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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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 남기남 과장의 호출이 있었다.

그는 용건을 딱히 말하진 않았다. 급한 용건이 있다고 했다.

그저 중간 점검을 위한 자리라고 여겼다.

남기남은 회의실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얼굴이 굳어 있었다.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남극으로 가는 인원 중 한 명을 줄여주셔야겠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남극으로 보낸 뒤, 나와 동료들은 남극 대한기지 대원들과 함께 남극으로 이동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 중에서 남극으로 가기로 한 멤버는 나와 민요한 그리고 이장우, 세 사람이었다.

“대한기지 대원이 한 명 더 추가됐습니다.”

지리산 농부보다 대한기지 대원이 먼저였다. 지리산 농부들은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와 함께 그곳에 석 달간 상주하기로 돼 있었다.

남극 대한기지 대원들은 그곳에서 무려 12개월을 있어야 했다.

남극 대한기지 대원들은 크게 통신과 의료 등을 담당하는 총무반과 기계설비와 발전을 담당하는 유지반 그리고 기상, 대기, 해양을 연구하는 연구반으로 구성됐다.

일 년에 한 번씩 분야별로 인수인계가 이뤄진다.

“대원중에 식물학자 한 명이 더 포함됐습니다. 약속한 인원을 보장해 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남극은 서울에서 1만 2,740㎞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가는 길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전용기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일반 항공기로는 입장조차 불가능했다.

“김덕명 씨는 무조건 가주셔야 합니다.”

남기남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단 한 명이 가야 한다면 내가 가야 한다는 눈빛이다.

“혹시, 방송국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나요?”

“협조 공문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방송팀은 어떻게 할 계획인가요?”

“한국해양과학기술원에서 거절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남극 대한기지는 기후변화와 해양연구 등 특수한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다.

방송국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남기남은 마지막 용건을 말했다.

“그리고 남극으로 가기 전에 훈련이 있습니다.”

“훈련이요?”

처음 듣는 내용이다. 훈련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저도 오늘 전달받았습니다. 이번에 새로 생긴 훈련입니다.”

“어떤 훈련인가요?”

“생존 훈련입니다.”

작년에 남극 기지에서 생긴 조난 사고 때문이다. 남극 대한기지 대원 중 한 명이 조난 사고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 때문에 생긴 훈련이었다.

“김덕명 씨와 함께 갈 동료분도 참석하셔야 합니다.”

남기남은 말을 마치고 회의실을 나갔다.

나와 함께 남극으로 갈 기술진은 단 한 명밖에 허락되지 않았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최민성 피디에게 연락이 왔다.

“혹시 시간이 되시나요?”

방송팀은 남극 입장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역시 내용을 알고 있었다.

최민성은 읍소하듯 만날 것을 요청했다.

그는 내가 있는 곳으로 당장 오겠다고 말했다.

난 잠시 시간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최민성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 급하게 달려온 게 느껴졌다.

그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공문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남극 대원이 우선이라며.”

“아쉽게 됐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김덕명 씨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부탁인가요?”

최민성 피디는 가방에서 작은 카메라를 꺼냈다.

“이 카메라를 부탁해도 될까요?”

최민성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방법이다.

내가 카메라를 들길 원했다. 남극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과정을 내가 직접 찍는 것이다.

“어려운 부탁인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리산 농부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한다고 생각하시고 찍으면 어떨까요?”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뭔가요?”

그가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최민성 피디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중에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무슨 다큐멘터리인가요?”

“김덕명 씨와 지리산 농부들입니다. 이번 방송을 제작하며 개인적으로 관심이 생겼습니다. 이번 남극 이야기를 듣고, 더 욕심이 생겼죠.”

“저희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뭘 보여주고 싶은지 여쭤도 될까요?”

“청년 농부의 아름다운 성공 이야기입니다.”

“비행기 태우시는 건가요?”

“아니요,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처음엔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알고 고민됐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전문적으로 촬영을 배운 적은 없습니다.”

“제가 몇 가지 팁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규칙만 알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최민성 피디의 표정이 밝아졌다.

