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기존 대원들이 기지를 떠났다.
아쉬운 작별의 순간이다.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곧 샐러드 컨테이너가 들어온다는 소식이다.
칠레 기지에서 온 손님
일 년 동안 남극 기지를 지키던 대원들이 떠났다.
잠깐이었지만 그들과 정이 들었는지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말은 안 했지만 다른 대원들도 나와 비슷한 것 같았다.
김도기 대장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 같았다. 오랜 시간 남극을 경험한 사람다웠다.
그는 이런 순간 대원의 마음을 달랠 방법도 알고 있었다.
일과가 끝났을 때, 그는 전 대원에게 공지 사항을 알렸다.
“오늘부터 돌아가며 화상 통화를 할 예정입니다. 부대장과 상의해서 시간을 정하길 바랍니다.”
화상 통화란 말에 대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남극 대한 기지에도 인터넷이 설치돼 있었다.
인터넷이 설치돼 있다고 화상 통화가 자유로운 건 아니었다.
일과 시간 중에는 화상 통화를 할 수 없었다. 시차 때문에 연락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경우도 많았다.
남극의 시계는 한국과 정반대다. 남극이 정오일 때 한국은 자정이다.
김도기 대장은 일과 시간 중에도 화상 통화를 허락했다. 일주일간의 기한을 정해 놓고 한 일이다.
김도기 대장은 나와 이장우에게 우선권을 줬다.
이틀 안에 샐러드 컨테이너가 들어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화상 통화를 마치고 일에 집중하길 바랐다.
난 한기탁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부모님은 화상 통화를 하는 방법을 몰랐다.
한기탁은 만반의 준비를 해 놓겠다고 답했다. 이장우의 아버지에게도 소식을 전하겠다고 했다.
다음 날 저녁, 난 이장우와 함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처음 화면을 보고 놀랐다. 화면에 보이는 건 실내가 아니라 야외였다.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목장이다.
“놀랐지? 목장 앞에 컴퓨터를 설치했어. 너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한기탁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화면 뒤로 목장의 풍광이 보였다. 풍경조차 반가웠다.
가장 보고 싶었던 부모님이 등장했다.
어머니가 날 보고 물었다.
“많이 말랐네. 밥은 잘 먹고 있는 거야?”
“네, 잘 먹고 있어요.”
“춥진 않아?”
“괜찮아요. 기지에 난방 시설이 잘돼 있어요.”
가만히 보고만 있던 아버지도 불쑥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몸 잘 챙기고.”
“네, 건강관리 잘할게요.”
부모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이장우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화면에 이동춘이 등장했다.
“장우야, 첫째도 안전이고 둘째도 안전이다. 그럼 셋째는 뭘까?”
“아버지도 참…….”
“네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구나. 그래도 말해 보거라.”
“안전이요.”
“그래, 안전이다. 우리 같은 기술자들은 안전이 최고 우선이지. 항상 안전에 주의해라.”
“네, 아버지도요.”
이동춘을 끝으로 화상 통화를 끝내려고 했다.
그때 한기탁이 다시 등장했다.
“혹시 이대로 끝내려는 건 아니겠지? 잠깐만 기다려.”
“통화를 오래 할 수는 없어요.”
“알겠어. 잠깐이면 돼.”
화면이 꺼지고 한기탁도 사라졌다. 곧 화면이 다시 켜지고 놀라운 장면이 보였다.
지리산 농부들의 동료들이 모두 화면에 등장했다. 사무실과 목장 그리고 매장의 동료들이 총출동했다.
임시백 선생님과 녹차 농가 사람들도 있었다. 방현식과 샐러드 컨테이너를 운영하는 청년 농부들까지,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화면 안에 사람들이 다 담기지 못할 지경이다.
모두 한목소리로 외쳤다.
“일 잘 마치고, 무사히 돌아오세요.”
한기탁이 준비한 깜짝 이벤트였다. 나와 이장우는 그 모습에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남극에서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 * *
샐러드 컨테이너가 들어오기로 한 날이다.
우린 트레일러를 타고 항구로 나갔다.
쇄빙선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내렸다.
40ft 컨테이너로, 길이 12m에 높이가 2.6m에 달했다.
작업은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됐다. 만에 하나 샐러드 컨테이너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큰일이다.
트레일러를 조종하는 기사에게도 신신당부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안전하게 트레일러에 싣고 기지로 향했다.
