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식을 집에 데려다주고 사무실로 향했다.
계획 중인 작물 재배를 위해 상의할 것이 있었다.
난 한기탁과 백민석을 불렀다.
“오늘은 나까지 부르고 무슨 일이야?”
백민석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참고로 지금 좀 바빠. 클라이언트에 서버 일까지 일복이 터진 상태니까.”
“바쁜 거 알고 있어. 오늘은 네가 꼭 있어야 해서.”
“내가 꼭 있어야 한다고?”
백민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설날이 지나면 좀 한가해지지?”
“그때가 되면 좀 한가해질 거야.”
“그때 나랑 어디 좀 가자.”
백민석의 시선이 한기탁을 향했다. 아는 게 있냐는 표정이었다.
한기탁은 두 손을 들고 모른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한기탁도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어딜 갈 생각인데?”
“미국.”
“미국? 미국 어디? 왜에?”
“캘리포니아.”
난 캘리포니아 농업 박람회에 대해서 말했다. 매년 초에 열리는 농업 박람회였다.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농업 박람회였다.
“국제적인 농업 박람회라면 갈만하겠네.”
한기탁이 이해했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왜 나와 함께 가는 거야?”
백민석이 물었다.
한기탁도 같은 의문을 품고 있는 듯 날 쳐다봤다.
“민석이 네가 봐줘야 할 게 있어.”
“농업 박람회에서?”
박람회는 단순히 농사 기술을 공유하고 농업 기계를 소개하는 곳이 아니었다.
2000년도 초반부터 첨단 농업이 박람회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농업과 첨단 기술이 결합하고 있었다.
“프로그래머의 안목이 필요해.”
“프로그래머의 안목?”
백민석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기탁의 얼굴은 달랐다.
“생각해 보니 덕명이 말이 맞네.”
“뭐가요?
백민석은 한기탁을 보며 물었다.
“내가 독일에 갔던 거 기억해?”
“기억하죠. 독일에 로봇 착유기 보러 갔던 거.”
백민석의 입에서 로봇 착유기가 나왔다. 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하겠는데 그건 기계였잖아. 나 같은 프로그래머가 도움이 될까?”
“기계도 프로그램으로 움직이지.”
한기탁이 백민석을 보며 말했다.
“그 말이 맞네요. 기계도 프로그램으로 돌아가죠.”
백민석은 생각을 정리한 듯했다.
그는 타고난 프로그래머였다. 지리산 농부들의 쇼핑몰을 만든 핵심 멤버.
박람회는 견학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박람회에서 본 첨단 기술을 지리산 농부들의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백민석이 꼭 필요했다.
“나는 같이 안 가도 되겠어?”
한기탁이 물었다.
“나 아직 한 번도 미국에 안 가봤는데.”
간절한 표정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선배까지 가면 사무실은 누가 지켜요?”
“나 말고도 지킬 사람 많다니까.”
“누가 있어요? 경영지원팀장님.”
“없나?”
한기탁이 한숨을 내쉬었다.
“비행기 티켓 좀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표님아.”
백민석은 그 말에 웃음이 터뜨렸다.
* * *
황유신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 예천의 천진호에게 내 뜻을 전했다는 내용이었다.
황유신의 전화를 끝나자마자 곧장 천진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황유신 선생님에게 말씀 들었습니다. 참깨를 사고 싶다고요?”
“네, 조금 많이 사고 싶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네, 제가 예천으로 가겠습니다.”
원래는 천진호와 둘만 만날 계획이었다.
방현식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약속을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방현식과 함께 만나야 했다.
그와 함께 예천으로 향했다.
“드디어 참깨를 사네요. 좀 설레기도 해요.”
방현식은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뭐가 그렇게 설레는데?”
“올해는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일을 하게 돼서요.”
밝게 말하는 모습이 왠지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건강한 참기름을 만들면 사람들도 좋아할 거 같아요. 다 형 덕이에요.”
“네가 노력한 덕도 있지. 온도와 볶는 시간을 알아낸 건 너니까.”
“그건 너무 작은 부분이잖아요.”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기계도 없이 정확한 온도와 시간을 알아냈다.
그의 집념이 만들어 낸 성과였다.
예천 천진호의 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우린 곶감이 가득한 덕장을 지났다.
천진호가 올해 작업한 곶감 같았다. 그가 집 앞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천진호라고 합니다. 두 분이 오셨군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솥뚜껑 같았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방현식도 그에게 인사했다.
“참깨를 산다고 하셨는데 기름을 짤 용도겠죠?”
“네, 참기름을 짤 생각입니다.”
천진호는 창고로 우릴 안내했다. 창고가 제법 컸다.
문을 열자 온도를 제어하는 장치가 보였다.
“관리가 잘 되어 있네요.”
