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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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답사를 마치고 고애주와 함께 대전역으로 움직였다.

“부부가 정말 착하죠?”

“법 없이도 살 분들 같았어요.”

“그런데 이동식 양봉을 하는 이유가 있나요?”

고애주에게 진단한 내용을 전달했다. 밀원이 부족하다는 말에 고애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꽃이 있는 곳으로 옮겨 다니는 거네요?”

“네, 이동해 다니며 꿀을 채취하는 거죠.”

이동 양봉의 최대 장점은 꿀을 많이 채밀할 수 있는 점이다. 게다가 원하는 꿀을 만들 수 있다. 아카시아 숲에서는 아카시아 꿀이, 밤나무 아래서는 밤 꿀이 만들어진다.

물론 말처럼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지 않아요? 이동 양봉은 혼자서 어렵다고 들었는데?”

고애주는 이동 양봉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작가답게 양봉에 대해서도 취재를 한 모양이다.

“혼자서도 할 수 있게 방법을 제시해야겠지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벌을 분양받는 일은 제가 협회를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동 양봉을 하기 위한 설비가 필요합니다.”

“비용은 제작비에서 나올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참고하겠습니다.”

고애주를 대전역에 내려주고 하동으로 향했다.

이동 양봉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설비가 필요했다.

캘리포니아 농업 박람회에서 본 물건은 첨단 벌통만이 아니었다.

이동식 양봉을 위한 설비도 있었다. 박람회에서 본 물건을 이때 써먹게 될 줄은 몰랐다.

하동에 도착하자마자 이장우에게 연락했다.

그는 농업 지원센터에서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하고 있었다. 모든 샐러드 컨테이너에 태양열 집열판이 달려 있었다.

“벌써 다 붙인 거야?”

이장우가 구슬땀을 흘리며 컨테이너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다 같이 해서 어렵지 않게 끝났어.”

민요한을 포함해 샐러드 컨테이너를 담당하는 14명의 농부가 함께 있었다.

“고생했네, 나랑 잠시 이야기 좀 할까?”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장우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민요한도 거들었다.

“어디서 일 냄새가 나는데요?”

민요한이 코를 킁킁거리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저도 도울까요?”

방현식이 달려와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넌 가서 좀 쉬어.”

이장우가 웃으며 말했다. 방현식 뒤에 사람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붙어 있었다.

모두 도울 일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괜찮으니까, 다들 가서 쉬세요.”

사람들을 물리고 이장우와 민요한만이 남았다.

난 두 사람과 함께 이동식 양봉 시설에 대해 상의했다.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그렸다.

여러 개의 벌통을 한꺼번에 수납할 수 있는 일종의 벌집틀이었다. 트럭에 실을 수 있도록 제작하는 게 목표다. 꿀벌을 위한 이동식 아파트.

“트럭에 실을 수 있는 벌집틀이네, 벌집틀을 트럭에서 자유롭게 뺐다 끼었다 할 수 있는 구조고.”

이장우가 그림을 보고 말했다.

이동장소에 도착하면 벌집틀을 지지대에 고정한다. 벌집틀을 땅에 고정한 상태에서 리프트로 들어 올리는 구조다.

벌집틀을 땅에 고정한 상태에서 살짝 들어 올리면 트럭에서 분리할 수 있었다.

이동 양봉에서 가장 힘든 일은, 벌통을 차에서 싣고 내리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장비만 제대로 갖추고 있으면 혼자서도 이동 양봉을 할 수 있었다.

“가능하겠지?”

“수경재배 시설에 비해선 아무것도 아니지. 하지만 여기선 제작이 불가능해.”

이장우가 그림을 보며 말했다. ‘인천 정밀’에서 제작할 물건이었다.

“지금 당장 제작해 달라는 건 아니고, 확인 작업만 한 거야. 방송국하고 협의도 해야 하고.”

* * *

그날 밤, 잠을 뒤척였다.

머릿속에서 황규대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에게 추천한 이동 양봉을 다시 점검했다.

그가 사는 지역은 밀원이 풍부하지 않았다. 이동 양봉으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건 이동 양봉 때문이 아니었다.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동식 양봉만으로는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지가 않다.’

문제는 양봉만으로 벌이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꿀은 채밀할 수 있는 시기가 정해져 있었다. 많아도 일 년에 두 번밖에 수확할 수 없다.

나 역시 양봉을 했을 때 다른 일로 사업을 늘려갔다.

이동식 양봉 하나만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사고라도 터지면 속수무책이다.

대안이 필요했다.

양봉 말고도 수익을 낼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잠을 자기는 글렀다는 생각으로 불을 켰다.

불을 켜는 순간 구석에 놓아둔 가방이 보였다.

황규대가 나에게 줬던 물건이 떠올랐다.

가방에서 그가 준 물건을 꺼냈다.

쌍둥이를 위해 만든 도라지 조청이다.

‘이게 대안이 될 수 있겠다!’

어쩌면 양봉보다 더 큰 수익을 가져다줄 수도 있었다.

도라지 조청

방송을 통해 황규대에게 두 가지 일을 추천할 계획을 세웠다.

첫째는 이동 양봉이다. 한 번의 좌절이 있었지만, 꿀벌을 키워서 안정적으로 수익 낸 경험이 있었다. 그 일로 다시 일어서는 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회복하는데도 꼭 필요한 일이다.

둘째는 도라지 조청을 판매하는 일이다. 양봉만으로 고수익을 내기 위해선 꿀벌을 대규모로 키워야 한다. 황규대는 밀원이 부족한 곳에 살고 있었다. 대규모로 확장하기에 한계가 있다.

양봉 말고도 다른 일을 병행하면 좋을 것 같았다. 조청은 인간이 만든 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꿀벌을 키우는 부부가 조청을 만들면 화제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천식과 비염이 있는 쌍둥이에게 특효약이기도 했다.

* * *

우선 꿀벌부터 분양받아야 했다.

난 양봉협회의 박문호 회장과 약속을 잡았다. 박문호는 며칠 전에 첨단 양봉기기를 보기 위해 하동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오늘은 내가 서울로 올라왔다.

난 이장우가 제작한 첨단 벌통을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벌통은 전에 본 것과 다르게 생겼군?”

박문호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저희가 직접 만든 벌통입니다. 미국에서 사 온 것보다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됐습니다.”

박문호에게 벌통을 건넸다.

벌통 윗면에 태양열 집열판을 달았다. 전원을 연결하지 않아도 온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여름에 냉각팬이 돌아가고, 겨울엔 열선으로 내부가 따뜻해졌다.

벌통 내부를 관찰할 수 있는 카메라도 있었다.

“미국에서 사 온 것과는 비교할 수 없군, 훨씬 더 좋아졌어.”

그는 감탄한 표정으로 벌통을 바라보았다.

“부탁하면 만들어 줄 수 있겠나?”

“문제없습니다, 원하시는 만큼 제작 가능합니다.”

박문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벌통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전에 도움을 구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일인가? 말만 하게.”

“제가 이번에 방송을 하나 맡게 됐습니다. ‘농부가 희망이다’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죠. 힘든 상황에 처한 농부에게 도움을 주는 방송입니다.”

“자네와 아주 잘 어울리는 프로그램이군.”

“첫 번째 출연자가 꿀벌을 키우는 분입니다.”

박문호에게 황규대의 사연을 전했다. 질병으로 꿀벌을 전부 소각해야 했던 이야기를 했다.

사연을 듣고 박문호는 협회에 등록된 양봉 농가 목록을 훑어봤다. 황규대는 회원 목록에 없었다. 그는 독립적으로 꿀벌을 키운 사람이었다.

“안타까운 일이군. 자네가 독일까지 가서 예방약을 사 왔는데...”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법이죠, 다시 일어설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양봉을 다시 시작하는 일이라면 나도 돕겠네.”

“꿀벌을 분양받고 싶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어렵지 않네, 얼마든지 분양하겠네.”

“한 가지 더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든 말만 하게.”

“이동 양봉을 할 계획입니다, 이동 양봉 장소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동 양봉은 자리가 중요하다. 장소 문제로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정도 일이라면 문제없네.”

