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식과 함께 곶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방현식을 일을 돕기 위해서였다.
그는 사람들이 도착하기 전 참깨와 호두를 살폈다. 참깨와 호두는 예천 천진호에게 샀다.
그것만은 자신의 손으로 하겠다고 다짐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처음으로 대출을 받았다. 재해에 따른 농업대출이 가능했다. 7천만 원의 대출금으로 필요한 재료를 샀다.
참기름 5천 개, 호두 기름 5백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
기름을 담을 병과 상자는 지리산 농부에게 지원받았다.
홈쇼핑 이후로는 지리산 농부들의 쇼핑몰에서 참기름과 호두 기름을 팔 계획이었다.
김덕명이 병과 포장지를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 방현식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예나은을 포함해 곶감 교육을 받았던 모든 인원이 방현식의 집에 모였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방현식은 준비한 위생복을 꺼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움직이는 일이었다.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게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옷이 다 하얀색이네, 무슨 반도체 공장 사람 같다. 장갑에 장화, 마스크까지 하얀색이고.”
예나은이 하얀 위생복을 입고 말했다. 다른 이들도 모두 위생복으로 갈아입었다.
“일은 나눠서 진행하려고 해요. 참깨를 씻는 일부터 병에 담는 일까지 각자 역할을 적어 봤어요.”
방현식은 작성한 문서를 나눠주었다. 기름을 짜는 건 곶감 작업과 달랐다.
일을 나눠야 좀 더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참기름만 짜는 게 아니라 호두 기름도 만들어야 했다.
방현식이 기계를 이용해 기름을 짜는 일을 맡았다.
그의 어머니 김혜숙은 호두와 함께 밥을 찌는 일을 담당했다.
나머지 일들은 겹치지 않게 분배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기름 짜는 냄새 때문인가 공기까지 고소한 거 같네.”
예나은이 참기름을 병에 담으며 말했다. 참기름 병은 포장 작업을 거쳐 박스에 담겼다.
날이 저물도록 작업이 계속됐다.
“내일도 나오는 건가?”
예나은이 허리를 펴며 말했다.
“힘들면 쉬셔도 돼요.”
방현식이 말했다.
“누가 쉰다고 했어. 내일도 당연히 나온다는 소리지.”
그녀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 * *
해가 바뀌었다. 덕장에 매달아 두었던 곶감도 포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곶감을 말린 창고로 향했다.
아버지는 곶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곶감을 포장할 때가 된 거 같구나.”
“제가 사람들에게 말해 놨어요. 다들 와서 도울 거예요.”
“돕다니, 이건 엄마랑 둘이 해도 충분하다.”
“이 많은 걸 두 분이 어떻게 다 해요. 모두 돕겠다고 난리에요. 부르지 않으면 다들 서운해할 거예요.”
“서운해하면 안 되지.”
사무실 동료들도 곶감을 포장하는 일은 무조건 나가겠다고 말한 상태였다.
목장에서 유제품을 만드는 동료들과 연구소의 연구원들까지도 돕겠다고 했다.
양초를 만드는 할머니들도 나섰다.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포장 작업은 휴일을 선택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사람이 곶감 창고로 모였다. 방현식과 곶감 교육생들도 참석했다.
“곶감이 다치지 않게 최대한 주의해 주시고요. 그럼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잘 익은 곶감이 곱게 포장돼서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곶감을 농사를 지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돈도 사람도 여유롭지 못했다. 부모님과 함께 밤새도록 곶감을 포장했다.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지리산 농부들은 식구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곶감 포장을 할 틈이 없었다.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일손이 많아서 일이 빨리 끝나겠구나.”
아버지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곧 끝나겠어요.”
곶감 포장 작업이 끝내고 다 함께 저녁을 먹었다. 저녁 밥상이 화려했다.
산해진미가 가득한 식탁이었다. 어머니의 특기인 갈비찜과 불고기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잔칫집 분위기였다. 온종일 곶감을 포장했던 사람들이 식탁에 모여 밥을 먹었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았던지 아끼던 담금주를 꺼냈다.
작년에 만들어 둔 매실주였다.
모든 이들에게 한 잔씩 따르며 수고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매실주 한잔 마시니까 피로가 싹 가시네.”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아까 보니까 현식이 왔던데 어디 있지?”
한기탁은 주변을 둘러보며 방현식을 찾았다.
