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1. (181/205)

사무실에서 한기탁과 함께 서류 작업을 했다.

버블티까지 카페에 공급하는 방안이 담긴 서류였다.

설강인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우유의 생산량을 늘리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설강인은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며 자신했다.

버블티 이야기를 듣고 가장 좋아한 사람은 설민주였다.

특허받은 고구마 펄이 빛을 볼 순간이었다.

매장과 협의할 내용까지 모든 정리가 끝났을 무렵이었다.

고애주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음 출연자가 정해졌어요.”

“한시도 쉴 틈이 없네요.”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 봐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그나저나 다음 출연자는 누구인가요?”

“다음 출연자는 덕명 씨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요.”

“저와 가까운 곳에요?”

곰 같은 남자

다음 출연자는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

하동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구례였다.

고애주 작가와 화개장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화개장터는 말로만 들었어요, 직접 와 본 건 처음이에요.”

그녀는 먼저 도착해서 화개장터의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지리산 농부들의 1호 매장도 이미 다녀왔다.

“지리산 농부들의 매장은 갤러리 같았어요, 근사했어요.”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최민성 피디와 두 명의 스태프도 함께였다.

최민성 피디가 말했다.

“이번부터는 촬영과 함께해야 할 거 같아요. 방송도 시작됐고, 일정을 맞추려면 어쩔 수 없네요.”

황대규처럼 따로 만날 시간이 없었다.

이미 첫 회 방송이 나간 상태였다.

출발은 좋았다. 시청률도 양호한 편이었다.

고애주는 내 차에 탔다. 스태프들은 우리를 뒤쫓았다.

“혹시, 이메일 보셨어요?”

고애주가 물었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메일 볼 시간도 없었네요.”

그녀는 두 번째 출연자에 대한 정보를 메일로 보냈다.

일 때문에 볼 시간이 없었다.

“메일을 못 보셨다면 제가 간단하게 소개해 드릴게요. 다음 출연자는 구례에 사는 이기석 씨예요.”

“뭘 하는 분인가요?”

“벼농사도 하고 닭도 키웠던 분이세요.”

“여러 가지를 하셨네요, 어떤 상황인가요?”

고애주는 말을 아꼈다. 직접 보는 게 나을 거라고 말했다.

* * *

구례에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출연자의 집은 마을과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한 남자가 우리를 맞았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 농부였다. 덩치가 산만 한 게 흡사 곰 같았다.

“이기석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솥뚜껑 같은 손을 내밀었다.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방송에서 뵀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기석은 큰 덩치와 달리 서글서글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말할 때마다 웃는 얼굴이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촬영팀은 이미 카메라와 한 몸이 됐다. 두 대의 카메라가 우리를 쫓았다.

이기석은 카메라를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다.

“어머니, 손님들 오셨어요.”

머리에 두건을 두른 여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이기석의 어머니 김난희 여사다. 마르고 체구가 작은 게 아들과 대비됐다.

“아이고, 먼 길을 오셨는데 대접할 게 변변치 않네요.”

시골 인심은 어딜 가든 넉넉하다. 그보다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벼농사를 지었다고 들었습니다.”

난 이기석에게 물었다.

“벼농사를 했었죠.”

그가 말꼬리를 흐렸다.

우린 함께 논으로 향했다.

“여기서 농사를 지었나요?”

난 두 눈을 크게 뜨고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이 땅에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작년에 가을장마가 와서 잘 익어가던 벼에 벼이삭도열병, 깨씨무늬병, 목도열병이 번졌습니다.”

유기농을 시작하고 생긴 병이었다. 유기농을 해도 해충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 했지만, 그는 자연 그대로 재배하길 원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벼이삭도열병이 심하게 걸리면 수확이 완전 불가능하다. 벼에 낱알이 차지 않고, 벼 이삭은 하얗게 변해 버리기 때문이다.

“닭도 키웠다고 들었습니다.”

“양계장은 저쪽에 있습니다.”

이기석과 함께 양계장으로 향했다. 양계장으로 쓰던 하얀색 건물이 나타났다.

그가 건물의 문을 열었다. 안이 텅텅 비어 있었다.

“닭들은 어디에 있나요?”

“올겨울에 조류 바이러스가 번져서 모두 살처분했습니다.”

“저런...”

스태프들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기석은 우리를 걱정하듯 말했다.

“이제부터 잘 될 거니까 괜찮습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고애주 작가가 나에게 슬쩍 물었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그녀의 눈빛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도울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벼를 심었던 곳은 황무지로 변했고, 조류 바이러스로 닭은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게 어떻게 농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도시에서 생활하다, 어머니 때문에 시골로 내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대상포진을 심하게 앓았다.

대상포진은 어릴 때 앓는 수두가 원인이 된다. 몸속에 잠복해 있다가 성인이 된 뒤에 다시 활성화되는 질병이다.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어머니의 증상이 심해져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온 것이다.

생계를 해결해야 했기에 농사를 시작했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환경의 영향과 질병으로 농사가 망했다. 불행 중 다행한 일은 어머니의 병세는 호전됐다는 사실이다.

