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 (189/205)

저녁 식사를 마치고 김도기 대장의 사무실로 갔다.

그는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식사는 하셨나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했다.

“그럼 저와 함께 가실까요?”

김도기 대장은 날 탁구장으로 안내했다.

남극 올림픽에서 사용했던 탁구대가 보였다.

“탁구 한판 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갑자기 탁구라니, 의아스러웠다.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덕명 씨와 탁구를 하고 싶은 것뿐이니까요.”

김도기 대장이 라켓을 들었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가 말했다.

“이긴 사람이 선물을 주면 어떨까요?”

“선물이요?”

선물이란 말에 그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다만 조건이 이상했다.

“이긴 사람이 선물을 준다고요?”

“네, 이기는 쪽에서 선물을 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어쩌죠? 전 선물을 준비 못 했습니다.”

“덕명 씨는 이미 선물을 주셨죠. 대원들의 목숨을 구했으니까요. 그러니 편안하게 즐기시면 됩니다.”

“제가 이기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김도기 대장의 두 눈에서 광채가 돌았다.

나에게 선물을 주려고 일부러 벌이는 게임이다.

그냥 주면 될 것을 게임까지 벌이다니, 독특한 성격이다.

어쨌든 게임은 게임이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 겁니다.”

남극 올림픽 때처럼 단판 승부였다.

김도기는 남극 올림픽 때와 달리 펜홀더 라켓을 잡았다.

지난번 남극 올림픽 때는 분명 셰이크핸드 라켓을 사용했다.

그때와 달리 공격적으로 나오겠다는 뜻이다.

게임이 시작됐다.

김도기는 처음부터 강하게 나왔다.

회전이 강하게 걸린 토마호크 서브가 날아왔다.

처음 두 점을 그대로 내줬다.

점수를 딸 때마다 김도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기고 싶은 마음이 발동한 것이다.

핑퐁.

김도기는 강력한 파워 드라이브로 공을 때렸다.

강한 반동과 체중을 실린 공이 정면으로 날아왔다.

난 블록 기술로 공을 막았다.

그 뒤로 나의 공격이 이어졌다.

루프 드라이브에 카운터 드라이브까지 원하는 대로 공이 꽂혔다.

접전이 이어졌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지막 한 점을 남겨 둔 상황이다.

김도기는 있는 힘을 다해서 공을 때렸다.

그때 나도 모르는 반사 신경이 작동했다.

강하게 날아온 공을 본능적으로 받아쳤다.

그렇게 게임이 끝났다.

내가 이겼다.

김도기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다.

“단판 승부라고 하셨죠?”

김도기는 대꾸하지 않았다. 무조건 이긴다고 자신하던 표정이 지워져 있었다.

난 김도기 대장을 깨우듯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김도기는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난 재빨리 숙소로 뛰어갔다.

숙소에서 돌아왔을 때, 김도기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난 그에게 준비한 물건을 건넸다.

“이거 받으세요.”

“그게 뭔가요?”

“대장님이 이긴 사람이 선물을 줘야 한다고 하셔서요.”

남극 올림픽에서 받은 펭귄 인형이다.

난 그에게 펭귄 인형을 주었다.

김도기 대장은 펭귄 인형을 안고 날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펭귄 인형을 번갈아 보더니 끝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도 그와 함께 웃었다.

“김덕명 씨를 당해 낼 재간이 없네요.”

김도기는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냈다. 이제야 여유를 찾은 얼굴이다.

“비록 졌지만, 저도 선물을 하나 드리고 싶네요. 괜찮을까요?”

“얼마든지 받겠습니다.”

“벤자민 대장의 말 기억하시죠?”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칠레 기지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드는 일이다.

김도기 대장은 그 일은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은 마음이 달라진 게 분명하다.

“혹시 그 일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전 대한 기지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러 왔습니다.”

“그럼 못하겠다는 뜻인가요?”

김도기 대장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대한 기지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게 우선이란 뜻입니다. 대한 기지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난 뒤에 고려해 보겠습니다.”

김도기 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좋은 기회라고 해도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다.

물론 일을 완벽하게 마치면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유쾌한 승부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장우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옷이 다 젖었네. 무슨 일이 있었어?”

“김도기 대장이랑 탁구 쳤어.”

“뭐라고? 탁구 치자고 부른 거였어?”

“맞아, 탁구 치려고 부른 거야.”

“난 또 우리에게 기회를 주려는 줄 알았네.”

이장우가 침대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라 실망한 것 같았다.

“내가 이겼어.”

“잘했네.”

“이겨서 선물도 받았어.”

“선물?”

그제야 이장우가 고개를 돌렸다.

“무슨 선물인데?”

“칠레 기지에 수경 재배 시설을 설치할 기회.”

“정말이야?”

이장우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이장우에게 김도기와 있었던 일을 말했다.