그는 곶감 교육을 받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현식은 자신을 찾는 소리를 듣고 곧장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저 부르셨어요?”
방현식이 한기탁을 보며 물었다.
“내가 가려고 했는데 번개처럼 와버렸네.”
“아니에요, 그런데 절 찾으신 이유가?”
“아, 다른 게 아니라 일은 어떻게 돼가나 궁금해서요.”
“동료들이 도와줘서 일을 잘 마쳤어요.”
“그래요? 그럼 곧 판매도 하겠네요?”
“이틀 뒤에 홈쇼핑에서 판매해요.”
“잘 될 거예요.”
한기탁은 방현식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슬기로운 판매
스튜디오에 불이 들어왔다. 홈쇼핑 피디가 스텝들에게 사인을 보냈다.
쇼호스트 노용미가 입을 열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상품은 특별한 농산품인데요. 바로 참기름과 호두 기름입니다.”
노용미는 최근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쇼호스트였다.
재치 있는 입담과 게스트와의 호흡이 좋았다.
판매 실적도 높았다.
“특별한 농산품인 만큼 소개도 특별하게 해드릴 텐데요. 무대에서 직접 참기름을 만드는 과정을 보여 드릴 겁니다.”
카메라가 무대 안에 있는 방현식을 잡았다.
노용미가 그에게 다가갔다.
“지금 뭘 하고 계신 거죠?”
“참깨를 볶고 있습니다.”
“냄새가 정말 고소해요. 볶은 참깨로 기름을 짜내는 거죠?”
“네, 맞습니다. 일반적으로 참기름을 만드는 방식이죠.”
“그런데 참깨를 볶는 온도가 상당히 높은 것 같아요. 다가가는 순간 몸이 뜨거워질 정도네요.”
“일반적으로 참깨는 200도가 높은 고온에서 볶습니다.”
“200도가 넘는 다고요? 참깨가 탈 수도 있겠어요.”
“타지 않게 볶는 게 기술이죠.”
방현식은 볶은 참깨를 기계에 넣었다. 촬영을 위해 기계를 스튜디오까지 운반해 왔다.
“이 기계에 넣으면 참기름이 완성되는 건가요?”
“네,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방현식은 시작 버튼을 눌렀다. 이미 볶은 참깨라 온도 조절은 필요 없었다.
관을 통해 기름이 흘러나왔다.
“정말 금세 기름이 나오네요.”
“나선형 스크루가 돌아가며 기름을 짜냅니다. 다른 기계에 비해서 속도가 빠르죠.”
“정말 엄청나네요.”
쇼호스트 노용미는 눈을 크게 뜨고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방현식은 그녀에게 참기름 병을 건넸다.
“뚝딱 참기름이 완성됐네요.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라고요?”
“네, 끝이 아닙니다.”
무대 뒤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두 남자가 등장했다.
서우영과 이영호였다.
“여러분께 잠깐 소개의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나오신 두 분은 연구소에서 나온 분입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연구원들이십니다.”
화면에 서우영과 이영호와 관련한 이력이 자막으로 나왔다.
신뢰를 주기 위한 장치였다.
“두 분은 참기름으로 뭘 하실 작정이죠?”
“참기름에 이상 물질이 없는지 검증을 할 겁니다.”
“아니, 참기름 안에 이상 물질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정말 궁금합니다~.”
노용미가 멘트를 할 동안 스텝들이 테이블을 무대 중앙으로 옮기고 있었다.
노용미가 무대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게 검증할 장비들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성분을 분석할 겁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나요?”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홈쇼핑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지금 스튜디오에서 참기름 안에 이상 물질이 있는지 직접 확인할 예정입니다.”
서우영과 이영호는 연구소에서 하듯 분석을 했다. 최대한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았다.
서우영이 노용미에게 사인을 보냈다.
“벌써 분석을 마치셨군요. 혹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벤조피렌이란 물질이 발견됐습니다.”
“벤조피렌이요? 그건 발암 물질 아닌가요?”
“맞습니다. 벤조피렌은 발암 물질입니다. 벤조피렌이 든 참기름을 장기간 복용하면 몸에 이상이 생길 수 있죠.”
“그럼 이 참기름을 먹으면 안 되는 거네요?”
노용미는 참기름을 들고 울상을 지었다. 방송 전에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다시 들어도 놀라웠다.
특유의 과장된 표정이 그녀의 특기였지만 오늘만은 과장돼 보이지 않았다.