“혹시 생각해 둔 일이라도 있나요?”

“실은 저도 그게 고민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벼농사를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수익을 내기 힘들었다. 두 모자가 겨우 먹고살 정도일 뿐이었다.

수익을 바라고 시작한 양계도 쉽지 않았다. 어머니가 닭을 살처분하는 과정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양계도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열악한 환경에 자본과 노동력이 부족했다.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동 양봉으로 해법을 냈던 황규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뭐든 할 각오가 돼 있습니다.”

이기석이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기석 씨는 남들에게 없는 능력이 하나 있네요.”

“그게 뭔가요?”

“힘든 상황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능력이요.”

“어릴 때부터 긍정적이란 소리를 많이 듣긴 했습니다.”

그가 가진 최고의 장점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비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었다.

“당장은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저에게 시간을 조금만 주시겠어요?”

“그럼요, 당연히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장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난 최민석 피디와 고애주에게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 같습니다.”

최민성 피디는 촬영팀과 함께 장비를 정리했다.

고애주가 나에게 다가왔다.

“너무 어려운 숙제를 드린 건가요?”

“이번 일은 쉽지 않네요.”

“제가 이기석 씨를 섭외한 이유가 있어요.”

고애주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요?”

“좀 허술한 면이 있긴 하지만, 어머니를 위한 마음은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잘되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섭외를 부탁드렸고요.”

“저도 작가님하고 같은 마음입니다.”

“전 김덕명 씨만 믿을게요.”

곧장 하동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이기석의 집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주변에 힌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작은 논과 밭이 곳곳에 있었다.

눈에 띄는 건 언덕 뒤에 있는 커다란 저수지였다.

난 그 저수지에 앉아 한참을 고민했다.

* * *

하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노해미에게 전화가 왔다.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근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노해미는 매장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날 보고 그녀가 물었다.

“위에 올라가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그녀와 함께 2층 사무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나요?”

“요즘 김꽃님 할머니가 안 좋으세요.”

“자세히 말해 봐요.”

노해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김꽃님 할머니의 수양딸 매화스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매화스님이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뒤로 할머니가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김꽃님 할머니는 무릎이 안 좋아 절에 가기 힘들었다. 게다가 매화스님은 청각장애가 있기에 통화마저도 곤란했다.

지리산 골짜기에 있는 지장사는 문명과도 단절돼 있었다. 인터넷을 이용해 화상으로 만날 수도 없었다.

김꽃님 할머니가 전전긍긍하는 이유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노해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지금 밑에 계시죠?”

노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래층에 있는 김꽃님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김꽃님 할머니는 내가 앞에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정신이 온통 매화스님에게 가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 저 좀 보세요.”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매화스님 이야기 들었어요.”

“해미가 말했나 보네.”

“제가 매화스님이 어떤지 확인하고 올게요.”

“덕명이가 지장사에 가겠다고? 바쁜데 괜찮겠어?”

“당연히 가 봐야죠.”

“그렇게 해준다면 내 마음이 한결 놓일텐데...”

“제가 매화스님 모습도 담아서 올게요.”

“모습을 담다니?”

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 카메라로 찍어서 올게요.”

“사진 찍어올라구?”

“그럼요, 사진도 찍고 매화스님 건강한 모습을 영상으로도 담아서 올게요.”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라도 볼 수 있다면 정말 고마울 거 같아.”

김꽃님 할머니의 눈이 촉촉하게 젖었다.

“그럼 이것도 좀 전해 주면 좋겠구먼.”

김꽃님 할머니는 카운터 밑에서 상자를 꺼냈다.

“이게 뭐예요?”

“약하고 이것저것 좀 챙겼어.”

매화스님에게 줄 물건을 챙겨둔 걸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몸은 갈 수 없지만, 마음은 이미 그곳에 있던 것이다.

“제가 다 전해 줄게요, 더 있으시면 주셔도 돼요.”

“정말 그래도 되겠어? 그럼 잠깐만 기다려봐.”

그녀는 매장에 있던 약과를 챙겨서 박스에 넣었다.

“공짜로 주겠다는 건 아니고, 내가 사는 거야.”

뒤에 보고만 있던 노해미가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아니요, 약과는 제가 살게요.”

노해미가 김꽃님 할머니 대신 약과를 포장했다.

서로 사겠다는 모습이 다정해 보였다.

이번에 내 차례였다.

“이럴 때 대표의 권한을 발휘해도 될까요?”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대표의 권한으로 그 약과는 제가 사겠습니다.”

노해미와 김꽃님이 웃음을 터트렸다.

“좋아요, 대표님의 권한 인정해 드릴게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방송 때문에 긴장했던 마음도 사라졌다.

다만 사소한 문제는, 가져갈 물건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다. 지장사 스님들에게 줄 선물까지 한 보따리였다.

* * *

다음 날 아침 지리산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오랜만에 등산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물었다.

“오늘은 출근 안 해?”

“갈 데가 좀 있어서요.”

“어디 가는데?”

