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도 양봉장에 손님이 온다고 미리 말해뒀다.
첨단 양봉 기기를 견학하러 온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기기를 사용한 뒤에 양봉이 한결 수월했기 때문이다.
벌통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었다. 이것만으로 큰 도움이 됐다.
벌집의 환경에 따라 꿀벌들의 움직임도 달라진다.
리틀 한스의 걱정처럼 환경에 따라 꿀벌은 벌집을 버리고 집단으로 달아나기 때문이다.
환경을 개선하는 기기를 통해 꿀벌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었다.
꿀 수확량도 전보다 늘었다.
이장우와 함께 양봉장에 도착했다. 그는 벌통에 달린 장치를 보고 물었다.
“벌통에 기계 장치가 달렸네.”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장치야, 벌통 내부도 볼 수 있고.”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들어서 그런지 저건 귀여워 보인다.”
벌통에 달린 장치는 샐러드 컨테이너와 비교할 수 없었다.
때마침 최규식이 도착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왔다.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양봉협회의 회장인 박문호였다.
“오랜만일세.”
박문호가 악수를 청했다. 손을 잡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게 미국에서 사 온 물건인가?”
“캘리포니아 농업 박람회에서 사 온 물건이죠.”
양봉협회 사람들은 첨단 양봉 기기에 관심을 보였다.
박문호는 벌통 내부를 관찰할 수 있는 카메라를 유심히 보았다.
벌통 내부를 보는 카메라는 요긴하게 쓰일 물건이었다.
꿀벌이 동면에 들어가는 겨울철엔 벌통을 함부로 열 수 없기 때문이다.
꿀벌이 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런 기계를 또 살 수 있겠나?”
박문호가 기계를 보며 물었다.
“살 수는 있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문제라니?”
“기계가 고장 나면 수리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거 큰 문제군.”
박문호는 기계를 갖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습니다.”
“해결한다고?”
“저희가 직접 제작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걸 직접 제작할 수 있겠나?”
“네, 이 정도는 쉽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이장우와 눈빛을 교환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2주가 지났다. 14명의 농부는 모두 성실하게 프로그램에 임했다.
김상철과 방현식은 누구보다 더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농부들은 모종 컨테이너에서 자란 잎을 샐러드 컨테이너로 옮겨 심었다.
난 교육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한기탁이 날 불렀다.
“장우 씨는 요즘 양봉 기계를 제작하고 있다고 들었어.”
“네, 미국에서 가져온 기계를 참고해서 새롭게 만들어 보려고요.”
양봉협회 사람들과 만났던 날 이후로 이장우는 작업에 돌입했다.
참고할 모델이 있어서 제작이 어렵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기탁이 날 부른 건 양봉 기계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샐러드 영업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영업은 잘되고 있어요?”
내 질문에 한기탁이 미소를 보였다.
“안 그래도 그 말을 하려고 했지.”
“뭔가 조짐이 있군요.”
“작은 성과가 하나 있었어,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우리 샐러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어.”
“샌드위치 전문점이요?”
한기탁은 부산 지역을 돌며 샐러드를 팔 곳을 알아봤다.
부산은 목장 유제품을 납품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는 유제품을 받는 매장을 돌며 정보를 모았다. 매장 사장들을 통해 작은 빵집부터 뷔페집 등을 소개받았다. 그러던 중 샌드위치 전문점이 들어설 거라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샌드위치 전문점 창업자는 미국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유행하는 샌드위치 전문점을 한국식으로 만들 낼 계획이었다.
아직 매장을 오픈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매장을 내기 전에 식자재를 알아보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샐러드는 빵만큼이나 주요한 재료다.
“계약에 따른 몇 가지 조건이 있어.”
“어떤 조건이죠?”
“친환경 인증을 받은 샐러드일 것 그리고 가격이 일정할 것.”
“우리와 조건이 딱 맞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샌드위치 전문점만큼 샐러드를 많이 소비하는 곳도 없었다.
샌드위치엔 신선한 샐러드를 넣는 게 기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샐러드 가격에 있었다.
샐러드는 날씨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채소다. 환경의 영향에 따라 가격 차이가 발생했다.
샐러드 컨테이너는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일정한 가격에 샐러드를 공급할 수 있었다.