“참기름에서 벤조피렌이 나오는 이유가 뭔가요?”
“높은 온도에서 참깨를 볶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고온에 볶지 않으면 벤조피렌이 나오지 않겠네요?”
“맞습니다, 고온에 볶지 않으면 벤조피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 카메라가 방현식을 단독으로 잡았다.
“저희는 고온에 볶은 참기름에서 벤조피렌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건강한 참기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금부터 노력의 결과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방현식은 참깨를 기계에 넣었다. 이번엔 온도 조절 버튼을 이용해 48도로 맞췄다.
시작 버튼을 누르자 나선형 스크루가 돌아가며 기름을 짜냈다.
“볶지 않았는데도 기름이 나오네요~?”
“네, 저온 압착 방식으로 참기름을 짜는 중입니다.”
이번에 나온 참기름은 첫 번째 것과 확실하게 구별이 됐다.
노란빛이 감도는 참기름이었다.
“색이 처음 것하고 다르네요. 노란빛이 도는 게 투명하기까지 하고.”
“침전물도 없습니다.”
“그러네요, 참기름 특유의 침전물도 보이지 않아요. 이 참기름에 벤조피렌이 들었는지 검사해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노용미는 서우영과 이영호에게 참기름 병을 건넸다.
카메라는 그들이 성분을 검사하는 장면을 꼼꼼하게 잡았다.
노용미는 서우영에게 물었다.
“어떤가요? 이번엔 벤조피렌이 나오지 않았나요?”
“네,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정말인가요? 제가 한번 봐도 될까요?”
화면에 성분 검사표가 나왔다. 소비자들을 위해 처음 만든 참기름의 성분 검사표와 비교해서 보여주었다.
고온으로 참깨를 볶은 참기름에 벤조피렌이 검출됐다. 하지만 저온으로 압착한 참기름은 벤조피렌이 검출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런 사실을 몰랐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오늘 판매할 참기름은 당연히 저온 압착한 참기름이겠죠?”
“맞습니다, 저온으로 압착한 건강한 참기름을 판매할 예정입니다. 가격도 저렴하게요.”
“그래서 얼마인가요?”
“정가는 3만 5천 원이지만, 오늘은 설맞이 특별 할인으로 3만 원에 드리겠습니다.”
“100% 국내산 참기름인가요?”
“네, 예천 참깨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천이면 참깨의 고장이죠. 여러분 벤조피렌이 없는 건강한 참기름을 3만 원에 드리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스튜디오에서 직접 성분을 분석해 보여드린 저온 압착 참기름입니다. 건강한 참기름으로 식탁을 바꿔 보세요~!”
* * *
방송되고 있는 시간 예나은의 집.
그녀의 집엔 사람들로 북적였다. 곶감을 함께 만들었던 동료들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일 때문에 예나은의 집에 모였다.
“현식이 방송 아주 잘 하네.”
“쇼호트스 뺨칠 정도로 말도 잘하고.”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유, 다들 알고 있죠?”
예나은은 전화기를 들어 보였다.
“다들 전화기 드세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전화기를 들었다.
“동시에 구매하는 겁니다.”
“한꺼번에 전화하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문제없어요, 다들 전화하세요.”
그 시각 지리산 농부들도 참기름을 구매하고 있었다.
목장의 식구들도 매장에 있던 노해미도 참기름을 샀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다.
* * *
같은 시각 황유신의 집.
난 황유신 선생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황정아 여사도 함께였다.
우린 올해 만든 곶감을 먹으며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제 호두 기름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카메라가 까만 호두를 잡았다. 쇼호스트가 까만 호두를 보고 놀란 척하며 방현식에게 질문을 했다.
“호두가 왜 이렇게 까만 거죠?”
“독성 없는 호두 기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밥과 함께 호두를 여러 번 쪄야 합니다. 세 번 정도 찌는데 그러면 이렇게 색이 까맣게 됩니다. 그 뒤에 잘 말려서 기름을 짜면 기관지에 좋은, 정말 건강한 호두 기름이 되는 겁니다.”
방현식의 집에서 호두를 찌고 말리는 과정 전체를 촬영해 두었다. 미리 촬영된 화면을 편집해 보여주는 방식으로 방송이 진행됐다.
방송을 보던 황정아 여사도 호두를 쌀과 함께 지는 이유가 뭔지 물었다.
나도 방송에서 방현식이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해주었다.