박문호가 웃으며 말했다. 꿀벌 분양과 이동 양봉 장소까지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해결됐다.

“그런데 그 남자는 혼자서 꿀벌을 키운다고 하지 않았나?”

박문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고애주 작가와 같은 물음이었다.

수십 개의 벌통을 차에 싣고 다니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동 양봉을 위한 설비도 만들 계획입니다.”

“설비라니 그게 뭔가?”

난 이장우에게 보여줬던 그림을 그렸다.

트럭에 수십 개의 벌통을 한꺼번에 실을 수 있는 장치였다.

트럭과 쉽게 분리할 수도 있어서 이동 양봉에 편리했다.

박문호는 트럭과 벌집틀이 분리된다는 부분에서 눈을 반짝였다.

그런 장치가 있다면 벌통을 차에 올리고 내리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정말 편리하게 이동 양봉이 가능하겠군.”

태양열 집열판이 달린 벌통보다 이동 양봉 장치가 더 탐나는 것 같았다.

“벌통이며 이동 양봉 장치까지 전부 협회에 필요한 물건이네.”

박문호는 눈을 껌뻑거리며 물었다. 방송이 끝나면 언제든 제작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일정을 조율하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양봉협회에 온 김에 양초 학교에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양초 학교 복도에서 정가희와 마주쳤다.

“김덕명, 살아 있었네.”

“오래간만이네, 정가희. 잘살고 있었어?”

“나야 항상 잘살고 있었지, 너야말로 소식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기야?”

“미안, 그동안 일들이 많았어. 그런데 이건 무슨 소리야?”

복도 끝에 음악 소리가 들렸다.

“댄스 동아리 연습하는 소리.”

“댄스 동아리?”

음악이 흘러나오는 그곳으로 다가갔다. 정가희의 말대로 아이들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난 창 너머로 아이들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가희도 옆에서 함께 보았다.

“아이들이 원해서 만들었어, 공부만 할 순 없잖아.”

그때였다. 연습실 문이 열렸다.

한 소녀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낯익은 얼굴이다.

“김덕명 선생님!”

목소리를 들으니 누군지 알 거 같았다.

빵 가게 도둑으로 몰렸던 소녀였다. 보지 못한 사이에 훌쩍 커버린 것 같았다.

남아영이다.

“아영아.”

“언제 오셨어요?”

남아영이 나오자 연습실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다른 아이들의 얼굴도 새록새록 기억났다.

“이제 빚 갚으세요.”

남아영이 대뜸 말했다.

“무슨 빚?”

“너무 오랜만에 나타나셨잖아요, 맛있는 거 사주세요.”

난 아이들과 함께 분식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떡볶이와 순대를 먹으며, 그간 양초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밝은 모습이 보기 좋았다.

* * *

하동으로 내려가기 전, 만나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난 여의도로 향했다. 고애주가 커피숍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1화 구성안은 거의 다 썼어요, 조만간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벌써 다 쓰셨다고요?”

“왜 그렇게 놀라세요?”

“더 넣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요.”

고애주는 수첩부터 꺼냈다.

“말씀하세요, 내용만 좋다면 최대한 반영할 테니까요.”

“정말인가요?”

“방송작가에 원고 마감은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죠.”

웃으며 말했지만, 방송작가의 비애처럼 들리기도 했다.

“양봉만으로 수익이 충분하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도 그 생각을 한 적 있어요. 황규대 씨가 소규모로 양봉을 하셔서...”

“추가로 수익을 낼 수 있다면 어떨까요? 양봉도 하면서.”

“그럼 아주 좋겠죠.”

“꿀 말고 다른 것도 팔 수 있게 도우면 어떨까요?”

“다른 거라면?”

“도라지 조청이요.”

“그건 파는 게 아니라고...”

“쌍둥이를 위해서 만들었죠. 그래서 더 정성을 들였고요.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조청이라면 사람들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요?”

“말씀을 들어보니 괜찮을 거 같네요.”

“양봉은 집약적인 일입니다. 수확도 일 년에 두 번밖에 할 수 없죠. 소규모로 양봉을 하면 수입도 제한적이고요. 다른 일을 병행할 수밖에 없죠. 그들 부부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왜 다른 일은 안 하셨을까요?”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니까요. 농사도 목돈이 들어가는 일이죠. 마음만 있다고 쉽게 할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때부터 고애주가 수첩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 같았다.

그녀가 펜을 멈출 때까지 난 가만히 기다렸다.

메모를 멈춘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제가 가끔 이럴 때가 있어요.”

“괜찮습니다.”

“도라지 조청을 만들 게 된 이야기를 풍부하게 넣으면 좋을 거 같아요. 도라지 조청을 만드는 과정도 자세하게 담고요.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이 나올 수도 있을 거 같네요.”

“조청은 인간이 만든 꿀이라고도 불립니다. 황규대 씨 가족의 경우엔, 꿀벌을 키우는 쌍둥이 엄마가 아이들을 위해 만든 꿀인 셈이죠.”

“인간이 만든 꿀이라, 멋진 표현이네요. 도라지 조청 아이템은 최대한 살려 볼게요. 황규대 씨 부부와도 협의하고요.”

고애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혼자서 중얼거렸다.

“한의사 선생님도 등장시켜 볼까요?”

좋은 생각이다. 검증까지 받는다면 사람들의 호기심이 더 증폭될 거다.

그때 고애주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시만요, 최민성 피디예요.”

생각보다 통화가 짧게 끝났다.

“별 내용 아닌가 보네요.”

“그게 아니라 이쪽으로 오겠다고 하네요.”

“여기로요?”

최민성 피디가 커피숍에 도착했다. 그는 우릴 보자 읍소하듯 말했다.

“다들 최선을 다하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제작팀도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서.”

방송 프로그램은 속도 싸움이기도 했다. 빨리 잘 찍어서 완제품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미리미리 준비해 놓기를 바랐다. 더 기다릴 수도 없다는 표정이다.

“그럼 오늘 당장 촬영할 수 있을까요?”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의 요구를 들어줄 방법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물론입니다, 지금 당장 촬영 팀을 부르죠. 그런데 장소는 어디인가요? 하동인가요?”

“하동이 아니라 인천입니다.”

* * *

‘인천 정밀’로 가는 길에 이장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우야, 준비는 잘하고 있어?”

이장우에게 이동식 양봉 장치를 만들 준비를 해달라고 말했다. 우선은 준비였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그때 제작에 돌입해 달라고 부탁했다.

“준비는 끝났지.”

“곧 촬영 팀과 함께 도착할 거야.”

“오늘이 그날이구나.”

촬영팀과 함께 ‘인천 정밀’에 도착했다.

이장우가 밖으로 나와 촬영 팀을 안내했다. 이동춘의 차림이 평소와 달랐다.

작업복치고는 고급스러워 보였다. 심지어 새 옷 같았다.

“평상시처럼 자연스럽게 하시면 됩니다, 카메라 의식하지 마시고요.”

최민성 피디가 나와 ‘인천 정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장우와 난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일하는 중간에 하는 인터뷰도 어색하지 않았다.

“이동 양봉 장치는 트럭에 싣는 건가요?”

“네, 트럭에 탑재할 수 있는 특별한 구조물이죠.”

“벌집들이 층층이 있는 게 꿀벌 아파트 같네요.”

카메라가 이동춘에게 옮겨갔다.

이동춘은 평소와 달리 자연스럽지 않았다. 카메라 때문인지 긴장한 것 같았다.

“인천 정밀은 김덕명 씨와 어떤 관계인가요?”

“김덕명 씨와 인천 정밀은 아주 긴밀한 관계입니다.”

이동춘의 말은 거기서 멈췄다. 평소의 그라면 너스레를 떨었을 것이다. 입이 굳었는지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이장우가 이동춘을 대신해 인터뷰했다.

지리산 농부들과 인천 정밀이 협업으로 만든 수경재배 시스템과 함께했던 역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했다.

이장우가 인터뷰하는 동안 난 이동춘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이거 하나 드세요.”

가방에 있던 드링크제였다. 양초 학교의 남아영이 선물로 건넨 물건이다.