“지장사에 가려고요.”

“지장사에 무슨 일 있니?”

“매화스님이 좀 아픈가 봐요. 김꽃님 할머니도 걱정하시고 해서, 다녀오려고요.”

“진작 말하지 그랬어!”

어머니는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식구 모두 매화스님에게 양봉을 배웠다. 어머니는 그 소식을 전하지 않은 나를 타박했다.

어머니는 주방 수납장에서 박스 하나를 꺼냈다.

제법 묵직했다.

“이것도 챙겨.”

“이게 뭐예요?”

“여자 몸에 좋은 거야, 진작 말했으면 이것저것 챙겼을 텐데.”

그때 아버지가 방에서 나왔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어머니는 매화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지.”

반응뿐만 아니라 말까지 똑같이 했다.

“잠깐만 기다려봐라.”

아버지는 거실 수납장을 열고 유리병을 꺼냈다. 지장사 꿀에 귀한 삼을 재어 놓은 꿀인삼이다.

“이것도 챙겨라.”

가방이 터질 것 같았다. 부모님은 가방의 무게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도라지 조청까지 있었다.

가방이 온갖 물건들로 빵빵하게 찼다.

“이제 더 없는 거죠?”

“진작 말했으면 더 챙겨 놓았을 텐데.”

어머니는 아직도 아쉬운 얼굴이다.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렸어야 하는 건데.”

난 재빨리 집을 빠져나왔다. 물건을 더 넣을 공간이 없었다.

짐을 짊어지고 산길을 올랐다.

가방이 무거웠지만,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매화스님의 병도 금방 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래간만의 산행이다.

가파른 경사 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땀으로 범벅이 됐지만, 머리는 한결 가벼워졌다.

드디어 지장사에 도착했다.

갈증이 났다. 시원한 물부터 마시고 싶었다.

지장사 연못에 식수대가 있었다.

물을 한 바가지 퍼서 꿀꺽꿀꺽 마셨다.

물이 달았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연못으로 향했다.

연꽃이 물 위에 동동 떠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이기석이 떠올랐다.

벼농사와 양계 일까지 망해버린 농부다.

연못 안에 그가 재기할 아이디어가 숨어 있었다.

벼를 대체하는 작물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도 꽃을 피우고, 흙탕물이 묻지 않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불교를 포함한 많은 종교에서 연꽃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다.

우리 삶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맑고 아름답게 피어나길 바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연(蓮)은 상징적인 의미만 있는 작물이 아니다.

상품으로서의 값어치도 엄청나다.

꽃과 잎은 차로 만들 수 있고, 뿌리줄기는 식용으로 쓸 수 있다. 열매는 한방의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말 그대로 버릴 게 없는 작물이다.

내가 연(蓮)에 주목한 이유는 단순히 고소득을 낼 수 있는 작물이어서만은 아니다.

두 번째 출연자 이기석의 주변 환경 때문이다.

연 재배는 원활한 물 공급이 중요한데, 그의 집 주변에 제법 큰 저수지가 있다.

연을 재배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게다가 연은 벼를 대체할 수 있는 작물이기도 하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논에 연(蓮)을 재배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닭을 키우던 공간에서는, 연(蓮)을 이용한 가공식품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인 지금은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지만, 연은 훗날엔 벼를 대체할 작물로 주목받는다.

이기석에게 추천할 작물은 연(蓮)이다.

* * *

지장사 사무처 비구니는 반가운 얼굴로 날 반겼다.

“오랜만에 방문하셨네요, 주지 스님을 뵈러 오셨나요?”

온 김에 주지 스님도 만날 생각이다. 그전에 먼저 할 일이 있었다.

“매화 스님이 많이 아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 일이라면 이제 걱정을 덜 하셔도 될 거 같습니다.”

“많이 좋아졌나 보죠?”

“절 따라오시지요.”

난 사무처 비구니를 따라 사찰 안으로 들어갔다.

꿀을 보관하는 창고가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매화 스님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녀는 목에 걸린 수첩에 글을 적었다.

오랜만에 하는 필담이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매화 스님이 아프시다는 소식을 듣고, 김꽃님 할머님이 걱정이 많으세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다행이에요, 저도 걱정했어요]

[양봉 일로 무리를 했던 것 같아요, 갑자기 몸에서 열이 나서 며칠 앓았어요]

매화 스님은 웃는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지금은 완전히 나은 것 같았다.

[김꽃님 할머니에게 안부 전할 수 있을까요?]

[안부를 전해요?]

매화 스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난 휴대폰을 꺼냈다.

[동영상을 찍으려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핸드폰을 들고 그녀의 모습을 찍었다.

수화의 모든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몇몇 동작은 알아들었다.

김꽃님 할머니의 건강을 걱정하는 내용이다.

촬영을 마쳤을 때,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가방에 꽤 크네요? 안에 뭐가 엄청나게 든 거 같은데]

[전부 매화 스님에게 줄 물건들이요]

[저에게 줄 물건이라고요?]

가방을 풀기 전에 수레부터 찾았다. 그 정도로 물건이 많았다.

