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하루에 300팩의 샐러드를 납품하게 됐다.
계획대로 샐러드 재배와 동시에 납품이 이뤄진 것이다.
청년 농부들은 기뻐했다.
“정말 말처럼 됐네요, 바로 이렇게 판매까지 하게 되다니.”
방현식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 매일 샐러드를 납품해야 합니다, 문제 없으시겠죠?”
“그럼요, 힘든 것도 없는 걸요.”
방현식의 말대로 육체적으로 큰 힘이 들어가진 않았다.
노지재배와 달리 날씨와 환경에 촉각을 곤두세울 일도 없었다.
수확할 때를 제외하고 하루에 한두 시간을 내면 충분히 가능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도 얼마든지 샐러드를 재배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14명의 농부가 합심해서 하기에 큰 무리가 따르지 않았다.
“조만간 또 다른 판매처도 생길 겁니다.”
“병원 말고 다른 곳에서도 팔 수 있다고요?”
“샌드위치 전문점에도 우리 샐러드를 납품할 계획입니다.”
“그럼 컨테이너가 부족하지 않을까요?”
“여분이 있어서 괜찮을 겁니다.”
샐러드 컨테이너 하나당 400팩의 샐러드를 수확할 수 있었다.
병원에 납품할 샐러드는 하루에 300팩이다. 다른 납품처가 확보되면 남은 100개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판매처가 늘어난다고 해도 걱정할 것은 없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추가로 들이면 된다.
“각자의 컨테이너를 잘 관리해 주세요.”
14명의 농부는 각자의 컨테이너로 들어갔다.
노지재배보다 편리하지만 수경재배는 철저한 관리가 필수였다.
항상 적절한 환경을 유지해야 했다. 애플리케이션으로 컨테이너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게 한 것도 철저한 관리가 목적이었다.
난 모종 컨테이너로 향했다.
민요한이 컨테이너에서 모종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온 지도 모르고 있었다.
“바쁘신가요?”
말을 건네자 고개를 돌렸다.
“작업할 때는 누가 와도 잘 모를 때가 있어요.”
민요한은 손을 털고 일어났다.
“그나저나 일이 잘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샐러드를 납품하게 됐다고요.”
“네, 덕분에 일이 잘됐습니다.”
“제 덕은 아니죠, 모두 대표님이 수고한 덕이겠죠.”
“민요한 씨는 이제 다른 일에 집중하면 좋겠습니다.”
“어떤 일인가요?”
민요한은 나와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수직재배와 관련한 일입니다.”
“수직재배라면 플랜트팩토리가 풀지 못한 숙제를 말하는 건가요?”
민요한은 내 뜻을 정확하게 읽었다.
수경재배 대형화를 위한 수직재배였다. 민요한에게 연구과제로 줄 생각이었다.
대규모 수경재배 시설은 당장 실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병원과 계약을 체결했다고 하지만 샐러드 컨테이너가 이상 없이 돌아가는지는 지켜봐야 했다.
샐러드 컨테이너가 자리를 잡는 동안 민요한이 문제를 풀기 바랐다.
“플랜트팩토리와 달리 이곳에선 연구할 맛이 날 것 같네요.”
민요한이 기분 좋은 얼굴로 답했다.
“대신 저와 한 약속은 지켜주셔야 합니다.”
“양봉 말씀하시는 거죠?”
제주도에서 그와 한 약속이었다.
샐러드 컨테이너 제작과 교육으로 민요한은 양봉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부터 양봉장에 나오세요. 약속한 대로 제가 직접 양봉기술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 * *
하동 군수 김창대가 날 찾았다.
비서실장 강민수가 병원 일을 보고한 모양이었다.
군청에 도착하자 강민수가 날 반겼다.
“김덕명 씨가 해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와 함께 군수실로 들어갔다.
김창대의 얼굴이 무척 밝아 보였다.
“비서실장에서 전해 들었습니다, 일이 아주 잘 됐다고요.”
“모두 신경 써주신 덕분입니다.”
