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 (183/205)

디데이다.

안보영이 한기탁의 차에 탔다.

이날의 주인공은 안보영이다. 한기탁은 그녀가 마음 놓고 연기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한기탁은 한운남에게 미리 전화했다. 한운남에겐 급한 일로 방문하겠다고 전했다. 그의 신변과 관련 있는 일이라며, 자세한 내용은 집에서 이야기 나누자고 했다.

마침 한운남은 저수지 일로 바쁜 상황이었다. 일이 끝나면 한기탁과 약속한 시간이 얼추 될 것 같았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승낙하고 말았다.

한기탁은 안보영과 함께 구례로 향했다.

“조금만 더 가면 당숙의 집입니다.”

“한운남 씨를 만나기 전에 들르고 싶은 곳이 있어요.”

구례로 오는 내내 말 한마디 없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한기탁은 속도를 줄이며 물었다.

“어디를 말씀하시는 거죠?”

“말씀하셨던 저수지를 한번 보고 싶어요.”

한기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저수지에서 시작됐다. 당숙을 만나기 전 저수지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저수지로 모시겠습니다.”

한기탁은 핸들을 돌렸다. 곧 거대한 저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보영이 밖으로 나갔다.

한기탁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연기자처럼 당숙에게 말할 내용을 연습하고 있었다.

저수지 주변을 거닐던 안보영은 자리에 멈춰 섰다.

한기탁은 창을 열고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땅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저수지 어딘가를 바라보는 모습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그녀가 연기를 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라고 말하려 했다.

차 문을 열고 나오려는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여기서 뭐 해?”

이기석이다.

그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깜짝이야, 말이라도 하고 나타나야지.”

“뭐야? 이상한 꿍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런데 저분은 누구고?”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안보영이 나타났다.

“이분은?”

안보영은 이기석을 보며 물었다.

“저수지 물이 필요한 친구입니다.”

안보영은 이기석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이기석도 얼떨결에 인사했다.

한기탁은 서둘러 떠나려 했다. 이기석이 그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기석아, 오늘은 좀 바빠서 그런데 나중에 이야기하자.”

한기탁은 서둘러 저수지를 떠났다.

“이제 더 볼 거는 없는 거죠?”

한기탁이 그녀에게 물었다.

“네,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네요.”

* * *

한운남의 집에 도착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한기탁과 안보영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을 느낀 한운남이 밖으로 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냐?”

한운남이 한기탁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당숙 어른, 들어가서 말씀하시죠. 손님도 계시고요.”

한운남은 그제야 안보영을 보았다. 그녀에게서 남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조용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다른 식구들은 없었다.

한기탁이 차를 준비했다. 그 사이 한운남은 안보영과 마주하고 있었다.

한운남은 헛기침하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묘하게도 그가 무서워하는 무속인의 눈빛이다.

“전 무속인입니다, 무당이라고도 하죠.”

안보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한운남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녀가 말하는 순간 눈을 정면으로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있던 다른 무속인과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여자에게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한기탁 씨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게 됐죠.”

한운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한기탁이 들어왔다.

그는 당숙과 안보영에게 차를 건넸다.

안보영은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저수지 물로 말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네, 저수지 문제로 좀 시끄러운 상황입니다.”

한운남은 고분고분한 태도로 말했다.

“그 문제로 조언을 드리고자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조언이요?”

“저수지의 물을 마을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그래야 화를 피할 수 있습니다.”

한운남은 그녀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불안한 표정으로 커피잔을 매만질 뿐이다.

“제 말이 믿기지 않으시죠?”

안보영은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제야 한운남은 입을 열었다.

“믿기 힘든 건 사실이죠. 저놈이 마을 사람들과 짜고 벌이는 일일 수도 있고.”

평소 한운남의 성격대로라면 거칠게 쏘아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보영의 눈치를 보고 있다.

아무리 짜고 치는 일이라고 해도, 그녀가 무속인인 것은 의심하지 않았다.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여기 오기 전에 저수지를 봤습니다. 안 좋은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듣기가 거북하네요.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한운남은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그녀를 도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조용히 돌려보내고 싶었다.