“수경재배로 샐러드를 키운다고 하니까 관심을 보였어. 마케팅 수단으로 쓰고 싶다는 말까지 하고.”
“그 정도 반응이면 성사될 가능성이 아주 크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 된 밥이라고 봐야지.”
“혹시 계약 시기는 말이 없었나요?”
“그게 좀 걸리긴 해.”
“걸린다니 뭐가요?”
“아직 오픈 전이라서, 인테리어며 여러 가지 문제로 시간이 좀 걸린다고.”
“대략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대요?”
“짧으면 두 달, 길면 석 달까지 걸릴 거 같아, 문제없을까?”
보통의 상황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경우라면 좀 달랐다.
벌써 모종이 끝난 상황이기 때문이다. 2주 후면 샐러드 수확이 가능했다.
“시간이 걸리는 게 오히려 행운이 될 수도 있어요.”
내 말에 한기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다.
“행운이 된다고?”
“네, 기회가 될 수 있어요.”
“어떤 기회인데?”
“계약을 두 개 따낼 기회요.”
“두 개를 딴다고?”
* * *
일주일 뒤에 예정된 사건이 터졌다.
큰아버지가 입원했던 대학병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병원이 자랑하는 유기농 샐러드에 문제가 생겼다. 유기농 샐러드라고 한 것이 알고 보니 중국산이었다. 위생에도 문제가 많았다.
원무과장 박은지의 내부고발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병원의 모든 행정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행정 실장의 비리였다.
그는 업체로부터 뒷돈을 받고 부정을 저질렀다. 행정 실장은 파면과 동시에 구속이 됐고, 병원의 위상도 땅에 떨어졌다.
내부고발자인 박은지도 병원을 나갔다. 병원장이 만류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부고발자는 편안하게 직장을 다닐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병원장 엄상구를 중심으로 대책 회의가 있었다.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할 겁니까?”
병원장 엄상구의 말에 간부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샐러드를 식단에서 삭제하자는 말까지 나왔다.
엄상구는 음식도 치료의 일환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환자들에게 좋은 음식을 제공한다는 게 우리 병원의 모토인 거 잊으셨습니까?”
샐러드를 식단에서 지우자는 말이 쏙 들어갔다.
“당장 제대로 된 업체를 선발하세요, 투명한 과정을 거쳐서!”
엄상구는 썩은 뿌리를 도려낼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간부들이 나간 뒤 엄상구는 책상 서랍에 있던 문서를 꺼냈다.
원무과장 박은지가 작성한 문서였다. 그녀는 퇴사 전에 농업법인 리스트를 만들어 보고했다.
제대로 된 유기농 샐러드를 재배하는 곳들이었다. 업체명과 짤막한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엄상구는 리스트에 있는 업체를 하나하나 자세히 보았다.
리스트 마지막에 지리산 농부들이 눈에 들어왔다.
‘청년 농부들과 힘을 합쳐 친환경 샐러드를 재배함, 수경재배가 특색임.’
블라인드 평가
컨테이너에서 샐러드가 자라고 있었다.
민요한이 청년 농부들 앞에서 말했다.
“물에 수경재배용 비료를 녹인 액체를 ‘영양액’ 또는 줄여서 ‘양액’이라고 합니다. 작물이 잘 자라기 위해서는 적정한 농도의 양액을 만들어서 공급해야 합니다.”
민요한은 물과 영양액을 정확한 비율로 섞었다.
“영양액을 만들 때는 전자저울을 이용합니다. 물과 비료의 비율이 정확하게 맞아야 하니까요.”
영양액의 비율은 작물에 따라 달라진다. 작물에 따라 영약액의 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샐러드는 600ppm의 농도로 맞춰서 영양액을 만든다.
농도를 측정하기 위해 전기 전도도를 측정하는 기계를 사용했다.
전기 전도도를 측정하는 기계는 손가락 길이로, 휴대가 간편했다. 측정기를 영양액에 넣으면 농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들 배운 대로 영양액을 만들어 보세요.”
14명의 농부는 영양액을 만들었다.
화학 교실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그들은 한 달 가까이 수경재배와 컨테이너 사용법을 익혔다. 딱히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
농부들은, 김덕명이 말한 대로 게임처럼 재밌어했다.