“김도기 대장 성격 참 이상하네. 그냥 말하면 될걸.”

“성격이 좀 별나긴 한 것 같아.”

“아무튼 잘 됐다.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생겼으니까.”

“네 말처럼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 하지만 대한 기지 일이 먼저야. 완벽하게 일을 끝내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야 해.”

“당연하지. 나도 대한 기지의 샐러드 컨테이너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해.”

이장우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난 칠레 기지의 일을 보너스라고 생각했다. 보너스는 일을 제대로 마쳤을 때 얻는 보상이다.

대한 기지의 샐러드 컨테이너는 완벽해야 했다.

보너스는 그 뒤에 찾아올 것이다.

크리스마스 선물

은재민 조리장이 주방에서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방에 내가 들어온 것도 보지 못했을 정도다.

“은재민 조리장님!”

“덕명 씨가 주방엔 무슨 일로?”

“조리장님께 드릴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이요?”

난 그와 함께 샐러드 컨테이너로 향했다. 이장우는 컨테이너 안에서 기계를 점검하고 있었다.

조리장은 컨테이너에서 자라고 있는 샐러드를 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샐러드가 다 자랐네요!”

그의 말대로 수확할 정도로 샐러드가 성장했다.

“은재민 조리장님이 첫 수확의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은재민은 당장 주방으로 달려가 채소를 담을 바구니를 가져왔다.

바구니에 둥근 잎사귀의 버터헤드와 물결치는 모양의 카이피라가 담겼다.

난 버터헤드 잎사귀를 하나 떼서 그에게 권했다.

“하나 드셔 보세요.”

“그럴 수는 없죠. 다 같이 먹어야죠.”

은재민 조리장은 버터헤드만큼이나 귀여운 얼굴로 답했다. 그는 샐러드 잎사귀 하나도 먼저 먹지 않았다.

바구니에 샐러드가 가득 찼다.

“오늘 점심은 아주 특별한 음식으로 준비해야겠습니다.”

특별한 음식을 만든다는 말에 이장우가 물었다.

“그냥 샐러드가 아니라는 말씀이죠?”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은재민 조리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점심시간, 대원들이 식탁에 올라온 음식을 보고 소리쳤다.

“이거, 샌드위치 아냐?”

“그것도 샐러드가 듬뿍 들어간 샌드위치!!”

대원들은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샐러드의 아삭거리는 소리가 먹음직스럽게 들렸다.

“지금까지 먹어 본 샌드위치 중에서 단연 최고다!”

“조합도 끝내줘.”

샌드위치 안에는 신선한 샐러드만 들어 있는 게 아니었다.

칠레에서 들여온 살라미도 샌드위치의 풍미를 더하고 있었다.

최고급 살라미였다. 살라미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에 다양한 향신료를 넣고 만든 수제 햄이다. 피자에 토핑으로 넣는 페퍼로니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을 냈다.

신선한 샐러드와 살라미가 더해져 최고의 샌드위치가 만들어졌다.

소식가로 알려진 김도기 대장도 샌드위치를 두 개나 먹을 정도다.

은재민 조리장은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는 대원들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 * *

다음날부터 샐러드 컨테이너 교육이 진행됐다.

샐러드 재배에 성공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관리할 줄 알아야 했다.

교육은 두 파트로 나눠서 이뤄졌다.

작물을 재배하는 파트와 샐러드 컨테이너를 유지 보수하는 파트다.

내가 작물 재배를 맡았고, 이장우는 유지 보수 쪽을 맡았다.

이장우가 엔지니어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는 동안 난 작물 재배 교육을 했다.

김도기 대장에게 최소 두 사람이 필요하고 말했다. 그래야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할 수 있었다.

작물 재배 교육에 참여한 사람은 도상현 부대장과 은재민 조리장이다.

“오늘부터 샐러드 컨테이너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생각보다 쉬우니까 긴장할 거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샐러드 컨테이너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남극 기지는 인터넷 환경이 좋지 않았다. 애플리케이션보다 샐러드 컨테이너의 상태를 확인하는 모니터를 활용할 생각이었다.

샐러드 컨테이너 내부에 있는 모니터를 켰다.

[빛 8,500lux]

[온도 16도]

[상대 습도 범위 70%]

[이산화탄소 농도 380ppm]

[물의 흐름 정상]

[영양액 정상]

도상현과 은재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재배 환경을 한눈에 볼 수 있네요?”

도상현이 말했다.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컨테이너 내부의 온도는 15~20도에 맞춰져 있습니다. 상대 습도는 50~80%에 맞춰져 있고요. 온도와 습도는 자동으로 제어됩니다.”

“샐러드 컨테이너 내부 환경이 자동으로 제어가 된다는 말씀이죠?”

“네, 자동으로 제어됩니다.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350ppm보다 낮은 경우 외부의 공기를 유입시켜 적정 농도를 유지하고요.”