샐러드 컨테이너는 발전동 옆에 놓았다. 그곳에 전기와 정화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내려놓고 이장우에게 말했다.
“내부 점검 좀 부탁해. 난 모종 작업을 할 테니까.”
샐러드 컨테이너는 남극 지형에 맞게 제작을 완료한 상태였다. 이동 중 문제가 발생했는지 점검이 필요했다.
이장우에게 점검을 맡기고 모종 작업을 시작했다.
샐러드 컨테이너 안에 모종에 필요한 재료가 있었다.
난 모종 재료를 가지고 기지 안으로 들어왔다.
원래는 샐러드 컨테이너 안에서 재배와 동시에 모종 작업을 할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콩나물 재배기를 만들면서 모종할 기구를 제작했기 때문이다.
못 쓰는 컵 살균기를 모종 기구로 만들었다.
덕분에 샐러드 컨테이너 공간을 아낄 수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에 심을 작물은 버터헤드와 카이피라다.
암석을 1,600도 이상으로 용융해 만든 배지에 종자를 심고 물을 주었다.
한참 모종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작업실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은재민 조리장이다.
그는 노란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콩나물이 이렇게 자랐어요.”
그가 나에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그 안에 싱싱한 콩나물이 있었다.
“잘 자랐네요.”
“오늘 저녁엔 이 콩나물로 요리할 생각입니다.”
“기대됩니다!”
그러고 보니 콩나물을 먹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제 샐러드 컨테이너도 들어왔으니 조만간 샐러드도 먹겠네요.”
“모종이 끝나고 재배까지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샐러드는 어떤 종류인가요?”
“버터헤드와 카이피라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네요. 맛있는 샐러드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은재민이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아 말했다.
콩나물을 자랑하는 것 말고는 다른 용건은 없었는지 바로 돌아섰다.
나가려는 순간 그에게 물었다.
“은재민 조리장님.”
“네?”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뭐든 말씀하세요.”
은재민은 편안한 얼굴로 답했다.
“이곳에서 일 년 더 머물기로 하셨죠?”
“하하, 네. 일 년 더 머물기로 했습니다.”
“이유가 뭔가요?”
벌써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대원도 있었다.
은재민은 달랐다. 일 년이나 더 이곳에 있기로 한 것이다.
이유가 궁금했다.
“남극 기지에 있으면 살아 있는 기분이 들어서요.”
“살아 있는 기분이요?”
“남극 기지에 있는 대원들은 절 필요로 하니까요. 요리하면서 보람을 느낀 건 이곳이 처음입니다.”
은재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는 해군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조리장이었다.
해군에서 느끼지 못했던 만족감을 이곳에서는 느끼는 것 같았다.
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콩나물 요리, 기대하겠습니다.”
“저도 샐러드 기대하겠습니다.”
* * *
모종 작업을 마치고 발전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샐러드 컨테이너 안에서 이장우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에어 펌프가 말을 안 듣네.”
샐러드 컨테이너는 물과 영양액이 순환하는 구조로 돼 있었다.
하나의 파이프로 연결해, 모든 작물에 물과 영양액을 공급했다.
물과 영양액 말고도 산소가 공급됐다. 에어 펌프가 그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동 중에 기계가 얼고 녹으며 고장을 일으킨 것 같았다.
“너무 걱정할 건 없어. 여분을 준비했으니까.”
이장우가 굳은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다른 곳은 문제없고?”
“온도, 습도, 광량, 이산화탄소의 농도까지 제어하는 기능까지 전부 점검했어. 다른 곳은 이상 없어.”
“그럼 에어 펌프만 교체하면 되는 거네?”
“맞아.”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물과 영양액이 통하는 파이프가 고장 났다면 일이 커졌을 것이다.
에어 펌프 정도면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고생했어, 이제 저녁 먹으러 가자. 참고로 오늘 저녁 메뉴는 특별식이 될 거야.”
“특별식?”
이장우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 * *
저녁 식사 자리에 손님이 와 있었다.
김도기 대장이 대원들에게 손님을 소개했다.
“이분들은 칠레 기지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남극의 이웃사촌이죠.”
이웃사촌이란 말에 칠레 기지 사람들이 활짝 웃었다.
