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2. (192/205)

다음 날 아침 이장우와 함께 캘리포니아 농업 박람회장으로 향했다.

캘리포니아 툴레어에서 박람회가 한참 진행 중이다.

올해는 69개국에서 1,800곳의 업체가 박람회에 참가했다. 박람회를 찾은 방문자가 12만 명을 넘었다.

참가한 나라와 방문자가 작년보다 더 많아졌다.

농업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장우는 박람회장을 보고 말했다.

“규모가 대단하네.”

“아마 하루 만에 다 볼 수 없을 거야.”

“플랜트 팩토리부터 구경해 볼까?”

난 작년과 달리 마음이 평온했다.

처음 박람회장을 찾았을 땐 조급함이 앞섰다면, 지금은 여유가 생겼다.

남극에 수경 재배 시설을 설치했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저기 해리 씨 있네.”

이장우가 전해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셨네요. 안 그래도 덕명 씨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제 이야기요?”

“남극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든 일이요.”

그때였다. 전해리의 뒤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플랜트 팩토리의 대표 마크 레스터다.

그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스터 김, 또 만났네요.”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남극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성장 속도가 놀랍네요.”

“한국 사람들은 뭐든 빠르니까요.”

“저도 그 점에 동의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뭐든 빠르죠.”

마크 레스터는 전해리를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해리의 차림이 달라 보였다.

그녀의 직급이 제법 상승한 것 같았다.

우리 함께 박람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난 마크 레스터에게 가볍게 말을 건넸다.

“남극에서 당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었다고요? 그것도 남극에서요?”

“마크 레스터의 이름을 똑똑히 들었죠.”

“그게 누군가요?”

그가 놀란 토끼처럼 날 바라보았다.

“모하마드 살라를 만났습니다.”

모하마드라는 이름이 나오자 당황한 것 같았다.

“미스터 김이……. 모하마드를 어떻게?”

마크 레스터는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옆에 있던 전해리가 놀랄 정도다.

그가 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나 역시 그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귀국 그리고 검증

마크 레스터는 방으로 날 안내했다.

박람회장에서 플랜트 팩토리가 사용하는 전용 공간 같았다.

방 안에서 몇몇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크 레스터는 그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주변이 정리되자 그가 조용히 물었다.

“모하마드 살라에게 내 이야기를 들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마크 레스터에게서 조바심이 느껴졌다.

“모하마드가 플랜트 팩토리에 일을 의뢰했었다고 들었습니다. 두바이에 수경 재배 시설을 건설하는 프로젝트 말입니다.”

말을 마치고 잠시 마크 레스터의 얼굴을 살폈다.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전해리에게 마크 레스터가 야심 차게 밀어붙이던 프로젝트가 실패했다고 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그것이 두바이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벤자민 대장이 모하마드 살라를 소개했던 일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마크 레스터는 눈치가 빠른 인간이다.

간결하게 말해도 알아들을 거라 여겼다.

예상대로 사연 따위 묻지 않았다.

그는 두바이 프로젝트에 관해서 말했다.

“두바이 프로젝트에 관해 미스터 김과 이야기할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그럼 그 후의 이야기도 들으셨겠네요?”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마크 레스터는 빈 의자에 앉았다. 한숨을 내쉬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미스터 김이 들은 대로입니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 못했죠.”

그는 실패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실패한 정확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것이 내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이유기도 했다.

난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문제가 있었나요?”

마크 레스터가 생수병에 있던 물을 종이컵에 따랐다.

“남극까지 가서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었다니, 물의 순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겠죠?”

그는 일부러 물이 넘치게 부었다. 종이컵에서 물이 넘쳐흘렀다.

칠레 기지에 만든 수경 재배 시설이 물바다가 됐던 장면이 떠올랐다.

“수경 재배 시설을 층층이 쌓는 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모하마드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가 없었죠.”

그 역시 수직 재배의 해법을 찾지 못한 것이다.

내가 그에게 듣고 싶었던 대답이었다.

“미스터 김은 수직 재배의 해법을 찾았나요?”

마크 레스터는 물이 가득한 종이컵을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내가 수직 재배의 해법을 찾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난 답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쉬운 일이 아니죠. 만약 미스터 김이 해법을 발견한다면 저에게도 꼭 연락하십시오.”

마크 레스트는 종이컵에 가득한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갈증보다는 욕구불만을 표출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 박람회장으로 가실까요?”

“한 가지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모마하드가 지리산 농부들에게도 기회를 줬습니다.”

“기회라면?”

“두바이 프로젝트입니다.”

“미스터 김도 그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거네요?”

마크 레스터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기뻐하는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감춰 놓은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요? 수직 재배를 할 수 있는 비법이라도?”

그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빛만으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 * *

박람회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왔다.

이장우는 박람회장에서는 말을 아꼈다. 호텔에 돌아와서야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마크 레스터랑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두바이 프로젝트에 관해서 물어봤어.”

이장우에게 플랜트 팩토리가 두바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실패한 일을 말했다.

“역시, 수직 재배가 문제인 거네.”

“플랜트 팩토리도 해답을 찾지 못한 것 같아.”

“그럼 우리가 성공하면 세계 최초가 되겠네?”

난 대답 대신 미소를 보였다.

이장우가 아이처럼 해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저녁엔 맛있는 거 먹자.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기도 하고.”

이번 출장을 통해 이장우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그는 생각보다 먹는 것에 집착했다.

“내가 전해리 씨도 초대했어.”