“그럼 우리가 손댈 건 없네요?”

“사람의 손이 필요한 일도 있습니다. 배양액을 주는 일은 기계가 하지 않으니까요.”

배양액뿐만이 아니었다. 모종 작업부터 손이 가는 일도 꽤 많았다.

난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에 대해서 꼼꼼하게 설명했다.

도상현과 은재민은 노트에 내가 한 말을 기록했다.

하루 만에 끝날 교육은 아니었다.

최소 2주일은 잡고 있었다.

“며칠 안에 주방과 사무동에도 모니터를 설치할 계획입니다. 모니터를 통해 샐러드 컨테이너의 상태를 관찰할 수 있을 겁니다.”

* * *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도상현과 은재민은 이미 배양액을 만들 줄 아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들은 스펀지가 물을 먹듯 지식을 빨리 흡수했다.

오늘은 김도기 대장의 면담 요청이 있었다.

난 교육을 끝내고 김도기 대장의 사무실을 찾았다.

김도기 대장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 교육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그는 도상현 부대장을 통해 매일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제 나에게 확인할 시점이 됐다고 여긴 것 같다.

난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을 상세하게 말했다.

김도기 대장은 설명을 듣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칠레 기지 일도 문제없겠네요?”

“지금 상태로 일이 진행된다면 가능할 거 같습니다.”

“그거 잘됐네요.”

김도기 대장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칠레 기지에서는 얼마나 걸릴까요?”

난 3개월 일정으로 남극에 머물고 있었다. 남극에 온 지도 거의 두 달이 지났다.

남은 시간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2주일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 기간이면 충분할까요?”

“최대한 시간을 아낄 생각입니다. 칠레 기지 일을 끝내도 할 일이 있으니까요.”

“일이 남았다고요? 샐러드 컨테이너 작업은 이제 끝난 거 아닌가요?”

“작물의 성장을 관찰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한 번 재배에 성공했다고 안심할 수는 없으니까요. 칠레 기지 일을 끝내고 난 뒤에도 지속해서 관찰할 예정입니다.”

“매사에 철저하시군요. 완벽한 마무리를 기대하겠습니다.”

김도기 대장과 면담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장우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힘들었나 보네?”

“난 아무래도 교육자 타입은 아닌 것 같아.”

이장우는 엔지니어들에게 샐러드 컨테이너의 유지 보수에 대해서 교육하고 있었다.

교육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장우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교육하는 게 힘들어서 약속한 시간은 맞출 수 있겠어?”

“시간은 정확하게 맞출 거야. 그렇다고 교육을 설렁설렁 하겠다는 뜻은 아니고.”

이장우는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갑자기 몸을 풀기 시작했다.

“지금 달밤에 체조하는 거야?”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여야지. 너도 해 봐.”

“난 사양할게.”

이장우에게 대략의 일정을 알렸다. 이제 칠레 기지에 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장우는 허리를 돌리다 물었다.

“그런데 칠레 기지에 가면 뭘 만들어야 하지?”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어야지.”

“샐러드 컨테이너가 더 있는 것도 아니잖아? 설마 콩나물 재배기를 또 만들 생각인가?”

“콩나물은 한국 사람만 먹는 채소야.”

“그럼 뭘 만들 생각인데?”

“지금은 고민하는 단계야. 생각이 정리되면 알려 줄게. 챙겨 갈 장비도.”

이장우의 말대로 샐러드 컨테이너가 또 있는 게 아니었다.

버터헤드와 카이피라는 제대로 된 시설이 있어야 재배가 가능했다.

난 베개 밑에 넣어 둔 노트를 꺼냈다.

종자 목록을 적어둔 페이지를 열었다.

남극으로 올 때 버터헤드와 카이피라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종자도 챙겼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챙긴 작물의 종자들이다.

그중에 하나를 선택할 계획이다.

* * *

남극에서 맞는 크리스마스이브 날이다.

휴게실에 트리 모양의 조명이 달렸다.

대원들의 얼굴도 조명처럼 밝게 빛났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오기로 예정돼 있었다.

구조 작업에 도움을 줬던 칠레 대원들이다.

은재민 조리장도 크리스마스 만찬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난 은재민 조리장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을 건넸다.

“이게 뭔가요?”

“감식초입니다.”

“감식초요?”

“샐러드를 만드는 데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드레싱을 만들려고 준비 중이었어요.”

은재민 조리장은 감시초 맛을 보았다.

“와, 이 식초 맛이 정말 좋네요. 발사믹보다 풍미가 더하네요. 혹시 덕명 씨가 만든 건가요?”

“아니요, 명인께서 만든 물건입니다.”

“명인이요?”

남극으로 떠나기 전날 황유신 선생이 준 감식초였다.

은재민은 감식초에 올리브유와 꿀을 넣어 드레싱을 만들었다.