“저수지 물을 좀 쓴다고 해서 손해를 볼 건 없습니다. 오히려 화를 면하고 사람들에게도 인심을 얻을 기회가 될 겁니다.”

“그런 이야기라면 듣기 싫습니다.”

한운남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슴 깊은 속에서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안보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증거를 보인다면 믿겠습니까?”

증거란 말에 한운남이 움츠러들었다.

한기탁은 안보영을 쳐다봤다.

예정에 없던 내용이다.

안보영은 손을 들어 장롱을 가리켰다.

한기탁은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했다.

“저 안에 붉은 주머니가 있군요.”

안보영은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베개 속에 넣어둔 물건은 태워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누가 왜 그런 물건을 줬는지 모르지만, 당신에게 아주 해롭습니다.”

그녀의 말에 한운남의 눈빛이 달라졌다.

베개 속에 부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운남 밖에 없었다.

아내조차 모르는 일이었다. 오로지 그만이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 자신을 기이한 일을 당하고 샀던 부적이다.

“아니 그걸 어떻게...? 당신 같은 무속인이 만들어 준 거란 말이요.”

한운남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은 악을 악으로 다스렸어, 덕분에 당신은 탐욕스럽게 변했고.”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잘 될 거라고 했는데...”

“저 물건을 그대로 방치하면 제명에 살기 힘들 겁니다.”

한운남은 불안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모든 걸 간파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는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던 부적을 꺼냈다.

베개 속에서 붉은 주머니가 나왔다.

“직접 열어보세요.”

베개에 부적 주머니를 넣고 있었지만, 주머니 안에서 부적을 꺼낸 적은 없었다.

주머니를 열자 지독한 악취가 났다.

내용물을 본 한운남은 뒤로 벌렁 자빠졌다.

한기탁도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붉은 봉투 안에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여자의 것인지 남자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분명 부적이었는데.”

한운남은 두려운 나머지 덜덜 떨고 있었다.

“당장 태우세요.”

안보영의 말에 한기탁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붉은 주머니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한운남과 안보영도 그를 쫓아 마당으로 나왔다.

한기탁은 깡통에 불을 붙이고 주머니를 던져 버렸다.

한운남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십 년을 넘게 베고 잔 물건이었다.

한운남은 안보영에게 말했다.

“기분이 이상하네요, 저런 물건인 줄도 모르고.”

“그때는 알았다고 해도 사용했을 겁니다. 생각도 유효기간이 있는 법이니까요.”

“지금이라도 저수지 물을 마을 사람과 나누면 될까요?”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럼 당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적이 소멸하자 한운남의 마음도 달라졌다.

그동안은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닫고 있었다.

지금은 바다보다 마음이 넉넉해졌다. 저수지의 물뿐만 다른 여러 가지 것도 나눌 생각마저 들었다.

그 자신도 놀란 것 같았다.

“느낌이 이상하네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저 사람이 당신을 살렸습니다.”

안보영은 한기탁을 가리키며 말했다.

* * *

난 이기석의 집에서 한기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기석은 저수지에서 한기탁과 만났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간단하게 상황을 전했다.

“그게 통할지 모르겠지만 잘 됐으면 좋겠네요.”

이기석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한기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제 저수지 물은 마음대로 써도 돼.”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

연(蓮)은 토층이 깊고 유기질이 풍부한 진흙땅에서 잘 자란다.

연을 키우려면 물을 대기 전에 우선 농지에 유기질 비료를 충분히 줘야 한다.

난 이기석과 함께 농지를 갈고 유기질 비료를 뿌렸다.

유기질 비료는 지리산 농부들의 연구소에서 만든 것이다.

촬영 팀은 그 모습을 찍었다.

저수지 문제로 잠시 멈춰 있던 촬영도 재개된 상황이다.

“비료는 충분히 줬으니 이제 물을 줘야겠네요.”