“칠레 대원들을 초청한 이유는 특별식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은재민 조리장님이 기지에서 재배한 콩나물로 특별한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콩나물이란 말에 대원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음식도 안 나왔는데 군침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옆에 있던 이장우가 조용히 물었다.
“콩나물이면 콩나물국인가?”
“뭐든 따뜻한 국물이면 좋겠다.”
내 말에 이장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저녁 식탁에 앉았다. 곧이어 기다리던 저녁이 등장했다.
오늘의 특별식은 콩나물국밥이다.
콩나물만 들어간 게 아니었다.
오징어도 보였다.
“이거 제대로인데?”
이장우가 콩나물국밥을 보며 말했다.
칠레 대원들은 이국적인 음식에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콩나물은 한국 사람만 먹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잘 먹겠습니다.”
모든 대원이 뜨끈한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너무 뜨거운지 연신 입김을 불어 가며 먹는 대원도 있었다.
이장우와 나도 수저를 댔다.
콩나물의 비린내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삭거리는 식감에 계속 손이 갔다.
“콩나물 재배기, 만들기 잘한 거 같아.”
이장우가 국밥을 먹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콩나물 재배기는 대성공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은 정도였다.
따뜻한 국물을 먹으니 속이 든든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들어가려는 순간이다.
김도기 대장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옆에 칠레 대원이 있었다.
난 김도기 대장과 눈을 마주쳤다.
용무를 묻는 눈빛에 그가 답했다.
“벤자민이 덕명 씨를 꼭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벤자민이라고 합니다.”
김도기 대장의 옆에 있던 칠레 대원이 인사를 하며, 간단한 소개를 해 왔다.
벤자민 산체스는 칠레 기지의 대장이다. 그는 칠레 기지에 3년째 머물고 있다고 한다.
한국 대원들과 달리 칠레 기지 사람들은 오랜 기간 남극 기지에 머무는 이들이 많다는데, 벤자민도 그중 하나였다.
한국과 달리 칠레는 남극과 인접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칠레 사람들은 이곳 킹조지섬에 공군 비행장까지 설치해 놓았다.
우리도 칠레 공군의 도움으로 기지에 올 수 있었다.
벤자민 산체스가 내게 관심을 보인 이유는 샐러드 컨테이너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샐러드 컨테이너에 대해서 세세하게 물었다.
“그럼 흙이 없이도 작물이 자라는 건가요?”
“맞습니다. 수경 재배 시스템으로 흙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작물에 물만 주는 건가요?”
“물과 함께 영양액을 공급합니다.”
“영양액이라고 하면 물에 녹은 이온 형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잘 아시네요. 정확하게는 이온화된 비료죠. 질소를 포함해 12개의 원소입니다.”
“샐러드 컨테이너의 온도는 몇 도를 유지하나요? 습도도 조절도 가능한가요?”
“샐러드 컨테이너는 15~20도를 유지합니다. 습도도 조절이 가능하고요. 상대 습도 범위는 50~80%에 맞춰져 있습니다. 이산화탄소의 농도도 350ppm을 유지합니다.”
자동으로 온도와 습도 이산화탄소의 농도를 맞출 수 있다는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만간 샐러드를 재배할 수 있겠네요?”
“크리스마스 전에는 샐러드를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때 다시 한국 기지를 방문해 주시면 좋겠네요. 칠레 대원들에게도 샐러드를 대접할 수 있게요.”
김도기 대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샐러드를 나눠 먹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표정이다.
한국 대원이 조난당했을 때도 칠레 기지 사람들이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건, 대한 기지 사람들에게 득이 되는 일이다.
“오늘 먹은 채소는 이곳에서 직접 재배기를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고장 난 냉장고를 이용해서 콩나물 재배기를 만들었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는 아주 정교한 장치 같은데, 간단하게도 만들 수 있는 모양이죠?”
“재배하는 작물에 따라 다릅니다.”
“칠레 기지에서도 그런 물건을 만들 수 있을까요?”
벤자민이 나에게 물었다.
내가 즉답을 피하자 그가 말했다.
“거저 해 달라는 뜻은 아닙니다.”
난 귀를 쫑긋 세우고 그의 말을 들었다.
그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블리자드
우린 김도기 대장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자리를 옮기자 벤자민은 거침없이 말했다.
칠레 기지에 수경 재배 시설을 설치하고 싶다고 했다.
샐러드 컨테이너처럼 완벽한 시설을 갖출 수 없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콩나물 재배기를 만들었던 것처럼 기지에 있는 물건들을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다.
