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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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민요한에게 연락이 왔다.

상의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양봉장에 있었다. 양봉 모자를 쓰고 벌의 상태를 관찰했다.

내가 왔는지도 모르고 일에 집중했다.

“언제 오셨어요?”

민요한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방금 왔습니다.”

민요한은 작업복을 벗고 하던 일을 마무리 지었다.

“김덕명 씨가 너무 바쁘셔서 양봉은 아버님께 배우고 있습니다.”

마침 아버지가 우리 옆을 지나갔다.

아버지는 민요한과 눈을 마주치며 보기 좋게 웃었다.

어느새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된 느낌이다.

“아버님이 참 재미있으세요. 꿀벌에 대해서도 잘 아시고.”

민요한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말씀하시고 싶은 게...?”

그가 날 부른 용건이 궁금했다.

“다른 게 아니라, 농업 지원 센터에서 요청이 들어와서요.”

“농업 지원 센터의 요청이요?”

농업 지원 센터에서 민요한에게 특별 요청이 들어왔다.

샐러드 컨테이너 특강이다.

민요한은 샐러드 컨테이너를 디자인한 사람이다.

청년 농부 지원 사업에서 교육을 맡기도 했다.

특강을 통해 더 많은 농부들에게 신지식을 나누려는 의도였다.

나 역시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민요한 씨가 원한다면 얼마든 하셔도 좋습니다. 물론 조건은 하나 있고요.”

“조건이요?”

“그때 말씀드린 수직재배 연구를 멈추지 않는 조건이요.”

“그 일이라면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습니다. 전 누구처럼 그렇게 바쁘지 않으니까요.”

민요한은 웃으며 말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눈 뒤 사무실로 들어갔다. 한기탁에게도 그에 따른 내용을 공유해야 했다.

“한 팀장님, 저 좀 잠깐.”

한기탁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했어.”

“연락이요?”

“내 이야기는 좀 나중에 하고 먼저 말해봐, 대표님 용건부터 듣는 게 순서니까.”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난 민요한의 이야기를 꺼냈다. 용건은 민요한이 특강을 하는 사실이 아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 지원 사업을 할 때 많은 사람이 몰렸다.

경쟁이 치열했고, 아쉽게 떨어진 사람들도 많았다.

난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요한 씨 특강할 때 지원 사업에서 누락된 사람들을 부르면 어떨까요?”

“그거 좋은 생각인데? 내가 지원 센터 소장님에게 말해볼게.”

“그리고 새로 제작하는 샐러드 컨테이너는 어떻게 되고 있어요?”

“조만간 컨테이너가 나올 거야.”

“그럼 이번 특강을 들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겠네요?”

“충분히 가능하지.”

이번에 제작하는 샐러드 컨테이너는 지리산 농부들이 주도적으로 하는 일이다.

지원 사업에 떨어진 이들에게도 기회를 줄 수 있었다.

“참, 선배 용건은 뭐였어요?”

“오늘 나랑 갈 데가 있어.”

“어디요?”

“우리 물건 받기로 한 곳.”

한기탁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갔다.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를 받기로 한 곳이다.

요양병원 원장이 나를 보고 싶어 했다.

한기탁과 함께 원장실에 들어갔다.

병원장이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박만수라고 합니다.”

인사를 나누자 그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그냥 샐러드만 받을 생각이었습니다만.”

병원장 박만수는 처음엔 그저 샐러드만 받을 생각이었다. 지금은 샐러드만 받는 게 아니라 샐러드 컨테이너까지 욕심이 난다고 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사게 되면 재배 방법도 배울 수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그가 우릴 부른 이유다.

그는 요양병원 안에서 샐러드를 직접 재배할 생각이었다.

“가능합니다,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죠.”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처음부터 무리하게 배울 생각은 없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 하나로 시작해 볼 생각입니다. 그러다 차츰 늘려갈 계획이고요.”