“사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까지 청년 지원 사업에서 성과까지 이뤄낸 게 많지 않아서요.”
김창대의 말에 강민수가 헛기침했다.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 마음에 걸린 것 같았다.
“난 곧 있으면 임기가 끝나는 사람입니다. 이번 일은 내가 지역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김창대는 알면 알수록 소탈한 인물이었다. 그 같은 사람이 지역을 위해 더 오래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소를 나누던 중 김창대가 물었다.
“덕명 씨에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든 말씀하시죠.”
“덕명 씨는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역과 청년을 살리는 일 말이에요. 덕명 씨 능력이면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김창대는 진심으로 묻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진심을 보여준 만큼 나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농부가 된 계기는 가족 때문이었습니다.”
“가족이요?”
“네, 평생 농사를 지으셨던 부모님이 힘든 상황이었으니까요. 곶감 농사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새로운 목표가 생겼고요.”
“어떤 목표인가요?”
“제가 이곳에서 희망을 발견했듯이 다른 이들도 희망을 찾기를 바랐습니다.”
“가족을 위한 마음이었군요. 그 마음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
김창대가 미소를 지었다.
“제가 공직에서 내려오더라도 도움이 필요할 때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힘이 닿는 데까지 돕겠습니다.”
병원 일이 잘 돼서 부른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 묻고 싶었던 것 같다.
김창대와 면담을 마치고 나올 때였다.
강민수가 나에게 말했다.
“참, 나가는 길에 박동규 주무관 만나고 가세요.”
“박동규 주무관이라면, 관광 진흥과에 계신 분 말씀하시는 거죠?”
“기억하고 있네요, 맞아요. 예전에 덕명 씨가 제안했던 다과 축제 일이예요.”
그의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았다. 곧 축제가 열린다는 사실을.
* * *
화개장터에 다과 축제가 열렸다.
장터 곳곳에 색색의 천막이 세워졌다. 천막 안에는 먹을거리들로 가득했다.
차와 함께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전통 과자들이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김꽃님 할머니가 만든 약과부터 유과에 한과 등 전통 과자들이 가득했다.
녹차 농가의 차와 지리산 농부들의 버블티도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매장에서는 버블티 체험에 약과 체험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됐다.
목장 식구들도 축제를 위해 지원을 나왔다. 매장에서 버블티와 약과를 만들고 있는 노해미와 김꽃님 할머니를 도왔다.
녹가 농가 사람들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다과 축제에 녹차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축제에 참석한 사람들과 다양한 종류의 차를 만들었다.
봄이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다과 축제를 찾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섬진강을 따라 피어난 벚꽃도 사람들이 축제를 찾는 이유였다.
화개장터가 사람들로 북적였다. 맛있는 음식과 차가 어우러져 축제 분위기가 한층 고조됐다.
한기탁과 나도 축제의 현장에 있었다.
부산 샌드위치 전문점과 계약을 마치고 돌아온 길이었다.
우린 벚나무 그늘에 앉아 섬진강을 바라봤다.
“사람 참 많다, 다과 축제가 이렇게 인기가 좋을지 누가 알았겠어?”
한기탁이 매장에서 가져온 약과를 먹으며 말했다.
“약과 맛있어요?”
“꿀맛이야.”
김꽃님 할머니가 꿀로 버무려서 약과를 만든 게 생각났다. 가끔 생각나는 맛이었다.
나도 약과를 하나 집었다.
“정말 꿀맛이네요.”
약과를 먹자 지장사에서 양봉을 배우던 일이 생각이 났다.
“그나저나 그거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거라니요?”
“샐러드 컨테이너도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잖아, 오늘 부산 건도 계약이 끝났고. 그때 말한 대규모 시설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는 내가 대규모 수경재배 시설을 만들겠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규모 시설을 만들어야죠.”
“설마 지금 할 생각은 아니겠지?”
“왜요? 지금 하면 안 돼요?”
“나도 따져 봐서 하는 소리지, 돈이 만만치 않게 들어가는 일이야.”
“지리산 농부들이 그렇게 가난한가요?”