버터헤드와 카이피라로 만든 샐러드 위에 감식초 드레싱을 뿌렸다.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맛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은재민 조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톡 쏘는 맛에 입맛이 돈다.

역시 황유신의 감식초다.

“저게 메인 요리인가요?”

“네, 신경 좀 썼습니다.”

메인 요리는 티본스테이크였다.

칠레 대원들을 위한 배려였다. 티본스테이크와 샐러드가 식탁 위에 놓였다.

곧 손님이 찾아왔다.

칠레 대원들까지 모이자 기지가 꽉 찬 느낌이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Feliz Navidad! (메리 크리스마스!)”

벤자민 대장이 유쾌한 얼굴로 스페인어로 인사했다. 그의 뒤에 있는 칠레 대원들은 선물 상자를 들고 있었다.

“이건 저희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벤자민은 준비한 선물을 김도기 대장에게 건넸다.

“몸만 와 주시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그럴 수는 없죠.”

그들이 준비한 건 칠레산 포도주와 수제 치즈였다.

“저희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김도기 대장도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한국 대원들이 정성스럽게 마련한 선물이었다.

우리 전통 술부터 복주머니까지 다양한 선물들이 나왔다.

김도기 대장은 남극으로 떠나기 전 다른 나라 대원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선견지명이었다. 물론 그도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지리산 농부들 만든 곶감과 약과였다.

“이게 뭔가요?”

벤자민은 곶감에 관심을 보였다.

“한국 전통 디저트입니다.”

“맛이 궁금하네요.”

“식사하시고 한번 드셔 보세요. 포도주와 궁합이 좋을 겁니다.”

“좋습니다!”

극지에서 맞는 크리스마스 파티였다.

은재민 조리장이 준비한 티본스테이크와 감식초 드레싱을 곁들인 샐러드가 나왔다.

“이게 기지에서 재배한 샐러드인가요?”

벤자민과 칠레 대원들은 싱싱한 샐러드를 보고 군침을 흘렸다.

“남극에서 자란 샐러드입니다. 마음껏 드시죠.”

스테이크가 입에서 살살 녹았다.

샐러드의 맛도 일품이다.

호텔에서도 이런 맛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한국 기지 조리장님이 음식에 마법을 부렸나 봅니다.”

벤자민이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먹으며 말했다.

“음식도 음식이지만 포도주 맛도 좋네요. 역시 포도주는 칠레산이 최고입니다~!”

김도기 대장이 화답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이어졌다.

식사를 마치고 김도기 대장이 날 불렀다.

벤자민은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미소 지었다.

“벤자민 대장님, 예전에 김덕명 씨에게 제안했던 거 기억하십니까?”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명 씨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칠레 기지에도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어 드리기로요.”

“그게 정말인가요?”

벤자민 대장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내심 기대하고 있었을 테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받아 본 크리스마스 선물 중에 최고의 선물이네요.”

그 순간, 난 포도주잔을 높이 들었다.

모든 대원이 함께 잔을 들었다.

적포도주의 달콤한 향이 콧속을 맴돌았다.

잔을 내려놓고 벤자민 대장에게 말했다.

“대장님의 약속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약속은 틀림없이 지킬 테니까요.”

두바이 왕자 모하마드 살라를 소개해 주겠다고 한 약속이다.

그 기회를 살린다면 국내를 넘어 세계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남극의 펭귄 선생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

남극에서 맞이하는 새해다.

“올해도 복 많이 받아.”

“너도.”

난 이장우와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언제까지 방에 있어야 하는 거야?”

“은재민 조리장님이 부를 때까지.”

대원들은 우리를 위한 깜짝 이벤트를 준비한다고 대기하라고 했다.

내일이면 칠레 기지로 떠나기 때문이다.

물론 칠레 기지에 가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블리자드 사태 때 도움을 받은 대원들이 보답하고 싶다고 했다.

그 이야기는 크리스마스 파티 때도 나왔다.

칠레 기지로 이동만 하는데, 가까운 곳이어도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말들이 터져 나온 것이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은재민 조리장이 깜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나오셔도 됩니다.”

식당에 들어서자 김도기 대장과 대원들이 우리를 반겼다.

모두 한목소리로 새해 인사를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도 대원들에게 새해 인사를 전했다.

“김덕명 씨와 이장우 씨를 위해 대원들이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은재민 조리장이 식탁으로 안내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만둣국이 놓여 있었다.

그는 떡만둣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원들이 직접 빚은 만두로 만들었어요. 이거 드시고 잘 다녀오세요.”

모두 자리에 앉아 함께 음식을 먹었다. 고향에 온 것처럼 정겹고 훈훈한 마음이 느껴졌다.

식사가 끝나고 휴식이 주어졌다.

모든 대원이 쉬는 날이기도 했다.

나와 이장우는 쉴 틈이 없었다. 마지막 점검을 해야 했다.

우리가 기지를 비울 2주 동안 문제가 발생해선 안 됐다.

