”
“행운이 아니라 실력으로 승부를 봐야죠.”
“좋아. 실력으로 승부를 보자.”
크라우드 펀딩으로 돈을 모아 대규모 재배 시설을 지을 계획이다.
단지 재배 시설을 지을 목적만 있는 건 아니다.
펀딩을 통해 전 국민에게 지리산 농부들을 알릴 기회기도 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과 비전을 보일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펀딩과 동시에 청년 농부도 모집할 생각이다.
재배 시설을 다 짓고 난 뒤는 늦기 때문이다.
사전에 인력을 모집하고 교육해야 했다.
수직 재배부터 샐러드 컨테이너를 운영하는 법까지 모두 가르칠 계획이기 때문이다.
첨단 시설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청년 농부들을 육성하고 싶었다.
* * *
한기탁과 함께 펀딩 작업을 시작했다.
중개 업체에 등록하고 필요한 서류 등을 만드는 데 일주일을 보냈다.
“생각보다 준비할 게 많네.”
한기탁이 서류를 보며 말했다.
“액수가 커서 더 그럴 거예요. 시간이 걸릴 거라고 예상했어요.”
펀딩에 따른 계획과 회사 소개 등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철저하게 준비할수록 우리에게 더 유리하겠죠.”
“그건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한기탁이 특유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때 이장우에게 전화가 왔다.
“대표님, 통화 가능한가요?”
“물론이죠.”
그의 목소리가 밝았다. 느낌이 좋았다.
“여기 한번 와 주셔야겠어요.”
“검증 작업 벌써 끝난 거야?”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이장우가 일정보다 시간을 당길 수 있다고 말했던 게 생각났다.
“와 보시면 알겠죠?”
목소리만 들어도 알 것 같았다. 시설 작업이 끝난 게 분명하다.
“선배, 저 좀 나갔다 올게요.”
“무슨 일이야? 너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고.”
“선배도 같이 가요.”
“나도?”
“어서 일어나요.”
“혹시 장우 전화야?”
“맞아요.”
한기탁도 그제야 눈치를 챈 것 같았다.
표정부터 달라졌다.
그 역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우린 한걸음에 수직 재배 검증을 하는 창고로 달려갔다.
창고 문을 열자 놀랄 만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완성된 수직 재배 시설이다.
이장우과 민요한 그리고 엔지니어들이 재배 시설 옆에 서 있었다.
이장우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수직 재배에 성공했습니다!”
“언제 작물까지 재배한 거야?”
“민요한 씨가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역시, 민요한이다. 재배 시설을 구축하는 동안 모종까지 작업하고 있었다.
난 좀 더 가까이서 재배 시설을 보고 싶었다.
이장우의 말대로 재배 시설에 작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층층이 쌓인 수직 재배 시설이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봐야 했다.
목이 아플 정도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들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높이였다.
이장우와 엔지니어들은 내가 생각한 재배 시설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민요한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대표님이 낸 아이디어가 수직 재배의 해법이 됐습니다. 대표님의 발상이 아니었다면 만들 수 없었을 겁니다.”
난 민요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모두 수고 하셨습니다. 이건 누구 하나의 공이 아니라 모두의 땀방울이 담긴 결정체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지리산 농부들은 더 큰 도약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박수 소리가 들렸다.
이동춘이 혼자 박수를 치고 있었다. 뒤이어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창고가 울릴 정도다.
우린 함께 성공을 자축했다.
“오늘 같은 날 회식해야죠?”
이동춘의 목소리가 박수 소리를 뚫고 나왔다.
“당연하죠.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모두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이제 검증까지 끝났다.
본격적으로 펀딩에 들어갈 순간이다.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
저녁밥을 먹고 방으로 들어왔을 때다.
펀딩과 관련한 내용을 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어머니가 급한 목소리로 부르며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
“아들, 거실로 좀 와 봐.”
“무슨 일이세요?”
“와 보면 알아. 아버지도 기다리고 계셔.”
“아버지도요?”