“가난하진 않지만 그래도 당장 대규모 시설은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야.”
“저에게 방법이 있어요.”
“그렇겠지, 김덕명에게 언제나 방법이 있으니까.”
한기탁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디 한번 말해봐, 그 방법이 뭔지?”
플랜트팩토리가 대규모 시설을 만들 수 있었던 건 투자유치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소수의 투자자들이 돈이 될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난 플랜트팩토리에 같은 방법을 쓰고 싶지 않았다.
“돈을 모을 생각이에요.”
“어떻게 모으려고?”
“크라우드 펀딩을 받을 계획이에요.”
“크라우드 펀딩?”
크라우드 펀딩은 인터넷을 이용해 개인 투자자에게 투자금을 모으는 방식을 말한다.
“그게 가능할까? 사람들이 수경재배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당장 크라우드 펀딩을 받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선배 말대로 일반 사람들은 첨단 농업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요.”
“첨단 농업을 떠나서 지리산 농부들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인정해요, 지역 사람들을 제외하곤 우리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많죠.”
2008년인 지금 수경재배와 첨단 농업에 대해서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조차 모르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더 도전해 보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첨단 농업에 관심을 갖길 바랐다.
“차근차근 하나씩 해보려고요.”
“급하게 하지 않겠다면 나도 동의해.”
샐러드 납품 건을 해결한 뒤에 차근차근 일을 해나갈 계획이었다.
펀딩은 미래의 계획이다. 당장 펀딩을 시작한다고 해도 관심을 보일 사람은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리산 농부들을 더 알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 * *
다과 축제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반가운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일일드라마 ‘눈부시게 빛나는 날’의 쉐도우 작가 성은정이었다.
“작가님 오래간만이네요, 잘 지내시죠?”
“네, 저야 뭐 똑같죠.”
최근에는 그림자 딱지를 떼고 일한다고 했다. 조만간 데뷔를 앞둔 상황이었다.
그녀가 나에게 전화를 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선배에게 특명을 받았어요.”
“특명이요?”
“김덕명 씨 섭외 특명이죠.”
방송 출연 제의였다.
“무슨 방송인가요?”
“농부를 돕는 방송이에요.”
예능과 다큐를 결합한 방송으로 농사 전문가가 어려운 상황에 처한 농부를 돕는 내용이었다.
“제목이 뭔가요?”
“<농부가 희망이다>예요. 김덕명 씨와도 어울리는 제목이죠.”
성은정이 웃으며 말했다.
“금민서 씨도 함께 출연하고요.”
금민서는 ‘눈부시게 빛나는 날’에서 명장면을 탄생시킨 배우였다.
제목과 금민서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방송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시청자들에게 제법 사랑을 받았던 방송이었다.
지리산 농부들을 전국적으로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방송 출연의 시작
방송 출연은 나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한기탁과 백민석 그리고 설강인까지 지리산 농부들의 팀장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방송 출연과 함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짤막하게 언급했다.
대중들에게 지리산 농부들을 적극적으로 알리겠다고 말했다.
대단위 수경재배지와 펀딩에 대한 의견도 공유했다.
백민석이 가장 먼저 말했다.
“방송 출연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펀딩을 위해서도 그렇고. 지리산 농부들을 쇼핑몰로 아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나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물론 우리 대표님이 연예인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다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찬성하네, 지리산 농부들을 전국적으로 알릴 절호의 기회기도 하고 말일세.”
설강인도 같은 의견이었다.
“방송을 잘못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럴 일은 없겠지?”
백민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파심이었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어려운 농부들을 돕는 방송이니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게다가 우리 대표님이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
한기탁의 말에 백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작가에게 전달할게요, 방송 출연하겠다고.”
회의를 마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난 목장으로 향하는 설강인을 잠시 붙잡았다.
“설 팀장님 잠깐 저랑 말씀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설강인과 함께 조용한 장소로 이동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올해는 약속을 지키기 힘들 것 같습니다.”
“약속이라니...?”
그에게 함께 일하자고 했을 때 했던 약속이었다.