수레 안에 물건을 하나씩 옮겨 담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요?]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수레에 담긴 물건을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준 꿀인삼부터 김꽃님 할머니가 준 보따리까지 수북하게 쌓였다.

[이건 지장사 스님들과 함께 드세요]

지리산 농부들 매장에서 챙긴 약과다.

[고맙습니다]

동영상 안부 촬영에 물건 전달까지 마쳤을 때였다. 창고 밖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주지 스님이다.

인사를 하자 그녀도 합장으로 답했다.

“김덕명 씨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네요.”

연화 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처음 지장사를 찾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매화 스님을 만날 목적이었다. 주지 스님이 날 매화 스님에게 안내했다.

“먼 길 오셨는데, 차 한 잔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좋습니다.”

방 안에 밀랍양초가 붉을 밝히고 있었다. 그녀가 차를 우려 내 앞에 놓았다.

“방송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에게도 소식통이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농부를 돕는 내용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연화 스님이 차를 마시며 말했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양봉을 하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농부를 도왔습니다. 모두 주지 스님의 덕분입니다.”

“제 덕이라니요, 김덕명 씨가 한 일인데요.”

“주지 스님이 아니었다면 양봉 기술을 배울 수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주지 스님께 여쭙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주지 스님이 드시는 차 중에 연잎차도 있나요?”

“연잎차라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기를 모아둔 곳에서 종이봉투를 하나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난 내용물을 확인했다. 녹차와 생김이 비슷했다.

“맛을 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주지 스님은 연잎차를 만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잎차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뭘까요?”

“이번에 도움을 줄 농부에게 연(蓮) 재배를 추천할 생각입니다.”

“그럼, 연잎차를 만들 생각인가요?”

“연은 차 말고도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지 않습니까?”

“김덕명 씨 말씀대로, 연은 연근부터 열매까지 버릴 게 없는 작물이죠.”

주지 스님은 뜻을 이해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녀가 연잎차를 내게 건넸다.

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이 녹차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윽하고 은은한 향이 있었다.

그녀가 연잎차를 마시며 말했다.

“연이 더러운 물을 정화하는 것처럼, 연잎차는 사람의 나쁜 피도 제거한다고 합니다.”

동의보감에 나온 말이기도 했다. 연잎차는 나쁜 피를 제거하고, 꾸준히 마시면 병을 낫게 한다고 쓰여있다.

“이 연잎차는 지장사에서 만든 차인가요?”

“아닙니다, 차는 전문가가 만들었죠.”

“전문가라면...?”

“네, 임시백 선생님이 만드셨죠.”

임시백 선생님이 만든 차일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에게 자문을 구한 뒤 이기석에게 연잎차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이었다. 물론, 연잎차만 만들 생각은 없었다. 제품을 다양하게 할 계획이다.

“농부들에게 도움을 주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주지 스님이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농부들을 도우면서 지리산 농부들을 대외적으로 알릴 생각입니다.”

“하긴 그렇군요, 사람들에게 지리산 농부들을 알릴수록 판매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네, 그렇죠. 하지만 꼭 판매만이 목적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주지 스님은 눈을 깜빡거리고 물었다.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큰 계획이 있나 봅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스님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그저 행운을 빌어줄 뿐이다.

지장사를 나오는 길에 사무국 비구니가 날 불렀다.

“무슨 일인가요?”

“약소하지만 저희가 준비한 겁니다.”

그녀가 보따리를 내밀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열 개가 넘었다.

“이게 다 뭐죠?”

“저희도 매번 선물만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약초와 나물입니다. 모두 지장사 스님들이 재배한 겁니다.”

성의를 봐서라도 사양할 수 없었다.

배낭이 올 때보다 더 커졌다.

“동료들과 함께 나눠 먹겠습니다.”

“조심히 내려가십시오.”

* * *

지장사에서 내려와 농업 지원센터 사무실로 향했다.

한기탁은 등산복 차림의 날 보고 피식하고 웃었다.

“옷이 왜 그래? 산이라도 다녀온 거야.”

난 배낭에 있던 물건을 꺼냈다.

“이거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줘요.”

“그게 다 뭐야?”

“약초하고 나물들이에요.”

“약초랑 나물이라고?”

그에게 지장사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한기탁은 웃으며 물건을 챙겼다.

“마음이 참 고맙네.”

“그나저나 버블티 일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버블티 기계제작에 들어갔어.”

한기탁은 버블티 관련해서 일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버블티를 만들 기계를 새롭게 만들 계획이다.

이장우와 이동춘 부자가 기계제작에 들어갔다.

기계가 만들어지면 곧 매장에 보급할 생각이다.

계획했던 대로 일이 처리되고 있었다.

한기탁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방송은 어때, 이번엔 또 누구야?”

난 그에게 이기석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벼농사와 양계가 망한 딱한 사연을 전했다.

“그 사람 이름이 뭐라고?”

“이기석이라는 남자예요.”

“혹시, 덩치가 산만 하지 않아?”

“맞아요, 곰 같은 남자였어요. 아는 사람이에요?”

