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우린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했다.
푼타 아레나스는 칠레의 최남단 도시다. 그곳에서 칠레 공군기를 타야 남극 대한기지로 갈 수 있다.
남극 대한기지가 있는 ‘킹 조지’ 섬엔 칠레 공군기지가 있었다.
김도기는 한국 대사관에 이미 협조를 요청한 상태였다.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나와 이장우는 항구로 향했다.
한국에서 보낸 샐러드 컨테이너를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항구 노역자들이 샐러드 컨테이너를 남극으로 떠날 배에 옮기고 있었다.
대형 선박을 통해 푼타 아레나스로 이동한 샐러드 컨테이너를 쇄빙선에 싣는 작업이다.
얼어붙은 바다의 얼음을 깨부수는 쇄빙선이 아니면 남극으로 컨테이너를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쇠사슬로 묶기 전에 마지막 점검을 했다.
“문제없어.”
이장우가 내부를 살피고 말했다. 선박 담당자에게도 점검이 끝났음을 알렸다.
선원들은 샐러드 컨테이너를 쇠사슬로 단단히 고정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보내고 공군기지로 이동했다.
대장 김도기가 대원을 향해 말했다.
“대한기지에서 보내온 무전에 따르면, 기지 주변에 심한 눈바람이 불고 있다고 합니다. 모두 안전에 주의하십시오.”
김도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칠레 군인이 항공기 안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프로펠러가 두 개 달린 치누크기다. 오래전 미군이 침투용으로 사용하던 모델이다.
군용 헬기의 소음은 상상을 초월했다. 귀마개를 해도 소용없었다. 이걸 타고 3시간이나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이장우가 나에게 뭐라고 말을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소음 때문에 힘들다는 말 같았다.
3시간 만의 비행 끝에 남극 ‘킹 조지’ 섬에 도착했다.
그곳에 우릴 마중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대한기지 사람들이다.
마중 나온 사람 중 하나가 말했다.
“대한기지 대장 강찬일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초여름의 칠레와 달리 남극은 칼바람이 부는 한겨울 날씨였다.
“여기서 대한기지까지는 보트를 타고 가야 합니다.”
강찬일은 기지 맞은편에 있는 항구를 가리켰다. 그곳에 작은 고무보트들이 있었다.
한국에서 해양 훈련을 받을 때 탔던 보트였다.
보트에 타기 전에 우주복처럼 생긴 방수복을 입었다. 이걸 입으면 바다에 빠져도 물에 둥둥 뜬다고 했다.
네 팀으로 나눠서 보트에 탔다. 보트를 타기 위해 해안가를 지날 때였다.
“펭귄이다!”
대원 중 하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펭귄 무리가 줄지어서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진짜 남극에 온 기분이네.”
이장우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연 상태에서 펭귄을 본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귀여웠다.
보트에 탑승하는 순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남극은 여름에도 눈이 내렸다.
“강풍이 불 수 있으니 손잡이를 꼭 잡아 주세요.”
김도기 대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바다에 빙하 조각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이동하자 멀리 육지가 보였다.
조립식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전 대원은 보트에서 내렸다.
드디어 남극 대한기지에 도착했다.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았다.
기지 안에 모두 모여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기지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를 배웅 나왔던 강찬일이 말했다.
그의 옆에 있던 대원 중 하나가 우리에게 종이를 나눠 줬다.
“서약서입니다. 사인을 해야 이곳에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난 서약서를 꼼꼼히 살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남극에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겠다는 서약이다.
남극에 상주하는 모든 이가 하는 약속이었다.
실제로 남극의 자연환경은 한 번 파괴되면 복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일행은 모두 서약서에 사인했다.
이제야 본격적인 남극 생활이 시작됐다.
* * *
숙소는 대부분 2인실이다. 나와 이장우가 같은 방을 배정받았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고달파서 그런지 배가 고프네.”
이장우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 역시 허기가 졌다.
그때 마침 방송이 나왔다.
우린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 새로 오신 대원들을 위해 조촐한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모든 대원은 8시 정각에 강당으로 모여 주십시오.”
남극 대원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임무를 교대했다.
떠나는 대원들이 새로 온 대원에게 열어주는 파티다.
남극 기지의 전통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장우는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뭐가 나올지 기대되네. 또 청국장이 나오진 않겠지.”
“나올 수도 있지.”