이장우는 엔지니어들에게 샐러드 컨테이너의 유지 보수와 관련해서 최종 전달을 했다.

나 역시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은재민 조리장과 도상현 부대장이 날 보고 있었다.

“덕명 씨의 말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네요.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상현 부대장이 나에게 노트를 보이며 말했다. 그동안 내가 말한 내용이 노트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저도 잘 기록해 뒀습니다.”

은재민 조리장도 노트를 내밀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노트였다.

“두 분 다 정리를 잘하셨네요. 언제든지 문제가 발생하면 연락하세요. 당장 달려올 테니까요.”

“네, 언제든지 연락하겠습니다.”

도상현 부대장과 은재민 조리장이 거수경례했다.

둘이 짠 모양이다.

나도 거수경계로 답했다.

이제 칠레 기지로 떠나기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 * *

다음날, 대한 기지 앞에 트레일러가 도착했다. 칠레 국기가 그려진 트레일러였다.

나와 이장우는 트레일러에 장비를 실었다. 샐러드 컨테이너에 있던 여분의 장비들이다. 배양액도 준비했다.

물론 모든 장비를 챙길 순 없었다. 대한 기지에 필요한 장비는 놔두고 잉여 장비만 챙겼다.

부족한 장비지만 최대한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생각이었다.

“이제 준비 끝났어.”

이장우가 트레일러에 실은 장비를 확인하고 말했다.

드디어 칠레 기지로 떠났다.

남극에 온 뒤로 처음으로 다른 나라 기지로 가는 길이다.

이장우는 긴장한 얼굴이다.

“이장우가 긴장도 하네?”

“새로운 곳으로 가는 거니까. 긴장보다는 설렘이라고 할까.”

그가 웃으며 말했다.

창밖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남극에서 내리는 눈은 민들레 홀씨처럼 희고 아름다웠다.

트레일러가 칠레 기지 안으로 진입했다.

규모가 상당했다. 대한 기지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남극 칠레 기지는 1969년에 킹조지섬에 세워졌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다. 하지만 규모에 비해 시설이 좋진 않았다.

벤자민 대장의 말대로 칠레 정부는 남극 기지에 투자를 많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낡고 녹슨 곳이 많았다.

기지 앞에 벤자민 대장과 대원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어서 오세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밴자민 대장은 몇 번 봐서 그런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인사를 하고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훈훈했다.

겉에서 본 것만큼이나 내부도 넓었다.

“두 분이 2주간 지내실 곳으로 안내할 겁니다.”

벤자민 옆에서 수행 비서처럼 쫓아다니던 남자가 우릴 안내했다.

숙소는 대한 기지와 마찬가지로 2인 1실이다.

낡은 침대가 이곳 남극에서의 긴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짐 풀었으면 이제 나가 볼까?”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기지 내부를 보고 싶었다.

벤자민 대장은 휴게실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대장님, 기지 내부를 좀 볼 수 있을까요?”

벤자민 대장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당연히 볼 수 있죠. 그런데 오자마자 일부터 하려는 건가요?”

벤자민 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난 말 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으로 당연히 일이 먼저라고 의사 표현을 했다.

“한국 분들은 일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요. 혹시 남극 구경은 해 보셨나요?”

“남극 구경이요?”

남극 구경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바깥에서 장시간을 보낸 건 구조 작업을 할 때가 전부였다.

“일도 일이지만 남극에 오셨으니 구경도 한번 해 보셔야죠.”

벤자민 대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때 한 대원이 하얀 방진복을 입고 나왔다.

벤자민은 대원에게 물었다.

“디에나, 펭귄 관찰 하러 가는 길이지?”

“네, 펭귄 마을에 가려는 길이에요.”

“잘됐네. 그럼 이분들하고 같이 가지.”

“이분들이요?”

칠레 대원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짙은 쌍꺼풀이 인상적인 여자 대원이다.

남극에서 여자 대원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디에나는 남극의 생물을 관찰하는 연구원입니다. 펭귄 마을 선생님이기도 하죠.”

펭귄 마을 선생님이라니, 말만 들어도 호기심이 들었다.

“일하기 전에 한번 다녀오시죠.”

밴자민 대장이 정중하게 권했다.

난 이장우의 눈빛부터 읽었다. 얼굴에 펭귄 마을에 가 보고 싶다고 쓰여 있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기지를 나가기 전에 디에나가 우리가 하얀 방진복을 주었다.

그녀가 입은 것과 같은 것이다.

“이걸 입어야 하나요?”

“방진복을 입지 않으면 사고를 당할 수 있어요.”

“사고요?”

디에나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 *

우린 디에나와 함께 펭귄 마을로 이동했다. 하늘은 맑게 개 있었다.

디에나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난 그녀에게 물었다.

“펭귄 마을 선생님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요?”