교육은 최대한 쉬운 부분부터 이뤄졌다. 교육이 진행될수록 난이도를 조금씩 높였다.
수경재배에서 영양액을 만드는 일은 난이도가 꽤 높은 일이다.
이제 교육도 막바지에 이른 것이다.
“600ppm 딱 맞았어요.”
김상철이 영양액을 만들고 소리쳤다.
“저도 600ppm요.”
뒤이어 방현식이 말했다. 휴대용 측정기에 600ppm 숫자가 정확하게 찍혀 있었다.
다른 청년 농부들도 영양액을 정확한 비율로 만들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사용하는 방법과 영양액을 만드는 일까지, 교육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 * *
대학병원에서 일어난 사건은 지역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큰아버지가 입원했던 바로 그 병원이다.
병원 납품 비리에 관한 내용이 특집으로 연일 보도가 되었다. 특히 저질 중국산 채소가 유기농 샐러드로 둔갑했다는 것이 병원으로서는 큰 타격이었다. 유기농 재료를 제공한다는 것을 병원 홍보에도 활용해왔던 터라 타격이 더욱 컸다.
원무과장 박은지의 내부고발로 밝혀진 진실이다.
기사를 보던 중에 한기탁이 소리쳤다.
“기사에 나왔던 대학 병원에서 메일이 왔어,”
“무슨 내용인데요?”
샐러드를 납품할 업체를 모집한다는 공문이었다. 병원에서 몇몇 업체를 지정해 연락을 취했다. 우리도 그중 하나였다.
“업체를 선정하는 방식이 좀 독특하네.”
한기탁이 메일 내용을 보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선정 방식이 보통과 달랐다.
단순히 가격만 보고 입찰을 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선정 방식이 좀 남다르긴 하지만 우리도 참여해야겠지?”
한기탁이 공문을 보고 물었다.
“참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쩌면 이 방식이 우리에게 유리할 수도 있어요.”
회신을 보냈다. 입찰에 참여하겠다는 내용이다.
* * *
공문을 발송하기 전 병원장 엄상구는 간부들을 모아놓고 샐러드 입찰 방식에 대해 논의했다.
예전 방식대로 가격 경쟁 입찰로 하자는 의견이 다수였다. 다른 아이디어는 없었다.
“이번 입찰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했으면 합니다.”
“다른 방식이라면?”
병원 간부들은 병원장이 입을 주시했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업체를 선발할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병원장 엄상구는 샐러드 입찰 방식을 설명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리스트를 보여줬다.
인근에서 샐러드 등의 채소를 키우는 농업법인의 목록이었다.
원무과장 박은지가 퇴사하기 전에 엄상구에게 전한 리스트였다.
“여기에 있는 업체들 중에서 샐러드를 받을 곳을 선발할 예정입니다.”
간부들은 리스트 보며 엄상구가 이미 내정한 업체가 있다고 여겼다.
리스트는 보여주는 용도로 작성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평가단을 구성할 거니까요.”
“평가단이요?”
“샐러드 평가단입니다.”
“그럼 직접 먹어보고 평가한다는 말씀인가요?”
“그럴 생각입니다, 참여하는 업체에게도 동의를 구할 생각이고요.”
“좀 과하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럼 다른 아이디어라도 있는 건가요?”
병원장 엄상구는 간부들에게 물었다.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다.
“과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일은 이렇게 처리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요. 여러분들은 평가단을 모집해 주세요.”
간부들은 엄상구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 물러가고 엄상구 혼자 남았다.
그는 서랍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원무과장이었던 박은지는 리스트만 건넨 건 아니었다.
그녀는 새로운 업체를 선정할 아이디어도 제안했다. 검증된 업체를 선발할 수 있도록 평가단을 운영하는 방안이었다.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절하는 업체는 문제가 있을 가능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엄상구는 박은지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다. 비록 그녀는 떠났지만, 이 방안만큼은 고수하고 싶었다.
* * *
난 하동군청을 찾았다. 비서실장 강민수와 약속이 있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그가 날 부르는 일은 없었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그가 먼저 날 보자고 했다.
“컨테이너에서 샐러드 재배가 이뤄지고 있다고 보고받았습니다.”
강민수가 날 자리에 안내하며 말했다.
“최근에 친환경 인증도 받았죠.”