“청국장이든 뭐든 배고파서 미칠 지경이야. 생고기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강당 안에 사람들과 가득했다. 기존에 상주하고 있던 대원들과 새로운 대원들을 합치면 서른 명은 족히 넘는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 음식이 가득했다.
스테이크, 새우튀김, 참치회까지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다.
소주도 있었다.
배웅 나왔던 강찬일 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운 대원들을 위한 축하 파티입니다. 앞으로 일 년 동안 무사히 임무를 끝내고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로 술을 한잔 드리겠습니다. 남극에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술이죠.”
강찬일의 말이 떨어지자 얼음 통이 등장했다.
“남극의 신선한 빙하입니다. 먹게 좋게 잘라 놨습니다.”
빙하 소주다.
컵에 빙하 조각을 넣고 소주를 따랐다.
모든 대원이 빙하가 든 소주잔을 들었다.
“무사 귀환을 위하여!”
강찬일이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잔을 들었다.
술을 한 잔 마시고 소개하는 자리가 이어졌다.
새로운 대장 김도기가 앞으로 나왔다.
“앞으로 남극 생활을 책임질 대장 김도기입니다.”
그때 김도기 대장이 빙하학자란 사실을 처음 알았다. 생존 훈련을 겪으면서는 그가 학자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김도기에 이어 차례대로 소개가 이어졌다.
부대장 격인 도상현은 기상학자다.
남극 대한기지 대원들은 크게 총무반, 유지반, 연구반으로 구성된다.
총무반은 통신과 의료를 담당한다. 기계는 발전과 설비를 맡는다. 연구반은 기후, 해양, 빙하를 연구한다.
기지 대원들은 일 년에 한 번씩 분야별로 인수인계가 이뤄진다.
이제 며칠 후면 기존의 연구대원들은 한국으로 돌아간다.
새로운 대원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새로 부임한 15명 대원의 소개가 끝났다.
김도기 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남극 대원 중에 특별한 분이 계십니다. 남극 대한기지에서 신선한 채소를 재배할 분들입니다.”
신선한 채소란 말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바로 이분들입니다.”
그가 나와 이장우를 가리켰다.
“네가 대표로 말해. 우리 대표님이기도 하니까.”
이장우의 볼이 붉게 변해 있었다. 한 잔만 마셨는데 술기운이 도는 모양이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남극 대한기지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할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샐러드 컨테이너는 채소를 재배할 수 있는 첨단 시설입니다. 이제 남극에서도 신선한 채소를 먹을 수 있습니다.”
대원들은 샐러드 컨테이너를 기대하는 얼굴이다.
음식에 들어간 채소들은 모두 동결 건조한 채소들이다.
신선한 채소는 남극에서 구경할 수조차 없었다.
“소개도 마쳤으니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마감 시간도 잘 지켜 주시고요.”
새로 부임한 대장 김도기가 말했다. 그가 말하는 마감 시간까지 고작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서약서를 쓸 때 대장의 통제에 따른다는 항목도 있었다.
이장우는 남은 시간 동안 음식에 집중했다.
난 커피를 한잔 마시려 휴게실로 들어갔다.
한 남자가 내 뒤를 쫓아왔다.
자기소개 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사람이다.
난 잔을 들고 휴게실 소파에 앉았다. 그도 커피를 들고 내 옆에 조용히 앉았다.
어색한 침묵을 깬 건 그였다.
“뭐 하나 여쭤봐도 되나요?”
“네, 말씀하시죠.”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면 진짜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건가요? 샐러드도 포함해서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미소 지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매일 드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언제부터 먹을 수 있나요?”
“샐러드 컨테이너가 어제 푼타 아레나스 항구를 출발했으니까…….”
“이틀은 걸리겠네요. 샐러드 컨테이너가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그가 바로 답했다. 이곳의 생리를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원래 이곳에 있던 대원 아니신가요?”
“네, 맞아요. 이곳에서 상주하는 대원이죠.”
“곧 떠나지 않나요?”
“일 년 더 있기로 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오래 계시네요. 혹시 어떤 임무를 맡고 계시는가요?”
“아, 소개가 늦었네요. 남극 기지 조리장 은재민입니다. 원래는 해군에 있었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잠수함에서 요리를 담당하던 군무원이었다.
우연한 계기로 남극까지 오게 된 남자다. 남극 생활이 적성에 맞았는지, 일 년 더 있기로 했다고 한다.
“정말 기대가 커요. 신선한 채소 맛을 본 게 언제인지도 모르겠어요.”
