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 농업 지원 센터에서는 특강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민요한이 강의를 진행했다.
수경재배와 첨단 농업이 주제였다.
강의실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청년 농부 지원 사업에서 아쉽게 탈락한 사람들이다.
민요한은 청년 농부 지원 사업에서 사용한 샐러드 컨테이너를 중심으로 강의했다.
“샐러드 컨테이너는 외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작물이 자라는 데 필요한 광원, 온도, 습도, 이산화탄소 농도, 양분을 인공으로 제어할 수 있습니다.”
빔프로젝터 화면에 샐러드 컨테이너 내부가 보였다.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내부 환경을 제어할 수도 있죠.”
민요한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창을 열었다.
[빛 8,500lux]
[온도 17도]
[상대습도 범위 66%]
[이산화탄소 농도 400ppm]
[물의 흐름 정상]
[영양액 정상]
수강생들은 화면을 통해 내용을 확인했다.
다들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경재배는 미래의 농업 기술입니다. 토양을 사용하지 않고 고형배지와 물을 이용하죠. 작물이 자라는 데 필요한 양분도 적정 농도로 용해한 배양액만을 씁니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의 눈이 빛났다. 모두 수경재배와 첨단 농업에 빠져들었다.
강의가 끝날 무렵 민요한이 물었다.
“혹시 질문 있나요?”
강의실 끝에 있던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민요한은 손을 든 남자를 지목했다.
“말씀하세요.”
남자가 일어났다.
민요한은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질문자는 한기탁이다.
민요한에게 부탁해 강의를 듣고 있었다.
한기탁이 물었다.
“수경재배의 단점은 없나요?”
“물론 단점도 있습니다. 전기가 끊어지면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전기세도 무시하지 못하고요.”
민요한은 빔프로젝터 화면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다시 띄웠다.
컨테이너 상단에 태양열 집열판이 보였다.
“샐러드 컨테이너에 태양열 집열판을 달아서 단점을 보완했습니다.”
그의 말에 수강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기탁의 질문이 이어졌다.
“수경재배는 샐러드만 가능한가요?”
한기탁은 화면에 떠 있는 샐러드 컨테이너를 보며 물었다.
“샐러드뿐만 아니라 다른 작물도 가능합니다. 물론 모든 작물이 가능한 건 아니지만요.”
“그럼 샐러드를 재배한 이유는 뭔가요?”
“다른 작물에 비해서 키우기가 쉽다는 게 이유입니다. 재배도 빠르고요.”
“혹시, 인삼도 가능한가요?”
“인삼이요?”
* * *
다음 출연자 현우진은 순천에 살고 있었다.
난 고애주와 순천역에서 만났다.
“덕명 씨와 전국을 유랑하는 기분이네요.”
“그러네요, 방송이 끝날 때쯤이면 안 가본 곳이 없겠어요.”
현우진은 순천역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다.
고애주에게 짐이 제법 있었다.
“뭘 그렇게 가져오셨어요? 그 안에 행운의 과자라도 있나요?”
옥천으로 가는 길에 그녀가 행운의 과자를 건넸던 게 생각났다.
“아니요, 아쉽게도 행운의 과자는 없네요.”
“그런데 뭘 그렇게 많이 가져오셨어요?”
난 빵빵한 종이봉투를 보며 물었다.
“과자는 맞추셨어요. 아이들에게 줄 과자를 좀 준비했어요.”
“6남매에게 줄 물건이군요.”
“저도 형제자매가 많았던 경험이 있어서... 과자 하나 먹는 것도 전쟁이었어요.”
“과자 전쟁이라니, 재미있네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고애주는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덕명 씨는 형제가 없죠?”
“네, 아쉽게도 저 혼자입니다.”
“그래서 모르는 거예요, 치열한 과자 전쟁을.”
“그렇게나 치열한가요?”
가는 동안에 유쾌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고애주는 어린 시절에 있었던 사건을 이야기하다 사 온 과자를 하나 꺼냈다.
“그땐 과자 하나 더 먹으려고 별짓을 다 했어요.”
“설마 드시게요?”
“네, 하나 먹으려고요.”
“그거 6남매에게 줄 물건인데...”
“하나만 먹을 거예요.”
고애주는 웃으며 과자를 까먹었다.
“지금 먹어도 맛있네요, 덕명 씨도 하나 드릴까요?”
고애주가 밝은 얼굴로 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과자 맛은 좋았다.
“거의 다 온 거 같아요.”
고애주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린 현우진이 사는 동네에 도착했다.
“잠깐 차 좀 세울게요.”
난 차를 세웠다.
“왜요? 무슨 일 있나요?”
“간판이 보여서요.”
“간판이요?”
바로 앞에 밭이 있었다. 간판에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현우진 인삼 농장]
현우진이 인삼을 재배했던 곳 같았다.
“현우진 씨 인삼 농장 같아요.”
고애주는 표정이 어두웠다. 간판만이 이곳이 인삼 농장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은 인삼밭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지경이다. 이기석의 농지보다 황량해 보였다.
그때였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아이 중 하나가 나에게 물었다.
“아저씨 방송에 나오는 분이죠?”
다들 표정이 해맑았다.
“혹시, 우리 집 찾아오신 거 아니에요?”
정확하게 6명의 아이다.
현우진의 아이들 같았다.
한 남자가 우릴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6년 동안의 노력
깡마른 체구의 남자가 내 앞에 섰다.
6명의 아이 중 하나가 남자의 다리에 코알라처럼 매달렸다.
