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람회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리틀 한스가 민요한 씨를 알고 있었다니 정말 기막힌 인연이야.”
백민석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문득 처음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왔던 날이 떠올랐다. 미국 땅을 밟는 순간 전해리에게 곶감을 배달했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리워하던 곶감이었다. 그 곶감이 우리에게 행운을 가져온 것 같았다.
플랜트팩토리와 인연이 생겼고, 민요한에 대한 정보도 얻었다.
“한국에 도착하면 민요한 씨부터 만나 볼 거지?”
백민석이 물었다.
“하동에 들렸다 바로 만나러 가보려고.”
“내가 생각해 봤는데, 팀을 꾸리면 좋을 거 같아.”
“어떤 팀?”
“수경재배를 위한 특별한 팀. 김덕명과 백민석 그리고 민요한으로 구성된 특별팀.”
“민요한 씨는 아직 만나지도 못했다고.”
“일이 술술 풀리는 게 예감이 좋아. 민요한 씨 일도 잘 될 거 같아.”
백민석이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대로 예감이 좋았다.
창밖으로 서울이 내려다 보였다.
수경재배를 위한 엔지니어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찾고 백민석과 함께 지하철에 탔다.
“하동으로 내려가기 전에 잠깐 들릴 곳이 있어.”
“어딜 가려는 거야? 제주도는 하동에 들렀다가 간다고 했잖아?”
“제주도에 가는 건 아니고.”
“그럼 어딘데?”
“인천에 갈 일이 있어. 너도 함께 만나봤으면 해.”
“나랑 같이 만나볼 사람이 있다고?”
“네가 그랬잖아? 수경재배를 위한 특별팀을 만들자고.”
“그랬지, 그런데 인천에 누가 있길래?”
백민석의 말대로 수경재배를 위한 특별한 팀을 꾸려야 했다.
식물학자 민요한만 섭외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수경재배 시설을 만들기 위해서는 엔지니어가 필요했다.
‘인천 정밀’의 이장우와 이동춘을 만날 생각이었다.
백민석에게 ‘인천 정밀’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아, 현식 씨 기름 짜는 기계를 만든 분들!”
백민석도 생각났다는 듯이 외쳤다. 이동 중에 이장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한가한 시간이라고 했다.
인천 기계 거리에 ‘인천 정밀’ 간판이 보였다.
이장우는 아버지 이동춘과 함께 있었다.
“오셨군요.”
이동춘은 내게 악수를 청했다.
“기계가 말썽을 부리진 않나요?”
“아니요, 덕분에 아주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천 정밀이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만든 작품입니다.”
이동춘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백민석은 이동춘의 과장된 말투와 행동을 낯설어했다.
이장우의 아버지가 좀 독특하다고 말은 했다. 직접 보니 적응이 안 되는 것 같았다.
“미국에 다녀왔다고?”
이장우가 물었다.
“방금 귀국했어.”
“무슨 일로 미국까지 다녀온 거야?”
“농업 박람회에 다녀오는 길이야.”
“농업 박람회라는 게 있구나, 처음 알았네. 그런데 상의할 게 있다니 무슨 일이야?”
이장우의 물음에 이동춘이 눈을 반짝였다.
기민한 감각으로 일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인천 정밀에 일을 의뢰하고 싶어서.”
“일?”
이장우가 가볍게 물었다.
그때 이동춘이 한마디 했다.
“인천 정밀의 솜씨를 알게 되면 계속 일을 맡길 수밖에 없죠.”
“그건 아버님 말씀이 맞습니다.”
난 웃으며 답했다. 역시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이장우가 내게 물었다.
“자세하게 말해봐. 맡기고 싶은 일이 뭔지?”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싶어.”
“작물을 재배할 시설? 그때 이야기했던 거구나. 비닐하우스나 온실에 설비를 넣는 건가?”
이동춘은 나서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비닐하우스나 온실은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그럼 어디에서 작물을 키울 생각이야?”
“컨테이너에 작물을 재배할 설비를 넣으려고.”
“컨테이너에 넣는다고?”
이장우는 놀란 눈으로 아버지 이동춘을 바라보았다.
이동춘도 의외라는 듯 눈을 껌뻑이고만 있었다.
“왜 이상해?”
“이상하다기보다 낯설어서 그래. 컨테이너에서 작물을 키우겠다는 게 상상이 안 가서 말이야...”
마크 레스터의 말대로 수경재배 시스템은 초기 자본이 많이 드는 일이다.
작물을 키우기 위한 완벽한 설비를 만들어야 했다.
스타트업인 플랜트팩토리가 대규모 수경배재 시스템을 갖춘 것은 투자유치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리가 만들 수경재배 시스템을 고민했다.
플랜트팩토리의 수경재배지는 반도체 공장처럼 밀폐된 공간 안에 있었다.