난 노트북을 덮고 거실로 나왔다. 특별한 일은 없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평소처럼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아버지가 날 보고 말했다.
“아들, 여기 앉아 봐.”
“무슨 일이세요?”
“이제 곧 나온다!”
“나온다니, 뭐가 나와요?”
아버지의 말과 동시에 광고가 끝나고 방송이 나왔다.
‘농부가 희망이다―남극편’이었다.
금민서와 내가 화면에 등장했다.
수직 재배 성공 이후 시간 가는 것도 잊을 정도로 바쁜 시간이었다.
오늘이 방송하는 날이라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머니가 과일 접시를 놓으시며 말했다.
“우리 아들 텔레비전에 나왔네.”
가족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참 오래간만이다.
난 시원한 배 한 쪽을 입에 물었다. 달고 시원한 맛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부모님은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극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모습이었다.
“저걸 우리 아들이 했다고?”
아버지는 텔레비전과 내 얼굴을 동시에 보며 말했다.
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평화로운 한때다.
달콤한 배를 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남극 올림픽에서 내가 금메달을 땄던 장면이 나왔다.
부상으로 펭귄 인형이 나오자 어머니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 등을 가볍게 치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우리 아들 탁구도 잘 치네.”
“다 날 닮아서 그렇지.”
아버지는 어머니의 말을 받아쳤다.
“당신이 언제 탁구를 했다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내가 한 탁구 한다고!”
“덕명아, 네 아버지 허풍이 날로 심해진다?”
어머니 말에 웃음이 터졌다.
남극 장면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계획을 말하는 장면이다.
부자 농부의 꿈을 말하는 대목에서 아버지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었다.
어머니도 가만히 화면을 응시했다.
방송이 끝나자마자 아버지는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은 아들하고 술 한잔해야겠다.”
“술이요?”
“왜? 아버지랑 한잔하는 게 싫은 게냐?”
“싫은 게 아니라, 저 보약 먹고 있잖아요.”
부모님이 날 위해 준비해 주신 보약이었다.
귀국 후 매일 챙겨 먹고 있다.
회식 때도 술은 가급적 마시지 않았다.
부모님의 정성을 생각해서였다.
“한 잔은 괜찮아. 아버지랑 같이 마시는 술이 보약이나 다름없어.”
어처구니없는 논리다. 하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머니가 이미 술상을 준비하고 계셨다.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순식간에 한 상이 차려졌다.
저녁 밥상에 올라왔던 생선구이와 오징어볶음이다.
“오늘은 나도 아들이랑 한잔하고 싶네에?”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합류하시고, 아버지는 직접 담근 매실주를 꺼내셨다.
“한 잔 받아라.”
기분 좋은 목소리에 웃음이 절로 났다.
어머니의 술잔에도 매실주가 가득 찼다.
“가족끼리 건배 한 번 할까?”
아버지가 술잔을 들고 외쳤다.
매실주가 술술 넘어갔다.
배보다 더 달았다.
“이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지리산 농부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진 적은 많았지만, 가족끼리 오붓한 자리를 가진 건 오래간만이다.
난 약속대로 한 잔만 마셨다.
아버지는 벌써 취기가 오른 것 같았다.
사슴처럼 촉촉한 눈망울로 날 바라보셨다.
“네가 처음에 곶감 농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는 평범한 농부가 되려는 줄만 알았다.”
“평범한 농부라니요!”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가 발끈했다.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처음엔 그랬다는 거지. 지금 보니까 세상을 바꿀 사람처럼 보이는구나.”
아버지가 그 말을 하고 술잔을 들었다.
입가엔 미소가 가득하다.
문득 회귀 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야심 차게 시작했던 축산업이 망하고 고통 속에 살았다.
어머니도 많이 힘들어하셨다.
난 그런 아버지를 원망했다.
“덕명아,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
어릴 때 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다.
난 그 말이 싫었다.
농부의 고단함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부지런함을 강요하는 것 같아 싫었다.
“이 말을 명심해야 한다.”
“네,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고 있어요.”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난 네가 이 말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싫긴요. 그 안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잘 알고 있어요.”