“샐러드 컨테이너가 도착하는 대로 재배를 시작하겠습니다.”
조리장 은재민은 미소로 답했다.
기대가 큰 눈빛이다.
극지에서 재배하는 콩나물
아직 샐러드 컨테이너가 도착하기 전이다.
비디오카메라를 켜자 이장우가 말했다.
“드디어 카메라를 꺼냈네.”
최민성 피디에게 받은 카메라였다. 남극으로 이동하는 동안은 위험 요소가 있어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다.
김도기 대장도 기지 안에서 촬영을 허락했다.
“촬영까지 하면서 일할 수 있겠어?”
“일할 땐 카메라를 삼각대에 고정해서 찍을 생각이야.”
“하긴 비디오카메라니까 고정하면 문제없겠네.”
영화를 찍는 게 아니었다. 고정해서 찍어도 기록 영상으로 남기기에는 충분했다.
* * *
이장우와 함께 남극 기지 설비를 둘러보았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려면 전기가 필수다.
남극 기지는 발전기를 이용해 전기를 만들었다.
난 발전기를 관리하는 엔지니어에게 물었다.
“만약 발전기가 멈추면 어떻게 하나요?”
“중요한 장비는 UPS와 연결해 전기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거죠.”
UPS는 거대한 다기능 배터리를 의미한다. 전기가 나갔을 때 장비들이 멈추는 걸 방지할 수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도 UPS와 연결해 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구축하면 UPS와 연결하겠습니다.”
전기를 확인하고 수도 시설을 확인했다. 수경 재배를 위해서는 전기와 물은 필수다.
남극 기지의 식수는 담수호를 통해 공급됐다. 기지를 만들 때 인공으로 만든 담수호다.
정수 처리를 거쳐 대원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겨울철에는 바닷물을 담수화했다.
초기엔 증기 담수화 방식을 사용하다 최근엔 역삼투압 방식으로 바꿨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점검한 건 정화 시설이다.
수경 재배에 사용되는 영양액 때문이다. 영양액을 바다에 그대로 흘려보내면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남극 생태계를 교란하는 어떤 행동도 용납될 수 없었다. 서약서에도 사인한 내용이기도 했다.
남극 대한 기지엔 정화 시설이 갖춰져 있었다.
정화 시설은 발전기 옆에 있었다.
난 정화 시설을 관리하는 엔지니어에게 물었다.
“약품을 이용하는 방식인가요?”
“아니요, 그럴 수야 없죠. 정화 시설은 미생물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미생물로 유기물을 분해하는 방식이다.
섭씨 30도에서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한다. 정화 시설이 발전기 옆에 있는 까닭이다.
발전기를 돌릴 때 발생하는 열을 이용해 정화했다.
“대원들의 대소변도 이 정화 시설을 거쳐 배출됩니다. 정화를 마치고 살균까지 합니다. 미생물조차도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요.”
샐러드 컨테이너도 남극 환경에 영향을 줘서는 안 됐다.
정화 시설을 둘러본 뒤, 이장우에게 말했다.
“전기와 수도도 중요하지만, 정화 시설은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거야.”
“이렇게 철저하게 관리하는지 몰랐네.”
“남극에만 있는 동식물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야.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으니까.”
남극의 환경오염 문제는 지금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미세 플라스틱과 유해 화학물질이 바다를 통해 남극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한국 기지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기지들도 폐수 등 오염 물질을 철저하게 관리했다.
기지 안의 시설 점검이 끝났다.
우린 샐러드 컨테이너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 * *
그날 오후, 김도기 대장이 날 불렀다.
그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요?”
“한국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가 이곳 기지로 들어오는 데 예정보다 시간이 더 길어질 것 같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가 푼타 아레나스 항구에서 떠나는 걸 확인했습니다만?”
“날씨 때문에 다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남극의 날씨는 예측을 불허합니다. 종종 생기는 일이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언제쯤 도착할 수 있나요?”
“적어도 일주일은 걸릴 겁니다.”
“일주일이나요?”
샐러드 컨테이너를 쇄빙선에 싣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얼음도 뚫고 가는 배라고 들었다.
날씨 앞에서는 쇄빙선도 꼼짝 못 하는 모양이다.
“기다리는 동안 일을 드리겠습니다.”
“일이요?”
“남극 기지에선 정해진 휴식 시간을 제외하고 노는 일은 용납되지 않으니까요.”