난 그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최대한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는 내 마음을 읽은 것 같았다.
“쉽게 승낙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덕명 씨는 한국 기지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러 오셨으니까요.”
“다음에 기회가 오길 바랍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다음에 기회가 오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칠레 정부에서 돈을 들여 샐러드 컨테이너를 제작하지 않을 거라는 뜻입니다.”
벤자민의 솔직한 표현에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김도기 대장도 조용히 그의 말을 들을 뿐이다.
“아, 그렇군요. 안타깝게 됐네요.”
그렇게 대화가 끝날 거라고 생각할 때였다.
벤자민 산체스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했다.
“혹시, 이런 조건이면 어떨까요?”
“조건이요?”
“덕명 씨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을 한 명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람이요?”
벤자민은 이곳에 오기 전에 유엔 환경계획기구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인맥을 쌓았다.
내게 소개해 줄 사람도 그곳에서 일할 때 만난 사람이다.
“모하마드는 수경 재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쩌면 덕명 씨에게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가 소개해 주겠다고 말하는 인물은 모하마드 살라다.
두바이 왕자다. 환경에 관심이 많은 인물로 유엔 환경계획기구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다.
“모하마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제 소개라면 문제없을 겁니다.”
벤자민 대장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자신만만한 얼굴이다. 허풍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다.
단순한 인연을 넘어 두바이에 우리 기술을 수출할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그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칠레 기지에 굳이 수경 재배 시설을 설치하고 싶은 이유는 뭔가요? 칠레는 남극과 가까이 있지 않나요?”
칠레는 남극과 인접해 있었다. 심지어 킹조지섬에 공군기지까지 운영했다.
그가 수경 재배 시설을 욕심내는 이유가 궁금했다.
벤자민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신 것처럼 칠레 정부는 킹조지섬에 공군기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지원이 열악한 게 현실입니다. 정부가 공군기지를 설치한 까닭은 남극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죠.”
“영유권이요?”
“남극의 영유권 분쟁은 오랜 숙제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칠레 정부가 남극에 기지를 세운 이유는 정치적인 성격이 강했다.
남극의 기후나 환경 따위를 연구하는 것이 주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남극의 겨울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무리 칠레가 남극과 인접해 있다고 해도 겨울엔 오갈 방법이 없습니다. 신선한 채소는 구경조차 할 수 없고요. 수경 재배 시설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죠. 이게 수경 재배 시설을 설치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됐나요?”
그의 말대로 남극의 겨울은 상상을 초월한다.
겨우내 밤만 계속되는 극야 현상이 일어난다. 최대 영하 90도 이하로 떨어지는 혹한이 찾아오기도 한다.
벤자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대원들의 건강을 생각하는 대장의 마음이다.
그때 우리 대장도 나섰다.
김도기 대장이 벤자민에게 물었다.
“그런 일이라면 칠레 정부에 건의하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도 정부에 건의해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게 됐으니까요.”
“한국 정부처럼 칠레 정부는 남극 기지 대원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미 칠레 정부에 건의한 적도 있습니다.”
“어떻게 됐나요?”
김도기 대장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보기 좋게 묵살됐죠.”
“그래서 김덕명 씨를 만나고 싶어 했군요.”
김도기 대장은 벤자민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벤자민은 씁쓰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김도기 대장은 시계를 보며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벤자민이 원하는 수경 재배 시설에 대해서는 에둘러 말했다.
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것 같았다.
김도기 대장은 칠레 대원들을 돌려보내고, 나와 이장우에게 말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그만 주무시죠.”
* * *
이장우와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이장우도 생각이 많은 것 같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벤자민 대장의 말 어떻게 생각해?”
“무슨 말?”
“시치미 떼긴, 모하마드인가 하는 왕자를 소개해 준다는 거.”
“구미가 당기긴 해.”
난 웃으며 말했다.
“역시 같은 마음이구나. 그런데 잘 될까? 김도기 대장은 좀 불편한 표정이던데.”
“우선은 우리 일만 생각하자. 남극에 온 이유는 대한 기지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기 위해서니까.”
다시 하루가 시작됐다. 난 이장우와 함께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샐러드 컨테이너의 내부 환경을 확인했다.
내부 온도 18도에 상대 습도 68%다.
이산화탄소의 농도도 350ppm을 유지했다.