“고맙습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잘하실 거예요, 한 번 더 도전해 보세요.”

최민성 피디에게, 이동춘에게 기회를 한 번 더 달라고 요청했다.

두 번째 인터뷰는 긴장하지 않았다. 평소처럼 유머러스하게 말했다. 자양강장제가 힘을 준 모양이다.

* * *

고애주의 구성안에 새로운 내용을 넣기 전에 부부에게 의견을 물었다.

황규대는 박은희와 상의했다.

박은희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당신이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돼. 도라지 조청은 원래부터 파는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아니에요,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요. 할게요.”

“정말이야?”

박은희는 방송에 출연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했다. 그녀가 흔쾌히 승낙하자 황규대는 마음이 놓였다.

양봉만으로는 생활이 빠듯했다. 쌍둥이를 위해서라도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고애주 작가에게도 의견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했다.

시간이 지나 약속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촬영 전날 황규대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 잘 할 수 있을까?”

황규대의 목소리에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일상을 모두 공개해야 했다.

아내 박은희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잘할 거예요,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아빠이자 남편이니까.”

“고마워, 역시 당신밖에 없어.”

황규대보다 박은희의 가슴이 더 떨렸다.

그녀가 만드는 도라지 조청에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이동양봉과 아내의 비밀

첫 촬영 날이다.

나를 포함한 방송 스텝들이 황규대의 집에 도착했다.

촬영 전, 최민성 피디가 오늘 찍을 내용을 전달했다.

오전에 황규대가 양봉하며 겪었던 일들을 묻는다.

꿀벌까지 도착하면 곧바로 이동 양봉을 시작할 예정이다.

황규대는 긴장한 듯 얼굴이 굳어 있었다.

전달 사항을 다 듣고 황규대에게 말했다.

“최대한 카메라를 의식하지 마세요.”

“안 그러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평소엔 말을 잘하던 사람도 카메라 앞에 서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도 한다.

최민성 피디는 노련하게 움직였다. 무턱대고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다.

스텝들이 장비를 점검하는 동안 황규대를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촬영할 예정입니다, 억지로 꾸며낸 모습보다 일상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더 좋으니까요. 촬영 중간에 인터뷰를 넣을 생각이에요. 양봉을 시작하게 된 계기며 꿀벌이 죽은 사연도 물을 거고요. 불편한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황규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민성은 이야기를 마치고 나에게 꿀벌과 이동 양봉 장치에 대해서 조용히 물었다.

난 모든 조치를 다 취했다.

“오늘 중으로 모두 도착합니다.”

* * *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황규대가 양봉장을 정리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그는 잿더미로 변한 양봉장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카메라가 그를 쫓으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물었다.

긴장했던 황규대는 조금씩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술술 털어놓았다.

사법 고시생이었던 과거의 일과 지금의 아내를 만나 정착하기까지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냈다.

아내 박은희와 쌍둥이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겼다.

천진한 아이들은 카메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집안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게 반가운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최민성이 나에게 다가왔다.

“이제 김덕명 씨가 출연하실 때가 됐습니다.”

황규대를 만나는 장면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난 상황을 진단하고 그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말했다.

황규대는 나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감사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잠시 후 예정된 물건이 도착했다.

인천 정밀에서 만든 이동 양봉 장치였다.

이장우가 직접 트럭을 몰고 왔다.

카메라를 든 스텝들이 동선이 겹치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이게 뭔가요?”

황규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동 양봉을 위한 장치입니다.”

이장우는 장치를 트럭에서 내렸다.

완성된 이동 양봉 장치는 제법 그럴싸한 모습이었다.

4단으로 구성됐고, 층마다 10개의 벌통을 수납할 수 있었다.

거대한 형틀은 트럭에서 쉽게 분리할 수 있는 구조다.

양쪽에 4개의 지지대를 세우고, 높이를 조절하면 트럭 바닥과 공간이 생겨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장우는 사용방법을 황규대에게 알려주었다.

황규대는 트럭에 이동 양봉 장치를 탑재하며 방법을 익혔다.

“사용하는 방법이 생각보다 쉽네요.”

황규대는 얼굴이 밝아 보였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최민성 피디가 카메라를 들고 다가왔다.

“그런데 꿀벌은 안 오나요?”

“이제 곧 올 겁니다, 낮에 움직이면 꿀벌이 스트레스를 받아서요.”

벌통은 낮에 움직이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꿀벌이 모든 활동을 마친 후에야 가능했다.

이동 양봉 장치부터 먼저 도착한 까닭이다.

난 벌통이 도착하기 전까지 황규대가 이동 양봉 장치를 완벽하게 습득하기를 바랐다.

스텝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벌통을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트럭과 함께 낯익은 승용차도 한 대 보였다.

승용차에서 박문호가 내렸다.

“회장님까지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동 양봉 장치도 구경할 겸 왔네.”

그는 밀원이 있는 곳까지 미리 알아봐 주었다.

이곳까지 와주다니 고마웠다.

“꿀벌은 우리 협회에서 제공하는 걸세.”

박문호가 웃으며 말했다. 꿀벌은 가족을 위한 선물이라고 했다.

황규대와 박은희는 그 말을 듣고 감사를 표했다.

벌통은 정확하게 40개였다. 난 꿀벌들의 상태를 살폈다.

건강하고 기세가 좋은 꿀벌이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할 일이 많았다.

황규대와 난 두 팔을 걷어붙이고 벌통을 이동 양봉 장치에 실었다.

이동 양봉 장치에 벌통을 전부 싣고 벌통 입구에 그물망을 붙였다.

이동 중에 꿀벌이 밖으로 나오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황규대에게 그물망을 붙이는 법을 알려주었다.

“말씀대로 오늘 밤 떠나나요?”

황규대는 그물망을 붙이며 물었다.

“피곤하시면 내일 가셔도 됩니다.”

“아니요, 전혀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피곤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힘이 넘쳐 보였다.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가 불타고 있었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 기운이 났다.

“지금이 아카시아가 한창입니다. 이동 양봉은 때를 놓치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이때를 놓치면 가을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죠.”

“가을까지 기다릴 수 없죠.”

황규대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동 양봉 장치 제작과 꿀벌 분양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꿀을 모으기 위해서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어둠 속에서 카메라가 우리를 찍고 있었다.

황규대도 이젠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다.

떠날 준비가 다 됐다.

최민성 피디에게도 목적지를 공유했다. 스텝들도 차에 올랐다.

집을 떠나기 전 황규대의 아내 박은희가 차로 다가왔다.

“이거 챙겨가야죠.”

“깜빡했네, 고마워. 잘 다녀올게.”

“몸조심하고요.”

“당신도.”

옷가지와 먹을 것들이었다. 꿀을 딸 장소로 이동하면 최소 5일에서 7일은 밀원지에서 머물러야 했다.

꿀벌이 꿀을 모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힘든 만큼 보상도 충분했다. 일주일 만에 꿀을 수확할 수 있었다.

이동 양봉을 권한 이유이기도 하다. 시기가 맞으면 수익을 바로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 * *

목적지는 칠곡에 있는 칠암산이었다. 이름이 붙은 산이긴 하지만 개인소유의 산이었다.

칠곡은 아카시아 축제가 벌어질 만큼 아카시아로 유명하다.

이동 양봉에서 가장 중요한 건 채밀 장소다. 낚시처럼 주요한 포인트가 있는 것이다.

칠곡의 칠암산도 포인트 중 하나였다. 이맘때면 전국의 양봉가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아카시아꿀을 따기 위해서다. 자리싸움도 치열하다. 간혹 싸움이 붙는 경우도 있다.

우리에게는 그럴 염려가 없었다. 박문호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동 양봉의 전문가였다. 전문가답게 주요한 포인트들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칠곡 칠암산 포인트 지점엔 땅까지 사 놓았다. 주차 공간에 컨테이너 집까지 있었다.

박문호가 양봉업에 종사할 때 찾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우리를 위해 장소를 내주었다.

새벽 시간, 칠암산 포인트에 도착했다. 아카시아 향이 진동했다.

냄새에 취할 지경이었다.