목장이 자리를 잡으면 경기도 쪽에 2호점을 내겠다고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듣자 설강인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그런 말 말게, 지금까지 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네. 자네가 없었으면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을 걸세.”
가족이란 말을 꺼낼 때, 설강인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설 팀장님께서 안 계셨다면 지금의 목장도 없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솔직히 지금 상태로는 2호 목장이 생긴다고 해도 갈 마음이 없네. 우리 목장이 좋아져 버렸으니까.”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난 자네가 개인적인 욕심만으로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네. 지금 하려는 일도 그렇고 말일세.”
목장에 그가 있어서 든든했다.
난 설강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 * *
양봉장에 있는 부모님에게 방송 출연에 대해 말씀드렸다.
물어볼 것도 없이 승낙이었다.
농부들을 돕는다는 말에 어머니가 좋아했다.
“그런 일이라면 우리 아들이 전국 최고지.”
어머니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방송한다고 다른 동료들에게 피해 주지 말고.”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가 말했다.
“덕명이가 무슨 피해를 준다고, 그런 말을 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잘하라고 응원은 못 할망정.”
“당신 오늘따라 왜 그렇게 까칠해.”
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있다가 불똥이 떨어질 수 있었다.
양봉장 한쪽에서 이장우와 민요한이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장우 씨가 실력을 발휘하고 있어요.”
내 물음에 민요한이 답했다.
이장우는 벌통 위에 작은 태양열 집열판을 붙이고 있었다.
“양봉기기는 태양열로 충분히 사용이 가능할 거 같아서.”
그제야 이장우가 입을 열었다.
그는 박람회에서 사 온 양봉기기를 참고해 새로운 기기를 만들고 있었다.
박람회에서 사 온 물건은 태양열 집열판이 없었다. 역시 기술 하나는 끝내줬다.
“미국에서 사 온 물건보다 더 좋아 보이네.”
온도를 조절하는 장치도 열선과 냉각팬을 이용해 새롭게 제작했다.
“양봉기기를 만들다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어. 민요한 씨와도 이야기를 나눴고.”
이장우가 나에게 말했다.
“어떤 아이디어야?”
“샐러드 컨테이너에 태양열 집열판을 놓는 아이디어야.”
샐러드 컨테이너는 일 년 365일 쉬지 않고 채소를 키울 수 있었다.
날씨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지속해서 샐러드 재배가 가능했다.
그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기는 필수였다.
“태양열을 이용하면 전기세를 아낄 수 있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도 있고.”
이장우가 벌통에 달린 태양열 집열판을 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전기세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수 있었다.
“나도 찬성이야, 당장 조치를 취해 볼게.”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담당자와 상의할 내용이었다.
자리를 뜨기 전 그들에게도 방송 출연에 대해서 알렸다.
그 말을 듣고 민요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송 때문에 양봉 약속을 저버리는 일은 없겠죠.”
“방송은 방송이고 약속은 약속이죠.”
“그럼 안심하고 있겠습니다.”
이장우는 아무 말도 없었다.
“장우 넌 할 말 없어?”
“솔직히 말해도 돼?”
“솔직한 게 좋지.”
“난 대환영이야. 네가 바빠져야 내가 한가해지니까.”
민요한은 이장우의 말을 듣고 물었다.
“덕명 씨가 장우 씨를 그렇게 못살게 구나요?”
“친구지만 적당히 거리를 둬야 할 사람이죠.”
이장우의 말에 민요한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 * *
방송 출연 전에 태양열 집열판 문제부터 해결하고 싶었다.
당장 비서실장 강민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뵐 수 있을까요?”
“지금 농업지원센터에 나와 있습니다.”
“그럼, 사무실에서 뵐 수 있을까요?”
“네, 그렇게 하죠.”
마침 농업지원센터에 그가 있었다. 센터장과 미팅을 마치고 나가는 길이었다.
그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지리산 농부들의 사무실은 처음이네요. 군청보다 환경이 쾌적하네요.”
강민수는 일이 잘됐는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샐러드 컨테이너에 설치할 태양열 집열판에 대해서 말했다.
