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이다.
USA 기지에서 칠레 기지로 떠나기로 한 건 오후 시간이다.
이른 아침에 모하마드가 차를 보냈다. 최고급 SUV 안에는 운전기사가 있었다.
난 차를 타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자동차는 해안가에 멈췄다. 그곳에 돔 형태의 집이 있었다.
모하마드가 날 반겼다.
“어서 오세요.”
그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자세히 보니 별장 같았다. 모하마드, 그는 남극에 별장을 가진 남자다.
집사로 보이는 남자와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그가 나에게 따뜻한 차를 건넸다.
차를 마시기도 전에 용건부터 꺼냈다.
“덕명 씨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두바이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드는 일이죠. 물론 수직 재배가 가능하다는 조건입니다.”
원하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빨리 기회를 얻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좀 갑작스럽습니다만.”
“마크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원하는 수준의 시설을 만들 수 없어서 도중에 하차했죠.”
“그런 일이 있었군요.”
“덕명 씨에게도 마크와 같은 요청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회를 드리는 것이지 계약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요청을 하는 건 아닙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실력을 알기에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간혹 기회와 계약을 혼동하는 사람도 있었죠.”
모하마드 살라는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이미 지리산 농부들에 대해서 알아본 것 같았다. 한국에서 내가 한 일을 다 아는 얼굴이다.
“아랍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남자는 먼지를 가지고도 금을 만든다.”
“무슨 뜻이죠?”
“덕명 씨처럼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과한 칭찬이십니다. 그리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하마드는 헤어지기 전에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또 만나길 희망합니다.”
이름, 전화번호, 메일 주소만 있는 명함이다.
재질이 보통 종이와 달랐다.
명함은 기회의 증표였다.
* * *
벤자민과 디에나도 떠날 준비를 마쳤다.
공항으로 가기 30분 전이다.
우린 남극 여관 로비에 앉아 있었다.
디에나가 벤자민 대장에게 말했다.
“대장님, 전 덕명 씨랑 어디 좀 다녀올게요.”
“무슨 일이죠?”
“중요한 일이 생겨서요.”
그녀가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는 순간, 커다란 덩치의 개가 벤자민에게 달려왔다.
남극 여관을 지키는 로키다.
로키가 벤자민 대장에게 애교를 떨었다.
벤자민도 싫지 않은 얼굴이다.
“시간에 늦지 않게 다녀오세요.”
허락이 떨어지자 디에나가 내 팔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어딜 가려는 거예요?”
물음에 답은 없었다. 맹렬한 기세로 어딘가로 향할 뿐이다.
디에나 덕에 남극 USA 기지 다시 둘러보게 됐다.
눈앞에서 빠르게 시설들이 지나갔다.
미국 기지엔 병원, 체육관, 우체국, 술집, 심지어 남극 방송국까지 있었다.
그녀와 함께 도착한 곳은 남극 아이스크림 가게였다.
처음 미국 기지에 왔을 때 갔던 곳이다.
“여긴……?”
“그냥 참을까 했는데 자꾸 생각나서요. 또 언제 먹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디에나는 애절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럼 빨리 먹고 가죠.”
“좋아요.”
우린 한걸음에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주인 마이클이 나를 보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또 오셨네요.”
“아이스크림 맛이 생각나서 또 왔습니다.”
내 말에 마이클이 피식하고 웃었다. 괴짜도 웃을 줄 안다.
“빙하 아이스크림 두 개요.”
디에나가 빙고를 외치듯 말했다.
마이클이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빙하 아이스크림을 만들었다.
디에나는 아이스크림을 흡입하듯 먹었다.
“천천히 먹어요.”
“안 돼요. 빨리 먹어야 시간 맞출 수 있어요.”
그녀는 정신없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나도 지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우린 남극을 한입에 삼켜 버렸다.
아이스크림을 다 비우고 밖으로 나왔을 때다.
디에나가 나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입에 아이스크림 묻었어요.”
* * *
칠레 기지로 다시 돌아왔다.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칠레 공군기를 이용했기에 그들의 시간에 맞춰야 했다.
