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농업 박람회는 캘리포니아 툴레어에서 열렸다.
박람회엔 매년 약 67개국에서 1,600곳의 업체가 참가한다. 박람회를 찾는 방문자는 10만 명이 넘었다.
2008년 올해는 우리도 방문자가 되어 박람회장 곳곳을 누비며 다녔다.
트랙터와 콤바인 같은 최신 농기계를 관람하고 체험하는 곳들이 많았다. 엄청난 규모로 작물을 재배하는 환경에 적합한 기계들이었다.
미국도 당장 첨단 농업으로 넘어갈 수는 없는 조건이었다.
곡류는 토경재배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낙농업 전시관에는 첨단 기계들이 눈에 띄었다.
“로봇 착유기가 우리 목장에 있는 것과 같아.”
백민석이 로봇 착유기를 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우리 목장에서 사용하는 기계였다.
우리 목장에서 사용하는 착유기는 최신 모델이었다.
낙농업 전시관에서 곤충을 사육하는 전시관으로 넘어갈 때였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하니 정말 아는 사람이 맞았다.
독일인 리틀 한스였다. 양봉가이자 지리산 농부들에게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목장에 로봇 착유기를 들일 때도 그의 도움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김덕명입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요? 잘 지내셨나요?”
“덕명 씨,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전생에 인연이 있었나 봅니다.”
리틀 한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보통의 독일인과 달리 유머가 넘치는 남자였다.
난 그에게 백민석을 소개했다. 그도 함께 온 동료들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다.
“우리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같이 둘러 보실까요?”
리틀 한스가 먼저 제안했다. 양봉과 관련한 시설도 둘러볼 생각이었다.
우린 독일의 한스 일행과 함께 부스를 돌았다.
“이 장치는 참 대단하네요.”
리틀 한스가 벌통에 달린 센서를 보며 말했다.
벌통의 온도와 습도를 자동으로 제어하는 장치였다.
온도와 습도뿐만 아니라 꿀벌이 먹을 물도 제어할 수 있었다.
벌을 모니터링하는 장치도 눈에 띄었다.
“꿀벌이 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 주네.”
백민석이 장치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최적의 환경을 만든다고 해도 꿀벌을 제어하기는 쉽지 않죠.”
리틀 한스가 웃음을 지우고 말했다. 뭔가 사연이 있는 얼굴이었다.
“혹시 무슨 일 있나요?”
난 리틀 한스에게 물었다.
“요즘 벌들이 사라지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벌들이 사라진다고요? 이유가 뭔가요?”
“이유를 알 수 있다면 좋겠는데... 제가 박람회를 찾은 이유기도 하죠. 전 꿀벌을 모니터링하는 장치를 살 계획입니다. 한국은 문제가 없나요?”
“문제없습니다. 아직은...”
“천만다행이네요, 저는 요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러다 꿀벌들이 다 사라지는 거 아닌가 하고요.”
“그러시군요.”
리틀 한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한국에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먼 훗날의 이야기다.
리틀 한스는 꿀벌 모니터링하는 곳에서 시간을 더 보내겠다고 말했다.
그와의 짧은 만남은 거기서 끝났다.
백민석과 함께 첨단 작물 관으로 이동했다.
“우리도 꿀벌을 키우지만, 알면 알수록 까다로운 것 같아.”
백민석이 조용히 말했다.
그도 꿀벌의 생태에 대해 알고 있었다. 리틀 한스의 이야기를 듣고 비슷한 걱정을 한 것이다.
“양봉을 하다 보면 벌을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통제 불능이야.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백민석의 말대로였다. 양봉은 벌과 공생하는 일이지 통제하는 일이 아니었다.
꿀도 함께 나눠 먹어야 했다.
꿀벌이 살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조성한다고 해도 그들이 떠나면 끝나는 일이었다.
“작물 재배하고는 다른 것 같아.”
“채소는 날개가 달려 있지 않으니까.”
“맞아, 채소는 날개가 달려 있지 않아. 도망갈 염려가 없다고.”
백민석이 웃으며 말했다. 웃으면서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첨단 농업의 바탕이기도 했다.
작물은 성장할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을 조성해 주면 무럭무럭 자라난다.
어떤 환경을 조성하냐에 따라 일 년 내내 재배가 가능했다.
우린 첨단 작물 관에 도착했다.
다른 전시관 달리 사람들이 두 배 가까이 있었다. 첨단 작물에 대한 관심이 느껴졌다.
여러 부스 중 단연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유독 사람들이 북적였다.
“저기 사람이 엄청 많네, 우리도 가볼까?”
백민석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물었다.
리치파머라는 회사였다.
“이 회사의 수경재배 시스템이 아주 독특하네.”
백민석이 리치파머에 관심을 보였다. 리치파머의 수경재배 시스템이 독특한 건 사실이다.
