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기탁과 함께 이기석을 찾아갔다.
이기석은 평상에 앉아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인사를 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일은 제가 알아서...”
이기석은 말을 하려다 한기탁과 눈을 마주쳤다. 낯익은 얼굴을 보며 누군지 기억하려는 얼굴이다.
“구례 초등학교 한기탁!”
“오랜만이야.”
한기탁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이 나왔다.
이기석은 옛 추억이 떠올랐는지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이기석이 내게 물었다. 내가 초등학교 동창과 방문할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다.
난 그에게 한기탁도 지리산 농부들의 일원임을 알렸다. 이 문제를 함께 상의한 사실도.
“덕명이 통해서 이야기 들었어. 일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한기탁이 이기석에게 물었다.
이기석이 조용히 말했다.
“어제 아저씨를 찾아갔었어.”
“벌써 만났다고?”
“결과는 어땠는데?”
이기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운남과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고 했다.
저수지 물을 사용하면 고소하겠다는 뜻을 확인 받았을 뿐이다.
“그래도 마지막 방법이 하나 있어.”
이기석이 힘을 줘서 말했다.
“무슨 방법?”
한기탁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을 방문하기 전에 한기탁과 미리 말해둔 게 있었다.
이기석의 이야기를 최대한 듣고, 우리 의견을 말하자는 내용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찾아가 보려고 지금 목록을 작성하는 중이었어.”
“마을 사람과 목록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저수지 물이 필요한 사람은 나 말고도 많다는 걸 알았거든.”
“그래? 자세히 말해봐.”
이기석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도 저수지 물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벼농사하는 농부부터 밭작물을 재배하는 사람들까지 저수지 물이 필요한 이들이 제법 됐다.
저수지 물은 마을 사람들이 사용한다고 바닥날 정도가 아니었다.
저수지는 30년 동안 단 한 번도 바닥을 보인 적이 없었다.
행여 물을 많이 끌어 쓴다고 해도 지하수와 빗물을 통해 충분한 수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운남의 말도 안 되는 욕심에 불만이 많았다.
이기석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단체 행동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함께할 사람들의 리스트를 작성 중이었다.
“단체행동을 한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 나도 도울게.”
한기탁이 이기석에게 말했다.
“너까지 나서지 않아도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기석은 든든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이기석이 마을 사람들을 모으는 동안 우리도 준비할 게 있었다.
한기탁이 세운 플랜B다.
마을 사람들과 이기석의 단체 행동이 통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일이다.
처음 한기탁의 계획을 듣고 백 퍼센트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이기석을 만나고 생각을 바꿨다.
한기탁이 제시한 방법이 통한다면 이기석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한운남도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을 기회이기도 했다.
우린 일을 나눠서 진행하기로 했다.
“선배가 이기석 씨와 함께 상황을 지켜봐 주세요. 사람을 구하는 일은 제가 할 테니까.”
“그래, 그게 좋을 거 같아. 미리 준비해야 할 것도 있고.”
“그런데 이 방법이 정말 통할까요?”
“분명 통할 거야. 오히려 단체 행동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
한운남의 독특한 성향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한기탁이 제시한 방법은 한 편의 연극이었다.
한운남은 현대 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일을 경험했다. 그는 무속의 힘으로 살아났다. 그는 지금도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욕심쟁이에,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지만 무속인 앞에서는 쩔쩔매는 것이다.
한기탁은 그 점을 역이용하자고 제안했다.
“이건 모두가 행복해지는 연극이야. 결과적으로 아저씨도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게 될 테니 좋은 일이 될 거야.”
“플랜B는 상황을 보고 판단하죠.”
“물론 그래야지, 그래도 미리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방송 일정을 맞추려면.”
그의 말이 맞았다. 우리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 * *
난 고애주 작가와 만났다. 거두절미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연기자 한 명 추천해 줄 수 있을까요?”
“연기자는 왜요?”
“저수지 문제를 해결하려고요.”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연기자가 필요하나요?”
고애주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놀랄 만도 했다.
난 고애주에게 계획을 말했다.
계획을 듣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처음엔 저도 의심했었어요. 지금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덕명 씨가 이렇게까지 애써 주실 줄은 몰랐네요. 그럼 저도 나서야겠네요.”
고애주 작가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연기자를 구하기 위해서다.
연기자의 조건도 있었다. 너무 많이 알려진 사람이어서는 안 됐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단역 배우를 원했다. 성별은 상관없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서도 안 됐다. 거기에 연기력까지 출중한 사람이어야 했다.
고애주는 생각보다 발이 넓었다.
“지금 섭외 중이니까 곧 연락이 올 거예요.”
“작가님도 아시다시피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없어요.”
“알고 있어요, 최대한 빨리 구해볼게요.”
* * *
그 시각 한운남의 집.
이기석과 마을 사람들이 한운남의 집 앞에 모였다.
이기석이 문을 두드렸다.
한운남이 집 밖으로 나왔다.
“또 자넨가, 그때도 말했지만 난 물을 대줄 생각이 없네.”
이기석 뒤에 마을 사람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자네가 사람들을 어떻게 끌어모았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네.”
이기석은 준비한 종이를 꺼냈다.
“저와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모았습니다.”
한운남은 종이를 받아 내용을 확인했다.
저수지 물을 대주는 대가로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내용이다.
한운남은 문서를 확인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조건이 마음이 들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이기석이 한운남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내가 돈 때문에 그러는 줄 아나?”