“그 소식도 들었습니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샐러드를 판매할 일만 남았고요.”
“그 문제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문제라니요, 우리 지원 사업에 대해서 다른 지자체도 관심을 보일 정도인데요.”
“그런데 무슨...?”
“병원 납품 입찰에 참여한다는 소식을 저도 들었습니다.”
그의 소개로 박은지를 만났다. 그땐 영업 활동에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을 꺼렸다.
지금은 태도가 달랐다.
의욕에 불타는 얼굴이었다.
“이번 일이 잘 되길 바랍니다.”
강민수는 병원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아마도 박은지에게 들은 모양이다. 강민수와 박은지는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 같았다.
“판로 개척 등 영업 관련한 일은 민감한 문제입니다. 저 같은 공무원들이 개입하기 힘든 부분이죠.”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일이 잘 되면 더 많은 청년들에게 기회가 생길 겁니다.”
“기회요?”
“샐러드 재배와 동시에 안정적인 판매처까지 생긴다면 이번 지원 사업은 성공적으로 끝날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도 꾸준하게 지원할 계획이 있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로 수익까지 내야 완벽한 성공인 것이다.
그들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영업 등의 판매에 관여하기는 어려운 지점이 있었다.
그 부분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었다.
* * *
샐러드를 평가하는 날이 다가왔다.
난 동료들과 함께 병원으로 이동했다.
우리를 포함해 총 세 개의 업체가 이번 선발에 참여했다. 총 다섯 개 업체가 신청했지만 최종으론 세 업체가 남았다.
모두 친환경 인증을 받은 농업법인이었다. 수경재배로 샐러드를 재배하는 건 우리가 유일했다.
블라인드 평가였다. 업체 이름을 비밀에 부친 상태에서 샐러드 맛을 보고 평가하는 방식이다.
떨어진다고 해도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이만큼 투명한 선발도 없기 때문이다.
병원 측에서는 평가단을 만들었다.
병원장 엄상구가 처음 평가단을 만들라고 했을 때 간부들은 소수의 인원을 생각했다.
10명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긴 것이다. 엄상구는 더 많은 인원을 원했다. 그 정도 인원으로는 맛과 품질을 판단할 수 없다고 여겼다.
병원장 엄상구의 핀잔을 듣고 대규모 평가단을 조직했다. 의사, 간호사, 행정 직원으로 이뤄진 평가단이다.
처음 10명이었던 평가단이 100명으로 늘었다.
엄상구도 평가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원이 많은 만큼 업체들에겐 평가에 들어가는 비용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평가는 점심시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병원의 특성상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구내식당 한쪽에 스티커를 붙일 수 있는 대형 판넬이 설치됐다.
샐러드 맛을 보고 스티커를 붙이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우리는 다른 업체들과 함께 샐러드를 준비했다.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일을 마쳐야 했다.
세 업체는 모두 같은 종류의 샐러드를 준비했다.
버터헤드와 카이피라였다. 드레싱은 뿌리지 않았다. 오직 샐러드만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사람들이 샐러드를 가져다 먹을 수 있게 준비를 마쳤다.
지리산 농부들이 배정받은 번호는 3번이었다.
번호를 구분해서 샐러드를 먹을 수 있었다.
“바쁜 와중에 평가에 참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원장 엄상구가 식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무리 블라인드 평가지만 참여한 업체의 소개를 듣는 게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엄상구는 업체의 대표들에게 말했다.
내 옆에 있던 대표가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평가단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엄상구는 손을 든 이에게 손짓했다.
“말씀해 보세요.”
손을 든 이는 새로 부임한 원무과장이었다.
“업체 소개는 듣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이유가 뭔가요?”
“소개를 듣고 나면 판단이 힘들어질 거 같아서요.”
“판단이 힘들어진다고요?”
“알게 모르게 편견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순수하게 맛으로만 판단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엄상구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그것도 맞는 말씀이네요,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요?”
평가단도 인사말을 듣지 않는 걸 선택했다.
엄상구는 의견을 받아들였다.
“소개는 하지 않는 걸로 하죠.”
업체 대표들도 문제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본격적으로 블라인드 평가가 시작됐다.
평가를 하는 동안 업체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나와 동료들은 병원 밖으로 나왔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요?”
김상철이 초조한 눈빛으로 물었다.