“벤자민이 붙여 준 별명이에요. 제가 매일 펭귄을 보러 간다고.”

디에나는 생물학자였다. 남극 대륙에 서식하는 동물을 관찰하는 게 임무다. 그중 펭귄에 관심이 많았다.

트럭이 바닷가 앞에 멈췄다.

펭귄들이 수백 마리가 무리를 지어 있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렇게 심한 냄새는 난생처음이다.

“이게 무슨 냄새야?”

이장우가 손으로 코를 가렸다.

그의 말대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디에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거렸다.

“펭귄 똥 냄새랍니다.”

“똥 냄새요?”

이장우가 역겨운지 헛구역질했다. 그때였다. 아기 펭귄 한 마리가 우리를 향해 아장아장 걸어왔다.

냄새와 별개로 귀여운 모습에 미소가 절로 났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네요?”

“펭귄들은 호기심이 강해요. 특히 사람들에게.”

디에나가 아기 펭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펭귄에게 정신이 팔렸을 때다.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장우의 신음이다.

펭귄 중 한 마리가 이장우를 쫓고 있었다.

이장우는 녀석을 피하려고 애쓰는 상황이었다.

길이가 1m 정도 되는 황제펭귄이다.

“장우야, 가만히 있어. 그러면 괜찮을 거야.”

“가만히 있으라고?”

이장우는 내 말대로 그 자리에 멈췄다.

얼굴을 보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펭귄이 이장우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이장우는 견디다 못해 다리를 움직였다.

놀란 펭귄이 이장우의 다리에 분변을 지렸다.

“우웩, 더러워.”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디에나도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것이 하얀 방진복을 입은 까닭이었다. 방진복을 입지 않으면 펭귄의 변이 옷에 묻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녀는 나에게 커다란 봉투를 하나 주었다.

해안에 있는 이물질을 주워 담는 용도였다.

펭귄 서식지를 보호하기 위한 일이다.

“이런 곳에도 쓰레기가 있네요.”

“조업하는 어선에서 나온 것들이에요.”

남극 해역에서 조업하는 어선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크릴새우를 잡는다. 이물질은 대부분 어선에서 나온 것들이다.

디에나는 펭귄 마을 선생님이 아니라 거의 보호자나 마찬가지였다.

일을 거의 마쳤을 때, 디에나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녀는 펭귄 한 마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미 펭귄이 새끼 펭귄을 품고 있는 장면이다.

펭귄에 몸서리쳤던 이장우도 감동한 얼굴이다.

새끼 펭귄이 어미 펭귄의 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장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끼를 품고 있는 곳에는 털이 없네요.”

“새끼를 더 따뜻하게 품기 위해서예요.”

디에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장우의 말대로 어미가 새끼를 품는 배 부분은 맨살이다. 영하의 날씨에 체온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어떤 새들은 일부러 배에 있는 깃털을 뽑아내기도 한다. 알을 더 따뜻하게 품기 위한 모성애다.

기지로 돌아가는 길에 디에나가 말했다.

“100년 뒤에는 펭귄이 멸종할 수도 있어요.”

“네? 펭귄이 멸종한다고요?”

펭귄의 주요 먹이는 크릴새우다. 인간의 무분별한 조업으로 펭귄의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다.

“설마 먹이가 다 사라지진 않겠죠?”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라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최후의 방법을 써야 할 거고요.”

“최후의 방법이요?”

“덕명 씨가 남극에서 재배한 작물이요.”

디에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 *

칠레 기지에도 일상이 찾아왔다.

이곳에서도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어야 했다.

우선 칠레 기지의 내부를 둘러봤다.

대한 기지처럼 샐러드 컨테이너가 준비된 상황이 아니다.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도 기지에는 공간이 많았다.

여러 곳을 물색하다 적당한 곳을 하나 찾았다.

오래전 숙소로 사용하던 곳인데, 지금은 창고로 쓰고 있었다.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 건 전기와 수도 시설 때문이다.

벤자민에게 요청해 물건을 치워 달라고 했다.

대원들의 도움으로 내부가 말끔해졌다.

난 깨끗해진 공간을 보며 말했다.

“이곳에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생각이야.”

이장우도 그 공간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우선 종자부터 발아시킬 생각이야. 내가 수경 재배 장치를 설계할 동안 넌 종자를 발아시킬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 줘.”

칠레 기지에도 못 쓰는 기계들이 있었다.

고장 난 식기 살균기를 이용해 씨앗 발아기를 만들 계획이다.

내부에 조명을 달고 물이 순환할 수 있는 기능만 넣으면 됐다.

샐러드 컨테이너에 모종을 할 때도 이용한 방법이다.

난 가져온 종자를 꺼냈다.

순무 종자, 보리 종자, 케일 종자다.

모두 새싹채소 종자들이다.

비교적 재배 기간이 짧고 간단하게 키울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장우가 발아기를 만드는 동안 종자들을 젖은 부직포 위에 올려놓았다.