숙소에서 이장우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모하마드 만난 일은 잘됐어?”
“아주 잘 됐어.”
“역시 그럴 줄 알았지.”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
“엄청나게 고생했지. 혼자 교육도 했다니까.”
이장우가 하품하며 말했다.
대한 기지에서 대원들에게 교육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수경 재배 시설을 관리하는 요령을 알려줬다.
“카를로스에게 알려 줬는데, 좀 힘들었어.”
카를로스는 칠레 기지의 조리장이다. 수경 재배를 이해시키는 것도 힘들었다고 했다.
“남은 시간에 카를로스에게 최대한 알려 주고 갈 생각이야.”
다음 날 아침 수경 재배 시설로 향했다.
“뭐야? 물바다가 됐잖아!”
이장우가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물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청소 도구를 챙기려 주방으로 들어갔다.
카를로스가 우리 뒤를 쫓았다.
카를로스는 물바다가 된 바닥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제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는데…….”
카를로스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시간도 없었다.
우선 점검부터 해야 했다.
난 이장우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는 카를로스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조용한 가운데 점검이 시작됐다.
다행히 작물과 시설엔 큰 이상은 없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수직 재배의 해법을 잃은 것이다.
난 분수대처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물의 순환 구조가 수직 재배의 해법이 될 거라고 여겼다.
생각과 달리 수압과 물의 하중을 견디지 못했다.
수경 재배 시설은 규모가 커질수록 만들기 어렵다.
시설을 층층이 쌓아 하늘 높이 올리는 수직 재배가 어려운 까닭이다.
수경 재배의 선구자인 플랜트 팩토리가 아직 수직 재배에 성공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만이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다.
상심에 빠졌을 때였다.
취~ 하는 소리와 함께 호스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어딘가에서 물이 새는 것 같았다.
난 손가락으로 물을 막았다.
그때였다.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난 호스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물이 다시 나왔다.
마치 분무기에서 나오는 물 같았다.
난 그 행동을 두세 번 반복했다.
재미로 하는 엉뚱한 행동이 아니다.
아이디어를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실패했다고 생각했는데 솟아날 구멍을 찾았다.
하늘 높이 수경 재배 시설을 올릴 방법이 생각났다.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수직 재배의 해법이다.
위대한 발견
수경 재배 시설은 작으면 작을수록 만들기 쉽다.
콩나물 재배기를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었던 이유다.
반대로 규모가 커질수록 시설을 만들기 어려워진다.
수경 재배 시설을 아파트처럼 층층이 쌓는 일은 가장 난이도가 높은 일이다.
시설을 높이 쌓을수록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수압과 물의 하중이 문제다.
샐러드 컨테이너의 경우 파이프를 사용했다. 하나로 이어진 파이프가 작물의 뿌리에 물과 양분을 공급한다.
수압과 물의 하중을 견딜 수 있었던 건 3단 높이로 제작했기 때문이다.
파이프를 배치할 때 수압과 물의 하중도 고려했다. 그 이상으로 높게 쌓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칠레 기지에서는 분수와 같은 구조로 물을 순환시켜서 마땅한 장비가 없어도 충분히 제작할 수 있었다.
그때 난 작은 실험을 했다. 작은 수경 재배 시설을 최대한 층층이 쌓아 올린 것이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그것이 수직 재배의 해법이 될 거라 상상해 보기도 했다.
모하마드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이유다.
예상과 달리 수압과 물의 하중이란 문제에 다시 봉착했다.
역시 수경 재배 시설을 높이 쌓은 게 문제였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난 물바다가 된 상황에서 해답을 찾았다. 수경 재배 시설을 하늘 높이 올릴 방법이다.
공교롭게도 물이 새는 호스에서 답을 찾았다. 호스에서 분무기처럼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해답은 분무다.
분무기에서 물을 뿜어내듯 물과 영양액을 뿜어내면 된다.
작물의 뿌리에 물과 영양액을 분무하는 것이다.