“샐러드 컨테이너를 관리할 사람은 누구인가요?”

“제가 직접 해 볼 생각입니다.”

“원장님께서 직접요?”

“작물 재배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직접 운영해보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다.

병원 안에서 유기농 작물을 직접 키우고 싶은 것이다.

여러모로 좋은 기회다.

샐러드만 파는 게 아니라 컨테이너까지 팔 수 있었다.

* * *

고애주 작가와 만나기로 한 날이다.

화개장터 매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오는 길에 이기석 씨 만나고 왔어요.”

그녀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농산물 대회에 출전할 아이템도 정했더라고요.”

“벌써요?”

“마을 분들이랑 똘똘 뭉쳐서 출전 상품도 만드셨더라고요.”

“잘됐네요, 대회에 참가할 상품은 뭐로 정했나요?”

고애주는 가방에서 종이봉투를 하나 꺼냈다.

“바로 이거에요.”

봉투를 열었다.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이게 뭔가요?”

“연근 과자요.”

연근이라고 하기엔 색이 진했다. 캐러멜처럼 진한 갈색이다. 표면은 조청을 발랐는지 강정처럼 투명하게 코팅이 돼 있었다.

“연근을 튀기고 조청을 발라서 말린 과자예요.”

“이런 건 처음 보네요.”

“네, 저도 처음 봤어요. 동네 사람들이 연근이며 연잎으로 여러 가지 실험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와중에 이 물건이 나오게 됐고요. 덕명 씨도 맛 한번 보세요.”

그녀가 내게 과자를 건넸다.

하나 들어 입에 넣어 봤다.

“진짜 과자처럼 아삭한 맛이 나네요.”

그때 노해미가 차를 들고 왔다. 그녀가 궁금한 눈빛으로 연근 과자를 바라보았다.

“해미 씨도 하나 드세요.”

난 그녀에게 연근 과자를 건넸다.

“맛이 어때요?”

“이게 뭐죠?”

“연근 과자에요.”

“연근으로 과자도 만들어요?”

노해미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맛은 좋네요. 김꽃님 할머니도 하나 드릴 게요.”

그녀는 김꽃님 할머니에게도 과자를 건넸다. 할머니도 좋은 반응을 보였다.

“생각보다 반응이 좋네요.”

“연잎차랑 연근 과자를 출품한다고 했어요.”

“두 개를 동시에요?”

“두 개까지는 문제가 없다고 했어요.”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다음 출연자 문제로 상의드릴 게 있어요.”

그녀는 이제부터 출연할 사람에 대해서 함께 결정하자고 말했다.

“지금 후보를 정하고 있어요. 세 명으로 압축할 생각입니다. 후보가 정해지면 그때 덕명 씨에게 보여드릴 계획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좋습니다.”

“그럼, 후보가 정해지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고애주는 용건을 마치고 매장을 나갔다.

노해미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이란 게 뭔가요?”

“아, 그거요?”

난 농산물 대전에 관하여 간단하게 소개했다.

노해미는 관심을 보였다. 이야기를 듣자마자 컴퓨터로 일정까지 확인했다.

내용을 다 확인하고 그녀가 말했다.

“혹시, 지리산 농부들도 참가해도 되나요?”

참가하고 싶다는 얼굴이다.

방송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말릴 이유가 없었다.

“물론이죠.”

“정말요? 목장 사람들에게 말해도 되는 거죠?”

“당연하죠.”

그녀는 뛸 듯이 기뻐했다. 김꽃님 할머니도 기뻐하는 그녀를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지리산 농부들은 우리 농산물 대전에 어떤 물건을 내놓을지 궁금했다.

조선시대 치즈

스튜디오 촬영이 시작됐다. 최민성 피디가 사인을 보냈다.

금민서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말했다.

“농부가 희망이다, 벌써 두 번째 출연자네요. 오늘도 스튜디오에는 김덕명 씨 나와 계십니다.”