김도기 대장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다.
“물론, 아무 일이나 시키지 않겠습니다. 김덕명 씨에게 몇 가지 선택지를 드리죠.”
김도기 대장은 나에게 2가지 선택지를 줬다.
첫 번째는 다른 대원을 보조하는 역할이다. 연구자들을 보조하는 간단한 일이다. 빙하 시추부터 기상 관측까지 보조하는 일은 다양했다.
두 번째는 일을 스스로 찾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기술을 이용해서 뭐든 해도 좋다고 했다. 다만 그에 따른 결과를 보고하는 조건이다.
가볍게 다른 대원을 보조하는 일과 주체적으로 일을 찾는 두 가지 선택지다.
“어떤 걸 선택하실 건가요?”
“스스로 일을 찾아보겠습니다.”
“역시, 예상대로네요. 어떤 성과를 보일지 기대하겠습니다.”
김도기 대장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그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김도기는 빙하학자였다. 그가 하는 일은 남극 빙하를 분석하는 일이다.
빙하를 분석하기 위해 지하 깊숙한 곳에서 빙하를 시추했다.
빙하를 분석해서 고대의 기후와 자연환경을 연구하는 것이다.
대장의 말대로 남극 기지의 모든 대원은 맡은 바 임무가 있었다.
내 임무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이장우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샐러드 컨테이너가 늦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일을 스스로 찾다니, 그건 좀 당황스럽네?”
“아니야,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어렵지 않다니. 뭘 할 생각인데?”
우리가 남극 기지에 발을 들인 건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샐러드 컨테이너가 아직 오지 않았다.
난 샐러드 컨테이너가 없이도 작물을 재배해 보고 싶었다.
“작물을 재배할 생각이야.”
“샐러드 컨테이너도 없이 작물을 재배한다고?”
이장우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샐러드 컨테이너 없이도 재배가 가능한 작물이 있어.”
“그게 뭔데?”
“그전에 확인할 게 있어.”
“확인?”
난 이장우와 함께 주방으로 갔다.
조리장 은재민이 날 반겼다.
“아직 저녁 전입니다. 배고프시면 휴게실에 컵라면이 있습니다.”
“배고파서 온 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로?”
첫날 환영 파티를 기억했다.
채소가 거의 없었다.
그날 먹은 스테이크, 새우, 참치 등은 모두 냉동한 식품을 조리한 것이다.
“채소는 어떻게 먹고 계시는지 궁금해서요.”
은재민은 선반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동결 건조 채소를 사용합니다. 여름에는 신선한 채소가 들어올 때도 있습니다. 특성상 오래 보관하진 못하지만요.”
“기지에서 채소를 재배해 본 적은 없나요?”
“실은 시도를 한번 해 보긴 했는데…….”
은재민은 주방 구석의 플라스틱 통을 바라보았다.
그가 재배하려 했던 건 콩나물이다.
예상했던 일이다.
콩나물은 재배가 간편해서 가정집에서도 키우기도 한다.
어머니도 콩나물을 집에서 키웠다.
“보기 좋게 실패했습니다.”
은재민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실패의 원인이 궁금했다.
나 역시 콩나물을 재배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장우도 내 의도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우린 은재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온도 때문인 것 같았어요. 밤에는 숙소동만 난방을 하니까요.”
콩나물을 재배할 때 온도가 중요했다.
콩나물을 키우기에 적절한 온도는 22도다.
그가 콩나물 재배에 실패한 이유였다.
이곳 기지의 주방에서는 그 온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실패의 원인은 온도만이 아니었다. 콩나물은 물을 주기적으로 갈아 줘야 했다.
기지에서 물은 귀한 자원이다. 콩나물 재배를 위해 물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난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방법을 찾고 싶었다.
“주방에 콩이 있나요?”
“콩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콩나물이 아니라 샐러드를 재배하는 게 아니었나요?”
은재민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그에게 기상 악화로 샐러드 컨테이너 도착이 늦는다고 말했다.
“그럼 샐러드 컨테이너가 오기 전에 콩나물을 재배할 생각이신가 봅니다?”
“네. 콩나물을 재배할 생각입니다.”
“그게 가능한가요?”
은재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노력해 봐야죠. 혹시 기지 안에 못 쓰는 가전제품이 있나요?”
“그런 거라면 총무반에 문의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 * *
총무반으로 가는 길에 이장우가 물었다.