물과 영양액을 통하는 관을 혈관처럼 가느다랗게 만들면 가능했다. 그렇게 하면 수압과 물의 하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분무만 해도 작물을 재배할 수 있었다.
혈관처럼 가느다란 관에서 물과 영양액을 안개처럼 뿜어낸다.
이것이 수직 재배의 해법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해 내지 못한 발상이다.
난 마음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 * *
이장우가 카를로스를 위로하고 있었다.
나도 거들었다.
실제로 그의 잘못도 아니었다.
“카를로스 잘못이 아니에요. 설비에 문제가 있었어요.”
“그래도 내 잘못 같아서요…….”
난 과학적 증거를 대며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정확하게 말해줬다. 그제야 카를로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카를로스는 얼굴에서 근심 걱정을 지우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다시 재배 시설을 정상으로 돌려놔야 했다.
“장우야,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이장우에서 당장 발견한 내용을 전하진 않았다.
우선 눈앞의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수경 재배 시설의 높이를 좀 조절해야 할 것 같아.”
이장우는 엔지니어답게 내 말뜻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도 수압과 물의 하중이 문제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층층이 쌓아 올린 시설을 낮추는 작업이 시작됐다.
사흘 후면 한국 기지로 돌아간다. 작업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 했다.
그날은 하루가 한 시간처럼 지났다. 그만큼 일에 몰두해 있었다.
일을 마치고 이장우와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카를로스가 회심의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두 분을 위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우리를 위한 음식이요?”
“한국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한식이라는 말에 이장우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칠레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떤 음식인가요?”
“새싹 비빔밥입니다.”
카를로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난리가 난 뒤에 새싹 채소도 일부 수확했다.
카를로스는 그걸 이용해 비빔밥을 만든 것 같다.
이장우는 기대하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새싹 비빔밥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보기에는 그럴싸했다. 한국에서 보던 그 비주얼과 흡사했다.
음식을 보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점심도 대충 먹고 일했다.
뭐든 맛있을 것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난 밥을 비벼 크게 한 입 먹었다.
먹자마자 이장우를 쳐다봤다.
그도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랬다. 맛이 좀 이상했다.
카를로스도 묘한 기류를 감지한 얼굴이다.
“왜요? 맛이 없나요?”
“아니요, 맛이 없긴요. 오랜만에 비빔밥을 먹으니 너무 감동했습니다. 한국에서 먹던 맛이 나서 놀랐습니다.”
난 이장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로스는 그제야 안심하는 것 같았다.
맛이 이상한 이유가 있었다.
비빔밥에 고추장 대신 칠리소스가 들어 있었다.
맵고 자극적일 뿐 비빔밥의 맛이 나질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칠레 대원들은 칠리 비빔밥을 잘 먹었다.
벤자민 대장과 디에나는 감탄을 연발했다.
“한국 비빔밥은 정말 맛있네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 이건 비빔밥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장우의 이마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덕명 씨랑 장우 씨 떠나기 전까지 매일 비빔밥을 먹어도 좋을 거 같아요.”
디에나가 카를로스를 보고 외쳤다.
“제가 매일 비빔밥을 해 드리겠습니다. 소스를 듬뿍 넣어서요.”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썼다.
이장우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 * *
그날 밤, 이장우에게 새롭게 발견한 수경 재배의 비법을 말했다.
이장우는 이야기를 듣던 중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위대한 발견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발상의 전환이지.”
“대단해! 그렇게 하면 시설을 높게 쌓는 것도 가능할 거 같아.”
이장우는 내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는 당장 노트를 꺼냈다.
수식을 이용해 얼마나 높이 쌓을 수 있는지 계산했다.
이장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수경 재배 시설을 50단으로 쌓아도 문제없을 거 같아. 어쩌면 그 이상도.”
“그럼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도 문제없는 거지?”
“50단만 해도 이미 대규모야.”
“이 일은 우선 비밀이야.”
“당연하지.”
이장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건 콩나물 재배기를 만든 기술과 수준이 달랐다.
플랜트 팩토리도 생각해 내지 못한 기술이다.