“안녕하세요, 김덕명입니다.”

“오늘 소개해 주실 분은 누구인가요?”

“구례에 사는 이기석 농부입니다.”

화면에 이기석이 등장했다. 황무지처럼 변한 땅과 껍데기만 남은 양계장이 그의 처지를 말하고 있었다.

난 화면을 보며 이기석이 처한 상황을 말했다.

“유기농으로 벼농사를 하려고 노력했지만, 병충해 때문에 잘 안됐습니다. 조류 바이러스로 닭도 전부 살처분한 상황이었고요.”

“저런, 많이 힘드셨겠네요.”

금민서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럼 벼농사와 양계를 다시 시작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이기석 씨와 새로운 일에 도전했습니다.”

“아~ 그러셨어요? 새로운 일에 도전한 이유라도 있나요?”

벼농사는 다시 시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만약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양계업도 쉽지 않았다. 우선 비용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이기석의 어머니는 닭은 살처분하는 과정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간단하게 설명을 마치고 금민서에게 말했다.

“이기석 씨에게 벼를 대체할 수 있는 작물을 추천했습니다.”

“벼를 대체하는 작물이요?”

“연(蓮)입니다.”

“연꽃이 피는 연(蓮) 말씀인가요?”

“네, 바로 그 연(蓮)입니다.”

화면이 바뀌고 벼농사를 지었던 농지에 물이 차는 장면이 나왔다.

“저기에 연(蓮)을 심는 건가요?”

“네, 이기석 씨가 사는 마을에 큰 저수지에 있었습니다. 저수지 물을 이용해서 연(蓮)을 심는 장면이죠.”

금민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돼 연근 종자를 심고 있었다.

저수지 문제로 한운남과 갈등을 벌이는 화면은 없었다.

편집된 화면은 연잎차를 만드는 부분으로 이어졌다.

“저분은 녹차의 명인 임시백 선생님 아닌가요? 황금 미네랄 녹차로 장관상을 받은 분이시죠?”

임시백 선생님과 이기석을 위주로 화면이 보였다.

최민성 피디에게 요청한 사항이기도 했다.

이기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연잎차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네요.”

“연(蓮)은 물을 자정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연잎차는 사람의 피를 맑게 해줍니다.”

“정말이요? 저도 한번 먹어보고 싶네요.”

금민서가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미소 짓는 얼굴과 함께 화면이 교차했다.

이기석과 마을 사람이 함께 모여 열심히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저 화면은 어떤 장면인가요?”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만들고 있네요? 농특산물 대전에는 이기석 씨가 나가는 거 아닌가요?”

“마을 분들이 이기석 씨를 돕고 있는 겁니다.”

“정말이요? 이기석 씨가 사는 마을은 따뜻한 곳이네요. 시골인심이 살아 있어요.”

“네, 시골인심은 항상 넉넉하죠.”

“화면을 보다 보니까 인상적인 분도 계시네요. 편집한 화면인데도 열심히 하는 게 느껴지네요.”

금민서가 지목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한운남이다.

난 웃으며 말했다.

“한운남 씨입니다.”

“김덕명 씨도 알고 계시네요?”

“네, 저분이 허락을 안 했다면 연(蓮)을 재배할 수 없었으니까요.”

“허락이요?”

“저분이 바로 저수지 주인입니다.”

“그렇군요, 연(蓮)을 재배하려면 물이 많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금민서가 기억하고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면에서 사람들이 투표하는 장면이 나왔다.

“마을 분들이 투표를 하고 있네요?”

금민서는 투표 장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에 나갈 상품을 결정하는 모습이다.

투표가 끝나고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하~ 이렇게 해서 연근 과자로 결정된 거군요?”

금민서는 웃으며 말했다.

연근을 튀긴 후 조청을 바른 과자였다.

“먹음직스럽게 생겼어요.”