“이런 인연이 있나! 그 친구, 내 초등학교 동창이야.”

구례 사람이라고 했을 때, 한기탁이 떠오르긴 했다. 이기석이 사는 곳이 한기탁의 고향과 멀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묘한 인연이다.

“기석이가 어머니 때문에 시골로 내려왔구나. 어머니는 많이 좋아지셨다고?”

“네, 어머니는 아주 건강하세요.”

“어떤 해법을 제시할 생각이야?”

“연(蓮)을 재배할 계획이에요.”

난 배낭에서 연잎차를 꺼냈다.

구상한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한기탁이 설명을 다 듣고 물었다.

“연잎차를 만들면 매장에서도 팔 수 있지 않을까?”

지리산 농부들의 매장에선 하동녹차를 팔고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서도 꾸준히 나가는 상품이었다.

마케팅만 잘 한다면 연잎차도 문제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은 나에게도 상황을 공유해줘, 나도 힘이 되고 싶으니까.”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초등학교 동창의 일이라고 그도 마음이 쓰이는 것 같았다.

* * *

다음날, 고애주 작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기석 농부에게 제시할 해법이 생각났습니다.”

“어떤 방법인가요?”

“연(蓮)입니다.”

“연꽃이 피는 그 연(蓮)인가요?”

“네, 맞습니다.”

“자세하게 듣고 싶은데 제가 그쪽으로 가도 될까요?”

“좋습니다.”

고애주는 일하기 편한 상대였다. 먼 길을 오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방송 작가의 자질이기도 했다. 그녀는 하동에서 원고를 완성할 계획이라고 했다.

우리는 화개장터 매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준비한 자료를 검토하는 중에 고애주가 나타났다.

“화개장터는 올 때마다 친근한 느낌이 드네요.”

고애주는 웃으며 말했다.

“오는 길에 연(蓮) 재배와 관련해서 알아봤어요.”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아, 네. 정신이 없었네요.”

그녀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꺼냈다.

“최민성 피디하고도 이야기를 나눴어요. 좋은 아이디어 같다고 하시네요. 말씀대로 벼농사를 대체할 수 있는 작물이기도 하고요.”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할까요?”

“좋죠.”

난 미리 준비한 차를 그녀에게 건넸다.

“무슨 차인가요? 녹차 같기도 한데 맛이 좀 다른 같기도 하네요?”

“연잎차입니다.”

“연잎으로도 차를 만드는군요?”

그녀는 신기한 눈으로 연잎차를 바라보았다.

“이기석 씨에게 연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는 주변 환경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기석 씨의 집 주변에 커다란 저수지가 있더라고요. 그곳 물을 끌어다 쓰면 연을 재배하기 수월할 겁니다.”

“그럼 이기석 씨가 벼농사하던 곳에서 연을 재배할 수 있는 거네요?”

“네, 가능할 겁니다.”

“저도 연에 대해서 좀 알아봤어요. 연을 작물로 키우면 좋은 점이 많더라고요. 자라는 속도도 빠르고 더러운 물에서도 아주 잘 산다고. 심지어 수질을 정화하는 능력도 있다고 들었어요.”

고애주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연(蓮)뿐만이 아니라 수경 식물은 대부분 수질을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그때 유기물이 분해되면서 질산염과 인 등이 배출된다.

수경 식물은 그것을 영양분으로 빨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수질이 정화되는 것이다.

수경 식물 중에서 연의 정화력이 유독 좋았다. 번식력이 워낙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오는 길에 생각이 난 건데요.”

그녀는 노트북을 켜고 웹페이지를 열었다.

“이기석 씨와 여기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요?”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내게 보였다.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이란 페이지가 나왔다.

“우리 농산물로 창의적인 식품을 만드는 대회에요.”

“이거 재미있겠네요!”

“그렇죠, 느낌이 오시죠?”

고애주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대상이 아니라고 해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연(蓮)을 이용해 새로운 식품을 만든다.’

그녀의 말대로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우리도 대회에 한 번 나가보죠.”

저수지 물

이기석을 만나기 전 임시백 선생님을 찾았다.

그는 녹차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산양들이 녹차밭 구석구석을 누비며 잡초를 뜯고 있었다.

임시백이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덕명이 왔구나, 방송 때문에 바쁠 텐데 무슨 일이냐?”

방송을 시작하기 전에 그에게 알렸다. 그는 첫 회가 방영됐을 때 전화로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선생님과 차 한잔 하려고 왔습니다.”

임시백은 작업복을 털고 다원으로 들어갔다.

그가 고이 모셔둔 황금 녹차를 꺼냈다.

“이 녹차는...?”

“왜? 마시기 싫으냐?”

그는 찻잎을 다기에 넣으며 물었다.

“그건 아니지만... 이 귀한 걸.”

“제자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난 기분 좋게 차를 받았다.

“네 덕에 녹차 협동조합도 아주 잘 되고 있다. 다과 축제 때 녹차 농가 반응도 아주 좋았고.”