난 남극 일기를 영상에 담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 * *

난 곧장 샐러드 컨테이너 제작 현장으로 이동했다.

민요한과 이장우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밥 먹었어?”

이장우가 짜장면을 먹으며 물었다.

“아니, 안 먹었지.”

“하나 더 시킬까?”

“그래, 하나 더 시켜줘.”

이장우가 전화를 거는 사이 민요한이 물었다.

“다녀온 일은 잘됐어요?”

“작은 문제가 하나 생겼어요.”

“문제요?”

이장우도 문제라는 말에 날 쳐다보았다.

난 그들에게 변화된 상황에 대해 말했다. 남극에 갈 인원이 줄어든 사실과 훈련을 받는 일까지.

말이 끝나자마자 민요한이 물었다.

“남극에 가는 사람은 무조건 생존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건가요?”

“무조건 받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거, 해병대 훈련 같은 건가요?”

“아마도 비슷할 겁니다.”

민요한은 인원이 줄어든 것보다 생존 훈련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두려운 것 같았다.

이장우는 표정 변화 없이 짜장면을 먹고 있었다.

“저랑 장우 씨 중에 한 명만 가야 한다고요?”

민요한이 고민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네, 둘 중 한 명만 가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저보다 장우 씨가 가는 게 맞을 거 같아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생각해보니 저까지 남극으로 떠나면 전문가가 하나도 없잖아요. 샐러드 컨테이너를 봐줄 사람도 필요할 테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때 조용히 짜장면을 먹고 있던 이장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민요한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장우 씨, 왜 웃으세요?”

“혹시 생존 훈련 때문에 그러는가 해서요.”

“그거와는 전혀 상관없어요!”

발끈하며 강조해서 말하는 걸 들으니, 진짜로 생존 훈련이 무서운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생존 훈련을 받는 이유는 남극에서 사망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남극에서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몰랐다.

민요한이 두려움에 떠는 진짜 이유다.

“요한 씨 말대로 이곳에 전문가가 한 명 상주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남극은 저와 장우가 가겠습니다.”

“저도 대표님과 생각이 같아요.”

민요한은 격하게 동의했다.

이장우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 * *

고애주 작가와 마지막 방송을 약속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이미 녹화를 끝냈고, 난 금민서와 함께 스튜디오에 나왔다.

“전에 출연했던 이기석 농부가 상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연근 과자와 연잎차로요.”

금민서가 내게 물었다.

“네,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화면에 이기석이 등장했다.

그는 시청자와 제작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모두 김덕명 씨 덕입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금민서가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어서 최근에 촬영된 영상이 나왔다.

낙농업을 하는 여자 농부다.

최근 우유를 납품하던 업체가 도산하는 바람에 곤란에 처한 상태였다.

고애주는 일부러 낙농업을 하는 농부를 선택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위기에 처한 농부에게 지리산 농부들의 치즈 공법을 전수했다.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유제품이다.

설강인과 설민주도 함께 도왔다.

금민서는 설민주가 만드는 치즈를 보며 말했다.

“저도 치즈 한 조각 먹어보고 싶어요.”

녹화된 영상이 끝났을 때였다.

화면에서 샐러드 컨테이너와 남극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대본에 없던 내용이다.

금민서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았다.

그녀가 화면을 보며 말했다.

“이건 저희 제작진이 김덕명 씨를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

“선물이요?”

“이번에 남극에 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민성 피디가 날 보며 웃고 있었다. 그의 옆에 고애주 작가가 있었다.

평소엔 스튜디오 촬영에 오지 않던 그녀다.

금민서가 날 보고 물었다.

“남극에 가는 이유를 시청자들에게 말씀해주세요.”

난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

“남극에서 샐러드를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샐러드요?”

금민서는 깜찍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리액션이 좋았다.

“남극 대한기지 대원들에게 신선한 샐러드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남극에서 샐러드가 자라는 모습도 보여주실 건가요?”

난 최민성 피디와 눈을 마주쳤다. 그가 쓴 대사 같았다.