빛 한 줄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서 작물을 키웠다. 인공 광에 공기의 흐름까지도 내부에서 조절했다.
그들처럼 대규모 수경재배지를 만들 수 없지만 작게는 가능했다.
대안으로 컨테이너가 떠올랐다. 8평짜리 컨테이너를 수경재배가 가능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작더라도 완벽한 수경재배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면, 훗날 대규모 시설까지도 기대해 볼 수 있었다.
“컨테이너에 유리라도 달 생각이야? 작물을 키우려면 빛이 필요하잖아, 흙도 필요하고.”
이장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자연 광이 아니라 인공 광을 이용할 거야. 그리고 흙은 필요 없어.”
“흙이 필요 없다고요?”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이동춘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 흙은 필요 없습니다. 물과 영양액으로 작물을 재배할 거니까요.”
“작물이라고 물에서 자라나요?”
그때 백민석이 나섰다. 전해리에게 배운 내용을 그들에게 전달했다.
두 부자는 백민석의 말에 집중했다.
백민석은 흙에서 작물을 키우다 오히려 질식사시킬 수 있다는 말도 했다.
백민석의 설명이 끝나고 내가 바통을 넘겨 받았다.
“컨테이너 안에 작물이 자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 생각입니다. 물의 순화부터 빛, 온도, 습도, 이산화탄소를 제어할 수 있게요.”
“발상의 전환이네요. 솔직히 말해서 이런 일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동춘은 과장 없이 말했다.
“아버지 말이 맞아, 인천 정밀에서는 한 번도 안 해본 일이야.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개인적으로 흥미가 생겼어. 기름 짜는 기계를 만드는 일보다 더 재미있을 거 같아.”
이장우가 미소를 보였다.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인천 정밀에 기계를 의뢰한 건 이장우와의 친분 때문은 아니었다.
이장우는 훗날 건실한 정밀업체의 사장이 된다. 그의 도전 정신이 회사를 키우는 데 한몫했다. 물론 엔지니어로서의 성실함도 성장의 비결이었다.
그와 함께 수경재배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은 이유였다.
아버지 이동춘은 별난 구석이 있지만, 기술자로서는 탁월했다. 두 부자가 힘을 합친다면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올 것 같았다.
“구체적인 일정과 설비가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해. 오늘 인천 정밀을 찾은 이유는 계획을 말하기 위해서야.”
“그럼 구체적인 일정은 언제 나오는 거야?”
세부적인 내용은 민요한과 결합한 이후에 나올 것이다.
“조만간 세부 일정이 나올 거야.”
“그럼 그때까지 저희가 컨테이너를 구해 놓고 있겠습니다.”
이동춘이 예의 바른 말투로 말했다.
“네, 아버님 감사합니다. 관련한 비용은 지리산 농부들에게 바로 청구하시면 됩니다.”
“결제에 관련해서는 신뢰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보니, 덕명 씨는 말과 행동이 다른 게 없더군요.”
“별말씀을요, 당연한 일이죠.”
“요즘은 그 당연한 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답니다.”
이동춘은 말을 마치고 헛기침을 했다.
“일이 잘되면 대형 시설로 만들 계획도 있습니다.”
대형이란 말에 이동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인천 정밀은 하동으로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동 정밀로 이름을 바꾸는 건 힘들겠지만요.”
이동춘은 너털웃음을 호탕하게 터트렸다.
“아버지는 참 별말씀을 다 하시고. 아무튼 자세한 일정이 나오면 말해줘. 우리 쪽에선 최대한 준비해 놓고 있을 테니까.”
이야기를 마치고 인천 정밀을 나왔다.
이장우가 우릴 배웅했다.
“수경재배 설비 말고도 사소하게 부탁할 일이 있을 거야.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뭐든 말만 해.”
그는 일 이야기만 하면 미소를 지었다.
처음 왔을 때도 느꼈지만, 인천 정밀의 재정 상황이 안 좋아 보였다.
“요즘 일은 어때?”
헤어지기 전 이장우에게 물었다.
“여전히 경기가 안 좋아. 아버지도 힘들어하시고. 네가 하는 일이 잘됐으면 좋겠다. 인천 정밀도 살아날 수 있게.”
“잘 될 거야, 인천 정밀도 살아날 거고.”
“말이라도 고맙다. 그리고 이건 선물이야.”
“선물?”
“아버지가 주는 거야. 그때 우리에게 일 줘서 고맙다고.”
그가 작은 상자를 건넸다. 스위스 국기가 그려진 상자였다.
“스위스 칼이야. 아버지가 좋아하는 물건이지.”
“고맙다고 말씀 전해줘. 그리고 내 선물도 있어. 이거 아버지에게 전해줘.”
난 캐리어에서 상자를 꺼냈다.
“미국에서 사 온 거야.”
“버번위스키, 아버지가 아주 좋아하시겠네!”
이장우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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