단순히 도움이 되는 수준이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수경재배 중 전기가 나간 상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런 순간을 대비하지 못한다면 대형 사고가 터질 수 있었다.
“말씀처럼 태양열 집열판을 설치하면 도움이 많이 되겠네요.”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꼭 필요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럼 설치가 가능하다는 말인가요?”
“미안하지만 거기에 사용할 예산이 없습니다.”
뜻은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진행 중인 정부 지원 사업이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자금을 투입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강민수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청년 농부 지원 사업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 역시 작은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던 강민수가 눈을 번쩍 떴다.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네요.”
“어떤 방법이죠?”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강민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갔다.
강민수는 밖으로 나간 지 10분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태양열 집열판을 구했습니다.”
정말 10분 만에 태양열 집열판을 구했다.
농업지원센터 창고에 있던 물건이었다.
오래전 지원 사업에 사용하고 지금은 창고에 보관 중이라고 했다.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난 이장우를 불렀다.
샐러드 컨테이너에 사용하기 적합한지 점검이 필요했다.
이장우는 점검을 마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샐러드 컨테이너에 사용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 * *
방송 출연을 승낙하고 이틀 뒤였다. 작가와의 미팅이 잡혔다.
미팅 장소는 서울이었다. 방송에 참여하는 모든 스텝이 한자리에 모인다고 했다.
방문증을 수령해서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빨리 오셨네요, 메인 작가 고애주라고 합니다.”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은정 씨 통해서 말씀 많이 들었어요.”
고애주는 쉐도우 작가 성은정과 학교 선후배 관계였다. 방송을 기획하며 나에 대해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올해 나이가 몇 살이시죠?”
“스물아홉입니다.”
“그보다 더 젊어 보이세요.”
그녀도 나이가 많지 않아 보였다. 많게 잡아도 삼십 대 중반 정도였다.
“별다른 뜻이 있어서 말씀드린 건 아니네요. 솔직히 덕명 씨를 캐스팅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나이 때문이기도 하니까요.”
“나이가 무슨 상관이죠?”
“성공한 젊은 농부시잖아요.”
“아직 성공이라고 말할 단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겸손하시네요, 말씀드렸다시피 덕명 씨는 저희 프로그램의 주요 출연자세요.”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농부들에게 해법을 제시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회의실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연출 홍대철입니다.”
“연출을 맡은 최민성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진행을 맡을 금민서가 등장했다.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
나를 기억하는 것 같았다. 드라마 촬영장에서 봤을 때와 느낌이 사뭇 달랐다.
활달하고 유쾌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조연출이 방송의 주제와 진행 방식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김덕명 씨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 농부에게 해법을 제시해 주시는 역할입니다.”
해법을 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농가를 찾아다니며 발로 뛰는 것도 내 몫이었다.
“해법을 제시하면 저희와 함께 상의하셔야 하고요.”
방송국에서도 내가 제시한 해법을 같이 검토하고, 가능한 선에서 농가에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
“김덕명 씨가 농부들과 벌이는 일들은 다큐멘터리처럼 있는 그대로 나갈 예정입니다. 힘들었던 농부가 다시 일어나는 모습들도요.”
이번엔 연출을 맡은 최민성 피디가 말했다.
“금민서 씨와는 스튜디오에서 농부들과 후일담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되도록이면 가볍고 재미있게요.”
농부들과 있었던 일은 다큐멘터리로 진행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예능에 가까웠다.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금민서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촬영 일정이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피디와 작가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를 먼저 보냈다.
금민서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그녀의 역할을 가늠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의 보조자이지만 흥행의 요소로 여기는 것 같았다.
금민서의 인기는 아직 식지 않았다. 나보다 그녀를 섭외하기 위해 애쓴 느낌도 들었다.
그녀가 간 뒤에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됐다.
1회 출연자에 대한 논의였다.
“제가 모든 농사에 전문가이진 않습니다.”
난 먼저 선을 그었다.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덕명 씨만큼이나 다방면에 전문가인 사람도 없다고 봅니다.”