“콩나물은 재배할 생각인 건 알겠는데, 장비 없이도 그게 가능할까?”
“콩나물은 장비가 많이 필요하지 않아. 온도와 물만 맞춰 주면 재배할 수 있어.”
“빛이 없어도 가능하다는 소리야? 샐러드 컨테이너는 LED 광원을 이용하잖아?”
“콩나물을 재배하는 데 빛은 필요하지 않아. 오히려 빛을 가려야 해.”
“정말이야? 그런 줄은 몰랐네.”
콩나물은 빛이 없이도 키울 수 있는 작물이다. 오히려 빛을 받으면 상품성이 떨어진다.
노란색 머리가 녹색으로 변하고, 콩나물 특유의 비린내가 진동한다. 게다가 질겨서 먹기조차 힘들어진다.
난 총부반장에게 못 쓰는 가전제품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에게 가전제품을 이용해 콩나물 재배기를 만들 계획도 말했다.
콩나물 재배기란 말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성공하면 기지에서 콩나물국도 먹을 수 있겠네요?”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창고에 못 쓰는 가전제품들이 있습니다. 못 쓰는 물건은 칠레로 가져가 폐기 처분 합니다. 이곳에 버릴 순 없으니까요. 마침 창고에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총무반장이 웃으며 말했다.
기지에서 못 쓰게 된 전자 제품은 푼타 아레나스로 가져가 폐기한다는데, 조만간 물건을 모두 수거해 갈 예정이라고 했다.
샐러드 컨테이너가 도착할 때와 맞물려 있었다.
총무반장은 우릴 창고로 안내했다.
컴퓨터 모니터부터 라디오까지 다양한 가전제품들이 창고 안에 쌓여 있었다.
그의 말대로 물건의 양이 제법 됐다.
“여기에 있는 것들을 전부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총무반장은 인심 쓰듯 말했다.
창고 안에는 나와 이장우만 남았다.
이장우가 고장 난 가전제품들을 보며 말했다.
“쓰레기장을 뒤지는 기분이네.”
“쓰레기가 아니라 콩나물 재배기를 만들 재료들이야.”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뭘 찾으면 되는 거지?”
“업소용 냉장고가 좋을 거 같아.”
“냉장고라…….”
냉장고를 온장고로 만들 생각이었다.
업소용 냉장고는 가정용과 달리 내부가 스테인리스로 구성돼 있었다.
내부에서 물을 분사해도 좋은 구조다.
“이 정도면 괜찮나?”
이장우가 창고 구석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좋은데!”
정말 업소용 냉장고가 있었다. 내부도 스테인리스 재질이다. 내가 원하던 물건이었다.
이장우가 상태를 점검했다.
“냉장 시스템이 고장 났어.”
“우리에게 딱 맞는 물건이네. 우린 온장고를 만들어야 하니까.”
“온장고를 만들려면 내부에 열선을 깔아야겠네.”
“발전동에서 동파 방지용 열선을 봤어. 그걸 사용하면 될 거야.”
“열선은 언제 본 거야?”
“미리미리 봐 뒀지. 샐러드 컨테이너에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역시, 대표는 다르구나.”
이장우와 함께 창고에서 냉장고를 꺼냈다.
우린 기지 안으로 냉장고를 옮겼다.
그때 김도기 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을 마친 것 같았다.
그가 날 보고 물었다.
“뭘 하고 계신 건가요?”
“일하고 있습니다.”
김도기 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그에게 말했다.
“콩나물 재배기를 만들어 보려고요.”
“콩나물이요?”
“샐러드 컨테이너가 오기 전에 콩나물부터 재배해 볼 생각입니다.”
“남극에서 콩나물국을 먹게 생겼네요.”
“콩나물국만 먹을 순 없죠, 아귀찜도 하고 콩나물밥도 먹어야죠.”
“남극기지에서 아귀찜이라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김도기 대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대원들도 덩달아 웃었다.
최대한 빨리 콩나물 재배기를 완성하고 싶었다.
재배기만 완성하면 콩나물을 빠르게 수확할 수 있었다.
콩나물은 재배 시작 후 2~3일이면 쑥쑥 자란다.
5~6일이면 먹을 수 있었다.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남극 올림픽
남극에서 일 년 동안, 대원 한 명이 소비하는 식료품의 양은 1톤에 가깝다.
물과 음료까지 포함해서다.