마크 레스터와 따로 이야기하는 사이, 두 사람이 약속을 잡은 것 같았다.

그녀 덕에 마크 레스터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저녁 정도는 대접하고 싶었다.

이장우의 말대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기 하루 전이기도 했다.

길고 긴 출장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저녁 식사 장소는 이장우가 골랐다.

‘엘 마리아치(El Mariachi)’라는 멕시코 요리 전문점이다.

칠레 기지의 조리장 카를로스가 추천한 레스토랑이라고 말했다.

“여기 타코가 멕시코에서 먹는 타코보다 더 맛있다고 들었어.”

이장우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때마침 전해리가 도착했다.

그녀가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시간 맞춰서 온다고 했는데 정말 딱 맞았네요.”

“해리 씨도 여긴 처음이시죠?”

이장우가 엘 마리아치(El Mariachi) 간판을 가리키며 물었다.

“처음이에요. 이곳에 멕시코 식당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카를로스가 추천한 곳이니까요.”

“카를로스요?”

이장우는 칠레 기지 조리장 카를로스 이야기를 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전해리가 깔깔거리며 말했다.

“칠레 조리장이 멕시코 요리도 잘 아시나 봐요!”

그녀의 말에 이장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우린 메인 메뉴인 타코를 시켰다.

주문과 동시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레스토랑의 특별 이벤트다.

멕시코 전통 복장을 한 밴드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밴드의 리더가 이장우에게 커다란 모자를 씌워 주었다.

“정말 잘 어울려요.”

전해리가 손뼉을 치며 맞장구를 쳤다.

그녀의 말대로 묘하게 어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드디어 메인 메뉴인 타코가 나왔다.

푸짐한 한 상이다.

밀가루 반죽을 얇게 밀어 구워 낸 토르티야와 특제 소스를 발라 구운 소고기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타코에 넣어 먹는 부재료들도 푸짐했다.

양상추, 토마토, 치즈, 라임, 고수, 살사 소스까지 테이블이 가득 찰 지경이다.

이장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우와, 꼭 쌈밥집에 온 기분이야.”

쌈밥이란 말에 전해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맛있게 먹겠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마지막 밤은 즐거웠다.

이장우는 타코를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가 미친 듯이 삼겹살을 먹던 모습이 떠올랐다.

“덕명 씨는 왜 안 드시고 웃기만 하세요?”

전해리는 뭐가 그리 재밌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난 그녀에게 남극 기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줬다.

이장우가 괴물처럼 삼겹살을 먹었다고 하자, 전해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실 때였다.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덕명 씨는 남극 프로젝트 이후에는 어떤 일을 계획하시나요?”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생각입니다.”

“플랜트 팩토리와 같은 꿈을 꾸고 계시네요?”

“같지만 다른 꿈이죠.”

“같지만 다르다니요?”

전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플랜트 팩토리는 완전 자동화를 꿈꾸고 있으니까요.”

“그건 마크의 꿈이기도 하죠.”

난 민요한이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민요한은 플랜트 팩토리의 창립 멤버였다.

그는 마크 레스터와 생각이 맞지 않아 회사를 떠났다.

마크 레스터는 인간이 없는 농업을 꿈꿨다.

농업의 완전 자동화를 꿈꾼 것이다.

“덕명 씨의 꿈은 뭔가요?”

“저 역시 농업에 첨단 기술을 도입하고 있죠. 그것이 시대의 흐름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모든 걸 기계의 힘에 의존하는 건 반대입니다. 작물을 돌보는 일은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덕명 씨는 사람의 힘을 믿는군요?”

“전 농부의 힘을 믿습니다.”

농부라는 말에 그녀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기술은 재배를 위한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죠. 남극에서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것도 기술의 힘이죠. 하지만 작물을 돌보고 관리하는 건 사람의 몫입니다.”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면 수많은 농부와 뜻을 함께하겠네요?”

“그게 바로 제 꿈입니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의 밤이 지나갔다.

* * *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3개월 일정으로 간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이다.

미국 일정까지 덧붙여져 예정보다 길어졌다.

이장우와 함께 입국장을 통과했다.

우리를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

이장우의 아버지 이동춘이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이동춘은 아들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다치긴요. 더 건강해졌어요.”

“다행이구나.”

이동춘은 아들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다.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아버님, 저도 잘 다녀왔습니다.”

“아이고, 대표님도 계셨군요.”

반가운 손님이 더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공항에 나와 계셨다.

두 분이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나도 걸음을 재촉했다.

어머니가 얼굴과 몸 상태를 확인했다.

“좀 마른 거 같구나. 밥은 제대로 먹은 거야?”

“잘 먹고 잘 지냈어요.”

옆에 있던 아버지도 거들었다.

“내가 봐도 먹는 게 부실했던 거 같네. 너 먹으라고 보약 지어 놨다. 내일부터 아침 점심으로 챙겨 먹어라.”

“보약이요?”

처음 남극으로 출장을 간다고 했을 때는 그저 잘 다녀오라고 말했던 부모님이다. 보약까지 지어 놨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머니, 아버지 성의를 봐서라도 잘 챙겨 먹을게요.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데 힘들지 않으셨어요?”

“기탁이 덕에 편하게 왔다.”

“한기탁 선배요?”

“방금까지 같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한기탁이 귀신같이 나타났다.

“대표님아, 남극까지 출장 다녀오느라 고생 많았어!”

“고마워요. 이곳까지 부모님 모시고 와 줘서.”