그 말은 농부의 고단함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의 힘으로 첨단 재배 시설을 만들지만, 시설 안에서 키우는 건 살아 숨 쉬는 작물이다.
작물과의 교감이 중요한 것이다.
“방송에서 부자 농부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
아버지의 촉촉한 눈망울에서 곧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이 양반이 또 엉뚱한 소리 하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머니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네가 말한 꿈이 내 꿈이기도 하다. 부디 그 꿈을 꼭 이루길 바란다.”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굵은 투명해서 눈물처럼 보이지 않았다.
풀잎에 맺힌 이슬 같았다.
“아버지 말씀대로 꿈을 꼭 이룰 거예요.”
아버지는 부자 농부가 많아야 나라가 잘산다고 말했다.
나의 꿈이자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다.
* * *
방송의 파급력은 가족에게만 미치는 게 아니었다.
언론사들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많은 언론사에서 인터뷰 요청을 해 왔다.
그중에 한국 신문의 배선아 기자도 있었다.
난 그녀에게 처음으로 인터뷰할 기회를 줬다.
“한국 신문의 배선아 기자입니다.”
배선아 기자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오래간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저야 항상 잘 지냈죠.”
“안으로 들어오시죠.”
그녀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방송 보고 깜짝 놀랐어요.”
회의실로 들어오자, 그녀가 대뜸 말했다.
“뭐 때문에 그렇게 놀라셨나요?”
“덕명 씨가 탁구를 그렇게 잘하는지 몰랐어요. 저도 예전에 탁구 좀 했거든요.”
“나중에 배 기자님하고 한판 해야겠네요.”
배선아 기자는 웃으며 수첩을 꺼냈다.
그녀와는 오랜 인연이 있다. 처음 곶감 농사를 할 때부터 우연찮게 연이 닿았다.
그때 기사를 잘 내준 덕에 곶감 판매에 큰 도움이 됐다.
“가장 궁금한 거부터 물어봐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대체 덕명 씨의 끝은 어디인가요?”
“끝이라니요?”
“곶감에서 시작해서 첨단 농업까지 하고 계시잖아요. 그 끝이 궁금해서요.”
“글쎄요, 저도 궁금하네요. 방송에서 말했던 것처럼 부자 농부를 많이 만들면 끝이 보일 수도 있겠네요.”
난 엷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럼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인터뷰가 시작됐다. 그녀는 수경 재배를 시작한 계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물었다.
남극 에피소드도 빠지지 않았다. 대한 기지에서 벌어진 갖가지 일과 칠레 기지에서 만든 재배 시설까지 꼼꼼하게 물었다.
수경 재배 이야기가 끝나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송에서는 말씀하지 않았던데, 펀딩 규모는 얼마나 되나요?”
“그건 좀 나중에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아직 결정하지 않으셨나요?”
“구체적인 내용은 중개업체와 계약을 한 뒤에 알릴 생각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내용이 정해지면 저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시는 건가요?”
배선아 기자는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노리겠다는 눈빛이다.
“배 기자님에게 가장 먼저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럼, 새롭게 만들었다는 수직 재배 시설은 볼 수 있을까요?”
“볼 수는 있지만, 촬영은 힘듭니다.”
“아, 그런가요? 왜죠?”
“지금은 특허 작업 중입니다. 민감한 부분이 있어서 그러니 양해 부탁드려요.”
“그럼 눈으로만 보겠습니다. 그건 가능한 거죠?”
“물론이죠.”
그녀와 함께 수직 재배 시설이 있는 창고로 향했다.
이장우와 민요한이 손을 흔들었다.
배선아 기자는 고개를 들어 수직 재배 시설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높을 줄은 몰랐어요.”
그녀는 층층이 쌓인 재배 시설을 보고 놀란 것 같았다.
“대규모 시설을 만들 때는 더 높이 쌓을 예정입니다.”
“이것보다 더 높이요? 거의 아파트 수준이네요!”
“아파트라고 볼 수 있죠, 샐러드가 사는 아파트요.”