주식인 쌀을 제외하고 생선, 과일 등은 통조림을 이용한다. 냉동한 고기와 건조한 식품도 주요한 식품 중 하나다.
식료품과 연구에 필요한 모든 물자는 쇄빙선과 항공기를 통해 들어온다.
남극에선 어떤 작물도 키울 수 없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 * *
난 이장우와 함께 콩나물 재배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콩나물 재배기를 만들기 위해 고장 냉장고를 활용했다.
냉장 기능을 상실한 스테인리스 재질의 냉장고를, 콩나물 재배를 위한 온장고로 변신시켜야 했다.
콩나물은 온도에 영향을 많이 받는 작물이다.
생육 초기에는 18도를 유지해야 한다. 생육 초기에 온도가 너무 높으면 부패하기 쉽다.
2일 정도 18도를 유지하다 20도로 온도를 높인다. 뿌리를 굵게 만드는 과정이다. 그 뒤로는 22도로 유지해 생육을 촉진한다.
“재배기 안에 열선을 다 깔았어.”
이장우가 재배기 내부에 열선을 연결했다. 전자식 온도계를 달아 내부 온도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이제 콩나물 재배기에 살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해.”
“살수 시스템?”
이장우가 열선을 설치하는 동안 난 살수 시스템에 대해서 고민했다.
최대한 물을 아끼는 방법을 찾았다.
고민 끝에 해답을 얻었다.
난 살수 시스템이 담긴 도면을 꺼냈다.
이장우는 도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도면을 집어넣고 있는 것 같았다.
“콩나물 재배기 내부에서 물을 뿌리는 구조네.”
“펌프로 물을 끌어 올려서 분사하는 구조야. 샐러드 컨테이너처럼 물 낭비가 없어.”
“펌프로 물을 끌어 올려 분사한 뒤에 바닥에 고인 물을 다시 끌어 올린다? 좋은 아이디어네. 농부가 아니라 엔지니어 해도 되겠어.”
“기계를 만지는 건 널 따라갈 수 없지.”
칭찬에 이장우가 보기 좋게 미소 지었다.
펌프를 이용한 자동 살수 시스템이다.
최대한 물을 낭비하지 않는 구조로 설계했다.
콩나물 재배에 온도 다음으로 중요한 게 물이다. 최소 3~4시간 만에 한 번씩 물을 줘야 한다.
자동 살수 시스템까지 갖추면 완벽한 콩나물 재배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럼 펌프만 달면 완성하는 건가?”
“살수 시스템만 설치하면 바로 콩나물을 재배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런데 펌프는 어디서 구하지?”
“이미 구해 놨어.”
“빠르네.”
이장우에게 펌프와 호스를 건넸다.
수도 시설을 담당하는 엔지니어에게 구한 물건이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여분의 펌프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펌프의 크기도 다양했다. 난 그중에서 가장 작은 것을 골랐다.
재배기 안에 딱 맞는 크기였다.
“설계대로 살수 시스템을 만들면 될 거야, 그동안 나도 할 일이 있고.”
“뭘 할 건데?”
“재배기 안에 들어갈 콩을 준비해 놓으려고.”
“가장 중요한 일을 깜빡했었네. 콩이 있어야 콩나물을 재배할 수 있는데 말이야.”
이장우가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작업장을 나가려는 순간이다.
“카메라는 이대로 놓고 갈 거야?”
이장우가 카메라를 보고 물었다.
작업장 안에 카메라를 고정해 놓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그대로 놓고 가려고. 너 일하는 모습도 찍고.”
이장우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불편하면 꺼 줄까?”
“아니야, 괜찮아. 그대로 놔둬.”
남극에서 촬영한 영상은 훗날 값지게 쓰일 것이다. 방송을 통해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을 알릴 수 있었다.
대규모 펀딩을 모으는 데도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장우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불편을 감수했다.
* * *
주방에서 은재민 조리장을 만났다.
그에게 받을 물건이 있었다.
“덕명 씨가 부탁한 대두입니다.”
은재민이 콩이 담긴 바구니를 꺼냈다.
콩나물을 재배하는 데 보통 흰콩과 노란 대두를 사용한다. 검은콩으로도 콩나물을 재배할 수 있지만, 미관상 좋지 않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난 노란 대두를 이용해 콩나물을 재배할 계획이다.
그가 나에게 노란 콩을 건네며 물었다.
“정말 이곳에서 콩나물이 자랄까요?”