“저렇게 3번을 찌면 호두의 독성이 모두 사라져요.”
“색이 정말 까맣구나.”
황유신이 호두를 보며 말했다. 그도 호두의 독성을 제거하는 방법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쉽게 알려지지 않았던 비결이라 더 그런 것 같았다.
“신기하구나, 호두 기름은 어디에 좋은 거냐?”
“기침이나 폐렴에 특효약이에요.”
“그렇다면 나도 하나 사야겠구나.”
“제가 나중에 한 병 가져다드릴게요.”
“그럴 수는 없지. 곶감 농사를 망치고 다시 시작하는 청년인데 행운을 빌어주는 뜻으로라도 사야지. 너도 알다시피 내가 천식이 좀 있어서...”
“그럼 제가 한 병 사드릴게요.”
황유신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순간이었다.
“제가 이미 샀어요.”
황정아 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 사셨어요?”
“지금 수량이 마구 떨어지고 있어요. 빨리 사지 않으면 살 수도 없을 거 같아서요.”
난 화면을 주시했다.
쇼호스트가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여러분 이제 정말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주문 전화가 걸려오고 있는데요.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건강한 기름을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홈쇼핑에서 실험 결과를 보여주는 아이디어가 먹혔다.
사람들은 저온 압착하는 방식의 참기름을 알지 못했다.
말로만 해서는 믿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눈으로 직접 보여줘야 했다.
그것이 판매와 연결될 거라고 확신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을 보여줄 기회기도 했다.
* * *
참기름 판매가 끝나고 보름 정도 시간이 흘렀다.
사무실 사람들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지리산 농부들이 생산한 곶감도 배송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이벤트 상품으로 만든 버블티 세트까지 모두 동이 났다.
참기름과 호두 기름이 완판이 났고, 지리산 농부들의 상품들도 전부 나갔다.
“모두 수고 많았어요. 그리고 이건 특별 선물이에요.”
“선물이요?”
직원들이 몰려왔다.
한기탁과 상의해 준비한 명절 선물이었다.
“이건 스마트폰 아닌가요?”
“맞아요, 최신형 스마트폰입니다.”
2008년은 스마트폰의 해이기도 했다. 1세대 스마트폰에서 2세대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앞으로 스마트폰을 사용할 일이 많았다.
사무실 동료뿐만 아니라 목장과 매장에 있는 모든 이들에서 스마트폰을 선물로 지급했다.
“지리산 농부들은 명절 선물도 남다르네요.”
쇼핑몰 팀의 천희석이 웃으며 말했다.
“게임할 생각만 하지 말고.”
“네, 팀장님.”
천희석이 백민석에서 거수경계를 하며 말했다.
그 모습에 다들 재미있어할 때였다.
“사무실에 누가 찾아왔는데요.”
방현식이었다.
“안녕하세요, 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그의 손에 한가득 꾸러미가 있었다.
“참기름하고 호두 기름이에요. 명절 선물이고요.”
“우린 다 샀는데.”
한기탁이 방현식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받으세요.”
방현식은 사람들에게 가져온 물건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선물을 전부 나눠주고 날 따로 불렀다.
조용히 말할 것이 있다며 밖으로 나갔다.
“혹시 내 선물을 따로 준비한 거야?”
“어떻게 아셨어요?”
방현식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그냥 말해 본 건데...”
농담에 반응한 게 좀 이상했다.
“이거 받으세요.”
“뭐야, 이게?”
“기계 값이요.”
“기계 값?”
그가 나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받지 않고 이유부터 물었다.
홈쇼핑 판매가 끝나고 난 뒤에 돈이 들어왔다고 했다.
대출받은 돈과 홈쇼핑 수수료를 제하고 순이익이 5천만 원이었다.
그중 일부를 기계 값으로 주려고 한 것이다.
“모두 형 덕이에요.”
“네가 고생한 덕이지.”
방현식은 여전히 봉투를 내밀고 있었다.
“현식아, 네 마음 잘 받을 게. 그리고 그건 넣어둬.”
“형이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못 했을 거예요.”
“내가 도운 건 사실이지만 밤을 새워 연구하고 물건을 만든 건 바로 너야.”
난 봉투를 쥔 손을 꼭 잡았다.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곶감 농사를 망쳤을 때 정말 힘들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거든요. 그저 어머니와 함께 살아보려고 한 것뿐인데...”