“우리 대표님이 오시는 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

한기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장우와 이동춘 부자도 대열에 합류했다.

우린 다 함께 하동으로 내려갔다.

* * *

하동은 아직 겨울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남극의 여름보다 따뜻했다.

익숙한 풍경을 보자 집에 돌아온 게 실감 났다.

“오늘은 푹 쉬고 내일 환영 파티하자.”

한기탁이 짐을 내리며 말했다.

“선배 말대로 환영 파티는 내일 해요.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

“민요한 씨랑 만나기로 했어요.”

“오자마자 일하려고?”

“일이 아니라 확인할 게 있어요.”

“그런 걸 일이라고 부르는 거야, 일!”

한기탁의 말에 아버지가 조용히 웃으셨다.

“민요한 씨에게 대략 이야기는 들었어. 우리 대표님이 숙제를 내줬다고.”

“아주 중요한 숙제죠.”

“지금은 숙제 검사를 하러 가는 거네. 그 길도 내가 모셔다드려야지.”

한기탁이 자동차 문을 열었다.

난 곧장 농업 지원 센터로 향했다.

민요한은 보통 샐러드 컨테이너에서 일했다.

오늘은 평소와 다른 곳에서 날 반겼다.

농업지원 센터에서 창고로 쓰는 곳이다.

크기는 작지만, 높이가 제법 있는 곳이다.

민요한은 그곳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어 놓았다.

정교한 시설은 아니었다. 간단하게 만든 시설이다.

창고로 들어가자 민요한이 손을 흔들었다.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검증 작업은 잘 돼 가고 있나요?”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검증을 마쳤습니다.”

“그렇게 빨리요?”

“정교한 검증까지는 아니에요. 그래도 수직 재배가 가능한지 확인했습니다.”

“확인 결과는 어떤가요?”

“대표님이 발견한 방법이 수직 재배의 해답이 될 거 같습니다!”

민요한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좀 더 확실하게 검증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공간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할 거 같고요.”

민요한은 간이로 만든 수경 재배 시설을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와 다른 모양의 재배 시설이다.

샐러드 컨테이너의 수경 재배 시설과 달리 높이가 제법 높았다.

간이 시설이라 했지만 제법 짜임새 있어 보이기도 했다.

칠레 기지에서 검증을 부탁했을 때부터 만들었던 재배 시설 같았다.

“내일부터 당장 작업에 들어가죠.”

검증이 끝나면 특허부터 낼 생각이다.

플랜트 팩토리도 도용할 수 없는 국제 특허다.

특허 출원을 위한 준비

지리산 농부들의 목장에서 환영 파티가 열렸다.

남극에서 무사히 귀환한 걸 축하하는 자리다.

“고생했네. 그 먼 곳까지 가서.”

지리산 목장의 책임자 설강인이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설 팀장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난 그저 목장에서 젖소들을 지켰을 뿐이지.”

남극 출장 중에 지리산 농부들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지리산 농부들 목장에 로봇 착유기가 한 대 더 늘었다.

목장에서 유제품을 공급받는 매장도 지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쇼핑몰은 이번 명절에도 곶감을 완판하는 기염을 토했다. 곶감뿐만 아니라 꿀과 녹차, 거기에 방현식이 만든 참기름과 호두 기름도 인기가 좋았다.

급속한 성장세를 보이는 건 샐러드 컨테이너 사업이었다.

방송에서 새싹인삼 편이 나간 이후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문의하는 사람들이 폭주했다.

한기탁은 농촌진흥청에 보조금을 요청했고, 농부들은 저렴한 가격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받을 수 있었다.

작은 것부터 차곡차곡 쌓았던 일들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이제 지금까지 이뤄 놓은 기반을 토대로 도약할 일만이 남았다.

* * *

수직 재배를 검증할 순간이다.

검증 작업에 앞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민요한과 이장우를 주축으로 우선 전문가 집단부터 구성했다.

처음으로 한 일은 장소를 섭외하는 일이다.

시설을 만든 장소는 내부의 높이가 중요했다. 최소 8단 높이로 수경 재배 시설을 올릴 수 있어야 했다.

공간이 너무 커서도 안 됐다. 공간이 크면 고려할 사항이 많았다. 빠른 검증이 어려운 것이다.

마침 화개 장터 인근에 적당한 건물이 있었다.

냉동 창고로 쓰던 건물이다. 지금은 방치된 상태였다.

“이곳이 좋겠네요.”

민요한이 냉동 창고를 둘러보고 말했다.

이장우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냉동 창고를 임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 안에 시설을 구축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냉동 창고를 구입한다고 하자 창고 주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애물단지처럼 방치하고 있던 물건이었다.

주인은 가격만 맞으면 당장이라도 계약하겠다고 했다.

우리에겐 여유 자금이 충분했다. 남극 프로젝트를 끝내고 받은 돈까지 있었다.

당장 계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했다.

시설을 만들기 위해 최고의 인력이 모였다.

이장우, 이동춘, 민요한, 거기에 이장우가 불러온 엔지니어까지 합세했다.

엔지니어들은 청년 농부 지원 사업 때 손발을 맞춘 인력들이다.

모두 샐러드 컨테이너를 제작한 경험이 있었다.

현재 국내 있는 수경 재배 기술자 중 최고였다.

수직 재배 시설을 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이해가 필요했다.

검증 작업이라고는 하지만 새롭게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모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든 경험이 있지만, 수직 재배는 처음이다.