“계획대로 된다면 문제없을 겁니다. 조만간 콩나물 요리도 할 수 있을 거고요.”
“역시 전문가라 다르네요. 샐러드 컨테이너도 기대가 큽니다.”
은재민은 눈을 반짝였다.
“혹시 플라스틱 통도 쓸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 쓰세요.”
난 주방에 있는 플라스틱 통을 하나 골랐다.
콩을 물에 담가둘 통이다.
콩을 물에 3~4시간 정도 담가 두면 발아가 촉진된다.
콩을 물에 담가두고 발전동으로 갔다.
발전동에서는 발전기와 정수 시설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난 발전동을 관리하는 엔지니어에게 물었다.
“발전기 옆에 콩나물 재배기를 놓을 생각인데 괜찮을까요?”
“크기가 얼만 한가요?”
“냉장고만 합니다.”
“그 정도 크기라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샐러드가 아닌 콩나물을 키우시네요?”
“샐러드 컨테이너가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려서요. 그 전에 한번 시도해 보는 겁니다.”
발전기 옆에 콩나물 재배기를 놓는 이유는 두 가지다.
콩나물 재배기는 물의 온도까지 제어하진 못하기 때문에, 발전기를 돌릴 때 발생하는 열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콩나물이 자라는 데 적당한 수온을 맞춰 줄 것 같았다. 이곳엔 정화 시설까지 옆에 있어서 콩나물 재배에 사용한 물을 내보내는 데도 유리했다.
정화 시설을 담당하는 엔지니어에게도 협조를 요청했다.
* * *
다음날, 이장우와 함께 콩나물 재배기를 발전기 옆에 설치했다.
콩나물 재배기에 전원과 호스를 연결했다. 호스는 두 개였다. 재배에 사용할 물을 받을 호스와 정화 시설로 보낼 호스다.
저녁까지 작업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물에 담가 둔 콩을 재배기 안에 넣었다.
“이제 콩나물이 자라는 걸 기다리는 일만 남은 건가?”
이장우가 웃으며 물었다.
그때였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우리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김도기 대장이 날 보고 있었다.
“이게 그 콩나물 재배기인가요?”
그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콩나물 재배기를 바라보았다.
“한번 열어 봐도 되나요?”
“물론이죠.”
김도기 대장이 콩나물 재배기가 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내부가 따뜻하네요.”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도록 설계됐습니다.”
“내부에 호스가 달려 있네요?”
“반복해서 물을 뿌릴 수 있는 장치죠. 살수한 물을 다시 끌어 사용해서 물 낭비가 없습니다.”
“그럼 콩만 넣어 주면 콩나물이 되는 거네요?”
“가끔 물도 갈아 줘야 합니다.”
“대단합니다!”
김도기 대장은 감탄한 얼굴이다.
그는 콩나물 재배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대원 중 하나가 김도기를 찾아왔다.
“대장님, 곧 송별회가 있습니다.”
“곧 가겠습니다. 먼저 가 계세요.”
김도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송별회가 있습니다. 덕명 씨와 장우 씨도 참석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오기 전 남극 기지를 지키고 있던 대원들이 내일 떠난다.
그들을 떠나보내는 송별회다.
나와 이장우가 콩나물 재배기를 만드는 동안 다른 대원들은 인수인계 작업을 마쳤다.
남극 기지에 온 지 며칠 안 돼서 송별회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대원이 강당에 모였다.
김도기 대장이 마이크를 들었다.
“그동안 남극 대한 기지에서 애써 주신 강찬일 대장님과 대원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저와 함께 온 대원들이 여러분들의 자리를 대신할 겁니다. 떠나는 대원들을 위해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김도기가 인사를 마쳤다. 대원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조리장 은재민은 떠나는 동료들을 위해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했다.
메인 음식은 언양식 불고기였다. 첫날 먹었던 참치 회도 보였다.
남극 기지에서는 참치 회가 빠지지 않았다.
해동만 하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불고기 맛이 끝내주네.”
이장우의 젓가락질이 멈추질 않았다. 그의 말대로 불고기 맛이 좋았다.
다들 참치 회는 손도 대지 않았다. 달콤한 불고기가 모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오늘은 술이 없네요.”
대원 중 하나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술보다 더 좋은 걸 준비했으니 기대하라고.”
도상현 부대장이 말했다.
술이 없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떠나는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이동 중에 안전사고가 날 것을 대비한 것이다.