빛과 물을 흡수하면 종자에서 싹이 난다.

내가 수경 재배 시설을 설계하는 사이에 이장우는 발아기를 만들었다.

“벌써 다 만든 거야?”

“이게 바로 기술자 손이지.”

난 부직포 위에 올려놓은 종자를 발아기 안에 넣었다.

“이 많은 씨앗은 언제 챙긴 거야?”

“이게 바로 대표의 손이지.”

이장우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그 안에서 어떻게 작물을 재배하도록 설계할 생각이야?”

“기지에서 형광등 챙겼지?”

남극을 올 때 LED 조명 말고도 형광등도 챙겼다.

이장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하려는지 상상이 안 가네?”

이장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당연한 반응이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들 때는 아파트처럼 층층이 수경 재배 시설을 구축했다.

층마다 광원을 달고 물과 영양액이 지나가게 했다.

상단에 조명을 달고 바닥엔 물과 영양액을 순환시키는 구조다.

이곳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에겐 장비도, 시간도 없었다.

“광원을 벽에 붙일 생각이야.”

“벽에 붙인다고?”

이장우는 상상이 안 가는 얼굴이다.

난 그에게 설계한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제야 이해가 된 모양이다.

“이거 될 거 같은데?”

장비가 부족해도 가능한 일이다.

난 이곳에서도 수경 재배에 성공할 것이다.

수경 재배 해법

샐러드 컨테이너는 수경 재배를 위한 완벽한 기계 장치다.

온도, 상대습도, 이산화탄소 농도, 광원, 영양액까지 작물이 자랄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준다.

칠레 기지에서는 완벽한 시설을 만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난 광원을 벽에 붙이는 아이디어를 냈다.

샐러드 컨테이너에서는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이다.

지금까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수경 재배 시스템이기도 했다.

“네 말대로 벽에 광원을 붙이면 이곳에서도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아. 이런 발상을 하다니 대단한데.”

이장우가 도면을 보며 말했다.

그도 내 계획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수경 재배의 주요한 장치 중 하나가 광원이다.

특히, 남극에서는 더 중요했다.

겨울엔 밤이 지속되는 극야가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도 빛이 들어올 일이 없었다.

광원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물의 순환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거지?”

이장우가 손가락으로 도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맞아,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구조야.”

분수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펌프를 이용해 물을 끌어 올려 밑으로 내려가는 구조다.

“콩나물 재배기를 만들 때처럼 물이 순환되게 만들면 되는 거지?”

“콩나물 재배기와 비슷해. 밑으로 떨어진 물을 다시 위로 다시 끌어 올리는 게 포인트야.”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겠네.”

콩나물 재배기는 내부에서 물이 품어져 나왔다. 재배 중인 작물 전체에 살수하는 방식이다. 냉장고를 이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을 끌어 올려 순환시키는 구조는 동일했지만, 이번엔 살수가 아닌 분수 방식이다.

광원은 벽에 부착해 빛을 받게 하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려보내 순환시키는 수경 재배 설비다.

수경 재배는 규모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진다. 설비가 클수록 만들기 어렵다. 광원과 물의 순환 등의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콩나물 재배기는 못 쓰는 냉장고를 이용했다. 밀폐된 용기였기에 시설을 만들기 쉬웠지만, 이곳은 냉장고처럼 작은 용기가 아니다.

다른 방법으로 물을 순환시켜야 했기에 분수 시스템을 떠올렸다.

샐러드 컨테이너처럼 물의 순환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재배할 작물이 새싹 채소이기 때문이다.

새싹 채소는 종자를 발아시킨 후 일주일 된 어린싹을 말한다.

빛과 물을 주면 씨앗에서 싹을 틔우고 뿌리를 뻗는다. 비교적 열악한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

샐러드 컨테이너의 주요작물인 버터헤드와 카이피라는 재배할 수 없지만, 새싹 채소는 충분히 가능했다.

“광원과 물의 순환은 문제가 없는데,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어떻게 조절해야 할까?”

이장우가 고민하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문제였다.

샐러드 컨테이너라면,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350ppm보다 낮아지면 외부의 공기를 유입시켜 적정 농도를 유지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센서를 이용해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자동으로 외부의 공기를 유입시키는 기술이다.

그 기술은 지리산 농부들의 핵심 기술력이기도 했다.

만약 장치가 있다고 해도 쉽게 공유하긴 힘든 기술이긴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여기는 남극이라는 제한된 공간이라는 거다.

이유나 상황은 그러하지만, 어찌 됐든 샐러드 재배기의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맞추는 일은 중요했다.

이곳에선 원시적인 방법이라도 동원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장우야, 우선 도면대로 작업을 진행해 줘. 그동안 내가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맞출 방법을 찾을 테니까.”

“좋아. 도면대로 최대한 만들어 볼게.”