난 창고에 있는 자루를 보며 말했다. 커다란 자루에 참깨가 담겨 있었다.
“참깨 1kg에 만 원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도매가 보다 저렴한 가격이죠.”
“그렇게 싸게 주셔도 괜찮겠습니까?”
“올해 참깨 농사가 잘 됐습니다. 참깨 풍년이죠. 이럴 때는 가격 조절이 가능합니다. 물론 조건은 있습니다.”
“조건이요?”
“100kg 이상 참깨를 사셔야 그 가격에 드릴 수 있습니다.”
“그건 문제없습니다. 1톤 넘게 참깨를 살 계획이니까요.”
“황 선생님께서도 대량으로 구입할 거라고 말씀하시더니... 정말이군요.”
천진호는 자루 중 하나를 열었다.
“참깨 상태는 최상급입니다, 확인해 보시죠?”
방현식이 적극적으로 참깨를 살폈다. 그도 어머니와 함께 참깨 농사를 짓고 있었다.
참깨를 살피는 모습이 진중했다.
“젊은 사람이 참 꼼꼼하네요.”
천진호는 참깨를 보고 있는 방현식에게 말했다.
방현식은 대꾸 없이 참깨를 자세히 살폈다.
“좋네요.”
점검을 끝낸 방현식이 천진호에게 말했다.
“예천은 참깨의 고장이니까요. 저는 최상급 참깨만 취급합니다.”
참깨 점검을 마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천진호는 차를 내왔다.
“황유신 선생님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곶감 농사가 잘 안됐고요?”
천진호는 방현식에게 차를 건네며 말했다.
방현식은 애써 웃음을 보였다.
“하늘을 이길 수 있는 농부는 세상에 없죠. 저도 날씨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있습니다.”
천진호는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했다.
“참깨는 조만간 살 예정입니다.”
“언제든지 말씀만 하시죠.”
천진호는 참깨와 곶감 말고도 다른 농산물도 판다는 말도 했다.
난 그에게 물었다.
“혹시 호두도 살 수 있을까요?”
“호두요?”
천진호는 당장 수첩을 꺼내 확인했다.
“호두도 구할 수 있습니다.”
“잘 됐군요, 참깨와 함께 호두도 같이 살 수 있을까요?”
“문제없습니다. 그런데 호두는 어디에 쓸 생각인가요?”
“호두 기름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이야기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그가 우릴 배웅했다.
“그럼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차에 타기 전 그에게 말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만든 곶감을 지리산 농부의 쇼핑몰을 통해서 팔기로 했으니까요.”
올해 곶감 교육을 받은 모든 농부들은 지리산 농부들의 쇼핑몰에서 곶감을 팔기로 약속했다.
참깨 가격을 저렴하게 받는 게 우리와의 거래 때문인지도 몰랐다.
방현식과 하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방현식이 물었다.
“그런데 호두 기름은 뭐예요?”
난 호두 기름에 대해 설명했다. 호두 기름의 효능과 가능성에 대해서 말했다.
설날 선물로 좋을 것 같다는 말에 그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내 설명을 가만히 듣던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형 근데 한가지... 참깨는 제 돈으로 살게요.”
“처음엔 내가 구입하고 나중에 돈을 받을 생각이었는데?”
“형이 그럴 거 같아서 같이 온 거였어요. 지금까지 도움만으로 충분히 감사해요. 참깨는 제가 사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방현식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스스로 일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네 뜻대로 할게. 대신 판매는 형에게 맡겨줘. 넌 기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건 형 말에 따를게요.”
이제 참기름을 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기계의 힘
양재동 베스트 홈쇼핑 사옥에 도착했다. 그곳은 농산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홈쇼핑이었다.
건물 전체가 홈쇼핑을 위한 스튜디오기도 했다. 방문자 카드를 발부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제작 2팀의 홍성진 과장이었다. 그는 홈쇼핑의 꽃이라고 불리는 상품기획자다.
“처음으로 뵙네요. 홍성진입니다.”
“김덕명입니다.”
그와 함께 사옥에 딸린 카페로 이동했다. 홈쇼핑이 운영하는 카페테리아로 회의실 공간도 있었다.
“일 년 전에 연락을 드렸는데 드디어 만나네요.”
홍성진은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그는 일 년 전 곶감을 함께 팔자고 제안했다. 그때는 난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자체 쇼핑몰에서 곶감을 팔고 싶은 이유였다.
“올해도 곶감 농사를 지으셨겠네요?”
“네, 올해도 곶감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상품이 곶감이 아니라고요?”
“네, 베스트 홈쇼핑을 통해 팔고 싶은 상품은 참기름입니다.”
“네, 이메일을 통해 전달받았습니다. 좀 의외였습니다. 참기름이라니.”