기술 유출의 위험이 있었다.
국제 특허까지 받아서 선점할 기술이다.
* * *
칠레 기지를 떠나는 날이다.
난 기지를 떠나는 날까지 칠레 대원들에게 수경 재배 관리 요령을 알려 주었다.
카를로스 조리장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교육에 임했다.
칠레 기지를 떠나기 전에 벤자민 대장이 나를 불렀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모하마드까지 소개받고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이건 개인적으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이요?”
벤자민 대장이 수납장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배낭이다. 보통 것들과 달리 제법 큰 편이다.
처음엔 배낭 안에 선물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내 착각이다. 배낭 자체가 그가 준비한 선물이다.
배낭이 제법 묵직했다. 재질은 가죽 같았다.
“배낭이라니 좀 의외네요.”
“특별한 배낭입니다. 제가 사용 방법을 알려 드리죠.”
배낭에 특별한 사용 방법이라니 호기심이 들었다.
벤자민 대장은 배낭 상단에 있는 덮개를 열었다. 그리곤 배낭 안에 장치된 것들을 하나하나 결합하기 시작했다.
배낭이 다른 모양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일반적인 배낭이 아니다.
책상 위에 배낭이 아닌 전혀 다른 물건이 있었다.
난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건 카약 아닌가요?”
“배낭으로 쓸 수도 있죠.”
벤자민 대장이 웃으며 말했다.
카약으로 변하는 배낭이다.
신기한 물건이다.
“이 배낭은 긴급한 상황에서 카약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다시 봐도 놀라웠다.
“제가 아끼는 물건입니다.”
“선물로 받기에 좀 부담스럽습니다.”
“솔직히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덕명 씨 덕에 칠레 기지에서도 신선한 채소를 먹게 됐으니까요. 부담 갖지 마시고 받아 주세요.”
성의를 봐서라도 받아야 할 상황이다.
난 카약으로 변신하는 배낭을 선물로 받았다.
남극 일정에서 얻는 게 많았다.
수직 재배를 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모하마드라는 기회, 거기에 카약으로 변하는 배낭까지 내 손에 들어왔다.
벤자민에서 선물을 받고 곧장 트레일러에 올랐다.
우리 대한 기지로 향했다.
김도기 대장과 대원들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은재민 조리장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복귀 기념으로 오늘은 특별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다.
이장우가 은재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비빔밥은 아니겠죠?”
“비빔밥이요? 전혀 아닌데요.”
“우선 안심이네요.”
“그런데 비빔밥은 왜 물어보신 건가요?”
“칠레 기지에서 고생 좀 했거든요.”
이장우가 대원들에게 칠레 기지에서 먹은 칠리 비빔밥을 먹은 일을 말했다.
대원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음식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군요. 그 고생, 제가 보상하겠습니다.”
은재민 조리장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대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빼고 모두 저녁 메뉴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김도기 대장이 대원들을 보고 말했다.
“오늘 저녁은 특별히 소주를 허락하겠습니다.”
소주라는 말에 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장우도 덩달아 만세를 불렀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지만, 소주는 사람을 춤추게 한다.
저녁 메뉴는 삼겹살이다.
“반갑다, 삼겹살아!!!”
이장우는 불판 옆에 놓인 삼겹살을 보고 말했다.
남극에서 먹는 삼겹살이다. 거기에 소주까지 있었다.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어갔다.
이장우는 익지도 않은 삼겹살을 날름 먹어 치웠다.
“익으면 먹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
이장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삼겹살이 노릇노릇 먹기 좋게 구워졌다.
젓가락을 들려는 찰나다.
은재민 조리장이 슬며시 나에게 다가왔다.
그가 뒤에 숨겨 든 바구니를 내밀며 말했다.
“삼겹살은 상추에 먹어야 더 맛있죠.”
바구니 안에 싱싱한 상추가 들어 있었다.
난 잠시 삼겹살의 유혹을 물리치고 물었다.
“상추가 있었나요?”
“덕명 씨가 종자를 주고 가셨던 거 잊으셨나요?”