남자가 우릴 향해 물었다.
“방송국에서 나오셨나요?”
“전화 드렸던 고애주 작가입니다. 이쪽은 김덕명 씨고요.”
“반갑습니다. 현우진이라고 합니다.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예상한 대로 현우진이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이 거칠었다.
“오시자마자 농장부터 보셨네요.”
그가 망가진 인삼밭을 보며 말했다.
“작년 집중호우 때 모두 물에 잠겼습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쏟아 부었죠,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기상이변으로 내린 폭우였다. 양수기를 동원해서 물을 퍼내며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폭우가 휩쓸고 지나간 인삼밭은 처참했다. 수확을 앞둔 6년 근 인삼은 모두 폐기하고 말았다.
6년 동안 지은 농사가 허망하게 끝나버린 것이다.
“집으로 가시죠.”
현우진은 집으로 안내했다. 집으로 가자는 말에 아이들이 앞서나갔다.
“아이들이 참 귀엽네요.”
“제 삶의 낙이자 희망이죠.”
그가 방송을 신청하며 썼던 글이 떠올랐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절대 무너질 수 없는 남자다.
인삼밭과 5분 거리에 그의 집이 있었다. 마당이 넓은 집이다.
한 여인이 가마솥에 뭔가를 삶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그녀가 달려왔다.
“어서 오세요,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우진의 아내 성미희다.
고애주는 평상에 가져온 과자를 풀었다.
“과자다.”
과자를 풀자 아이들이 참새처럼 달려들었다.
“인사드리고 먹어야지.”
성미희가 아이들을 보고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6명의 아이가 동시에 배꼽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 중 가장 큰 사내아이가 과자를 골고루 나눴다. 고애주의 예상과 달리 과자 전쟁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시죠.”
우린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벽면은 아이들의 사진으로 도배가 돼 있었다.
“방송을 봤습니다. 양봉 농가를 도운 일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저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고요.”
현우진이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희망이란 단어를 말할 때 그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성미희가 차를 들고 들어왔다. 그녀가 찻잔을 건네는 순간 현우진이 물었다.
“인삼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그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고애주와 성미희도 내 입을 쳐다봤다.
“저도 인삼을 생각해 보긴 했습니다. 그런데 인삼을 다시 시작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텐데 괜찮겠습니까?”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양봉을 다시 시작했던 황규대와 전혀 다른 케이스다.
그는 꿀벌을 분양받고 이동식 양봉으로 승부를 봤다.
인삼은 재배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수확을 하기 위해서는 6년 동안 기다려야 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많이 고민했습니다, 심지어 다른 농사를 지어볼 생각도 했고요. 하지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현우진은 말을 끝내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성미희도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저도 남편과 같은 생각입니다. 저희 부부가 오랜 시간 노력한 일이기도 하고요.”
성미희는 방구석에 있던 책장에서 책을 한 권 집었다.
“이 책으로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녀가 내게 책을 건넸다.
[인삼 재배 백과사전]
얼마나 봤는지 책장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부부의 노력이 느껴졌다.
고애주도 닳고 닳은 책을 보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저희 부부의 욕심일지도 모릅니다. 더 좋은 방법을 제시해 주신다면 의견을 따를 용의도 있습니다.”
현우진은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앞에 두고.”
성미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직 점심 전이시죠? 식사하셔야죠.”
괜찮다고 말할 시간도 없었다. 그녀는 번개처럼 움직였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현우진은 부드러운 말투로 권했다.
고애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시선은 여전히 낡은 책에 꽂혀 있었다.
밥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와 시작할 농사가 고민됐다.
인삼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인삼 농사를 성공적으로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수익을 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고민하는 지점이다.
“오늘 점심은 특식인데 입에 맞을까 모르겠네요.”
“특식이요?”
고애주가 물었다. 특식이란 말에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다.
나도 궁금했다.
“아이들이 워낙 좋아해서요, 오늘은 날도 좋은데 밖에서 드시죠.”
마당에 있는 평상에 점심상을 차렸다.
아이들이 밥상을 차리는 일을 거들었다.
작은 아이부터 큰아이까지 각자 맡은 일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았다.
앙증맞고 모습이 보기 좋았다.
성미희가 가마솥 뚜껑을 열자 아이들은 탄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성미희가 가마솥에 있던 음식을 꺼냈다.
“술빵이네요.”
가마솥에서 찌고 있던 건 술빵이었다.
성미희는 술빵을 잘라 접시에 담았다.
내 앞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술빵이 놓였다. 아이들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방금 과자를 먹었어도 또 배가 고픈 모양이다.
“어서 드세요.”
부부가 동시에 말했다. 내가 빵에 손을 대자 아이들도 그제야 빵을 먹었다.
어머니도 가끔 술빵을 만들어 주셨다.
어릴 때 술빵에 막걸리가 들어 있다는 말을 듣고 먹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빵에 술이 들어가 먹기 싫다고 하자 어머니가 알려 주었다.
막걸리는 밀가루 반죽을 발효시켜주는 역할만 한다고. 막걸리의 알코올은 빵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는 종종 술빵을 맛있게 먹었다.
성미희가 만든 술빵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던 맛이 느껴졌다.
“맛이 정말 좋네요. 밖에서 사 먹는 것하고 달라요. 더 담백하달까?”
고애주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남편과 제가 직접 만든 막걸리로 만들었어요.”
성미희가 웃으며 말했다.
“막걸리도 만드세요?”
“아르바이트로 하고 있어요.”