임시백 선생님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과 풍미가 일품이다. 역시 녹차의 장인 임시백의 솜씨다.

“며칠 전에 지장사에 다녀왔습니다.”

“지장사에는 무슨 일로?”

임시백도 지장사와 연이 많은 사람이다. 난 그에게 지장사에 다녀온 사연을 말씀드렸다.

매화 스님의 증상이 호전됐다는 말을 듣고 그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지 스님과 함께 연잎차를 마셨습니다.”

“그래, 맛이 어떻더냐?”

그가 만든 차였다. 내 평가가 궁금한 듯했다.

“역시 명인의 차라 그런지,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임시백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평가가 흡족한 모양이다.

“이번 출연자에게 연잎차 기술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차를 재배하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벼농사와 닭을 키웠던 사람이죠.”

임시백에게 이기석이 처한 상황을 말했다. 연(蓮)을 키울 수 있게 해법을 제시할 거란 계획도 상세하게 전했다.

“그래서 연잎차를 알려 줄 생각이구나.”

임시백은 차를 마시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난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너도 차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만, 그 일은 나에게 맡기면 어떻겠냐?”

기대했던 말이다. 난 그의 제안을 승낙했다. 거기에 덧붙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었다.

“선생님의 다원에서 그 장면을 찍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다원에서?”

“차를 만드는 도구들도 그렇고, 그림도 잘 나올 거 같아서요.”

임시백은 기분 좋게 승낙했다.

“연잎차를 만드는 재료는 내가 준비해 놓겠다.”

재료까지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처음부터 임시백 선생의 다원에서 촬영하고 싶었다. 마케팅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명인의 다원에서 연잎차를 배우는 모습이 방송을 통해 나간다면, 홍보의 효과가 꽤 좋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반응이 좋으면 지리산 농부들의 매장뿐만 아니라 우리와 협력관계인 카페에도 물건을 댈 수 있었다.

* * *

임시백 선생님과 이야기를 끝내고 이기석의 집으로 향했다.

최민성 피디와 스태프들도 함께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기석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오늘은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작물을 추천하겠습니다.”

작물을 추천하기 전에 그의 논을 다시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기석과 함께 논으로 이동했다. 촬영 팀도 우리를 쫓았다.

난 척박하게 변한 땅을 보며 말했다.

“이곳에 연(蓮)을 재배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연(蓮)이라면 연근을 재배하는 건가요?”

연(蓮)이라고 하면 단편적으로 연근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연근 말고도, 열매는 한의학에서 약재로 사용합니다.”

“약재요?”

연(蓮)의 열매는 한약재로 연자육(蓮子肉)이라고 부른다.

한의학에 따르면 연자육은 심신을 안정시키는 데 효과가 있어, 불안증과 불면을 호소하는 경우에 사용한다.

위장 기능이 떨어지고 장기간 설사가 멈추지 않는 경우에도 특효약으로 쓴다.

“연잎으로는 차를 만들 수 있습니다. 연(蓮)이 더러운 물을 정화하듯 연잎차는 사람의 피를 정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연잎을 찧어서 상처 부위에 바르면 타박상과 어혈을 없애는 효능도 있다고 합니다.”

“연(蓮)이 그렇게 다양하게 쓰이는지 몰랐습니다.”

이기석은 연(蓮)의 다양한 쓰임을 듣고 놀란 것 같았다.

“벼농사를 대체할 수 있는 작물이기도 합니다. 이곳에 연을 재배하면 안정적으로 수익을 낼 거라고 믿습니다.”

“말씀을 들으니 가슴이 뛰네요, 빨리 연(蓮)을 재배해 보고 싶습니다.”

이기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이라도 연을 재배하고 싶은 의지가 느껴졌다. 그전에 준비가 필요했다.

난 최민성 피디에게 물었다.

“연(蓮)을 재배하기 위해서 사전준비가 필요합니다.”

고애주 작가에게 이미 필요한 사항을 전달한 상태였다.

최민성 피디도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는 눈빛으로 말했다. 필요한 것들은 준비하겠다는 사인이다.

사인을 받고 이기석에게 말했다.

“우선 연잎차를 만드는 법을 배우면 어떨까요?”

“연잎차를 배운다고요?”

이기석의 황량한 논을 보며 물었다. 아직 연을 재배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배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연밭을 준비하는 동안 미리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아서요. 전문가와 필요한 재료도 준비해 놨습니다.”

“그런 뜻이었군요.”

“그리고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에 참가해 볼 생각입니다.”

이기석에게 농특산물 대회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했다. 연(蓮)을 이용한 상품을 만들자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잎차로 도전하는 건가요?”

“대회에 나갈 상품을 정하는 건 차차 결정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농산물을 창의적으로 만드는 대회였다. 연잎차도 나쁘지 않았지만,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다.

“이제야 뭔가 시작하는 기분이네요.”

이기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제작팀에서 연(蓮) 재배에 따른 모든 준비를 맡았다.

연(蓮) 종자는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수지의 물이다.

옥천 오일장에서 자리를 구했던 것처럼 저수지의 물 정도는 쉽게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 * *

임시백 선생님의 다원이다.