그녀는 연근 과자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연근 과자로 출품하기로 결정했나 봐요?”

“연잎차도 함께 출품할 계획입니다.”

“연잎차와 연근 과자라, 잘 어울릴 거 같아요. 혹시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 결과도 나오나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나중에 결과가 나오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스튜디오 녹화가 끝났다.

카메라 녹화 버튼이 꺼지자 금민서가 나에게 물었다.

“한운남 씨 때문에 상당히 고생했다고 들었어요. 저수지 물을 쓰지 못하게 했다면서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고애주 작가님에게 들었어요.”

“김덕명 씨가 해결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설득하신 거예요?”

다행히 고애주는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한운남 씨와 잘 아는 분이 있었어요.”

“복이 참 많으시네요.”

“금민서 씨를 만난 것도 복이죠.”

머릿속에서 금민서가 목장에서 명장면을 찍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 덕에 목장 유제품이 불티나게 팔렸었다.

* * *

촬영을 마치고 방송국 회의실로 들어갔다.

고애주 작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촬영은 잘 마치셨나요?”

“네, 덕분에 잘 마쳤습니다.”

“시청률이 꾸준히 오르고 있어요. 모두 덕명 씨 덕분이에요.”

“작가님의 공도 크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네요. 다음 출연하실 분들을 추려 봤어요.”

그녀가 문서를 건네며 말했다.

문서엔 세 명의 후보가 있었다.

“과수원과 오리농장 그리고 인삼 농사를 하시던 분들이네요.”

난 문서를 꼼꼼하게 살폈다. 딱한 사연에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다들 힘든 상황이시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세상에 왜 이렇게 힘든 사람들이 많은지...”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실 수 있나요?”

“시간은 드릴 수 있지만, 최대한 빨리 결정하셔야 해요.”

고애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까지면 될까요?”

“그 정도면 문제없을 거 같아요.”

고애주는 그제야 표정이 밝아졌다.

이렇게 출연자를 고르게 된 건 내 요청 때문이었다.

처음엔 양봉하는 농가라 부담이 없었다. 이기석을 경험하고 생각이 달라졌다.

난 모든 농사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대한 내가 가진 전문지식을 활용해 도울 수 있는 농부를 선택하고 싶었다.

* * *

하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해미에게 전화가 왔다.

“촬영은 끝나셨나요?”

“지금 촬영 끝내고 하동으로 가는 길이예요.”

“오는 길에 목장에 잠시 들려주실 수 있나요?”

“목장에 무슨 일이 있나요?”

“대표님이 봐주셔야 하는 일이 생겼어요.”

지리산 농부들도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에 출품할 상품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출품할 상품은 뭐로 정했나요?”

“그건 직접 와서 보시면 좋을 거 같아요.”

“그러죠.”

노해미의 목소리가 경쾌했다.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엔 출품 규정이 있었다.

이미 판매 중인 제품은 출품할 수 없다는 조건이다.

목장의 히트 상품들은 대전에 출품할 수 없다는 뜻이다.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야 했다.

분명 평범하거나 흔한 물건은 아닐 것 같았다.

저녁 늦은 시간에 목장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목장 식구들이 반겼다.

목장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기탁을 포함한 사무실 동료들도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죠?”

“역시 대표는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네.”

한기탁의 말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테이블에 시선이 꽂혔다. 뭔가가 베일에 싸여 있었다.

난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게 대전에 출품할 상품인가요?”

“네, 지리산 농부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상품이에요.”

설민주가 웃으며 말했다.

“저만 빼고 다 알고 계시겠네요, 이게 뭔지?”

“맞아요, 대표님 빼고 다 알고 있죠. 심지어 맛까지 봤고요.”

“저도 맛 좀 볼 수 있을까요?”

설민주는 베일을 벗겼다.

접시 위에 네모반듯한 모양의 노란 물체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노란색 쿠키처럼 보이기도 했다.