난 민요한, 이장우와 함께 수직 재배 시설을 설계했다.

엔지니어들에게 설명하는 역할은 내가 맡았다.

“이제부터 만들 수경 재배 시설은 지금까지 만든 설비와는 다릅니다. 가장 큰 차이는 작물의 뿌리가 물에 닿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뿌리가 물에 닿지 않는다고요?”

이동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기존 샐러드 컨테이너는 작물의 뿌리가 물속에 잠겨 있었다. 하나의 관에 물과 영양액이 순환하는 구조기 때문이다.

산소는 에어 펌프를 통해 공급했다.

“이번에 만들 시설은 작물의 뿌리가 물에 닿지 않습니다.”

“그럼 물과 영양액은 어떻게 주나요?”

“물과 영약액은 분무할 겁니다.”

“분무요?”

“노즐을 이용해 분무하는 방식이죠.”

난 프로젝트 화면을 켰다. 준비한 이미지가 나왔다.

작물의 뿌리가 허공에 노출된 모습이 보였다. 뿌리 아래 물과 영양액을 분무하는 노즐 장치가 있었다.

“노즐에서 물과 영약액이 안개처럼 분무됩니다.”

이동춘과 다른 엔지니어들은 분무 장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뿌리가 허공에 노출된 게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다.

“작물의 뿌리가 밖으로 노출됐다고 이상이 생기진 않습니다. 오히려 한 가지 장점이 생기기도 하죠.”

“장점이요?”

이동춘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에어 펌프를 이용해 산소를 공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에어 펌프 이야기를 꺼내자 이동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해한 것 같았다.

난 다른 엔지니어들을 위해 자세히 설명했다.

작물은 뿌리털을 통해서 호흡한다. 작물이 흙 속에 묻혀 있다고 해서 호흡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흙 알갱이 사이사이에 작은 틈이 있다. 그 사이로 공기가 들어오는 것이다.

그동안 제작했던 수경 재배 시설은 작물의 뿌리가 물에 잠기는 구조였다.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숨 쉴 구멍이 없었다.

물이 숨구멍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어 펌프를 이용해 산소를 공급해 주는 방식이었다.

노즐을 이용해 물과 영약액을 분무하면 에어 펌프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작물의 뿌리가 허공에 노출돼 있어, 대기 중 공기로 호흡할 수 있었다.

“일종의 비데네요.”

이동춘이 웃으며 말했다. 주변 사람들도 그의 말에 피식거렸다.

“말씀대로 비데와 비슷한 구조죠. 비데와 다른 건 뿌리가 마르지 않게 지속해서 분무해야 한다는 점이죠.”

지속해서 분무한다는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이동춘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사람의 엉덩이에 물을 분사하는 것처럼 작물의 뿌리에도 물과 영양액을 분사한다.

수직 재배가 가능한 이유기도 했다.

얇은 노즐이 혈관처럼 수경 재배 시설에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혈관처럼 얇은 관이다. 수압과 물의 하중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가벼운 관이 촘촘하게 이어져 있기에 시설을 높게 쌓을 수 있었다.

설명을 마치고 각자 자리로 돌아갈 때다.

이장우가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 대표님은 이제 다른 일 좀 보세요. 여긴 내가 책임질 테니까.”

“내가 없어도 괜찮겠어?”

“요한 씨도 있고, 나도 있으니까 문제없어. 넌 다른 일도 많잖아.”

그때 민요한이 등장했다.

“장우 씨 말대로 여긴 저희에게 맡겨 주세요.”

민요한도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두 사람에게 맡기겠습니다.”

이장우의 말대로 처리할 일들이 많았다.

* * *

난 곧장 사무실로 갔다.

특허 관련해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한기탁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검증 시설을 만드는 일은 잘 진행되고 있어?”

“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완성될 예정이에요.”

“그거 기대되네.”

“그나저나 특허 관련해서는 좀 알아봤어요?”

“변리사와 통화하고 서류 검토 중이었어.”

“특이 사항은 없나요?”

“국내 특허는 어렵지 않을 거 같은데, 국제 특허가 좀 까다롭네?”

한기탁에게 특허를 맡기기 전에 나도 알아봤다.

국제 특허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PCT(Patent Cooperation Treaty)라는 제도가 있다.

나라 간에 특허를 좀 더 쉽게 획득하기 위한 제도다.

자국 특허청에 출원하고자 하는 국가를 지정해 국제 출원서를 제출하면 특허를 인정받는 제도다.

특허 협력 조약에 가입한 나라에 국제 출원서를 제출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제 특허는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특허받기 위한 절차가 까다롭다. 시간도 오래 걸렸다.

물론 유능한 변리사를 만난다면 절차와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었다.

“이번 일에는 돈을 아끼지 말아 주세요. 변리사도 제일 잘하는 곳을 섭외하고요.”

한기탁은 잠시 고민했다. 그는 지리산 농부들의 재정을 관리하는 안방마님이기도 했다.

돈을 쓰는 데 신중한 것이다.

“나도 이번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어. 대표님 말대로 비용은 아끼지 않겠습니다.”

한기탁은 딱 부러지는 말투로 말했다.

서류를 정리해 일어나려는 순간이다.

한기탁이 물었다.

“그럼 이제 대규모 펀딩 작업 들어가는 건가?”

“네, 들어가야죠.”

“아무래도 수직 재배 검증이 끝나야겠지?”

“검증이 끝나기 전에 홍보부터 하려고요.”

“홍보라니……. 또 무슨 작전을 꾸미고 있는 거야?