“아르바이트요?”
현우진과 성미희는 막걸리 양조장에 다니고 있었다.
인삼밭이 망가지고 난 뒤에 하는 일이었다.
아이들 때문이라도 부부는 안정적인 수익이 필요했다. 남의 집 품앗이로는 한계가 있었다.
막걸리 공장 일은 새벽에 시작해 오전 중에 끝났다. 오늘도 일을 하고 왔다고 했다.
가족의 녹록지 않은 삶에 마음이 아팠지만, 동시에 부부의 힘이 느껴졌다.
“더 드세요.”
“아니요, 충분히 먹었습니다.”
고애주와 난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왔다.
6명의 아이가 배웅을 나왔다.
성미희는 술빵을 포장해 주었다.
“일정이 잡히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 * *
고애주를 순천역에 내려줬다. 그녀는 술빵을 챙겼다. 술빵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짐을 다 챙기고는 내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좀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거 같아요.”
“현우진 씨가 원하는 대로 인삼을 재배해 보면 어떨까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어요.”
“잘 아시겠지만, 저희에게 시간은 금이라서...”
고애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녀를 보내고, 난 다시 현우진의 동네로 향했다.
이기석의 경우처럼 주변 환경을 이용할 게 있는지 살피고 싶었다.
이기석에겐 고민 끝에 연(蓮) 재배를 추천했다.
주변 환경을 고려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때와 달리 주변 환경을 이용해서 할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고민하던 중에 전화가 왔다.
순천에 사는 예나은이다.
나에게 곶감을 배운 청년 농부.
“순천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누구한테 들었어요?”
“현식이한테 들었죠.”
예나은은 방현식과 오누이처럼 지내고 있었다.
방현식이 힘들 때 예나은은 자기 일처럼 도왔다.
참기름을 짤 때는 밤을 새워 일을 도왔다.
“저 일하는데 한번 구경 오세요.”
“궁금하네요, 무슨 일을 하는지?”
“직접 와서 확인하세요.”
난 예나은이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현우진의 마을과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일을 하고 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겼다.
예나은은 학원 강사를 하다 귀농한 여자다. 곶감 농사는 시골에서 정착하기 위해서 배웠던 것인데, 곶감 농사 말고도 다른 일을 하는 게 신기했다.
난 작은 매장 앞에 차를 세웠다.
<유기농 마을>이란 간판이 붙은 매장이다.
예나은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가까운 곳에 있었어요. 그런데 여긴 뭐 하는 곳이죠?”
“마을 사람들이 농사지은 유기농 농산물을 파는 곳이에요.”
작지만 알찬 매장이다. 곡식, 채소, 과일, 달걀, 특용 작물까지 없는 게 없었다.
“곶감 농사는 안 하고 여기서 일하고 있는 거예요?”
“곶감 농사도 하고 있죠. 이 일과 병행하고 있어요.”
“어떻게 여기서 일하게 된 건지... 궁금하네요?”
“귀농인 모임이 이렇게 커졌어요.”
“귀농인 모임이요?”
순천 지역에 귀농한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다.
예나은은 귀농인 모임에 주기적으로 참여했다. 모두 유기농 농산물에 관심을 둔 사람들이었다.
다들 열정적으로 유기농 농산물을 생산하고 있었지만 팔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직접 매장을 열었다.
예나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함께 협력해 매장을 열게 됐다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여긴 누구라도 물건을 팔 수 있는 건가요?”
“한 가지 제한 사항이 있긴 해요.”
“그게 뭔가요?”
“반드시 유기농 농산물이어야 해요.”
그녀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웃음이 나려는 걸 애써 참았다.
“그런데 손님이 별로 없네요.”
“아직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진 않았어요.”
“내가 좀 도와줄까요?”
“어떻게요?”
예나은의 눈에서 불이 켜진 듯 빛났다.
“방송 나올 때 소개해 줄 수도 있죠.”
“정말이요? 그러면 정말 좋을 거 같아요!”
빈말이 아니다. 현우진이 생산한 물건도 이곳에서 팔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순천에서 돌아와 농업 지원 센터에 주차를 하려는 순간이다.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순천엔 잘 다녀오셨어요?”
방현식이 나에게 물었다. 그의 뒤로 새로 산 트럭이 보였다.
“응, 잘 다녀왔어. 예나은 씨도 만났고. 네가 알려줬다고 그러던데?”
“형이 순천 간다는 소리를 듣고 전화했죠.”
“너도 어디 다녀오는 모양인데?”
“참깨 가지러 예천에 좀 다녀왔어요.”
“트럭이 생겨서 편리해졌네.”
“맞아요, 정말 편해요.”
방현식이 해맑게 웃었다.
“지금은 어디 가는 거야?”
“샐러드 컨테이너에 일이 있어서요.”
“왜 무슨 문제 있어?”
“문제는 없어요. 배양액을 넣어 줄 때가 돼서요.”
그는 트럭에서 배양액 통을 꺼냈다.
“요즘 일이 너무 재미있어요. 돈도 잘 벌리고. 특히 샐러드 컨테이너는 재미가 쏠쏠해요. 형이 말한 대로 게임을 하는 것 같기도 해요.”
“밭에서 농사짓는 거랑 다르긴 하지?”
“비교가 안 돼요. 밭에서 농사짓는 건 중노동이라면 샐러드 컨테이너 일은 거의 취미 수준인걸요.”
순간, 인삼도 수경 재배가 가능한지 궁금했다. 샐러드 컨테이너처럼 인삼을 재배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뭐가 그리 재미있어?”