“그 표현 재미있네요.”
배선아는 수첩에 그 말을 적었다.
그녀와 작별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다.
한기탁이 날 찾았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특허 관련해서 말인데…….”
* * *
다음날, 난 한기탁과 함께 서울로 향했다.
특허 문제로 변리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변리사 사무실에는 몇 주 전부터 특허 관련한 서류를 보낸 상태였다.
변리사 사무실에선 특허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곤란한 문제가 하나 발생했다.
한기탁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처음엔 최대한 빨리 특허를 받겠다고 했는데…….”
난 말없이 운전에 집중했다.
돈을 아끼지 않고 고용한 변리사였다. 최대한 빨리한다는 게 일 년이었다.
일 년 동안 특허를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다른 변리사를 구할 생각이다.
우린 강남의 빌딩 숲 사이로 들어왔다.
변리사 사무실의 간판이 보였다.
[원스톱 특허]
처음 한기탁이 이곳을 섭외했을 때 잘한 선택이라고 여겼다.
유명한 변리사 사무실이었다.
최고의 변리사들이 모인 곳이라는 평이 자자했다.
특히 대표의 일처럼 능력이 뛰어나다고 들었다.
하지만 소문과 달리 원스톱으로 진행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여직원이 물었다.
“약속하셨나요?”
“네, 김윤식 변리사와 약속했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여직원이 사무실로 안내했다.
김윤식 변리사가 우리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얼굴을 뵙는 건 처음이네요.”
김윤식 변리사는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융통성이 없어 보이는 이미지다.
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바로 특허 관련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답변은 한결같았다.
“원래 특허가 좀 시간이 걸립니다. 특히 기술 분야는 심사가 까다롭고요.”
더 말을 해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지금이라도 계약을 해지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 고객니임!”
김윤식 변리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한기탁과 눈을 마주쳤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하자고 말해 둔 상태다.
우린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윤식 변리사가 뒤를 쫓았다.
“저기, 제 말씀을 한 번 더 들어 보시죠.”
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다른 변리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무실을 나오던 순간이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나를 보고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혹시, 김덕명 씨 아니신가요?”
“네, 맞습니다만?”
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방송에서 뵀습니다. 우연이라도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간혹 이런 경우가 있긴 하지만, 변리사 사무실에서는 처음이다.
가볍게 묵례하고 가려 할 때다.
그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우리 사무실엔 무슨 일로 오셨죠?”
“특허를 등록하러 왔었습니다.”
왔다가 아니라 왔었다는 말에 중년 남자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가 김윤식 변리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그의 물음에 김윤식 변리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직책이 높은 사람 같았다.
중년 남자는 눈치가 빨랐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제 사무실로 들어가 말씀을 좀 나누면 어떨까요?”
난 한기탁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긍정의 표정이다.
나 역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시죠.”
우린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방금 들어갔던 김윤식 변리사의 방과 다른 느낌이다.
넓고 쾌적한 사무실이다.
대표 장호영 변리사라는 명패가 눈에 띄었다.
우리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동안, 김윤식 변리사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장호영 대표에게 경과를 보고해야 했다.
김윤식 변리사는 특허의 내용을 상세하게 말했다.
장호영 대표는 설명을 들으며 문서를 꼼꼼하게 살폈다.
설명을 다 듣고 장호영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저희 직원이 실수한 거 같네요. 먼저 사과부터 하겠습니다.”
장호영 대표는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특허를 빨리 받을 방법이 있습니다.”
특허와 펀딩
장호영은 ‘원스톱 특허’의 대표이자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변리사이기도 했다.
그는 사무실에 있던 김윤식 변리사를 조용히 내보내며 말했다.
“김윤식 변리사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실수한 모양입니다.”
“특허를 빨리 받을 방법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 방법이 뭔지 알 수 있을까요?”
“방법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김덕명 씨의 발명에 대해서 말씀드려야겠네요.”
장호영 대표는 김윤식 변리사에게 받은 서류를 가리켰다.