“여기에 양봉 장치를 내려놓죠.”

스텝들도 차에서 내렸다. 그들의 손에는 언제나 카메라가 붙어 있었다.

황규대와 난 이동 양봉 장치를 내릴 곳을 살폈다.

장치는 트럭에서 쉽게 분리될 뿐만 아니라 넓게 펴는 것도 가능했다.

4단으로 만든 이동 양봉 장치를 활짝 개방할 수 있는 것이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양봉 장치를 설치했다.

“꿀벌들이 입구 앞에 뭉쳐 있네요.”

황규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벌통을 바라보았다.

꿀벌들이 벌통을 나가려는 듯 입구 앞에서 앵앵거렸다.

그물망으로 막은 이유다.

“지금은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래요. 이럴 때 급하게 열면 꿀벌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수도 있어요.”

“정말이요?”

“이럴 때는 이걸 사용하세요.”

난 그에게 물뿌리개를 건넸다.

“물을 조금 뿌려주면 진정이 될 거예요.”

황규대는 물뿌리개를 이용해서 그물망에 물을 뿌렸다. 그물망에 모여 있던 꿀벌들이 벌집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효과가 있네요.”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이제 꿀벌들이 일할 시간이었다.

* * *

칠곡에서 사흘이 지났다. 난 황규대에서 꿀벌을 관리하는 요령과 분봉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꿀벌을 키워본 경험이 있었기에 쉽게 알아들었다.

스텝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우리의 모습을 담았다.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최민성 피디도 초췌해 보였다.

점심을 먹을 때 그가 나에게 물었다.

“여기에 계속 계실 필요는 없습니다. 김덕명 씨 분량은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요.”

“아닙니다, 같이 있어야죠. 피디님은 이동 양봉 과정을 전부 찍으실 생각이시죠?”

“네, 될 수 있으면 전부 찍을 생각입니다.”

최민성 피디는 완벽주의자였다. 적당하게 찍어서 편집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벌통이 제법 묵직해졌다. 이제 칠곡을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 * *

그 시각, 고애주 작가는 옥천 황규대의 집을 찾았다.

이미 구성안 작업이 끝났고, 촬영도 시작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가 촬영지에 가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박은희가 그녀에게 만날 것을 부탁했다. 아이들 때문에 움직일 수 없다며 사정을 말했다.

고애주는 잠시 망설였다. 다음 출연자 섭외와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리가 복잡했다. 그녀가 다시 옥천으로 향한 건 박은희의 말 때문이었다.

“도라지 조청에 말 못할 사연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남편에게 숨긴 사실이죠. 그것에 대해 상의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고애주는 박은희의 말을 듣고 호기심을 느꼈다.

분명 도라지 조청은 그녀가 스스로 터득해서 만들었다고 했다. 거기에 어떤 사연이 담겨 있는지 궁금했다.

혼자서 그곳까지 가야 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고애주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옥천으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바쁘실 텐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어요.”

고애주는 능청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웃으며 말했지만 오는 길이 만만치는 않았다. 부부의 집은 그만큼 외진 곳에 있었다.

“들어가시죠.”

고애주는 박은희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박은희는 건넌방을 잠시 살폈다.

고애주가 오기 전 아이들은 마당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지금은 방에 누워 낮잠을 자는 중이었다.

“차 한잔하시겠어요?”

“좋죠.”

“도라지 조청차도 괜찮으시죠?”

“그것도 차로 마시나요?”

“그냥 먹어도 좋지만, 차로 먹어도 좋습니다.”

박은희는 고애주에게 도라지 조청차를 건넸다.

“이렇게 먹어도 맛이 괜찮네요, 실력이 좋으세요. 팔면 잘 팔릴 거 같아요.”

고애주는 잠시 박은희의 눈을 살폈다. 이제 슬슬 숨겨둔 이야기를 꺼낼 눈치였다.

박은희가 입을 열었다.

“도라지 조청의 비법은 시아버지가 전수해 주셨습니다.”

“시아버지요?”

“네, 시아버님은 한의사로 일을 오래 하셨습니다. 아이들의 증세를 말씀드렸더니 도라지 조청을 추천해 주셨죠. 만드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알려 주셨고요.”

“아~ 황규대 씨 아버님이 한의사셨군요.”

고애주는 의문이 들었다. 한의사 시아버지가 알려준 대로 도라지 조청을 만든 게 그리 큰 문제로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과 시아버님 사이에 문제가 있습니다.”

박은희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황규대는 오랜 고시 생활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 거는 기대가 컸다. 아버지는 그가 판검사가 되길 바랐다. 황규대가 고시를 포기하겠다고 말했을 때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다.

갈등의 골은 깊어 갔고, 아버지는 두 사람의 결혼식도 참석하지 않았다. 황규대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고애주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박은희를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서 가장 힘들었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박은희 씨는 시아버님과 연락하고 계셨네요?”

“네, 남편에게는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어요. 도라지 조청에 관해서도요.”

“저를 부른 이유가 뭔가요?”

고애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 기회에 남편과 아버지의 관계가 회복됐으면 좋겠어요.”

박은희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양봉으로 잘 되는 일보다 그 일을 더 바라는 눈빛이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 * *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벌통에 꿀이 가득 찼다.

황규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최민성 피디는 다음에 찍을 내용을 준비하고 있었다.

황규대의 아내 박은희가 만드는 도라지 조청이다.

아버지와 아들

일주일간의 촬영이 끝나고 잠시 휴식이 주어졌다.

최민성 피디는 조만간 다음 촬영 일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칠곡에 있는 동안 미뤄뒀던 일을 해야 할 순간이다.

샐러드 컨테이너 앞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백민석이다.

“보여줄 게 있어.”

그는 샐러드 컨테이너 애플리케이션을 작동시켰다.

[빛 8,500lux]

[온도 21도]

[상대습도 범위 65%]

[이산화탄소 농도 400ppm]

[물의 흐름 정상]

[영양액 정상]

적정 온도를 초과한 상태였다.

“온도가 높네?”

백민석은 버튼을 눌러 온도를 조절했다.

[온도 19도]

온도며 습도 등 다른 것들도 제어할 수 있었다.

“드디어 완성했구나, 수고 많았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샐러드 컨테이너 내부 카메라]

전에 못 보던 새로운 메뉴였다.

백민석이 그 버튼을 누르자 샐러드 컨테이너 내부가 보였다.

요청했던 모든 메뉴가 전부 들어갔다.

샐러드 컨테이너 내부 환경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물이 자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해, 최고야!”

프로그램이 완벽하게 구현돼 있었다.

백민석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제 안정화 작업을 할 거야, 아직 버그가 좀 있어서. 우선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그동안 작업했던 것들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엄쉬엄해. 몸도 살피면서.”

“너도 만만치 않은 거 같은데? 얼굴이 완전 반쪽이 됐어.”

“오래간만에 꿀벌들과 씨름하느라고 그랬지.”

몸은 지쳐 있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우린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언젠가 플랜트팩토리를 능가하는 수경재배 시설을 만들 것이다.

* * *

사무실에서 한기탁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바빠?”

“촬영 때문에 좀 바빴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한기탁은 촬영 중에도 전화를 몇 번 했다. 일이 끝나는 대로 사무실에서 만날 걸 요청했다.

“샐러드가 엄청 잘 팔리고 있어.”

“정말요?”

한기탁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백민석에 이어 기분 좋은 소식이다.

이번엔 요양원이었다. 영업의 비밀은 입소문이었다. 우리가 재배하는 샐러드가 병원 사람들의 입을 통해 다른 곳으로 전파되고 있었다.

질기지 않은 잎사귀에 아삭한 식감이 좋다는 평이 많았다.

물론 한기탁의 영업력도 한몫했다. 그는 학교, 회사, 수련원 등 단체로 급식하는 시설을 찾아다니며 우리 샐러드를 알리고 있었다.

“병원에 샌드위치 매장 그리고 요양원까지. 앞으로 더 늘어날 거야.”

한기탁은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샐러드 컨테이너가 더 필요할 거 같아.”

“아무래도 샐러드 컨테이너 14개로는 한계가 있죠.”