접시를 들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고소한 우유향이 났다.

“이게 뭔가요?”

“유락(乳酪)이에요.”

“유락이요? 생소한 단어네요.”

“조선 시대에 만들어 먹던 치즈예요.”

“조선 시대 치즈요?”

설민주는 유락(乳酪)에 대해서 말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수유치’라는 말이 나온다. 수유는 버터나 치즈를 부르는 말이다. 치는 벼슬아치를 가리킨다.

‘수유치’는 치즈를 만드는 사람을 의미한다.

북방 유목민의 식생활이 조선으로 들어와 유제품을 만들 게 됐다.

만드는 과정은 단순했지만, 지극한 정성이 필요했다.

우유를 약한 불에 넣고 계속 저어주어야 했다.

약한 불로 5시간을 저어주면 걸쭉한 상태에 이른다.

밀가루 반죽처럼 변한 우유 덩어리를 면포에 싸서 모양을 낸다.

굳은 과정을 거쳐 불에 구우면 유락(乳酪)이 완성된다.

당시 유락(乳酪)은 왕이나 귀족들이 먹는 귀한 음식이었다.

“전통 방식으로 만들었어요.”

“맛을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난 조선 시대 치즈를 맛봤다. 현대의 치즈와는 맛이 달랐다.

우유 진액을 먹는 느낌이다. 고소하면서도 쫀득한 식감이 좋았다.

“맛이 좋네요.”

“여기에 찍어서 먹으면 맛이 더 좋을 거예요.”

설민주는 꿀이 든 종지를 건넸다.

그녀의 말대로 유락(乳酪)은 꿀과 궁합이 맞았다.

고소함에 꿀의 단맛이 더해지니 깊은 풍미가 느껴졌다.

“와, 맛이 정말 좋네요!”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에 나가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 같았다.

난 접시 담긴 유락을 하나 더 먹었다. 배가 고파서 그런지 계속 손이 갔다.

혼자서 먹는 게 무안해질 지경이다.

모두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만 먹고 있네요, 다들 더 드세요.”

“우린 벌써 배가 터지도록 먹었어.”

한기탁이 배를 툭 치며 말했다.

* * *

목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한기탁이 날 불렀다.

“잠깐 시간 있어?”

늦은 시간이다.

뭔가 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는 포장마차로 날 안내했다.

한기탁이 소주를 주문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별일 없어.”

목장에 활기찼던 얼굴이 아니었다.

“무슨 일 있는 거 같은데...?”

“실은 너에게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어.”

“뭔데요?”

“그때 아저씨 일에 대해서.”

“아저씨라면 한운남 씨 말하는 건가요?”

한기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저수지 문제로 안보영과 함께 한운남을 만났다.

일을 다 끝내고, 그는 예정된 시나리오대로 진행됐다고 전했다.

그때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날 좀 별스러운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이요?”

한기탁은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리곤 그날 있던 일을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보영이 베개 속에서 부적을 찾아낸 일이다.

부적 속에 머리카락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소름이 돋았다.

“솔직히 지금도 믿어지지 않아.”

한기탁이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놀라웠다.

“세상엔 별의별 일들이 많잖아요, 설명할 수 없는 일도 있고요.”

“네 말이 맞아, 설명할 수 없는 일도 많지. 아무튼 아저씨는 그 사건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어.”

“좋은 것만 생각해요.”

난 빈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한기탁이 잔을 받았다.

“너도 부담스러워할까 봐 말하지 않았는데, 그냥 말하고 떨쳐내고 싶었어.”

“잘했어요, 한잔 마시고 떨쳐내요.”

“말하고 나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시원하다는 표정이다.

곧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기탁은 요양병원에 넣을 샐러드 컨테이너부터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평소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다음 출연자로 넘어갔다.

난 고애주에 받은 문서를 꺼냈다.

“세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을 골라야 해요.”