“방송에서 공개할까 해요.”

* * *

다음날 여의도로 향했다.

방송국으로 가는 길이다.

최민성 피디에게 줄 물건이 있었다. 그가 나에게 준 비디오카메라다.

비디오카메라 안에 남극에서의 긴 여정이 담겨 있었다.

남극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과정부터 콩나물 재배기와 칠레 기지에 수경 재배 시설을 설치한 장면까지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전문가처럼 앵글이 다양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들었다.

원하는 화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았기 때문이다.

남극 대한 기지 대원들의 모습도 있었다.

남극 올림픽에서 탁구를 하던 장면과 삼겹살 회식이 담긴 영상이다. 다시 봐도 즐거운 추억들이었다.

모두 대원들의 동의를 얻어 촬영했다. 그들도 방송을 통해 얼굴이 나가길 기대하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건강하게 잘 지내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고 했다.

여의도에 도착해 방송국 로비에 들어섰다.

로비에 커다란 홍보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잠시 눈을 의심했다.

내가 잘 아는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있었다.

‘농부가 희망이다.’

내가 출연했던 방송이기도 했다.

‘농부가 희망이다’는 꾸준히 시청률이 올랐다고 전해 들었다.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기탁이 농담처럼 말했다.

새싹인삼을 기점으로 프로그램의 인기가 고공 행진했다는 내용이다.

방송국 로비에 플래카드가 걸릴 정도라고는 생각 못 했다.

홍보 플래카드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곶감 명인의 황유신 선생과 녹차 명인 임시백 선생이다.

그들보다 작은 얼굴이었지만 양봉 협회의 박문호 선생도 있었다.

대타로 출연을 부탁했던 분들이다. 지금은 어엿한 방송인처럼 보였다.

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최민성 피디와 고애주 작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고애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간만에 뵙네요. 남극엔 잘 다녀오셨어요?”

“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최민성 피디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이다.

최민성 피디는 내 가방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맡긴 비디오카메라를 찾는 눈빛이다.

“혹시 이걸 찾으시나요?”

난 가방에서 비디오카메라를 꺼냈다.

최민성 피디는 들뜬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촬영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워낙 잘 알려주셔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확인 좀 해도 될까요?”

최민성 피디는 고애주 작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물론이죠. 얼마든지 확인하세요.”

“그럼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최민성 피디는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고애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랑 올 때는 미팅 끝나고 확인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덕명 씨가 이해해 주세요.”

“최민성 피디는 저보다 카메라를 애타게 기다렸던 것 같네요.”

고애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없는 동안에도 방송도 잘 됐다고 들었습니다.”

“덕명 씨가 기반을 잘 닦아 놔서 잘 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녀와 함께 출연자를 찾아다녔던 일이 떠올랐다.

마치 먼 옛날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즐거운 추억이다.

“덕명 씨 소식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제 소식이요?”

“시청자 게시판에 글이 매일 올라온다니까요. 남극으로 간 농부는 어떻게 됐냐고?”

“그래요?”

좋은 타이밍이다. 지금이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을 알릴 절호의 기회다.

“남극 일도 끝났으니, 다시 방송하셔야죠?”

“아마 그때처럼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앞으로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계획이라서요.”

“아쉽네요. 그래도 시청자들에게 남극 이야기는 들려주실 거죠?”

“물론이죠. 제 손으로 직접 촬영한 영상이기도 하고요.”

“방송에서 앞으로 계획도 말씀해주세요.”

“기회만 주신다면 얼마든지요.”

고애주 작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최민성 피디였다.

손에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덕명 씨, 이번 방송은 특집으로 가야겠는데요!”

두 가지 사건

최민성 피디는 남극 영상에 만족한 것 같았다.

그냥 만족하는 수준이 아니다.

“덕명 씨, 방송 일을 해도 잘할 것 같아요.”

농담이 아니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방송은 제가 아니라 최민성 피디님이 더 잘하시죠.”

고애주 작가는 최민성 피디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체 어떤 수준이기에 이런 말까지 하는지 궁금한 표정이다.

“그렇게 내용이 좋나요?”

“고 작가도 화면 보면 알 거야. 특집으로 방영해도 될 수준이야. 물론 편집이 좀 필요하겠지만.”

“궁금하네요. 최 피디님이 그런 말까지 하는 걸 보니.”

고애주 작가는 날 바라보며 말했다.

“피디님, 너무 띄우시네요~ 과장이 지나치신데요?”

“과장이라니요, 절대 과장이 아닙니다. 그나저나 이번 남극 편에 출연해 주실 거죠? 덕명 씨가 반드시 출연해 주셔야 합니다.”

최민성 피디는 애원하는 말투로 말했다.

“물론이죠, 제가 촬영한 영상이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조만간 녹화 일정을 잡을 겁니다. 그때 연락드리겠습니다.”

“혹시, 저 혼자 출연하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금민서 씨랑 함께 출연하게 될 겁니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그림이 그려졌다. 남극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장면을 보며 방송을 진행하게 될 것이다.

여의도에서 일을 마치고 하동으로 돌아가려는 순간이다.

한기탁에게 전화가 왔다.

흥분한 목소리다.

“덕명아, 빅뉴스야.”

“무슨 뉴스인데요?”

“수입산 타피오카에서 공업용 가소제 성분이 검출됐다는 뉴스가 나왔어.”

버블티에 들어가는 타피오카에 공업용 말레산이 32ppm이나 검출됐다는 뉴스다.