“당연히 보여드려야죠.”

마지막 방송은 그렇게 끝났다.

* * *

남극 기지에 보낼 샐러드 컨테이너가 완성됐다.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확인 작업을 거쳤다.

“이제 더 확인할 거 없는 거지?”

난 이장우에게 물었다.

“벌써 몇 번째 묻는 거야? 한 번만 더 물으면 백번도 넘겠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확인해야 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배에 태워 보내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저도 몇 번이나 확인했어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민요한도 거들었다.

난 그 후에도 몇 번을 더 확인했다.

이제 정말 샐러드 컨테이너를 보낼 순간이 됐다.

드디어 샐러드 컨테이너를 배에 실었다.

컨테이너가 먼저 남극으로 떠났다.

배에는 남극 대한기지 대원들이 사용할 생필품과 식량도 함께 있었다.

떠나는 배를 보며 이장우가 물었다.

“그나저나 내일이 그날인가?”

“맞아, 내일이 바로 그날이야.”

“단단히 각오해야겠네.”

“군대 다시 간다고 생각해야 할 거야.”

난 웃으며 말했다.

곧 생존 훈련이 예정돼 있었다.

생존 훈련과 만취 테스트

생존 훈련 하루 전날이다.

이장우는 나와 함께 하동에 머물고 있었다.

생존 훈련을 앞두고 우린 바쁘게 움직였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떠나보낸 뒤였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샐러드 컨테이너에 관한 매뉴얼부터 유지보수에 따른 설명서도 만들어야 했다.

우리가 떠난 후에는 남극 대원들이 스스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가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업을 끝내고 이장우가 기분 좋게 말했다.

“생맥주 한잔할까?”

“웬일이야? 네가 술을 다 권하고.”

“나도 생맥주는 가끔 한 잔씩 마신다고.”

이장우가 웃으며 말했다.

그와 함께 호프집을 찾았다.

우린 생맥주를 시원하게 한잔했다.

“사람 달라졌네.”

“뭐가?”

“예전엔 술이라면 질색했잖아?”

“그럴 때도 있었지. 네 덕에 살아난 적도 있었고.”

이장우의 얼굴에 미소가 묻어났다.

그와는 군대 동기로 2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사이다.

그때만 해도 이장우는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그가 말한 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군대 선임들과 외박을 나와서 벌어진 사건이다.

부대로 복귀전 술자리가 있었다.

이장우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며 거절했다. 외박이라고 해서 계급이 사라진 건 아니다.

짓궂은 선임들은 계속해서 술을 권했다. 이장우의 얼굴이 창백해질 때쯤에 내가 나섰다.

그의 술까지 다 마시겠다고 한 것이다. 선임들은 날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때부터 술 내기가 시작됐다.

난 기분 좋게 술을 마시면 취하는 편이다. 하지만 긴장한 상태로 먹기 시작하면 잘 취하지 않는다.

난 그들 모두를 상대했다.

선임들은 내기에서 졌다.

“그날 네가 했던 말 생각나?”

이장우가 날 보며 물었다.

“술을 진탕 마셨는데도 멀쩡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어.”

“내가 뭐라고 했는데?”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일 중 하나가 술 내기야, 라고.”

“바른말 했네.”

이장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맥주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적당히 하자. 내일부터 훈련 시작이니까.”

“긴장되나 봐?”

“긴장은 무슨, 간만에 몸 좀 푸는 거지.”

* * *

다음날, 이장우와 함께 단체 버스를 탔다. 버스엔 남극으로 떠날 대원들도 함께였다.

이장우와 나를 제외하고 15명의 대원이고, 모두 남자였다. 남극 기지에서 임무를 교대할 기술자와 연구자들이다.

훈련 장소로 가는 도중 중년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대장 김도기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생존 훈련을 받게 됐습니다. 생존 훈련을 하는 이유는 위기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디 안전하게 훈련을 받기 바랍니다.”

남극 대장은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김도기는 말이 길지 않았다. 용건만 간단하게 하는 타입 같았다.