“네가 대규모 시설을 만들 계획이라고 했지만 그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잖아. 펀딩받는 과정도 필요하고. 그래서 말인데 샐러드 컨테이너를 더 만들면 어떨까?”

현재 가동 중인 샐러드 컨테이너는 하동군과 합작한 일이다.

한기탁은 지리산 농부들 자체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제작하고 판매까지 하자고 말했다.

청년 농부 지원사업과 별개의 일이다.

문제가 될 요소는 없었다. 오히려 하동군에서 더 좋아할 일이기도 했다. 샐러드 컨테이너가 더 많아지고 성공적으로 운영될수록 하동군의 업적은 커지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나랑 상의하고 싶은 내용이 인천 정밀과 관련한 내용이죠?”

“맞아, 지금처럼 외주 제작사 관계로 지내는 게 좀 별로인 거 같아. 불편한 점도 많고.”

한기탁은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나도 고민했던 일이었다.

지금까지 샐러드 컨테이너를 제작하는 일은 인천 정밀과 협업했다.

하동군과 하는 지원사업이었기에 오히려 외주 제작사로 일하는 게 편했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단순히 샐러드 컨테이너 제작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규모 단지를 위해서는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선배 말에 동감해요.”

“그런데 인천 정밀 쪽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

한기탁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장우와는 개인적으로 교감하고 있었다. 그가 하동에 내려왔을 때도 지리산 농부들과 함께 일할 것을 말하곤 했다. 구체적으로 방식을 논의하진 않았지만, 그도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동춘이었다. 이장우의 아버지이자 인천 정밀의 실질적인 주인이다. 농담처럼 지리산 농부들과 하나가 될 것을 말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 *

우선 이장우에게 전화로 마음을 전했다. 예상했던 대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도 아버지를 걱정했다. 인천 정밀은 이동춘의 인생이 녹아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이장우에게 연락이 왔다. 이동춘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난 한기탁과 함께 인천으로 향했다.

“아버님 반응은 어떠시대?”

“별다른 말씀이 없었다고 하네요. 그저 만나서 이야기 나누시겠다고...”

“설마 반대하시는 건 아니겠지?”

난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많은 일을 했고, 앞으로도 할 일이 많았다.

이장우가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웬일이야? 마중을 나와 있고.”

“아버지가 시켰어.”

“아버님이?”

이장우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모르겠다는 몸짓을 했다.

한기탁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이동춘은 작업복 차림이 아니었다. 방송 촬영 때 입던 새 옷을 입고 있었다.

이동춘은 커피 믹스를 타서 나와 한기탁에게 주었다.

“먼 길 오시느라고 많았습니다, 장우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처음 덕명 씨를 만났을 때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인연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긍정에 가까운 말이다. 한 가지 걸리는 건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경직돼 있다는 것이다.

난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외주제작사가 아닌, 지리산 농부들의 일원이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만약 그게 불편하시면 지금처럼 관계를 유지하셔도 좋습니다.”

이동춘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지리산 농부들의 계획을 물어봐도 될까요?”

그는 샐러드 컨테이너 이후의 계획을 묻고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이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하동에 대규모 농장을 만들 계획입니다. 샐러드 컨테이너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요. 그 시설을 제작하고 유지하는데 인천 정밀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내 말을 듣고 이동춘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평소와 다른 얼굴로 변했다.

그는 토해내듯 말했다.

“기술 하나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 욕심 때문에 아들도 엔지니어가 됐죠. 하지만 고작 이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동춘은 이장우와 눈을 마주쳤다.

이장우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것 같았다.

나와 한기탁도 숨죽여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의 기술력을 알아봐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누군가에 인정받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방송국에서 촬영까지 나왔고요. 저와 아들도 지리산 농부들의 꿈을 위해서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이동춘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전한 것이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나도 그 마음에 답했다.

“저희가 더 감사합니다,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난 이동춘의 손을 잡았다. 거친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 * *

당장 인천 정밀이 하동으로 내려올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은 자회사처럼 움직이는 걸로 합의했다.

세부적인 조정은 한기탁과 이장우가 맡기로 했다.

“선배 먼저 하동으로 내려가세요.”

“넌 안 가?”

“방송국에서 호출이 왔어요.”

“수고해, 인천 정밀하고 남은 문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내가 인천에 있는 걸 알았는지, 고애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시나 하고 전화 드렸는데 가까운 곳에 계셨네요.”

고애주는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도라지 조청 문제로 상의할 것이 있다고 했다.

여의도 앞 커피숍에서 그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도라지 조청에 작은 문제가 생겼어요.”

고애주는 커피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무슨 문제죠?”

“부자지간의 문제요.”

도라지 조청에 부자지간의 문제가 있다니 숨은 뜻이 궁금했다.

고애주는 박은희와 만났던 이야기를 했다.

황규대와 그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법고시를 포기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틀어진 사연이다.

그 사건 이후로 아버지와 아들은 관계가 깨졌지만, 아내 박은희는 시아버님과 연락하고 있었다.

도라지 조청은 시아버지가 알려준 특효약이었다.

고애주가 사연을 전하고 말했다.

“박은희 씨가 가장 고생했을 거예요.”

“정말 그랬겠네요.”

“박은희 씨는 이번 방송을 통해서 부자의 관계가 회복되길 바라고 있어요.”

“황규대 씨 아버님이 한의사라고 했죠?”

“네, 한의사라고 했어요.”

“그분도 방송에 출연시키면 어떨까요?”

“우리 프로그램에요?”

“작가님이 그때 말씀하셨던 게 기억나서요. 한의사도 등장시키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아버님 생각을 알아보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고애주는 고민했다. 그녀는 휴먼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하며 이런 상황과도 자주 마주쳤다. 대본과 달리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일이 많았다.

좋은 마음에 시작한 일이 원망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고애주가 답을 미루고 있었다.

“작가님은 어떻게 되길 원하세요?”

“부자간의 관계도 회복하고 도라지 조청도 잘 팔리길 바라죠.”

“박은희 씨 생각도 마찬가지고요?”

“박은희 씨는 남편과 시아버님 관계 개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어요.”

“그럼, 이러면 어떨까요?”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신가요?”

난 황규대와 아버지의 만남을 주선하자고 제안했다.

앞으로 촬영할 내용 중에 도라지 조청과 꿀을 파는 장면이 있었다.

옥천에서 열리는 오일장에서였다. 이미 상인회의 도움을 받아 자리까지 배정받았다.

그날 부자가 만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괜찮을까요?”

고애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물론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할 일이요?”

“작가님과 제가 한 명씩 맡아서 의사를 확인해보는 겁니다.”

“한 명씩 맡아서요?”

화해의 조건은 마음에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둘 중 하나라도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만남은 성사될 수 없었다. 하지만 둘 다 혹은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화해하고자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관계가 회복될 여지가 있다.

“그럼 제가 황규대 씨를 맡아도 될까요?”

고애주가 부탁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이미 황규대의 아버지에 대해서 알아본 것 같았다.

맡기 곤란한 점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그럼 제가 황규대 씨의 아버님을 맡죠.”

“정말 그래 주시겠어요?”

“황규대 씨 아버님이 좀 무서운 분인가 봐요, 고 작가님이 피하는 걸 보면?”

“좀 유별난 분이라고 들었어요.”

난 방송의 진행자인 동시에 농부들의 고민을 해결사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아버님부터 만나보겠습니다. 두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만날 의사가 있다면 만남을 주선하는 걸로 하고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동 양봉은 촬영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이제 도라지 조청 만드는 과정과 장터 장면을 찍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황규대 부자의 모습도 나올 것이다.

* * *

고애주 작가에게 황규대의 아버지에 관한 정보를 들었다.

이름은 황만식. 한의사 경력 30년의 명의이다.

황만식은 동대문에 한의원을 개업했다. 작은 규모였고 단골 위주로 손님을 받았다.

지금은 제법 유명한 한의원 중 하나가 됐다. 황만식은 침과 뜸에 능했다.

그는 약을 거의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최대한 침과 뜸으로 치료했다.