샐러드 컨테이너 내부에 20㎝ 두께의 우레탄을 붙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열 손실을 최대한 줄이고 작물을 키우기에 최적의 환경을 만들었다.
고장 난 에어 펌프 교체 작업도 끝났다.
교체 작업을 끝내고 이장우가 물었다.
“태양열 집열판은 어떻게 할까?”
“우선은 설치하지 않는 게 좋겠어.”
“태양열을 이용하면 좋지 않나?”
“발전기와 UPS에 연결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거 같아.”
발전기를 관리하는 엔지니어에게 부탁해 샐러드 컨테이너와 UPS를 연결했다.
UPS를 연결하면 정전이 돼도 전력을 공급하는데 문제없었다.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하지 않는 이유는 남극의 눈보라 ‘블리자드’ 때문이다.
‘블리자드’는 초속 20미터를 넘는 거대한 눈 폭풍이다. 영구 빙설인 빙관으로부터 불어오는 맹렬한 강풍이다. 최고 50미터를 기록하기도 했다.
눈 폭풍이 일어나면 태양열 집열판은 순식간에 날아갈 수도 있었다.
“김덕명 씨, 저 좀 볼 수 있을까요?”
김도기 대장이 날 찾았다.
잠을 못 잤는지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다.
그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어제 칠레 대장의 부탁 말입니다.”
김도기는 벤자민의 이야기를 꺼냈다. 고민한 기색이 역력했다.
“칠레 대원들이 우리를 많이 도와주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김도기 대장은 대한 기지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게 우선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벤자민 대장의 부탁은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부탁해도 불가능하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난 김도기와 생존 훈련을 함께 받았다. 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였다.
게다가 그가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김덕명 씨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는데 아쉽게 됐네요.”
“아쉬울 건 없습니다. 전 대한 기지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러 왔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회는 또 올 거라고 생각했다.
난 컨테이너 설치 작업에 집중했다.
이장우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우린 샐러드 컨테이너 작업에만 매달렸다.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일에 집중했다.
심지어 자유 시간을 쪼개 가며 일했다.
기회가 왔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장우는 불평 없이 나를 따라 줬다.
모종판에 심었던 종자가 싹을 틔웠다.
샐러드 컨테이너 안에 모종을 옮겨 심었다.
자라나는 샐러드만큼이나 시간도 빨리 지나갔다.
버터헤드와 카이피라에 푸른 잎이 돋아났다.
샐러드를 수확할 날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작업 중에 사이렌이 울렸다.
이장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지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자.”
밖에서 작업하던 모든 대원들이 기지 안으로 들어갔다.
기지 안에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탐사 나간 대원들이 고립됐어요.”
“고립이요?”
빙하 탐사에 나간 대원들이 눈 폭풍을 만난 상황이다.
휭. 휭.
기지에도 눈보라 블리자드가 찾아온 모양이다.
매서운 눈보라가 기지를 때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세가 강해졌다.
남극에 온 이후로 만난 최고로 큰 눈 폭풍이다.
순간 풍속이 30미터는 넘을 것 같았다.
당장 대장실로 달려갔다.
도상현 부대장이 사무실 안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에게 물었다.
“김도기 대장님은요?”
“아직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김도기 대장도 빙하를 탐사하러 나간 대원 중 하나였다.
도상현 부대장이 김도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도상현은 당황한 얼굴이다. 부대장이라고 하지만 아직 경험이 없었다.
생존 훈련을 받을 때도 힘에 부쳐 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난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대원들과 연락은 해 봤나요?”
“네, 계속 무전을 했습니다.”
“무사한가요?”
“그게, 눈보라 때문에 통신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그럼 연락이 안 되는 거네요?”
도상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이 두절된 상태다.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대한 기지에 헬기가 있죠?”
대한 기지에 비상용 헬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구조 작업이 불가능한 상태다.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날씨가 잠잠해졌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지금은 헬기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죠?”
“며칠 전에 정비에 들어가서요.”
헬기가 없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다.
“그럼 다른 기지에 헬기 협조를 요청하죠.”
“헬기를… 요?”
당황하면 생각이 멈춰 버리는 사람이 있다. 머리가 마비돼 버리는 것이다.
지금 도상현이 그런 상태다.
난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대한 기지와 가장 가까운 기지가 칠레 기지 아닌가요?”