“어디 나도 한번 볼까?”

한기탁에게 문서를 건넸다.

그가 문서를 살폈다.

“모두 상황이 말이 아니네. 전부 다 도울 수는 없는 거지?”

한기탁은 문서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문서를 보던 그가 세 명의 사람 중에 하나를 가리켰다.

“한 명을 골라야 한다면 난 이분이면 좋겠어.”

그가 지목한 사람을 보았다. 인삼 농사를 짓던 농부였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가족 사항 때문에.”

“가족 사항이 왜요?”

딱히 주목하지 않았던 항목이었다.

난 그의 가족 사항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 깜짝 놀랄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인삼밭의 아이들

한기탁이 가족 사항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려 6남매를 둔 아버지야.”

“6남매요?”

그의 신상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현우진은 마흔 중반의 남자로 전라남도 순천에 사는 농부다.

이전에 출연했던 사람들과 달리 도시 생활을 한 경험은 없었다.

고향에서 뿌리를 내리고 산 사람이다.

자신을 소개하는 글에서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밑천이 없을 때는 쌀농사, 단감, 복숭아까지 마을 사람들의 일을 거들며 돈을 벌었다.

그렇게 착실하게 돈을 모아 땅을 사고 인삼 농사를 시작했다.

인삼을 택한 건 높은 소득을 내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인삼은 일반 밭작물보다 5배 이상의 소득을 낼 수 있다.

현우진은 가족을 위해서 인삼을 재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작년에 내린 집중호우 때문이다. 그의 인삼밭은 물에 잠기고 말았다.

6년 근 인삼을 수확하려는 순간이었는데, 수확은 고사하고 비룟값도 건지지 못했다.

“정말 딱하게 됐네. 수확하려는 때에 그렇게 되다니. 가족들을 어떻게 건사하나... 6남매나 되는데!”

한기탁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 친구 중에도 6남매의 맏이가 있었어. 그 녀석이 나중에 말하더라. 어릴 때 부모님이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한기탁의 말대로 6남매를 키우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았다.

난 현우진이 쓴 글을 꼼꼼하게 보았다.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6남매를 둔 가장이다. 절대로 무너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어떻게 할 거야?”

한기탁이 나에게 물었다.

마음이 가는 건 사실이지만,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인삼은 내 전문 영역이 아니었다.

“김덕명답지 않게 고민이 많은 얼굴이네.”

“인삼을 재배해 본 적이 없어서요.”

“하긴, 지리산 농부들은 인삼을 재배한 적이 없지. 내가 좀 감정적으로 말했나 봐.”

우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기탁은 택시를 타기 전에 물끄러미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기 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요?”

“농부들을 도울 때 꼭 농사를 지어야 하나? 농산물을 유통하거나 상품을 만들 수도 있잖아.”

“선배 말대로 반드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농산물과 관련한 상품을 만들 수도 있죠.”

한기탁은 그 말을 끝으로 택시에 탔다.

그날 밤 난 잠을 뒤척였다.

다음 출연자를 놓고 고민했다.

마음은 6남매를 키우고 있는 현우진에게 쏠리고 있었다.

한기탁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맴 돌았다.

* * *

출연자를 결정하기로 약속한 날이다.

난 고애주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애주는 전화를 받자마자 물었다.

“결정은 하셨나요?”

“네, 결정했습니다.”

난 인삼을 재배했던 현우진을 선택했다. 많은 고민 끝에 한 결정이었다.

“정말 잘됐네요.”

“고 작가님은 현우진 씨가 되길 바랐던 것 같으시네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맞아요. 현우진 씨가 되길 바랐어요.”

“처음부터 말씀하셨어도 됐는데...”

“덕명 씨가 잘 아는 분야가 아니라서 제가 나서서 추천하기가 좀 부담스러웠어요.”