훌륭한 치료 기술을 가졌다고 사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황만식은 괴팍한 성향의 인간이었다. 까다롭고 별난 사람이다.

남이 하는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고애주가 그를 꺼렸던 까닭이다.

촬영 전에 그에게 의사를 확인해야 했다.

황만식의 한의원에 도착했다.

내 옆에는 나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있었다.

난 그녀에게 물었다.

“이곳이 맞나요?”

“네, 시아버님이 하시는 한의원 맞아요.”

박은희가 말했다.

나 혼자 왔다가는 말도 붙이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든든한 지원군이 필요했다.

그녀와 함께 한의원 안으로 들어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황만식의 한의원은 한산했다. 접수를 담당하는 여자가 박은희를 알아봤다.

“원장님 안에 계세요.”

난 박은희와 함께 원장실로 들어갔다.

그녀와 이곳을 찾기 전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남편과 시아버지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뭐든 하겠다는 태도였다.

원장실에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미간에 11자 주름이 깊게 파인 사람이었다. 인상만으로도 고집스러워 보였다.

박은희가 남자에게 인사했다. 그가 황규대의 아버지 황만식이다.

“무슨 일이냐?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고?”

황만식이 건조한 말투로 물었다. 나를 경계하는 눈빛이다. 예고하지 않은 방문이었다.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아드님을 돕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을 돕고 있다니요?”

접수를 담당하는 여자가 차를 들고 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한 여자는 말없이 차만 놓고 밖으로 나갔다.

난 그에게 ‘농부가 희망이다’를 진행하고 있음을 알렸다.

황규대는 첫 번째 출연자이며, 이동 양봉을 전수했다고 말했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입니까?”

황만식이 내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물었다. 아들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다.

“아드님과 만나실 생각이 있는지 여쭈러 왔습니다.”

황만식은 대꾸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의자에 앉아 있던 박은희가 바닥에 꿇어앉았다.

“아버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손자들을 위해서라도...”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마음먹은 것 같았다.

황만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거라.”

황만식은 단호하게 말했다. 박은희는 그의 말을 따랐다.

박은희가 자리에 앉자 황만식이 입을 열었다.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난 아들이 잘되길 바랐을 뿐이요.”

황만식은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은 아들을 위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아들에게 최고의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아들이 그 길을 포기하는 순간 관계도 깨졌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의 장황한 이야기가 긴 변명처럼 느껴졌다. 지금도 자신에겐 아무 잘못도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이 한 일은 무조건 옳았다는 태도다. 지금도 아들 탓만 하고 있었다.

난 그에게 말했다.

“최고의 삶보다 행복한 삶을 선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황만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미간의 11자 주름이 더 깊게 파였다.

황규대는 벌통에 아카시아 꿀이 가득 든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뭘 원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제가 아는 친구 중에 아버지와 연을 끊고 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화해도 못 했죠. 그 친구는 장례식장에서 후회된다는 말을 여러 번 했습니다.”

회귀 전 내 이야기다. 나 역시 아버지에게 마음의 문을 닫았던 경험이 있다.

그가 마음을 열길 바랐다.

“그만하십시다.”

황규대는 단호한 어투로 더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의사표시를 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준비한 봉투를 꺼냈다.

“이게 뭔가요?”

“선택은 아버님 자유입니다.”

봉투 안에는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그날 황규대는 옥천 오일장에서 아카시아 꿀과 도라지 조청을 팔기로 예정돼 있었다.

원장실을 나가려는 순간 황만식이 박은희에게 물었다.

“쌍둥이는 좀 어떠냐?”

“많이 좋아졌습니다. 도라지 조청도 꾸준히 먹고 있고요.”

마지막 그의 말에서 난 희망을 엿봤다.

고집스러운 노인이긴 했지만, 손자들이 보고 싶은 평범한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도라지 조청을 만드는 법까지 알려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오일장에 모습을 드러내길 바랐다.

* * *

그 시각, 황규대의 집.

황규대는 칠곡에서 딴 아카시아 꿀을 유리병에 담고 있었다.

촬영 팀은 황규대가 꿀을 담는 모습을 담았다.

오늘 촬영은 그걸로 끝이었다.

촬영이 끝날 무렵 고애주가 황규대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작가님도 오셨네요?”

“황규대 씨의 의견을 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제 의견이요?”

황규대는 일손을 잠시 멈췄다. 고애주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진지해 보였다.

고애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박은희 씨에게 아버지와의 일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이야기를 했나요?”

황규대는 당황한 얼굴이다.

“박은희 씨는 황규대 씨와 아버님의 관계가 회복되길 바라고 있어요.”

고애주는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김덕명 씨와 함께, 아버님 의사를 확인하러 갔습니다.”

“아버지에게 갔다고요?”

김덕명이 이른 아침에 박은희를 태우고 나갔다.

도라지 조청을 촬영하기 전에 할 일이 있다고 말했다.

황규대는 별일 아니라고 여겼다. 아버지를 만나러 갈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고애주는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도라지 조청을 만드는 법을 알려준 사람은 아버님이세요.”

“아버지가요?”

황규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내가 지인을 통해 알아낸 방법이라고 했었다.

도라지 조청에 아버지 이야기는 없었다. 물론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면 싫어했을 것이다.

“아버지와는 오랜 시간 연을 끊고 살았습니다. 제가 마음을 연다고 해도 아버지가 받아주지 않을 겁니다.”

황규대는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예전과 같진 않았다. 꿀벌을 잃고 크게 실패했을 때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선뜻 나설 수 없었다. 지금은 원망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아버지를 만난다면 화해할 의사는 있으신 거죠?”

황규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애주는 그제야 안심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인가요? 아버지가 도라지 조청을 만드는 법을 알려줬다는 게?”

“아이들이 아팠을 때 도움을 청했다고 했어요.”

황규대는 쌍둥이가 심하게 아팠던 순간을 떠올렸다. 수중에 돈도 없을 때였다.

그때 박은희가 백방으로 뛰며 방법을 알아냈다. 그녀는 도라지 조청을 만들어 쌍둥이에게 먹였다.

효과가 있었다. 쌍둥이들의 증상이 호전된 것이다.

그 순간 고애주에게 문자가 왔다.

김덕명에게 온 문자 메시지였다.

황만식을 만났고, 의사를 전했다는 내용이다.

오일장 장소와 시간을 알렸다고 했다.

마지막 문장을 보고 그녀는 조용히 메시지 창을 닫았다.

김덕명은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고 했다.

다만 가능성은 높지는 않았다.

* * *

박은희는 조청을 만들었다. 카메라가 그녀가 만들고 있는 조청을 잡았다.

조청(造淸)은 사람이 만든 꿀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설탕이 없던 시절 만들어낸 단맛 감미료다.

조청은 찹쌀과 엿기름을 발효해 만든다. 엿기름은 보리 씨앗을 물에 담가 싹을 낸 후 말린 것을 의미한다.

보리 씨앗을 싹이 나게 키우면 아밀라아제라는 효소가 증가한다. 씨앗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저장된 녹말을 분해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맛의 비밀이다. 녹말이 설탕처럼 변해 단맛을 내는 것이다.

촬영 팀은 도라지 조청을 만드는 과정을 세세하게 잡았다.

박은희는 찹쌀과 엿기름을 1:1 비율로 준비했다.

우선 준비한 찹쌀로 고두밥을 지었다.

밥을 하는 동안 엿기름물을 만들었다.

엿기름을 물에 넣고 박박 문질렀다. 그렇게 몇 차례 반복하면 엿기름물이 만들어졌다. 뿌연 물을 가라앉히고 윗물만 사용했다.

다 된 밥과 엿기름물을 전기밥통에 넣었다.

그렇게 8시간을 발효시켰다.

발효가 끝나자 밥알이 위로 동동 떴다.

안에 있던 건더기를 면 보자기에 싸서 국물만 걸러냈다. 그렇게 걸러낸 국물을 솥에 붓는다. 그때 도라지 가루를 함께 넣는다.

이제 불로 졸이는 과정이다.

처음엔 센 불로 끓이다 물이 끓어오르면 중불로 놓고 서서히 졸인다.