“김덕명 씨의 수직 재배는 정말 대단한 발명인 것 같습니다. 이건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첨단 농업을 이끌 혁신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난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가 칭찬부터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발명의 수준에 따라 특허를 받을 수 있는 과정도 달라집니다. 김덕명 씨의 발명은 최상급인 것 같습니다. 이런 수준이라면 ‘우선 심사’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우선 심사요?”
장호영 변리사는 우선 심사에 대해서 말했다.
일반적으로 특허를 받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특허 출원 후 접수한 순서대로 심사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대기자가 많아 최소 1년이 넘게 걸린다. 하지만 우선 심사 제도를 이용하면 3개월로 단축할 수 있었다.
‘우선 심사 제도’는 특허법 61조에 근거한다. 제삼자가 해당 발명을 무단으로 도용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허를 기다리는 동안 플랜트 팩토리 등의 회사가 무단으로 기술을 훔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우리는 대통령령으로 규정된 우선 심사의 대상에도 해당했다. 국가적 방위 산업이나 녹색기술 관련해서는 우선 심사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장호영 변리사의 칭찬은 그의 말대로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다.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하기에 꺼낸 말이었다.
“김덕명 씨의 발명은 우선 심사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심사 대상이 되면 빠르게 특허를 받을 수 있죠.”
난 한기탁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장호영 변리사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선배 생각은 어때요?”
“변리사님 말대로 ‘우선 심사’를 받는 게 좋을 거 같아.”
나도 그와 생각이 같았다.
“말씀대로 특허를 진행하겠습니다. 처리 부탁드립니다.”
“한 가지 더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서류상으로는 발명의 검증이 끝났다고 나와 있는데, 사실인가요?”
“네. 수직 재배의 검증이 끝났습니다.”
“훌륭하시군요. 그럼 기간을 조금 더 단축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기간을 더 단축할 방법이 있다는 말에 눈이 번쩍했다.
“발명에 대한 내용을 전문기관에 의뢰한 후, 그 결과를 특허청에 제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전문기관이요?”
“수직 재배 발명은 농촌 진흥청에 선행 기술 조사를 의뢰할 수 있습니다.”
“농촌 진흥청과는 샐러드 컨테이너로 함께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방송에서 나왔던 남극 프로젝트 말씀이군요.”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까지 저희가 대행해 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특허를 받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다.
장호영 변리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송 이야기가 나와서 말씀인데, 개인적인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장호영 변리사는 잠시 머뭇거렸다. 특허 업무와 관련해서 일사천리로 말을 쏟아 놓은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김덕명 씨가 방송에서 했던 말이 사실인가요?”
“어떤 내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펀딩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대규모 재배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펀딩을 계획하신다고 말씀하셨던 게 생각이 나서요.”
“사실입니다. 말씀대로 조만간 펀딩을 할 계획입니다.”
“개인도 참여할 수 있는 건가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개인 투자자도 펀딩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긍정의 답을 하자 장호영 변리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저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아, 네. 혹시, 서비스 차원으로 참여하시겠다는 건지요?”
난 웃으며 물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서비스 차원이 아니라, 저도 첨단 농업에 관심이 있습니다. 첨단 농업에 한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난 미소로 답했다.
“국내 특허를 마치고 곧장 국제 특허 작업까지 들어가겠습니다.”
장호영 변리사는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이다.
일 처리도 깔끔하게 할 것 같았다.
이제 특허 관련해서는 문제가 될 게 없었다.
하동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기탁이 운전대를 잡았다.
그의 표정도 여유로워 보였다.
“솔직히 좀 걱정했어. 다른 변리사 사무실에서도 시간이 걸린다고 했거든.”
“다른 건 몰라도 특허만큼은 빨리 받고 싶었어요.”
“당연하지. 나도 특허는 최대한 빨리 받고 싶었어. 이제 펀딩이 남았네.”
펀딩 문제는 신중해야 했다.
특허와 달리 빠르게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완벽한 준비가 필요했다.
한기탁과 함께 펀딩 중개업체 벤처 크라우드를 선택했다.