“그럼 어떤 점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물을 다 주면 저수지에 있는 물고기들은 어떻게 살란 말인가?”
“그 정도로 물이 많이 소모되진 않을 겁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바늘구멍 하나 들어가지 않았다.
마을 사람은 한숨을 쉬었다. 돈을 주겠다는 것도 큰 결심이었다.
역시 액수가 문제인 것이다.
한운남의 욕심은 끝도 없었다.
* * *
한기탁이 급하게 날 찾았다. 마을 사람들의 단체 행동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결국, 플랜B를 가동해야겠네요.”
“그래야 할 거 같아. 배우 섭외는 어떻게 됐어?”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제가 다시 연락해 볼게요.”
때마침 고애주 작가에게 연락이 왔다.
고애주 작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한 분을 찾은 거 같아요. 연기력도 아주 좋다고 하시네요.”
“수고하셨어요. 연락처도 받을 수 있을까요?”
“잠시만요, 연락처 드릴게요.”
고애주에게 연기자의 연락처를 받았다.
전화를 끊자 한기탁이 물었다.
“섭외된 거야?”
“네, 섭외했어요.”
“최대한 빨리 만나고 싶은데.”
바로 연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자배우였다. 그녀는 대전에 있었다.
지금은 바쁜 일정이 없다고 했다.
우리 곧장 대전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인터넷으로 그녀에 관한 정보를 검색했다.
방송이나 영화에 출연한 이력은 나오지 않았다.
고애주에겐 지역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유명하진 않지만,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프로라는 것도.
대전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다.
“안보영이라고 합니다.”
안보영은 중년의 여자배우였다.
배우답게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무엇보다도 눈빛이 살아 있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날카롭게 보이기도 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오해 없이 들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적당하게 둘러댈 생각은 없었다.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말할 작정이었다.
그녀에게 저수지 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전했다.
한운남에 대한 이야기와 그녀가 연기할 역할까지.
무속인으로 변신해서 한운남에게 경고를 해야 했다.
이야기를 다 듣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재미있는 일이네요.”
긍정적인 반응이다. 그것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이번 일은 묘하게 관심이 생기네요.”
“감사합니다.”
“그전에 저도 고백할 게 하나 있어요. 제 이야기를 듣고 저와 함께할지 결정하셔야 할 거 같아요.”
“고백이요?”
고백이라고 말할 때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다.
난 귀를 쫑긋 세웠다.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
안보영은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날카로운 눈빛에 마음마저 간파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선, 말씀하신 연기를 하는 건 문제없습니다.”
안보영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웃는 얼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서늘함이 느껴졌다.
“나쁜 의도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죠. 물론 지금은 느낌뿐이지만.”
“절대 나쁜 의도는 없습니다. 그분은 제 친척이기도 합니다. 그저 이번 기회에 마음을 고쳐먹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기탁은 목소리에 힘을 줘서 말했다.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는 태도다.
“그런데 고백할 게 있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고백이란 단어를 꺼냈을 때부터 내내 궁금했다.
“실은 저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이요?”
“가끔 저에게 신(神)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신(神)이라면 무당들이 받는다는, 그런 영적인 존재를 말하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녀의 두 눈에 광채가 돌았다. 난 종교며 무속 등을 믿지 않았다.
이번 일을 진행할 때도 무속인이 아닌 배우를 섭외하자고 했던 까닭이다.
“일반적인 무속인과는 다릅니다만, 과거의 사건 때문인지 간혹 신기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안보영은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과거에 고약한 신병을 앓았다고 한다.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안보영의 어머니는 딸에게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안보영의 신병은 심해졌고, 온몸에 두드러기 같은 수포가 올라오고 정신도 온전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원인불명의 희귀병이라며 방치한 상태였다.
더 이상 딸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안보영의 어머니는, 결국 자신의 딸이 신병에 걸린 걸 인정했다.
그리고 딸을 대신해 신(神)을 받기로 결정했다.
어머니가 내림굿을 받자 안보영의 신병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고 한다.
“저에겐 이런 과거가 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 같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기탁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그녀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하고 와도 될까요?”
“편하실 대로 하시죠.”
난 한기탁과 함께 카페 밖으로 나왔다. 카페 통유리 사이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한기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좀 음산한 느낌이 드네.”
“어쩌면 저분이 최고의 선택일 수도 있어요.”
“네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아. 하지만 너무 딱 맞아 떨어져서 무서울 지경이야.”
“맞아요, 선배가 말했던 캐릭터랑 완전히 일치해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바로 한기탁이었다.
그는 분명 효과가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게다가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한기탁의 계획은 간단했다. 우선 무속인을 연기할 배우를 섭외하고, 배우와 함께 당숙을 찾아간다, 그리고 당숙에게 저수지 물을 마을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계획의 전부였다.
그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은 무속인을 연기 할 배우였다.
너무 유명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어서는 안 됐다. 연기력까지 밑받침되어야 했다.
안보영은 우리가 생각한 최적의 사람이다. 하지만 한기탁의 말대로 너무 딱 맞아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한기탁이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저분하고 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시간도 없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의 말대로 시간이 없었다. 저수지 물 때문에 촬영도 멈춘 상태다.
이기석을 위해서라도 빠른 행동이 필요했다.
안보영에게 이번 일을 함께하자고 말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친김에 디데이까지 잡았다.
날짜를 잡을 때 그녀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정말 무속인 같았다.
우린 그녀가 원하는 날로 디데이로 잡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