졸이는 과정에서 걸쭉한 도라지 조청이 완성된다.

조청은 한의학에서 약으로 사용됐다. 한의학 명으로는 교이 또는 이당이라고 불렀다. 동의보감엔 허약한 기력에 도움을 주고 기침을 멎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기록돼있다.

도라지 조청을 만드는 과정까지 촬영이 끝났다.

박은희가 도라지 조청을 만드는 동안 황규대는 아카시아 꿀을 모두 포장했다.

아카시아 꿀 50병에 도라지 조청 30병이 완성됐다.

이제 파는 일만 남았다.

옥천 오일장에 판매할 장소를 허락받았다.

상인회에서 미리 허락받은 장소였다.

최민성 피디가 스텝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오늘이 황규대 씨 마지막 촬영입니다. 오일장에서 판매하는 모습을 끝으로 촬영을 종료할 계획입니다.”

오늘 촬영이 끝나고 나면, 편집을 거쳐 본 방송에 들어갈 예정이다.

황규대가 긴장한 듯 얼굴이 굳어 있었다.

“긴장되세요?”

“네, 조금 긴장되네요.”

“뭐가 가장 긴장되세요?”

“물건이 안 팔릴까 봐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방법이 있나요?”

방법이 있냐는 황규대의 물음에 최민성 피디가 보기 좋게 웃었다. 그와는 사전에 협의가 끝났다.

“장터에 가시면 깜짝 놀랄 거예요. 어마어마한 지원군이 있거든요.”

“비밀인가 보네요.”

“네, 비밀이죠.”

황규대는 어색하게 웃었다. 여전히 긴장했다는 뜻이다. 그가 진짜로 걱정하는 건 꿀과 도라지 조청의 판매가 아니었다.

고애주에게 황규대의 생각을 들었다.

그는 아버지와 화해할 의사가 있었다. 묵은 앙금을 떨쳐내고 싶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의 아버지 황만식이다. 그의 선택에 따라 관계가 회복될지 아니면 이대로 지속될지 결정되는 것이다.

우린 물건을 트럭에 싣고 오일장이 열리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몇몇 상인이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리를 잡기 전에 상인회 회장부터 만났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자리를 주셔서.”

“힘든 일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같이 돕고 사는 거죠. 마침 꿀을 파는 상인도 없어서 큰 문제가 되진 않았습니다.”

오일장이라고 아무렇게나 물건을 파는 건 아니었다. 상인회 허락을 받아야 했다. 다행히도 상인회 회장은 다정한 사람이었다.

촬영 팀은 그림자처럼 우릴 쫓아다니고 있었다.

황규대와 함께 천막을 치고 테이블을 설치했다.

테이블 위에 아카시아 꿀과 도라지 조청을 올려놓았다.

“그럴듯하네요.”

아카시아 꿀과 도라지 조청에 예쁜 라벨이 붙어 있었다.

디자인은 지리산 농부들이 도왔다. 깔끔한 디자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 준비가 끝났네요. 마음이 어떠세요?”

모든 준비를 마치고 황규대에게 물었다.

“우선 감사의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꿀벌을 전부 잃고 많이 힘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도 찾을 수 없었고요.”

황규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감정이 격해진 것 같았다.

“이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습니다.”

“오늘 물건을 다 팔면 뭐부터 하고 싶으세요?”

“쌍둥이를 위한 장난감을 사줄 생각입니다.”

쌍둥이는 새 장난감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모두 누군가에게 얻은 물건이었다.

박은희도 쌍둥이와 함께 장터에 있었다. 그녀는 황규대의 인터뷰 모습을 바라보며 주변을 기웃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녀는 황만식을 찾고 있었다.

그때 승합차 한 대가 우리 천막 앞에 섰다.

자동차 문이 열리고 반가운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가희와 양초학교 아이들이다.

“늦었네.”

“차가 막혔어.”

정가희가 웃으며 말했다.

그녀 뒤로 남아영이 보였다. 분식집에 만난 댄스 동아리 아이들도 있었다.

“저 아이들은 누군가요?”

황규대가 아이들을 보고 물었다.

“지원군들이요.”

“지원군이요?”

아이들은 모두 양초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남아영이 천막으로 다가와 물었다.

“물건은 이게 단가요?”

“왜? 너무 적나?”

“이 정도 물건이면 반나절도 안 걸릴 거 같은데...”

남아영의 말에 황규대가 껄껄대고 웃었다.

“정말 엄청난 지원군이네요.”

본격적인 판매가 시작됐다.

손님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아카시아 꿀과 도라지 조청을 들고 시장을 뛰어다녔다.

양초학교 아이들은 기본으로 양봉을 배웠다. 꿀벌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거침이 없었다.

남아영의 말처럼 물건들이 빠르게 팔렸다.

촬영 팀들도 아이들을 쫓아 뛰었다.

나와 황규대는 포장과 계산으로 정신이 없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사람이 온 것도 몰랐다.

그가 우리 매장 앞에 서 있었다.

황만식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산에서 온 손님

황규대는 아카시아 꿀을 포장하고 있었다.

난 그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

황규대는 아버지를 마주했다.

“아카시아 꿀이구나.”

황만식은 꿀 병을 들고 말했다. 농부 아들이 애써 수확한 꿀이었다.

황규대는 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전보다 많이 늙어 있었다.

가슴에서 추억과 회한이 뒤엉켜 요동쳤다.

“죄송해요, 아버지.”

황규대는 말과 동시에 눈시울을 붉혔다.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안하다.”

황만식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아들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때 박은희가 쌍둥이와 함께 등장했다.

“할아버지에게 인사드려야지.”

쌍둥이는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했다. 황만식도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췄다.

“건강하게 잘 자랐구나.”

황만식은 쌍둥이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아이들이 그에게 다가가 안겼다.

쌍둥이의 습관 같았다. 내가 쌍둥이들과 눈높이를 맞췄을 때도 아이들은 날 안아주었다.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에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황만식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스킨십이 낯선 전형적인 옛날 사람이다. 그런 그도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그는 두 팔로 아이들을 안았다.

황규대와 박은희는 촉촉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 * *

장이 끝나기도 전에 아카시아 꿀과 도라지 조청이 다 팔렸다.

양초학교 아이들이 판매의 일등 공신이었다.

모두 예약한 식당으로 향했다.

황규대의 가족과 촬영 팀 그리고 양초학교 아이들까지 모두 함께였다.

대식구가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눈에 띄는 건 황만식이었다. 그는 쌍둥이들과 떨어질 줄 몰랐다.

꼬장꼬장했던 노인에서 다정하고 상냥한 할아버지로 변해 있었다.

촬영팀은 식당에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양초학교 아이들도 카메라에 제법 익숙해졌는지, 촬영 스태프들을 의식하지 않았다.

남아영은 쌈밥을 먹으며 내게 물었다.

“또 언제 나오면 돼요?”

“또 오게?”

“당연히 와야죠. 우리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팔고 있었을 텐데...”

밝고 명랑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난 고개를 돌려 정가희를 바라보았다. 조용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체질에 맞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다음에도 부를 생각이야?”

정가희가 날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에게 사정을 말했을 때 흔쾌히 승낙했다.

“그냥 고마워서. 다음엔 내가 거하게 살게.”

“우리도 잊지 마세요.”

남아영와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식사를 마칠 무렵이었다.

“이제 스튜디오 촬영만 남았습니다.”

최민성 피디가 카메라를 정리하며 말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1회 출연자 황규대의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 이제 스튜디오 촬영만 남겨둔 상황이다.

* * *

방송국 스튜디오 안.

금민서와 난 모니터를 보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금까지 촬영했던 영상들이 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깔끔하게 편집된 영상이다.

황규대가 뉴스에 출연했던 화면으로 시작했다.

꿀벌이 병에 걸려 벌통을 모두 소각하는 장면이었다.

금민서는 그 장면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나, 저 방법밖에 없는 건가요?”

“안타깝게도 벌이 병에 걸리면, 소각하는 것밖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황규대가 다시 양봉을 시작하는 장면으로 나왔다. 내가 상황을 진단하고 이동 양봉을 권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제 다시 시작하는 거네요, 잘 됐으면 좋겠어요.”