필요한 서류를 보내며 업체 쪽에 미팅을 제안했다.
“벤처 크라우드에서 연락 왔나요?”
“안 그래도 그 이야기하려고 했어. 조만간 벤처 크라우드 사람이 우리 사무실로 찾아올 거야.”
“누가 온다는 말도 있던가요?”
“그런 말은 없었어. 아마도 담당자겠지?”
100억 규모의 펀딩이다.
벤처 크라우드가 아무리 벤처 기업의 펀딩에 강하다고 해도 이 정도 규모는 처음일 것이다.
벤처 크라우드 입장에서 우리는 큰 손이다.
최소 임원급이 방문할 거라고 예상했다.
* * *
며칠 뒤 벤처 크라우드에서 사람이 왔다.
정장을 입은 두 명의 남자다.
안경을 낀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옹골찬 인상에 힘이 넘쳐 보였다.
“벤처 크라우드 대표 공대식이라고 합니다.”
“김덕명입니다. 회의실로 들어가시죠.”
임원급이 아니라 대표가 직접 방문했다. 벤처 크라우드가 이번 건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었다.
난 한기탁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공대식 대표가 먼저 말을 꺼냈다.
“특허 출원이 진행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몇 달 안에 특허를 받을 예정입니다.”
일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됐다.
벌써 농촌 진흥청에 선행 기술 조사 의뢰를 마친 상태다.
“지리산 농부들이 주신 서류를 검토했습니다. 기술이 대단하더군요. 한국의 농업 회사 중에 이런 기술을 가지고 있는 회사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과찬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저희에게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벤처 크라우드의 대표 공대식은 마케터 출신이다.
거래처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을 잘 아는 인물이다.
“100억 규모의 펀딩은 우리 회사도 처음으로 진행하는 큰 사업입니다. 일이 잘 성사될 수 있게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당장 말씀드리긴 어렵습니다. 세부 논의를 거친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니더라도 어떤 부분인지 알 수 있을까요?”
“펀딩을 대중에게 홍보할 전략에 관한 일입니다.”
“펀딩 홍보라면 저희 쪽에게 맡기시는 게…….”
“내용이 확정되면 벤처 크라우드가 도와주셔야 할 일이 있을 겁니다.”
“마케팅 전략까지 미리 생각하시고. 대단하시네요. 그럼 일정은 어떻게 진행할까요?”
“대략 한 달 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좀 있네요. 그럼 그 시간 동안 벤처 크라우드에서도 마케팅 전략을 세워도 되겠습니까?”
난 공대식 대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꺼낸 말인지 궁금했다.
“펀딩과 동시에 청년 농부들을 모집할 계획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대표님이 펀딩만큼이나 청년 농부 모집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이 맞나요?”
“정확히 보셨습니다.”
“청년 농부들을 모집하는 일도 이 프로젝트의 주요한 축이라고 느꼈습니다.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일에 대해서는 저희에게 맡겨 주시면 어떨까요?”
생각도 못 한 제안이다. 벤처 크라우드는 목표 금액만 달성하면 수수료를 받기 때문이다.
그들 입장에선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일은 부가적인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손을 걷고 나서겠다니, 호감이 생겼다.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요?”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요. 벤처 크라우드 입장에서는 없던 일이 하나 더 생기는 거니까요.”
“일이 더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대식 대표가 안경테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벤처 기업의 펀딩을 성사시켰습니다. 그중에 농업 벤처 기업은 없었죠. 솔직히 지리산 농부들이 처음입니다. 최초의 농업 벤처 기업이 최대 규모의 펀딩을 의뢰한 겁니다. 전 이번 펀딩을 무조건 성공시키고 싶습니다. 만약 지리산 농부들이 성공한다면 제2, 제3의 지리산 농부들이 탄생할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역시 성공할 회사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회의를 마치고 공대식 대표가 손을 내밀었다.
“무슨 부탁인지 모르지만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네, 결정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공대식 대표가 나가고, 한기탁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벤처 크라우드에 부탁하고 싶은 뭐야?”
“장소 섭외요.”