“말씀대로 칠레 기지가 가장 가깝습니다.”
“칠레 기지에 협조 요청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날씨가 잠잠해지면 구조 작업을 할 수 있게.”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이요!”
그제야 도상현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빠르게 움직였다.
* * *
도상현 부대장은 칠레 기지에 협조를 요청했다.
칠레 기지에서는 눈보라가 끝나는 대로 출동하겠다고 전했다.
눈 폭풍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그저 빨리 지나가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장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대원들은 무사하겠지?”
“김도기 대장이 있으니까 문제없을 거야.”
난 김도기 대장을 믿었다. 그는 대원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람이다.
남극 경험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대원 중 한 명이 소리쳤다.
“블리자드가 멈췄다!”
바깥을 내다봤다. 그의 말대로 눈 폭풍이 잦아들었다.
본격적인 구조 작업이 시작됐다.
도상현 부대장은 구조팀을 선발했다.
기지를 무조건 지켜야 하는 대원도 있었다. 그들을 제외하고 구조팀이 꾸려졌다.
나와 이장우도 구조팀에 선발됐다.
구조팀은 트레일러를 타고 이동했다.
목적지는 김도기 대장과 함께 대원들이 빙하 연구를 하던 곳이다.
하늘에서 헬기가 나는 모습이 보였다.
칠레 기지 대원들도 구조 작업에 나섰다.
“여기가 빙하를 연구하는 곳입니다.”
난 트레일러에서 내려 주변을 살폈다. 빙하 시추기가 눈에 덮여 있었다.
아직도 미세한 눈가루가 날렸다.
고글 형태의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눈가루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하얀 사막 한가운데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장우야, 천천히 움직여야 해.”
2인 1조로 움직이고 있었다. 허리에 끈을 묶어 서로 연결한 상태였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것이다.
조난된 대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간 거지?”
이장우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눈보라를 피해 어딘가 있을 것 같았다.
수색 작업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모두 희망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과 달리 시간은 무심히도 지나갔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기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도상현 부대장이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기지로 돌아가야 했다.
구조대의 안전도 중요했다.
기지에 도착할 무렵, 트레일러에 달린 무전기에 불이 들어왔다.
도상현 부대장이 무전기를 들었다.
“지금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대장님과 대원들이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완벽한 보너스
김도기 대장과 대원들은 무사했다.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던 데는 김도기 대장의 대처 능력이 한몫했다.
김도기 대장은 블리자드를 예상하고 기지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남극의 강풍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김도기 대장은 발걸음을 돌려 안전지대로 이동했다.
바위들이 고대의 거석 구조물처럼 모여 있는 곳이었다.
대원들은 그곳에 몸을 숨기고 블리자드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눈 폭풍은 멈췄지만, 문제가 발생했다. 블리자드가 지나간 자리에 거대한 산이 만들어졌다. 눈으로 이뤄진 하얀 산이다. 지형을 바꿔 버릴 정도의 눈덩이가 쌓인 것이다.
길은 막히고, 대원들은 그곳에 고립됐다.
대한 기지 구조대가 그들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기도 했다.
칠레 기지의 헬기가 그들을 발견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지 않았다면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크게 다친 대원은 없었다.
* * *
김도기 대장의 사무실.
도상현 부대장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김도기 대장은 발등에 찜질팩을 올려놓고 있었다.
“발은 좀 어떠세요?”
“가벼운 동상이야. 온찜질을 하면 나아질 거야.”
“다행이네요, 크게 다치지 않으셔서.”
“칠레 대원들은 아직 기지에 있나?”
“지금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대원들 상태는 어때?”
김도기 대장의 물음에 도상현 부대장은 수첩을 꺼냈다. 그는 대원 명단을 보며 말했다.
“대부분 가벼운 찰과상과 동상입니다.”
“천만다행이야.”
김도기 대장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냥 앉아 계시지…….”
“움직이는 데 전혀 지장 없어. 내일이면 말끔하게 나을 정도니까.”
김도기는 도상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도상현은 그의 손을 잡았다.
“부대장이 대처를 잘해 줘서 모두 무사할 수 있었어.”
“솔직히 말씀드리면 당황했습니다. 처음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할 지경이었으니까요.”
“당황했어도 침착하게 대처를 잘했어. 칠레 기지에 헬기까지 요청하고.”
도상현은 김도기 대장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그는 김도기 대장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김덕명 씨가 아니었다면 헬기를 요청할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김덕명 씨가?”