버스가 위병소를 지났다. 베레모를 쓴 군인들과 특공여단 마크가 보였다.

“정말 군대에 다시 가는 기분이네.”

이장우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군인들이 우릴 안내했다.

침상을 배정받고 군복까지 받았다.

“이거 유격복이잖아?”

이장우가 군복을 보고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연병장에 붉은 모자를 쓴 남자가 있었다.

“오늘부터 일주일 동안 여러분과 함께할 조교입니다. 군대 다녀오신 분은 알겠지만, 유격훈련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모두 긴장하십시오.”

시작부터 선착순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러니한 건 아직 선착순 실력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PT체조가 끝나자마자 헬기 레펠장으로 이동했다.

11m에 높이에서 레펠을 이용해 하강하는 훈련이다.

남극에도 헬기가 있었다. 긴급한 상황에 대비하려는 것 같았다.

헬기 모형에서 로프를 타고 뛰어내렸다. 대원 중 하나가 겁을 먹었다.

그를 진정시킨 건 조교가 아니었다.

남극 대장 김도기였다.

그는 침착하게 대원을 안정시켰다. 결국, 대원은 로프를 잡고 모형 밑으로 뛰어내는 일에 성공했다.

김도기는 대장다웠다. 중년의 나이에도 군말하지 않고 열심히 훈련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훈련에 익숙해졌다. 입소 첫날 거북이걸음으로 가던 시간도 정상적으로 가기 시작했다.

유격장에서 취사장까지 뛰어가는 일도 낯설지 않았다.

가파른 비탈길을 뛰어올라 밥을 먹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 * *

일주일간의 지상 훈련이 끝났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린 포항 앞바다로 이동했다. 그곳에 해병대 해양 훈련장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산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생존 훈련이다.

“고무보트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해병대 조교가 말했다.

그는 친절하게 고무보트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특공여단의 조교보다 더 심했다.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이장우가 조용히 말했다.

“왜, 많이 힘들어?”

“힘들긴, 이 정도는 껌이지.”

이장우가 웃으며 말했다. 대원들도 처음과 달리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고무보트를 들고 백사장을 뛸 때도 힘이 넘쳤다.

남극 대장 김도기도 지치지 않은 체력을 보였다.

해양 훈련장은 지상처럼 숙소가 좋지 않았다.

내무반의 침상은 호텔이었다.

우린 바닷가 앞에 커다란 천막을 치고 생활했다.

모래사장 위에 야영 침대를 놓고 지냈다.

훈련을 마치면 모두 쿨쿨 곯아떨어졌다.

바닷가에서의 일주일도 금방 지나갔다.

생존 훈련의 마지막 날 회식이 있었다.

남극 대장 김도기가 대원들 앞에 섰다.

“모두 고생 많았습니다. 내일이면 퇴소입니다. 여러분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텐트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인근 식당에서 배달을 나온 것 같았다.

텐트 안에 음식이 깔리기 시작했다.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술이 박스째로 준비돼 있었다.

소주에 맥주, 거기에 막걸리까지 술의 종류도 다양했다.

“자 모두 잔을 채우세요.”

김도기 대장이 술잔을 들었다. 처음엔 그저 임무 완수 기념 축하 파티라고만 생각했다.

힘든 훈련을 마치고 기분 좋게 한잔한다고 생각했다.

나와 이장우도 즐거운 마음으로 술을 마셨다.

처음엔 술이 술술 들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김도기 대장의 태도가 수상쩍었다.

그는 끊임없이 술을 권했다.

그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장우가 손사래를 칠 정도다.

오래전 이장우와 함께 외박을 나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술 때문에 사건이 벌어졌다.

난 이장우에게 사인을 보냈다. 이제 술은 입에 대지 말라는 신호다.

이장우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난 고개를 돌려 대원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는데, 대장의 권유로 계속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만하시죠.”

난 김도기에게 말했다.

김도기가 날 노려봤다.

“이건 남극 대원들의 통과 의례기도 합니다.”