이기석이 웃으며 말했다.

연(蓮)을 재배할 농지에 물이 가득 찼다.

물을 댄 후에 잠시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흙이 가라앉은 후에야 연근 종자를 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동안 이기석과 연(蓮) 재배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전에 지장사 스님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도 쓸모가 있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연근 종자를 심으려는 순간이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기석의 집으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었다.

이기석은 놀란 얼굴로 그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우리도 도우러 왔지.”

무리 앞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모두 작업복에 장화까지 신고 있었다.

“자네 덕에 저수지 물을 쓸 수 있게 됐는데, 이 정도도 못 돕겠나?”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그런 소리 하지 말게, 우리도 다 알아. 자네가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했는지. 젊은 사람이 열심히 살겠다는데, 우리도 일손이라도 좀 거들고 싶네.”

“마음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긴, 우리가 더 감사하지.”

카메라가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잡았다. 모두 두 팔을 걷어붙이고 연근 종자를 심었다.

마을 사람들은 저수지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이기석이라고 알고 있었다.

내가 한기탁에게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우린 마을 사람들에게 이기석이 아니었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석은 자신이 아니라며 사실대로 말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겸손해서 그렇게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문제를 해결했든 중요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저수지 물 문제로 갈등을 빚는 일이 없었고, 이기석은 연(蓮)을 재배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연근 종자 심기를 모두 마쳤다.

이기석의 어머니 김난희 여사가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새참 바구니를 들고 등장했다.

“이거 먹고들 하세요.”

바구니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새참은 특제 고추장 소스에 시원한 오이가 들어간 비빔국수였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네요.”

마을 사람들이 젓가락을 들었다.

“카메라 내려놓고 좀 드세요.”

김난희 여사는 최민성 피디와 스태프들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먹는 모습도 찍어야 해서요.”

“그러지 말고 좀 드세요.”

최민성 피디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먹는 장면을 전부 다 찍을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새참을 먹는 장면을 짧게 스케치하고 모두 카메라를 내려놓게 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촬영 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모처럼 느껴보는 자유였다.

스태프들도 젓가락을 들었다.

다들 정신없이 비빔국수를 먹었다.

마을 사람 중 하나가 이기석에게 물었다.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에 나간다고?”

“그런 소식은 어디서 들으셨어요?”

“다 아는 수가 있지, 그나저나 뭐로 참가할 생각이야?”

이기석은 나와 눈을 잠시 마주쳤다. 아직 확정한 아이템은 없었다.

“연잎차를 배우긴 했는데...”

그는 나와 함께 연잎차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지금은 그것 말고는 생각나는 게 없다는 표정이다.

이기석에게 물었던 남자가 말했다.

“연잎차는 너무 약하지 않아?”

“아직 찾고 있는 상황이에요.”

“연(蓮)을 재배하고 있으니까, 연(蓮)을 재료로 하면 좋을 거 같긴 한데...”

남자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부터 마을 사람들도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연근 초절임 어때?”

“연근 가루도 좋을 거 같은데?”

마을 사람들도 각자의 의견을 말했다.

자신들도 도움이 되려는 것 같았다.

재미난 상황이 연출됐다.

모두 자신의 일처럼 아이디어를 쏟아내고 있었다.

난 그때 최민성 피디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그와 함께 따라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

우린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최민성 피디가 먼저 물었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면 어떨까요?”

“마을 사람들과요?”

“연잎차는 저와 함께 찍었지만, 대회에 나가는 과정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면 좋을 거 같아서요.”

저수지 사건을 계기로 마을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고 있었다.

내가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마을이 하나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이미 그에겐 연잎차를 만드는 방법도 전수했다.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에 나가는 일까지 내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감도 넘치고 있었다.

“저도 덕명 씨 생각에 찬성합니다.”

최민성 피디도 내 뜻을 이해했다.

‘농부가 희망이다’는 힘든 상황에 처한 농부에게 희망을 주는 게 목적이다.

필요한 도움은 주되 스스로 일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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