그는 미리 연잎을 준비했다.

이기석과 난 임시백 선생님에게 연잎차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촬영 팀은 그림자처럼 붙어 그 모습을 찍었다.

임시백 선생님은 품질이 좋은 연잎을 두고 우리에게 말했다.

“연잎차를 만들 때는, 너무 어리거나 오래된 잎보다 적당하게 자란 잎을 사용합니다. 잎에 병이나 상처가 있는지 살피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는 연잎을 깨끗한 물로 씻었다.

“연잎의 가장자리에는 이물질이 많습니다. 확실하게 이물질을 제거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는 씻은 연잎을 마른 수건으로 닦았다. 곧 마른 연잎을 작두로 잘랐다.

“연잎은 2~3mm 넓이로 잘게 썰어야 합니다.”

너무 두껍게 썰면 가공할 때 모양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연잎을 썰며 굵은 잎을 가려냈다.

“이제 연잎을 덖어야 합니다.”

찻잎을 덖는 솥에 불을 지폈다. 약한 불에서 연잎을 덖었다.

“처음에 불을 세게 하면 잎이 타버립니다. 불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임시백은 불을 조절해가며 찻잎을 덖었다. 현란한 손기술이 나왔다.

녹차를 만들 때도 불을 조절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찻잎의 향을 맡으며 불을 조절해야 한다.

덖은 찻잎을 꺼내 바람에 잠시 말렸다. 그리고 왕골 돗자리에 놓고 찻잎을 손으로 문질렀다.

“이 과정을 세 번 반복하면 연잎차가 완성됩니다.”

임시백의 시범이 끝났다. 우리 그에게 배운 대로 연잎차를 만들었다.

나도 함께 연잎차를 만들었다. 이기석과 함께 연잎차를 만든 이유는 그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이기석은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함께 차를 만들며 틈틈이 그를 도왔다. 그도 조금씩 여유를 되찾는 게 느껴졌다.

“임시백 선생님보다 김덕명 씨 실력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이기석이 긴장이 풀렸는지 농담까지 했다.

이럴 때 긴장의 끈을 풀어선 안 된다.

난 그에게 말했다.

“차 만드는 기술은 이론도 중요하지만, 몸으로 익혀야 해요. 반복 학습이 중요합니다.”

이기석은 눈을 반짝였다. 오로지 연잎차를 만드는 일에만 집중했다.

드디어 연잎차를 완성했다.

이기석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만들긴 했는데 맛이 어떨지...”

맛을 평가하는 일은 임시백 선생님이 맡았다.

그는 내가 만든 연잎차를 마시며 흡족한 듯 미소 지었다.

이기석이 만든 연잎차도 한 모금 마셨다.

그는 말없이 이기석을 바라보았다. 곰 같은 사나이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갈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드디어 임시백이 입을 열었다.

“합격.”

임시백 선생님은 유쾌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기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방송 때문에 합격을 준 것만은 아니었다.

이기석이 만든 연잎차는 맛이 좋았다. 어떻게든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차 맛에 영향을 준 것 같았다.

훈훈한 촬영 현장이다.

최민성 피디와 스태프들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 * *

며칠 뒤 고애주에게 연락이 왔다.

“혹시 지금 시간 되세요?”

“지금이요?”

그녀가 당연히 서울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 지금 화개장터 매장에 있어요.”

급한 일이라며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이야기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갑자기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 농특산물 아이디어 대전에 출품할 것에 대한 문제도 아닌 것 같았다.

밝고 경쾌하던 평소의 목소리와 달리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뭔가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다. 난 급하게 매장으로 이동했다.

고애주가 노트북을 켜놓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민 있는 얼굴이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고애주는 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죠?”

“내용증명이에요.”

“내용증명이요?”

봉투를 펼쳤다.

한운남이란 사람이 보낸 내용증명이다.

저수지 물을 사용하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는 내용이다.

연(蓮) 재배를 위해 물은 필수였다. 저수지 물을 사용할 수 없다면 연(蓮) 재배가 불가능했다.

고애주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이유다.

“이 사람 만나봤나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에요.”

고애주는 당장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최민성 피디가 제작팀 전부 데려가서 부탁했어요. 사정했는데 듣질 않았어요.”

그때였다.

매장에 낯익은 얼굴이 등장했다.

곰 같은 남자 이기석이다.

“최민성 피디님에게 이야기 들었습니다.”

최민성이 그에게 상황을 알렸다. 이기석도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일은 제가 해결해 보겠습니다.”

이기석이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장한 각오라도 한 눈빛이다.

“그게 쉽지 않을 수도 있어요.”

고애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작팀이 두 손 두 발 든 일이다.

이기석 혼자서는 불가능할 거란 말이다.

“김덕명 씨와 제작진이 애써주신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연(蓮)은 지금 제 상황에 적합한 작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도움은 충분히 받았으니 이 일은 해결해 보겠습니다.”

이기석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이번 기회는 놓칠 수 없다는 의지다.