“그럼 제가 다른 사람들 몫까지 마시죠.”

김도기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날카롭게 빛났다.

그때부터 남극 대장과의 대작이 시작됐다.

이장우는 긴장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린 말 없이 술을 마셨다.

한 잔 두 잔 세 잔... 술이 끝도 없이 들어갔다.

김도기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대원들은 이미 만취한 상태였다.

모든 대원이 술에 취해 쓰러져 있었다.

이장우도 잠을 이기지 못했다.

나와 대장만 술잔을 기울였다.

“주량이 어마어마하시네요.”

김도기 대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대장님도 만만치 않으시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떨까요? 술 내기는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니까요.”

그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미친 듯이 술을 권하던 남자가 할 말이 아니었다.

나도 더 마시고 싶지 않았다.

이장우를 침대에 눕히고 나도 자리에 누웠다.

술을 그렇게 마셨는데도 정신이 말짱했다.

긴장했던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남극 대장 김도기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모범생처럼 보이던 남자가 미친 듯 술을 권하는 악당으로 돌변했다.

처음엔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헬기 레펠장에서 대원을 안정시키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런 그가 돌변하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텐트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바닷가를 거닐고 있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보였다.

“아직 안 주무셨네요?”

남극 대장 김도기다. 그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네, 잠이 안 와서요.”

우리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정적을 깬 건 김도기였다.

“벌써 10년째 남극을 다니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네요.”

“무리하게 술을 권한 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왜 그렇게 술을 권한 거죠?”

“지금 있는 대원들은 일 년을 함께 지낼 사람들이죠. 막상 남극에 도착하면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는 대원도 나옵니다. 술을 먹고 사고를 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죠. 주사가 심한 대원을 걸러내려고 한 겁니다.”

남극 대원들은 고약한 환경 속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일을 마치고 퇴근한 후에도 대원들과 함께 지내야 했다.

사소한 갈등이 빈번하다고 한다. 술로 인해 문제가 커진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극지에서 벌어진 폭행 사건이 뉴스에 보도될 정도였으니.

대원 간의 불화는 자연재해만큼이나 큰 문제였다.

대장 김도기는 미리 그 문제를 차단하려고 한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가긴 하네요. 그런데 방법이 좀 지나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만약 주사가 심한 대원이 있다면 데려가지 않을 작정이었나요?”

“그런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이번 기수엔 주사가 심한 대원은 없네요.”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제야 긴장이 풀렸다.

방법이 과한 건 사실이었지만, 이상한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안전한 임무 수행을 위한 그만의 방법이었다.

“이제야 긴장이 풀리네요.”

“긴장이 풀린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순식간에 졸음이 쏟아졌다. 백사장에 누워 잠이 든 것 같다.

일어나 보니 침상이다.

“덕명아 일어나, 아침이야.”

이장우가 날 흔들어 깨웠다.

이제야 생존 훈련이 끝났다.

* * *

공항으로 떠나기 전날 조촐한 파티가 있었다.

가족과 지리산 농부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100일만 있다 돌아올 건데 너무 거창하네요.”

“우리 대표님이 먼 길 떠나는 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모두들 따라 웃었다.

그때였다.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이 시간에.”

어머니가 밖으로 나갔다.

곧 반가운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님!”

곶감 명인 황유신이다.

“내일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 왔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오시다니요.”

“이거 받아라.”

“이게 뭐예요?”

“감식초랑 이것저것 좀 챙겼다.”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다 쓸데가 있을 거다.”

황유신의 마음이 느껴졌다.

모두 함께 따뜻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부터 방송을 통해 만났던 농부들까지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모두 나의 건강과 샐러드 컨테이너의 성공을 기원했다.

선물 보따리가 거실에 소복하게 쌓였다.

물건보다 사람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 * *

다음날,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이장우와 이동춘이 보였다.

두 부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우야, 첫째도 안전이고. 둘째도 안전이야. 그럼 셋째는 뭐겠어?”

“안전이요.”

“그래, 맞아. 아주 잘 아는구나.”