도상현은 기지에서 벌어졌던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그는 남극 대원이기 전에 순박한 기상학자기도 했다.
김도기는 도상현의 이야기를 듣고 입을 열었다.
“김덕명 씨가 대응을 잘해 줬군. 물론 부대장도 임무를 잘 수행해 줬고 말이야.”
김도기 대장은 도상현 부대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도상현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김도기는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나가 보자고. 칠레 기지 대원들을 그냥 보낼 수 없으니까.”
김도기와 도상현은 사무실을 나왔다.
칠레 기지 대원들은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벤자민 대장의 모습도 보였다.
김도기는 벤자민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벤자민은 그의 손을 잡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웃사촌끼리 서로 도와야죠.”
벤자민 대장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주변에 있던 칠레 대원들도 모두 미소를 지었다. 대장과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하고 가시죠.”
김도기 대장은 벤자민의 손을 잡고 말했다.
“식사는 다음에 하는 걸로 하죠.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어서요.”
벤자민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김도기는 미안한 마음에 손을 놓질 못했다.
벤자민은 손을 거두며 말했다.
“곧 크리스마스니, 그때 함께 식사하시죠?”
“그럼, 크리스마스 때는 한국 기지에서 파티를 열겠습니다.”
“좋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 파티엔 신선한 샐러드도 있겠네요.”
“물론입니다.”
김도기 대장은 웃으며 답했다. 겉으로는 웃고는 있지만, 샐러드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 * *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다시 평화로운 일상이 찾아왔다.
나와 이장우는 평소처럼 샐러드 컨테이너로 향했다.
“오늘은 바람 한 점 없네.”
이장우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하늘이 고요했다. 눈 폭풍이 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하늘 그만 보고 일이나 하자.”
난 이장우와 함께 샐러드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푸릇푸릇한 잎들이 샐러드 컨테이너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주일도 안 돼서 수확이 가능할 것 같았다.
직접 채소를 재배하고 있지만,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지에서 재배한 채소다. 그것도 내 손으로 직접.
난 컨테이너 구석에 있는 버터헤드와 카이피라 잎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대부분 싱그러운 기운이 느껴졌다. 잎사귀에 빛깔도 좋았다.
컨테이너의 벽에 붙은 샐러드는 상태가 좀 달랐다.
잎사귀에 탄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장우야, 벽 쪽에 빛을 더 줘야 할 것 같아.”
“그래?”
우레탄을 붙여 컨테이너의 보온력을 높였지만, 벽과 닿은 부분은 온도가 낮은 모양이었다.
이럴 땐 샐러드 컨테이너의 내부 온도를 높이기보다 광원으로 조절해야 한다.
초기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들며 민요한과 함께 연구한 결과였다.
“벽 쪽에 조명을 더 달아 볼게.”
“너무 과하게 하면 성장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작은 조명을 달자.”
“알겠어. 마땅한 LED 조명이 있는지 찾아볼게.”
광원은 8,500lux에 맞춰져 있었다. 하루에 필요한 광량은 77,000lux다. 부족해도 문제지만 초과해도 성장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이장우는 조명을 찾으러 밖으로 갔다.
난 그사이에 영양액을 배합했다.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다녀온 거야?”
당연히 이장우가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내 앞에 김도기 대장이 서 있었다.
“버터헤드와 카이피라네요.”
김도기 대장은 성장 중인 작물을 보며 말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보시다시피 아무 문제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도상현 부대장에게 들었습니다. 김덕명 씨가 도움을 줬다고요.”
“저는 별로 한 일은 없습니다. 다 부대장님이 알아서 처리하셨죠.”
“감사합니다. 김덕명 씨가 아니었으면 헬기도 부르지 못했을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단순히 칭찬하러 온 게 아닌 것 같았다. 용건이 있는 얼굴이다.
“일과가 끝나도 이곳에서 일한다고 들었습니다.”
“작물의 성장 상태를 관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오늘 저녁에는 저에게 시간을 내줄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시죠?”
“그건 저녁에 말씀드리죠.”
응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난 그와 저녁에 만날 것을 약속했다.
그가 돌아서 나갈 때였다.
이장우가 컨테이너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대장님이 여기까지 오시고?”
“저녁에 보자고 하네.”
“용건이 뭔데?”
“글쎄?”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