한기탁이 날 보고 물었다.
“현식이도 있었네?”
“전 이제 일하러 가볼게요.”
방현식은 배양액을 든 통을 들고 움직였다.
그가 사라지자 한기탁이 고개를 돌렸다.
“순천엔 잘 다녀왔어?”
난 다녀온 내용을 간단하게 말했다. 현우진이 인삼을 고집한다는 내용을 듣고 그가 말했다.
“그럴 거 같았어.”
“어떻게 알았어요?”
“6년 동안이나 애썼던 일인데, 쉽게 포기될 것 같지 않았어.”
그의 말대로다. 무려 6년을 고생한 일이다. 사전에 준비한 과정까지 생각하면 6년도 더 넘을 것이다.
“인삼, 그거 해보면 어때?”
한기탁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수경 재배가 가능하다면 해봐도 좋을 거 같아요.”
방현식을 보고 했던 생각이다. 수경 재배를 한다면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집중호우가 내린다고 해도 문제가 없었다.
수익을 보기까지 시간이 좀 걸리지만, 그것도 해결할 방법이 있을 거 같았다.
한기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랑 똑같은 생각이네.”
“그런데, 수경 재배가 가능할지는 따져봐야 할 거 같아요.”
“혹시, 민요한 씨에 물어볼 생각이야?”
뭔가 꿍꿍이가 있는 표정이다.
“나에게 뭐 숨기고 있는 거 있죠?”
“대표 아니랄까 봐, 눈치 하나 빠르네.”
“털어놔요.”
“내가 이미 민요한 씨에게 물어봤어. 인삼 재배와 관련해서.”
“뭐라고 그래요?”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대됐다.
새싹인삼 재배
한기탁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수경재배로 인삼도 키울 수 있어!”
“정말이요?”
민요한과 인삼 재배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검증 끝에 답을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일반 인삼은 아니야.”
“일반 인삼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죠?”
“직접 보면 알 거야.”
한기탁은 날 샐러드 컨테이너로 안내했다. 모종을 키우는 컨테이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민요한이 작물을 돌보고 있었다. 샐러드 모종이 아니었다.
못 보던 푸른 잎사귀가 눈에 띄었다.
민요한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오셨네요.”
“혹시, 인삼을 재배하고 있는 건가요?”
“새싹인삼입니다.”
“새싹인삼이요?”
난 두 눈을 크게 뜨고 새싹인삼을 바라보았다. 크기가 작았다. 꼭 인삼 미니어처 같아 보였다.
“새싹인삼은 약용채소죠.”
새싹인삼은 흔히 알고 있는 인삼과 달랐다. 인삼 모종을 이용해 수경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다.
새싹인삼 한 뿌리에는 사포닌이 1∼4㎎ 들어있다. 잎과 줄기에도 사포닌이 8~12㎎가량 들어있다.
사포닌 성분이 있지만, 약보다는 채소로 많이 쓰인다. 나물처럼 식감이 부드러워 샐러드, 비빔밥, 녹즙 등 다양한 곳에 쓰이는 약용채소다.
“어린 인삼 모종으로 수경재배를 시도해 봤습니다. 생각보다 성장이 빨랐습니다. 2주 정도 키우면 수확이 가능합니다.”
민요한은 새싹인삼을 한 뿌리 뽑았다.
“한 번 드셔보세요.”
난 새싹인삼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 먹었다. 부드러운 식감이 느껴졌다.
“인삼 맛하고 똑같네요.”
민요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런 걸 언제?”
“한 팀장님 덕분이죠.”
민요한은 내 뒤에 있는 한기탁을 가리켰다. 한기탁은 헛기침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한기탁이 수업 시간에 수경재배로 인삼을 키울 수 있는지 물었던 게 시작이었다.
처음에 민요한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인삼의 독특한 특성 때문이었다.
인삼은 아주 느리게 영양분을 흡수한다. 무 한 뿌리가 1년 동안 흡수하는 영양분과 인삼이 6년 동안 흡수하는 영양소가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수경재배는 영양액으로 작물을 재배한다.
영양 과잉으로 인삼이 죽거나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들기 힘들다. 인삼을 재배하기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새싹인삼은 인삼 모종으로 2주 동안 수경재배하면 수확할 수 있었다.
영양 과잉에 노출될 위험이 없었다.
“난 그저 묻기만 했을 뿐이야, 새싹인삼을 키워낸 건 민요한 씨고.”
민요한이 새싹인삼을 알게 된 건 특강 덕이었다. 그는 농업 지원 센터에서 수경 재배 특강을 맡고 있었다.
수경 재배 특강 말고도 다양한 강좌가 진행 중이었다. 강좌 중 새싹인삼 재배에 관한 것도 있었다.
새싹인삼은 농촌진흥청에서 새롭게 소개하는 농산물 중 하나였다.
“호기심에 새싹인삼 강좌를 들어봤습니다. 곧바로 수경 재배를 시도해 봤고요.”
민요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샐러드 컨테이너에 새싹인삼을 재배할 수 있는 거네요?”
“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문제가 생각보다 쉽게 해결됐다.
새싹인삼은 일반 인삼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현우진이 재배하기 적합한 작물이다.
난 당장 고애주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새싹인삼에 대해서 말하자 고애주는 기뻐했다.
무엇보다 빠른 수확이 가능하다는 말에 놀라워했다.
난 촬영을 하기 전에 준비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촬영 당일에 새싹인삼 재배 시설을 공개하겠다고 전했다.