그걸 위해서는 뭐라도 하겠다는 뜻이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떻게요?”

이기석이 내 입을 바라보았다.

“우선 기석 씨에게 이 일을 맡기겠습니다. 혹시 말이 통하지 않거나 힘든 상황이 되면 저도 돕게 해주십시오.”

“네, 그때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기석은 공손한 자세로 말했다.

고애주는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 이기석이든 나든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 * *

그날 저녁, 포장마차에서 한기탁과 마주했다.

“무슨 일이야? 포장마차에 보자고 하고.”

“이기석 씨 상황 보고하려고요.”

한기탁은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난 그에게 난처하게 된 상황을 전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큰일이네.”

한기탁은 소주잔을 기울였다. 걱정하는 눈빛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물었다.

“혹시, 그 내용증명 볼 수 있어?”

사본을 챙겨두고 있었다. 그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한기탁은 문서를 유심히 보았다.

“내가 기석이 좀 찾아가 봐도 될까?”

“선배가요?”

“어쩌면 내가 도움이 될지 몰라.”

한기탁은 이기석과 친구였다. 이럴 땐 말이라도 편하게 할 사람이 필요한 법이다.

“선배 말대로 도움이 될 것 같네요. 힘든 내색도 잘 안 하는 남자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니라고요?”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뜻이야.”

“정말요? 자세히 말해 보세요.”

욕심쟁이의 약점

한기탁은 내용증명 사본을 보며 말했다.

“이 문서를 보낸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야.”

“저수지 주인을 안다고요?”

“구례는 작은 동네니까.”

그러고 보니 내용증명을 보낸 이는 한운남이다. 한기탁과 같은 한 씨다.

“집안 친적이셔, 당숙 어른.”

“정말이요? 세상 참 좁네요.”

난 일이 쉽게 해결될 거라고 여겼다.

“저수지 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건 아마 낚시터 때문일 거야.”

한운남은 저수지에서 낚시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저수지 물을 쓰면 낚시터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거라는 노파심 때문이다.

“저수지가 엄청나게 컸어요, 물을 나눠 쓴다고 해도 문제가 되진 않을 거 같았는데요.”

“네 말이 맞아. 저수지가 워낙 큰 편이라 연밭에 물을 좀 나눠도 괜찮을 텐데.”

“그럼 선배가 말씀드리면 쉽게 해결되겠네요?”

한기탁은 즉답을 피했다. 고민하는 눈치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당숙 어른을 설득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야.”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요?”

“욕심이 많기로 유명한 분이거든. 조금이라도 손해 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아. 집안에서도 그런 성격 때문에 학을 뗐을 정도야.”

“그럼 선배가 설득해도 소용없다는 뜻인가요?”

“아쉽지만, 내 설득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거야.”

“방법이 있다고 했잖아요?”

한기탁은 그제야 빙그레 웃었다.

“방법이 있긴 하지.”

“무슨 방법인데요?”

“당숙 어른에게 약점이 하나 있거든. 그 약점을 이용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 같아.”

“무슨 약점인데요?”

“그게 말이야... 당숙 어른은 겁이 좀 많은 편이야.”

“겁이 많다고요?”

한기탁은 그와 관련한 일화를 하나 들려주었다.

집안사람들만 아는 이야기라고 했다.

무더운 여름날에 벌어진 사건이다. 한기탁의 가족과 친척들이 함께 모여 나들이를 떠났다. 여름휴가 겸 떠난 여행이기도 했다.

한기탁의 가족은 지리산 뱀사골 계곡에서 피서를 즐겼다.

중학생이던 한기탁은 계곡에서 물놀이하며 놀았다. 함께 온 가족들은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더위를 날리고 있었다.

한운남은 돗자리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모든 일정이 끝날 때까지도 그는 일어날 줄 몰랐다. 이상하게 여긴 식구들이 그를 깨웠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상태가 심각했다. 가족들은 그를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의사들도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상태를 지켜보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때 한운남의 어머니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녀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묘당 보살을 찾았다.

묘당 보살은 한운남에게 안 좋은 기운이 들어갔다고 진단했다.

당장 뱀사골에 가서, 그가 누워 있던 그곳에 제사를 올리라고 말했다.

그녀는 묘당 보살이 시킨 대로 한운남이 누워 있던 곳에 제사를 올렸다.

일반적인 제사와는 달랐다. 젯상 위엔 수수와 팥만이 올라갔다.

다음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운남의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사람 같았다.

그 사건 이후, 한운남은 겁이 무척 많아졌다. 겁만 많아진 게 아니었다.

욕심도 많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상이 더 심해졌다. 가족들도 그를 멀리하게 됐다.

한기탁은 이야기 끝에 말했다.

“가족 중에서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없는 걸로 알고 있어.”

“기이한 과거를 가진 사람이네요.”

“과거뿐만 아니라 성격도 독특하지.”

“그럼 선배가 생각하는 해결 방법은 뭔가요?”

“당숙은 귀신을 무서워하는 사람이야. 그걸 역이용하면 어떨까?”

“역이용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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