방현식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알고 있어, 그때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열심히 해서 어머니 더 잘해 드리고. 봉투는 이제 집어넣고.”
“네.”
방현식의 웃으며 말했다. 웃는 얼굴이었지만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 *
설날이 무사히 지나갔다. 곶감과 방현식의 참기름까지 모두 좋은 결과를 얻었다.
방현식이 앞으로 생산하는 참기름과 호두 기름은 지리산 농부들의 쇼핑몰을 통해서 판매될 예정이었다.
난 백민석과 함께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열리는 최대 규모의 농업 박람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처음이네.”
백민석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너 해외에 한 번도 안 나가봤잖아.”
“하긴 미국이 처음이 아니라 해외에 나간 적이 없었지.”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허허하고 웃었다.
그와 함께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비행기 탔다.
이번 농업 박람회를 통해 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지리산 농부들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캘리포니아 드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한국이 겨울인 것과 달리 온화한 봄 날씨다.
백민석과 함께 공항을 나왔다.
“짐이 뭐가 그렇게 많아?”
“내가 말 안 했나? 배달할 물건이 있어.”
“배달이라니?”
“곶감이야.”
“혹시, 전해리 씨?”
“맞아.”
백민석은 깜짝 놀란 얼굴이다.
곶감 예약을 받을 때 해외에서도 주문이 들어왔다. 백민석이 나에게 처리에 관해 물었다.
해외에서 들어온 주문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곶감보다 배송료가 더 나가는 일이었다. 배로 곶감을 보내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곶감이 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난 해외 주문자들에게 일일이 메일을 보냈다.
우리 곶감에 관심을 가져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아쉽지만 배송이 힘들겠다고 전했다.
대부분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며 다음을 기약했지만, 유독 한 사람은 고집을 부렸다.
전해리였다. 그녀는 항공료를 지불할 테니 곶감을 보내달라고 메일을 보냈다. 곶감을 보낼 주소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농업 박람회가 열리는 곳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내가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하자 그녀가 반색했다.
단순 서비스는 아니었다. 전략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그녀의 메일에 명함이 딸려 있었다. 그녀가 근무하는 회사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농업 박람회에 참가하는 업체 중 하나였다. 혁신적인 농업 회사로 성장하는 곳이었다.
지리산 농부들이 모델로 삼아야 할 곳이었다.
그곳에서 전해리가 일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두고 싶었다.
“전해리 씨 집요하게 곶감을 요청했는데, 결국 김덕명을 구워삶았네.”
백민석은 곶감이 든 캐리어를 보며 말했다.
그때였다. 한국 브랜드의 승용차가 우리 앞에 섰다.
곧이어 전화벨이 울렸다.
차 안에서 동양인 여자가 내렸다.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전해리라고 합니다.”
“김덕명입니다.”
“백민석입니다.”
전해리는 서구적인 외모의 여자였다. 내 또래 정도로 보였다.
“타세요.”
백민석이 나와 눈빛을 교환했다. 배달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해리에게 물건만 주면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의 안내자이기도 했다.
“전해리 씨가 우리를 안내한다고?”
백민석이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으며 조용히 물었다.
“곶감 배달료치곤 꽤 괜찮지?”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
“말할 틈이 있었나, 잠만 잤으면서.”
“내가 그랬나?”
우린 전해리의 차에 탔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림’이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전해리가 입을 열었다.
“비행시간이 길었을 텐데 고생하셨어요. 샌프란시스코 첫인상 어떠세요?”
“따듯해서 좋네요.”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인사차 건네는 말이라 생각해 편안하게 대답했다.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졌다.
“제가 일하는 회사도 이번 농업 박람회에 참가해요.”
“플랜트팩토리도 이번 박람회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해리 씨 메일에 있는 명함이요. 박람회 자료에도 같은 회사가 있더라고요.”
“김덕명 씨는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저녁 식사는 우리 집에서 하시죠? 이쪽은 LA와 달리 한인 식당도 많지 않아요.”
“좋습니다.”
전해리는 우리를 호텔에 내려주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 둘이라 방을 따로 잡을 필요는 없었다.
백민석은 짐은 풀기 전에 침대에 발라당 누워 버렸다.
“캘리포니아에 와 보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네.”
“처음으로 해외에 온 느낌이 어때?”
“낯선 느낌이랄까? 그래도 좋긴 좋다. 오래간만에 일과 좀 떨어져 있으니까.”