“아버지, 그만 좀 하세요.”

이장우가 창피한 듯 주변을 살폈다.

“덕명, 언제 왔어?”

이장우는 그제야 내가 온 걸 발견했다.

“아까부터 왔었지, 아버님 잘 다녀오겠습니다.”

“오셨군요, 첫째도 안전이고, 둘째도 안전입니다.”

“아버지 제발 그만 좀 하세요.”

이장우가 이동춘의 팔을 잡고 말했다.

이동춘도 이장우의 손을 잡았다. 그는 말없이 아들을 바라보았다.

눈으로도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때 김도기 대장이 캐리어를 끌고 왔다.

“이제 갈까요?”

그의 뒤에 대원들이 보였다.

우린 대원들과 합류했다.

남극으로 떠나는 긴 여정이 시작됐다.

세상 끝에 서다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인천에서 14시간을 날아왔다. 5시간 후에 다시 비행기를 탄다.

다음 목적지는 칠레 산티아고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뒤에는 또 푼타 아레나스라는 곳으로 국내선으로 이동해야 한다. 푼타 아레나스는 남극의 관문인 곳이다.

“이제 비행기가 지긋지긋하다.”

이장우가 산티아고로 떠나는 비행기에 타며 말했다. 칠레에 도착하면 또 비행기를 타야 했다.

남극으로 가는 길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김도기 대장은 칠레까지 말없이 우릴 인도했다. 칠레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하자 그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산티아고에서 하룻밤 묶고 떠날 예정입니다. 이곳에 제가 잘 아는 한식당이 있습니다. 오늘 저녁은 그곳에서 먹죠.”

한식당이란 말에 대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우린 이틀 동안 기내식만 먹었다. 제대로 된 밥은 구경조차 못 한 상태다.

산티아고에서 공항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순간이다.

“저게 안데스산맥일까?”

이장우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멀리 보이는 산맥 위에 하얀 빙하가 덮여 있었다. 이국적인 풍경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날이 이렇게 더운데 빙하가 있는 게 신기하네.”

칠레 산티아고는 남반구에 있어 계절이 한국과 정반대다.

11월인 지금 칠레는 초여름 날씨였다.

남극도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지금이 남극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했다.

최고 영하 50도까지 떨어지는 겨울에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여름이라고 해도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진 않았다.

호텔에 짐을 풀고 김도기를 따라 한식당으로 이동했다.

칠레에서 보는 한글 간판이 정겨웠다.

‘한라산’이란 이름의 한식당이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국인만이 알 수 있는 특유의 냄새가 코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청국장에서 나는 고린내다.

“칠레에서 청국장을 먹게 될 줄이야!”

이장우뿐만 아니라 다른 대원들도 놀란 얼굴이다.

김도기는 주인과 잠시 담소를 나누곤 우리에게 말했다.

“이곳 청국장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비지나 된장찌개도 있으니 식성에 맞게 주문하면 됩니다.”

‘한라산’은 현지에서 재배한 콩으로 청국장을 만든다고 했다.

남극으로 가기 전에 먹는 음식이 청국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와 이장우는 자리에 앉아 메뉴를 고민했다.

“덕명이 넌 뭐 먹을 거야?”

“그래도 이 집에서 가장 잘하는 걸 먹어야겠지.”

“넌 청국장 잘 안 먹잖아?”

“여기선 된장찌개를 먹어도 맛이 다 똑같을 거 같아.”

난 웃으며 말했다. 이장우도 말뜻을 이해한 듯했다.

청국장 향이 너무 진해서 다른 음식도 모두 같은 맛이 날 것 같았다.

우린 다른 사람들처럼 청국장을 시켰다.

뚝배기에 청국장이 나왔다.

며칠 만에 먹어 보는 제대로 된 식사였다.

“잘 먹겠습니다.”

이장우와 난 동시에 숟가락을 들었다.

“맛이 생각보다 괜찮네. 칠레에서 먹어서 그런가?”

이장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코가 마비된 건지 특유의 구린내도 나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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