고애주 작가가 답했다.
나에 대해서 조사를 많이 했다는 말투였다.
“그래서 말씀인데, 시작을 양봉으로 해보면 어떨까요? 김덕명 씨는 양봉 전문가니까요.”
고애주 작가가 최민성 피디와 눈을 마주쳤다.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농부들에게 사연을 받았습니다. 눈에 띄는 사연 중에 꿀벌을 키우는 농부도 있었고요.”
“그 사연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조연출 홍대철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나에게 사연이 적힌 종이를 건넸다.
충청도 산골에서 꿀벌을 키우는 농부의 사연이었다.
도시의 삶을 뒤로 하고 귀농을 한 사람이었다.
키우던 꿀벌들이 병에 걸려 죽었다고 했다.
양봉을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도저히 방법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사연을 다 읽자 고애주가 물었다.
“어떠신가요, 느낌이 오시나요?”
“사연만 봐서는 알 수 없네요. 제가 직접 찾아가서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당연히 만나 보셔야죠.”
고애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저의 스텝들도 함께 가면 어떨까요?”
최민성 피디가 물었다.
“혼자 가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카메라를 달고 올 게 뻔했다. 있는 그대로 상황을 판단하고 싶었다.
“그럼 저와 함께 가는 건 괜찮으시겠어요?”
고애주 작가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물었다.
카메라만 달고 오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카메라가 없는 조건이면 좋습니다.”
“네, 그렇게 하죠.”
난 그녀와 함께 사연의 주인공을 만나기로 했다.
첫 번째 출연자
방송국 회의실, 고애주 작가와 최민성 피디가 프로그램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고 작가는 어떻게 봤어? 김덕명 씨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
최민성 피디가 고애주에게 물었다.
지금은 프로그램의 기획 단계였다. 진행자를 확정 짓고, 출연자를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김덕명이 스텝들의 결정에 순순히 따라주길 바랐다. 그가 개인적으로 출연자를 만나고 싶다고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고애주도 최민성이 무슨 뜻으로 물었는지 알고 있었다.
“전 김덕명 씨 좋게 봤어요. 좋은 이미지에, 우리 프로와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이미지는 선해 보이긴 한데 고집 있어 보이지 않아? 혼자서 출연자를 만나 본다는 것도 그렇고.”
“전 그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자기만의 생각이 있어 보여서.”
“고 작가는 김덕명 씨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봐. 다 좋게 보고.”
“그냥 무작정 마음에 든 건 아니에요, 저도 생각이 있으니까.”
“어쨌든 한배를 탔으니 잘 해봐야지. 난 고 작가만 믿을게.”
고애주는 이번 프로그램을 맡기 전에 휴먼 다큐로 인정받았다.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비교적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시청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담으려는 게 기획 의도였다.
방송 작가로 일하며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프로그램이었다.
대상을 농부들로 좁힌 건, 농촌의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었다.
농부들의 사연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고애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김덕명에 대해서 알게 됐다.
특히 곶감 농사와 관련한 이야기가 고애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김덕명은 명인에게 배운 곶감 기술을 청년 농부들과 나눴다.
자신이 한 약속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곶감 기술을 배운 사람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자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고애주가 주목한 대목이었다. 김덕명은 곶감 농사를 망친 방현식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참기름과 호두 기름을 짜는 일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움을 줬다.
김덕명을 섭외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는 돈만 보고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농부들과 함께 성공하려는 의지가 돋보였다.
김덕명이 청년 농부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청년 농부답게 첨단 농업에도 도전하고 있었다.
김덕명은 시청자들에게 호감을 줄 요소가 많았다.
고애주는 섭외 1순위로 김덕명을 골랐다. 물론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메인 피디 최민성은 김덕명 섭외에 유보적이었다. 김덕명 보다 인지도가 높은 사람을 원했다.
고애주는 금민서 섭외에도 공을 들였다. 초반에 김덕명의 낮은 인지도를 보완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금민서 출연이 확정되자 최민성 피디도 김덕명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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