“우린 놀러 온 게 아닌데?”
“그래도 좋다고.”
백민석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3박 4일의 일정이라 개인 짐은 많지 않았다.
우린 가볍게 샤워를 하고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
캘리포니아의 드넓은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 다 옥수수 밭인가? 어마어마하게 넓네.”
“그러게, 끝도 보이지 않아. 너 미국의 식량 자급률이 몇 프로인지 알아?”
“한 100프로?”
백민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133프로야, 강한 나라일수록 식량 자급률이 높으니까.”
“그럼 한국은 몇 프로나 될까?”
“쌀을 제외하면 20퍼센트 이내일 거야.”
“그렇게 낮아?”
“한국은 세계 5대 곡물 수입국 중 하나야.”
“농업법인에서 일하면서 그런 것도 몰랐네.”
“한국 농업은 아직 갈 길이 멀었어.”
전화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전해리의 문자였다. 삼십 분 뒤에 도착하겠다고 전했다.
“해리 씨 삼십 분 뒤에 도착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런데 해리 씨도 농업 관련 회사에 다닌다고 했지. 플랜트팩토리라고 했나?”
“맞아, 플랜트팩토리.”
“이름이 독특해, 식물공장이라니. 근데 해리 씨는 그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거야?”
“연구원이라고 들었어.”
“이영호 씨 같은 연구원?”
플랜트팩토리라는 회사명을 보고, 어떤 일을 하는지도 물었다.
그녀는 생물학을 전공하고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전해리는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집으로 이동했다. 주택가로 들어서자 비슷하게 생긴 집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전해리는 그중 한 곳에 차를 세웠다.
“어서 오세요.”
집에 들어서자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우리를 반겼다.
“곶감 아주 잘 받았어요. 정말 맛이 좋아요. 저희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것과 맛이 비슷했어요.”
그녀의 집엔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전해리는 부부의 외동딸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이민 2세대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교포였지만 한국말이 유창했다.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서인지 전해리도 한국어가 어색하지 않았다.
“이건 선물입니다.”
곶감은 그녀가 요청한 물건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 선물을 준비했다.
꿀과 참기름이었다.
“어머나, 이런 걸 다 준비하시고!”
저녁 식사를 하며 이야기꽃이 피었다. 나와 백민석은 하동에서 일하며 사는 이야기들을 풀어 놓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특히 한국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한 번도 한국에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매번 한국을 가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일에 치여 가지 못했다며 넋두리하듯 말했다.
곶감도 전해리의 어머니가 찾은 음식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곶감을 만들어 준 추억이 있었다.
한국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아버지의 곶감 맛은 잊을 수 없던 것이다.
전해리는 여러 루트를 통해 곶감을 구해다 주었지만, 어머니는 항상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예전에 아버지가 만들어 주던 그 맛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해리가 지리산 농부들의 곶감까지 수소문하게 된 사연이었다.
식탁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음식도 말끔하게 치워진 상태였다.
난 화제를 돌렸다.
플랜트팩토리와 전해리에 대해서 궁금했다.
“플랜트팩토리는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요?”
“플랜트펙토리는 작물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요.”
“지속적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가요?”
“일 년 내내 환경과 무관하게요.”
“일 년 내내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는 뜻인가요?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백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 가능해요. 작물이 자라는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말이죠.”
“어떤 조건이죠?”
“작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빛, 온도, 습도, 이산화탄소 그리고 양분이 필요하죠. 작물에 그런 환경을 제공하면 지속적인 생산이 가능해지죠.”
“그런 환경을 어떻게 만드나요? 전 도저히 상상이 안 가네요.”
백민석이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그녀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플랜트팩토리는 수경재배 기술로 최적의 환경을 만든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우리 회사의 핵심역량이죠. 김덕명 씨는 수경재배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전해리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백민석에 설명해 줄 때와 달리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구가 진행된 것은 NASA의 데스티니 모듈에서 시작됐다는 것 정도요.”
“조금이 아니라 잘 알고 계시네요. 데스티니 모듈이 수경재배의 시초는 아니지만, 수경재배의 본격적인 모델이죠.”
백민석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해리는 백민석의 표정을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민석 씨에게 수경재배의 원리에 대해서 알려 드릴까요?”
“네, 원리가 궁금하네요.”
“우선 수경재배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퀴즈를 하나 낼게요. 작물을 키우기 위해선 흙이 필요할까요? 아니면 흙과 물, 둘 다 필요할까요?”