칠레 기지로 떠나기 전, 은재민과 도상현에게 종자를 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중에 상추 종자도 있었다.
만약을 대비한 조치였다. 재배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대단하십니다! 상추까지 재배하시고.”
“다 덕명 씨 덕이죠.”
은재민 조리장은 대원들에게도 상추를 나눠 주었다.
이제 진짜 삼겹살을 먹을 순간이다.
젓가락을 다시 들었다.
불판 위에 있던 삼겹살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 있던 고기 다 어디 갔어?”
이장우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걸신이라도 들린 사람 같았다.
“미안해. 내가 배가 좀 고팠던 것 같아. 다시 구우면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이장우가 불판에 고기를 다시 올렸다.
이번엔 절대 놓칠 수 없었다.
생각과 달리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삼겹살을 먹으려는 때마다 사람들이 찾아왔다.
소주를 권하는 사람부터 칠레 기지 일을 묻는 사람까지.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떠나면 불판 위의 고기도 어김없이 사라져 있었다.
“장우야, 나도 좀 먹자.”
남극의 밤이 그렇게 저물어 갔다.
* * *
대한 기지에서 남은 시간은 정확히 열흘이다.
남은 기간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점검하는 일이다.
이장우는 샐러드 컨테이너의 기계 장치를 다시 점검했다.
무정전 전원 장치인 UPS와 잘 연결이 됐는지도 확인했다.
작물을 재배할 사람들도 빠트려선 안 됐다.
“광원, 온도, 습도, 이산화탄소 농도, 영양액까지 모두 이상 없습니다.”
도상현과 은재민이 한입으로 말했다. 그들은 이제 샐러드 컨테이너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탄다.
마지막 밤이다.
이장우가 잠을 못 자고 뒤척이고 있었다.
“왜, 잠이 안 와?”
“이상하게 잠이 안 오네.”
나도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남극에서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고, 보람도 많았다.
무엇보다 수직 재배의 해법을 알아낸 것이 최고의 성과다.
플랜트 팩토리도 시도하지 못한 일을 지리산 농부들이 하게 될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할 일이 많았다.
샌프란시스코의 인연
남극 대한 기지를 떠나는 날이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배웅을 나왔다.
김도기 대장이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미안해지네요.”
남극의 여름은 짧다. 곧 있으면 겨울이 된다.
겨울엔 밤이 지속되는 극야가 찾아온다.
여름보다 지독한 눈 폭풍도 겨울의 불청객이다.
대원들은 그 겨울이 지나야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대원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짧은 시간이지만 정이 들었는지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손을 잡은 건 은재민 조리장이다.
“내년엔 한국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저도 내년엔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거 가져가세요.”
은재민 조리장은 종이봉투 하나를 슬쩍 내밀었다.
포장을 꼼꼼하게 해서 내용물을 볼 수 없었다.
“이게 뭔가요?”
“비행기에서 꺼내 보세요.”
“여기서 열어 보면 안 되나요?”
난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은재민 조리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무조건 비행기에서 열어 봐야 한다는 얼굴이다.
이장우도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모두 건강하세요.”
난 손을 흔들며 기지를 떠났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처럼, 칠레 공군 기지에서 비행기를 탔다.
“그거 한번 열어 봐.”
이장우가 호기심 어른 눈빛으로 말했다. 그는 은재민 조리장이 준 봉투를 가리켰다.
난 조심스럽게 종이봉투를 열었다.
“건빵이잖아.”
이장우는 건빵을 들고 외쳤다.
제법 신경 쓴 건빵이다.
튀김 건빵이다. 설탕까지 버무려져 있었다.
이장우가 튀김 건빵을 한입에 쏙 넣었다.
맛이 제법 좋았다. 봉투 안에는 별사탕까지 있었다.
은재민 조리장의 센스가 엿보였다.
“이게 얼마 만이냐. 이제 집에 가는구나!”
이장우가 튀김 건빵을 맛깔스럽게 먹으며 말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칠레에는 한국으로 가는 직항이 없다.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이다.