* * *
모든 준비를 끝내고 촬영을 시작했다. 최민성 피디와 촬영 팀이 현우진의 집에 도착했다.
오늘은 금민서도 현장에 있었다. 지금까지 스튜디오에서 화면을 보며 이야기했지만, 오늘은 함께 현장에 나왔다.
고애주 작가의 요청이었다.
촬영 팀은 현우진과 그의 가족을 먼저 카메라에 담았다.
최민성 피디는 아이들의 모습에 주목했다.
6남매는 어려운 상황에도 천진하고 밝았다.
아이들은 부모님과 함께 텃밭에서 채소를 돌봤다.
고사리 손이지만 채소를 가꾸는 솜씨가 훌륭했다.
아이들 촬영을 마치고, 최민성 피디가 금민서에게 사인을 보냈다.
“오늘은 제가 김덕명 씨와 함께 현장에 직접 나왔습니다. 오늘의 출연자는 누구인가요?”
“인삼을 재배하던 현우진 씨입니다.”
현우진과 성미희 부부가 등장했다.
금민서가 그들에게 말했다.
“현우진 씨와 성미희 씨는 인삼 농사를 지었다고 들었어요.”
“네, 6년 넘게 인삼 농사를 지었습니다.”
부부가 동시에 답했다.
“집중호우로 인삼 농사가 어렵게 됐다는 말도 들었고요.”
금민서는 그들의 딱한 사연을 말하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현우진은 씩씩한 얼굴로 답했다.
금민서도 그의 말에 화답했다.
“아버님이 힘이 넘치세요. 뭐든 다 잘하실 거 같아요. 김덕명 씨가 두 분을 위해서 준비한 게 있다고요?”
그녀가 바통을 나에게 넘겼다.
“인삼밭에 준비한 물건이 있습니다.”
“뭘 준비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현우진과 성미희도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부부에겐 비밀이었다.
우린 함께 인삼밭으로 이동했다.
인삼밭에 초록색 컨테이너가 있었다.
“이게 뭔가요?”
금민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인삼을 재배하는 시설입니다.”
인삼을 재배한다는 말에 현우진이 놀란 듯했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인삼을 재배한다고요?”
우린 컨테이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수경재배 시설과 함께 새싹인삼이 보였다.
“진짜 인삼이네요! 그런데 일반 인삼과 좀 다르게 생겼네요?”
“새싹인삼입니다.”
난 농촌진흥청에서 새롭게 도입한 새싹인삼에 대해서 말했다.
“어린 묘삼을 이용해 수경 재배가 가능합니다.”
2주 만에 수확이 가능하다는 말에 현우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공부했던 책에는 없던 내용이다.
“정말, 2주 만에 수확이 가능한 건가요?”
“네, 2주면 충분합니다.”
난 부부에게 수경 재배 시설을 관리하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인삼 농사를 지을 수 있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딴 세상에 온 거 같아요.”
성미희는 새싹인삼 재배 시설을 보고 말했다.
“재배한 새싹인삼을 판매할 곳도 섭외해 놨습니다.”
“판매할 곳도요?”
성미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판매 장소는 예나은이 관리하는 <유기농 마을>이다. 예나은에겐 이미 말을 해 둔 상태였다.
부부의 집과 근거리에 있어서 물건을 유통하기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인삼을 다시 시작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현우진의 얼굴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성미희의 눈에도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금민서도 눈물을 글썽였다.
컨테이너에서 나오자 6남매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부부에게 안겼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면이 카메라에 담겼다.
* * *
촬영을 무사히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다.
난 이장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컨테이너는 잘 전달했어?”
“컨테이너 상태가 아주 좋았어. 나날이 기술이 좋아지는 거 같아.”
“조금씩 업그레이드되고 있지.”
이장우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제작한 샐러드 컨테이너가 3대나 있었다.
그중 한 대를 인삼 재배가 가능하게 개조했다.
촬영 전, 고애주 작가와 최민성 피디와도 사전에 조율한 내용이었다.
“네가 말한 요양병원에도 샐러드 컨테이너 납품했어.”
“고생했어.”
“이러다 평생 샐러드 컨테이너만 만드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나중엔 샐러드 컨테이너가 아니라 샐러드 농장을 만들어야지. 세계에서 가장 큰 샐러드 농장으로.”
“어서 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통화를 마치고, 요양병원으로 핸들을 꺾었다.
납품만 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요양병원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대표님, 여기요.”
김상철이 손을 흔들었다.
“제가 늦었나요?”
“아니요, 제가 좀 일찍 왔어요.”
김상철이 웃으며 말했다. 그와 함께 병원장실로 들어갔다.
병원장 박만수가 우릴 반겼다.
“샐러드 컨테이너는 잘 받았습니다.”
박만수가 선물을 받은 아이 같았다.
“그런데 함께 오신 분은 누군가요?”
“지리산 농부들의 동료입니다. 샐러드 컨테이너 전문가죠.”
샐러드 컨테이너 전문가라는 말에 김상철은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이분이 샐러드 컨테이너 사용 방법에 대해서 교육을 할 겁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그럼 제 선생님이군요.”
이번 건은 샐러드만 납품하는 일이 아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의 사용 방법을 숙지해야 했다.
새싹인삼을 재배하는 현우진에게도 사람을 붙여줄 생각이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한번 볼 수 있을까요?”
김상철이 박만수에게 물었다.