그들은 아쿠아포닉(Aquaponics)이란 방식을 사용했다. 수경재배에 물고기 양식을 융합한 기술이다.
물고기 배설물을 작물의 영양분으로 삼고, 작물 재배 과정에서 정화된 물로 물고기도 키운다는 발상이다.
언뜻 보면 일석이조처럼 보인다. 물고기와 채소를 동시에 키우니 말이다.
백민석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관심을 받는 이유기도 했다. 하지만 리치파머는 몇 년 안에 사라질 회사였다.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이 문제였다.
리치파머는 기본적으로 도시 농업을 추구 하는 회사였다. 건물 옥상에 수경재배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래서 도입한 게 유리 온실이었다.
그들은 건물 옥상에 유리 온실을 만들었다. 유리 온실 속에 아쿠아포닉 시스템은 구축했다. 그러자 문제가 발생했다.
물고기와 식물이 함께 살 수조를 만들다 보니 규모가 커졌다.
유리 온실의 하중을 견디다 못해 누수 문제가 발생했다. 방수처리도 제대로 안 된 옥상에 유리 온실을 설치해 피해를 본 사례도 있었다.
작물의 재배 방식도 문제였다. 물고기의 배설물이 식물의 영양분이 되기는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노지재배로 기른 채소보다 품질이 떨어졌다.
비싼 설치비용과 떨어지는 품질 때문에 결국 리치파머는 파산하고 말았다.
기사를 통해 자세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백민석은 리치파머의 시스템에 푹 빠져 있었다.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모습이 신기해 보인 것이다.
실제로 리치파머의 주가가 무섭게 올라간 적도 있었다. 시작부터 큰 관심을 받았지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었다.
난 백민석의 옆구리를 찔렀다. 어서 플랜트팩토리 부스로 가고 싶었다.
“넌 관심 없어? 플랜트팩토리는 수경재배 시스템만 있는 거잖아. 여긴 물고기까지 있다고.”
“저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이 아니야. 두 마리 애물단지를 함께 키우는 일이지.”
민석이 이해할 수 있게 간단하게 문제점을 말해주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해리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작물에 줄 영양소를 정확하게 계산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내가 잠시 넋이 나갔었나 봐. 리치파머, 뭔가 그럴싸해 보였어.”
우린 플랜트팩토리의 부스로 이동했다.
리치파머만큼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었다.
전해리의 얼굴도 보였다.
플랜트팩토리의 유니폼을 입은 남자 중 하나가 마이크를 들었다.
“전 플랜트팩토리의 창업자 마크 레스터입니다.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를 진행하려고 했습니다. 저희가 만든 수경재배 기구를 만들어 보는 일이죠. 가정용 수경재배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벤트를 진행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저희의 실수입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실수로 인해 행사를 진행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백민석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다른 식으로 진행해보면 어떨까요?”
난 마크 레스터에게 물었다.
“다른 식이라니 어떤 방식을 말씀하시는 거죠?”
“재활용품을 이용해서 수경재배 시설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재활용품이요?”
“플랜트팩토리에서 만든 수경재배 시스템도 처음엔 재활용품을 이용해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박람회장에 있는 재활용품을 이용해 다 같이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마크 레스터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수경재배 시스템
“실례지만 어느 나라에서 오셨나요?”
마크 레스터가 나에게 물었다.
“한국에서 온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미스터 김. 그리고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우리 회사는 재활용품을 이용해 수경재배 시설을 만든 적이 있습니다.”
플랜트팩토리의 시작은 가정용 수경재배 기구였다. 그들은 가정에서도 손쉽게 수경재배를 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었다.
“한국에서 온 김덕명 씨의 의견대로 재활용품을 이용해 수경재배 기구를 만들어 볼까 합니다. 여러분들은 의견은 어떤가요?”
마크 레스터가 박람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그의 질문에 아이들이 환호했다.
아이들이 관심을 보이자 어른들도 동참한다는 뜻을 밝혔다.
“우선 수경재배 기구를 만들기 전에 알아야 할 게 하나 있습니다. 수경재배의 간단한 원리에 대해서요. 수경재배는 물과 양분을 식물에 직접 공급하는 재배방식입니다. 노지재배와는 큰 차별점이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한다는 점이죠. 이유를 아는 분 있나요?”
마크 레스터가 청중들을 향해 물었다.
그의 질문에 장난감 자동차를 든 소년이 번쩍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바라봤다.
“물과 양분을 골고루 주니까요. 가뭄이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요.”
“정확해요. 물과 양분을 골고루 주기 때문에 작물이 서로 양분을 빼앗지 않죠.”
마크 레스터는 소년에게 작은 선물을 주었다. 무지개 빛깔의 식물 모형이었다.