“둘 다 필요하지 않나요?”
“민석 씨는 집에서 화분을 키워 본 적이 있나요?”
“그럼요.”
“식물이 죽은 적도 있나요? 병충해도 아니고 원인 불명으로요.”
“네 아쉽게도요. 그런 경험이 많아요.”
백민석이 고해성사하듯 말했다.
“왜 죽었다고 생각하세요?”
백민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물 때문인가요? 물을 너무 잘 줘서?”
“네, 대부분 물을 너무 잘 줘서 식물이 죽어요. 물 때문에 질식사 한 거죠.”
“질식이요?”
“식물은 뿌리털을 통해서 호흡을 해요. 흙 알갱이 사이에 틈이 있어요. 보통은 물을 약간만 머금고 있어서 습도가 높은 공기가 차 있죠. 하지만 물이 너무 많으면 숨을 쉴 수 없어요.”
뿌리를 아예 공기 중에 내놓으면 호흡이 잘 된다. 하지만 습도가 너무 낮아 뿌리가 말라죽을 수 있다.
“물이 숨구멍을 막아버린 거네요. 그럼 흙도 물도 아닌가요?”
전해리는 그 말에 깔깔 웃었다.
“흙은 작물을 지지하는 역할을 해요. 다만 흙에서 작물을 키울 땐 토양과 작물의 성질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수경재배는 흙을 사용하지 않아요. 물을 이용해 작물을 키워요.”
“물에서 작물을 키우면 질식사하는 거 아닌가요? 화분에 물을 줬던 것처럼.”
“에어 펌프로 산소를 공급해 줘요. 수족관을 생각해 보세요. 기포로 산소를 공급하죠. 물고기가 살 수 있는 환경이면 작물이 살기에도 충분해요.”
전해리는 물이 든 유리컵에 발포 비타민을 넣었다.
물에서 기포가 올라왔다.
“그렇다고 물만 주는 건 아니에요. 작물에 필요한 영양분을 물에 타서 공급하죠.”
“비료를 물에 타는 건가요?”
“우리가 알고 있는 유기질 비료는 아니에요. 토양에 주는 유기질 비료는 작물이 영양소를 곧바로 흡수하지 못하니까요.”
“비료의 영양소를 흡수하지 못한다고요?”
“식물은 소화 기관이 없으니까요. 다른 생명체가 분해해 줘야 해요. 미생물이 비료를 분해하죠. 그렇게 분해된 무기질 성분이 물과 녹았을 때 식물이 영양소를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온 상태를 말하는 거군요.”
백민석은 이제야 이해한 듯 말했다.
전해리는 미소로 화답했다.
“이온 상태의 질소와 철을 영양소로 흡수하는 거죠.”
“그럼 수경재배를 할 때는 이온화된 영양소를 사용하겠네요.”
“그게 수경재배의 핵심이에요. 이온 상태의 양분을 식물에 바로 공급하는 거죠.”
“그렇게 작물을 재배하면 더 빨리 자라겠네요?”
“맞아요, 작물이 빨리 자라게 할 수도 있어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토양 없이도 식물을 재배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미래의 농업의 토대가 되는 이론이다.
미국과 유럽 등의 선진국에서 빠르게 전파되고 있는 농업 기술이었다.
한국도 도입이 시급했다.
지리산 농부들이 미래 농업 선봉에 서기를 바랐다.
“정말 식물이 자라는 완벽한 환경을 만드는 거네요.”
백민석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도 수경재배와 미래 농업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 같았다.
“두 분이 수경재배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이 많을 줄 몰랐네요. 내일 박람회도 기대하셔도 좋을 거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죠?”
난 귀를 세우고 물었다.
“우리 회사에서 만든 수경재배 기구가 있어요. 가정에서도 수경재배를 할 수 있는 기구죠. 박람회에 참석한 사람들과 기구를 만드는 행사도 할 예정이고요. 최고로 잘 만든 사람에게 행운의 티켓도 드려요.”
“행운의 티켓이요?”
“진짜 수경재배 시스템을 볼 수 있는 티켓이에요. 박람회에서 선보이는 가정용 기구와 달리 대량 생산이 가능한 물건이죠. 아직 개발이 끝나지 않아서 이번 박람회에선 선보이지 못하지만, 행운의 티켓이 있으면 볼 수 있어요.”
“궁금하네요, 어떤 모습일지.”