그는 문서를 보며 말했다. 문서 안에 참기름을 팔 계획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참기름 특성상 홈쇼핑과 궁합이 잘 맞을 거 같았다.
“솔직히 저희도 설날을 앞두고 바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농산물은 명절이 대목이라...”
“저희 물건을 파는 게 힘들다는 말씀인가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 다만 곶감을 못 파는 게 좀 아쉬워서요.”
홈쇼핑 상품기획자들을 판매 성과에 따라 성과급을 받는다고 들었다.
곶감은 이미 검증이 된 물건이었다.
그가 아쉬워하는 이유였다.
“이번에 제안하신 상품도 매력적이라고 느꼈습니다.
홍성진을 내가 보낸 문서를 들추며 말했다.
가방에서 방현식이 만든 참기름을 꺼냈다.
투명한 병에 담긴 참기름이었다.
일반 참기름과 달리 노란빛이 특징이었다.
“이게 그 참기름이군요. 정말 다르긴 하네요.”
그는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냄새도 일반 참기름과 다르네요. 향이 은은하고요.”
“네, 일반 참기름과 달리 침전물이 없습니다.”
“저온 압착으로 만든 참기름이라니 정확하게 뭔가요?”
문서에도 있는 내용이었지만 말로 다시 설명해줬다.
벤조피렌이 없는 게 포인트였다.
“처음 알았습니다. 그 점을 잘 부각한다면 판매도 문제없을 겁니다.”
“스튜디오에서 직접 시연해 보일 계획입니다.”
“직접 시연한다고요?”
“참기름 안에 유해 물질이 없다는 것을요.”
“그거 좋네요. 그런데 누가, 어떻게 하시겠다는 건지요?”
“지리산 농부들과 함께 하는 연구원이 있습니다.”
문서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서우영과 이영호를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처음엔 난색을 보였지만, 전문가가 알리지 않으면 믿지 않을 거라는 말에 마음을 돌렸다.
난 이번 홈쇼핑 판매를 통해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었다.
첫째는 방현식이 성공하는 일이다. 이번 일을 통해 그가 다시 일어서길 바랐다.
둘째는 지리산 농부들의 기술력을 알리는 일이다.
‘지리산 농부들의 손에서 나온 농산물이 과학적인 방식으로 분석된, 검증된 상품이다.’라는 사실을 일반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다.
2007년인 지금은 홈쇼핑이 성장 중인 시기다. 홍보에 좋은 매체가 되리라고 여겼다.
방현식의 재기를 돕는 일이자 지리산 농부들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일이기도 했다.
“호두 기름도 함께 파실 계획이라고 하셨죠?”
“호두 기름은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혹시 참기름과 함께 팔 수 없을까요? 개인적으로 호두 기름이 끌리더라고요. 최근 방송을 통해 입소문도 돌고 있기도 하고.”
며칠 전 방송에서 호두 기름의 효과가 방영됐다. 기침과 폐 질환에 특효라는 한의사의 이야기가 화제가 된 것이다.
방송이 나온 뒤 호두 기름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제품을 파는 곳은 없었다.
방송에 출연한 한의사도 해외에서 들여온 호두 기름을 가지고 나왔다.
우선은 벤조피렌이 없는 건강한 참기름만 판매할 생각이었다.
호두 기름은 그 뒤의 일이었다.
제품을 하나 이상 써 달라는 요청에 쓴 품목이었다.
“참기름과 호두 기름 둘 다 상품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홍성진은 호두 기름도 함께 팔 것을 제안했다.
“호두 기름은 아직 준비 단계라... 물량이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집요했다. 호두 기름과 함께 나온다면 황금시간대로 편성해 주겠다는 말까지 했다.
호두 기름이 여간 팔고 싶은 모양이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해내실 거라고 믿습니다.”
확답은 하지 않았다. 가능성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가 가능성을 확답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물량 확보도 부탁드립니다.”
그는 곧장 물량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홈쇼핑은 거대한 유통망을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방송과 동시에 전화 주문이 이뤄진다. 그 뒤로 배송까지 이어지는 구조였다.
당연하게도 물량 확보는 기본이었다.
“참기름은 최소 5,000개 정도면 어떨까 합니다.”
3천 개에서 5천 개 사이를 예상했다. 그 이상은 무리였다.
아무리 기계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참깨를 사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방현식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 수량이면 문제없었다.
“말씀대로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호두 기름은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신 걸 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호두 기름에 대해서 단서를 달았다. 생산이 가능하다고 해도 수량은 적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호두 가격은 참깨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호두 기름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대량 생산은 힘들었다.
마지막까지 밀고 당기는 협상이 이어졌다.
건물을 나왔을 땐 날이 저물고 있었다.
* * *