칠곡 화면이 등장했다. 하얀 아카시아꽃이 산을 뒤덮고 있는 장면이 장관이었다.

“아카시아 꿀을 따는 거죠?”

“이동 양봉의 최대 장점이죠. 원하는 꿀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이동 양봉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런데 트럭에 달린 건 뭔가요? 특별한 장치 같아요.”

이장우가 제작한 이동식 양봉 장치다.

“꿀벌을 위한 이동식 아파트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이해가 빠르네요.”

칠곡 아카시아 산에서 있던 일들이 속도감 있게 지나갔다.

금민서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이것저것 물었다.

난 이동 양봉 장치부터 양봉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풀어 설명했다.

장면이 전환되고 박은희가 등장했다.

“저분은 황규대 농부의 부인이시죠?”

“네, 박은희 씨입니다.”

“지금 뭘 만들고 계신 거죠?”

“도라지 조청입니다.”

“도라지 조청이요? 엿하고는 다른 거죠?”

“네, 엿과는 다릅니다.”

“만드는데 엄청나게 정성이 들어가네요.”

그녀의 말대로 도라지 조청을 만드는 일은 채밀하는 일 만큼이나 정성이 필요했다.

“조청은 인간이 만드는 꿀이라고 하던데, 남편은 아카시아꿀을 만들고 부인은 조청을 만드네요.”

금민서는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말했다.

“도라지 조청은 쌍둥이를 위한 특별한 약이기도 합니다.”

“약이요?”

“쌍둥이가 천식에 비염까지, 기관지가 좋지 않거든요.”

“도라지 조청은 약이기도 한 거네요, 그럼?”

“한의학에서는 지금도 약으로 사용하고 있죠.”

“아~ 그렇군요! 조청을 약으로 사용하는지는 몰랐네요.”

금민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의사가 등장했다.

그는 도라지 조청의 효능에 대해서 말했다.

“조청은 오래전부터 한약의 재료로 사용돼왔습니다. 기력을 보강하고 노폐물 해독과 혈액순환에 효과가 있습니다. 조청에 도라지를 첨가해 만들면 기침을 멎게 하고 기관지에 탁월한 효과를 냅니다...”

금민서는 한의사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의사는 황만식이 아닌 다른 인물을 섭외했다.

황만식은 오일장 장면에 출연하기 때문이다.

곧이어 황규대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는 아버지와 있었던 일을 고해성사하듯 말했다.

아들의 인터뷰가 끝나고 아버지가 등장했다.

그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인터뷰를 통해 솔직하게 말했다.

화면은 오일장에서의 재회 장면으로 이어졌다.

금민서가 그 장면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저런 일이 있었네요, 지금이라도 관계가 회복돼서 정말 잘 됐어요.”

눈가에 이슬이 맺혔던 금민서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양초학교 아이들의 물건을 파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다.

“양초가 그려진 티셔츠가 너무 귀여워요. 물건도 잘 팔고요. 아이들의 모습에 장터가 환해졌어요!”

스튜디오 녹화까지 전부 끝냈다. 녹화를 끝내고 최민성과 다음 일정에 대해서 조율했다.

“스튜디오 촬영분까지 편집을 끝내면 방송에 나갈 겁니다. 4회분으로 쪼개서 나갈 예정입니다. 방송이 나가는 사이에 김덕명 씨는 다른 출연자와 만나야 할 거예요. 자세한 일정은 작가님이 알려줄 겁니다.”

“그럼 당장은 일정은 없는 거죠?”

“네, 우선은 쉬셔도 좋습니다.”

최민성 피디가 웃으며 말했다. 녹화가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 좋은 얼굴이다.

* * *

하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가 왔다.

카페 ‘프렌즈’의 서남수 선생님이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나야 잘 지내지, 오늘 혹시 시간이 있나?”

서남수 선생님은 평소와 달리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에게 몇 번 전화가 오긴 했다. 바빠서 다음에 통화하자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마침 오늘은 한가해요,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전화로 이야기할 건 아니고 만나서 이야기했으면 하는데. 같이 만나볼 사람들도 있고.”

“같이 만나볼 사람들이요?”

“네가 다 아는 사람들이야.”

“그럼 제가 부산으로 갈까요?”

“아니다, 우리가 하동으로 갈 생각이다.”

약속 장소는 지리산 농부들의 1호 매장이었다. 전화로는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다.

서남수 선생님 매장을 비롯해 지역의 매장에 별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한기탁에게 꾸준히 매출과 관련한 문서를 받고 있었다.

목장에서 나오는 요거트와 아이스크림, 최근에 버블티 세트까지 유제품을 공급하고 있었다.

유제품 문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화개장터 매장 앞에 자동차가 즐비하게 서 있었다.

자동차 중에 서남수 선생님의 차도 보였다.

문을 열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매장 안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제가 좀 늦었죠.”

“아니야, 우리도 지금 막 왔어.”

서남수 선생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도 나를 보더니 알은체했다. 그의 말대로 모두 낯익은 얼굴들이다.

부산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들이었다. 어려운 사정 때문에 힘들어했던 강순복 사장도 있었다.

“다들 어쩐 일로...?”

그들의 얼굴을 보자 궁금증이 증폭됐다. 오는 길에 다른 매장의 매출도 확인했다. 모두 꾸준하게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특별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불쑥 방문해서 많이 놀랐지?”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건지 좀 걱정됐습니다.”

“문제라니 네 덕에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잘 됐는데.”

“그럼 무슨 일로?”

“우리가 이렇게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서남수 선생님이 대표로 이야기했다.

그들은 나를 찾은 건 미래에 대한 불안함 때문이었다.

모든 매장은 목장 유제품 덕에 매출이 껑충 뛰었다. 문제는 커피에 있었다.

해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 매장이 들어서고 있었다. 커피 음료의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유제품 덕에 매출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커피는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원두 가격도 문제였다. 대기업은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사서 가격에서 경쟁력이 있지만, 소량으로 원두를 공급받는 매장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도 버블티를 팔아 보면 어떨까 하고.”

“버블티요?”

카운터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해미도 깜짝 놀란 듯했다.

모두 목장의 유제품 덕에 매장이 살아난 사람들이다.

차까지 버블티로 바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한기탁을 매장으로 불렀다.

유제품을 관리하는 건 한기탁의 영역이다. 그의 의견을 물어야 했다.

한기탁에서 상황을 전하자 사무실에서 매장으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와 매장 2층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오면서 생각해 봤는데, 좋은 기회일 수 있을 거 같아.”

버블티까지면 공급하게 되면 그들은 모든 물건을 우리에게 받게 된다.

“모든 물건을 우리가 책임지는 만큼 좀 더 체계적으로 관리하면 어떨까?”

유제품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 매장 관리 등의 시스템을 말하고 있었다.

일종의 프랜차이즈 시스템이다.

“프랜차이즈는 왠지 우리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이건 작물 재배를 대형화하는 것과 달랐다. 관계의 문제다.

프랜차이즈가 되는 순간 갑과 을의 관계가 된다.

“협동조합으로 운영해보면 어떨까?”

“카페들을 협동조합으로 만든다고요?”

“녹차 농가도 협동조합으로 만들었잖아. 카페들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한기탁이 아이디어를 냈다.

그의 말대로 가능한 일이다.

잘만하면 좋은 모델이 될 수도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사람들과 협의하면 될 거고.”

한기탁의 말대로라면 카페들도 협동조합처럼 하나로 움직일 수 있었다.

난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해서 1층으로 내려갔다.

사장들이 긴장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우선 저희에게 좋은 제안을 해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난 한기탁과 이야기한 내용을 전했다. 모두 귀를 세우고 내 말을 들었다.

그들은 조건을 마음에 들어 했다.

공동의 이익을 위해 나아가는 구조였다.

“지금보다 더 좋은 거 같은데요?”

강순복 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그들과 공생관계였다. 그들이 잘 돼야 목장의 미래도 밝았다.

판매가 부진한 매장이 있으면 함께 도울 수도 있었다. 서로 협력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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