재료로 쓸 장비는 모두 재활용품 수준이다.

그나마 악조건에서도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수 있는 건, 대한 기지의 경험 때문이다.

콩나물 재배기를 만들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 * *

난 벤자민 대장을 찾았다.

그에게 부탁할 물건이 있었다.

마침 디에나가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벤자민 대장은 어디 갔나요? 연락이 안 되네요.”

“외부에 있을 땐 연락이 잘 안 돼요. 나간 지 꽤 됐으니까 곧 돌아올 거예요.”

기다리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커피 한 잔 드시겠어요?”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게실 안에 커피 향이 진동했다.

“드세요.”

디에나가 커피를 건넸다.

진한 커피가 머리를 깨우는 느낌이다.

“덕명 씨는 남극이 처음이시죠?”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죠.”

디에나는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녀가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혹시 남극 대륙의 얼음이 녹고 있다는 말 들어 보셨어요?”

“기후 온난화로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고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럼 남극 대륙의 얼음이 모두 녹아 버리면 어떻게 되는지도 아세요?”

당황스러웠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해수면이 상승하겠죠?”

“그럼 해수면이 얼마나 상승할지도 상상해 보세요. 전 지구의 해수면이 얼마나 상승할지.”

“글쎄요. 한 10미터 정도?”

“땡! 최소 60미터는 상승할 거로 예측하고 있어요.”

“60미터요? 그 정도 높이면 해안가에 있는 도시는 모두 물에 잠기겠네요?”

“대지의 반 이상이 물에 잠길 거예요.”

그녀는 남극 연안에 있는 만년빙이 한순간에 붕괴하는 사건을 가정하며 말했다.

서울 면적의 10배에 달하는 얼음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동안 남극의 만년빙이 1,000년 동안 서서히 녹았다. 지금은 한두 달 사이에 갑작스럽게 녹아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짧은 시간에 남극의 얼음이 사라질 수 있다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말을 꺼냈다.

“남극의 얼음이 모두 녹으면 인류의 문명도 물에 잠기겠네요.”

말하는 순간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개를 돌리자 벤자민 대장이 지그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심오한 대화를 나누고 계셨네요.”

“대장님을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우선 따뜻한 커피부터 한 잔 마시고요.”

벤자민과 대원들은 커피를 마시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깥에서 일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난 벤자민에서 충분한 시간을 줬다.

칠레 사람들은 급한 걸 싫어했다.

벤자민은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물었다.

“저를 찾은 이유가 뭔가요?”

“칠레 기지에 새싹 채소를 재배할 계획입니다.”

“새싹 채소라면, 종자를 발아시킨 어린싹을 말하는 건가요?”

벤자민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관심 많은 얼굴이다.

“맞습니다. 어린싹을 칠레 기지에서 키울 생각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종자들인가요?”

“순무, 보리, 케일입니다.”

“영양가가 아주 좋겠네요.”

벤자민의 말대로 영양가 만점이다.

종자에서 싹이 터 어린잎일 때가 생리 활성 물질이 가장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크기는 작지만, 단백질, 비타민, 미네랄 등의 영양적 요소도 충분하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문제요?”

벤자민은 몸을 움직이며 물었다. 뭐든 해결해 줄 자세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이산화탄소 농도를 제어하지 못합니다.”

이산화탄소는 광합성을 위해서 꼭 필요했다.

광합성은 빛, 온도, 이산화탄소, 물과 이온화된 영양 성분을 받아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만약 이산화탄소가 충분하지 않으면 광합성 속도가 저하되고 작물의 생장에 문제가 생긴다.

벤자민은 사정을 듣고 입을 열었다.

“기지 안에 이산화탄소 측정기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던 물건이다. 칠레 기지도 연구소였다.

이산화탄소 측정기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벤자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디에나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벤자민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덕명 씨는 우주에서도 작물을 재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극에서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면 우주에서도 가능하겠죠?”

실제로 미국 등의 일부 국가에서는 남극에서 작물 재배 시설을 실험하고 있었다.

우주선에 실을 작물 재배 시설이다.

벤자민이 금속 케이스를 들고 들어왔다.

“적외선을 이용해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하는 기계입니다.”

그는 이산화탄소 측정기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샐러드 컨테이너에 있는 물건보다 구식이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나았다.

적외선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산화탄소가 특정 영역의 적외선을 흡수하는 원리를 이용한다. 적외선 흡수량의 변화를 통해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한 가지 요청 사항이 더 있습니다.”

이산화탄소 농도만 측정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산화탄소의 농도에 따라 외부에서 공기를 유입시켜야 했다.

난 공기를 통하게 할 파이프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럼 이산화탄소 농도는 수동으로 조절해야 하는 거네요.”

“네, 사람이 직접 확인하고 외부 공기를 유입시켜야 합니다.”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시적이지만 그 방법이라도 가능하다는 게 어디인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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