말레산은 플라스틱을 부드럽게 만드는 화학물질이다. 다량 복용할 경우 신장 기능의 이상을 가져올 수 있다.

문제가 된 업체는 대만계 버블티 체인이다. 한두 곳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버블티를 판매하고 있는 대부분의 대만계 업체들이 걸려들었다.

보건당국이 전량 회수 조치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뉴스가 더 있어.”

“뉴스가 더 있어요?”

“중국산 채소에서 멜라민이 검출됐다는 뉴스야. 버터헤드와 카이피라도 포함돼 있어.”

멜라민도 말레산과 마찬가지로 공업용 화학 물질이다.

주로 플라스틱, 염료, 접착제 등의 원료로 사용된다.

채소에 공업용 화학 물질을 넣는 이유는 단순하다. 일종의 방부제이다.

시간이 지나도 신선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좀 화가 나는 뉴스네요.”

“나도 뉴스를 접하고 좀 짜증이 났어. 사람이 먹는 음식에 장난을 치다니. 아무튼, 그 덕에 지리산 농부들은 바빠지게 생겼어.”

공교롭게도 사건이 두 개나 터졌다. 두 사건 모두 지리산 농부들에게 영향을 주는 사건이다.

이미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농산물과 관련한 사건은 이후로도 끊이질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입 농산물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한국에서 재배되는 많은 작물도 해마다 문제가 발생했다.

한국 농산물에 발생한 문제는 주로 작황의 불균형이다. 수입산 농산물처럼 공업용 화학물질이 문제가 된 게 아니라, 기상 이변으로 생산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회귀하기 전 매년 겪었던 일이다.

내가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에 공을 들이는 이유기도 했다.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로 작물을 생산하면 기상 이변에도 대처가 가능했다.

난 핸들을 돌렸다.

목적지는 하동이 아니라 부산이다.

수입산 타피오카 사건이 지리산 농부들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 * *

부산 용두산 공원에 도착했다.

난 카페 간판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원래 이름은 ‘카페 프렌즈’였다. 지금은 ‘버블티 프렌즈’로 바뀌어 있었다.

간판 아래 지리산 농부들 협동조합이란 말이 눈에 띄었다.

처음 이 카페를 방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곳은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셨던 서남수 선생님의 매장이다.

양심선언을 하고 퇴직당해야 했던 선생님이, 장사가 어려워 카페를 접으려 했었던 곳이다.

지리산 목장의 요거트를 팔기 시작하면서 매장은 살아났다.

서남수 선생님의 매장뿐만 아니라 지역의 다른 매장들도 목장 요거트를 팔면서 승승장구했다.

지금은 모든 매장이 지리산 농부들과 협동조합으로 상생하고 있었다.

카페의 주메뉴도 커피에서 버블티로 바꿨다.

서남수 선생님의 카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르바이트생이 정신없이 버블티를 만들고 있었다.

서남수 선생님도 바쁘게 움직였다.

“서남수 선생님.”

몇 번을 부르고 난 뒤에야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정도로 매장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덕명이 왔구나, 잠깐만 기다려. 이것만 만들고 갈게.”

서남수 선생님 버블티를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이거 한 잔 마셔.”

오래간만에 보는 버블티다. 난 고구마 펄이 들어간 버블티를 한 잔 마셨다. 타피오카 펄이 쫀득한 게 맛이 좋았다.

“남극에 갔다는 소식은 들었다. 언제 들어 온 거야?”

“며칠 안 됐어요.”

“바쁠 텐데, 여기까진 무슨 일로?”

“뉴스 보고 왔어요.”

“뉴스라니?”

“타피오카 펄에서 화학 물질이 나왔다는 뉴스요.”

“아, 그 뉴스. 우리랑은 전혀 관련 없는 뉴스지.”

그의 말대로 지리산 농부들의 제품은 사건과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더 주목받게 생겼다.

지리산 농부들의 고구마 펄은 연구소의 서우영 박사와 설민주가 공동으로 개발했다.

고구마 전분과 찹쌀가루 그리고 녹두 전분을 넣은 고구마 펄로, 모두 국내산 농산물을 이용했다. 특허로 기술력까지 인정받은 제품이었다.

서남수 선생님의 매장을 나와 다른 매장도 둘러보았다.

다른 매장들도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뉴스에 나온 대만계 버블티 매장에는 사람이 없었다.

대조적인 모습이다.

확인을 마치고 곧장 하동으로 향했다.

* * *

지리산 농부들의 사무실도 버블티 매장만큼이나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중국산 채소에서 멜라민이 검출된 사건 때문이다.

샐러드에 빠질 수 없는 버터헤드와 카이피라도 포함돼 있었던 터라, 지리산 농부들이 생산하는 샐러드를 요청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났다.

모두 전화통을 붙잡고 있었다.

한기탁이 통화를 마치고 나에게 물었다.

“대표님도 일 좀 하셔야겠어요. 지금 일손이 부족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일 좀 해 볼까요.”

* * *

2주일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를 공급받고 싶어 하는 업체부터 우리 버블티 매장을 열고 싶다는 사람들 요청까지, 일이 넘쳤다.

2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사무실이 평소처럼 차분해졌다.

한기탁이 동료들에게 회의를 요청했다.

모두 지친 얼굴이다.

“모두 주목해 주세요. 빅뉴스가 있습니다.”

“무슨 뉴스인데요? 혹시 또 수입산 농산물에 문제라도 터진 건가요?”