다른 이벤트가 있다는 말은 전해 듣지 못했다.
뭘 준비했는지 궁금했다.
식사를 마치자 대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농구대부터 탁구대까지 운동 기구를 설치하고 있었다.
도상현 부대장이 대원들에게 말했다.
“오늘, 남극 올림픽을 개최할 예정입니다.”
기존에 있던 대원들은 남극 올림픽이란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남극 올림픽은 전통으로 내려오는 친선 활동이었다.
올림픽이라고 이름 붙이기엔 사이즈가 작았다.
종목은 탁구, 농구, 제기차기, 투호 이렇게 네 가지였다.
“무조건 한 종목은 신청해야 합니다.”
도상현 부대장이 말했다.
한 종목이 아니라 모든 종목에 다 참가할 수도 있었다.
“저렇게 조그만 농구대로 농구를 한다고?”
이장우가 작은 농구대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고 보니 진짜 농구가 아니었다.
골대에 공을 넣는 미니 게임이다.
대부분 간단하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이었다.
부상의 위험에 있는 스포츠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 종목만큼은 제대로 구색을 갖췄다.
바로 탁구다.
“덕명이 넌 뭘 신청할 거야?”
“당연히 탁구.”
“그럴 줄 알았지. 결승전에서 보자고.”
이장우와 난 탁구를 신청했다.
탁구는 남극 올림픽의 꽃이기도 했다.
모든 종목을 끝낸 후에 탁구 토너먼트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드디어 세상에서 가장 별난 올림픽이 시작됐다.
제기차기에서 헛발이 나오고, 투호 막대기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대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순위 따윈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모두 웃고 떠들며 극지의 고단함을 달래고 있었다.
드디어 남극 올림픽의 피날레를 장식할 탁구대회가 열렸다.
제기차기와 투호를 할 때와는 눈빛이 달랐다.
토너먼트가 시작되자 대원들은 손을 불끈 쥐고 경기를 관전했다.
탁구는 5세트가 기본 규칙이지만 남극 올림픽은 단판 승부였다.
치열한 경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내 차례도 돌아왔다.
난 첫 상대로 김도기 대장을 만났다.
탁구 라켓은 쥐는 방법에 따라 펜홀더 그립과 셰이크핸드 그립으로 나뉜다.
펜홀더 그립은 라켓의 단면만을 사용한다. 공격 시 손목 사용이 매우 용이하지만, 포핸드와 백핸드 전환이 느린 단점이 있다.
셰이크핸드 그립은 탁구 라켓 양면을 다 이용할 수 있어 빠르게 대응할 수 있지만, 라켓을 손가락 3개로 지탱해야 하므로 난이도가 높았다.
난 펜홀더 그립을 사용했다. 김도기는 셰이크핸드 그립이다.
시작부터 결승전이나 다름없었다.
김도기 대장은 공을 자유자재로 다뤘다. 내 발은 쉴 틈이 없었다.
스텝을 밟는 기술을 연마하지 않았다면 패했을지도 모른다.
1점 차로 내가 이겼다.
김도기 대장이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대원중 몇몇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벽에 걸린 명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남극 올림픽 1등 수상자가 적혀 있었다.
김도기 대장은 남극 올림픽 탁구 대회에서 5번이나 1등을 한 이력이 있었다.
탁구 토너먼트는 계속됐다.
마지막 상대는 이장우였다.
그의 예언대로 결승에서 붙었다.
이장우가 공을 들고 말했다.
“진짜 결승에서 붙었네.”
“긴장해야 할 거야. 단판 승부니까.”
이장우도 나와 같은 펜홀더 그립이다. 창대 창의 대결이다.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대원들은 숨을 죽이고 경기를 지켜봤다.
탁구대를 날아다니던 공이 멈췄다.
“휴, 우리 대표님은 탁구 실력도 무시무시하네.”
이장우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1등 상품입니다.”
도상현 부대장이 상품을 건넸다.
“그거 누구랑 똑 닮았는데.”
이장우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1등 상품은 귀여운 펭귄 인형이다.
“2등 상품도 있습니다.”
이장우는 깜짝 놀란 얼굴로 인형을 받았다.
다른 종목엔 2등 상품이 없었다.
그의 품에 바다표범 인형이 들어왔다.
인형 표정이 이장우와 닮아 보였다.
“그 인형도 누구랑 똑 닮았는데.”
내 말에 이장우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렇게 남극 올림픽이 끝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