박만수가 안내했다. 요양병원 옆에 공터가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는 그곳에 놓여 있었다.
김상철은 익숙한 자세로 컨테이너 내부를 살폈다.
그는 박만수에게 샐러드 컨테이너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박만수는 성실한 학생으로 변신했다.
난 김상철이 교육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는 정말 전문가가 다 돼 있었다.
설명을 마치고 김상철이 말했다.
“내일부터 모종을 심을 예정입니다. 모종은 제가 준비해 오겠습니다.”
“벌써 기대가 되네요.”
박만수는 눈을 반짝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길에 박만수가 물었다.
“그런데, 샐러드 컨테이너에 다른 작물을 심어도 되나요?”
김상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샐러드 말고 다른 작물을 재배한 적은 없었다.
난 박만수를 보며 말했다.
“새싹인삼도 가능합니다.”
“새싹인삼이라니, 그런 것도 가능하군요. 나중에 꼭 도전해 보고 싶네요.”
박만수가 작별인사를 하고 김상철과 둘만이 남았다.
김상철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
“샐러드 말고 다른 작물도 가능한지 몰랐어요.”
“모든 작물을 다 재배할 순 없지만, 가능한 작물도 있습니다.”
“저도 나중에 시간이 되면 배우고 싶네요.”
“네, 언제든지요.”
* * *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하동 군청의 강민수 비서실장이다.
청년 농부 지원 사업은 이미 종료했다.
그가 어떤 이유로 전화했는지 궁금했다.
“김덕명입니다. 전화하셨네요?”
“많이 바쁘시죠?”
“전화기를 무음으로 해놔서 이제야 봤습니다.”
“혹시, 저녁 식사 같이할 수 있을까요?”
뭔가 중요한 일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흔쾌히 승낙했다.
강민수는 약속한 장소에 먼저와 있었다.
나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셨군요, 일은 잘되고 있죠?”
“네, 청년 농부 지원 사업 이후로 아주 잘 되고 있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판매하고 있다는 말도 있던데 사실인가?”
“오늘 요양병원에 납품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김덕명 씨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저를요?”
“수경재배 시설이 꼭 필요한 사람이죠.”
강민수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때 방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강민수와 아는 사람 같았다.
“이쪽이 내가 말한 김덕명 씨.”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남기남이라고 합니다.”
“김덕명입니다.”
“이제 다 모였으니 식사하면서 이야기할까요?”
강민수가 벨을 누르자 준비한 음식이 나왔다.
종업원이 나가자 남자가 말했다.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드는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참,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제 명함입니다.”
남기남은 농촌진흥청의 농업기술과장이다.
명함을 보자 호기심이 들었다.
“강민수 비서실장과는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입니다. 김덕명 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제가 특별히 부탁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절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수경 재배 시설을 구축할 계획이 있습니다. 컨테이너 형태의 수경 재배 시설이 필요합니다.”
“그런 일이라면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장소가 좀 특별합니다.”
“어디에 컨테이너를 설치할 생각인가요?”
남기남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남극입니다.”
남극 프로젝트
“남극이라고요?”
잠시 귀를 의심했다.
“남극 맞습니다.”
남기남은 차분한 말투로 남극 프로젝트에 대해서 말했다.
남극 대한기지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일이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에서 농촌진흥청에 요청한 사항이었다.
남극 기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식량과 공산품 등을 보급 받았다. 고기 등의 냉동이 가능한 식품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신선한 채소는 조달이 불가능했다.
미국과 유럽 등의 나라는 샐러드 컨테이너를 이용해 채소를 재배하고 있었다.
한국 대원들도 채소를 재배할 설비가 있기를 바랐다.
그들의 건의 사항은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을 거쳐 농촌진흥청으로 들어갔다.
그는 마지막으로 프로젝트의 참여 방법에 대해서 말했다.
“남극 프로젝트는 지명경쟁입찰을 할 예정입니다.”
지명경쟁입찰은 특수한 설비가 있는 자가 아니면 계약의 목적을 달성하기 곤란한 경우 하는 입찰 방식이다.
“몇몇 업체를 지명할 예정입니다. 지리산 농부들도 그중 하나가 될 겁니다.”
“다른 업체도 참여하는 건가요?”
“네, 몇몇 업체를 지명할 생각입니다.”
남기남은 말끝을 흐렸다. 현재 국내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생산할 수 있는 업체는 지리산 농부들이 유일하다.
지명경쟁입찰을 한다는 건 형식적인 내용임이 분명했다.
“지리산 농부들이 이번 입찰에 꼭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기남은 힘을 주어 말했다.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
“조만간 입찰이 있을 겁니다. 그때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좋습니다.”
그때 비서실장 강민수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식사하지요.”
밥을 먹는 동안은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내 마음은 이미 남극으로 가 있었다.
* * *
다음날, 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참석자는 한기탁과 민요한 그리고 이장우다.
“무슨 일이야? 이른 아침부터.”
한기탁은 회의 참석자를 둘러보며 물었다. 3명만 불러놓고 회의를 하는 게 궁금한 표정이다.
민요한과 이장우도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어제 제안을 하나 받았어요.”
“제안?”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일이에요.”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한다는 말에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다.
“샐러드 컨테이너 설치하는 일이야 뭐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이렇게 회의까지 소집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설치 장소가 좀 많이 특별해서예요.”
“특별한 장소라고요?”
민요한이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극 대한 기지예요.”
“헉, 남극 기지!”
한기탁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난 동료들에게 남극 프로젝트에 대해서 말했다. 모두 숨죽여 내 이야기를 들었다.