경영지원팀의 박태호가 물었다.

한기탁이 한 손가락을 펴고 잘못 짚었다는 제스처를 했다.

“그런 뉴스가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뉴스입니다.”

“저희를 위한 뉴스요?”

“여러분을 위해 특별 보너스를 준비했습니다.”

보너스란 말에 일하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만세라도 부를 것 같았다.

사무실 동료뿐만 아니라 지리산 농부들의 모든 인원에게 보너스를 지급할 계획이었다.

한기탁과 내가 결정한 내용이었다.

갑자기 일이 바빠져서 2주일 내내 야근을 한 상황이었다.

목장 사람들도 바쁜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위해 작은 성의라도 보이고 싶었다.

한기탁은 적은 돈을 쓸 때도 인색한 사람이지만, 동료들을 위한 일에는 아끼지 않았다.

그는 모두가 흡족할 만한 액수를 불렀다.

난 흔쾌히 동의했다.

수직 재배 검증 팀에겐 내가 그 일을 전달하기로 했다.

냉동 창고가 근사한 수경 재배 시설로 변하고 있었다.

이장우는 작업에 몰두하면 누가 온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난 그의 등을 두드렸다.

“일은 잘 돼 가?”

“우리 대표님이 여기까지 무슨 일로?”

이장우는 얼굴에 땀이 흥건했다.

“검증 작업은 잘 진행 중이야.”

그가 말하지 않아도 작업이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마나 걸릴 거 같아?”

“한 달 잡고 시작했으니까, 이제 2주 정도 남았지. 그런데 그것도 좀 단축될 거 같아.”

인력을 최대한 많이 투입한 게 효과가 있었다.

“남극에서 작업할 때랑 비교하면 여긴 천국이야.”

이장우가 웃으며 말했다.

“모두 일손을 멈추고 모여주시겠어요?”

이동춘이 눈을 크게 뜨고 달려왔다. 선물을 기대하는 소년 같았다.

“고생하시는 여러분을 위해 보너스를 준비했습니다.”

보너스란 말에 이동춘이 만세를 불렀다. 옆에 있던 민요한이 그 모습을 보고 껄껄 웃었다.

이장우가 이동춘을 진정시키는 사이 민요한이 물었다.

“대표님이 방송에 나간다고 들었어요. 언제 녹화하세요?”

“내일이요.”

* * *

일주일 전에 고애주 작가에게 연락을 받았다.

그녀도 남극 촬영분이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이번 방송은 많은 사람이 기대하고 있다는 말까지 했다.

오늘이 약속한 녹화하는 날이다.

스튜디오 안에 사람들이 분주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금민서가 나에게 다가왔다.

“덕명 씨, 오래간만이에요. 남극에는 잘 다녀오셨나요?”

“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대단하세요! 남극까지 다녀오시고.”

“민서 씨는 방송 잘하고 계셨나요?”

“저야 뭐 똑같죠.”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화려한 외모와 달리 소탈한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녹화 들어갑니다. 준비해 주세요.”

최민성 피디의 사인이 들어왔다.

녹화가 시작되자 금민서는 카메라를 응시했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을 모셨습니다. ‘농부가 희망이다’의 원년 멤버시죠. 김덕명 씨, 스튜디오로 모시겠습니다.”

난 최민성 피디의 사인을 받고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금민서가 대본대로 멘트를 쳤다.

“덕명 씨, 얼굴이 반쪽이 되셨어요.”

“민서 씨는 더 예뻐지셨네요.”

나도 대본대로 말했다.

고애주 작가가 쓴 대본이다.

오글거리는 멘트에 엔지가 나고 말았다.

결국 그 멘트는 빼고 가는 걸로 정했다.

금민서는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

“남극에서 샐러드를 재배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직접 보시죠.”

화면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과정이 나왔다.

남극의 대한 기지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버터헤드와 카이피라를 재배하는 장면이다.

금민서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작가의 대본대로 하는 말이었지만, 정말 신기한 것 같았다.

남극 올림픽과 삼겹살 회식 장면에선 웃음을 멈추질 못했다.

그녀는 대본에 없던 말까지 했다.

“대한 기지 대원들이 참 귀여우시네요.”

나 역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메인인 샐러드 컨테이너 화면이 끝나고 콩나물 재배기가 나왔다.

“콩나물 재배기도 만드셨네요. 저것도 한국에서 가져가신 물건인가요?”

“아니요. 남극 현지에서 만들었습니다.”

“남극에서 저걸 만드셨다고요?”

“고장 난 냉장고를 이용했죠.”

“신의 손이 따로 없네요.”

금민서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리액션이 좀 과했지만, 기분 좋게 들렸다.

화면은 칠레 기지에 만든 수경 재배 시설로 이어졌다.

“저긴 한국 기지가 아닌 것 같네요?”

“칠레 기지입니다.”

난 칠레 대원들이 블리자드 사태 때 한국 대원들을 도운 일을 말했다.

금민서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도 있었군요.”

“남극의 날씨는 예측할 수 없어서 말이죠.”

“저런 혹독한 환경에서 샐러드를 재배할 할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워요!”

“모두 기술의 힘입니다.”

칠레 기지에서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든 일까지, 준비한 화면이 끝났다.

마지막 멘트를 할 순간이다.

금민서가 나에게 물었다.

“남극에서 한 일을 보니까, 앞으로 계획이 궁금해지네요. 시청자들을 위해 덕명 씨의 계획을 말씀해 주시죠.”