남극으로 갈 때와 같은 노선이다. 왔던 길을 되짚어 가지만, 그때와 다른 점도 있었다.
남극 대원들과 함께 움직일 때는 김도기 대장의 통제가 있었다. 지금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장우야,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 잠깐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
“어딜 들르게?”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 거긴 왜 가려고?”
“캘리포니아 농업 박람회가 있어.”
“작년에 민석이랑 다녀왔던 곳 말하는 거야?”
“맞아, 바로 그곳이야.”
남극을 떠나기 전에 알아봤다. 공교롭게도 캘리포니아 농업 박람회와 시기가 겹쳤다.
이장우도 호기심을 보였다.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대환영이야! 남극에서 샌프란시스코라니!! 내 인생에 이럴 일은 또 없을 거다, 야!!!”
사실 농업 박람회보다 더 궁금한 게 있었다.
플랜트 팩토리의 근황이 궁금했다.
난 플랜트 팩토리에 근무하는 사람과 친분이 있었다.
그곳의 연구원이자, 곶감까지 배달해 준 인연이 있는 전해리였다.
그녀를 통해 플랜트 팩토리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다.
어쩌면 대표인 마크 레스터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산티아고에서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 * *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뒤 숙소부터 잡았다.
칠레에서 떠나기 전, 한국에 미리 연락했다. 이장우의 아버지 이동춘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가족에겐 너무 늦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호텔에 도착하자 이장우는 해맑은 표정으로 기뻐했다.
“이게 바로 진짜 숙소지 남극 숙소와는 비교가 안 되는구만!”
이장우는 큰 침대에 대자로 누워 아이처럼 좋아했다.
“잠깐 쉬고 있어, 난 전화 좀 하고 올게.”
난 VIP 휴게실로 들어갔다. 호텔 직원에게 요청한 휴게실이다.
전화 내용 때문이다. 통화 내용을 함부로 유출하고 싶지 않았다.
민요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막 잠들려고 했는데…….”
“제가 잠을 방해했군요.”
“괜찮아요. 원래 야생성이라서.”
민요한이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언제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
“그때 제가 보낸 자료는 받으셨나요?”
“잘 받았어요.”
“검증은……. 어떻게 됐나요?”
“검증해 봤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어요.”
칠레 기지에서 만든 수경 재배 시설이다. 물을 수직으로 순환하는 구조였다.
물바다가 된 사건이 있었다. 그 역시 비슷한 일을 겪었을 거라고 여겼다.
“실은, 저도 실패했어요.”
“수압과 물의 하중이 문제였어요.”
민요한의 밝았던 목소리가 기운이 없어졌다.
드디어 발견한 내용을 말할 순간이다.
“실패 속에서 사소한 발견을 했습니다.”
“사소한 발견이요?”
그에게 새롭게 발견한 분무 시스템에 대해 말했다.
수압과 하중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었다.
작물의 뿌리에 물과 영양액을 분무하는 방식.
대한 기지에서 관련한 내용을 정리했던 터라, 그에게 내용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다.
민요한은 숨죽여 내 말을 들었다.
정리한 내용을 다 듣고 그가 소리쳤다.
“사소한 발견이 아니라, 위대한 발견인데요?”
민요한은 흥분한 것 같았다.
“작물의 뿌리에 물과 영양액을 분무하다니, 기발하네요. 만약 그 시스템을 이용해서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든다면, 수직 재배도 가능할 거 같아요.”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었다. 그 역시 이장우와 같은 의견이었다.
“곧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그 전에 검증 작업을 해 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물론이죠.”
이제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이다.
민요한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드릴게요.”
“뭐죠?”
“대표님 정말 대단하네요. 이런 발상을 하다니.”
“민요한 씨를 만난 덕이죠. 제가 잠을 깨운 것 같은데 다시 주무세요.”
“이미 다 깨 버렸어요. 지금부터 검증 작업 들어가겠습니다. 이번엔 확실할 거 같아요.”
말만 들어도 듬직했다.