설명을 듣고, 한기탁이 말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남극에 설치한다니, 생각만 해도 놀라운데?”
“좋은 기회가 될 거 같아요.”
민요한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장우는 말이 없었다.
“장우, 넌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컨테이너를 생각하고 있었어. 남극 기지에 들어가려면 설비가 좀 달라야 할 거 같아서.”
역시, 기술자다웠다. 그의 말대로 남극 기지에 들어갈 샐러드 컨테이너는 설비가 달라야 했다.
남극 환경에 맞는 특수한 물건을 제작해야 한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덕명이 네가 원하던 펀딩도 수월하게 진행될 거 같은데...”
한기탁이 말했다. 다른 동료들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 눈빛이다.
민요한과 이장우도 대규모 식물공장 구축할 계획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민요한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의 기술력을 대외적으로 알릴 기회가 될 것 같네요.”
“그런데, 지명경쟁입찰을 하면 떨어질 수도 있는 건가? 경쟁이란 말이 걸려서.”
이장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업체들은 우리와 경쟁이 안 될 거야.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은 독보적이니까.”
“그건 그렇지.”
이장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일을 나눠서 진행할 예정입니다.”
모두 내 말에 주목했다.
입찰과 관련한 서류를 준비하는 건 한기탁이 맡았다.
새로운 컨테이너 디자인은 이장우와 민요한에게 맡겼다.
업무를 분장한 뒤 말했다.
“입찰 과정 프레젠테이션이 있어요. 그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럼 방송은 어떻게 할 거야?”
한기탁이 물었다.
“담당 피디와 작가를 만날 예정이에요. 그쪽도 피해 가지 않게 잘 처리할 거고요. 그럼 이제부터 각자 일을 시작해 주세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격적으로 지리산 농부들의 남극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 * *
며칠 뒤, 고애주 작가와 약속을 잡았다. 그녀에게 최민성 피디도 함께 봤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하겠다고 전했다.
만나기 전에 제작팀과 협의할 내용을 점검했다.
미리 준비해야 할 일도 있었다.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계획한 일을 모두 마치고 곧장 서울로 향했다.
방송국 회의실에서 고애주 작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이죠? 여기까지 오시고.”
“긴히 말씀 드릴 일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일이죠?”
고애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때 최민성 피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죠.”
“아닙니다, 이제 막 이야기를 꺼내려던 참이었습니다.”
최민성 피디도 자리를 잡았다.
난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일 때문에 방송을 계속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방송국에 오기 전 계약 사항 등을 점검했다.
계약을 체결할 때 약속한 사항이 하나 있었다.
특수한 상황에선 방송을 중단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지금이 바로 그 특수한 상황이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고애주는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남극을 가게 될 것 같습니다.”
난 그들에게 남극 프로젝트 건을 이야기했다.
고애주는 말을 다 듣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최민성의 반응은 좀 달랐다. 그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방송도 중요하지만, 저에게 큰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고애주는 안절부절못하는 눈치다.
난 준비한 문서를 꺼냈다.
“이게 뭔가요?”
고애주가 문서를 받고 물었다.
“저를 대신할 사람들을 섭외했습니다.”
“대신할 사람들이요?”
“저도 이 프로그램에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안을 마련해 왔습니다.”
고애주와 최민성은 문서를 살폈다.
“이분들은 모두 농업 명인들이시네요.”
“네, 저 대신 진행을 맡아 줄 명인들입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곶감의 명인 황유신부터 녹차의 임시백까지 스무 명이 넘는 명인들을 섭외했다.
고애주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이분들을 전부 섭외하신 건가요?”
“제 인맥을 총동원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방송 출연자 중엔 개인 사정이나 불미스러운 일로 중간에 그만두는 일도 많았다.
그때 가장 힘든 게 작가들이다. 새로운 사람을 섭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농업 전문가라면 더 힘들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분만 더 하시는 건 괜찮겠죠?”
고애주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 한 분 정도는 문제없을 겁니다.”
그녀는 그제야 안심이 된 듯했다.
“저는 좀 다른 부탁을 드리고 싶은데...”
최민성 피디가 날 보며 말했다. 남극 이야기를 꺼내던 순간부터 그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말씀하시죠.”
“남극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모습을 저희가 촬영해도 될까요?”
방송국 피디가 가질 만한 욕심이다.
“최 피디님은 일이 바쁘지 않나요?”
“물론, 제가 가긴 힘들 겁니다. 제작국에 말해서 기획 다큐멘터리를 건의해 보려고요.”
느낌이 좋았다. 남극에 샐러드 컨테이너를 설치하는 모습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방영된다면 파급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전 좋습니다.”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최민성 피디는 무척 기뻐했다.
“다만 제가 좋다고 끝나는 문제는 아닙니다. 농촌진흥청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 문제는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넘쳤다. 어떻게든 허락을 받아 낼 것 같았다.
“그동안 손발이 잘 맞았는데 아쉽네요.”
고애주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다음 출연자는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작가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 * *
남극 프로젝트에 대한 공고가 떴다.
지명 입찰자에 지리산 농부들도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을 포함해 총 다섯 개의 업체가 지명됐다.
난 우리와 경쟁할 업체들을 조사했다.
그중 샐러드 컨테이너를 제작한 업체는 한 곳도 없었다. 이제 막 수경재배를 시작하는 업체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긴장의 끈을 놓고 있지 않았다.
한기탁이 준비한 문서를 꼼꼼하게 살폈다.