“조만간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계획입니다.”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이요?”

“샐러드 컨테이너와는 비교가 안 되는 시설이죠.”

“대규모 시설이라고 하면 그 안에 샐러드 컨테이너가 몇 개 정도 들어가는 건가요?”

금민서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못해도 1만 개 정도 될 겁니다.”

“샐러드 컨테이너가 1만 개요?”

금민서는 침을 꿀떡 삼켰다.

그녀의 놀란 표정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부자 농부의 꿈

금민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상상이 안 가네요. 샐러드 컨테이너가 1만 개나 들어간다고요?”

“초대형 선박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초대형 선박이요?”

“컨테이너 1만 개를 실을 수 있는 컨테이너선을 상상해 보시죠.”

“그렇게 상상하니까 이해가 되긴 하네요.”

머리로는 대충 짐작할 수 있지만, 수치로 환산하면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컨테이너선으로 따지면 1만 TEU급이다. ‘TEU’는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규모를 말하는데, 1만 개의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선박을 의미한다.

길이는 334m나 된다. 에펠탑(300m)보다 34m나 길다.

갑판의 넓이는 축구장 3개 크기와 맞먹는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쉽게 이해가 가네요.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어요.”

금민서는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어떤 점이 이해가 안 가나요?”

“대형 선박에는 컨테이너를 차곡차곡 쌓는 거잖아요? 샐러드 컨테이너도 그거 가능한가요? 새싹인삼 재배 때도 그렇게 높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요?”

금민서는 나와 함께 새싹인삼 재배 과정을 촬영했었다.

그녀도 이미 수경 재배에 대한 간단한 지식이 있던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했다.

“민서 씨가 정곡을 찌르셨네요. 지금까지 수경 재배는 수직 재배가 불가능했습니다.”

“수직 재배가 뭔가요?”

“수경 재배 시설을 위로 층층이 쌓는 일입니다.”

“이전에는 그게 안 됐지만, 그럼 지금은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요?”

“현재 검증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완성 단계이고요.”

“아파트처럼 재배 시설을 높이 올리는 게 가능하다는 말씀이네요?”

“네. 아파트처럼 높이 올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대단하시네요. 농부가 아니라 과학자 같으세요.”

“전 그저 평범한 농부일 뿐입니다만, 고민을 하다 보니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질문해도 될까요?”

최민성 피디가 금민서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시간을 더 주겠다는 의미다.

“그렇게 큰 시설을 만들려는 이유가 뭔가요?”

“민서 씨도 얼마 전 수입산 농산물에서 사고가 터진 일을 알고 계시죠?”

“수입산 채소에서 공업용 화학 물질이 검출됐다는 뉴스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바로 그 뉴스입니다. 앞으로 수입산 농산물에 의존하는 일이 많아질 겁니다. 문제가 발생한다 해도 계속 그럴 수밖에 없을 거고요. 한국 농업은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겠죠. 전 그걸 막을 생각입니다.”

금민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덕명 씨 말대로 대규모 재배 시설을 만들면, 우리 채소를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겠네요. 수입에 많이 의존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요. 그런데 그런 시설을 만들려면 돈도 많이 들겠어요?”

“민서 씨 말대로 돈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국민 펀딩을 모집할 계획입니다.”

“국민 펀딩이요?”

“투자형 크라우드 펀딩입니다. 재배 시설로 수익을 내면 배당을 받는 구조죠.”

“참신한 방법이네요! 그럼 저도 투자할 수 있는 건가요?”

“네, 민서 씨도 투자할 수 있습니다.”

“그럼 덕명 씨가 목표로 하는 금액은 얼마인가요?”

“펀딩 목표 금액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 어려울 거 같습니다. 아직 초기 단계니까요.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펀딩과 동시에 청년 농부를 모집할 계획입니다.”

“대규모 재배 시설에서 일할 사람들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재배 시설을 운영할 청년 농부들이죠.”

“재배 시설이 규모가 상당해서 사람들도 아주 많이 필요하겠어요.”

“네, 인력이 많이 필요할 겁니다.”

“덕명 씨가 그 시설을 구축하게 되면, 수입산 농산물 문제만 해결되는 게 아니었네요. 청년 실업 문제까지 동시에 해결되는 일이네요?”

“단순히 청년 실업 문제만 해결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없어 소멸 중인 농촌 문제를 해결하는 일기도 하죠.”

“저도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많이 느꼈어요. 농촌에 사람이 부족하다는 사실을요.”

“농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다짐한 일이 있습니다.”

“다짐이요?”

“청년 농부를 육성하고 그들을 부자 농부로 만들겠다고요.”

“부자 농부가 많아지면 농촌에 사람도 많아지겠네요.”

금민서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덕명 씨의 그 꿈, 반드시 이루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메라의 붉은 등이 꺼졌다.

금민서와 난 핀 마이크를 제거했다.

금민서가 속삭이듯 말했다.

“덕명 씨가 계획한 대로 됐으면 좋겠어요. 이건 방송용 멘트가 아니라 진심이랍니다.”

그녀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최민성 피디가 불쑥 등장했다.

“덕명 씨 오늘 방송 아주 좋았어요. 부자 농부를 만들겠다는 대목에서는 감동적이기까지 했어요.”

과장된 몸짓이었지만, 귀여워 보였다.

“방송이 나가면 파장이 좀 있을 것 같은데. 시청자들이 후속편을 원하면 출연해 주시는 거죠?”

최민성 피디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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