“물과 양분을 골고루 주는 것뿐만 아니라, 뿌리 때문에 소비되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면도 있습니다. 식물이 땅에서 뿌리를 뻗는 이유는 양분을 흡수하기 위해서죠. 뿌리를 뻗기 위한 에너지 소비는 생각보다 큽니다. 땅에서 양분을 흡수하는 일이 까다롭기 때문이죠. 수경재배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양분을 찾는데 들어가는 에너지를 잎, 꽃, 열매를 생산하는 데로 돌립니다. 노지재배보다 수확량이 좋은 이유죠.”
어른들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크 레스터가 설명을 할 동안 직원들이 재활용품들을 모아왔다.
페트병, 모래, 테이프, 빨대, 칼이 준비됐다. 식물의 줄기도 보였다. 호박 줄기 같았다.
직원들이 재활용품과 식물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백민석과 나도 재료를 받았다.
마크 레스터가 페트병을 들고 말했다.
“두 개의 페트병을 이용해 수경재배 시설을 만들 예정입니다.”
그는 화이트보드에 간단한 도면을 그렸다. 두 개의 페트병을 연결해서 만든 수경재배 시설이었다.
ㄴ자 형태였다. 눕힌 페트병은 반으로 갈라 모래를 깔았다. 세운 페트병은 물과 영양액이 들어가는 장치였다. 페트병 중간에 구멍을 뚫어 빨대로 연결했다.
“원리를 알면 아주 간단합니다. 반을 가른 페트병에 모래를 넣는 이유는 식물을 지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워 놓은 페트병에는 물과 영양액을 넣을 겁니다. 윗면을 잘라서 공급을 원활하게 할 거고요.”
간단하게 만드는 수경재배 장치였다.
아이와 어른들은 합심해서 수경재배 장치를 만들었다.
백민석과 나도 수경재배기를 함께 제작했다.
페트병과 페트병을 연결하는 빨대는 실리콘 재질이었다. 플라스틱 재질의 빨래와 달리 말랑말랑했다. 튜브처럼 연결하기 쉬웠다.
완성한 수경재배기에 호박 줄기를 나란히 세웠다.
재활용품을 이용한 수경재배기가 완성된 것이다.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모두 좋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경재배기를 만들었을 때였다.
백민석이 마크 레스터에게 물었다.
“식물을 물에만 담가 두면 식물이 질식하지 않나요?”
백민석의 질문에 전해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 배운 내용이었다.
“맞습니다. 물에만 넣어 두면 질식하죠. 보통은 에어펌프를 사용해야 하는데요, 오늘은 아쉽게도 이 정도로 마무리해야 할 거 같네요.”
“제가 한 번 만들어 볼까요?”
난 마크 레스터에게 물었다.
사람의 이목이 나에게 쏠렸다.
“여기서 에어펌프를 만들겠는 말씀인가요?”
“네, 간단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기대되네요, 에어펌프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에어펌프를 만들기 위해서 소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난 장난감 자동차를 든 소년과 시선을 마주쳤다.
마크 레스터의 질문에 답했던 그 소년이었다.
“에어펌프를 만들 건데 좀 도와줄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소년에게서 장난감 자동차와 풍선을 빌렸다.
“어떤 아이디어야?”
백민석이 웃으며 물었다.
“풍선으로 피스톨을 만들 생각이야.”
소년이 가지고 있던 장난감에는 모터와 건전지가 달려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모터와 건전지를 분리했다.
자른 페트병에 풍선을 덮어 피스톨을 만들었다.
모터를 이용해 풍선을 펌프처럼 움직일 작정이었다.
어릴 때 과학 상자를 이용해 에어펌프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다.
수중도시를 만들 수 있는 과학 상자였다. 그때의 경험이 이런 곳에서 쓰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에어펌프를 만들고 실리콘 빨대로 수경재배기에 연결했다.
“한국인은 정말 손재주가 좋네요.”
마크 레스터가 감탄하는 눈빛으로 에어펌프를 바라보았다.
“네가 버튼을 눌러볼래?”
소년에게 에어펌프를 작동할 기회를 주었다. 사람들이 소년의 손가락을 응시했다.
그들은 에어펌프가 진짜 작동할지 궁금해했다.
소년이 작동 버튼을 누르자 모터가 돌아가며 풍선으로 만든 피스톨이 움직였다.
풍선 피스톨이 움직이며 수경재배기 안에 공기가 공급됐다.
페트병 안에 기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소년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박수를 쳤다.
마크 레스터가 나에게 다가갔다.
“놀랍네요! 이런 식으로 에어펌프를 만들다니. 원래 행사에서 주려고 했던 선물이 있습니다. 저희 회사를 견학할 수 있는 티켓입니다. 아직 공개하지 않은 수경재배 시설도 볼 수 있고요. 미스터 김에게 드리죠.”
마크 레스터가 나에게 티켓을 건넸다. 백민석의 것까지 두 장을 주었다.
“내일 호텔로 픽업 나가겠습니다.”
전해리가 우리에게 말했다.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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