“저도 그 부분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른 출연자에게 하셨던 것처럼 잘하실 거예요.”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어깨가 무겁네요. 그런데 현우진 씨가 되길 바랐던 이유는... 식구가 많아서인가요?”

“저도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 자랐어요.”

“작가님도 형제가 많으시군요.”

“형제가 많은 집이 얼마나 힘든지도 잘 알죠.”

“그렇군요. 촬영 일정은 어떻게 되나요?”

“덕명 씨 결정을 기다리고 있어서 취재를 못 했어요. 혹시 시간 되시면 같이 가시겠어요?”

고애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도 내가 일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늘 당장만 아니라면 가능합니다.”

“좋아요, 그럼 최대한 빨리 일정을 잡겠습니다.”

그녀와 함께 현우진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 * *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 있었다.

청년 농부 지원 사업을 매듭짓는 날이다.

오래간만에 하동 군청을 찾았다.

비서실장 강민수가 날 반겼다.

“요즘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강민수가 군수실로 안내했다.

군수 김창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공식적으로 청년 농부 지원 사업이 종료됐다.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었다. 모두 성실하게 지원 사업에 임했다.

“지원 사업이 끝났다고 모든 지원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김창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는 농업 지원 센터 부지에 있었다. 지원 사업에 참여한 혜택이었다.

지원 사업이 종료됐지만, 부지에서 당장 나갈 필요는 없었다.

최대 2년 동안 저렴한 임대료를 내고 사용할 수 있었다.

저렴한 전기료도 혜택 중 하나였다.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한 뒤에 전기료도 많이 절약할 수 있었다.

“비서실장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샐러드 주문량이 많이 늘었다고요.”

“모두 신경 써주신 덕분입니다.”

“저희야 물질적인 부분만 지원했을 뿐이죠. 발로 뛴 건 김덕명 씨고요. 잘 되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더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김덕명 씨의 좋은 모습은 방송을 통해서도 보고 있습니다. 방송을 보니 김덕명 씨의 진심이 느껴지더군요.”

김창대가 말을 마치자 비서실장 강민수가 다가왔다.

“군수님, 시간이 다 됐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요? 김덕명 씨도 함께 가시죠.”

김창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하동 군청 강당에 청년 농부 지원 사업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모였다.

김창대는 지원 사업에 참여한 청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일장연설을 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짧고 굵게 격려의 말을 전하고 청년 농부들에게 수료증을 전달했다.

상패를 전달하는 시간도 있었다. 성실하게 임한 청년 농부에게 주는 상이다.

우수상과 성실상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상을 받은 인물들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우수상은 방현식이 받았다. 성실상은 김상철이 수상했다.

당연하게도 지리산 농부들의 입김은 작용하지 않았다.

군청 공무원들이 심사를 통해 수상자를 결정했다.

수상이 끝나고 모두 함께 점심을 먹었다.

내 양옆에 수상자들이 앉았다.

“상철 씨 정말 고생했어요, 목장 일을 하면서 지원 사업까지.”

“별말씀을요, 제가 원해서 한 일인데요.”

김상철은 목장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하나였다. 지원 사업을 하는 중에도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성실상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우수상을 받은 방현식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저 자랑할 게 하나 더 있어요.”

“자랑이라니, 상 말고 다른 거?”

“네, 밥 다 먹고 보여 드릴게요.”

방현식은 김상철과 눈을 마주쳤다. 둘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점심 식사는 화기애애한 가운데 끝났다.

모두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현식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 팔을 잡았다.

“어디를 가려고?”

“기대하세요.”

그가 뭘 보여줄지 궁금했다. 김상철도 우리를 뒤쫓고 있었다.

방현식은 주차장으로 날 데려갔다.

“짜잔!”

눈앞에 1톤 트럭이 있었다.

“저 트럭 샀어요.”

“정말?”

그의 집에 있던 낡은 경운기가 떠올랐다.

“부자 됐어요!”

방현식은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이다.

나까지 기분이 좋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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