곧이어 전해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덕명 씨,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나요?”
“저야 잘 지냈죠.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혹시 미국에 오시기라도 했나요?”
“단번에 맞추시네요. 지금 샌프란시스코에 있습니다.”
“정말이요?”
그날 저녁 전해리와 약속을 잡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고 전했다.
약속 장소에 이장우도 동행했다.
전해리와 호텔 인근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오늘은 백민석 씨가 아니라 다른 분이랑 오셨네요.”
전해리는 전에 같이 왔던 백민석을 기억하고 있었다.
백민석이 그녀에게 수경 재배에 관해 물었던 게 떠올랐다.
“이장우라고 합니다.”
이장우는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다.
식사가 나오기도 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됐다.
작년, 전해리와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나에게 곶감을 받았던 이야기부터 박람회장에서 장난감으로 에어 펌프를 만들었던 일까지 나왔다.
봉골레 파스타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런데 올해도 박람회 때문에 오신 건가요?”
“남극에 업무차 다녀오는 길입니다.”
화제가 자연스럽게 남극으로 이어졌다.
남극 기지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었다는 말이 나오자,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파스타 면을 넘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컥, 그게 사실인가요? 남극 기지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었다고요?”
“남극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대단한데요? 그렇게 빨리 성장하다니…….”
“해리 씨 덕입니다.”
“제 덕이요?
전해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해리 씨가 요한 씨를 소개해 줬으니까요.”
“그럼, 민요한 씨를 스카우트하신 건가요?”
정확히는 그녀가 민요한을 소개해 준 건 아니었다. 전해리는 민요한과 연락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민요한 씨는 지금 지리산 농부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정말 능력자시네요! 마크가 알면 배 아파하겠어요.”
기다리던 순간이다.
난 플랜트 팩토리의 근황에 관해서 물었다.
전해리는 차분하게 플랜트 팩토리의 사정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중에 인상적인 게 하나 있었다.
마크 레스터가 야심 차게 밀어붙였던 프로젝트가 실패했다는 내용이다.
그녀는 프로젝트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더 캐물을 수도 없는 일이다.
헤어지는 길에 전해리가 말했다.
“내일 박람회에 우리 회사도 참가해요. 구경 오세요.”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당연히 박람회에 가야죠.”
“그럼 내일 뵐게요.”
“참, 이거 받으세요.”
그녀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뭔가요?”
“남극에서 산 물건입니다.”
“남극이요?”
상자를 열어 보았다. 그 안에서 펭귄 인형이 나왔다.
“고마워요. 펭귄이 귀엽네요.”
미국 기지에 갔을 때 산 기념품이다.
가족과 회사 동료들에게도 줄 선물도 준비했다.
* * *
호텔에 도착하자 이장우가 말했다.
“난 아직 정신이 얼떨떨한 거 같아.”
“시차 때문에 그런가?”
“시차 문제가 아니라, 바로 여기가 문제야.”
이장우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두통이라도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야.”
“꿈을 꾸는 기분?”
“몸은 남극에 있는데 꿈을 꾸고 있는 거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꿈을.”
이장우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난 어디 아픈 줄 알았잖아.”
“아프긴, 몸도 마음도 최고로 좋아.”
이장우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냈다.
“오늘은 우리 대표님이랑 한잔하고 싶다.”
“기지엔 있을 땐 혼자 다 먹어 놓고선. 술도 고기도.”
“미안,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그때 일을 떠올리며 우린 배꼽을 잡고 웃었다. 대한 기지에서 삼겹살 파티를 할 때였다.
이장우는 쉬지도 않고 삼겹살을 먹었다. 함께 술을 마실 틈도 없었다.
오래간만에 시원한 캔 맥주로 목을 축였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이장우도 맛있게 마셨다.
그가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기분이 좋았어.”
“뭐가 좋았는데?”
“플랜트 팩토리의 연구원이 놀란 정도의 성과를 냈다는 게.”
“더 놀라운 성과를 내게 될 거야.”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해. 우리 대표님은 특별한 사람이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