“장소 섭외?”
* * *
점심 식사 이후 난 한기탁과 백민석을 불렀다.
“조금 있다 저랑 갈 데가 있어요.”
“또 어디를 가려고?”
백민석이 조용히 물었다.
“수경 재배 시설에서 가려고.”
“검증은 끝났잖아? 거기서는 이제 샐러드 재배를 하고 있고.”
한기탁의 말대로 검증은 끝났다.
냉장창고가 수직 재배 시설로 재탄생했다.
엔지니어들은 가고 민요한, 이장우, 이동춘이 시설을 지키고 있었다.
“검증하러 가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상의할 게 있어요.”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거야?”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펀딩 전략을 세우려고요.”
다 같이 모여서 할 이야기다.
우린 함께 재배 시설로 향했다.
재배 시설은 전과 달리 보완 시스템을 설치한 상태다.
외부로 기술이 유출되는 걸 막기 위해서다.
보완 업체에서 24시간 감시하고 있었다.
보안 카드를 센서에 대자 문이 열렸다.
수직 재배 시설은 볼 때마다 놀라웠다.
층층이 쌓인 재배 시설은 경외감마저 들게 했다.
때마침 노즐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안개처럼 뿜어져 나온 액체가 작물의 뿌리에 분무됐다.
“무슨 일이야?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한 분들이 다 함께?”
이장우가 우리에게 다가오며 농을 던졌다.
그 덕에 모두가 껄껄 웃었다.
“다 같이 의논할 게 있어서.”
시스템을 점검하던 민요한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요?”
“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중요한 일이라는 말에 멀리 있던 이동춘이 반응했다.
그가 후다닥 달려와 물었다.
“중요한 일이요?”
이동춘이 별처럼 빛났다.
한기탁, 백민석, 민요한, 이장우, 이동춘까지 6명이 모였다.
모두 수경 재배를 함께 시작했던 인물들이다.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새로운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계획이에요.”
“새로운 수경 재배 시설?”
이장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다들 궁금한 얼굴이다.
“수직 재배 시설은 아니에요. 샐러드 컨테이너와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샐러드 컨테이너와 비슷하다면 어려울 건 없겠네요?”
민요한이 가볍게 말했다.
“샐러드 컨테이너와 다른 점은 외벽이 투명한 유리라는 점이에요.”
“외벽을 유리로 만든다고? 그럼 컨테이너가 아니잖아!”
이장우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맞아, 컨테이너가 아니야. 여기처럼 창고도 아니고.”
“그럼 어디에 재배 시설을 만들려고?”
“지하에 만들 생각이야.”
“지하?”
지하라는 말에 다들 놀란 얼굴이다.
민요한이 물었다.
“지하면 어딜 말하는 건가요?”
“지하철 안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생각입니다.”
“지하철 안에요?”
벤처 크라우드의 공대식 대표에게 말하지 않았던 펀딩 전략이다.
난 지하철 안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생각이다.
펀딩을 위한 전략
런던의 클래펌커먼스역은 영국에서 가장 분주한 지하철역 중 하나다.
매일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지만, 이색적인 풍광도 엿볼 수 있다.
최첨단 수경 재배 시설에서 양상추와 고추냉이 등의 작물이 자라고 있는 모습이다.
영국의 한 농업 벤처 기업이 세운 재배 시설이다.
세계적으로 처음 시도한 일이다.
물론 2009년인 지금은 아니다. 몇 년 뒤에나 있을 일이다.
역사는 바뀌기 마련이다.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은 지리산 농부들이 가져갈 것이다.
타이틀뿐만이 아니라, 지하철에 만든 수경 재배 시설은 펀딩을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도 활용할 예정이다.
난 동료들에게 새롭게 만들 재배 시설에 대해서 설명했다.
“지하철에 만들 재배 시설은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구조예요.”
“상상이 가네요. 쇼윈도 안에 재배 시설이라!”
민요한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전시 효과를 노리는 전략이죠. 방송을 통해 재배 시설을 봤다고 해도,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차이가 있으니까요. 펀딩 계획을 발표하기 전에 지하철역에 재배 시설을 만들고 싶어요.”