문서엔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과 전문성이 상세하게 기술돼 있었다.
문서 안에는 민요한과 이장우가 디자인한 샐러드 컨테이너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남극에 설치할 샐러드 컨테이너였다.
보안사항은 블라인드 처리했다.
마지막으로 프레젠테이션이 남았다.
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챙겨서 농촌진흥청으로 들어갔다.
“지리산 농부들의 김덕명 대표입니다.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화면에 지리산 농부들이 제작한 샐러드 컨테이너가 등장했다.
지리산 농부들이 최초로 제작한 샐러드 컨테이너였다.
심사위원들은 화면에 비친 샐러드 컨테이너를 유심히 보았다.
“저희가 개발한 샐러드 컨테이너는 꾸준히 업그레이드됐습니다.”
난 화면을 넘겼다. 샐러드 컨테이너 지붕에 태양열 집열판이 달려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는 전원이 끊기면 모든 기능을 상실합니다. 태양열 집열판으로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화면이 넘어갔다.
샐러드 컨테이너 관리자 화면이 나왔다.
[빛 8,500lux]
[온도 18도]
[상대습도 범위 65%]
[이산화탄소 농도 400ppm]
[물의 흐름 정상]
[영양액 정상]
“샐러드 컨테이너는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내부 상태를 제어할 수 있습니다.”
“설마, 지금 보고 있는 화면이 작동 중인 모습인가요?”
심사위원 중 한 명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 실제로 작동 중인 샐러드 컨테이너입니다.”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난 계속해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최근엔 샐러드 컨테이너에서 다른 작물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화면에 새싹인삼이 자라는 모습이 보였다.
난 샐러드 컨테이너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말했다.
“저희의 기술력으로 샐러드와 새싹인삼을 재배할 수 있습니다. 남극의 대한기지 대원들도 신선한 채소를 먹게 될 겁니다.”
발표가 끝나자 심사위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막힘없이 모든 질문에 답했다.
* * *
남극 프로젝트 건의 결과 발표 날이다.
아직 결과가 나오진 않았다.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긴장됐다.
긴장도 풀 겸 지리산 농부들의 매장을 찾았다.
노해미의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오늘 결과 발표 날이에요.”
“해미 씨도 알고 있었군요.”
“당연하죠, 오늘만 기다렸는데.”
노해미가 김꽃님 할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할머니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봐도 그들이 말하는 건, 남극 프로젝트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결과 발표인가요?”
“대표님 잊으셨어요?”
“제가 뭘 잊었죠?”
“지리산 농부들이 출품한 치즈요.”
그제야 알아 들었다.
오늘이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의 결과 발표 날이다.
공교롭게도 남극 프로젝트의 결과 발표와 겹쳤다.
“결과 나왔어요.”
노해미가 노트북 화면을 보며 말했다.
우리 다 함께 화면을 응시했다.
“우리가 대상이에요.”
노해미가 두 팔을 들고 소리쳤다.
이기석이 만든 연근 과자는 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핸드폰에서 진동음이 느껴졌다.
남극 프로젝트의 결과도 도착했다.
[축하드립니다. 지리산 농부들이 이번 남극 프로젝트의 시행사로 선정되었음을 알립니다]
마지막 방송
남극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샐러드 컨테이너 제작이다.
사람은 비행기로 이동하지만, 샐러드 컨테이너는 배로 실어 보내야 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남극에 보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먼저 제작해야 하는 이유다.
이번 제작 과정엔 내가 책임자로 나섰다. 모든 게 완벽해야 했다.
작업한 컨테이너를 떠나보내면 돌이킬 수 없다.
이장우와 이동춘 부자 그리고 민요한도 함께 작업에 동원됐다.
“샐러드 컨테이너 내벽은 어떻게 할 거야?”
이장우에게 물었다.
남극의 환경에 맞게 샐러드 컨테이너를 제작해야 했다. 남극은 -40℃까지 기온이 떨어지는 곳이다. 열 손실을 최소로 해야 한다.
“내부에 우레탄을 붙일 생각이야.”
“두께는 어느 정도 할 생각이야?”
그때 민요한이 문서 한 장을 건넸다.
“모의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예요.”
온도에 따른 열 손실을 계산한 결과값들이다.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우레탄 두께는 최소 20㎝ 이상이어야 했다.
“컨테이너 내부가 많이 좁아지겠네요.”
“이 정도로 단열하지 않으면 작물 자라는 데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요.”
샐러드 컨테이너는 40피트였다.
길이 12미터에 높이가 2.6미터다.
작물을 재배하는 시설을 3단으로 쌓았다.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배지는 총 400개다.
컨테이너 하나당 400포기의 샐러드를 수확할 수 있었다.
내부에 우레탄을 붙이면 내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단열재 때문에 수확량이 좀 줄겠네요? 대략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배지가 100개 정도는 줄어들 겁니다.”
난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 정도 양이면 남극 연구원 1명이 하루 100g의 신선한 채소를 섭취할 수 있다.
넉넉한 양은 아니지만 부족하진 않았다.
연구원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난 샐러드 컨테이너의 LED 조명을 살폈다.
형광등과 LED의 조합으로 부족할 수 있는 광원을 보완했다.
“예정된 시간 안에 제작해야 해. 샐러드 컨테이너를 배로 먼저 보내야 하니까.”
난 이장우와 눈을 마주쳤다.
“무조건 시간을 맞출 거야, 걱정하지 마.”
이장우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동춘과 민요한도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