난 백민석과 눈을 마주쳤다.
그도 몹시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박람회에서 생긴 일
늦은 밤에 호텔로 돌아왔다.
전해리의 집에서 시간이 길어졌다. 백민석이 수경재배와 미래 농업에 관심을 보인 까닭이었다.
“맥주 한잔할까?”
백민석이 맥주를 권했다. 단둘이 술잔을 기울이는 건 오래간만이었다.
호텔 스카이라운지에 자리를 잡았다.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야경이 아름다웠다.
“밤에도 제법 운치 있네.”
백민석이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말했다. 야경을 바라보던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넌 수경재배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 같던데.”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부터 수경재배로 작물을 키웠다면 어땠을까?”
백민석이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물었다.
수경재배 등의 첨단 농업에 대해서도 생각한 적이 있었다.
회귀 후 고민했던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첨단 농법을 시작할 여력이 안 됐다.
섣불리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농사뿐만 아니라 첨단이란 단어가 붙은 것들은 생각보다 많은 자본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곶감에서 양봉 그리고 목장까지, 난 가능한 농사부터 시작했다.
“수경재배로 시작했다면 지금도 연구 개발 중일 거야. 농사는 짓지도 못했을 거고. 플랜트팩토리의 수경재배 시스템도 쉽게 나온 건 아니니까.”
“하긴,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
“자본도 필요해. 목장에 있는 로봇 착유기도 억대가 넘는 물건이니까.”
“그러고 보니 지리산 농부들도 첨단 기계가 있었네.”
백민석이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지리산 농부들이 최초로 도입한 첨단 기계였다.
목장을 운영하며 첨단 기계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 싶었다.
로봇 착유기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가져왔다. 젖소들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도 우유를 생산했다. 일이 줄었고 유제품의 품질도 좋게 했다.
그만큼 수입도 함께 늘었다.
“수경재배, 지리산 농부들도 한번 도전해 봤으면 좋겠어.”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해?”
“평소에는 조용히 일만 했잖아.”
백민석은 지리산 농부들의 원년 멤버이자 쇼핑몰을 만든 장본이기도 했다.
언제나 안정적으로 일을 하는 타입이었다. 도전적으로 일을 벌이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수경재배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컴퓨터 교육을 했던 거 기억나?”
내가 지장사에 있는 동안 그는 마을에서 컴퓨터 교육을 했다. 그 덕에 사람들과 손쉽게 힘을 합칠 수 있었다.
“당연히 기억하지.”
“그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 이분들이 다 돌아가시면 마을이 어떻게 변할까 하고 말이야. 마을이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난 귀를 기울였다.
“그때 덕명이 네가 한 말이 기억났어. 시골에 청년들이 넘치게 하겠다고 했던 말. 이런 말 처음이지만 난 좀 회의적인 입장이었어. 지리산 농부들의 식구들이 늘어날 수는 있지만, 일정한 한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거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어. 물론 전제 조건이 있지만.”
“어떤 조건인데?”
“일 년 내내 작물을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 그게 가능하면 뭔가 큰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느낌마저 들었어.”
“농업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지.”
“네 말이 맞아.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야. 일 년 내내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면 그만큼 수익도 많아질 거로 생각해. 돈이 있는 곳에 사람도 모이는 법이고.”
그가 어떤 마음으로 이야기를 꺼내는지 알 것 같았다.
백민석이란 친구를 둔 게 자랑스러웠다.
“나도 너와 생각이 같아. 솔직히 현식이 때문에 더 관심이 생겼어.”
“현식이네 곶감을 전부 폐기 처분한 일 말하는 거지?”
“맞아, 그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어. 그런 자연재해를 극복할 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
“농업도 많이 발전한 건 사실이지만, 아직까진 환경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수경재배를 한다면 양상이 달라질 거야.”
“나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너도 알다시피 처음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어. 지금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 지리산 농부들이 열심히 일한 덕에.”
“궁금하네.”
백민석이 남은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뭐가 궁금한데?”
“플랜트팩토리가 만들었다는 수경재배 시설 말이야.”
“행운의 티켓 기억하지?”
백민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해리가 말한 행운의 티켓이었다. 박람회에서 플랜트팩토리가 진행하는 이벤트.
이벤트 우승자에게 상용화될 수경재배 시설을 관람할 수 있는 티켓을 준다고 했다.
백민석과 함께 그 시설을 관람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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