“좋은 전략이네요. 많은 사람이 오가는 지하철역에 재배 시설을 만들면 흥미를 느낄 테니까요. 펀딩에도 도움이 될 거고요.”
민요한이 말을 마치자, 이장우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지하철역 안에 재배 시설을 만든다……. 물과 전기는 문제없을 테고, 정화 시설도 지하철에 있는 걸 활용한다면 될 거 같네. 이산화탄소 농도만 신경 쓰면 되겠네. 아무래도 샐러드 컨테이너와는 환경이 다를 테니까.”
“광원과 온도 관리도 중요할 거야.”
이장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남극에서 재배 시설을 만든 경험이 있었다. 지하철역 안에 재배 시설을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동료들도 지하철역 안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드는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단순히 작물이 자라는 모습만 보여 줄 생각은 아닙니다.”
“그럼 뭐가 또 있나요?”
이동춘이 토끼 눈을 뜨고 물었다.
“재배한 작물을 시민들에게 나눠 줄 생각입니다.”
“무료로 나눠 주는 건가요?”
민요한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 무료로 나눠 줄 생각입니다. 물론 펀딩 기간에 한정해서요.”
“시설만 알리는 게 아니었네요?”
민요한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 재배 시설만 알릴 계획이 아니다.
신선한 샐러드의 맛을 보여 주고 싶었다.
전시 효과와 더불어 재배 시설 앞에 줄을 서게 하는 이벤트다.
“그 아이디어 아주 좋은데?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릴 수 있겠어!”
한기탁이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말했다.
“지하철역이 사람들로 미어터지겠어.”
이장우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한기탁이 대꾸했다.
“지하철공사에서 싫어할 수도 있겠는데?”
“왜요?”
“가뜩이나 매일 사람들로 북새통일 텐데, 샐러드를 받으려는 줄까지 길게 늘어서서 말이야.”
한기탁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이 아이디어에 찬성이야, 그런데 생각한 지역은 있어? 지하철역이 어디 한두 곳도 아니고.”
한기탁은 날 보며 물었다. 다른 동료들도 모두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지역에 생각하고 있어요.”
“두 지역이나?”
“서울과 부산이요.”
서울 지하철은 도교보다 이용 인구가 많다. 세계적 수준이다.
지역 중에서도 한 곳을 섭외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부산이 그 주인공이다.
두 곳에 재배 시설을 놓겠다고 하자, 이장우가 물었다.
“나도 서울 한 곳보다는 부산까지 하면 좋을 거 같아. 팀은 어떻게 꾸리는 게 좋을까?”
“서울은 장우 네가 맡아 줬으면 좋겠어.”
“그럼 부산은?”
“부산은 내가 맡을 생각이야.”
“그럼 저는요?”
민요한이 물었다. 자기도 어느 한 곳을 맡을 거로 생각한 얼굴이다.
“요한 씨는 하동을 맡아 주셔야죠. 수직 재배 시설을 볼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민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이동춘이 민요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요한 씨는 나랑 같이 여기 있어요. 여기서 나랑 같이 있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예요.”
“아버님은 저랑 같이 부산에 가셔야 하는데요?”
“부산이요?”
이동춘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부산에 갈 줄은 생각도 못 한 것 같다.
“아버님 같은 베테랑 기술자가 필요하답니다.”
“대표님이 가자고 하면 지옥이라도 쫓아가야죠. 보너스까지 두둑하게 주셨는데.”
민요한과 이장우가 깔깔거리고 웃었다.
처음엔 내가 서울을 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리가 문제였다.
재배 시설을 만드는 동안에도 이곳에서 처리할 일들이 있었다.
부산 정도 거리면 문제가 없었다.
“그럼 언제부터 작업 시작하는 거야?”
이장우가 자리에 벌떡 일어나면 물었다. 당장이라도 일할 기세다.
“곧 하게 될 거야. 그동안 준비를 꼼꼼하게 해 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