“우리가 될 가능성이 높아요.”
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김상철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는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몹시 궁금한 눈빛이었다. 함께 온 동료들도 나와 김상철의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 샐러드가 다르기 때문이에요.”
“다르다니 그게 무슨 뜻이죠? 종류도 똑같이 맞췄는데.”
그의 말대로 동일한 품종을 놓고 벌이는 경쟁이다. 하지만 우리 샐러드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 온 샐러드를 자세히 본 적 있어요?”
“얼마나 자세하게를 말씀하시는지 모르지만 보긴 봤죠?”
“어땠나요?”
“좋아 보였어요, 신선해 보이고.”
“우리 샐러드는 어때 보였어요?”
“우리가 재배한 것도 좋아 보였죠.”
김상철의 말에 함께 있던 동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는 있었지만, 그들도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김상철의 말대로 전부 신선하고 품질이 좋았다.
“다 똑같아 보이지만 우리가 재배한 샐러드는 맛이 달라요.”
“맛이 다르다고요?”
김상철은 큰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함께 있던 이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두 재배과정에서 맛을 봤기 때문이다. 맛의 차이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수경재배를 했기 때문이에요.”
“수경재배하면 맛이 달라지나요? 전 전혀 모르겠던데.”
“우리 샐러드가 다른 것들에 비해서 훨씬 부드러워요.”
난 그들에게 맛이 다른 이유를 알려줬다.
수경재배한 샐러드는 노지에서 재배한 샐러드에 비해서 훨씬 부드럽다.
씹는 맛이 다른 것이다. 고기로 따지면 육질이 야들야들한 것과 비슷하다.
땅에서 기른 작물은 뿌리가 양분을 흡수하기 위해 에너지를 쓴다. 그 과정에서 전체 조직이 단단해진다.
근육이 생기는 이치와 같다. 직사광선도 한몫을 한다.
반면 수경재배로 작물을 키우면 조직이 단단해지지 않는다.
뿌리가 양분을 흡수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힘들지 않고 작물이 편안하게 자란다. 게다가 내리쬐는 직사광선도 없다.
전체적으로 조직이 부드러워지는 이치다.
김상철은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듣고 보니 이해가 되네요, 우리가 재배한 샐러드가 부드럽다는 사실이.”
블라인드 평가가 종료됐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우린 평가장 안으로 들어갔다.
동료들은 들어가자마자 스티커 판부터 보았다.
우리가 배정받은 숫자는 3번이었다.
스티커의 수를 셀 필요도 없었다.
3번에 압도적으로 많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반가운 섭외
블라인드 평가로 샐러드 공급자가 정해졌다.
100명의 평가단 중 68명이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를 선택했다.
압도적인 차이였다.
구내식당에 있던 평가단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병원장 엄상구가 날 사무실로 불렀다.
그가 나에게 차를 권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매장에서 판매하는 녹차였다.
“화개장터에서 사 온 물건이죠.”
엄상구가 녹차를 보며 말했다.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여겼다.
“이 녹차를 산 이유는 지리산 농부들이 궁금해서였습니다.”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는 나에게 문서를 한 장 보여주었다. 유기농 샐러드를 재배하는 농가들이 정리된 리스트였다.
“리스트에 있는 업체를 전부 가봤습니다.”
리스트에 지리산 농부들도 있었다. 누가 작성했는지 모르지만, 지리산 농부들에 대한 코멘트가 인상적이었다.
[청년 농부들과 힘을 합쳐 친환경 샐러드를 재배함. 수경재배가 특색임]
리스트까지 작성한 걸 보면 병원장도 고민이 많았던 것 같았다.
“저도 3번을 찍었습니다, 1번과 2번이 비슷한 맛이라면 3번은 다르더군요. 뻣뻣한 느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선한 느낌도 좋았고요.”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과찬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우리 병원엔 고령의 환자들도 많다는 걸 잘 아시잖습니까. 그분들이 먹기에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치아가 건강한 젊은 사람은 인지하지 못할 수 있었다. 김상철이 샐러드의 부드러움을 느끼지 못한 이유다.
“비결이 뭔가요?”
엄상구에게 수경재배로 재배한 샐러드의 특징을 말했다.
“아주 훌륭한 재배 방법이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